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ㅇ- 10 일명경인~ )
91. 일명경인(一鳴驚人) 一鸣惊人
한 번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한다. 한 번 始作하면 사람을 놀라게 할 程度의 大業을 이룩하는 것을 比諭
「순우곤(淳于髡)은 齊나라 사람의 데릴사위였다. 그는 키가 일곱 자도 안 되지만 익살스럽고 辯說에 뛰어나 諸侯들에게 자주 使臣으로 갔으나 屈辱을 當한 일이 한 番도 없었다. 齊나라 威王은 수수께끼를 좋아하고 淫蕩하게 밤새도록 술 마시기를 즐겨 술에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政治를 卿大夫에게 맡겨 버렸다. 그리하여 文武百官들은 紊亂해지고 諸侯들이 同時에 侵略하여 나라의 存亡이 아침저녁으로 切迫한 地境에 놓였다. 그런데도 左右에서 敢히 諫言하는 者가 없었다.
이때 淳于髡이 威王에게 수수께끼를 내어 물었다. “나라 안에 큰 새가 있는데, 王의 뜰에 멈추어 있으면서 三 年이 지나도록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있습니다. 이 새가 무슨 새인지를 모르겠습니다.” 王이 對答했다. “이 새는 날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한 番 날았다 하면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울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한 番 울었다 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淳于髡說之以隱曰, 國中有大鳥, 止王之庭, 三年不蜚又不鳴, 不知此鳥何也. 王曰, 此鳥不飛則已, 一飛衝天. 不鳴則已, 一鳴驚人.)
威王은 各 縣의 縣令과 縣長 72名을 朝廷으로 불러들여, 그 中 한 卽墨大夫에게는 賞을 주고 한 사람 阿大夫는 死刑에 處한 뒤 兵士들의 士氣를 일으켜 出征했다. 諸侯들은 크게 놀라 그동안 侵略하여 빼앗아 갔던 齊나라 땅을 모두 돌려주었다. 그 뒤로 36年間이나 齊나라의 威嚴이 떨쳐졌다. 이 일은 田敬仲完世家에 記錄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史記 滑稽列傳》에 나온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史記 楚世家》와 《呂氏春秋 審應覽》에 나오는데, 齊威王보다 약 250年 前 사람인 楚莊王과 伍擧가 對話한 것으로 되어 있다.
92. 일모도원(日暮途遠) 日暮途远
날은 저물고 가야 할 길은 멀다. 할 일은 많은데 時間이 없는 것을 比喩
吳王 闔閭를 輔弼하여 覇者로 만든 伍子胥의 집안은 元來 6代에 걸쳐 楚나라에 忠誠을 바친 傳統을 자랑하는 家門이었다. 伍子胥의 아버지 伍奢는 楚나라 平王의 臣下였다. 當時 平王에게는 建이라는 太子가 있었다. 平王은 伍奢를 太子 建의 太傅로, 費無忌를 少傅로 任命했는데, 費無忌는 太子 建에게 不誠實했다. 얼마 後, 平王은 太子妃를 秦나라에서 맞아 오기 爲해 費無忌를 秦나라에 보냈다. 秦나라 公主가 美人인 것을 본 費無忌는 말을 달려 돌아와 平王에게 秦나라의 公主를 太子에게 주지 말고 直接 聚하라고 建議했다. 平王은 秦나라 公主를 가로챘으며, 그女를 더없이 사랑하여 아들 軫을 낳았다. 太子에게는 따로 妃를 맞게 해 주었다. 이 功勞로 費無忌는 平王을 모시게 되었다.
하지만 平王의 死後가 걱정이었다. 太子가 王이 되면 自己 목숨이 危殆로워질 것이므로 怯이 난 나머지 太子 建을 中傷하기 始作했다. 平王은 漸漸 太子 建을 멀리하더니 마침내는 邊境인 성보(城父) 太守로 任命하여 國境을 지키게 했다. 費無忌는 繼續해서 王에게 太子를 讒訴했다. “太子는 秦나라 公主의 일로 分明히 怨恨을 품었을 것입니다. 王께서는 太子를 警戒하셔야 합니다. 太子는 城父에서 軍隊를 거느리고 있으므로 때가 되면 諸侯들과 交際를 맺고 首都로 쳐들어와 叛亂을 일으킬 것입니다.” 平王은 費無忌의 讒訴에 넘어가 卽時 太子의 太傅인 伍奢를 불러들여 事實을 追窮했다. 伍奢는 費無忌가 太子를 王에게 讒訴한 것을 알았으므로 直言을 아끼지 않았다. “王께서는 어찌하여 讒訴로써 사람을 害치려는 小人輩의 말을 믿으시고 親子息을 멀리하려 하십니까?” 목숨을 걸고 太子를 除去해야 하는 立場에 서 있는 費無忌는 必死的으로 나왔다. “王께서 只今 當場 이를 막지 못해 일이 이루어지는 날이면 結局 捕虜가 되실 뿐입니다.” 平王은 卽時 伍奢를 獄에 가두고, 城父의 司馬 (軍政官)인 奮揚에게 太子를 잡아 죽이라고 命令했다. 奮揚은 命令을 받고 떠나면서 太子에게 사람을 미리 보내 逃亡치라고 알려 줬다. 太子 建은 宋나라로 逃亡했다.
太子를 내쫓은 費無忌는 다음 차례로 伍奢 一家를 指目했다. “伍奢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모두 賢明합니다. 只今 죽이지 않으면 앞으로 楚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의 아비를 人質로 잡아 그들을 불러들이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楚나라의 禍가 될 것입니다.” 王은 獄中의 伍奢에게 두 아들을 불러들일 것을 命令했다. 勿論 불러들이면 伍奢의 목숨을 살려 준다는 條件이었다. 伍奢가 拒絶하자 王은 사람을 보내 두 아들을 불렀다. 큰아들 伍尙이 가려 하자 작은아들 伍子胥가 말렸다. “楚나라에서 우리 兄弟를 부르는 것은 우리 아버지를 살려 주기 爲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兄弟가 後患이 될까 두려워 아버지를 人質로 잡아 우리 둘을 불러들이려는 것입니다. 가는 날이면 父子가 함께 죽고 말 뿐 조금도 아버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가면 아버지의 怨讐마저 갚지 못하게 됩니다. 다른 나라로 달아나 힘을 빌려 아버지의 怨讐를 갚는 것만 못합니다. 父子가 함께 죽는 것은 아무런 意味도 없습니다.” 伍尙은 同生 伍子胥에게 아버지의 怨讐를 갚아 달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아버지와 함께 죽기 爲해 自進해서 獄에 갇혔다. 伍子胥는 逃亡쳐 宋나라에 있는 太子 建에게로 갔다. 伍尙이 首都로 護送되자 平王은 伍奢와 伍尙 父子를 함께 處刑해 버렸다.
伍子胥가 宋나라에 到着한 直後에 宋나라에서는 때마침 反亂이 일어났으므로, 伍子胥는 太子 建과 함께 鄭나라로 달아났다. 鄭나라에서는 太子 建을 極盡히 禮遇해 주었으나, 鄭나라는 작은 나라라서 힘이 되어 줄 수 없다고 생각한 太子 建은 晉나라로 떠났다. 太子 建이 鄭나라와 親한 사이로, 鄭나라의 信賴를 받고 있다는 事實을 안 晉頃公은 그를 利用해 鄭나라를 滅亡시킬 計劃을 세우고 太子 建을 부추겼다. 晉頃公은 太子 建이 안에서 內應하고 晉나라가 밖에서 攻擊하여 鄭나라를 滅亡시키면, 그곳에 太子 建을 封하겠다는 條件을 내걸었다. 太子는 慾心을 품고 다시 鄭나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런 事實을 알고 있는 그의 從者가 鄭나라 朝廷에 이 陰謀를 告發해 버렸다. 그 從者는 어떤 일로 太子에게 죽임을 當할 處地에 놓이게 되자 自身이 살기 爲해 저지른 짓이었다. 鄭나라에서는 太子 建을 誅殺하고 말았다. 伍子胥는 建의 아들 勝을 데리고 허둥지둥 吳나라를 向해 달아났다. 하지만 國境 地帶에 이르러 關門을 지키는 官吏에게 쫓겼으므로 할 수 없이 勝과 헤어져 혼자 逃亡했다. 追擊者에게 쫓기던 伍子胥는 가까스로 江水에 이르러서 한 漁夫의 도움을 받아 겨우 危急한 狀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伍子胥는 江을 건너자마자 차고 있던 一百 金의 값어치가 나가는 칼을 끌러 漁夫에게 謝禮했다. 漁夫는 칼을 받지 않았다. “楚나라에 이런 榜이 붙었소. 伍子胥를 잡는 사람에게는 粟 5萬 섬과 執珏 (楚나라 最高의 爵位)의 벼슬을 준다고 말이오. 만일 내게 慾心이 있었다면 그런 一百 金의 칼이 問題겠소?”
伍子胥는 吳나라에 들어섰으나 都城으로 가는 途中 病에 시달리고, 乞食을 하는 等 甚한 苦生을 겪었다. 伍子胥는 將軍인 公子 光을 通해 吳王 僚를 謁見했다. 오랜 時間이 지난 後, 吳나라와 楚나라 사이에 紛爭이 일어났다. 兩國의 國境 地帶에 있는 고을이 함께 누에를 치고 있었는데, 兩쪽 女子들이 뽕 때문에 是非를 한 것이 原因이 되어 두 고을이 서로 攻擊을 했고, 이것이 兩國 間의 戰爭으로 擴大된 것이다. 吳나라는 公子 光을 시켜 楚나라를 치게 했다. 公子 光은 國境 地帶 一部 고을을 陷落시킨 다음 돌아왔다. 伍子胥는 吳王 僚에게 이 機會에 公子 光을 보내 楚나라를 繼續 攻擊하라고 建議했다. 公子 光은 伍子胥가 自身의 怨讐를 갚기 爲해 楚나라와의 戰爭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把握하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戰爭을 反對했다. 이런 公子 光의 反應을 보고 伍子胥는 그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公子 光은 王을 죽이고 自身이 王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只今은 外部의 問題를 말해 보아야 所用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伍子胥는 專諸라는 刺客을 公子 光에게 薦擧하고, 自身은 물러나 太子 建의 아들 勝과 함께 들판에서 農事를 지으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5年 後 楚平王이 죽었다. 그리고 앞서 太子妃가 될 뻔했다가 平王의 妃가 된 秦나라 公主의 아들 軫이 그 뒤를 이어 王이 되었으니, 그가 곧 昭王이다. 吳王 僚는 楚나라의 國喪을 틈타 두 公子(僚의 아우 蓋餘와 燭庸)를 시켜 楚나라를 奇襲 攻擊하게 했지만, 두 公子는 오히려 退路를 遮斷當하고 말았다. 吳나라의 軍隊가 楚나라를 치기 爲해 出兵하여 國內가 텅 비다시피 되자 公子 光은 刺客 專諸를 시켜 吳王 僚를 찔러 죽이고 스스로 王位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春秋五覇의 한 사람인 閤閭이다. 闔閭는 卽時 伍子胥를 불러들여 行人 (外交 顧問)에 任命하고 함께 國事를 꾀했다. 이럴 즈음 楚나라의 大臣 伯州犁 父子가 誅殺되고, 그의 孫子인 伯嚭가 吳나라로 亡命해 왔다. 闔閭는 그를 大夫에 任命했다. 한 便, 앞서 楚나라를 攻擊하러 갔다가 退路를 遮斷當하고 困境에 處하게 된 두 公子는 公子 光이 吳王 僚를 죽이고 王이 되었다는 말을 듣자, 軍士를 거느리고 楚나라에 降服해 버리고 말았다. 楚나라는 그들을 舒 땅에 封했다.
吳王 闔閭는 卽位 3年 後에 軍士를 일으켜 伍子胥, 伯嚭 等과 함께 楚나라를 쳐서 書를 陷落시키고, 楚나라에 投降했던 두 公子를 사로잡았다. 闔閭와 伍子胥는 이 番 機會에 楚나라의 首都 郢(영)까지 쳐들어가고 싶었으나, 百姓들이 戰爭에 지쳐 있어 아직 때가 아니므로 좀 더 기다리자는 孫武의 意見에 따라 軍士를 물리고 돌아왔다.
闔閭 6年(BC510), 이番에는 楚나라의 軍隊가 吳나라를 侵攻했다. 闔閭는 伍子胥에게 이를 맞아 싸우게 했다. 伍子胥는 楚나라 軍隊를 크게 쳐부수고 楚나라의 居巢 (安徽省 巢湖市 東北)를 占領했다.
闔閭 9年(BC507), 伍子胥에게 드디어 復讐의 機會가 왔다. 闔閭가 伍子胥, 孫武 等과 相議를 通해 大大的으로 楚를 치기로 決定한 것이다. 闔閭는 먼저 楚나라의 屬國이면서도 楚나라와 怨恨 關係가 깊은 唐, 蔡와 聯合하고, 國內의 모든 軍士를 動員하여 楚나라로 쳐들어갔다.
「吳나라 軍隊는 破竹之勢로 楚나라의 首都 郢을 占領했다. 昭王은 首都 郢을 脫出하여 逃亡했다. 伍子胥는 昭王을 잡으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자 代身 平王의 무덤을 파헤쳐 屍體를 꺼내 300番이나 매질을 한 後에야 그쳤다. 山中으로 避亂 갔던 楚의 大夫 申包胥가 사람을 보내 伍子胥에게 말했다. “그대의 復讐는 너무 甚하지 않은가. 사람의 數가 많으면 하늘을 이길 수 있지만, 하늘이 決定을 내리면 사람을 깨뜨릴 수 있다고 들었다. 그대는 옛날에는 平王의 臣下로서 몸소 北面하여 그를 섬겼는데 이제 죽은 사람을 辱보였으니 어찌 天道가 없는 것의 極이 아니겠는가?” 伍子胥가 말했다. “부디 申包胥에게 잘 傳해라. 해는 지고 길은 멀기 때문에 갈팡질팡 걸어가며 앞뒤를 分揀할 겨를이 없었다고.”
(及吳兵人郢, 伍子胥求昭王, 旣不得, 乃掘楚平王墓, 出其尸, 鞭之三百, 然後已. 申包胥亡於山中. 使人謂子胥曰, 子之報讎, 其以甚乎. 吾聞之, 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 今子故平王之臣, 親北面而事之. 今至於僇死人. 此豈其無天道之極乎. 伍子胥曰, 爲我謝申包胥曰, 吾日暮途遠, 吾故倒行而逆施之.)」
이 이야기는 《史記 伍子胥列傳》에 나온다. ‘日暮途遠’과 비슷한 말로는, 날은 저물고 길은 다했다는 뜻으로 末路가 닥쳐온 것을 比喩하는 말인 日暮途窮, 窮途暮日, 等이 있다. 이 이야기에서 ‘倒行逆施’도 由來했다.
93. 일사천리(一瀉千里) 一泻千里
한 번 쏟아진 물이 千 里를 가다. 말이나 글이 거침없거나, 어떤 일이 거침없이 進行되는 것을 比喩
「긴 江과 큰 물이 한 番 흘러 千 里를 가는 것은 조금도 怪異해할 일이 아니다.(長江大河一瀉千里, 不足多怪也.)」
* 宋나라 陳亮의 -與辛幼安殿撰에.
긴 江은 長江을, 큰 물은 黃河를 말한다. 中國의 南方에서는 큰 물을 江이라 하고, 北方에서는 河라 했다. ‘一瀉千里’는 다음의 典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파른 峽谷 안으로 가벼운 배가 霎時間에 一瀉千里로 내려간다.(儼然峽裡輕舟, 片刻一瀉而千里.)」
* 淸나라 黃六鴻의 福惠全書에.
‘一瀉千里’는 李白의 詩 (贈從弟宣州長史昭)의 다음 句節에서 그 元形을 찾아볼 수 있다.
「긴 내는 中流에서 시원스럽게 터져 千 里를 흘러 吳나라 都會地로 흘러들어 간다.(長川豁中流, 千里瀉吳會.)」
94. 일신시담(一身是膽) 一身是胆
온몸이 쓸개다. 膽이 큰 것을 比喩
曹操가 劉備의 根據地인 漢中을 빼앗기 위하여 北山으로 軍糧을 輸送하였는데, 그 數가 엄청났다. 蜀의 將帥인 黃忠이 이를 빼앗으려고 出兵하자, 趙子龍도 軍士를 이끌고 뒤를 따랐다. 黃忠이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趙子龍은 數十 名의 輕騎兵만 이끌고 黃忠 等을 찾아 나섰다. 이때 曹操는 大軍을 出兵시켰고, 趙子龍은 敵의 先鋒으로부터 攻擊받아 戰鬪가 벌어졌다. 敵의 大軍이 밀려들어 形勢가 크게 不利하였으므로 趙子龍은 한便으로는 싸우면서 한便으로는 退却하였다. 趙子龍은 一旦 包圍網을 뚫었으나 我軍 將帥 張著가 負傷을 입자 말머리를 돌려 그를 救하였다.
「曹操軍이 追擊하여 周圍를 구름처럼 둘러싸자, 沔陽을 지키던 張翼은 城門을 닫고 守備에 置重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趙雲 (趙子龍)은 我軍의 陣營 안으로 들어온 뒤 오히려 城門을 활짝 열고 깃발을 누이고 북소리를 멈추게 하였다. 曹操의 軍士들은 趙雲이 伏兵을 두고 自身들을 誘引하려는 것으로 생각하고 서둘러 退却하였다. 趙雲은 이 틈을 타 卽時 攻擊 命令을 내렸다. 進擊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화살을 비 오듯 쏘아 대자 曹操軍은 놀라 다투어 逃亡하다 서로 밟고 밟혔으며, 漢水에 빠져 죽은 者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程度였다. 劉備가 다음 날 趙雲의 陣營에 와 어제의 싸움터를 둘러보고 말했다. “子龍은 온몸이 膽이로구나.”
(公軍追至圍, 此時沔陽長張翼在雲圍內, 翼欲閉門拒守, 而雲入營, 更大開門, 偃旗息鼓. 公軍疑雲有伏兵, 引去. 雲雷鼓震天, 惟以戎弩於後射公軍, 公軍驚駭, 自相蹂踐, 墮漢水中死者甚多. 先主明旦自來至雲營圍視昨戰處曰, 子龍一身都是膽也.)」
《三國志 · 蜀書 趙雲傳》에 나오는데, 劉備가 趙雲을 보고 한 말에서 ‘一身是膽’이 由來했다. 이 이야기에서는 이 外에도 깃발을 내리고 북소리를 멈춘다는 뜻으로, 敵의 눈에 띄지 않도록 秘密裏에 作戰을 펴거나 休戰하는 것을 比喩하는 말인 ‘偃旗息鼓’도 由來했다.
95. 일언구정(一言九鼎)
말 한마디가 가마솥 아홉보다 무겁다.
戰國時代 趙나라의 平原君은 强力한 秦나라의 攻擊에 直面하여 楚나라와 同盟을 맺고자 했다.
楚나라로 갈 隨行員을 選拔하는 過程에서 모두에게 無視當하던 無名의 毛遂가 스스로를 自薦하여, 數많은 人才를 제치고 拔群의 活躍을 펼쳤다.
이에 平原君은 말했다.
"毛遂 先生이 한 番 楚나라에 가니 趙나라는 가마솥 아홉과 宗廟의 큰 鐘보다 무거워졌고, 毛遂 先生의 세 치 혀는 百萬 軍士보다 强했소.
(毛先生一至楚,而使趙重於九鼎大呂. 毛先生以三寸之舌,彊於百萬之師)"
여기에서 '말 한마디가 가마솥 아홉보다 무겁다(一言九鼎)라는 成語가 派生되었다.
平原君은 戰國時代 末葉에 趙나라의 여러 公子 中 한사람인데, 선비를 좋아하여 食客이 3,000名에 달했다. 當時 가장 强力한 秦나라가 趙나라를 侵攻하여 首都 邯鄲을 包圍했으므로, 趙나라는 매우 危險에 處했다.
이에 趙나라 國王은 平原君에게 楚나라에 가서 도움을 要請하고 合縱을 하도록 했다. 이에 平原君은 食客 中에서 20名을 選拔하여 楚나라를 가려고 했으나 19名만 뽑고 한 名을 뽑지 못했는데, 毛遂라는 食客이 스스로 가겠다고 (毛遂自薦)하여 20名을 데리고 楚나라에 갖다. 楚나라에 到着한 平原君은 楚나라 王을 說得하는데 失敗하였을 때 毛遂가 나서서 楚나라 王을 說得하는데 成功했다.
平原君은 合縱을 決定짓고 趙 나라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시는 敢히 선비를 고르지 않겠다. 내가 지금까지 선비를 고른 數는 많다면 千 名이 되겠고, 적어도 百如 名은 될 것이다. 나는 스스로 天下의 선비를 잃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番 毛遂先生의 境遇에는 失手하였다.
毛遂 先生은 한 番 楚나라에 가서 趙나라를 九鼎이나 大呂 (周나라가 만든 큰 鐘)보다도 무겁게 만들었다. 毛遂 先生의 세 치 혀는 軍士 百萬 名보다도 强했다. 나는 敢히 다시는 人物을 評價하지 않겠다.”
그리고는 마침내 毛遂를 上客으로 삼았다.
(平原君已定從而歸,歸至於趙,曰:「勝不敢複相士. 勝相士多者千人,寡者百數,自以為不失天下之士,今乃於毛先生而失之也. 毛先生一至楚,而使趙重於九鼎大呂. 毛先生以三寸之舌,彊於百萬之師. 勝不敢複相士」遂以為上客)
* 史記 第76卷 平原君虞卿列傳에.
96. 일엽지추(一葉知秋)
나뭇잎 한 잎을 보고 가을이 옴을 알다.
나뭇잎 한 잎(一葉)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온 것을 안다(知秋)는 말은 작은 움직임만 보고도 全般的인 變化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豫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가만히 앉아서 天下의 움직임을 感知한다는 天里眼을 갖지 않았더라도 豫知力은 뛰어난 사람이다.
하지만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봄이 온 것은 아니다’라는 英國 格言이 말해주는 것처럼 些少한 證據를 가지고 全體를 把握하지 말라는 警告도 담고 있다.
이처럼 重義的으로 쓰이는 成語가 나타나는 곳은 많다.
‘文錄’이라는 冊에 唐나라 無名詩人의 詩句라며 引用한
‘山僧不解數甲子 一葉落知天下秋
山 속 스님은 歲月을 헤아리지 않고도, 落葉 하나로 天下에 가을이 왔음을 안다’가 有名하다.
같은 唐나라 李子卿의 ‘聽秋蟲賦’라는 詩에는
‘一葉落兮天地秋
(나뭇잎 한 잎이 떨어지니 天地는 가을이네)’라는 句節도 있다.
또 中國 前漢의 劉安이 쓴 ‘淮南子’에는 고깃국이 끓고 있는데 그 맛이 궁금하다면 국을 다 먹어야 그 맛을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며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를 보면 한 해가 將次 저물려는 것을 알 수 있고, 甁 속의 물이 언 것을 보면 天下가 곧 추워지리라는 것을 안다고 했다.
(見一葉落而知歲之將暮 覩甁中之氷而天下之寒)
朝鮮 後期의 文臣 心庵 趙斗淳도 비슷하지만 더 멋진 詩句를 남겼다.
‘梧桐 한 잎 날리자 天下가 가을이라, 가을바람 가을비만 외로운 樓閣에 가득하네.
(一葉梧飛天下秋 秋風秋雨滿孤樓)
成語의 뿌리야 어떻든 銳敏한 感知力은 恒常 간직하는 것이 좋지만 또 한편으로 한 部分만 가지고 일을 處理하는 어리석음도 警戒해야 한다는 敎訓을 준다.
짧은 가을은 今方 지나쳐 버릴 테니 이젠 結實을 생각하여 거두어들이고 貯藏하는
寒來暑往 秋收冬藏의 千字文 句節도 생각해 봄직하다.
97. 일일삼성(一日三省)
일일삼성(一日三省)은 ‘하루에 세 가지를 살피며 반성한다.’는 뜻이다.
孔子의 弟子 中에 魯나라 曾子는 孝幸이 남달랐다.
그의 逸話 中에 한 番은 참외밭을 메다가 잘못하여 뿌리를 뽑았는데 그의 아버지가 操心性이 없다며 몽둥이로 등을 후려쳤다. 暫時 昏絶을 하였다 일어나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웃었고, 일이 끝나고 歸家해서도 自己 房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신나게 노래를 불렀으며, 때린 아버지를 미워하기보다 怒엽게 만든 自身을 나무라며 父親의 健康을 念慮하였다.
또 齊나라에서 그를 불러 卿을 삼고자 했으나 老父母를 모셔야 된다며 拒絶했다.
繼母의 逼迫을 받고 成長했지만 奉養함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아내가 朝夕床에 덜 익은 나물을 올렸다고 쫓아내고 平生을 홀로 살았다.
그는 孝行뿐만아니라 하루 세 番씩 自身을 徹氐하게 反省하는 사람으로 有名하였다.
첫째, 남을 도와줌에는 眞情 良心의 呵責없이 眞實로 도와 주었는가?
둘째, 親舊와 交際를 하면서 或 信義에 벗어난 行動은 없었나?
셋째, 스승의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않고 잘 익히려 努力했었나?
2,500年 前의 일로 賢實과는 符合되지 않는 側面도 있으나 眞實, 信義, 努力이라는 眞理의 根源은 永遠不變으로 빛을 發하고 있다.
98. 일의대수(一衣帶水) 一衣带水
한 줄기 띠와 같은 물. 한 줄기의 띠처럼 좁은 냇물이나 江물 하나를 사이에 둔 것과 같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을 比喩
司馬炎이 魏나라를 簒奪하고 세운 晉나라는 265年부터 420年까지 156年間 存續되었는데, 마치 周나라가 西周와 東周로 나뉘었듯이 晉나라도 둘로 나뉘었다. 前半 52年 동안은 首都를 西쪽의 洛陽에 두었기 때문에 西晉, (265∼316)이라고 하고, 後半 104年 동안은 首都를 東쪽의 健康 (南京)에 두었기 때문에 東晉 (317∼420)이라고 한다. 西晉은 貴族들의 奢侈와 腐敗, 內亂으로 말미암아 小數民族들에 依해 316年에 顚覆되었는데, 그 이듬해에 皇族인 司馬睿가 健康에서 다시 晉나라를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東晉이다. 東晉 王朝와 때를 같이하여 匈奴 · 鮮卑 · 羯 · 氐 · 羌 等의 다섯 個 異民族(五胡)이 16個의 나라를 세워 中國의 北部를 掌握했는데, 이를 五胡十六國이라고 한다. 420年부터 中國은 南北朝時代에 접어든다. 이 期間 동안 南方에서는 東晉이 滅亡하고 宋 (420∼479) · 齊 (479∼502) · 梁 (502∼557) · 陳 (557∼589)의 4個 王朝가 차례대로 들어섰고, 北方에는 五胡十六國이 滅亡하고 北魏 (386∼534) · 東魏 (534∼550) · 西魏 (535∼556) · 北齊 (550∼577) · 北周 (556∼581)의 5個 王朝가 들어섰다.
581年, 楊堅이 北朝의 마지막 王朝인 北周의 政權을 簒奪하고 隋나라를 세웠으니, 이이가 바로 隋文帝이다. 隋文帝 楊堅은 情熱的으로 政事에 臨해 國力을 크게 伸張시켰다. 한便 南朝의 마지막 王朝인 陳나라의 마지막 皇帝 陳叔寶는 밤낮으로 酒色과 遊興에 빠져 政事를 等閑視 하고 있었다. 나라의 將來를 憂慮한 大臣 章華가 皇帝가 酒色에 빠져 政治를 外面하는 것을 꾸짖고, 이의 是正을 促求하는 上書를 올렸다가 되레 死刑을 當하고 말았다. 隋文帝는 복야(僕射)인 고경(高熲)에게 晉나라를 滅할 計策을 물었다. 高熲이 對答했다. “江南의 穀食이 江北보다 먼저 익습니다. 江南의 收穫期에 우리가 出兵을 해 晉나라를 친다고 거짓 情報를 흘리면 저들은 分明 收穫을 抛棄하고 軍隊를 駐屯시켜 우리의 攻擊에 對備할 것입니다. 그러고 우리는 出兵을 하지 않는 겁니다. 이런 式으로 몇 年만 하면 우리가 攻擊한다는 말을 믿지 않고 더 以上 우리의 攻擊에 對備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가서 갑자기 長江을 건너 攻擊하면 꼼짝없이 當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江南은 우리 北方처럼 土窟을 파고 糧食을 貯藏하는 것이 아니라 갈대나 대나무로 엮은 倉庫에 貯藏합니다. 몇 年 동안 反復的으로 몰래 사람을 보내 불을 질러 버리면 晉나라의 國力은 크게 損失을 입을 것입니다.”
隋文帝는 高熲의 計策을 받아들여 무려 7年 동안 準備를 했다. 그리고 588年 겨울 晉나라 討伐에 나섰다.
出兵 前에 隋文帝는 高熲에게 말했다. “내가 百姓의 어버이로서 어찌 한 가닥의 띠와 같은 長江이 막고 있다고 해서 그곳의 百姓들을 救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大大的으로 戰艦을 만들라고 命했다.
(隋文帝謂僕射高熲曰, 我爲百姓父母, 豈可限一衣帶水不拯之乎. 命大作戰船.)
隋文帝는 陳叔寶의 罪目 20가지를 列擧한 傳單 30萬 部를 江南 地方에 뿌리고, 아들 楊廣, 後의 隋煬帝을 元帥로 任命한 後 50萬 大軍을 出動시켜 晉을 討滅하라는 命令을 내렸다. 楊廣은 大軍을 거느리고 長江을 건너 南下하여 晉나라의 首都 健康을 陷落시켰다. 그리고 陳叔寶를 사로잡고 晉나라를 무너뜨려 長期間의 分裂 時期였던 南北朝時代를 마감시켰다.
이 이야기는 《南史 陳紀下》에 나오는데, ‘한 가닥 띠와 같은 長江’이란 隋文帝의 말에서 ‘一衣帶水’가 由來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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