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ㅈ-1 자가당착~ )
1. 자가당착(自家撞着)
스스로 부딪치다. 自己가 한 말이 앞뒤가 맞지 않거나, 言行이 一致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須彌山高不見嶺 : 須彌山은 높아 봉우리도 보이지 않고
大海水深不見底 : 바닷물은 깊어 바닥이 보이지 않네
硽土揚塵無處尋 : 흙을 뒤집고 먼지를 털어도 찾을 수 없는데
回頭撞著自家底 : 머리 돌려 부딪치니 바로 自身이로다
《禪林類聚 看經門》에 실린 南堂靜의 詩다.
이 詩의 마지막 句節에서 ‘自家撞着’이 나왔다. 이 成語는 本來 佛家에서 自己 自身 속에 있는 佛性을 깨닫지 못하고 外部에 虛荒된 目標를 만들어 헤매는 것을 警戒하는 데 쓰인 말이었으나, 後에 뜻이 擴大되어 自己가 한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比喩하는 데 쓰이게 되었다.
2. 자두연기(煮豆燃萁)
煮豆燃萁(자두연기)는 ‘콩을 삶는 데 콩깍지를 태운다’는 뜻으로, 같은 뿌리에서 자란 형제(또는 가까운 사이)가 서로 시기·싸움을 벌이는 상황을 비유
三國 時代의 英雄 조조(曹操)에게는 아들이 여럿이었지만, 그는 自己 뒤를 이을 子息으로 첫째 비(丕)와 셋째 식(植)을 꼽고 있었다. 조비(曹丕)는 性格이 活達하고 武에 能하여 아버지를 따라 戰場을 누빈 反面, 曹植은 天賦的 資質의 詩人이었다. 亂世에 絶對 必要한 武를 갖춘 데다 長男인 탓으로 曹丕가 客觀的 觀點에서 優位를 點하고 있는 것은 事實이지만, 曹操는 오히려 自己의 文學的 資質을 빼어 닮은 셋째를 더 사랑했다.
그런 까닭으로 曹丕의 마음 속에는 自己도 모르는 사이 아우 曹植에 對한 警戒心과 미움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런 눈치를 못 챌 리가 없는 曹植은 曹植대로 마음이 便치 못했다. 이윽고 曹操가 죽은 後 그 자리는 曹丕에게 돌아감으로써 繼承權 問題는 一段落되었지만, 曹丕의 가슴 속 앙금까지 解消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우가 勢力을 形成하지 못하도록 갖은 手段을 다 썼다. 한 番은 여러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曹植에게 이런 엄포를 놓았다.
“寡人의 앞에서 일곱 걸음을 걷되, 그동안에 詩를 한 編 지어 읊도록 하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 重한 罰을 내릴 것이다.”
그것은 單純한 心術이 아니라 天下第一의 文才라고 稱讚이 藉藉한 아우에게 一針을 加하여 猖披를 주려는 術策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曹植은 일곱 걸음을 걸은 後 목청을 가다듬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그것이 有名한 ‘七步詩’다.
煮豆燃豆萁 : 삶는 데 콩깍지를 때니
豆在釜中泣 : 콩은 솥 안에서 우는구나.
本是同根生 : 本來 한 뿌리에서 났거늘
相煎何太急 : 서로 지짐이 어찌 이리 급하뇨.
自己 利益을 지키기 爲해서는 피가 같은 父母兄弟 사이에도 싸우는 人間의 動物性을 잘 表現한 詩이다. 듣고 있던 조비(曹丕)의 눈에도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一時的인 感傷으로 曹丕의 非情함은 그 後로도 變함이 없었고, 조식(曹植)은 繼屬 不憂한 處地에 있다가 恨많은 生을 마감했다.
煮豆燃萁는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는다는 뜻으로, 兄弟間의 아귀다툼을 恨嘆하는 말이다.
3. 자포자기(自暴自棄) 自暴自弃
스스로 해치고 스스로 버리다. 絶望에 빠져서 스스로 포기(抛棄)하는 것을 말한다.
「孟子가 말했다. “스스로 自己를 해치는 사람과는 더불어 이야기할 수 없다. 스스로 自己를 버리는 사람과는 더불어 일할 수 없다. 말로 禮儀를 非難하는 것을 스스로 自己를 해치는 것(自暴)이라고 하며, 내 몸이 仁에 居하고 義에 따르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를 버리는 것(自棄)이라고 한다. 仁은 사람의 便安한 집이고, 義는 사람의 올바른 길이다. 便安한 집을 비워 두고 살지 않고 바른 길을 버리고 行하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孟子曰, 自暴者, 不可與有言也. 自棄者, 不可與有爲也. 言非禮義, 謂之自暴也. 吾身不能居仁由義, 謂之自棄也. 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 曠安宅而弗居, 舍正路而不由, 哀哉.)」
《孟子 離婁 上》에 나오는데, 孟子가 한 말인 ‘自暴’와 ‘自棄’가 合해져서 ‘自暴自棄’가 되었다.
4. 장경오훼(長頸烏喙) 长颈乌喙
긴 목에 까마귀 부리. 긴 목에 까마귀 부리같이 뾰족한 입이라는 뜻으로,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으나 즐거움은 함께 누리지 못할 觀相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吳王 闔閭가 越王 勾踐과 싸우다 죽자 그의 아들 夫差는 復讐의 칼을 갈았다. 이를 알게 된 勾踐이 먼저 夫差를 攻擊하였으나, 도리어 大敗하고 사로잡혔다. 勾踐은 夫差의 奴隸가 되어 夫差를 섬기다 釋放되어 돌아온 後에 쓸개를 맛보면서 亦是 復讐의 칼날을 갈았다. 十如 年이 지난 後, 勾踐은 마침내 吳나라를 쳐서 滅亡시켰다.
越나라가 吳나라를 滅亡시키는 데 가장 큰 貢獻을 한 사람은 범려(范蠡)였다. 范蠡는 20如 年 동안 句踐을 補弼하면서 그를 覇者로 만들었다. 그 功勞로 范蠡는 上將軍이 되었지만, 勾踐이 어려움은 같이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할 人物이 못 된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勾踐에게 作別을 告하고 越나라를 떠나 齊나라로 갔다.
「齊나라에서 그는 自身과 切親했던 越나라의 大夫 種에게 便紙를 썼다. ‘하늘에 새가 다하면 좋은 활도 倉庫에 넣어 두게 되고,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겨 죽으며, 敵國이 亡하면 謀士가 죽는 法이오. 게다가 越王 勾踐의 相은 목이 길고 입은 새 부리처럼 생겼는데, 이런 人物은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으나 즐거움은 함께 누릴 수 없소. 그대는 어째서 떠나지 않는 것이오?’
種은 便紙를 본 後 病을 稱하고 朝會에 나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種이 反亂을 일으키려 한다고 讒訴했다. 越王이 種에게 칼을 주며 말했다. “그대가 寡人에게 吳나라를 치는 일곱 가지 術策을 가르쳐 주어 寡人이 그中에 셋을 써 吳나라를 滅亡시켰다. 나머지 네 가지가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나를 爲해 先王을 따라 試驗해 보라.” 種은 自殺했다.
(范蠡遂去, 自齊遺大夫種書曰, 蜚鳥盡, 良弓藏. 狡兎死, 走狗烹. 越王爲人長頸鳥喙, 可與共患難, 不可與共樂. 子何不去. 種見書, 稱病不朝. 人或讒種且作亂, 越王乃賜種劍曰, 子敎寡人伐吳七術, 寡人用其三而敗吳, 其四在子, 子爲我從先王試之. 種遂自殺.)」
《史記 越世家》에 나온다. 越王 勾踐의 相이 긴 목에 새 부리처럼 뾰족한 입으로,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으나 즐거움은 함께 누릴 수 없다고 한 范蠡의 말에서 由來했다.
中國에서는 原文에 나온대로 ‘長頸鳥喙’를 쓴다. ‘長頸鳥喙’라는 말은 宋나라의 詩人 孫因의 〈越問 · 句踐〉의 다음 句節에서 찾아볼 수 있다. 「(前略) 客이 말했다오. 奇異하도다. 저는 긴 목에 까마귀 부리처럼 뾰족한 입을 가졌구나. 萬若 그와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할 수 있었다면 어째서 鸱夷는 멀리 避했을꼬?
(客曰 異哉兮彼長頸而烏喙, 其如可與其樂兮, 何鴟夷之遠避)」
鴟夷는 范蠡를 말한다. 그는 齊로 가서 이름을 鴟夷子皮로 바꾸었다.
5. 재점팔두(才占八斗)
才能이 <한 섬 가운데> 여덟 말을 차지한다. 學問이 높고 글재주가 아주 뛰어난 것을 比喩
曹植은 字가 子建으로, 魏武帝 曹操의 三男이며 魏文帝 曹丕의 同生이다. 曹植은 어려서부터 聰明하고 文才가 뛰어나 아버지 曹操의 사랑을 받았다. 曹操는 한때 曹植을 後嗣로 삼을 생각까지 했었다. 그 때문에 曹植은 曹丕의 嫉猜와 彈壓으로 生活이 不安定해지고 生命의 威脅까지 받는 處地가 되었다. 더욱이, 조카인 曹睿가 卽位한 後에는 더욱 甚한 打擊을 받게 되었다. 大體로 이 時期에 나온 그의 作品은 支配 階層 사이의 暗鬪와 葛藤, 그리고 民衆의 哀歡과 그에 對한 同情을 그린 것들이 많다. 只今까지 傳해 내려오는 그의 作品은 많지는 않지만 代代로 다른 作家들로부터 높은 評價를 받아 왔다. 南朝時代 宋나라의 詩人 謝靈運은 曹植에 對하여 이렇게 評價했다.
天下의 글才주를 모두 한 섬이라 한다면 曹子建 혼자서 여덟 말을 차지하고, 내가 한 말을 차지하고, 예로부터 只今까지의 사람들이 모두 한 말을 가지고 쓰고 있다.
(天下才共一石, 曹子建獨得八斗, 我得一斗, 自古及今共用一斗.)
* 釋常談에.
謝靈運의 말에서 ‘才占八斗’라는 말이 나왔는데, 八斗之才라고도 한다.
6. 전국옥새(傳國玉璽) 传国玉玺
나라에서 나라로 傳한 玉으로 만든 圖章<옥새(玉璽)>. 國家를 象徵하는 국새(國璽)를 말한다.
BC221年, 그동안 對峙했던 여섯 나라를 完全히 滅하고 全 中國을 統一하여 歷史上 첫 番째 中央執權的 封建國家인 秦 王朝를 세운 秦王 嬴政은 스스로 始皇帝라 稱하여 歷代 王들과 差別化를 꾀했다.
秦始皇은 王權을 强化하고 强한 統一 王朝를 이룩하기 爲해 强力한 中央執權制(郡縣制)를 實施하고, 文字 · 貨幣 · 度量衡 等을 統一했으며, 皇室 專用語를 制定했다. 皇室 專用語 中에 ‘璽’가 있는데, 이는 元來 ‘圖章’을 意味하는 글字였으나 秦始皇은 皇帝의 圖章에 限해서만 이 用語를 使用하도록 했다. 그리고 李斯에게 命하여 傳說的인 寶物인 和氏之璧으로 ‘하늘에서 命을 받았으니 오래토록 가고 永遠히 昌盛하라.’라는 뜻을 가진 ‘受命於天旣壽永昌’이라고 새긴 玉璽를 만들게 했다.
이 玉璽는 始皇帝의 孫子인 子嬰이 劉邦에게 나라를 들어 降服하면서 함께 바쳤으며, 劉邦이 中國을 統一한 뒤 漢나라 皇帝에게 代代로 傳해졌는데, 이때부터 ‘傳國玉璽’라는 名稱을 使用하게 되었다. 前漢의 皇爲를 簒奪하고 新나라를 세운 王莽이 暫時 이 玉璽를 빼앗았으나, 後漢을 세운 光武帝가 되찾았다. 玉璽는 後漢 末年의 混亂期에 遺失되었다가 孫堅과 袁術을 거쳐 曹操의 손에 들어갔다. 以後 魏晉南北朝를 거쳐 隋나라와 唐나라, 그리고 五代十國 時代의 後梁과 後唐까지 傳해지다가 後唐의 마지막 皇帝인 廢帝 李從珂가 焚身할 때 사라진 것으로 傳해지고 있다. 그 後 몇 차례에 걸쳐 傳國玉璽를 찾았다는 消息이 傳해졌지만, 모두 眞짜가 아닌 것으로 判明되었다.
和氏璧의 出沒에도 傳說的인 이야기가 뒤따랐듯이 和氏璧으로 만든 이 傳國玉璽에도 神秘를 더해 주는 傳說이 붙어 있다. 始皇帝가 배를 타고 洞庭湖 어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風浪이 일어 배가 뒤집힐 뻔하였다. 始皇帝가 遑急히 玉璽를 湖水에 던지고 神靈께 빌자 물결이 潛潛해졌다. 8年 뒤, 始皇帝의 使臣이 華陰 (陝西省 華陰市 東南) 地方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밤에 어떤 사람이 忽然히 나타나 使臣의 길을 가로막고, 龍王이 돌아가셨기에 돌려준다며 玉璽를 놓고 바람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7. 전도유랑(前度劉郎) 前度刘郎
지난번의 劉郎. 한 번 떠났다가 다시 찾아온 사람을 比喩
中唐때의 詩人 劉禹錫은 王叔文 柳宗元 等과 더불어 政治 改革을 꾀하다가 失敗하여 郎州의 司馬로 左遷되어 10年 가까이 지내다가 다시 長安으로 불려 왔다. 劉禹錫은 복사꽃으로 有名한 玄都觀이라는 道觀을 찾아갔다가 感懷가 일어 遊玄都觀 이라는 詩를 지었다.
紫陌紅塵拂面來 : 繁華한 거리 뿌연 먼지 얼굴을 스치는데
無人不道看花回 : 사람마다 꽃구경하고 돌아온다 말하네.
玄都觀裏桃千樹 : 玄都觀에 심은 千 그루 복숭아나무는
盡是劉郎去後栽 : 모두 劉郞이 떠난 뒤에 심어진 것이라네.
그런데 이 詩가 當時 執權者들을 隱然中에 誹謗했다는 혐의(嫌疑)를 받게 되었다. 劉禹錫이 이 詩에서 言及한 복숭아나무가 바로 새로 발탁(拔擢)된 高官大爵들을 풍자(諷刺)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劉禹錫은 다시 播州刺史로 左遷되었다. 當時 劉禹錫의 老母는 80如 歲였다. 播州(貴州省 遵義縣)는 멀리 떨어진 편벽(偏僻)한 고장이었으므로, 老母를 모시고 있는 劉禹錫은 어머니를 홀로 두고 갈 수도, 모시고 갈 수도 없는 困難한 狀況에 處하게 되었다. 이 當時 柳宗元도 柳州刺史로 發令이 났는데, 劉禹錫의 이런 딱한 事情을 알았기에 親舊를 돕기로 決心하고 發令地를 서로 바꾸어 달라고 上疎文을 올렸다. 柳宗元의 親舊 爲하는 마음이 많은 사람을 感動시켰다. 裴度도 皇帝에게 奏請하자, 憲宗은 劉禹錫을 連州 (廣東省 連縣)刺史로 보냈다. 그 後 劉禹錫은 14年 동안 여러 地方을 轉轉했다. 그러다가 裴度가 宰相이 되자 裴度는 劉禹錫을 長安으로 불러들였다. 劉禹錫이 長安으로 돌아왔을 때는 늦은 봄이었다. 그는 복숭아나무를 보기 爲해 玄都觀을 다시 찾았는데, 예前에 茂盛하였던 복숭아나무는 모두 없어지고 菜蔬 꽃만 茂盛히 피어 있는 것을 보고 感懷에 젖어 再遊玄都觀이라는 詩를 지었다.
百畝庭中半是苔 : 玄都觀 넓은 뜰엔 이끼가 殆半의
桃花淨盡菜花開 : 桃花는 사라지고 菜蔬 꽃만 피었구나.
種桃道士歸何處 : 복숭아 심던 道士는 어디로 갔는가!
前度劉郎今又來 : 지난번의 劉郞은 只今 또 왔는데.
‘劉郞’은 劉禹錫 自身을 指稱한 말이다. 여기서 由來하여 ‘前度劉郎’은 한 番 떠났다가 다시 찾아온 사람을 比喩하거나, 예前에 왔던 곳을 오랜만에 다시 찾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8. 전전긍긍(戰戰兢兢) 战战兢兢
몸을 움츠리고 벌벌 떠는 貌樣. 怯을 먹고 벌벌 떨거나 쩔쩔맨다는 뜻으로, 危機를 맞이하여 절박해진 心情을 比喩
不敢暴虎 : 敢히 맨손으로 범을 잡지 못하고
不敢憑河 : 敢히 걸어서 黃河도 못 건너네.
人知其一 : 사람들은 그 中 하나는 알지만
莫知其他 : 그 밖의 것들은 알지 못한다네.
戰戰兢兢 : 두려워서 벌벌 떨며 操心하기를
如臨深淵 : 깊은 蓮못에 臨한 것같이 하고
如履薄氷 : 살얼음 밟듯이 해야 하네.
* 詩經 · 小雅 小旻에. 201. 小旻(소민)-시경 소아(詩經 小雅)
이는 周나라 末期의 惡政을 慨歎한 詩로 西周의 暴君 幽王을 諷刺한 作品이라고 하는데, 그 뚜렷한 根據는 없다. ‘戰戰’은 몹시 두려워서 벌벌 떠는 貌樣이고, ‘兢兢’은 몸을 움츠리고 操心하는 貌樣을 말한다.
9. 전전반측(輾轉反側) 辗转反侧
누워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 밤새도록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比諭
關關雎鳩 : 꾸욱 꾸욱 우는 물수리
在河之洲 : 黃河의 모래톱에 있듯이
窈窕淑女 : 얌전하고 고운 아가씨
君子好逑 : 사나이의 좋은 짝
參差荇菜 : 올망졸망 조아기(노랑머리연꽃)
左右流之 : 이리저리 찾듯이
窈窕淑女 : 얌전하고 고운 아가씨
寤寐求之 : 자나 깨나 求하지요
求之不得 : 求해도 못 얻으니
寤寐思服 : 자나 깨나 생각하네
悠哉悠哉 : 그리워 그리워
輾轉反側 : 엎치락뒤치락
* 詩經 · 國風 · 周南 關雎에. 01 關雎(관저)-詩經(시경)
‘輾轉反側’은 原來 아리따운 아가씨를 그리며 잠 못 이루는 것을 表現한 말이었으나, 後에는 근심 걱정을 하면서 몸을 뒤척이고 잠을 못 이룬다는 뜻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關雎〉는 周나라 文王과 그의 아내 太姒(태사)의 德을 稱頌한 것이라고도 하고, 어여쁜 處女를 짝사랑하는 노래라고도 하며, 臣下가 文王과 太姒의 結婚을 祝賀하는 노래라고도 하고, 太姒가 文王을 爲해 美女를 求했으나 뜻과 같지 않아 근심하는 노래라 보는 見解도 있다.
10. 전철(前轍)
宋의 大文豪 '三蘇'는 父, 蘇洵과 子, 蘇軾(東坡), 蘇轍 '三父子'를 말한다.
蘇洵의 아들 이름 字에 수레와 關聯된 軾과 轍을 썼다.
'軾'은 수레 앞에 가로로 걸치는 나무를 뜻하며 이 나무는 있어도, 없어도 될 것 같아 보이나 없어선 안되는 道具이다. 티내지 않고 반드시 必要한 사람이 되라는 意味를 담고 있고, 蘇軾도 그렇게 살았다.
'轍'은 수레의 바퀴자국을 뜻하며 禍福을 左右하는 機能을 가지고 있다.
前轍은 앞 수레가 남긴 바퀴자국으로 이며, '前轍을 밟지말라'는 말로 引用되는데, 이는 앞의 잘못 난 자국을 따라 구르면 禍를 自招하니 避하란 意味다.
사람들도 이러한 잘못 된 前轍을 밟아, 汚名을 뒤집어 쓰고 人生을 亡친 境遇가 許多하였다.
산과바다 이계도
'**한자성어(漢字成語)** > 고사성어(故事成語)'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사성어(故事成語) (ㅈ- 3 조명시리~ ) (0) | 2026.03.07 |
|---|---|
| 고사성어(故事成語) (ㅈ- 2 전화위복~ ) (0) | 2026.03.07 |
| 고사성어(故事成語) (ㅇ- 11 일이관지~ ) (4) | 2026.03.07 |
| 고사성어(故事成語) (ㅇ- 10 일명경인~ ) (0) | 2026.03.07 |
| 고사성어(故事成語) (ㅇ- 9 이포역포~ ) (0) | 2026.03.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