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산에는 꽃이 피네
*** 詩 ***/당송8대가

적벽부 소동파

by 산산바다 2007. 1. 12.

산과바다

 

 

적벽부(赤壁賦)

 

소동파(蘇東坡, 1036.12.19 - 1101.7.28)

 

 

壬戌之秋 七月旣望 蘇子與客 泛舟遊於赤壁之下. 淸風徐來 水波不興.

임술지추 칠월기망 소자여객 범주유어적벽지하. 청풍서래 수파불흥.

 

임술(壬戌) 가을 7월 기망(기望)에 소자(蘇子)가 손[客]과 배를 띄워 적벽(赤壁) 아래서 노니,

맑은 바람은 천천히 불어오고 물결은 일지 않네.

 

 

 

擧舟屬客 誦明月之詩 歌窈窕之章.少焉, 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

거주촉객 송명월지시 가요조지장.소언, 월출어동산지상 배회어두우지간.

 

술을 들어 손에게 권하며 명월(明月)의 시를 외고 요조(窈窕)의 장(章)을 노래하니,

조금 있으니 달이 동쪽 산 위에 떠올라 북두성(北斗星)과 견우성(牽牛星) 사이를 서성이네.

 

 

白露橫江 水光接天

백로횡강 수광접천

 

흰 이슬은 강에 비끼고, 물빛은 하늘에 이었네.

 

 

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 浩浩乎 如憑虛御風 而不知其所止

종일위지소여 능만경지망연. 호호호 여빙허어풍 이부지기소지.

 

한 잎의 갈대 같은 배가 가는 대로 맡겨, 일만 이랑의 아득한 물결을 헤치니,

넓고도 넓구나,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탄듯하여 그칠 데를 알 수 없고,

 

 

 

飄飄乎 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 於是 飮酒樂甚 ?舷而歌之

표표호 여유세독립 우화이등선 어시 음주락심 구현이가지

 

훨훨 나부껴 인간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가 돋치어 신선(神仙)으로 돼 오르는 것 같더라.

이에 술을 마시고 흥취가 도도해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하니,

 

 

 

歌曰:桂棹兮蘭? 擊空明兮?流光 渺渺兮予懷 望美人兮天一方.

가왈:계도혜난장 격공명혜소류광 묘묘혜여회 망미인혜천일방

 

노래에 이르기를 "계수나무 노와 목란(木蘭) 삿대로 물에 비친 달을 쳐서 흐르는 달빛을 거슬러 오르네.

아득한 내 생각이여, 미인(美人)을 하늘 한 쪽에서 바라보네.

 

 

客有吹洞簫者 倚歌而和之 其聲嗚嗚然 如怨如慕 如泣如訴

객유취통소자 의가이화지 기성오오연 여원여모 여읍여소.

 

손님 중에 퉁소를 부는 이 있어 노래를 따라 화답(和答)하니,

그 소리가 슬프고도 슬퍼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듯, 우는 듯 하소연 하는 듯,

 

 

餘音?? 不絶如縷 舞幽壑之潛蚊 泣孤舟之釐婦. 蘇者 秋然正襟 危坐而問客曰 : 何爲其然也?

여음요요부절여루 무유학지잠문 읍고주지리부. 소자추연정금 위좌이문객왈 : 하위기연야?

 

여음(餘音)이 가늘게 실같이 이어져 그윽한 골짜기의 물에 잠긴 교룡(蛟龍)을 춤추게하고 외로운 배를 의지해 살아가는 과부를 울게 하네.

소자(蘇子)가 근심스레 옷깃을 바루고 곧추앉아 손에게 묻기를 "어찌 그러한가?" 하니,

 

 

 

 客曰 : 月明星稀 烏鵲南飛 此非曹孟德之詩乎?

 객왈 : 월명성희 오작남비 차비조맹덕지시호?

 

손님이 말하기를 "'달은 밝고 별은 성긴데,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것은 조맹덕(曹孟德)의 시가 아닌가?

 

 

西望夏口 東望武昌 山川上繆 鬱乎蒼蒼. 此非孟德之困於周郞者乎?

서망하구 동망무창 산천상무 울호창창. 차비맹덕지곤어주랑자호?

 

서쪽으로 하구(夏口)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무창(武昌)을 바라보니 산천(山川)이 서로 얽혀 빽빽하고 푸른데,

여기는 맹덕이 주랑(周郞)에게 곤욕(困辱)을 치른 데가 아니던가?

 

 

 

方其破荊州 下江陵 順流於東也 軸?千里 旌旗蔽空?

방기파형주 하강릉 순류어동야 축로천리 정기폐공

 

바야흐로 형주(荊州)를 격파하고 강릉(江陵)으로 내려감에, 흐름을 따라 동으로 가니,

배는 천 리에 이어지고 깃발은 하늘을 가렸었네.

 

 

 

시酒臨江 橫?賦詩 固一世之雄也 而今安在哉?

시주임강 횡삭부시 고일세지웅야 이금안재재?

 

술을 걸러서 강가에 가서 창을 비끼고 시를 읊으니 진실로 일세(一世)의 영웅(英雄)일 진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況吾與子 漁樵於江渚之上 侶魚蝦而友?鹿

황오여자 어초어강저지상 여어하이우미록

 

하물며 나는 그대와 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를 하며, 물고기와 새우를 짝하고 고라니와 사슴을 벗하고 있네.

 

 

賀一葉之扁舟 擧匏樽而相屬 寄??於天地 渺滄海之一粟.

하일엽지편주 거포준이상촉 기부유어천지 묘창해지일속.

 

한 잎의 좁은 배를 타고서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고, 하루살이 삶을 천지(天地)에 으지하니 아득히 넓은 바다의 한 알의 좁쌀알이구나.

 

 

 

哀吾生之須臾 羨長江之無窮 挾飛仙?遊 抱明月而長終 知不可乎驟得 託遺響於悲風

애오생지수유 선장강지무궁 협비선오유 포명월이장종 지부가호취득 탁유향어비풍

 

우리네 인생의 짧음을 슬퍼하고 장강(長江)의 끝없음을 부럽게 부러워하네. 나는 신선을 끼고서 즐겁게 노닐며, 밝은 달을 안고서 오래토록 하다가 마치는 것을, 불현듯 얻지 못할 것임을 알고, 여운을 슬픈 바람에 맡기네."

 

 

 蘇者曰: 客亦知夫水與月乎?

 소자왈: 객역지부수여월호?

 

소자 말하되 "손님꺼서도 대저 물과 달을 아시오 ?

 

 

逝者如斯, 而未嘗往也. 盈虛者如彼 而卒莫消長也.

서자여사, 이미상왕야. 영허자여피 이졸막소장야.

 

가는 것이 이와 같으나 일찍이 가지 않았으며, 차고 비는 것이 저와 같으나 끝내 줄고 늘지 않으니,

 

 

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曾不 能以一瞬

개장자기변자이관지 칙천지증불 능이일순

 

무릇 변하는 것에서 보면 천지도 한 순간일 수 밖에 없으며,

 

 

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盡也 而又何羨乎?

자기불변자이관지 즉물여아개무진야 이우하선호?

 

변하지 않는 것에서 보면 사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으니 또 무엇을 부러워 하리요?

 

 

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

차부천지지간 물각유주

 

또, 대저 천지 사이의 사물에는 제각기 주인이 있어,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 惟江上之淸風 與山間之明月

구비오지소유 수일호이막취 유강상지청풍 여산간지명월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한 터럭일지라도 가지지 말 것이나,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은,

 

 

而得之而爲聲 目遇之而成色 取之無禁 用之不竭

이득지이위성 목우지이성색 취지무금 용지불갈

 

귀로 얻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만나면 빛을 이루어서, 이를 가져도 금할 이 없고,이를 써도 다함이 없으니,

 

 

是造物者之無盡藏也 而吾與者之所共樂 客喜而笑 洗盞更酌

시조물자지무진장야 이오여자지공락 객희이소 세잔갱작

 

이는 조물주(造物主)의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 손님이 기뻐서 웃고, 잔을 씻어 다시 술을 따르니,

 

 

肴核旣盡 杯盤狼藉 相與枕籍乎舟中 不知東方之旣白.

효핵기진 배반낭자 상여침적호주중 부지동방지기백

 

고기와 과일 안주가 이미 다하고 술잔과 소반이 어지럽네. 배안에서 서로 함께 포개어 잠이드니, 동녘 하늘이 밝아 오는 줄도 몰랐네.

 

 

 

 

 

 

후 적벽부

 

소동파(蘇軾) 

 

 

是歲十月之望, 步自雪堂, 將歸于臨皐, 二客從予, 過黃泥之坂, 霜露旣降, 木葉盡脫. 人影在地, 仰見明月. 顧而樂之, 行歌相答, 已而歎曰, 有客無酒, 有酒無肴. 月白風淸, 如此良夜何. 客曰, 今者薄暮, 擧網得魚, 巨口細鱗, 狀如松江之?. 顧安所得酒乎. 歸而謀諸婦, 婦曰, 我有斗酒, 藏之久矣. 以待子不時之需.

 

이 해(임술년) 10월 보름에 설당(雪堂)으로부터 걸어 나와서 임고정(臨皐亭)으로 돌아가려 할 때에 두 손(客)이 나를 따라왔다. 황토 언덕을 지나니 서리와 이슬이 이미 내리고 나뭇잎이 다 떨어졌으므로 사람의 그림자가 비쳐 땅에 있기에 우러러 밝은 달을 보았다. 돌아보고 즐거워하여 길을 걸으며 노래 부르면서 서로 화답하였는데, 이윽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손(客)이 있으면 술이 없고 술이 있으면 안주가 없구나. 달은 밝고 바람은 시원한데, 이처럼 좋은 밤에 어찌 한단 말인가?” 하자, 손(客)이 말하기를 “오늘 저녁 무렵에 그물을 들어 고기를 잡았는데, 입이 크고 비늘이 가늘어 모양이 송강(松江)의 송어와 같습니다. 다만 어느 곳에서 술을 구하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돌아와서 부인에게 상의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내가 한 말 술을 두어 보관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대의 불시(不時)의 쓰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於是携酒與魚, 復遊於赤壁之下, 江流有聲, 斷岸千尺. 山高月小, 水落石出, 曾日月之幾何, 而江山不可復識矣. 予乃攝衣而上, 履?巖披蒙茸, 踞虎豹, 登?龍, 攀棲?之危巢, 俯馮夷之幽宮, 蓋二客之不能從焉. 劃然長嘯, 草木震動, 山鳴谷應, 風起水涌, 予亦?然而悲, 肅然而恐, 凜乎其不可留也. 反而登舟, 放乎中流, 聽其所止而休焉, 時夜將半, 四顧寂寥, 適有孤鶴, 橫江東來, 翅如車輪, 玄裳縞衣, ?然長鳴, 掠予舟而西也.

 

이에 술과 고기를 가지고 다시 적벽강(赤壁江) 아래에서 노니, 흐르는 강물 소리가 들려오고 끊긴 강 언덕은 천 길이나 되는구나. 산이 높고 달이 작으며 수위가 떨어져 돌이 드러나니,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지 강산을 다시 기억할 수가 없구나.

 

 나는 마침내 옷자락을 걷어잡고 올라가서 높은 바위를 밟고 우거진 풀 속을 헤치고, 호랑이 모양의 바위에 걸터앉고 규룡 모양의 나무에 올라가고, 송골매가 살고 있는 높은 둥지에 올라가 수신(馮夷)의 그윽한 집을 굽어보니, 두 손(客)은 따라오지 못하는구나. 째질듯 한 소리로 길게 휘파람을 부니, 초목이 진동하고 산이 울림에 골짜기가 메아리치며 바람이 일고 물이 솟는 듯하였다. 내 또한 초연(?然)히 슬퍼지고 숙연(肅然)히 두려워져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돌아와 배에 올라 중류(中流)에 이르러 배가 멈추는 대로 내버려두고 쉬었다. 한밤중이 되려 할 때에 사방을 돌아보아도 조용하기만 하였는데, 마침 외로운 학 한 마리가 강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오니, 나래가 수레바퀴만 하며, 검은 치마에 흰옷을 입고는 길게 울면서 내 배를 스쳐 서쪽으로 갔다.

 

 

須臾客去, 予亦就睡, 夢一道士羽衣翩?, 過臨皐之下, 揖予而言曰, 赤壁之遊樂乎. 問其姓名, ?而不答. 嗚呼噫?, 我知之矣. 疇昔之夜, 飛鳴而過我者, 非子也耶. 道士顧笑, 予亦驚悟, 開戶視之, 不見其處.

 

조금 후에 손(客)이 떠나가고 나 또한 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에 한 도사가 깃으로 만든 옷을 펄럭이면서 임고정(臨皐亭) 아래를 지나다가 나에게 읍하고 말하기를 “적벽강(赤壁江)의 뱃놀이가 즐거웠는가?” 하여, 그의 이름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아! 슬프다. 내 그대를 알겠노라. 어제 밤에 울면서 내 배를 스쳐 지나간 것이 그대가 아닌가?” 하니, 도사는 돌아보고 웃는다. 나 또한 놀래어 잠을 깨어 창문을 열고 보니,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소동파蘇東坡(Su Dongpo (웨)Ssu Tungp'o.)

1036. 12. 19~1101. 7. 28. 중국 북송시대의 시인·산문작가·예술가·정치가.

소동파본명은 소식(蘇軾), 자는 자첨(子瞻). 동파는 그의 호로 동파거사(東坡居士)에서 따온 별칭이다.

 

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3소'(三蘇)라고 일컬어지며, 이들은 모두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

 

소동파는 북송 인종(仁宗) 때 메이산[眉山:지금의 쓰촨 성(四川省)에 있음]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메이산의 도인(道人)이라 불리던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도가(道家), 특히 장자(莊子)의 제물철학(齊物哲學)을 접하게 되었다. 1056년 그의 아버지 소순은 두 형제를 데리고 상경하여 이들의 시를 구양수(歐陽修)에게 보여주고 격찬을 받았다. 이들 형제는 그해 가을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나란히 급제했지만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1060년 복상(服喪)을 마치고 수도인 카이펑[開封]으로 돌아온 소동파는 관리임용 특별시험인 제과(制科)에 동생과 함께 급제했다. 이어 봉상부(鳳翔府:지금의 산시 성[陝西省]에 있음)의 첨서판관(簽書判官)이 되어 수도에 남게 된 동생과 헤어져 임지로 떠났다. 봉상부는 서주(西周) 이래의 여러 문화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는 공자묘의 석고(石鼓:고대문자를 새긴 10개의 북 모양의 돌)와 카이위안 사[開元寺] 동탑(東塔)에 남아 있는 당대 왕유(王維)·오도현(吳道玄)의 불화(佛畵) 등을 접한 감회를 〈봉상팔관 鳳翔八觀〉에서 읊었다. 봉상부에서의 임기가 끝나 상경한 1065년에 부인 왕씨(王氏)와 사별하고 그녀의 생전 모습을 〈망처왕씨묘지명 亡妻王氏墓地銘〉에 담았다.

 

이듬해 아버지 소순마저 죽자 아버지의 관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상을 치렀다. 탈상(脫喪)하고 상경한 1068년은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로, 참지정사(參知政事:부재상)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가 중앙정부의 물자조달을 합리화하기 위한 균륜법(均輪法), 농촌에 저리자금을 융통하여 빈농을 보호하려는 청묘법(靑苗法) 등

 

이른바 신법(新法)을 시행하던 시기였다. 신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소동파는 감관고원(監官告院)이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업무를 담당하다가 지방 근무를 청하여 저장 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서 근무했고, 이어 밀주(密州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음쉬저우[徐州후저우[湖州] 등지의 지방관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신법으로 인해 고생하는 농민들의 생활상을 시로써 묘사하고는 했다. 후저우 지사(知事)로 있던 1079년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御史臺)에 체포되어 수도로 호송되었다. 이때 어사들의 심문과 소동파의 변명을 담은 기록이 오대시안 烏臺詩案에 남겨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다행히 사형을 면한 그는 100일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황주(黃州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 황강 현[黃岡縣]) 단련부사(團練副使)로 좌천되었다.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황주에 거주할 의무가 지워진 일종의 유형(流刑)이었다. 황주에서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부인은 양잠을 했고, 그는 본래 병영이었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이 땅을 동파(동쪽 언덕)라 이름짓고 스스로를 동파거사라고 칭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그 유명한 적벽부 赤壁賦가 지어진 것도 이곳에서였다.

 

 

1085년 신종이 죽고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신종의 어머니이며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태황후(宣仁太皇后)가 섭정을 시작했다. 그녀는 뤄양[洛陽]에 운둔해 있던 사마광(司馬光)을 불러들여 왕안석 일파가 만든 신법들을 폐지했다. 이때 소동파도 다시 발탁되어 예부랑중(禮部郞中)을 시작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한림학사지제고(翰林學士知制誥) 등의 요직에 올랐다. 그러나 사마광의 신법 폐지가 모역법(募役法)의 폐지에 이르는 등 과격해지자, 소동파는 중서사인이 되어 수도로 올라온 동생과 함께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사마광이 죽고난 후 당쟁이 시작되었고, 선인황태후마저 사망하자 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철종은 신법들을 다시 부활시켰으며, 소동파는 다시 좌천되어 혜주사마(惠州司馬)로 임명되었다. 그에 대한 탄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를 질시하는 정치인들로 인해 하이난 섬[海南島]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주로 거주하던 리족[黎族]과 함께 비참한 생활을 했다. 철종의 죽음으로 휘종(徽宗)이 즉위하면서 제거옥국관(提擧玉局觀)이라는 명예직에 봉해져 상경하던 도중, 큰 병을 얻어 창저우[常州]에서 66세의 생을 마감했다.

 

소동파는 구양수·매요신(梅堯臣) 등에 의해서 기틀이 마련된 송시(宋詩)를 더욱 발전시켰다. 구양수·매요신 이전의 시가 대개 비애(悲哀)를 주제로 해왔던 데 비해서 이 두 사람은 평안하고 고요한 심정을 주로 읊었고, 소동파는 이에서 벗어나 훨씬 적극적·자각적인 관점을 취했다. 즉 인생체험에 대한 시각의 전환을 생활의 지혜로 삼아 인간 불행의 내면에서 자신만이 인식할 수 있는 행복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가 이처럼 비애의 지양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장자의 제물철학, 불교의 묘리(妙理) 등의 사상적 배경 때문이었으며 〈적벽부〉에는 이같은 그의 사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의 시는 자유분방한 심정과 재능의 표현을 통해 경쾌한 리듬 속에 절묘한 비유와 유머를 담고 있다. 제재에 있어서도 특별히 구애받지 않아 이전까지 다른 사람들이 취하지 않았던 것, 간과되어왔던 것들도 시로 썼다. 그의 시는 모든 사람에 대한 폭넓은 애정을 기저에 깔고 있으며, 인간의 욕망을 긍정했고 인간의 선의(善意)를 신봉했다. 그는 사(詞)에서도 기존의 완약(婉約) 대신에 호방한 사풍을 창시했다. '적벽회고'(赤壁懷古)라는 부제가 붙은 〈염노교 念奴嬌〉·〈수룡음 水龍吟〉 등은 영물시(詠物詩)의 극치라 일컬어진다. 한편 산문에서는 당송8대가 중 소씨 부자, 즉 3소가 포함되었다. 동파의 산문은 송대의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이색적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분방함이다. 동파는 작가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와야만 훌륭한 문장이 된다는 청년기의 생각을 평생토록 일관했다. 〈조주한문공묘비 潮州韓文公廟碑〉 등의 비문, 〈유후론 留侯論〉·〈범증론 范增論〉 등의 사론(史論)을 비롯해 많은 산문을 남겨 지금까지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

 

소동파는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의 글씨는 동진(東晋)의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의 정통적인 서법과 당대 안진경(顔眞卿) 일파의 혁신적 서법을 겸비하고 있는데, 그 자신은 글씨 자체보다도 살아 있는 정신과 기백의 표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그는 〈제발 題跋〉이라는 평론에서 해서(楷書)가 모든 서체의 기본이며 서예는 사람 됨됨이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의 글씨로는 유배지 황주에서 쓴 〈한식시권 寒食詩卷〉, 예부상서 시절에 쓴 〈이태백선시권 李太白選詩卷〉 등이 원본으로 남아 있다. 항저우에서 쓴 〈진규각비 宸奎閣碑〉와 같이 탁본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으나, 모두 신품(神品)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필적을 모은 〈서루첩 西樓帖〉도 전해진다. 한편 그의 죽화(竹畵)는 문동(文同)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동파는 그림을 그리는 데 기교를 쓰지 않았으며, 친구들은 그러한 그의 그림에 한 점의 세속성도 보이지 않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왕유의 그림에 대해 "시 속에 그림 있고 그림 속에 시 있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이후 중국 화론사에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이같은 예술 사상과 기교에 대한 무관심은 문인화(文人畵)를 크게 부흥시키는 힘이 되었다. 다른 문인들과는 달리 동파의 시문집은 생전에 이미 간행되어 재판의 물증으로 제출될 정도였다. 〈동파집 東坡集〉 40권과 〈동파후집 東坡後集〉 20권은 남송 데의 판본이 여러 종류 남아 있다. 이 두 책에 〈주의 奏議〉·〈내제집 內制集〉·〈외제집 外制集〉·〈응소집 應詔集〉·〈속집 續集〉을 합친 〈동파칠집 東坡七集〉은 100권이 넘으며, 〈동파전집 東坡全集〉이라 불리기도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