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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한자성어(漢字成語)**/고사성어(故事成語)

고사성어(故事成語) (ㅇ- 4 오매불망~ )

by 산산바다 2026. 3. 7.

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글 목록

 

 

 고사성어(故事成語) (- 4 오매불망~ )

 

 

31. 오매불망(寤寐不忘) 寤寐不忘

자나 깨나 잊지 못하다.

 

關關雎鳩 : 꾸욱꾸욱 우는 물수리

在河之洲 : 黃河의 모래톱에 있듯이

窈窕淑女 : 얌전하고 고운 아가씨

君子好逑 : 사나이의 좋은 짝

 

參差荇菜 : 올망졸망 조아기(노랑머리)

左右流之 : 이리저리 찾듯이

窈窕淑女 : 얌전하고 고운 아가씨

寤寐求之 : 자나 깨나 하지요

 

求之不得 : 해도 못 얻으니

寤寐思服 : 자나 깨나 생각하네

悠哉悠哉 : 그리워 그리워

輾轉反側 : 엎치락뒤치락

 

參差荇菜 : 올망졸망 조아기

左右采之 : 이리저리 캐듯이

窈窕淑女 : 얌전하고 고운 아가씨

琴瑟友之 : 거문고와 琵琶 어울리는 것처럼 사귀고파

 

參差荇菜 : 올망졸망 조아기

左右芼之 : 이리저리 고르듯이

窈窕淑女 : 얌전하고 고운 아가씨

鐘鼓樂之 : 과 북이 어울리는 것처럼 즐기고파

 

詩經 · (國風)詩經 全文 國風(160) · (周南) 關雎〉》01 關雎(관저)-詩經(시경)

詩句寤寐求之, 寤寐思服에서 寤寐不忘由來했다. 關雎나라 文王과 그의 아내 太姒稱頌한 것이라고도 하며, 어여쁜 處女를 짝사랑하는 노래라고도 하고, 臣下文王太姒結婚祝賀하는 노래라고도 하며, 太姒文王美女했으나 뜻같지 않아 근심하는 노래라 보는 見解도 있다.

 

 

32. 오손공주(烏孫公主) 乌孙公主

烏孫公主. 政略結婚犧牲羊이 된 슬픈 運命女人比喩

 

烏孫西域 地方割據하던 투르크(突闕族)遊牧民族으로, 한때 그 勢力天山 山脈 北쪽의 이르츠크 湖水로부터 일리 (伊犁河) 流域盆地까지 이르렀을 만큼 强大했다. 當時 中國北方掌握하고 있던 匈奴烏孫보다 했는데, 자주 나라를 侵犯했다. 漢高祖 劉邦 以來 6代 皇帝 景帝에 이르기까지 줄곧 펼쳐 왔던 匈奴和親 政策强攻策으로 바꾼 武帝, 烏孫과 함께 匈奴協攻計劃을 세우고 張騫使臣으로 보내 同盟을 맺었다. 그리고 10年 後 同盟을 더욱 强化하기 武帝兄 江都王 (劉建)의 딸인 細君公主라 속여 늙은 烏孫에게 집보냈다. 德分匈奴나라와 烏孫協攻을 견디다 못해 한北方으로 밀려났으며, 西域 50나라가 나라를 上國으로 섬기게 되었고 나라는 異民族의 이반(Iban)을 막기 龜玆西域都護府를 두었다. 細君은 말도 하지 않는 異域 땅에서 사는 슬픔을 노래한 烏孫公主悲愁歌를 지었다.

 

吾家嫁我兮天一方 : 우리 집에서 나를 시집보내니 하늘 한쪽 끝이어라

遠托異國兮烏孫王 : 머나먼 他國에 몸을 맡기니 烏孫王이로다

窮廬爲室兮旃爲墻 : 天幕이 집이 되고 모전(毛氈)은 담장이 되었으며

以肉爲食兮酪爲漿 : 고기가 밥이 되고 젖이 국이 되었네.

居常土思兮心內傷 : 살면서 恒常 故鄕 그리워하니 마음이 아프구나.

願爲黃鵠兮歸故鄕 : 누런 고니가 되어 故鄕으로 돌아가고파

 

이 노래를 해 들은 漢武帝細君을 가엾게 여겨 해마다 細君에게 膳物을 보냈다. 數年이 지나 더욱 老齡이 된 烏孫王細君自己 孫子에게 집보내려 했다. 그들에게는 當然風習이었지만 細君에게는 驚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細君나라에 使者를 보내 이 事實을 알리고 歸國하게 해 달라고 武帝에게 付託했으나 武帝는 끝내 歸國許諾하지 않았다. 結局 細君烏孫王孫子孫岑의 아내가 되어 딸을 낳았다. 이처럼 나라를 匈奴危脅에서 벗어나게 한 一等 功臣細君은 말도 하지 않는 異域 땅에서 故鄕을 그리는 노래를 부르며 슬픔 속에 살다가 늙어 죽었다. 이 이야기는 漢書 西域傳에 나온다.

 

 

33.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조금 낫고 못한 정도(程度)의 차이(差異)는 있으나 본질적(本質的)으로는 차이(差異)가 없음을 이르는 말. 중국(中國) 양나라(--) 혜왕(惠王)이 정사(政事)에 관하여 맹자(孟子)에게 물었을 때, 전쟁(戰爭)에 패()하여 어떤 자()는 백() (), 또 어떤 자()는 오십(五十) ()를 도망(逃亡)했다면, () ()를 물러간 사람이나 오십(五十) ()를 물러간 사람이나 도망(逃亡)한 것에는 양자(兩者)의 차이(差異)가 없다고 대답(對答)한 데서 유래(由來)한다.

 

나라 惠王이 말했다.

"寡人은 나라일을 다스림에 있어 마음을 다 기울이고 있을 뿐입니다.

를 들면 河內地方凶年이 들면 그곳 百姓들을 河東地方으로 옮김과 同時食糧河內地方으로 옮겨 줍니다.

萬一 河東地方凶年이 들면 亦是 이와같은 政策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웃나라 임금들이 政治하는 것을 살펴보건데, 나만큼 百姓들에 하여 마음을 쓰는 임금이 없는데도, 이웃 나라 百姓들이 더 줄지 않고 우리나라 百姓들이 더 늘어나지 아니하니,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孟子對答하였다.

"께서 戰爭을 좋아하시니 컨데 戰爭로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둥둥 ! 하고 북이 울려서 敵軍武器를 맞대고 싸움이 始作되어 이윽고 戰勢不利해지면 옷을 벗어던지고 武器를 끌고서 도망치게 되는데, 어떤 兵士百步를 도망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또 어떤 兵士五十步를 도망가다가 걸음을 멈춥니다.

이때 五十步 도망간 兵士百步 도망간 兵士를 비겁(卑怯)하다고 비웃는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비록 百步 도망간 것은 아닐지언정 五十步 도망간 兵士亦是 도망친 것은 마찬가지이니까요."

 

(梁惠王"寡人之於國也盡心焉耳矣로니 河內凶卽 移其民於河東하며 移其栗於河內하고 河東커든 亦然하노니 寡人國之政컨대 無如寡人之用心者로데 隣國之民不可少하며 寡人之民不可多何也니이까.

" 孟子對曰 "好戰하시니 請以戰喩하리이다.

塡然鼓之하여 兵刃旣接이어든 棄甲曳兵而走하되 或百步而後하며 或五十步而後하여 以五十步笑百步卽何如하니이가." "不可하니 直不百步耳언정 是亦走也니이다.")

 

( 孟子 梁惠王 )

'五十步 百步'有名한 말이 여기에서 由來되었거니와,

孟子는 이와 같은 比喩를 잘 驅使能辯家였다. 爲政者平素에 늘 百姓을 사랑하여 不當稅金, 不當政策을 삼가고 治山.治水.治安愛護하는 한 便, 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政治第一條이다.

 

平素에는 百姓酷使시키면서 兇年이나 들어야 겨우 굶어 죽지 않도록

對策講究해 주는 것, 이런 程度를 가지고 仁義政治를 베풀고 있다고 自負하여 이웃 諸侯들의 惡政을 비웃는다면, 이것은 五十步 도망간 주제에 百步 도망간 사람을 겁()보라고 비웃는 것과 무엇이 다를 바 있겠는가?

 

 

34. 오월동주(吳越同舟) 吴越同舟

나라 사람과 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다. 서로 怨讐之間이라도 共同目的達成하기 위해서는 서로 協力한다는 것을 比喩

 

春秋時代戰略家 孫武孫子兵法 九地에서 軍士를 쓸 수 있는 아홉 가지 땅을 列擧해 놓고 있는데,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死地이다.

 

兵士들을 갈 곳이 없는 地境에 집어넣으면 죽음에 이르러도 敗退하지 않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兵士들이 盡力을 다하여 싸우게 된다. 兵士들이 陷穽에 깊이 빠지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 갈 곳이 없으면 軍心이 오히려 安定된다. 敵地에 깊이 들어가면 서로 依支하여 흩어지지 않게 된다. 不得已狀況에서는 싸울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까닭에 兵士들은 다스리지 않아도 警戒하고, 하지 않아도 아래의 情況上達되며, 約速하지 않아도 서로 和睦하고 도우며, 命令하지 않아도 紀律을 지킨다. 迷神自然히 없어지고 서로 疑心이 없어지며, 죽음에 이르러도 逃亡하지 않게 된다. 兵士들이 財物을 남기지 않는 것은 財貨를 싫어해서가 아니며, 生命危險을 돌보지 않는 것은 오래 살기를 싫어해서가 아니다. 命令을 내리는 날로 士卒앉아 있는 들은 눈물로 옷깃을 적시고, 누워 있는 滿面이 눈물범벅이 될 것이다. 兵士들을 갈 곳이 없는 狀況投入시키면 專諸와 조귀(曹侮) 같은 勇氣가 나오는 이다. 그러므로 用兵을 잘하는 자는 率然과 같아야 한다. 率然常山의 뱀으로, 머리를 치면 꼬리가 덤비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덤비고, 몸통을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한꺼번에 덤벼든다.

(投之無所往, 死且不北, 死焉不得, 士人盡力. 兵士甚陷則不懼, 無所往則固. 深入則拘, 不得已則鬪. 是故其兵不修而戒, 不求而得, 不約而親, 不令而信, 禁祥去疑, 至死無所之. 吾士無餘財, 非惡貨也. 無餘命, 非惡壽也. 令發之日, 士卒坐者涕沾襟, 偃臥者涕交頤, 投之無所往. 諸侮之勇也. 故善用兵者, 譬如率然. 率然者, 常山之蛇也. 擊其首則尾至, 擊其尾則首至. 擊其中則首尾俱至.)

 

이렇게 死地說明다음과 같은 實例를 덧붙였는데, 바로 여기에서 吳越同舟由來했다.

 

히 묻는데 軍隊率然과 같이 움직이게 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 나라 사람과 나라 사람은 서로 미워하지만, 같은 배를 타고 건너가다가 바람을 만나게 되면 서로 돕기를 左右의 손이 함께 協力하듯이 한다.

(敢問, 兵可使如率然乎. , . 夫吳人與越人相惡也, 當其同舟而濟遇風, 其相救也, 加左右手.)

 

傳諸나라 公子 光 (吳王 闔閭)을 도와 吳王 僚暗殺刺客이다. 曹侮春秋時代 魯나라 莊公大夫이자 將軍曹沫이다. 曹沫나라와 여러 차례 싸워 해 많은 領土를 잃었으나, 나라 莊公나라 桓公會盟을 할 때 匕首를 들고 壇上에 올라가 桓公脅迫하여 自身이 잃은 땅을 되찾았다.

 

 

35. 오유선생(烏有先生)

常識的으로는 到底히 있을 수 없는 사람

 

까마귀는 온통 검어서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다들왜 그럴까連發했다.

結局 글자도 조()에서 (눈을 뜻함)이 하나 빠진 오()로 만들었다.

디 뜻은까마귀지만 烏飛梨落, 烏合之卒, 長頸烏喙(목이 길고 입이 뾰족한 人相)검다는 뜻도 있으며, 烏骨鷄, ? 어찌? 라는 疑問의 뜻도 가졌다.

 

따라서 烏有어찌 있을 수 있으랴가 되며, 烏有先生常識的으로는 到底히 있을 수 없는 사람 이라는 뜻이 된다.

 

司馬相如漢武帝때 살았던 稀代風流 文人이다. 그가 武帝에게 바친 上林賦는 사냥에 빠진 武帝慇懃諷諫하기 해 지은 것이다.

 

使臣으로 나라에 간 子虛齊王과 사냥하면서 서로 自國의 사냥터가 더 크고 豪華롭다고 誇張하자

烏有先生子虛를 꾸짖고또 이를 지켜본 無是公이라는 가 나서서 兩非論을 편다는 內容이다.

百姓苦痛은 생각하지 않고 사냥에만 빠져있는 두 나라의 國王은 옳지 않다는 뜻에서다.

 

재미있는 것은 登場 人物들의 이름이다.

子虛烏有先生, 그리고 無是公은 모두이런 사람은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言論 報道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그럴듯한 地位體面에도 不拘하고 常識的으로는 到底理解하기 힘든 行爲를 일삼는 가 많은 것 같다.

모두 現代版烏有先生들이 아닌가 싶다.

 

 

36. 오하아몽(吳下阿蒙) 吴下阿蒙

吳 地域 시골구석의 呂夢. 學識이 짧은 사람이나 進步가 전혀 없는 사람을 比喩하는 말이다.

 

三國時代 吳나라의 將軍 呂夢은 집안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學問을 배우지 못하고 일찍이 軍門에 들어가 武勇을 떨치고 많은 戰功을 세워 將軍位置까지 올랐다. 그러나 글을 배운 적이 없는 그는 싸움만 잘했을 뿐 學識不足하여, 어떤 官吏들은 慇懃히 그를 無視하기까지 했다. 孫權呂夢이 젊고 똑똑하지만 學問不足을 안타깝게 여겨 읽기를 勸勉했다. 呂夢은 그때부터 熱心을 읽기 始作했는데, 얼마 에는 學者들이 읽은 것보다 더 많은 涉獵하게 되었다.

 

周瑜가 죽은 , 그 뒤를 이어 都督이 된 魯肅陸口로 가는 길에 呂夢軍營을 지나게 되었다. 魯肅은 마음속으로 如前呂夢輕視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魯肅說得했다. “呂將軍功名이 나날이 빛나고 있으니 마음대로 하면 안 됩니다. 가서 보는 게 좋겠습니다.” 魯肅呂夢을 찾아갔다. 술자리가 한창일 때 呂夢魯肅에게 말했다. “當身重任을 받아 關羽와 이웃하게 되었는데, 어떤 計略으로 豫期치 않은 狀況對備하고 있습니까?” 魯肅은 엉겁결에 對答했다. “때에 하여 適當方法할 것이오.” 呂夢이 말했다. “只今 東()西()은 한집안이지만, 關羽事實 곰이나 호랑이 같은 사람입니다. 計劃을 어찌 미리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魯肅해 다섯 가지 計策을 그렸다. 魯肅은 이때에 자리를 넘어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그의 등을 치며 말했다. “呂子明, 나는 그대의 才略이 이 水準까지 미쳤는지 몰랐소.” 그리고 呂夢의 어머니께 人事하고, 呂夢交分을 맺고 헤어졌다.

(魯肅代周瑜, 當之陸口, 過蒙屯下. 肅意尙輕蒙, 或說肅曰, 呂將軍功名日顯, 不可以故意待也, 君宜顧之. 遂往詣蒙, 酒酣, 蒙問肅曰, 君受重任, 與關羽爲鄰, 將何計略, 以備不虞. 肅造次應曰, 臨時施宜. 蒙曰, 今東西雖爲一家, 而關羽實熊虎也. 計安可不豫定. 因爲肅畵五策. 肅於是越席就之, 拊其背曰, 呂子明, 吾不知卿才略所及乃至於此也. 遂拜蒙母, 結友而別.)

 

三國志 · 吳書 呂夢傳에 나오는데, ‘吳下阿蒙이란 말은 江表傳引用裴松之 注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魯肅呂夢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나는 이제껏 그대가 武術만을 아는 줄 알고 있었는데, 只今 보니 그대의 學問이 뛰어난 것이 더 以上 옛날 吳 地域의 시골구석에 있던 阿蒙이 아니구려.” 呂夢이 말했다. “선비는 모름지기 여러 날을 떨어져 있다가 만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程度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江表傳曰, 肅拊蒙背曰, 吾謂大弟但有武略耳, 至於今者, 學識英博, 非復吳下阿蒙. 蒙曰, 士別三日, 卽更刮目相待.)長江 以南江蘇省 地域을 말하며, ‘阿蒙中國人들이 親近한 사람이나 아이를 부를 때 이름이나 앞에 붙여 부르는 號稱이다. 江表傳現在 失典되었는데, 三國志裴松之 注에 많이 引用되어 있다.

 

 

37. 오합지졸(烏合之卒) 乌合之卒

까마귀를 모아 놓은 것 같은 兵士. 까마귀 떼와 같이 조직(組織)도 안 되고 訓練도 없이 모인 무리라는 뜻으로, 어중이떠중이를 比喩하는 말이다.

 

나라 末年, 王莽皇位簒奪하고 皇帝의 자리에 올라 을 세운 , 過度改革 政策을 펼쳤다가 失敗社會混亂에 빠져 들자 到處에서 反亂이 일어났다. 漢 王朝의 핏줄인 劉縯劉秀 兄弟들도 漢 王朝復興을 내걸고 軍士를 일으켰다. 이들은 各地에서 王莽軍隊盜賊 떼들을 擊破하고, 景帝子孫劉玄(更始帝)擁立함으로써 漢 王室再建했다. 그러나 世上에는 如前群雄들과 盜賊 떼들이 雄據 하였으며, 各 地方에서는 將軍들이 軍士를 일으켜 地方政權掌握하고 郡守縣令 等自己 마음대로 바꾸었다. 에서도 樊崇이 이끄는 赤眉軍, (我軍識別하기 해 눈썹에 붉은 물감을 했기 때문에 붉은 눈썹을 가진 軍隊라는 뜻의 赤眉軍이라 했다), 河北에서 遼東에 이르는 廣大地域支配하고 있던 王郞勢力이 가장 컸다. 王郞元來 一個 卜術家不過했지만 自身人望을 높이기 前漢 時代 成帝의 아들 劉子輿했다. 百姓들은 그 말을 믿고 王郞을 따랐으며, 그를 天子推戴하기에 이르렀다. 當時 冀州, 河北中南部, 山東西, 河南一帶)幽州 (北京, 河北 北部, 遼寧 一帶) 一帶는 모두 王郞에게 降服狀態였다.

 

當時 河北省 上谷太守였던 耿況王莽에게 벼슬자리를 받은 터여서 마음이 몹시 不安狀態였다. 그런데 때마침 劉秀更始帝을 받들어 王郞討伐하기 해 나섰다는 消息을 듣고, 當時 21의 아들 경엄(耿弇)劉秀麾下로 보냈다. 耿弇劉秀를 찾아가는 途中, 王郞나라 成帝의 아들 劉子輿詐稱하고 邯鄲에서 스스로 天子하며 皇帝가 되었다는 消息을 들었다. 耿弇의 부하 孫倉衛包王郞에게 歸順하자고 共謀했다.

 

그러자 耿弇이 칼자루를 굳게 잡고 嚴肅하게 말했다. “子輿(王郞)는 도둑일 뿐이고 兵卒들은 모두 降服捕虜들일 뿐이다. 내가 長安到着하여 나라에서 組織漁陽上谷軍隊를 이끌고 太原, 代郡에서 數十 日만 왔다 갔다 하면서 輕騎兵으로 奇襲하여 까마귀를 모아 놓은 것 같은 무리들을 깔아 버리면 마치 마르고 썩은 것들이 부러지듯이 될 것이다. 너희가 狀況을 알지 못하고 그에게 간다면 머지않아 滅族하지 못할 것이다.”

(弇按劒曰, 子輿弊賊, 卒爲降虜耳. 我至長安, 與國家陳漁陽上谷兵馬之用, 還出太原代郡, 反覆數十日, 歸發突騎以轔烏合之衆, 如摧枯折腐耳. 觀公等不識去就, 族滅不久也.)

 

그러나 孫倉衛包 等王郞에게 가 버리고 말았다. 耿弇은 이들을 붙잡지 않고 軍隊를 이끌고 劉秀에게 달려갔으며, 劉秀麾下에서 弈奕을 세워 後漢開國 功臣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後漢書 耿弇傳에 나오는데, 까마귀를 모아 놓은 것 같은 무리들이란 말에서 烏合之卒由來했다. ‘烏合之衆이라고도 한다.

 

 

38. 옥석구분(玉石俱焚) 玉石俱焚

과 돌이 함께 불타다. 區分되지 않고 함께 滅亡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犧牲되는 것을 比喩

 

오늘 나는 그대들과 함께 을 받들어 天罰을 내리려 한다. 그대들 軍士들은 王室해 힘을 하고 나를 輔弼하여 삼가 天子威命을 받들도록 하라. 崑岡火災가 나면 과 돌이 함께 타 버린다. 天王官吏(義和)을 잃었으니 (臣下들도) 猛烈한 불길과 같이 함께 被害를 볼 것이다. 이에 그 首魁(義和)를 쳐서 滅亡시키되, 不得協助嚴重하게 를 묻지 않아도 된다. 에 물든 나쁜 汚俗이 모두 새로워지도록 하겠다. 嗚呼! 懲戒하겠다는 마음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이기면 이 征伐이 이루어지고, 불쌍하다는 마음이 懲戒하겠다는 마음을 이기면 成功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 軍士들은 힘써 警戒할지어다.

(今予以爾有衆, 奉將天罰, 爾衆士同力王室, 尙弼予欽承天子威名. 火炎崑岡, 玉石俱焚. 天吏逸德, 烈於猛火. 殲厥渠魁, 脅從罔治. 舊梁汚俗, 咸與惟新. 嗚呼. 威克厥愛, 允濟. 愛克厥威, 允罔功. 其爾衆士, 懋戒哉.)

* 書經 · 夏書 윤정(胤征). 書經(서경) 第四 胤征(윤정) 1~4

 

나라 仲康 王 義和라는 諸侯가 있었다. 그는 行動이 바르지 못하여 自己 職責을 다하지 못하였고, 管內百姓이 그를 따르지 않았다. 仲康이며 前 王이었던 太康無道하여 다른 諸侯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하고 스스로 王位에 올랐는데, 이 있어 百姓들이 그를 따랐다. 仲康胤侯에게 하여 義和를 치게 하였다. 胤侯出征하면서 戰爭을 하는 趣旨를 말한 것이 바로 胤征이다.

 

 

39. 옥석혼효(玉石混淆)

과 돌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는 뜻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뒤섞여서 좋고 나쁨을 區分하지 못할 때 쓰이는 말이다.

 

正經의 바다이고 子書는 이것을 補充하는 냇물의 흐름이다. ······ 方法은 달라도 傳播하는 데는 다름이 없다. 옛사람들은 才能을 얻기 어려움을 嘆息하여 崑山이 아니라 해서 夜光珠를 버리거나 聖人의 글이 아니라 해서 修養이 되는 말을 버리지는 않았다. ······ 漢魏 以來有益한 글이 많이 쓰였음에도 不拘하고 이를 올바르게 評價聖人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所見이나 知識이 옅은 사람들은 外貌를 꾸미기에만 置重하고 글풀이에만 汨沒해서 글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을 理解하려고 하지 않았다. ······ 賤薄詩賦鑑賞하는가 하면 뜻 깊은 子書를 하찮게 여기며 갈고닦는 데 도움이 되는 金言을 하찮게 생각하고 不必要하게 華麗한 말을 技巧로 생각했으니, 참과 거짓이 뒤바뀌고 과 돌이 뒤섞이며 雅樂淫亂桑間音樂으로 보고 무늬 를 놓은 아름다운 緋緞옷도 葛布로 만든 옷으로 본다. 모두가 다 그러하니 참으로 慨嘆스럽기 짝이 없다.

(或貴愛詩乘淺近之細文, 忽薄深美富博之子書, 以磋切之至言爲騃拙, 以虛華之小辯爲姸巧, 眞爲顚倒, 玉石混淆. 同廣樂於桑間, 鈞龍章於卉服. 悠悠皆然, 可嘆可慨也.)

* 葛洪抱朴子 尙博.

 

元文廣樂阿樂을 말한다. 桑間濮水 近處에 있는 風紀紊亂하고 淫亂盛行地域으로, 淫亂音樂代名詞이다. 龍章무늬를 그렸거나 를 놓은 옷을 말한다. 卉服葛布로 만든 옷을 말한다.

 

葛洪은 쉽고 便安한 것만을 찾는 世態恨嘆하며, 賤薄한 글에 사람들의 마음이 휩쓸리는 것을 哀惜해했는데, 여기에서 玉石混淆가 나왔다.

 

 

40. 옥하가옥(屋下架屋)

지붕 밑에 또 지붕을 만들다. 時代 사람이 이미 해 놓은 일을 그대로 모방해서 새로운 것이 없는 것을 比喩

 

庾闡 (仲初)揚都賦를 지어 庾亮에게 주었다. 庾亮親族情理로 이 聲價極讚했다. “二京賦와 함께 세우면 세 傑作이 되고, 三都賦와 함께 세우면 네 傑作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앞 다투어 이 를 베끼게 되어 종이 값이 뛰었다. 그런데 太傅 謝安酷評을 했다. “게 아니다. 는 마치 지붕 밑에다 또 지붕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모든 것이 (옛 사람들의 作品) 摸倣했을 뿐, 賤薄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庾仲初作揚都賦成, 以呈庾亮. 亮以親族之懷, 大爲其名價云, 可三二京, 四三都. 於此人人競寫, 都下紙爲之貴. 謝太傅云, 不得爾. 此是屋下架屋耳. 事事擬學, 而不免儉狹.)

 

이 이야기는 世說新語 文學에 나오는데, 謝安의 말에서 屋下架屋由來했다. 揚都賦揚都(南京)의 아름다운 風景融盛함을 노래한 作品이다. 二京賦張衡作品으로 西京賦東京賦의 두 으로 이루어졌다. 西京長安이고, 東京洛陽이다. 三都賦左思作品으로 吳都賦, 魏都賦, 蜀都賦의 세 으로 이루어졌다. 五都建業, 魏都, 蜀都成都이다.

 

成語北齊顔之推子孫들을 하여 쓴 顔氏家訓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魏晉 以後에 쓰인 모든 들은 理論內容重復되고 事實이 뒤섞여 갈아 서로 뜨고 가르쳐 지붕 밑에 또 지붕을 만들고 平牀 위에 또 平牀을 올린 것과 같다.

(魏晉以來所著諸子, 理重事複, 遲相摸斅, 猶屋下架屋, 牀上施牀爾.)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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