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ㅇ- 4 오매불망~ )
31. 오매불망(寤寐不忘) 寤寐不忘
자나 깨나 잊지 못하다.
關關雎鳩 : 꾸욱꾸욱 우는 물수리
在河之洲 : 黃河의 모래톱에 있듯이
窈窕淑女 : 얌전하고 고운 아가씨
君子好逑 : 사나이의 좋은 짝
參差荇菜 : 올망졸망 조아기(노랑머리蓮꽃)
左右流之 : 이리저리 찾듯이
窈窕淑女 : 얌전하고 고운 아가씨
寤寐求之 : 자나 깨나 求하지요
求之不得 : 求해도 못 얻으니
寤寐思服 : 자나 깨나 생각하네
悠哉悠哉 : 그리워 그리워
輾轉反側 : 엎치락뒤치락
參差荇菜 : 올망졸망 조아기
左右采之 : 이리저리 캐듯이
窈窕淑女 : 얌전하고 고운 아가씨
琴瑟友之 : 거문고와 琵琶 어울리는 것처럼 사귀고파
參差荇菜 : 올망졸망 조아기
左右芼之 : 이리저리 고르듯이
窈窕淑女 : 얌전하고 고운 아가씨
鐘鼓樂之 : 鐘과 북이 어울리는 것처럼 즐기고파
《詩經 · (國風)詩經 全文 國風(160篇) · (周南) 〈關雎〉》01 關雎(관저)-詩經(시경)
이 詩句의 寤寐求之, 寤寐思服에서 ‘寤寐不忘’이 由來했다. 〈關雎〉는 周나라 文王과 그의 아내 太姒의 德을 稱頌한 것이라고도 하며, 어여쁜 處女를 짝사랑하는 노래라고도 하고, 臣下가 文王과 太姒의 結婚을 祝賀하는 노래라고도 하며, 太姒가 文王을 爲해 美女를 求했으나 뜻같지 않아 근심하는 노래라 보는 見解도 있다.
32. 오손공주(烏孫公主) 乌孙公主
烏孫의 公主. 政略結婚의 犧牲羊이 된 슬픈 運命의 女人을 比喩
烏孫은 西域 地方에 割據하던 투르크系(突闕族)의 遊牧民族으로, 한때 그 勢力이 天山 山脈 北쪽의 이르츠크 湖水로부터 일리 江(伊犁河) 流域의 盆地까지 이르렀을 만큼 强大했다. 當時 中國의 北方을 掌握하고 있던 匈奴는 烏孫보다 强했는데, 자주 漢나라를 侵犯했다. 漢高祖 劉邦 以來 6代 皇帝 景帝에 이르기까지 줄곧 펼쳐 왔던 匈奴에 對한 和親 政策을 强攻策으로 바꾼 武帝는, 烏孫과 함께 匈奴를 協攻할 計劃을 세우고 張騫을 使臣으로 보내 同盟을 맺었다. 그리고 10年 後 同盟을 더욱 强化하기 爲해 武帝의 兄 江都王 (劉建)의 딸인 細君을 公主라 속여 늙은 烏孫의 王에게 媤집보냈다. 그 德分에 匈奴는 漢나라와 烏孫의 協攻을 견디다 못해 한層 더 北方으로 밀려났으며, 西域 50如 나라가 漢나라를 上國으로 섬기게 되었고 漢나라는 異民族의 이반(Iban)을 막기 爲해 龜玆에 西域都護府를 두었다. 細君은 말도 通하지 않는 異域 땅에서 사는 슬픔을 노래한 烏孫公主悲愁歌를 지었다.
吾家嫁我兮天一方 : 우리 집에서 나를 시집보내니 하늘 한쪽 끝이어라
遠托異國兮烏孫王 : 머나먼 他國에 몸을 맡기니 烏孫王이로다
窮廬爲室兮旃爲墻 : 天幕이 집이 되고 모전(毛氈)은 담장이 되었으며
以肉爲食兮酪爲漿 : 고기가 밥이 되고 羊젖이 국이 되었네.
居常土思兮心內傷 : 살면서 恒常 故鄕 그리워하니 마음이 아프구나.
願爲黃鵠兮歸故鄕 : 누런 고니가 되어 故鄕으로 돌아가고파
이 노래를 傳해 들은 漢武帝도 細君을 가엾게 여겨 해마다 細君에게 膳物을 보냈다. 數年이 지나 더욱 老齡이 된 烏孫王은 細君을 自己 孫子에게 媤집보내려 했다. 그들에게는 當然한 風習이었지만 細君에게는 驚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細君은 漢나라에 使者를 보내 이 事實을 알리고 歸國하게 해 달라고 武帝에게 付託했으나 武帝는 끝내 歸國을 許諾하지 않았다. 結局 細君은 烏孫王의 孫子인 孫岑의 아내가 되어 딸을 낳았다. 이처럼 漢나라를 匈奴의 危脅에서 벗어나게 한 一等 功臣인 細君은 말도 通하지 않는 異域 땅에서 故鄕을 그리는 노래를 부르며 슬픔 속에 살다가 늙어 죽었다. 이 이야기는 《漢書 西域傳》에 나온다.
33.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조금 낫고 못한 정도(程度)의 차이(差異)는 있으나 본질적(本質的)으로는 차이(差異)가 없음을 이르는 말. 중국(中國) 양나라(梁--) 혜왕(惠王)이 정사(政事)에 관하여 맹자(孟子)에게 물었을 때, 전쟁(戰爭)에 패(敗)하여 어떤 자(者)는 백(百) 보(步)를, 또 어떤 자(者)는 오십(五十) 보(步)를 도망(逃亡)했다면, 백(百) 보(步)를 물러간 사람이나 오십(五十) 보(步)를 물러간 사람이나 도망(逃亡)한 것에는 양자(兩者)의 차이(差異)가 없다고 대답(對答)한 데서 유래(由來)한다.
梁나라 惠王이 말했다.
"寡人은 나라일을 다스림에 있어 마음을 다 기울이고 있을 뿐입니다.
例를 들면 河內地方에 凶年이 들면 그곳 百姓들을 河東地方으로 옮김과 同時에 食糧을 河內地方으로 옮겨 줍니다.
萬一 河東地方에 凶年이 들면 亦是 이와같은 政策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웃나라 임금들이 政治하는 것을 살펴보건데, 나만큼 百姓들에 對하여 마음을 쓰는 임금이 없는데도, 이웃 나라 百姓들이 더 줄지 않고 우리나라 百姓들이 더 늘어나지 아니하니,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孟子가 對答하였다.
"王께서 戰爭을 좋아하시니 請컨데 戰爭을 例로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둥둥 ! 하고 북이 울려서 敵軍과 武器를 맞대고 싸움이 始作되어 이윽고 戰勢가 不利해지면 甲옷을 벗어던지고 武器를 끌고서 도망치게 되는데, 어떤 兵士는 百步를 도망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또 어떤 兵士는 五十步를 도망가다가 걸음을 멈춥니다.
이때 五十步 도망간 兵士가 百步 도망간 兵士를 비겁(卑怯)하다고 비웃는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비록 百步 도망간 것은 아닐지언정 五十步 도망간 兵士도 亦是 도망친 것은 마찬가지이니까요."
(梁惠王이 曰 "寡人之於國也에 盡心焉耳矣로니 河內凶卽 移其民於河東하며 移其栗於河內하고 河東이 凶커든 亦然하노니 寡人國之政컨대 無如寡人之用心者로데 隣國之民이 不可少하며 寡人之民이 不可多는 何也니이까.
" 孟子對曰 "王이 好戰하시니 請以戰喩하리이다.
塡然鼓之하여 兵刃旣接이어든 棄甲曳兵而走하되 或百步而後에 止하며 或五十步而後에 止하여 以五十步로 笑百步卽何如하니이가." 曰 "不可하니 直不百步耳언정 是亦走也니이다.")
( 孟子 梁惠王 에 )
'五十步 百步'란 有名한 말이 여기에서 由來되었거니와,
孟子는 이와 같은 比喩를 잘 驅使한 能辯家였다. 爲政者는 平素에 늘 百姓을 사랑하여 不當한 稅金, 不當한 政策을 삼가고 治山.治水.治安을 愛護하는 한 便, 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政治의 第一條이다.
平素에는 百姓을 酷使시키면서 兇年이나 들어야 겨우 굶어 죽지 않도록
對策을 講究해 주는 것, 이런 程度를 가지고 仁義의 政治를 베풀고 있다고 自負하여 이웃 諸侯들의 惡政을 비웃는다면, 이것은 五十步 도망간 주제에 百步 도망간 사람을 겁(怯)보라고 비웃는 것과 무엇이 다를 바 있겠는가?
34. 오월동주(吳越同舟) 吴越同舟
吳나라 사람과 越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다. 서로 怨讐之間이라도 共同의 目的을 達成하기 위해서는 서로 協力한다는 것을 比喩
春秋時代의 戰略家 孫武는 《孫子兵法 九地》에서 軍士를 쓸 수 있는 아홉 가지 땅을 列擧해 놓고 있는데, 그中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死地’이다.
「兵士들을 갈 곳이 없는 地境에 집어넣으면 죽음에 이르러도 敗退하지 않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兵士들이 盡力을 다하여 싸우게 된다. 兵士들이 陷穽에 깊이 빠지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 갈 곳이 없으면 軍心이 오히려 安定된다. 敵地에 깊이 들어가면 서로 依支하여 흩어지지 않게 된다. 不得已한 狀況에서는 싸울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까닭에 兵士들은 다스리지 않아도 警戒하고, 救하지 않아도 아래의 情況이 上達되며, 約速하지 않아도 서로 和睦하고 도우며, 命令하지 않아도 紀律을 지킨다. 迷神은 自然히 없어지고 서로 疑心이 없어지며, 죽음에 이르러도 逃亡하지 않게 된다. 兵士들이 財物을 남기지 않는 것은 財貨를 싫어해서가 아니며, 生命의 危險을 돌보지 않는 것은 오래 살기를 싫어해서가 아니다. 命令을 내리는 날로 士卒들 中 앉아 있는 者들은 눈물로 옷깃을 적시고, 누워 있는 者는 滿面이 눈물범벅이 될 것이다. 兵士들을 갈 곳이 없는 狀況에 投入시키면 專諸와 조귀(曹侮) 같은 勇氣가 나오는 法이다. 그러므로 用兵을 잘하는 자는 率然과 같아야 한다. 率然은 常山의 뱀으로, 머리를 치면 꼬리가 덤비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덤비고, 몸통을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한꺼번에 덤벼든다.
(投之無所往, 死且不北, 死焉不得, 士人盡力. 兵士甚陷則不懼, 無所往則固. 深入則拘, 不得已則鬪. 是故其兵不修而戒, 不求而得, 不約而親, 不令而信, 禁祥去疑, 至死無所之. 吾士無餘財, 非惡貨也. 無餘命, 非惡壽也. 令發之日, 士卒坐者涕沾襟, 偃臥者涕交頤, 投之無所往. 諸侮之勇也. 故善用兵者, 譬如率然. 率然者, 常山之蛇也. 擊其首則尾至, 擊其尾則首至. 擊其中則首尾俱至.)」
이렇게 死地에 對해 說明한 後 다음과 같은 實例를 덧붙였는데, 바로 여기에서 ‘吳越同舟’가 由來했다.
「敢히 묻는데 軍隊를 率然과 같이 움직이게 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 吳나라 사람과 越나라 사람은 서로 미워하지만, 같은 배를 타고 건너가다가 바람을 만나게 되면 서로 돕기를 左右의 손이 함께 協力하듯이 한다.
(敢問, 兵可使如率然乎. 曰, 可. 夫吳人與越人相惡也, 當其同舟而濟遇風, 其相救也, 加左右手.)」
傳諸는 吳나라 公子 光 (後의 吳王 闔閭)을 도와 吳王 僚를 暗殺한 刺客이다. 曹侮는 春秋時代 魯나라 莊公의 大夫이자 將軍인 曹沫이다. 曹沫은 齊나라와 여러 차례 싸워 敗해 많은 領土를 잃었으나, 後에 魯나라 莊公과 齊나라 桓公이 會盟을 할 때 匕首를 들고 壇上에 올라가 桓公을 脅迫하여 自身이 잃은 땅을 되찾았다.
35. 오유선생(烏有先生)
常識的으로는 到底히 있을 수 없는 사람
까마귀는 온통 검어서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다들『왜 그럴까』를 連發했다.
結局 글자도 조(鳥)에서 點(`눈을 뜻함)이 하나 빠진 오(烏)字로 만들었다.
곧 烏의 本디 뜻은「까마귀」지만 烏飛梨落, 烏合之卒, 長頸烏喙(목이 길고 입이 뾰족한 人相)「검다」는 뜻도 있으며, 烏骨鷄, 왜? 어찌? 라는 强한 疑問의 뜻도 가졌다.
따라서 「烏有」는「어찌 있을 수 있으랴」가 되며, 烏有先生은 常識的으로는 到底히 있을 수 없는 사람 이라는 뜻이 된다.
司馬相如는 漢武帝때 살았던 稀代의 風流 文人이다. 그가 武帝에게 바친 上林賦는 사냥에 빠진 武帝를 慇懃히 諷諫하기 爲해 지은 것이다.
楚의 使臣으로 齊나라에 간 子虛가 齊王과 사냥하면서 서로 自國의 사냥터가 더 크고 豪華롭다고 誇張하자
烏有先生이 子虛를 꾸짖고,또 이를 지켜본 無是公이라는 者가 나서서 兩非論을 편다는 內容이다.
百姓의 苦痛은 생각하지 않고 사냥에만 빠져있는 두 나라의 國王은 옳지 않다는 뜻에서다.
재미있는 것은 登場 人物들의 이름이다.
子虛나 烏有先生, 그리고 無是公은 모두「이런 사람은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言論 報道에 依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그럴듯한 地位와 體面에도 不拘하고 常識的으로는 到底히 理解하기 힘든 行爲를 일삼는 者가 많은 것 같다.
모두 現代版「烏有先生」들이 아닌가 싶다.
36. 오하아몽(吳下阿蒙) 吴下阿蒙
吳 地域 시골구석의 呂夢. 學識이 짧은 사람이나 進步가 전혀 없는 사람을 比喩하는 말이다.
三國時代 吳나라의 將軍 呂夢은 집안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學問을 배우지 못하고 일찍이 軍門에 들어가 武勇을 떨치고 數많은 戰功을 세워 將軍의 位置까지 올랐다. 그러나 글을 배운 적이 없는 그는 싸움만 잘했을 뿐 學識이 不足하여, 어떤 官吏들은 慇懃히 그를 無視하기까지 했다. 孫權은 呂夢이 젊고 똑똑하지만 學問이 不足한 點을 안타깝게 여겨 冊 읽기를 勸勉했다. 呂夢은 그때부터 熱心히 冊을 읽기 始作했는데, 얼마 後에는 學者들이 읽은 것보다 더 많은 冊을 涉獵하게 되었다.
「周瑜가 죽은 後, 그 뒤를 이어 都督이 된 魯肅이 陸口로 가는 길에 呂夢의 軍營을 지나게 되었다. 魯肅은 마음속으로 如前히 呂夢을 輕視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魯肅을 說得했다. “呂將軍의 功名이 나날이 빛나고 있으니 마음대로 對하면 안 됩니다. 가서 보는 게 좋겠습니다.” 魯肅은 呂夢을 찾아갔다. 술자리가 한창일 때 呂夢이 魯肅에게 말했다. “當身은 重任을 받아 關羽와 이웃하게 되었는데, 어떤 計略으로 豫期치 않은 狀況에 對備하고 있습니까?” 魯肅은 엉겁결에 對答했다. “때에 任하여 適當한 方法을 擇할 것이오.” 呂夢이 말했다. “只今 東쪽(吳)과 西쪽(蜀)은 한집안이지만, 關羽는 事實 곰이나 호랑이 같은 사람입니다. 計劃을 어찌 미리 定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魯肅을 爲해 다섯 가지 計策을 그렸다. 魯肅은 이때에 자리를 넘어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그의 등을 치며 말했다. “呂子明, 나는 그대의 才略이 이 水準까지 미쳤는지 몰랐소.” 그리고 呂夢의 어머니께 人事하고, 呂夢과 交分을 맺고 헤어졌다.
(魯肅代周瑜, 當之陸口, 過蒙屯下. 肅意尙輕蒙, 或說肅曰, 呂將軍功名日顯, 不可以故意待也, 君宜顧之. 遂往詣蒙, 酒酣, 蒙問肅曰, 君受重任, 與關羽爲鄰, 將何計略, 以備不虞. 肅造次應曰, 臨時施宜. 蒙曰, 今東西雖爲一家, 而關羽實熊虎也. 計安可不豫定. 因爲肅畵五策. 肅於是越席就之, 拊其背曰, 呂子明, 吾不知卿才略所及乃至於此也. 遂拜蒙母, 結友而別.)」
《三國志 · 吳書 呂夢傳》에 나오는데, ‘吳下阿蒙’이란 말은 江表傳을 引用한 裴松之 注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魯肅이 呂夢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나는 이제껏 그대가 武術만을 아는 줄 알고 있었는데, 只今 보니 그대의 學問이 뛰어난 것이 더 以上 옛날 吳 地域의 시골구석에 있던 阿蒙이 아니구려.” 呂夢이 말했다. “선비는 모름지기 여러 날을 떨어져 있다가 만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程度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江表傳曰, 肅拊蒙背曰, 吾謂大弟但有武略耳, 至於今者, 學識英博, 非復吳下阿蒙. 蒙曰, 士別三日, 卽更刮目相待.)」‘吳’는 長江 以南의 江蘇省 地域을 말하며, ‘阿蒙’의 ‘阿’는 中國人들이 親近한 사람이나 아이를 부를 때 이름이나 姓 앞에 붙여 부르는 號稱이다. 〈江表傳〉은 現在 失典되었는데, 《三國志》의 〈裴松之 注〉에 많이 引用되어 있다.
37. 오합지졸(烏合之卒) 乌合之卒
까마귀를 모아 놓은 것 같은 兵士. 까마귀 떼와 같이 조직(組織)도 안 되고 訓練도 없이 모인 무리라는 뜻으로, 어중이떠중이를 比喩하는 말이다.
漢나라 末年, 王莽이 漢의 皇位를 簒奪하고 皇帝의 자리에 올라 新을 세운 後, 過度한 改革 政策을 펼쳤다가 失敗해 社會가 混亂에 빠져 들자 到處에서 反亂이 일어났다. 漢 王朝의 핏줄인 劉縯과 劉秀 兄弟들도 漢 王朝의 復興을 내걸고 軍士를 일으켰다. 이들은 各地에서 王莽의 軍隊와 盜賊 떼들을 擊破하고, 景帝의 子孫인 劉玄(更始帝)을 擁立함으로써 漢 王室을 再建했다. 그러나 世上에는 如前히 群雄들과 盜賊 떼들이 雄據 하였으며, 各 地方에서는 將軍들이 軍士를 일으켜 地方政權을 掌握하고 郡守나 縣令 等을 自己 마음대로 바꾸었다. 그中에서도 特히 樊崇이 이끄는 赤眉軍, (我軍을 識別하기 爲해 눈썹에 붉은 물감을 漆했기 때문에 ‘붉은 눈썹을 가진 軍隊’라는 뜻의 赤眉軍이라 稱했다)과, 河北에서 遼東에 이르는 廣大한 地域을 支配하고 있던 王郞의 勢力이 가장 컸다. 王郞은 元來 一個 卜術家에 不過했지만 自身의 人望을 높이기 爲해 前漢 時代 成帝의 아들 劉子輿를 稱했다. 百姓들은 그 말을 믿고 王郞을 따랐으며, 그를 天子로 推戴하기에 이르렀다. 當時 冀州, 河北의 中南部, 山東의 西쪽, 河南의 北쪽 一帶)와 幽州 (北京, 河北 北部, 遼寧 一帶) 一帶는 모두 王郞에게 降服한 狀態였다.
當時 河北省 上谷의 太守였던 耿況은 王莽에게 벼슬자리를 받은 터여서 마음이 몹시 不安한 狀態였다. 그런데 때마침 劉秀가 更始帝의 命을 받들어 王郞을 討伐하기 爲해 나섰다는 消息을 듣고, 當時 21歲의 아들 경엄(耿弇)을 劉秀의 麾下로 보냈다. 耿弇이 劉秀를 찾아가는 途中, 王郞이 漢나라 成帝의 아들 劉子輿를 詐稱하고 邯鄲에서 스스로 天子라 稱하며 皇帝가 되었다는 消息을 들었다. 耿弇의 부하 孫倉과 衛包가 王郞에게 歸順하자고 共謀했다.
「그러자 耿弇이 칼자루를 굳게 잡고 嚴肅하게 말했다. “子輿(王郞)는 도둑일 뿐이고 兵卒들은 모두 降服한 捕虜들일 뿐이다. 내가 長安에 到着하여 나라에서 組織한 漁陽과 上谷의 軍隊를 이끌고 太原, 代郡에서 數十 日만 왔다 갔다 하면서 輕騎兵으로 奇襲하여 까마귀를 모아 놓은 것 같은 무리들을 깔아 버리면 마치 마르고 썩은 것들이 부러지듯이 될 것이다. 너희가 狀況을 알지 못하고 그에게 간다면 머지않아 滅族의 禍를 避하지 못할 것이다.”
(弇按劒曰, 子輿弊賊, 卒爲降虜耳. 我至長安, 與國家陳漁陽上谷兵馬之用, 還出太原代郡, 反覆數十日, 歸發突騎以轔烏合之衆, 如摧枯折腐耳. 觀公等不識去就, 族滅不久也.)」
그러나 孫倉과 衛包 等은 王郞에게 가 버리고 말았다. 耿弇은 이들을 붙잡지 않고 軍隊를 이끌고 劉秀에게 달려갔으며, 劉秀의 麾下에서 弈奕한 功을 세워 後漢의 開國 功臣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後漢書 耿弇傳》에 나오는데, 까마귀를 모아 놓은 것 같은 무리들이란 말에서 ‘烏合之卒’이 由來했다. ‘烏合之衆’이라고도 한다.
38. 옥석구분(玉石俱焚) 玉石俱焚
玉과 돌이 함께 불타다. 善과 惡이 區分되지 않고 함께 滅亡을 當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犧牲되는 것을 比喩
「오늘 나는 그대들과 함께 命을 받들어 天罰을 내리려 한다. 그대들 軍士들은 王室을 爲해 힘을 合하고 나를 輔弼하여 삼가 天子의 威命을 받들도록 하라. 崑岡에 火災가 나면 玉과 돌이 함께 타 버린다. 天王의 官吏(義和)가 德을 잃었으니 (그 臣下들도) 猛烈한 불길과 같이 함께 被害를 볼 것이다. 이에 그 首魁(義和)를 쳐서 滅亡시키되, 不得이 協助한 者는 嚴重하게 罪를 묻지 않아도 된다. 예前에 물든 나쁜 汚俗이 모두 새로워지도록 하겠다. 嗚呼라! 懲戒하겠다는 마음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이기면 이 征伐이 이루어지고, 불쌍하다는 마음이 懲戒하겠다는 마음을 이기면 成功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 軍士들은 힘써 警戒할지어다.
(今予以爾有衆, 奉將天罰, 爾衆士同力王室, 尙弼予欽承天子威名. 火炎崑岡, 玉石俱焚. 天吏逸德, 烈於猛火. 殲厥渠魁, 脅從罔治. 舊梁汚俗, 咸與惟新. 嗚呼. 威克厥愛, 允濟. 愛克厥威, 允罔功. 其爾衆士, 懋戒哉.)」
* 書經 · 夏書 윤정(胤征)에. 書經(서경) 第四 胤征(윤정) 1~4
夏나라 仲康 王 때 義和라는 諸侯가 있었다. 그는 行動이 바르지 못하여 自己 職責을 다하지 못하였고, 管內의 百姓이 그를 따르지 않았다. 仲康은 兄이며 前 王이었던 太康이 無道하여 다른 諸侯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兄을 廢하고 스스로 王位에 올랐는데, 德이 있어 百姓들이 그를 따랐다. 仲康은 胤侯에게 命하여 義和를 치게 하였다. 胤侯가 出征하면서 戰爭을 하는 趣旨를 말한 것이 바로 胤征이다.
39. 옥석혼효(玉石混淆)
玉과 돌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는 뜻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뒤섞여서 좋고 나쁨을 區分하지 못할 때 쓰이는 말이다.
「正經은 道의 바다이고 子書는 이것을 補充하는 냇물의 흐름이다. ······ 方法은 달라도 道를 傳播하는 데는 다름이 없다. 옛사람들은 才能을 얻기 어려움을 嘆息하여 崑山의 玉이 아니라 해서 夜光珠를 버리거나 聖人의 글이 아니라 해서 修養이 되는 말을 버리지는 않았다. ······ 漢魏 以來로 有益한 글이 많이 쓰였음에도 不拘하고 이를 올바르게 評價할 聖人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所見이나 知識이 옅은 사람들은 外貌를 꾸미기에만 置重하고 글字 풀이에만 汨沒해서 글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을 理解하려고 하지 않았다. ······ 또 賤薄한 詩賦를 鑑賞하는가 하면 뜻 깊은 子書를 하찮게 여기며 갈고닦는 데 도움이 되는 金言을 하찮게 생각하고 不必要하게 華麗한 말을 技巧로 생각했으니, 참과 거짓이 뒤바뀌고 玉과 돌이 뒤섞이며 雅樂도 淫亂한 桑間의 音樂으로 보고 龍무늬 繡를 놓은 아름다운 緋緞옷도 葛布로 만든 옷으로 본다. 모두가 다 그러하니 참으로 慨嘆스럽기 짝이 없다.
(或貴愛詩乘淺近之細文, 忽薄深美富博之子書, 以磋切之至言爲騃拙, 以虛華之小辯爲姸巧, 眞爲顚倒, 玉石混淆. 同廣樂於桑間, 鈞龍章於卉服. 悠悠皆然, 可嘆可慨也.)」
* 葛洪의 抱朴子 尙博에.
元文의 廣樂은 阿樂을 말한다. 桑間은 濮水 近處에 있는 風紀가 紊亂하고 淫亂이 盛行한 地域으로, 淫亂한 音樂의 代名詞이다. 龍章은 龍무늬를 그렸거나 繡를 놓은 옷을 말한다. 卉服은 葛布로 만든 옷을 말한다.
葛洪은 쉽고 便安한 것만을 찾는 世態를 恨嘆하며, 賤薄한 글에 사람들의 마음이 휩쓸리는 것을 哀惜해했는데, 여기에서 ‘玉石混淆’가 나왔다.
40. 옥하가옥(屋下架屋)
지붕 밑에 또 지붕을 만들다. 앞 時代 사람이 이미 해 놓은 일을 그대로 모방해서 새로운 것이 없는 것을 比喩
「庾闡 (字는 仲初)이 揚都賦를 지어 庾亮에게 주었다. 庾亮은 親族의 情理로 이 詩의 聲價를 極讚했다. “二京賦와 함께 세우면 세 篇의 傑作이 되고, 三都賦와 함께 세우면 네 篇의 傑作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앞 다투어 이 詩를 베끼게 되어 종이 값이 뛰었다. 그런데 太傅 謝安이 酷評을 했다. “別게 아니다. 이 詩는 마치 지붕 밑에다 또 지붕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모든 것이 (옛 사람들의 作品을) 摸倣했을 뿐, 賤薄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庾仲初作揚都賦成, 以呈庾亮. 亮以親族之懷, 大爲其名價云, 可三二京, 四三都. 於此人人競寫, 都下紙爲之貴. 謝太傅云, 不得爾. 此是屋下架屋耳. 事事擬學, 而不免儉狹.)」
이 이야기는 《世說新語 文學》에 나오는데, 謝安의 말에서 ‘屋下架屋’이 由來했다. 〈揚都賦〉는 揚都(南京)의 아름다운 風景과 融盛함을 노래한 作品이다. 二京賦는 張衡의 作品으로 西京賦와 東京賦의 두 篇으로 이루어졌다. 西京은 長安이고, 東京은 洛陽이다. 三都賦는 左思의 作品으로 吳都賦, 魏都賦, 蜀都賦의 세 篇으로 이루어졌다. 五都는 建業, 魏都는 鄴, 蜀都는 成都이다.
이 成語는 北齊의 顔之推가 子孫들을 爲하여 쓴 《顔氏家訓》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魏晉 以後에 쓰인 모든 冊들은 理論과 內容이 重復되고 事實이 뒤섞여 番갈아 서로 本뜨고 가르쳐 지붕 밑에 또 지붕을 만들고 平牀 위에 또 平牀을 올린 것과 같다.
(魏晉以來所著諸子, 理重事複, 遲相摸斅, 猶屋下架屋, 牀上施牀爾.)」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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