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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여행이 좋아**/국내 여행

선운사 동백꽃

by 산산바다 2007. 3. 3.

산과바다


선운사 동백꽃 보러 갔더니  

07.3.1. 동반하여 나들이

선운사-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도솔산(兜率山)에 위치

 

 

    선운사 동백꽃 보러 갔더니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고

막걸리집 없어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 듣지 못하고

풍천장어 집에 들려 장어구이와 복분자 한잔하고 왔지요

  

미당시문학관 잠시 들리고
김성수 생가 둘러보고

곰소항 조개젖 사가지고 돌아왔지요

-산과바다-

 


선운사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도솔산(兜率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선운사 입구에 미당서정주시비 앞에서

 

 <선운사(禪雲寺) 동구(洞口)>


선운사(禪雲寺)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것만 상기도 남었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여 남었읍디다.

 도솔산은 선운산(禪雲山)이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선운사는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 소중한 불교문화재들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천왕문을 통과 동서남북 사천왕에 합장하고 경내로 들림

원래는 고대 인도에서 세계의 수호신이었던 것을 불교가 수용한 것이다.

동방의 지국천왕(持國天王),남방의 증장천왕(增長天王), 서방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북방의 다문천왕(多聞天王) 등이다.

동방-지국천왕-좌-비파

 

남방-증장천왕-우-보검
 
서방-광목천왕-좌-용과여의주
 
북방-다문천왕-우-탑과방
 
저마다 권속을 거느리고 있는 이 사천왕은 힌두교의 사방 수호신과 내용상 동일한 관념을 채택한 것이나, 신의 명칭에서 그 원어까지 동일하지는 않다.

 

특히 눈 내리는 한겨울에 붉은 꽃송이를 피워내는 선운사 동백꽃의 고아한 자태는 시인ㆍ묵객들의 예찬과 함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대웅보전앞의 6층석탑

선운사의 대웅보전에는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을 봉안하였다(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대웅보전 뒤 산언덕에 동백군락을 이룸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법당옆에 백일홍나무가 송광사에 있는 것 보다 더 크고 굵어보인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범종루-범종루 안에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 있고 그 울림소리는 각각 다른데....중생과 축생과 수중고혼 허공중생을 구제하는 의미가 있다는군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도솔암쪽 골짜기로 도솔천을 따라 가는 중 산 비알에 자생 차가 보인다

 잘 정리되어 가꾸어진 차밭도 있고 

 차밭넘어로 선운사 전경이 보인다.

 

 

막걸리집 안보이고 풍천장어집만 즐비하군 

 풍천장어 옛날집에 들리어 점심을 맛있게 먹고

 

 생강채와 머위대 들깨무침이 장어구이 반찬으로 특이하군요.

 

 복분자술 한잔에 입안에서 살살녹는 듯 고소함이 여전하군.....

저녁식사라면  복분자 한잔으론 않되는데....

 

 

 

미당시문학관을 들려 둘러보고...

 서정주[徐廷柱]    1915. 5. 18 전북 고창~2000. 12. 24 서울.

호는 미당(未堂)·궁발(窮髮). 시세계의 폭넓음과 깊이로 해서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손꼽힌다.

[생애와 활동]

어린시절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다가 부안 줄포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구속되었다가 기소유예로 석방, 이로 인해 퇴학당했다. 1931년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으나 곧 자퇴하고 박한영의 도움을 받아 대한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교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1941년 동대문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후 동아대학교·조선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1960년 이후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해방 후에는 좌익측의 조선문학가동맹에 대응하여 우익측이 결성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의 시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동아일보사 문화부장,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을 역임했다.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창립과 함께 시분과 위원장을 지냈고, 1950년 6·25전쟁 때는 종군 문인단을 결성했다. 1954년 예술원 종신회원에 추천되었고,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문학세계-

1933년부터 〈동아일보〉와 〈학등〉에 3~4편의 시를 발표한 뒤, 1935년 〈신건설〉에 〈자화상〉을 발표하고,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벌였다. 1936년 김광균·김달진·김동리·김진세·여상현·오장환·함형수 등과 함께 시전문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고, 여기에 〈화사 花蛇〉·〈달밤〉·〈방 房〉 등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43년 친일 성향의 출판사인 인문사에서 발행한 잡지 〈국민문학〉의 편집 일을 보며 친일 시들과 종군기 등을 썼다. 이때의 친일 행각은 1980년 전두환 군사정부를 찬양한 일과 함께 그에게는 씻을 수 없은 과오가 되었다. 친일소설인 〈최체부(崔遞夫)의 군속지망(軍屬志望)〉(조광, 1943. 9)을 비롯한 소설 2편과 많은 평론이 있지만, 20권이 넘는 시집을 포함한 시선집의 분량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창작의 주류는 시였으며, 시를 통해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시세계는 크게 3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첫 시집 〈화사집 花蛇集〉(1941)에서부터 2번째 시집 〈귀촉도 歸蜀途〉(1948) 이전까지의 시기로, 정열적이고 관능적인 생명의식이 그 특징을 이룬다. 〈화사집〉에 실린 〈자화상〉·〈문둥이〉·〈화사〉·〈입맞춤〉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시이다.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 〈자화상〉은 그때까지 삶의 내면적 방황과 좌절, 그리고 전통적 가치를 부정하는 의식세계를 드러내고 있으며, 〈화사〉에서의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과 '붉은' 색조는 그의 보들레르적 관능과 원시적 생명력의 추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번째 단계는 2번째 시집 〈귀촉도〉에서 시집 〈서정주시선〉956) 이전까지의 시기로, 초기의 관능적인 세계를 벗어나 동양적인 내면과 감성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 특히 한국의 전통적 정서를 노래하게 된 과정이 이 시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 시로는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꽃〉(민심, 1945. 11)·〈국화옆에서〉(경향신문, 1947. 11. 9) 등이 있다. 〈국화옆에서〉의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조이던/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격정과 관능, 절망과 분열의 몸과 마음을 쉬게 하고 안식처로서의 '꽃'과 '누님'의 발견은 곧 새로운 생명을 발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귀촉도〉(춘추, 1943. 10)·〈춘향유문 春香遺文〉(민성, 1948. 5) 등에서와 같이 한국적 정서를 탐색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화사집〉류의 열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으며, 〈무등에서〉(현대공론, 1954. 8)·〈상리과원 上里果園〉(현대공론, 1954. 11)·〈산중문답 山中問答〉(현대문학, 1955. 1) 등에서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관념적 달관의 경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생명의 발견과 달관, 동양적인 정관의 입장은 화해를 바탕으로 하며, 여기서의 화해는 사회현실과의 치열한 대결 끝에 얻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적인 갈등과 회의를 거쳐 얻어진 것으로 이후의 시적 변모에 큰 영향을 준다.

3번째 단계는 시집 〈신라초 新羅抄〉(1961)와 〈동천 冬天〉969)이 나온 시기로, 신라의 정신과 새로운 동양사상의 탐구가 중심이 된다. 앞시기에 얻어진 화해의 마음은 심화되어 전래의 샤머니즘뿐만 아니라, 노장사상이나 유교까지 받아들이고 있으며 특히 불교의 윤회사상과 인연설에 열중하고 있다. 시집 〈신라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 얻은 '신라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신라를 하나의 역사적 공간이 아니라 화해에 의해 인간과 자연, 신화가 융합된 초월적 세계로 보았다. 시집 〈동천〉에서는 〈신라초〉에서 얻은 동양적 정신을 좀더 심화시켜 고전적인 절제의 경지를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지칠 줄 모르고 구도자의 행로를 걸어온 시인의 자신감과 원숙의 경지를 입증해주는 한편, 사회와 역사와 멀어진 개인적 구도라는 점에서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세계로의 도피, 형이상학으로의 도피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여섯번째 시집 〈질마재 신화〉975) 에서는 어린 시절 고향 마을 사람들과 풍속을 산문 양식에 담아내 동양적 정신을 확대하여 '고향'을 깊이 있게 탐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로도 정력적으로 창작활동에 전념해 〈떠돌이의 시〉(1976)·〈산시 〉(1991)·〈늙은 떠돌이의 시〉(1993) 등의 시집을 냈다. 1983년과 1991년 2번에 걸쳐 민음사에서 〈미당 서정주 시전집〉을 펴냈다. 그밖에 평론집으로 〈시창작교실〉(1956)·〈시문학 개론〉(1959)·〈한국의 현대시〉(1969)·〈시문학 원론〉(1983) 등을 펴냈다. 1955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6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으며, 타계 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동아일보 창업주 인촌 김성수 고택을 들리다

미당시문학관에서 지척에 있다.

 

인촌 김성수는 1891년 전북 고부에서 지주 김경중(金暻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로 입적되어 호적상으로는 김기중의 아들로 돼 있다. 김기중·경중 형제는 인근 일대에서 천석군으로 통하는 부자였는데 그들이 부를 축적한 경위를 두고서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동네 입구에 오래된 괴목이 있고 인촌기념정자가 그옆에 있다. 

 

대표적으로 이 두 형제가 벼슬길에 있을 때 관권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했다는 주장도 있고, 심지어는 중국·일본과 밀수를 하여 돈을 모았다는 주장(<다시 쓰는 동아일보사사(史))>, 위기봉)도 있으나 구체적인 자료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집안의 배경을 바탕으로 일찍 신문물에 눈 뜬 인촌은 1914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 이듬해인 약관 25세에 당시 대표적 민간 사립학교인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중앙학회의 부속학교로 당시 경영난에 처해있던 이 학교를 인수한 후 그는 1917년 교장에 취임하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작은댁이 앞에 있다

 

 당시 일본 유학생들은 약소국의 실력양성의 두 축으로 교육과 산업을 설정하였는데, 그가 우선 손댄 분야는 교육이었다.

 우물물은 지금도 철철넘쳐 발밑으로 흐르고 있다.

 

 이 해 그는 조선인 중소기업가들이 합자하여 운영하던 경성직뉴(京城織紐)주식회사를 인수, 마침내 산업분야에도 진출하였다.

 

 이듬해 그는 고하 송진우(宋鎭禹)에게 중앙학교 교장자리를 넘기고 사업가로 전신하였다. 3·1의거 직후 그는 회사명을 경성방직(京城紡織)으로 바꾸고는 초대사장에 박영효(朴泳孝)를 영입하였는데, 이는 그가 당대의 거물친일파 박영효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총독부와 조선 내 유지세력들을 사업에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풀이할 수 있다.

 

 이는 동아일보 역시 초대사장에 박영효를 앉혔던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1924년 동생 김연수(金秊洙)가 일본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자 그에게 경영을 맡기고는 그는 일선에서 물러났다.

 

 안채 마루에 올라가는데 끈으로 된 손잡이가 있다.

 

 안채앞 헛간에 디딜방아가 있군

 

 큰댁과 작은댁이 위아래로 위치하고 잘보존되어 있는데

인걸은 간데없고 수목과 까치가 지키고 있나보군.

 


 

동행한 안해가 젖갈을 좋아해서 공소항에가서 조개젖 사가지고 왔지요. 곰소항에는 젖갈로 유명하여 관광객이 항상 붐비는군요.

 

선운사 동백꽃 보러 가서 여기저기 둘러봄이 즐거웠답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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