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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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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故事成語) (ㅇ- 7 위편삼절~ )

by 산산바다 2026. 3. 7.

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글 목록

 

 

 고사성어(故事成語) (- 7 위편삼절~ )

 

 

61. 위편삼절(韋編三絶) 韦编三绝

가죽으로 맨 끈이 여러 차례 끊어지다. 讀書에 힘쓰는 것을 比喩

 

孔子는 나이 들어 周易을 좋아하여 단(), 繫辭, , 說卦, 文言을 지었다. 오직 만은 가죽으로 엮은 끈이 여러 번 끊어졌는데, 孔子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數年의 틈을 준다면, 내가 精通할 것이다.”

(孔子晩而喜易, 序彖繫象說卦文言. 獨易韋編三絶. , 假我數年, 若是, 我於易則彬彬矣.)

* 史記 孔子世家.

 

古代은 대나무를 直四角形으로 잘라 여러 을 가죽 끈으로 엮어 만들었다. 그래서 을 많이 읽다 보면 가죽 끈이 끊어지기도 했다. ‘韋編三絶이란 가죽 끈이 여러 차례 끊어졌다는 뜻이다.

 

 

62. 유교무유(有敎無類) 有教无类

가르침이 있을 뿐 差別은 없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르친다는 말이다.

 

孔子가 말했다. 가르침이 있을 뿐 差別은 없다.(子曰, 有敎無類.)

* 論語 衛靈公. 論語(논어) 15. 衛靈公(위령공)

 

이 말을 論語注疏(何晏集解), (邢昺疏)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은 사람을 가르치는 을 말한 것이다. 種類를 말한다. 누구든지 어느 곳에서나 가르침을 받는 데는 貴賤部類差別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此章言敎人之法也. 類謂種類. 言人所在見敎, 無有貴賤種類也.)

 

論語義疏何晏集解 皇侃疏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사람에게는 貴賤存在하지만 똑같이 주에 따라 가르쳐야지 部類卑賤하다고 해서 가르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가르치면 하게 되니, 差別은 없는 것이다.

(人乃有貴賤, 同宜資敎, 不可以其種類庶鄙, 而不敎之也. 敎之則善, 本無類也.)

 

論語集注(朱熹)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사람의 性品은 모두 하지만, 部類에 따라 善惡의 다름이 있는데 이는 氣質習俗에 물든 때문이다. 그러므로 君子가 가르치면 모든 사람이 回復할 수 있으므로 部類함을 다시 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人性皆善, 而其類有善惡之殊者, 氣習之染也. 故君子有敎, 則人皆可以復於善, 而不當復論其類之惡矣.)

 

孔子敎育 目的實踐하기 한 것이었으므로 貧富貴賤, 나이 하여 가르침의 差等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孔子는 스승에게 가르침을 하는 最小限禮義만 지키면 누구나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束脩 以上부터 내 일찍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自行束脩之以上, 吾未嘗無誨焉.)

* 論語 述而. 論語(논어) 7. 述而(술이)

10묶음 한 다발을 말하며, ‘는 말린 고기를 말한다. 束脩는 열 조각의 肉脯禮物 가운데 가장 弱小한 것이다.

 

孔子有敎無類를 들자면, 子貢 冉有富裕했지만 顔回는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하였고, 孟懿子身分이 높았지만 子路身分이 낮았다. 顔回賢明하였지만 高柴 (子羔)는 어리석었으며, 顔路孔子보다 53나 적어 孔子弟子들 가운데 가장 어렸다. 또한 國籍各己 달랐는데, 子淵나라, 子夏나라, 子張나라, 子思나라 出身이었다. 孔子가 가르치는 데 差別을 두지 않았다는 事實은 다음의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互鄕風俗이 좋지 않아서 말이 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곳에 사는 한 아이가 孔子를 만나러 왔다. 弟子들이 唐惑해하자 孔子가 말했다. “나아가고자 하는 것을 認定한 것이지, 물러나고자 하는 것을 認定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찌 하게 하겠는가? 사람들이 自己 몸을 깨끗이 하고 나아가고자 하면 그 깨끗함을 認定하면 됐지, 이미 지나간 것에 拘碍必要가 있겠는가.”

* 論語 述而. 論語(논어) 7. 述而(술이)

(互鄕難與言. 童子見, 門人惑. 子曰, 與其進也. 不與其退也, 唯何甚. 人潔己以進, 與其潔也, 不保其往也.)

 

 

63. 위여누란(危如累卵)

달걀을 쌓아 놓은 것처럼 위태(危殆)롭다. 매우 위급한 상태를 比喩하는 말이다.

 

戰國時代 魏나라에祁山范睢라는 사람이 있었다. 范睢나라의 大夫 須賈門客으로, 須賈를 따라 나라로 出使했다. 누구 못지않게 人才尊重했던 齊襄王范睢의 뛰어난 才能을 알아보고 을 내렸다. 別 所得도 없이 出使를 마치고 나라로 돌아온 須賈相國魏齊에게 范睢齊襄王私的으로 交流事實해바치고, 失敗責任范睢에게 뒤집어씌웠다. 魏齊范睢相府로 끌어가서 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패고 廁間 옆에 거적을 깔고 그곳에 范睢를 내버렸다. 한 손님들이 거적에 쓰러져 있는 范睢의 몸뚱이에 小便을 보았다. 며칠이 지난 後 精神을 차린 范睢相府大廳을 지키는 兵卒에게 自身해 달라고 哀願했다. 范睢를 가엽게 여겼던 兵卒은 술에 해 있는 魏齊에게 范睢가 죽었다고 거짓 報告 했고, 魏齊屍體밖에 버리도록 命令했다. 다음 날 魏齊范睢屍體가 없는 것을 알고 全國范睢逮捕하도록 命令했다. 范睢切親한 이웃인 鄭安平의 집에 숨어 살면서, 張祿으로 이름을 바꾸고 나라를 脫出機會를 노리고 있었다. 鄭安平은 마침 나라 昭王使臣으로 나라에 온 王稽에게 范睢紹介했고, 范睢才能感服을 한 王稽秘密裏范睢를 데리고 나라 都城大梁을 빠져나와 나라로 들어갔다.

 

王稽秦昭王에게 使臣으로 다녀온 일의 復命을 하면서 范睢紹介했다. “나라에 張祿 先生이라는 가 있는데, 天下에 뛰어난 言辯을 가진 선비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秦王의 나라는 알을 쌓아 놓은 것처럼 危殆롭지만, 나를 쓰면 安全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內容書面으로는 充分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여, 제 수레에 태워 함께 왔습니다.” 그러나 秦王은 믿지 못하여 張祿客舍에 머물게 하고 초라한 食事提供했다. (張祿)一 年如이 있기를 기다렸다.

(已報使, 因言曰, 魏有張祿先生, 天下辯士也. , 秦王之國危於累卵, 得臣則安. 然不可以書傳也. 臣故載來. 秦王弗信, 使舍食草具. 待命歲餘.)

 

하지만 昭王范睢를 만나 깊은 對話를 나눈 그를 重用했고, 그의 計策採擇하여 外戚穰侯華陽君을 몰아내고 王室을 튼튼히 만들었으며, 그의 遠交近攻 計策을 받아들여 諸侯들을 潛蝕하는 기틀을 세웠다. 나라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三晉 땅을 가장 먼저 滅亡시킨 것은 바로 范睢遠交近攻策한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史記 范睢蔡澤列傳에 나오는데, 王稽昭王에게 范睢의 말에서 危如累卵由來했다. 成語傳故는 다음과 같다. 春秋時代, 나라 靈公千金費用을 들여 9높이의 樓臺를 세우면서 側近들에게 말했다. “하는 가 있으면 斬刑하겠다.” 荀息이 이 事實을 듣고 上書를 올려 靈公을 뵙기를 했다. 靈公은 활에 화살을 먹여 들고 荀息引見했다. 荀息이 말했다. “하지 않을 것입니다. 12의 바둑알을 쌓고 그 위에 9鷄卵을 쌓아 올릴 수 있습니다.” “어디 한 해 보시오.” 荀息은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精神集中하여 12의 바둑알을 쌓고는 그 위에 鷄卵을 올렸다. 周圍 사람들은 緊張해서 히 숨을 쉬지도 못하였다. 靈公도 숨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繼續 중얼댔다. “危險하다, 危險하다.” 荀息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보다 더 危險한 것이 있습니다.” 靈公이 말했다. “그게 뭔지 보여 줄 수 있겠소?” “9높이의 樓臺를 짓는다는 것은 三 年 內에도 完成할 수 없습니다. 男子들은 農事일을 하지 못하고 女子들은 길쌈을 하지 못해 國庫가 비게 될 것이며, 이웃나라가 軍士를 일으키려고 謀議하여 社稷滅亡하게 되면 께서는 무엇을 바라볼 것입니까?” 靈公寡人의 잘못이 여기까지 이르게 만들었구려.”라고 말하고 卽時 9層 樓臺를 헐어 버렸다.

(晉靈公造九層之臺, 費用千金, 謂左右曰, 敢有諫者斬. 荀息聞之, 上書求見. 靈公張弩持矢見之. , 臣不敢諫也. 臣能累十二博棋, 加九鷄子其上. 公曰, 子爲寡人作之. 荀息正顔色, 定志意, 以棋子置下, 加九鷄子其上. 左右懼慴息, 靈公氣息不續. 公曰, 危哉, 危哉. 荀息曰, 此殆不危也. 復有危於此者. 公曰, 願見之. 荀息曰, 九層之臺三年不成, 男不耕, 女不織, 國用空虛, 鄰國謀議將興, 稷亡滅, 君欲何望. 靈公曰, 寡人之過也乃至於此. 卽壞九層臺也.)

 

이 이야기는 說苑에 나오는데, 荀息鷄卵을 쌓은 일에서 危如累卵이란 槪念由來했다. ‘危如累卵累卵之危라고도 하는데, 이는 다음의 典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王氏劉氏는 함께 설 수 없습니다. 마치 아래에 泰山과 같은 安定이 있고 위에는 알을 쌓아 놓은 危險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王氏與劉氏亦且不幷立, 如下有泰山之安, 則上有累卵之危.)

* 劉向極諫用外戚封事.

 

알을 쌓아 놓은 것 같은 危險해 있으면서도 泰山과 같은 安定圖謀한다.(居累卵之危而圖泰山之安.)

* 王符潛夫論.

 

 

64. 유능제강(柔能制剛) 柔能制刚

부드러움이 강함을 누른다. 아무리 강한 힘이라도 부드러움으로 대응하는 것에 당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軍讖에서 이르기를 부드러움은 함을 制御하고, 함이 함을 制御한다. 부드러움은 이고 함은 이다. 함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함은 사람들의 攻擊을 받는다.”고 했다.

(軍讖曰, 柔能制剛, 弱能制强. 柔者德也. 剛者賊也. 弱者人之所助. 强者人之所攻.)

* 三略.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하지만 죽으면 굳고 해진다. 풀과 나무도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하지만 죽으면 마르고 굳어진다. 그러므로 굳고 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한 것은 삶의 무리다. 그렇기 때문에 軍隊하면 滅亡하고, 나무가 하면 꺾인다. 하고 큰 것은 아래에 하고 부드럽고 한 것이 위에 하게 된다.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故堅强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是以兵强則不勝, 木强則折. 强大處下, 柔弱處上.)

* 老子 76.

 

世上에서 물보다 더 부드럽고 한 것은 없다. 그렇지만 굳고 한 것을 치는 데 물보다 나은 것은 없다. 물의 役割代身할 만한 것은 없는 것이다. 한 것이 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는 것은 世上 사람 모두가 알건만 그 理致實行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聖人은 말했다. 나라의 좋지 못한 일을 맡은 사람을 나라의 主人이라 하고, 나라의 祥瑞롭지 못한 일을 맡은 天下이라 한다. 올바른 말은 反對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 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弱之勝强, 柔之勝剛, 天下莫不知, 莫能行. 是以聖人云, 受國之垢, 是謂社稷主. 受國不祥, 是謂天下王. 正言若反.)

* 老子 78.

 

老子는 말했다. 혀가 남는 것은 그 부드러움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가 없어지는 것은 그 함 때문이 아니겠는가?

(老子曰, 夫舌之存也, 豈非以其柔耶. 齒之亡也, 豈非以其剛耶.)

* 說苑.

 

 

65. 유비무환(有備無患) 有备无患

準備가 있으면 근심할 것이 없다. 무슨 일이든지 미리 對備를 해 두면 걱정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생각이 옳으면 이를 行動으로 옮기되 그 옮기는 것을 時期에 맞게 하십시오. 나는 옳다고 여기면 그 옳은 것을 잃고, 한 것을 자랑하면 그 을 잃게 됩니다. 오직 모든 일은 다 그 갖춘 것이 있는 이니, 갖춘 것이 있어야만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寵愛하는 無能하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으며, 잘못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면 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君主가 스스로 安定地位維持하면 政事順調롭게 될 것입니다. 祭祀를 다하지 못하면 祭祀를 받지 않을 것이며, 煩雜하면 흩어지므로 煩雜하게 하지 마십시오. 을 섬기는 일은 至極히 어렵습니다.

(慮善以動, 動惟厥時. 有其善, 喪厥善. 矜其能, 喪厥功. 惟事事, 乃其有備, 有備無患. 無啓寵納侮, 無恥過作非. 惟厥攸居, 政事惟醇. 黷於祭祀, 時謂弗欽, 禮煩則亂, 事神則難.)

* 書經 (說命 열명). 書經(서경) 第十三 說命中(열명중) 1~3

 

나라 武丁이 부열(傅說)宰相으로 起用하여 自身補弼케 하여 나라를 크게 繁昌시켰는데, 武丁傅說起用하는 過程傅說意見을 쓴 것이 바로 說命으로, 여기에서 有備無患由來했다.

 

有備無患左傳 襄公11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晉悼公, (在位 BC572BC558)· · · 魯 等 12나라와 聯合하여 나라를 攻擊하자, 多急해진 鄭簡公晉悼公에게 和議했다. 나라가 和議를 받아들이자 다른 나라들도 모두 軍士撤收시켰다. 鄭簡公晉悼公에게 樂隊各種 兵車 百 臺美女들을 膳物로 보냈다. 晉悼公이 큰 魏絳에게 樂隊을 내리면서 그의 致賀했다. 魏絳은 이 膳物辭讓하면서 書經에 말하기를 便安할 때 危殆로움을 생각하라고 했는데, 생각하면 對備를 할 수 있고, 對備가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書曰, 居安思危. 思則有備, 有備無患.)”라고 말하며 一時的成就에 마음이 풀어진 을 일깨워 주었다.

 

 

66. 유유상종(類類相從) = 물이유취(物以類聚) 物以类聚

* 유유상종(類類相從) : 事物種類대로 모인다. 같거나 비슷한 部類끼리 어울리는 것을 말한다.

* 물이유취(物以類聚) : ‘만물은 같은 종류끼리 모인다.’는 뜻으로, 비슷한 성향·취향·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함께 어울린다는 의미

 

하늘은 높고 땅은 낮아, 하늘과 땅의 區別해졌다. 낮은 것과 높은 것이 벌여 있어서 한 것과 한 것이 各其 자리를 얻게 된다. 움직임과 고요함에 一定함이 있어 한 것과 柔順한 것이 決定된다. 森羅萬象은 같은 種類끼리 모이고, 萬物은 무리를 지어 나누어지니, 이로부터 함과 함이 생긴다.

(天尊地卑, 乾坤定矣. 卑高以陳, 貴賤位矣. 動靜有常, 剛柔斷矣. 方以類聚, 物以群分, 吉凶生矣.)

* 周易 繫辭 上. 繫辭上傳(계사상전) 1

 

같은 소리는 서로 하며, 같은 氣運은 서로 한다. 물은 한 곳으로 흐르고, 불은 마른 곳을 한다. 구름은 을 좇아 일고, 바람은 호랑이를 좇아 분다. 聖人이 나오면 萬物이 보이고, 하늘에 根本을 둔 것은 위와 하고, 땅에 根本을 둔 것은 아래와 하니, 이는 各者가 그 비슷한 것을 좇기 때문이다.

(同聲相應, 同氣相求, 水流濕, 火就燥, 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覩. 本乎天者親上, 本乎地者親下, 則各從其類也.)

* 周易 文言. 문언전(文言傳) 1. ()

 

成語戰國 時代 齊나라 순우곤(淳于髡)의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淳于髡體軀矮小했지만 말주가 좋았다. 그는 本時 奴隸였으나 데릴사위가 되어 丈人의 집에서 살다가 나라 威王信任을 얻었다. 威王이 죽은 , 宣王卽位하였다. 宣王賢士들을 招聘하자 淳于髡은 한꺼번에 7推薦하였다. 宣王이 몹시 놀라 말했다. “千 里賢者 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賢者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것처럼 많은 것이고, 百 年聖人 한 사람이 나타난다 해도 聖人들이 발꿈치를 맞대고 걸어오는 것처럼 많다고 할 수 있는데, 하루만에 7推薦했으니 너무 많은 게 아니겠소?” 淳于髡對答 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새들은 같은 깃털을 가진 것끼리 함께 모이고, 짐승들은 같은 다리를 가진 것끼리 함께 달립니다.

(夫鳥同翼者而聚居, 獸同足者而俱行) 柴胡桔梗 等藥材하려고 못으로 갔다면 平生 한 뿌리도 찾지 못하지만, 睪黍山이나 梁父山에 가서 찾는다면 몇 수레라도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事物에는 各其 비슷한 部類가 있으며, , 淳于髡賢者들의 部類라고 할 수 있습니다.(夫物各有疇, 今髡賢者之疇也.) 께서 저에게 人才하는 것은 마치 에서 물을 긷고 부싯돌로 불을 일으키는 것처럼 簡單한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戰國策 齊策에 나오는데, 事物에는 各其 비슷한 部類가 있다는 淳于髡의 말에서 物以類聚由來했다. 物各有疇, 物各有類, 方以類聚, 物以群分, 各從其類 等으로도 쓰며, ‘類類相從이라고도 한다.

 

 

67. 유지경성(有志竟成)

意志를 가지고 있으면 마침내 이룬다.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成功한다는 말이다.

 

나라 때 扶風 武陵 (陝西 興平)사람 경엄(耿弇)은 어렸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했는데, 고을에서 말을 타고 깃발과 북을 세우고 활 쏘는 것을 訓鍊하는 것을 자주 봐 武藝를 좋아하게 되었다. 前漢 末, 王莽皇位簒奪하고 皇帝의 자리에 올라 을 세운 , 過度改革 政策失敗社會混亂에 빠져 들자 到處에서 反亂이 일어났다. 漢 王朝의 핏줄인 劉縯劉秀 兄弟들도 漢 王朝復興을 내걸고 軍士를 일으켰다. 이들은 各地에서 王莽軍隊盜賊 떼들을 擊破하고 景帝子孫劉玄, (更始帝)擁立함으로써 漢 王室再建했다. 耿弇劉秀麾下로 들어가 많은 을 세웠으며, 劉秀東漢을 세우고 光武帝卽位하는 데 크게 一助했다.

 

當時 天下는 아직 完全平定되지 않은 狀態였는데, 光武帝 建武 3(27), 耿弇光武帝를 따라 南陽到着해서 自身이 가지고 있는 雄大計劃光武帝에게 建議했다. 먼저 北上해서 上谷兵力을 모은 다음, 漁陽彭寵하고, 다음으로 涿郡張豊하고, 軍士를 돌려 富平獲索農民軍鎭壓한 다음, 쪽으로 張步攻擊하여 나라 땅을 平定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耿弇南陽戰略이라 한다. 光武帝耿弇建議妥當하다고 생각하고 建議를 받아들였지만, 實現 可能性해서는 疑問을 가지고 있었다. 建武 4(28), 耿弇自身計劃대로 먼저 周邊武裝 勢力들을 鎭壓하여 勝利를 거두었는데, 그 사이에 耿弇의 아버지 耿況同生 耿舒漁陽彭寵 勢力平定했다. 建武 5(29), 耿弇富平獲索農民軍鎭壓했다. 建武 5(29)10, 劉秀耿弇에게 張步를 칠 것을 했다. 張步歷下(山東 濟南市 歷城區 西南)祝阿(山東 濟南市 長淸區 東北)兵力配置하고 對抗했다. 耿弇黃河를 건너 먼저 歷下攻略, 祝阿까지 攻略하고 臨淄進擊했다. 하지만 耿弇張步主力 部隊를 만나 많은 死傷者를 내는 打擊을 입고, 自身도 다리에 화살을 맞는 重傷을 입었다. 그때 마침 劉秀救援兵을 이끌고 달려오고 있다는 消息이 들려오자 耿弇皇帝께서 납시는데 소를 잡고 술을 準備하여 隆崇하게 歡迎해야지, 어찌 이런 들을 皇帝께 남겨 둘 수가 있겠느냐?”고 말하며 軍士들을 督勵하여 張步攻擊結局 臨淄陷落시켰다.

 

며칠이 지나서 光武帝臨淄到着하여 軍士들을 慰勞하는데, 君臣이 다 모였다. 光武帝耿弇에게 말했다. “옛날 韓信歷下攻略해 나라의 터전을 열었는데, 오늘 將軍祝阿攻略해 나라를 興起하게 했구려. 이곳들은 모두 나라의 西境界, 은 서로 匹敵한다고 볼 수 있소. 하지만 韓信은 이미 降服한 나라를 襲擊했고, 將軍强敵했으니 韓信보다 더 어려운 을 세운 것이오. ······ 將軍南陽에서 이 큰 計策建議했었는데, 實現되기 어렵다고 恒常 생각했었소. 그런데 뜻을 가진 사람이 結局 일을 成功시키는구려.” (後數日, 車駕至臨淄自勞軍, 群臣大會. 帝謂弇曰, 昔韓信破歷下以開基, 今將軍攻祝阿以發迹, 此皆齊之西界, 功足相方. 而韓信襲擊已降, 將軍獨拔勁敵, 其功乃難於信也. ······ 將軍前在南陽建此大策, 常以爲落落難合, 有志者事竟成也.)

 

이 이야기는 後漢書 耿弇傳에 나오는데, 光武帝耿弇稱讚한 말인 有志者事竟成也에서 有志竟成由來했다.

 

韓信이 이미 降服한 나라를 襲擊했다.’는 말은 다음과 같은 歷史的 事實을 가리킨다.

 

楚漢 戰爭 當時 劉邦韓信에게 나라 攻擊 命令을 내렸다. 그런데 역이기(酈食其)나라 王 田廣說得하겠다고 하자 劉邦酈食其나라에 보냈다. 나라 酈食其說得에 넘어가 나라에 降服하기로 하고, 軍士를 거두고 酈食其를 잘 接待했다. 便, 韓信劉邦을 받아 軍士를 이끌고 나라를 치러 가는 사이 酈食其가 세 치 혀로 나라를 降服시켰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라 征伐中止할 생각을 했다. 이때 辯士인 괴통(蒯通)韓信에게 나라를 치도록 說得했다. 비록 漢王密使 酈食其를 보내 나라의 降伏을 받아 내긴 했지만, 韓信에게 나라 攻擊中止하라는 命令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과, 한낱 儒生에게 을 넘길 수 없다는 것이 그 理由였다. 韓信蒯通의 말을 따라 나라를 襲擊하여 首都 臨淄까지 肉薄해 들어갔다. 齊王 田廣酈食其自己를 속였다고 생각하고 酈食其를 삶아 죽여 버리고 高密로 달아나, 나라 項羽에게 使臣을 보내 救援兵要請했다.

* 史記 酈生陸賈列傳에 나온다.

 

 

68. 유좌지기(宥坐之器)

옛날의 임금들이 너무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것을 스스로 警戒하기 坐席의 오른쪽에 備置해 두고 恒常 보던 기기(敧器 그릇). 마음을 바르게 하기 위해 스스로 정한 基準比喩

 

孔子나라 桓公祠堂을 찾았다가 敧器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祠堂지기에게 물었다. “저것은 무슨 그릇입니까?” “옛날의 임금들이 너무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것을 스스로 警戒하기 坐席의 오른쪽에 備置해 두고 恒常 보던 敧器입니다.” 孔子가 말했다. “나도 宥坐之器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속이 비면 기울고 알맞게 물이 차면 바로 서며, 가득 채우면 엎질러진다고 하더군요.” 孔子弟子를 돌아보며 말했다. “물을 따라 보아라.” 弟子가 물을 들어 따랐는데, 정말 알맞게 물이 차니 바로 섰고, 가득 차니 엎질러졌으며, 비니 기울어졌다. 孔子嘆息하며 말했다. “, 가득 차 엎질러지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孔子觀於魯桓公之廟, 有敧器焉. 孔子問於守廟者曰, 此爲何器. 守廟者曰, 此蓋爲宥坐之器. 孔子曰, 吾聞宥坐之器者, 虛則欹, 中則正, 滿則覆. 孔子顧謂弟子曰, 注水焉. 弟子挹水而注之. 中則正, 滿則覆, 虛而欹. 孔子喟然而嘆曰, . 惡有滿而不覆者哉.)

 

이 이야기는 荀子 (宥坐)孔子家語에 나온다. ‘宥坐之器는 비거나 차면 기울고 엎어지지만, 適當하게 차면 곧게 서 있는 그릇으로 敧器라고 한다. 敧器는 기울게 만들어져 있어 세우기 어려운 그릇인데, 先人들은 이 敧器를 놓고 보면서 自身의 마음을 알맞게 維持하여 너무 지나치거나 不足하지 않게 調節하는 警戒로 삼았다.

 

 

69. 육출기산(六出祁山)

六出祁山(육출기산)은 제갈량이 북쪽으로 진군해 기산(祁山)으로 나아간 일을 가리키는 말로, 보통 여섯 번 기산으로 나아감이라는 뜻

 

三國志演義한 토막. 諸葛亮建興 6(228)부터 始作하여 여섯 차례에 걸쳐 北伐敢行한다. 째는 기산(祁山)으로 出兵하여 나라의 駙馬 夏侯楙大破하고 天水 · 南安 · 安定 等 奪取한 뒤 다시 魏軍大都督 曹眞擊破한다. 그러나 馬謖街亭戰鬪에서 하는 바람에 漢中으로 退却하지 않을 수 없는 形便이 되자 얻었던 세 을 다시 잃어버린다. 째는 陳倉 길목으로 나아가지만 魏將 학소(郝昭)決死的으로 抵抗한다. 에서는 我軍이 적은 陳倉持援하기 勇將 王雙派遣한다. 諸葛亮魏延을 남겨 王雙을 막게 한 다음, 自身大軍을 이끌고 祁山攻擊하여 曹眞連破한다. 糧食이 다해 軍士를 물리면서 計策을 세워 王雙을 벤다. 째는 郝昭重病이 든 機會陳倉奇襲하여 다시 祁山에 이른 다음, 姜維王平에게 軍士를 나누어 주어 武都陰平을 빼앗게 한다. 이에 에서는 司馬懿都督으로 삼아 軍士를 거느리고 막게 한다. 諸葛亮司馬懿連破하지만, 張苞가 죽었다는 消息을 듣고 이 나는 바람에 超然軍士를 물린다. 째는 에서 曹眞司馬懿· 副都督으로 삼고 漢中攻擊토록 하였으나, 延日 큰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撤收한다. 諸葛亮軍士를 두 길로 나누어 箕谷斜谷進擊한다. 曹眞軍擊退시킨 諸葛亮曹眞를 돋우어 죽음에 이르게 한 다음, 다시 司馬懿擊破한다. 굳게 지키기만 하고 나오지 않던 司馬懿降服蜀將 苟安成都로 보내 諸葛亮皇帝 자리를 簒奪하려 한다는 流言蜚語를 퍼뜨리게 한다. 後周詔書를 받은 諸葛亮은 하는 수 없이 軍士를 물려 돌아간다. 다섯 째는 다시 祁山으로 나아가 이어 司馬懿擊破한다. 그러나 軍糧과 말먹이 乾草를 제때에 完備하지 못한 都護 李嚴나라에서 攻擊하려 한다는 거짓말로 危急한다. 이에 諸葛亮遑急軍士撤收시키다 途中大將 張郃을 활로 쏘아 죽인다. 여섯 째는 軍士를 다섯 길로 나누어 다시 祁山으로 進擊諸葛亮魏將 鄭文이 거짓 降伏하는 機會逆利用하여 魏軍大破한다. 그러고는 다시 上方谷을 불사르고 渭水 南쪽을 奪取하지만, 司馬懿는 굳게 지키기만 하고 나오지 않는다. 五丈原駐屯하던 諸葛亮은 오래지 않아 으로 世上下直한다. (92~104)

 

* 三國志 · 蜀書 · 後主傳諸葛亮傳하면, 歷史上 諸葛亮와 여섯 차례의 戰爭을 벌였는데, 그중 다섯 北伐이었다. 1次 北伐建興 6(228) 봄에 始作된다. 祁山으로 나아가자, 天水 · 南安 · 安定 背叛하고 諸葛亮에게 好應한다. 그러나 先鋒 馬謖街亭에서 하는 바람에 大軍을 물려 漢中으로 돌아온다. 2建興 6겨울로, 陳倉包圍했으나 陷落시키지 못하고 糧食이 떨어지는 바람에 돌아온다. 3建興 7(229) 봄으로, 陳式派遣하여 武都陰平 攻擊하여 빼앗는다. 4建興 9(231) 봄으로, 다시 祁山攻擊했으나 糧食이 떨어지는 통에 撤軍한다. 撤軍 途中 追擊하던 魏將 張郃을 쏘아 죽인다. 5建興 12(234) 봄으로, 야곡(斜谷)하여 渭濱攻擊하고, 五丈原駐屯하다 그해 8에 죽는다. 그런데 모두 다섯 차례의 北伐 中 祁山으로 나간 횟수는 但只 이었을 뿐이다. 나머지 한 차례의 戰爭防禦戰으로 建興 8(230) 가을에 曹眞司馬懿漢中攻擊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큰비를 만나는 바람에 撤收한다. 三國志演義에서는 基本的에서 事實爲主脚色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六出祁山많은 部分通俗 文藝物吸收하여 增殖內容들이다.

 

 

70. 은감불원(殷鑑不遠) 殷监不远

나라 滅亡을 보는 거울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다른 사람의 실패를 자신의 거울로 삼는 것을 比喩

 

(前略)

文王曰咨 : 일찍이 文王께서 말씀하시되

咨女殷商 : , 어지러운 나라여

人亦有言 : 世上에 널리 도는 말이 있거니

顚沛之揭 : 쓰러진 나무뿌리 드러날 적엔

枝葉未有害 : 가지나 잎이 于先 아니 해도

本實先撥 : 뿌리는 이미 먼저 죽어 있다고

殷鑒不遠 : 나라의 거울은 멀리 있지 않고

在夏後之 : 世夏나라의 뒤에 있었거늘

 

* 詩經 · 大雅 탕지십(蕩之什)261. ()-詩經 大雅(시경 대아)

나라의 마지막 , 荒淫無道하고 貪慾스러웠으나 남다른 힘과 知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를 無氣力하게 만들고 나라를 하게 한 女人이 있었는데, 바로 妺喜였다. 桀王이 한창때, 有施氏小國攻擊했다. 有施氏對抗할 힘이 없어 많은 進上品을 바치고 降伏했다. 進上品 가운데 妺喜라는 女人이 끼여 있었다. 桀王妺喜에게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妺喜宮闕을 다시 짓게 하고, 酒池肉林을 만들어 跌宕하게 놀면서 腐敗하게 만들었다. 妺喜는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을 꾸며 夏 王朝國力을 기울게 만들었다. 桀王의 이런 形態를 보다 못한 賢臣 關龍逢은 눈물을 흘리면서 하다가 斬首되고 말았으며, 膳官 (宮闕廚房을 맡은 官吏) 伊尹忠諫을 듣지 않는 桀王을 버리고 當時 商나라의 首都였던 박()으로 逃亡湯王을 섬겨 나라 創業一等 功臣이 되었다. 當時 湯王을 갖춘 軍將으로 諸侯들의 協力을 얻어 國力擴張해 가고 있었다. 桀王橫暴가 날로 極甚하여 百姓들의 마음이 그를 떠났다는 것을 안 湯王은 드디어 桀王 打倒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桀王鳴條의 싸움에서 大敗하여 달아나다가 南巢에서 죽었다. 이로써 初代 王 禹로부터 17代 王 桀까지 500에 걸쳐 (BC22世紀BC17世紀) 存在하였던 中國 最初王朝 夏나라는 을 닫고 말았으며, 湯王나라가 그 자리를 代身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史記 夏本紀에 나온다.

 

그런데 ()나라의 마지막 紂王나라 마지막 王 桀王前轍을 밟고 말았다. 紂王資質이 뛰어나고 識見이 높았으며, 頭腦明晳하여 남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聰明할 뿐만 아니라 勇力도 뛰어나 猛獸를 맨주먹으로 때려잡을 程度體力했다. 그런데 이렇게 뛰어난 資質을 쌓는 데 쓰지 않고, 自慢에 빠져 臣下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뛰어난 입담으로 自身非行合理化하거나 덮어 버렸다. 그는 天下自己보다 나은 사람은 存在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또한 酒色享樂해서도 아주 豪宕하여 妲己라는 女人에게 빠지고 말았다. 妲己有蘇氏의 딸로, 일찍이 紂王有蘇氏討伐했을 때 戰利品으로 獲得美女였다. 紂王妲己를 얻고 아주 기뻐했으며, 妲己의 아름답고 妖艶姿態에 빠져 그歡心을 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다. 紂王妲己하는 대로 宮中音樂을 더욱 官能的이고 奔放音樂으로 바꾸고, 首都 朝歌鹿臺라는 巨大金庫를 만들어 무거운 稅金으로 그 金庫를 채웠으며, 鉅橋倉庫를 세워 식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沙丘離宮擴張하여 그 안에 길짐승과 날짐승을 놓아길렀다. 妲己을 받아들여 술로 채운 못과 고기 按酒를 매단 나무로 이루어진 酒池肉林을 만들어, 많은 알몸의 男女들을 데리고 跌宕하게 놀았다. 不平을 하는 百姓들을 억누르려고 恐怖政治一環으로 불구덩이 위에 기름을 칠한 구리 기둥을 걸어 놓고 그 위를 걷게 하는 炮烙施行하였다.

 

當時 殷 王朝에는 天子政治補佐하는 三公으로 西伯昌 (周文王), 九侯, 鄂侯가 있었다. 九侯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어 紂王夫人이 되었는데 紂王에게 죽임을 하였으며, 九侯도 죽임을 하여 그 屍體가 젓으로 담가졌다. 鄂侯가 이를 하다가 亦是 죽임을 하고 屍體로 만들어졌다. 西伯은 이를 듣고 嘆息하다가 유리(羑里)에 갇히고 말았다. 西伯家臣들이 紂王에게 美女財物을 바치고 그를 釋放시켰다. 西伯自身領土一部洛西의 땅을 바치고 炮烙免除받은 , 自己 땅으로 돌아갔다. 忠臣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紂王에게 하였지만 大部分 죽임을 하거나, 스스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王子 比干하다가 心臟이 갈기갈기 찢겼으며, 箕子에 갇혔다. 紂王은 이 밖에도 姙娠女子의 배를 가르고, 뼈가 시려 을 건너지 못하는 老人의 다리를 자르는 등, 暴惡한 짓을 恣行하였다.

 

西伯 昌이 죽고 그의 아들 이 그 뒤를 이었으니, 그가 바로 나라의 公式的初代 王武王이다. 武王은 아버지 西伯 昌文王으로 追贈하고, 太公望 呂尙師傅로 삼아 民心을 끌어 모으고 軍隊整備하여 暴惡紂王膺懲하기 準備를 해 나갔다. 그리고 때가 되자 武王紂王하기 쪽을 進軍繼續하여 郊外牧野 (河南 淇縣 西南)에서 을 쳤다. 紂王70兵力動員해서 牧野로 나왔다. 하지만 紂王暴政에 시달리던 나라의 軍隊 大部分武王討伐鶴首苦待하고 있었으므로 降伏하거나 나라 軍隊加擔해 버렸다. 나라 軍隊一敗塗地하고 말았고, 紂王牧野에서 逃亡首都 趙歌에 있는 鹿臺 위로 올라가 불을 지른 , 寶石으로 裝飾한 옷을 입고 그 속으로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로써 殷 王朝初代 湯王으로부터 紂王에 이르기까지, BC17世紀부터 BC11世紀에 이르는 600歷史를 마감했다.

* 史記殷本紀周本紀에 나온다.

 

詩經蕩之什나라 文王, 나라 紂王이 바로 前代에 있었던 나라 夏桀王을 거울삼지 못했음을 慨嘆內容으로, 여기에서 殷鑑不遠이 나왔다. ‘商鑑不遠이라고도 한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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