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ㅇ- 8 음덕양보~ )
71. 음덕양보(陰德陽報) 阴德阳报
陰德을 베풀면 밝은 報答이 있다. 남모르게 德을 베풀면 밖으로 드러나는 報答을 받는다는 뜻이다.
「陰德을 쌓으면 반드시 밝은 報答이 있고, 隱密하게 善을 行하는 사람은 (그 숨은 行實이) 반드시 밝게 드러난다.
(有陰德者, 必有陽報. 有隱行者, 必有昭明.)」
이 말은 《淮南子 人間訓》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陰德陽報’가 由來했다. 陰德陽報의 代表的인 이야기는 孫叔敖의 故事와 楚나라 莊王의 故事를 들 수 있다.
「春秋戰國時代 楚의 宰相을 지낸 孫叔敖가 어렸을 때, 밖에 나가 놀다가 집에 돌아와 근심하여 밥도 먹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묻자 울면서 對答했다. “오늘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보았으니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걱정이 되어서 그럽니다.” 어머니가 물었다. “그 뱀은 只今 어디에 있느냐?”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보면 죽는다는 말을 들어 다른 사람이 또 볼까 봐 땅에 묻어 버렸습니다.” 어머니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너는 죽지 않는다. 陰德을 베푸는 사람은 하늘이 福으로 報答한다고 들었다.”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모두 孫叔敖가 어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孫叔敖가 令尹이 되자 아직 赴任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그가 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孫叔敖之爲嬰兒也, 出遊而還, 憂而不食. 其母問其故, 泣而對曰, 今日吾見兩頭蛇, 恐去死無日矣. 其母曰, 今蛇安在. 曰, 吾聞見兩頭蛇者死, 恐他人又見, 吾己埋之也. 其母曰, 無憂. 汝不死. 吾聞之有陰德者, 天報以福. 人聞之, 皆諭其能仁也. 及爲令尹, 未治而國人信其仁也.)」
* 劉向의 新序 雜事에.
「楚나라 莊王이 여러 臣下들에게 술을 내려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 술이 거나하게 올랐을 때 그만 燈불이 꺼졌다. 어떤 사람이 한 後宮의 옷을 잡아당기자 女子가 그의 갓끈을 잡아당겨 끊어 버리고 나서 王에게 말했다. “只今 불이 꺼진 틈에 어떤 者가 妾의 옷을 잡아당겼습니다. 妾이 그의 갓끈을 끊어 가지고 있으니 불을 밝히고 갓끈 끊어진 者가 누군지 보아 주십시오” 王이 左右에게 命했다. “술을 마시고 醉하여 禮를 잃었는데 女子의 貞節을 드러내기 爲해 어찌 사내大丈夫를 辱보일 수 있겠는가. 오늘 寡人과 더불어 술을 마시면서 갓끈을 끊지 않은 者는 즐겁지 않은 者다.” 그러자 百 名이 넘는 臣下 모두가 갓끈을 끊고 나서야 불을 밝혔고, 끝까지 그 즐거운 雰圍氣를 다한 뒤에 잔치를 마쳤다.
3年이 지난 後, 晉나라와 楚나라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한 臣下가 恒常 先鋒에 나서서 다섯 番 싸움에 다섯 番 모두 勇猛하게 싸워 앞장서 敵을 擊退시킨 德에 싸움에서 勝利할 수 있었다. 莊王이 이를 異常하게 여겨 물었다. “寡人은 德이 薄하여 일찍이 그대를 特異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는데,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렇게 나섰는가?” 臣下가 對答했다. “저는 죽을 몸이었습니다. 지난날 술에 醉해 禮를 잃었는데 王께서 참고 제게 誅罰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남몰래 감싸 주신 德을 밝게 드러내 王께 報答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늘 肝과 腦를 땅에 바르고 죽는 것과, 목의 피를 敵軍에게 뿌려 그 恩惠 갚기를 願해 왔습니다. 臣이 바로 그날 밤 잔치에서 갓끈이 끊겼던 者입니다.” 드디어 晉나라 軍隊를 물리치고 楚나라를 强하게 해 주었으니, 이것이 陰德에는 반드시 陽報가 있다는 例이다.
(楚莊王賜群臣酒, 日暮酒酣, 燈燭滅. 乃有人引美人之衣者, 美人援絶其冠纓, 告王曰, 今者燭滅, 有引妾衣者, 妾援得其冠纓持之, 趣火來上, 視絶纓者. 王曰, 賜人酒, 使醉失禮, 奈何欲顯婦人之節而辱士乎. 乃命左右曰, 今日與寡人飮, 不絶纓冠者不歡歡. 群臣百有餘人皆節去其冠纓而上火, 卒盡歡而罷. 居三年, 晉與楚戰, 有一臣常在前, 五合五奮, 首却敵, 卒得勝之, 莊王怪而問曰, 寡人德薄, 又未嘗異子, 子何故出死不疑如是. 對曰, 臣當死, 往者醉失禮, 王隱忍不加誅也. 臣終不敢以蔭蔽之德而不顯報王也, 常願肝腦塗地, 用頸血湔敵久矣. 臣乃夜絶纓者也. 遂敗晉軍, 楚得以强. 此有陰德者必有陽報也.)」
* 說苑 復恩에.
72. 읍참마속(泣斬馬謖) 泣斩马谡
울면서 마속(馬謖)을 베다. 공정한 法 집행을 하거나, 大義를 위해 사사로운 情을 버리는 것을 比喩
223年, 蜀主 劉備는 221年부터 始作된 東吳와의 싸움인 夷陵戰鬪에 出戰하였다가 大敗하고 病을 얻어 世上을 떠나면서 諸葛亮과 李嚴에게 아들 劉禪을 付託했다. 劉禪이 劉備의 뒤를 이었고, 歷史에서는 劉禪을 後主라고 부른다. 建興 6年(228) 봄, 諸葛亮은 軍士를 이끌고 北쪽으로 魏나라를 攻擊했다. 出征에 앞서 그는 後主 劉禪에게 글을 올렸는데, 이것이 바로 出師表이다. 이 出師表는 諸葛亮의 憂國衷情이 넘치는 글로서, 이를 읽고 울지 않으면 忠臣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 程度로, 읽고 울지 않으면 孝子가 아니라는 李密의 陳情表, 읽고 울지 않으면 友愛를 모르고 자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韓愈의 祭十二郞文과 더불어 사람의 肺腑를 찌르는 名文이다. 諸葛亮은 出師表를 올린 後에 魏나라를 攻擊하기 爲해 漢中을 나와 長安을 向해 進軍했다. 漢中에서 祁山을 向해 迂廻하면서 天水, 安定, 南安 等 3個 郡을 接收하고 祁山에 이른 다음 長安으로 進軍하는 戰略이었다. 이때 魏延은 子午谷을 질러 바로 長安으로 奇襲하자는 意見을 냈는데, 諸葛亮은 이 意見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國力을 다 기울인 이 戰鬪에서 成功하면 多幸이지만 失敗할 境遇 國基가 흔들릴 程度의 打擊을 입기 때문이었다. 魏나라는 夏侯楙를 總司令官으로 하여 對敵했으나, 南安, 天水, 安定의 隴西 地方 3郡을 빼앗기고 姜維가 蜀漢에 投降하자, 魏 明帝 曹叡는 司馬懿를 復職시키고 張郃을 街亭으로 向하게 하였다. 諸葛亮은 戰力上의 要衝地인 街亭을 지킬 將帥로 馬謖을 보내면서 街亭의 길목을 徹底히 지켜 敵이 接近하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命令했다. 하지만 馬謖은 自身의 能力만을 믿고 敵을 끌어들여 逆襲을 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山등성이에서 張郃의 軍隊에게 包圍當해 힘 한 番 써 보지도 못하고 慘敗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諸葛亮은 할 수 없이 軍隊를 이끌고 漢中으로 退却해야만 했다. 馬謖은 監獄에 갇히게 되었는데, 獄中에서 諸葛亮에게 謖臨終與亮書라는 글을 올렸다.
「丞相께서는 저를 子息처럼 對해 주셨고, 저는 丞相을 아버지처럼 對하였습니다. 鯀을 죽이고 禹를 興하게 한 뜻을 깊이 생각하시어 平生의 사귐이 이 때문에 무너지지 않도록 하시면 저는 비록 죽지만 黃天에서도 餘恨이 없을 것입니다.
(襄陽記曰, 謖臨終與亮書曰, 明公視謖猶子, 謖視明公猶父. 願深惟殛鯀興禹之義, 使平生之交不虧於此, 謖雖死無恨於黃壤也.)」
諸葛亮은 敗戰의 責任을 물어 馬謖에게 斬首刑을 내렸다. 다시 求하기 어려운 將帥이므로 살리자고 많은 사람들이 挽留했지만 法을 嚴正히 지켜 紀綱을 바로 세우기 爲해 울면서 馬謖의 목을 베었다. 이를 ‘泣斬馬謖’이라 한다. 이 이야기는 《三國志 · 蜀書 馬良傳》에 나오는데, 馬謖이 獄中에서 諸葛亮에게 올린 書信은 《襄陽記》를 引用한 注에 실려 있다.
鯀(곤)은 堯임금의 臣下로 治水에 失敗하여 死刑을 當한 사람이고, 禹는 鯀의 아들로 治水에 成功한 사람이다. 堯임금과 舜임금 때 20年 동안이나 洪水가 持續되었다. 堯임금은 鯀을 시켜 洪水를 다스리게 했다. 鯀은 9年 동안이나 熱心히 일했지만 물길을 다스리는 데 失敗했다. 堯임금은 그 責任을 물어 鯀을 處刑했다. 堯임금의 讓位로 帝位에 오른 舜임금은 鯀의 아들 禹에게 治水를 맡겼다. 禹는 아버지의 失敗를 거울삼아, 물길을 막는 方法이 아닌 물길을 내서 물이 빠지게 하는 方法을 써서 작은 시내는 큰 江으로 흘러들게 하고, 江물은 바다로 빠지게 만들었다. 이렇게 13年의 努力 끝에 禹는 마침내 洪水를 다스리게 되었고, 後에 舜임금의 讓位를 받아 帝位에 오르고, 中國 最初의 王朝인 夏나라를 세웠다.
* 歷史 · 文化 資料 (泣斬馬謖의 眞實)
諸葛亮의 第1次 北伐은 結果的으로는 人選의 失敗로 어이없게 無散되고 말았다. 그런데 諸葛亮이 이런 人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있었고, 馬謖의 목을 베지 않으면 안 되는 理由가 있었다. 街亭은 最前方의 戰線은 아니지만 補給路의 據點으로, 蜀의 立場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戰略的 要衝地이고, 魏나라 立場에서는 반드시 빼앗아야 할 要地였다. 諸葛亮은 街亭을 지킬 將帥로 重臣들이 推薦하는 猛將들을 제쳐 놓고, 馬謖을 起用했다. 猛將들은 本隊 戰力의 核心 要員으로 攻擊에 쓸 말이지 守備에 쓸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當時 趙雲(趙子龍)은 箕谷에서 이미 魏軍의 발을 묶는 役割을 遂行하고 있었으며, 魏延은 魏軍 本隊의 主力을 擊破하는 先鋒將으로서의 大任을 맡고 있었다. 하여 諸葛亮은 뛰어난 能力을 가지고 있지만 本隊에서 빠져도 크게 戰力 負擔이 없는 馬謖을 派遣한 것이다. 勿論 諸葛亮도 馬謖이 實戰 經驗이 不足하다는 事實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副將으로 王平을 붙여 주었다. 馬謖의 任務는 街亭, 卽 後方의 補給 據點을 굳게 守備하는 것이었고, 萬若 諸葛亮이 指示한 대로 길가에 木柵을 세우고 길목을 틀어막고만 있었다면 充分히 街亭을 지킬 수가 있었을 것이다.
當時 人才 不足으로 허덕이던 蜀나라에서 諸葛亮이 끔찍이도 아끼고, 모든 일을 함께 相議했던 自己 사람 馬謖을 눈물을 흘리면서 벨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軍法을 嚴正하게 施行한다는 名分뿐 아니라 그 裏面에 더 重要한 政治的인 名分이 있었다. 當時 蜀나라에는 세 個의 큰 派閥이 存在하면서 內部 矛盾이 深化되어 있었다. 現在 政權을 掌握하고 있는 劉備가 거느리고 들어온 荊州派, 前任 太守 劉璋의 東州派, 그리고 益州에서 태어나 자란 本土의 士族인 益州派의 葛藤이 그것이었다. 더구나 當時는 先主 劉備가 죽고 아들 劉禪이 그 뒤를 이었지만 ‘丞相이 君權을 代身’하는 非正常的인 狀況이었다. 이런 弱點을 補完하기 爲해 諸葛亮은 戰國時代 秦나라의 商鞅이 했던 것처럼 强力한 ‘法治’를 펴 公平無私하고 嚴正하게 法을 施行했다. 德分에 三國 中에서 蜀나라가 가장 잘 다스려졌고 治安도 가장 좋았다고 한다. 이런 狀況에서 自己가 選擇하여 派遣한 馬謖이 國運에 影響을 미칠 만한 失責을 犯했으니, 모든 派閥들이 諸葛亮의 行步를 注視할 것은 불을 보듯 明確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挽留를 뿌리치고 馬謖의 목을 베지 않을 수 없었던 諸葛亮의 苦衷을 馬謖을 베면서 흘린 그의 뜨거운 눈물이 말해 주고 있다. 哭이 눈물을 흘리는 代身 소리 내어 우는 것이라면, 泣이란 소리 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을 말한다. 소리 내어 울든, 소리 없이 울든 間에 한 番이라도 울어 본 사람이라면 어떤 울음이 肺腑에서 나오는 眞짜 ‘사나이 마음’인가를 알 것이다. 그래서 哭斬馬謖이 아닌 泣斬馬謖인 것이다.
* 歷史 · 文化 資料 ~ 夷陵의 戰鬪.
荊州 (湖北 江陵)에 駐屯해 있던 關羽는 曹操의 魏나라를 攻擊하여 樊城 奪取를 눈앞에 둔 狀況에서 東吳의 奇襲을 받아 싸움에 지고 自身은 不歸의 客이 되고 말았다. 221年, 蜀主 劉備는 趙雲(趙子龍) 等 名將들의 反對에도 不拘하고, 軍隊를 이끌고 吳나라 征伐에 나섰다. 戰略的 要衝地인 荊州를 되찾고, 關羽의 復㘜를 爲한 出兵이었다. 吳나라의 孫權은 陸遜을 大都督에 任命하고 5萬 軍士로 對抗했다. 劉備가 거느린 蜀軍과 陸遜이 거느린 東吳의 軍隊는 夷陵과 猇亭에서 맞붙었다. 劉備는 巫峽으로부터 夷陵에 이르기까지 長江 南쪽의 600如 里 되는 山 위에 數十 個의 영채(營處)를 設置하였다. 陸遜은 長長 7, 8個月을 싸우지 않고 長期戰으로 나갔다가 蜀나라 軍隊가 지쳤을 때 바람을 利用하여 불을 놓아 劉備의 軍隊를 大破했다. 劉備는 싸움에 진 後 白帝城으로 避身했다가 얼마 後에 城의 西쪽에 있는 永安宮에서 世上을 뜨고 말았다. 이 戰爭을 ‘夷陵의 戰鬪’라고 하는데, ‘官渡의 戰鬪’, ‘赤壁大戰’과 더불어 《三國志》의 三大戰役으로 불린다. 이 戰鬪를 契機로 諸葛亮이 蜀나라의 實勢로 浮上하여 그의 時代가 열렸다.
73. 의기양양(意氣揚揚) 意气扬扬
의기(意氣)가 드날리다. 뜻한 바를 이루어 滿足한 마음이 얼굴에 나타난 模樣을 말한다.
「春秋時代 齊나라의 晏嬰 (晏子)은 靈公과 莊公, 景公의 세 王을 섬기면서 君主를 잘 輔佐하여 名宰相으로 尊敬받았다. 하루는 晏嬰이 수레를 타고 出他하였는데, 수레를 끄는 馬夫의 아내가 門틈으로 男便의 擧動을 엿보았다. 男便은 宰相의 말을 몰면서 머리 위에 큰 日傘을 펼쳐 햇빛을 가리고 채찍을 휘두르며 네 匹의 말을 몰았는데, 意氣揚揚하여 매우 滿足한 모습이었다. 馬夫가 집에 돌아오자 아내는 離婚하자고 要求하였다. 馬夫가 그 까닭을 묻자 아내가 對答했다. “晏子께서는 키는 6尺도 안 되지만 齊나라의 宰相이 되어 諸侯들 사이에 名聲이 높습니다. 오늘 제가 그분께서 外出할 때 보니 뜻과 생각이 깊은데도 恒常 自身을 낮추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當身은 키가 8尺이나 되지만 남의 馬夫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當身의 뜻은 스스로 滿足하고 있으니 제가 떠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後로 馬夫는 恒常 自身을 抑制하고 謙遜한 態度를 取하였다. 晏嬰이 以上하게 여겨 까닭을 묻자 馬夫가 事實대로 말해 주었다. 晏嬰은 그를 薦擧하여 大夫로 삼았다.
(晏子爲齊相, 出. 其御之妻從門間而窺. 其夫爲相御, 擁大蓋, 策駟馬, 意氣揚揚, 甚自得也. 旣而歸, 其妻請去. 夫問其故. 妻曰, 晏子長不滿六尺, 身相齊國, 名顯諸侯. 今者妾觀其出, 志念深矣. 常有以自下者. 今子長八尺, 乃爲人僕御. 然子之意, 自以爲足. 妾是以求去也. 其後夫自損抑. 晏子怪而問之, 御以實對. 晏子薦以爲大夫.)」
이 이야기는 《史記 (管晏列傳)》에 나오는데, 馬夫의 態度에서 由來하여 ‘意氣揚揚’은 몹시 자랑스러워하며 으스대는 모습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하찮은 地位를 믿고 잘난 체하는 사람을 比喩하는 ‘晏子御’ 또는 ‘晏子之御’도 여기서 由來했다.
74. 응접불가(應接不暇) 应接不暇
應待하여 맞이할 겨를이 없다. 원래는 아름다운 景致가 연이어 나와 찬찬히 鑑賞할 여유가 없는 것을 뜻했는데, 후에 뜻이 轉移되어 지금은 몹시 바쁜 것을 比喩
「王子敬은 “山陰의 길을 좇아 오르다 보면, 山川이 서로 비추어 사람에게 찬찬히 鑑賞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萬若 가을이나 겨울이면 더욱 잊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王子敬云, 從山陰道上行, 山川自相映發, 使人應接不暇. 若秋冬之際, 尤難爲懷.)」
이 말은 《世說新語 言語》에 나오는데, 王子敬이 會稽山 北쪽의 山陰을 旅行하다가 山陰의 景致를 보고 讚歎한 말이다. 山陰은 會稽郡에 있는데, 옛날부터 景致가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이다. 王子敬은 晉나라 때의 書藝家 王羲之의 아들이다. 王羲之와 더불어 二王이라 불리며, 이름은 獻之이다.
《會稽郡記》에도 다음과 같이 記錄되어 있다.
「會稽에는 特別히 有名한 山水가 많다. ······ 王子敬도 이를 보고 “山水의 아름다움이 사람에게 찬찬히 監賞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會稽境特多名山水. ······ 王子敬見之曰, 山水之美, 使人應接不暇.)」
‘應接不暇’는 原來 王獻之가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山水를 表現한 것이었지만, 後代로 오면서 그 뜻이 轉移되어 오늘날에는 생각할 틈이나 對處할 겨를 없이 아주 바쁘게 흘러가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75. 의심생암귀(疑心生暗鬼)
怪異하게 여기는 마음이 암귀(暗鬼)를 낳는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의심스럽고 무서워진다는 것을 比喩
「사람들이 鬼神과 妖怪에 對해 말하는 것을 들은 사람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怪異하게 여기면 마음속에 疑心이 生긴다.
(嘗聞人說鬼怪者, 以爲必無此理, 以爲疑心生暗鬼.)」
이 말은 宋나라 呂本中의 《師友雜志》에 나오는데, 이 말의 典故는 《荀子 解蔽》에서 찾아볼 수 있다.
「夏水의 南쪽에 涓蜀梁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어리석고 무서움을 많이 탔다. 어느 달 밝은 밤에 밤길을 가는데, 고개를 숙여 自身의 그림자를 보니 엎드려 있는 鬼神으로 보였고, 고개들 들어 (바람에 날리는)自身의 머리카락을 보니 서 있는 妖怪로 보여 몸을 돌려 달렸는데 집에 이르러서 그만 숨이 끊어져 죽고 말았다.
(夏水之南有人焉. 曰涓蜀梁. 其爲人也, 愚而善畏. 明月而宵行, 俯見其影, 以爲伏鬼也. 昂視其髮, 以爲立魅也. 背而走, 比至其家, 失氣而死.)」
또 하나의 典故는《列子 (說符열부)》에 나오는 ‘失斧疑鄰’의 故事이다.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자 이웃집 아들이 훔쳐 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걸음걸이를 보니 도끼를 훔친 것 같았고, 顔色을 보니 도끼를 훔친 것 같았고, 말하는 것을 보니 도끼를 훔친 것 같았고, 動作과 態度가 다 도끼를 훔친 것 같았다. 다음날 그는 골짜기를 뒤지다가 도끼를 찾았다. 다른 날 다시 이웃집 아들을 보니 行動거지가 조금도 疑心스러운 데가 없었다.
(人有亡斧者, 意其鄰之子. 視其行步, 竊斧也, 顔色, 竊斧也, 言語, 竊斧也. 動作態度, 無爲而不竊斧也. 俄而抇其谷而得其斧, 他日復見其鄰人之子, 動作態度, 無似竊斧者.)」
76. 이관규천(以管窺天)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엿본다는 뜻으로서, 좁은 所見으로 事物을 보았자 그 全體를 把握할 수 없다.’는 意味로 쓰이게 되었다.
以管窺天은 史記에 나오는 故事이다.
管은 대나무로 만든 피리는 속이 비었다. 해서 대롱의 뜻으로 쓰이며, 피리는 잘 保管해야 한다는 데서 ‘管理’를 뜻하게 되었다. 규(窺)는 ‘엿보다’는 뜻으로 쓰인다. 天은 大에 一을 올려 놓은 글자로서, 사람의 머리 위에 끝없이 펼쳐진 ‘하늘(一)’을 뜻한다.
春秋時代 末期에 東洋 醫學의 原祖이자 醫聖이라 일컬어지는 扁鵲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虢 나라에 갔을 때 그 나라의 太子가 危重한 病을 앓다 죽었다. 宮中의 醫員이 總 動員되었으나 太子의 病을 治療하지 못했다. 이때 扁鵲이 太子의 病을 고치겠다고 나서자 宮中의 醫員들은 코웃음을 쳤다.
이에 扁鵲은 ‘當身들의 醫術 따위는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고, 좁은 틈새로 무늬를 보는 것과 같소’ 하며 嘆息을 했다. 暫時 後 扁鵲은 醫員에게 太子의 病 狀態를 說明하고 診察해 보도록 勸했다. 醫員이 診察한 結果 太子의 病狀態가 扁鵲의 말과 一致했다. 結局 扁鵲은 針을 놓아 太子를 蘇生시켰다. 以後부터 世上 사람들은 扁鵲이 죽은 사람도 蘇生시킨다는 말을 하며 그의 醫術을 稱頌했다.
이때부터 以管窺天은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엿본다는 뜻으로서, 좁은 所見으로 事物을 보았자 그 全體를 把握할 수 없다’는 意味로 쓰이게 되었다.
同義語로는 井底之蛙, 井中之蛙가 있다.
77. 이목지신(移木之信) = 사목지신(徙木之信)
나무를 옮기는 믿음. 나무를 옮긴 사람에게 賞을 주어 믿음을 갖게 하다. 남을 속이지 않거나 約束을 반드시 지킨다는 것을 比喩
* 사목지신(徙木之信)은 ‘나무를 옮기는 것으로 신뢰를 얻다’라는 뜻의 고사성어로, 위정자가 백성을 속이지 않고 약속을 지켜 신임을 얻는다는 의미로 쓰인다.
秦나라가 六國을 滅하고 戰國時代를 統一할 程度로 强盛해진 것은 商鞅이라는 人物이 富國强兵의 基礎를 잘 세운 德分이었다. 商鞅의 本名은 公孫鞅으로, 元來 魏나라 宰相인 公叔痤를 섬겼다. 公叔痤가 病이 나자 魏惠王이 親히 問病을 와서 앞일을 물었다. 公叔痤는 平素 公孫鞅이 賢明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王에게 公孫鞅을 强力히 推薦하면서, 萬若 쓰지 않으려면 죽여 버리라고 進言했다. 魏惠王은 公叔痤의 進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王이 돌아간 뒤 公叔痤는 公孫鞅에게 事實을 말해 주며 逃亡하라고 勸했다. 公孫鞅은 王이 自身을 쓰라는 進言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自身을 죽이라는 進言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逃亡하지 않았다. 公叔痤가 죽은 뒤, 마침 秦나라의 孝公이 널리 人才를 求한다는 令을 내렸다. 이 말을 듣고 公孫鞅은 秦나라로 가 孝公에게 遊說를 했다. 몇 차례 繼續된 公孫鞅의 遊說를 들은 孝公은 그를 登用하고, 그의 計策을 받아들여 變法을 斷行하려고 法令을 制定했다. 法의 內容은 다음과 같다.
“民家는 10집 或은 5집을 한 條로 묶어 서로 잘못을 監視하도록 하고, 한 집이 罪를 지으면 10집이 똑같이 罰을 받는다. 罪지은 것을 알리지 않는 사람은 허리를 자르는 罰로 다스리고, 그것을 알린 사람에게는 敵의 머리를 벤 것과 같은 賞을 주며, 罪를 숨기는 사람은 敵에게 降服한 사람과 똑같은 罰을 준다. 百姓들 가운데 한 집에 成年 男子가 2名 以上 살면서 分家하지 않으면 賦役과 納稅를 2倍로 한다. 軍功을 세운 사람은 各各 그 功의 크고 작음에 따라 벼슬을 올려 주고, 私事로이 싸움을 일삼는 者는 各各 그 罪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罰을 준다. 本業에 힘써 밭을 갈고 길쌈을 하여 穀食이나 緋緞을 많이 바치는 사람에게는 賦役과 賦稅를 免除해 준다. 商工業에 從事하여 利益만을 追求하는 者와, 게을러서 가난한 者는 모두 逮捕하여 官廳의 奴婢로 쓴다. 君主의 親戚이라도 싸워 功을 세우지 못했으면 審事를 거쳐 公族으로서의 特權을 누릴 수 없게 한다. 身分上의 尊卑, 爵位와 俸祿의 等級을 分明히 하여 差等을 두고 土地와 집, 新妾, 衣服의 等級을 爵位의 等級에 따라 差別이 있도록 한다. 功을 세운 사람은 名譽를 누리지만, 功을 세우지 못한 사람은 富裕해도 華麗한 生活이 許諾되지 않는다.”
「하지만 百姓이 信任을 하지 않을까 念慮하여 法을 公布하기 前에 國家가 信任을 먼저 보여 주는 作業을 했다. 높이가 세 발 되는 나무를 南門에 세우고 이를 北門에 옮겨 놓는 사람에게 10金을 賞으로 준다고 公示했다. 하지만 모두들 以上히 여기기만 할 뿐 아무도 옮기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賞金을 50金으로 올려 公示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옮기자 約束대로 50金을 주었다. 이처럼 나라가 百姓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 알린 다음, 마침내 法令을 公布하였다.
(令旣具, 未布, 恐民之不信. 已乃立三丈之木於國都市南門, 募民有能徙置北門者予十金. 民怪之, 莫敢徙. 復曰能徙者予五十金. 有一人徙之, 輒予五十金, 以明不欺. 卒下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不平을 하였지만, 法이 施行되고 10年이 지나자 길가에 物件이 떨어져도 줍는 사람이 없었고, 도둑도 없어졌으며, 집집마다 다 넉넉해졌고, 百姓들은 戰爭에는 勇敢하였으나 個人의 싸움에는 힘을 쓰지 않았고, 나라는 잘 다스려졌다. 公孫鞅은 法 앞에 聖域이 없을 程度로 强力하게 法을 施行했다. 甚至於는 太子가 法을 어기자 太子 代身 太子의 傅(後見人)인 公子 虔을 處罰하고 太子의 師 (敎育 擔當)인 公孫賈를 刺字刑 (얼굴이나 팔뚝의 살을 따고 홈을 내어 먹물로 罪名을 찍어 넣는 刑罰)에 處할 程度였다. 公子 虔은 4年 後 또 犯法을 하여 의형(劓刑, 코를 베는 刑罰)에 處해져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身世가 되었다. 秦나라는 公孫鞅의 變法을 通해 가장 莫强한 나라가 되었다. 公孫鞅은 또 魏나라를 攻擊하여 屈伏시켰다. 魏惠王은 過去에 公叔痤의 進言을 듣지 않은 것을 크게 後悔했다. 公孫鞅은 이 功으로 상오(商於) 땅을 食邑으로 받고 商君에 封해졌다. 이로부터 商鞅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孝公이 죽고 太子가 卽位하자 商鞅은 平素 怨恨을 품고 있었던 公子 虔의 무리들에 依해 謀叛罪로 몰려 車裂刑에 處해졌다. 車裂刑이란 轘刑이라고도 하는데, 受刑者의 두 팔과 다리 및 머리를 각각 매단 수레를 달리게 하여 身體를 찢는 刑罰을 말한다.
이 이야기는 《史記 商君列傳》에 나오는데, 商鞅이 賞을 걸고 나무를 南門에서 北門까지 옮기게 한 데서 ‘移木之信’이 由來했다. ‘徙木之信’이라고도 한다.
78. 이심전심(以心傳心) 以心传心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다.
「부처님의 法을 迦葉에게 맡겼는데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했다. (法付迦葉, 以心傳心.)」
* 景德傳燈錄에.
「法이란 마음에서 마음으로 傳하는 것으로, 모두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푸는 것이다. (法則以心傳心, 皆令自悟自解.)」
* 六祖大師法寶壇經 行由品에.
以上의 典籍에서 ‘以心傳心’이 由來했는데, 이의 典故가 되는 이야기는 《五燈會元》에 나온다.
「어느 날 釋迦世尊이 弟子들을 靈鷲山에 모아 놓고 說法을 하였다. 그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世尊은 손가락으로 蓮꽃 한 송이를 말없이 집어 들고 若干 비틀어 보였다. 弟子들은 世尊의 그 行動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섭(迦葉)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그레 웃었다. 그제야 世尊도 빙그레 웃으며 迦葉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正法眼藏과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주마.” 이렇게 하여 佛敎의 眞髓는 迦葉에게 傳해졌다.」
正法眼藏은 人間이 元來 갖추고 있는 마음의 德을 말하고, 涅槃妙心은 煩惱를 벗어나 眞理에 到達한 마음을 말하며, 實相無相은 不變의 眞理를 말하고, 微妙法門은 眞理를 깨치는 마음을 말한다. 不立文子 敎外別傳은 言語나 經典에 따르지 않고 ‘以心傳心’으로 傳하는 奧妙한 眞理를 말한다.
79. 역여반장(易如反掌)
쉽기가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다. 일이 매우 쉬운 것을 比喩
吳王 劉濞는 野心이 큰 人物이어서, 中央政府에 抵抗하여 叛亂을 일으킬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 무렵 漢나라 景帝는 鼂錯(조조)를 御史大夫로 起用하고, 鼂錯의 計策에 따라 諸侯들의 領地를 削減하기 始作했다. 劉濞는 다른 諸侯들의 領地가 削減되는 것을 보고 自身도 이를 避할 수 없음을 알고 楚나라의 王 劉戊와 함께 趙, 膠西, 膠東, 菑川, 濟南 等의 諸侯國과 聯合하여 叛亂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吳楚七國의 亂이다. 이때 吳王 劉濞의 밑에서 郎中 벼슬을 지내던 枚乘이 劉濞에게 上書諫吳王이라는 글을 올렸다. 枚乘은 이 글에서 叛亂 計劃을 中斷하도록 勸告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썼다.
「忠臣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모든 일이 즐겁게 됩니다. 萬一 반드시 自己 생각대로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鷄卵을 쌓아 놓은 것처럼 危險한 일이며,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險難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바를 바꾼다면, 이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며, 泰山처럼 安定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天命이 준 壽命을 다하고, 無窮한 즐거움을 廢하면서 萬乘의 勢를 講究하여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운 方案을 내거나 泰山과 같은 安定에 據하지 않고, 도리어 鷄卵을 쌓는 危險함에 便乘하고 하늘에 오르는 險難함을 걸으려 하시니 이는 이 어리석은 臣下가 大王을 爲해 가지는 疑惑입니다.
(能聽忠臣之言百擧必悅. 必若所欲爲, 危於絫卵, 難於上天. 變所欲爲, 易於反掌, 安於泰山. 今欲極天命之壽, 敝無窮之樂, 究萬乘之勢, 不出反掌之易, 以居泰山之安, 而欲乘絫卵之危, 走上天之難, 此愚臣之所以爲大王惑也.)」
그러나 劉濞는 이 諫言을 듣지 않았다. 枚乘은 吳王을 떠나 梁孝王을 찾아가 賓客이 되었다.
* 漢書 枚乘傳에 나온다.
‘易如反掌’은 如反掌이라고도 하는데, 이의 典故가 되는 손바닥을 뒤집는다는 뜻의 反手는 다음의 典籍에서 찾아볼 수 있다.
「公孫丑가 孟子에게 물었다. “先生님께서 萬若 齊나라의 重要한 자리에 오르신다면 菅仲과 晏子의 功을 다시 期約할 수 있겠습니까?” 孟子가 말했다. “참으로 齊나라 사람답구나. 菅仲과 晏子만 알고 있으니. 어떤 사람이 曾西에게 물었다. ‘先生님과 子路 中 누가 더 賢明합니까?’ 曾西가 不快해하면서 對答했다. ‘子路는 先親께서 尊敬하셨던 분이다.’ ‘그렇다면 先生님과 菅仲을 比較하면 누가 더 賢明합니까?’ 曾西가 火를 내며 말했다. ‘어찌 나를 菅仲과 比較하는가? 菅仲은 王의 信任을 얻어 그렇게 熱心히 오랫동안 나랏일을 했어도 業積이 그렇게 초라한데 어찌 그에 比하는가?’ 菅仲은 내가 본받으려고 하는 바가 아니다. 公孫丑 그대는 내가 그러기를 願하는가?”
公孫丑가 말했다. “菅仲은 自己 王을 覇者가 되게 했고, 晏子는 自己 君主를 有名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菅仲과 晏子가 本받을 만한 人物이 아닙니까?” 孟子가 말했다. “齊나라를 王子의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와 같은 일이었다.”
(曰. 管仲以其君覇, 晏子以其君顯. 管仲晏子猶不足爲與. 曰. 以齊王, 猶反手也.)
公孫丑가 물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弟子들은 더욱 헷갈립니다. 文王은 聖德으로 百 年을 다스리다 돌아가셨어도 天下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武王, 周公이 그를 繼承하고 나서야 그 뜻이 天下에 퍼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王 노릇 하기가 그렇게 쉽다고 하시니 그렇다면 文王도 本받기에 不足하다는 것입니까?” 孟子가 말했다. “文王을 어찌 當해 내겠느냐. ······ 文王은 고작 四方 百 里의 땅을 가지고 일어났기 때문에 그토록 時間이 많이 걸리고 어려웠던 것이다. ······ 夏 · 殷 · 周가 興盛할 때에도 그 領土가 千 里를 넘지 않았다. 只今 齊나라는 이미 千 里의 땅이 있고, 개와 닭의 울음소리가 領土의 끝까지 닿는다. 땅을 더 넓히고 百姓을 더 모으지 않아도 어진 政治를 펴고 君主가 眞正한 王이 된다면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王子가 只今처럼 일어나지 않은 때가 없었고, 百姓이 只今처럼 虐政에 시달린 적이 없었다. 굶주린 者를 먹게 하기 쉽고, 목마른 者를 마시게 하기 쉽다. 그래서 孔子는 ‘德이 퍼져 나가는 것은 驛馬로 命을 傳達하는 것보다 빠르다.’고 말했다. 只今 같은 때를 맞아서 萬乘의 나라에서 人情을 베푼다면 百姓들이 기뻐할 것이니, 이는 마치 거꾸로 매달린 데서 풀려난 것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이 한 것의 半만 일을 하고도 그 功은 반드시 곱절이 될 것이니, 오직 이 時期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때이다.”」
이 이야기는 《孟子 公孫丑上)》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孟子가 말한 ‘反手’가 바로 ‘如反掌’이다.
80. 이용후생(利用厚生)
쓰는 것을 便理하게 하며 삶을 두텁게 하다. 器物의 사용을 便理하게 하고 財物을 豊富하게 하여 百姓들의 生活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禹가 舜임금에게 말했다. “임금이시여, 잘 생각하십시오. 德으로만 옳은 政治를 할 수 있고, 政治는 百姓을 잘 기르는 데 있으니, 물 · 불 · 쇠 · 나무 · 흙 및 穀食들을 잘 다스리시고, 또 德을 바로잡고 쓰임을 利롭게 하며 삶을 두터이 하도록 調和시키십시오. 九功의 秩序가 잡히면 그것을 노래 부르게 하십시오.”
(禹曰, 於, 帝念哉. 德惟善政, 政在養民, 水火金木土穀惟修, 正德利用厚生惟和. 九功惟敍, 九敍惟歌.)」
* 書經 · 우서(虞書) 大禹謨에. 書經(서경) 第三 大禹謨(대우모) 1~7
‘利用厚生’은 다음의 典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晉의 大夫 극결(郤缺)이 趙宣子에게 말했다. “······ 《夏書》에 말하기를 ······ 水 · 火 · 金 · 木 · 土 · 穀의 여섯 가지가 나오는 것을 六府라 하고, 正德, 利用, 厚生을 일러 三事라 합니다.”
(晉郤缺言於趙宣子曰, ······ 夏書曰, ······水火金木土穀, 謂之六府. 正德利用厚生, 謂之三事.)」
* 左傳 文公 7年에.
正德은 百姓의 德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利用은 百姓들이 쓰는 데 便理하게 하는 것이며, 厚生은 百姓들의 生活을 豊富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九功은 六府를 잘 다스리고 三事를 整備하는 것을 말한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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