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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 詩 ***/당송8대가

당송8대가(한유 유종원 구양수 소순 소식 소철 증공 왕안석)

by 산산바다 2007. 2. 19.

산과바다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

 

중국 당·송대 8명의 문장가.(당송팔가문)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 Tang Sung pa chia wen]

중국 당·송대의 고문(古文) 명문집(名文集).

 

보통 청(淸) 건륭제(乾隆帝) 때 시문작가 심덕잠(沈德潛)이 편집한 〈당송팔가문독본 唐宋八家文讀本〉을 가리키는데, 정식 명칭은 〈당송팔대가문독본 唐宋八大家文讀本〉이며 모두 30권이다. 이 심덕잠본(本)이 성립되기 전에는 명대 모곤(茅坤)의 〈당송팔대가문초 唐宋八大家文〉와 청대 저흔(儲欣)의 〈당송십대가전집록 唐宋十大家全集錄〉이 있었는데 점차로 〈당송팔가문독본〉에 있는 당대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 송대 구양수(歐陽修)·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을 당송8대가로 부르게 되었다. 심덕잠이 이 책의 서문에서 당·송문에서 한대의 문장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명대 고문사파(古文辭派)의 "문장은 반드시 진·한대(秦漢代)의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는 격조파(格調派)의 창도자였다. 바로 이 점에서 그의 주장은 6조시대(六朝時代)에 쇠약했던 6예(六藝)의 뜻을 부흥시킨 한유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던 명대 당송파 모곤의 의도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심덕잠본은 원래 자신의 고문학습을 위한 명작선이었는데, 60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진사(進士)에 합격한 그가 그무렵 다시 손을 보아 발표했다. 〈당송팔가문독본〉이 유행하게 된 것은 그 내용뿐만 아니라 만년에 높은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던 심덕잠의 명성 때문이기도 했다.

 

 

1. 한유[韓愈, Han Yu]

(병)Han Yu (웨)Han Yü.

768 등주(鄧州 : 지금의 허난 성[河南省]에 속함)~824 장안(長安).

중국 산문의 대가이며 탁월한 시인.

자(字)는 퇴지(退之). 한문공(韓文公)이라고도 한다. 중국과 일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후대 성리학(性理學)의 원조이다. 어려서 고아였고, 처음 과거에 응시했을 때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문체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낙방했다. 그후 25세에 진사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이부시랑(吏部侍郞)까지 지냈다. 사후에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되었고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유학이 침체되어가던 시기에 유학을 옹호했던 그는 헌종(憲宗)이 불사리(佛舍利)에 참배한 데 대해 끝까지 간(諫)한 일로 인하여 1년 동안 차오저우[潮州] 자사(刺史)로 밀려나 있었고, 평생을 불우하게 지내야 했다. 유학을 옹호하기 위해 그때까지 유학자들이 다소 소홀히 하던 〈맹자〉·〈대학 大學〉·〈중용 中庸〉·〈주역 周易〉을 광범위하게 인용했다. 후대의 성리학자들은 기초개념을 이 책들에서 취했고 한유는 성리학의 기초를 놓은 셈이었다. 한유는 당시에 유행하던 규칙적인 운율과 고사성어로 가득 찬 변려문(騈儷文)을 배격했고, 위의 책들을 만든 옛 학자들처럼 자유롭고 간결한 문체의 사용을 주장했다. 그가 쓴 〈원도 原道〉·〈원성 原性〉 등은 중국문학의 백미이며 그가 주장한 고문체 문장의 대표작이 되었다. 시문학에서도 그는 기존의 문학적 형식을 뛰어넘으려고 했다. 그러나 문학에서 그가 기울인 노력의 많은 부분은 실패로 끝났다.

 

 

2. 유종원[柳宗元, Liu Tsungyuan]

(병)Liu Zongyuan (웨)Liu Tsungyüan.

773 중국 산시 성[山西省] 퉁관[潼關]~819 광시 성[廣西省] 류저우[柳州].

중국 당대의 문학자·철학자.

이명은 유하동(柳河東) 자는 자후(子厚). 하동해(河東解:지금의 산시 성 윈청[運城]) 사람이다. 일찍이 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왕숙문(王叔文)의 혁신단체에 참가했으나, 실패하여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었다. 후에 유주자사(柳州刺史)를 지내 유유주(柳柳州)라고도 한다. 한유(韓愈)와 함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제창하여 거의 1,000년 동안 귀족 출신의 문인들에게 애용된 변려문(騈儷文)에서 작가들을 해방시키려고 했다. 한유와 함께 당송8대가에 속하여 '한·유'(韓柳)라고 병칭된다. 그러나 철학상으로는 한유와 큰 견해 차이를 보여, 천(天)의 의지유무(意志有無)에 관해 논쟁을 벌였다. 유종원은 천지가 생기기 전에는 오직 원기(元氣)만이 존재했으며, 천지가 나누어진 뒤에도 원기는 천지중에 있다고 생각했다. 원기 위에 천이라는 최상위 개념이 있는 것을 부정하여 천이 상과 벌을 내린다는 천명론에 반대했다. 잡문(雜文)에서 전형적인 사물을 예로 들어 심오한 철리(哲理)를 제시했다. 〈포사자설 捕蛇者說〉·〈종수곽탁타전 種樹郭駝傳〉·〈영주철로보지 永州鐵爐步誌〉·〈삼계 三戒〉·〈부판전 傳〉 등은 모두 정론(政論)과 철리를 예술적인 형상과 융합시킨 것으로, 구상이 참신하며 문체가 생동감 있다. 그의 산수유기(山水遊記)는 널리 알려져 있는데, 특히 경물(景物)의 특징을 묘사하는 데 뛰어났다. 유명한 〈영주팔기 永州八記〉 가운데 〈고무담서소구기 潭西小丘記〉는 돌을, 〈소석담기 小石潭記〉는 담수어를, 〈원가갈기 袁家渴記〉는 초목을 묘사했는데, 서로 다른 각각의 사물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또한 세상에 대한 울분을 자연풍경에 이입하고, 속세와 떨어져 있는 기이한 산수에 마음의 울분을 기탁하여 작품에 반영했다. 시의 내용은 담백하며, 유배생활을 반영한 작품과 경치를 묘사한 소시(小詩)는 매우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그밖에 〈유하동집 柳河東集〉이 있다.

 

 

3. 구양수[歐陽脩, Ouyang Hsiu]

(병)Ouyang Xiu (웨)Ouyang Hsiu. 1007 중국 쓰촨[四川] 몐양[綿陽]~1072 허난[河南].

중국 북송(北宋) 때의 시인·사학자·정치가.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시호는 문충(文忠). 송대 문학에 '고문'(古文)을 다시 도입했고 유교원리를 통해 정계(政界)를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구양수는 쓰촨 성 몐양의 지방관이었던 아버지 구양관(歐陽觀)을 3세에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후베이[湖北]에 살고 있던 숙부 구양엽(歐陽曄)의 집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자랐다. 집안이 너무나 가난해서 모래 위에 갈대로 글씨 쓰는 연습을 했다는 이야기는 과장된 것인지 모르지만 집안이 궁색한 형편에 놓여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1030년 진사(進士)시험에 장원급제하여 서쪽의 수도였던 뤄양[洛陽]의 유수추관(留守推官)을 제수받았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문인으로 일찍부터 명성이 높았던 구양수는 뤄양에서 유명한 시인 매요신(梅堯臣) 등과 사귀었다. 이들과의 친분으로 인해 구양수의 문학적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이를 계기로 고문의 간결성·명료성에 더욱 열중하게 되었다. 구양수는 몇 해 전 당대(唐代)의 대문장가인 한유(韓愈)의 작품을 읽고 케케묵은 은유와 고전문구의 인용을 일절 배제한, 평이하고 간결한 고문체에 크게 감명받았다. 이후 고문체 부흥의 지지자·지도자로 활약하면서 새로운 문학운동의 전기를 마련했다.

1034년 수도 카이펑[開封]에 있는 황실도서관 사서직을 맡게 되었다. 2년 뒤 고위관리인 범중엄(范仲淹)이 조정의 제도와 정책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재상(宰相) 여이간(呂夷簡)에 의해 좌천되었을 때 구양수는 서슴지 않고 여이간을 공격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결과 그도 후베이 성, 후난 성[湖南省]의 하급관리직으로 강등·좌천되었다. 이곳에서 거의 1,000년에 이르는 정치적 혼란시대를 다룬 역사서인 〈오대사기 五代史記〉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엄격하고 공정한 사관(史觀)에 입각하여 정치적 소외세력인 순교자·반란자·매국노 등에 대해서도 별도의 지면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그 전대(前代)의 역사가들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수도 카이펑으로 다시 돌아온 범중엄과 다른 고관들의 추천을 받은 구양수는 1043년에 카이펑으로 소환되어 지간원정(知諫院正)이 되었다. 범중엄과 기타 정치개혁가들이 사사로운 파당을 조직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자 구양수는 유명한 〈붕당론 朋黨論〉을 써서 사대부들의 개인적인 모임이 정치적으로 유익하다는 주장을 폈다. 그의 용기와 직언에 감복한 인종(仁宗)은 구양수를 황제의 일상생활을 기록하고 조칙(詔勅)의 초안을 작성하는 직책에 임명했다. 그는 직언과 엄정한 비평 때문에 적이 많았는데 1045년에는 여러 해 전에 조카딸과 불륜관계를 맺었다는 탄핵을 받아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가 뤄양 시절에 여자관계가 문란했던 점을 미루어볼 때 이 탄핵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어 보인다. 비록 무죄로 방면이 되기는 했지만 그의 명성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구양수는 다시 강등되어 안후이 성[安徽省]의 추저우[州] 지사(知事)로 좌천되었으나 이 고장의 아름다운 전원풍경에 매혹되어 더욱 술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스스로 호를 취옹(醉翁)이라 지은 뒤, 취옹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취옹정기〉라는 수필을 썼다. 이 글은 중국문학에서 가장 이름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1050년 남쪽 수도인 허난 성 구이더[貴德]의 자사(刺史)를 거쳐 1054년에는 수도로 소환되어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가 되었다.

좌천된 지 거의 9년 만에 수도로 돌아와서 맡게 된 이 새로운 보직은 승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역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강직함과 직설적인 태도 때문에 동료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의 첫번째 임무는 〈신당서 新唐書〉를 저술하는 것이었다. 1년 뒤 이 작업이 막 시작되던 때 구양수는 중국 북부의 대부분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만주 거란족에 송의 사절로 파견되었다. 1057년 지공거(知貢擧:과거시험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 해의 과거시험에서 고문체로 답안을 작성한 사람들은 합격시키는 한편, 문학적 수사를 많이 사용하는 태학체(太學體)로 답안을 작성한 사람은 모두 불합격시켰다. 이렇게 하여 합격된 사람들 가운데는 후에 '당송 8대가'로 칭송되는 소식(蘇軾:蘇東坡)·소철(蘇轍) 형제와 증공(曾鞏)이 끼어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자기 자신의 문학관을 전통적인 과거시험에 적용했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은 낙방생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변려문(騈儷文)보다 고문(古文)을 더 중시하는 결정적이고 획기적 조치를 취함으로써 중국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는 왕안석(王安石)과 소식 같은 유능한 젊은 문인들을 칭찬하고 독려했다.

〈신당서〉가 완성된 1060년 그는 사회·재정·군사 등의 각 분야에서 많은 공적을 남기면서, 군정(軍政)을 담당하는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승진했고 그다음 해에는 부재상(副宰相)에 해당하는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그러나 궁중에서 더이상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운 사태가 발생하여 60세에 그의 관운(官運)은 끝이 났다. 그는 며느리와 불륜관계를 맺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고 그로 인해 명성에 타격을 받아 수도에서 점점 더 고립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거듭하여 퇴관시켜줄 것을 건의했으나 새로 등극한 신종(神宗)은 이를 거부하고 그를 안후이·산둥·허난 등지의 지방관으로 내보냈다.

산둥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그는 전에 자신이 키워 준 왕안석이 제정한 신법(新法) 가운데 농민에게 낮은 이자로 대출해주는 청묘법(靑苗法)에 특히 반대하여, 그의 관할 지역에서 그 제도를 실시하지 않았다. 이무렵 그는 분명 신법의 시행에 실망을 느낀 보수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1071년 그는 태자소사(太子小師)가 되어 은퇴했다. 그는 취옹정이 있는 아름다운 안후이성의 영주(潁州:지금의 푸양 현[阜陽縣])에서 은퇴 후의 생활을 보낼 작정이었으나 그곳에서 몇 달 살지 못하고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구양수의 개인적 영향력과 여러 방면에 걸친 업적은 그가 죽은 후에도 지속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정치가로서는 유교원리를 통해 당시의 정계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유능한 인재들을 적극 추천했다. 추천받은 사람들 중에는 나중에 그와 반대편에 선 사람들도 있었다. 구양수는 일찍이 한유의 작품에 심취하여 한유의 억불정책(抑佛政策)을 지지했으나, 한유보다는 온건한 입장이었다. 그는 맹자의 글처럼 간결명료한 한유의 고문체 문장을 좋아하여 당시 유행하던,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고 운율을 맞춘 태학체 문장을 멀리하고 고문체 문장을 즐겨 썼다. 고문체로 쓰여진 그의 문장은 이후 많은 문인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는 산문시인 부(賦)의 형태를 여러 가지 제약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했고, 부와 사(詞)를 비롯한 다른 문학형태에서 모범이 되는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오대사기〉와 〈신당서〉에서는 전통 역사서의 형태와 범위를 확충했고 간결하지만 정확한 기술과 도덕적 판단을 통하여 그당시의 인물과 제도를 평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 공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의식했으리라고 생각된다. 학자로서는 후대의 주석들을 무시하고 원전(原典)을 새롭게, 그리고 직감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고고학연구에도 일조했고, 화가로서는 새로운 문인화(文人畵)화법을 창안했다. 그가 남긴 저서로 전해져 오는 것은 역사서 이외에도 시·정부문서·편지, 기타 소품들을 합쳐 150권이 넘는다. 그의 서재는 1만 권이 넘는 책과 고대로부터의 문학적 유품 및 고고학적 기록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사후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4. 소순[蘇洵, Su Hsun]

(병)Su Xun (웨)Su Hsün. 1009~1066.

중국 북송(北宋) 때의 문학가.

자는 명윤(明允), 호는 노천(老泉). 쓰촨 성[四川省] 메이산 현[眉山縣] 출신으로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며, 시인 소동파(蘇東坡:蘇軾)의 아버지이다. 28세 때 과거에 낙제하자 그때까지 지은 글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두문불출하며 오로지 독서에 전념했다. 그결과 6경(六經)에서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두루 꿰뚫게 되었고, 단시간 내에 수천 언(言)의 글을 지을 수 있는 대문장가가 되었다. 인종(仁宗) 말기에 두 아들인 소동파·소철(蘇轍)을 데리고 상경하여 당시 한림학사(翰林學士) 구양수(歐陽修)에게 인정받았다. 구양수가 천자(天子)에게 그의 저서 22편을 바치자 학자들이 입을 모아 그의 글들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후 비서성(書省) 교서랑(校書郞), 원안 현[文安縣] 주부(主簿)를 지냈다.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북송 이래 예(禮)에 관한 책들을 요벽(姚闢) 등과 함께 편집한 〈태상인혁례 太常因革禮〉 100권이 있다.

 

 

5. 소식 (소동파 蘇東坡, Ssu Tungp'o)

(병)Su Dongpo (웨)Ssu Tungp'o. 1036. 12. 19~1101. 7. 28.

중국 북송시대의 시인·산문작가·예술가·정치가.

본명은 소식(蘇軾), 자는 자첨(子瞻). 동파는 그의 호로 동파거사(東坡居士)에서 따온 별칭이다. 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3소'(三蘇)라고 일컬어지며, 이들은 모두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소순, 소철).

소동파는 북송 인종(仁宗) 때 메이산[眉山:지금의 쓰촨 성(四川省)에 있음]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메이산의 도인(道人)이라 불리던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도가(道家), 특히 장자(莊子)의 제물철학(齊物哲學)을 접하게 되었다. 1056년 그의 아버지 소순은 두 형제를 데리고 상경하여 이들의 시를 구양수(歐陽修)에게 보여주고 격찬을 받았다. 이들 형제는 그해 가을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나란히 급제했지만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1060년 복상(服喪)을 마치고 수도인 카이펑[開封]으로 돌아온 소동파는 관리임용 특별시험인 제과(制科)에 동생과 함께 급제했다. 이어 봉상부(鳳翔府:지금의 산시 성[陝西省]에 있음)의 첨서판관(簽書判官)이 되어 수도에 남게 된 동생과 헤어져 임지로 떠났다. 봉상부는 서주(西周) 이래의 여러 문화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는 공자묘의 석고(石鼓:고대문자를 새긴 10개의 북 모양의 돌)와 카이위안 사[開元寺] 동탑(東塔)에 남아 있는 당대 왕유(王維)·오도현(吳道玄)의 불화(佛畵) 등을 접한 감회를 〈봉상팔관 鳳翔八觀〉에서 읊었다. 봉상부에서의 임기가 끝나 상경한 1065년에 부인 왕씨(王氏)와 사별하고 그녀의 생전 모습을 〈망처왕씨묘지명 亡妻王氏墓地銘〉에 담았다.

이듬해 아버지 소순마저 죽자 아버지의 관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상을 치렀다. 탈상(脫喪)하고 상경한 1068년은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로, 참지정사(參知政事:부재상)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가 중앙정부의 물자조달을 합리화하기 위한 균륜법(均輪法), 농촌에 저리자금을 융통하여 빈농을 보호하려는 청묘법(靑苗法) 등 이른바 신법(新法)을 시행하던 시기였다. 신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소동파는 감관고원(監官告院)이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업무를 담당하다가 지방 근무를 청하여 저장 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서 근무했고, 이어 밀주(密州: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음)·쉬저우[徐州]·후저우[湖州] 등지의 지방관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신법으로 인해 고생하는 농민들의 생활상을 시로써 묘사하고는 했다. 후저우 지사(知事)로 있던 1079년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御史臺)에 체포되어 수도로 호송되었다. 이때 어사들의 심문과 소동파의 변명을 담은 기록이 〈오대시안 烏臺詩案〉에 남겨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다행히 사형을 면한 그는 100일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황주(黃州: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 황강 현[黃岡縣]) 단련부사(團練副使)로 좌천되었다.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황주에 거주할 의무가 지워진 일종의 유형(流刑)이었다. 황주에서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부인은 양잠을 했고, 그는 본래 병영이었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이 땅을 동파(동쪽 언덕)라 이름짓고 스스로를 동파거사라고 칭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그 유명한 〈적벽부 赤壁賦〉가 지어진 것도 이곳에서였다.

1085년 신종이 죽고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신종의 어머니이며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태황후(宣仁太皇后)가 섭정을 시작했다. 그녀는 뤄양[洛陽]에 운둔해 있던 사마광(司馬光)을 불러들여 왕안석 일파가 만든 신법들을 폐지했다. 이때 소동파도 다시 발탁되어 예부랑중(禮部郞中)을 시작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한림학사지제고(翰林學士知制誥) 등의 요직에 올랐다. 그러나 사마광의 신법 폐지가 모역법(募役法)의 폐지에 이르는 등 과격해지자, 소동파는 중서사인이 되어 수도로 올라온 동생과 함께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사마광이 죽고난 후 당쟁이 시작되었고, 선인황태후마저 사망하자 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철종은 신법들을 다시 부활시켰으며, 소동파는 다시 좌천되어 혜주사마(惠州司馬)로 임명되었다. 그에 대한 탄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를 질시하는 정치인들로 인해 하이난 섬[海南島]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주로 거주하던 리족[黎族]과 함께 비참한 생활을 했다. 철종의 죽음으로 휘종(徽宗)이 즉위하면서 제거옥국관(提擧玉局觀)이라는 명예직에 봉해져 상경하던 도중, 큰 병을 얻어 창저우[常州]에서 66세의 생을 마감했다.

소동파는 구양수·매요신(梅堯臣) 등에 의해서 기틀이 마련된 송시(宋詩)를 더욱 발전시켰다. 구양수·매요신 이전의 시가 대개 비애(悲哀)를 주제로 해왔던 데 비해서 이 두 사람은 평안하고 고요한 심정을 주로 읊었고, 소동파는 이에서 벗어나 훨씬 적극적·자각적인 관점을 취했다. 즉 인생체험에 대한 시각의 전환을 생활의 지혜로 삼아 인간 불행의 내면에서 자신만이 인식할 수 있는 행복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가 이처럼 비애의 지양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장자의 제물철학, 불교의 묘리(妙理) 등의 사상적 배경 때문이었으며 〈적벽부〉에는 이같은 그의 사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의 시는 자유분방한 심정과 재능의 표현을 통해 경쾌한 리듬 속에 절묘한 비유와 유머를 담고 있다. 제재에 있어서도 특별히 구애받지 않아 이전까지 다른 사람들이 취하지 않았던 것, 간과되어왔던 것들도 시로 썼다. 그의 시는 모든 사람에 대한 폭넓은 애정을 기저에 깔고 있으며, 인간의 욕망을 긍정했고 인간의 선의(善意)를 신봉했다. 그는 사(詞)에서도 기존의 완약(婉約) 대신에 호방한 사풍을 창시했다. '적벽회고'(赤壁懷古)라는 부제가 붙은 〈염노교 念奴嬌〉·〈수룡음 水龍吟〉 등은 영물시(詠物詩)의 극치라 일컬어진다. 한편 산문에서는 당송8대가 중 소씨 부자, 즉 3소가 포함되었다. 동파의 산문은 송대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이색적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분방함이다. 동파는 작가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와야만 훌륭한 문장이 된다는 청년기의 생각을 평생토록 일관했다. 〈조주한문공묘비 潮州韓文公廟碑〉 등의 비문, 〈유후론 留侯論〉·〈범증론 范增論〉 등의 사론(史論)을 비롯해 많은 산문을 남겨 지금까지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

소동파는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의 글씨는 동진(東晋)의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의 정통적인 서법과 당대 안진경(顔眞卿) 일파의 혁신적 서법을 겸비하고 있는데, 그 자신은 글씨 자체보다도 살아 있는 정신과 기백의 표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그는 〈제발 題跋〉이라는 평론에서 해서(楷書)가 모든 서체의 기본이며 서예는 사람 됨됨이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의 글씨로는 유배지 황주에서 쓴 〈한식시권 寒食詩卷〉, 예부상서 시절에 쓴 〈이태백선시권 李太白選詩卷〉 등이 원본으로 남아 있다. 항저우에서 쓴 〈진규각비 宸奎閣碑〉와 같이 탁본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으나, 모두 신품(神品)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필적을 모은 〈서루첩 西樓帖〉도 전해진다. 한편 그의 죽화(竹畵)는 문동(文同)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동파는 그림을 그리는 데 기교를 쓰지 않았으며, 친구들은 그러한 그의 그림에 한 점의 세속성도 보이지 않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왕유의 그림에 대해 "시 속에 그림 있고 그림 속에 시 있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이후 중국 화론사에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이같은 예술 사상과 기교에 대한 무관심은 문인화(文人畵)를 크게 부흥시키는 힘이 되었다. 다른 문인들과는 달리 동파의 시문집은 생전에 이미 간행되어 재판의 물증으로 제출될 정도였다. 〈동파집 東坡集〉 40권과 〈동파후집 東坡後集〉 20권은 남송 데의 판본이 여러 종류 남아 있다. 이 두 책에 〈주의 奏議〉·〈내제집 內制集〉·〈외제집 外制集〉·〈응소집 應詔集〉·〈속집 續集〉을 합친 〈동파칠집 東坡七集〉은 100권이 넘으며, 〈동파전집 東坡全集〉이라 불리기도 한다.

 

 

6. 소철[蘇轍, Su Che]

(병)Su Zhe (웨)Su Che. 1039~1112.

중국 북송(北宋) 때의 문인.

자는 자유(子由). 쓰촨 성[四川省] 메이산[眉山] 사람이다. 1057년 형 소동파(蘇東坡)와 함께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지만 1072년 신법(新法)에 반대하는 서(書)를 올렸다가 허난[河南] 유수(留守)로 좌천되었다. 1079년 소동파가 신법에 반대하는 시를 지었다가 조정을 비방한 죄로 탄핵받았을 때, 이것에 연루되어 균주(筠州)의 염주세(鹽酒稅)를 관리하는 하급직으로 밀려났다. 철종(哲宗)이 즉위하여 구법당(舊法黨)이 세력을 얻자 다시 수도로 부름을 받았다.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에까지 올랐지만 후에 다시 지방관으로 전출되었다. 휘종(徽宗) 때에 대중대부(大中大夫)로 복직되었지만 사직한 뒤 허(許: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쉬창 현[許昌縣])에 별장을 짓고 창작생활을 하며 말년을 보냈다.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사상이나 문학 면에서 형과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산문창작에서는 양기(養氣)를 위주로 하여 내적 수양을 중시할 것을 주장했고, 특히 사마천(司馬遷)의 문장을 높이 받들었다. 그의 산문은 소동파만은 못하지만 뛰어나고 담백한 맛이 있다. 〈황주쾌재정기 黃州快哉亭記〉·〈무창구곡정기 武昌九曲亭記〉 등은 송대 산문 가운데 명작으로 꼽힌다. 장시(長詩)에도 능숙하며 그의 시는 비교적 질박·온후하고 수식이 적으며 의경(意境)이 심원하고 언어가 청아하다. 그가 이백(李白)의 시에 대해 "화려하지만 내용이 없다"고 비평한 것을 보면, 시를 지을 때 그가 추구한 바가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다. 〈춘추집해 春秋集解〉·〈노자해 老子解〉·〈고사 古史〉·〈난성집 欒城集〉 등의 저작이 있다.

 

 

7. 증공[曾鞏, Tseng Kung]

(병)Zeng Gong (웨)Tseng Kung. 1019~1083.

중국 북송(北宋)의 문학가.

자는 자고(子固). '남풍선생'(南豊先生)으로 불렸다. 건창(建昌) 난펑[南豊:지금의 장시 성(江西省)에 있음] 사람이다. 1057년(嘉祐 2)에 진사가 되었으며, 관직은 중서사인(中書舍人)까지 지냈다. 그의 문장은 일찍이 왕안석(王安石)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의 산문은 평이하며 '당송8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명이다. 그의 문장은 당시 권력자의 무사안일한 태도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한편, '선왕의 뜻에 합치한다'는 전제 아래 '법제도'에 대한 일련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문집으로는 〈융평집 隆平集〉·〈원풍류고 元豊類稿〉가 있으며, 특히 〈신서목록서 新序目錄序〉·〈전국책목록서 戰國策目錄序〉 등의 목록서를 비롯해 서발(序跋)·잡기(雜記) 등에서 빼어난 필치를 보여주었고 〈선대부집후서 先大夫集後序〉는 그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8. 왕안석[王安石, Wan Anshih]

(병)Wang Anshi (웨)Wan Anshih. 1021 중국 장시 성[江西省]~1086.

중국 북송의 시인·문필가.

1058년 왕안석은 송의 인종(仁宗)에게 〈만언서 萬言書〉를 올렸다. 이 글은 후에 그가 시행하게 될 정책과 그의 정치이론의 기초를 서술한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제안이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이 글은 주로 관료제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의 직무에 필요한 기술을 갖춘 유능한 관리들을 육성·선발할 것을 주장했다. 1060년 그는 조정에 들어갔고, 1067(또는 1068)년 신종(神宗) 즉위 후에는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어 황제의 신뢰를 얻었다. 1069년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어 다양한 내용의 개혁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개혁의 토대는 재정문제였다. 그는 경제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건전한 국가경제에서 단지 경제적인 조처만이 아니라 정부와 백성에게 모두 유익한 어떤 자극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는데, 이것은 정통 유가이론과는 거리가 있는 견해였다. 이 정책의 일환으로 먼저 기금을 만들어 농민들에게 대부를 해줌으로써 농민들이 고리대금에 시달리지 않게 했다(靑苗法). 아울러 소규모 상인들에게도 대부받을 권리를 주었다. 또한 화폐경제에 활력을 주고 확대된 국가재정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화폐를 많이 만들어 유통시켰다.

무엇보다도 보수파의 심한 반대를 불러일으킨 것은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과 균수법(均輸法)이었다. 방전균세법은 부세(賦稅)를 고르게 하기 위해 토지를 해마다 측량하게 한 것이다. 균수법은 각지에서 중앙정부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공납제를 개선하여, 정부는 발운사(發運使)로 하여금 가장 편리한 곳에서 가장 싼 가격으로 물자를 사들이게 하고 농민들에게는 생산물 중 가장 많이 생산되는 것으로 대납시키게 한 제도이다. 이외에도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고 농한기에 군사훈련을 실시할 목적으로 설립한 민병제도인 보갑제(保甲制)가 있었다. 또한 모역법(募役法)을 실시하여, 각 농가에 등급에 따라 면역전(免役錢)을 내게 하고 이 돈으로 희망자를 모집해 차역(差役)을 대신하게 했다. 무기의 개량을 위해 군기감(軍器監)을 설치했고, 군마(軍馬)의 수입을 막기 위해 농민들에게 관마(官馬)를 위탁·사육시키는 보마법(保馬法)을 실시했다. 왕안석은 또한 관료 양성기관인 한림원(翰林院)을 재편해 법률·의학·군사학 등의 실용적인 학문에 중점을 두었다. 과거제도를 개혁해, 경전을 암송하고 시문을 짓는 명경과(明經科)를 폐지했으며, 진사과(進士科)에서도 경의(經義)와 책론(策論)만을 출제했다. 또한 관리들의 고과(考課)를 엄격히 하여 공이 있는 사람만 승진시키도록 했다.

일부 개혁조처에 대한 대중적인 불만이 높아가고 심한 기근까지 겹치자, 왕안석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그는 결국 내외의 압력에 밀려 1074년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음해 다시 재상이 되었지만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지는 못했다. 이와 같은 좌절을 겪은데다 아들까지 죽자 의욕을 잃고 1076년말 재상직에서 물러났다. 개혁의 기본골격은 신종이 살아 있는 동안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1085(또는 1086)년 신종이 죽자 신법은 적의에 찬 개혁반대파들에 의해 폐지되었다. 그후 몇 십 년 간 신·구법당의 당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신법은 1093~1125년에 완화된 형태로 부활되기도 했다. 왕안석은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때로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기도 하여 자신의 행동과 그 행동의 동기에 대해 오해나 공격을 받기 일쑤였다. 고위관리들은 그에게 협력하지 않았으며, 하급관료들은 무능력하고 비양심적이어서 왕안석과 그의 정책들은 결국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은퇴한 후에 그는 어원연구에 관한 저술 및 학문을 계속하며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조정에 있을 때조차 검소하여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때로는 그 차림이 기이하기까지 했다.

유교경전의 실용적인 응용을 중시한 왕안석은 〈시경 詩經〉·〈서경 書經〉·〈주례 周禮〉를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이를 '신의'(新義)라 부르고 과거시험의 기본서로 채택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보수파들은 매우 놀랐다. 그러나 그의 문장력은 동료와 적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는 우아하고 깊이 있는 글로써 당송8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사람으로 꼽히게 되었다. 유려한 시문들, 특히 선종(禪宗)의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는 만년의 작품들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중국에 통일제국이 세워진 이래 전례 없는 규모로 단행된 왕안석의 개혁은 비록 항상 기대했던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었지만, 백성들의 도덕적인 수준을 향상시키고 그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주며 나가서는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 본래의 목표가 있었다. 왕안석과 그의 개혁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20세기까지도 비방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왕안석의 개인적인 단점과 정치적 결함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로 보수파들이 품었던 맹렬한 반감 때문이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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