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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한자성어(漢字成語)**/고사성어(故事成語)

고사성어(故事成語) (ㅇ- 9 이포역포~ )

by 산산바다 2026. 3. 7.

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글 목록

 

 

 고사성어(故事成語) (- 9 이포역포~ )

 

 

81. 이포역포(以暴易暴)

暴惡함으로 暴惡함을 바꾸다. 爲政者暴力과 힘에 依支하여 政治를 하는 것을 比喩

 

나라 때의 諸侯國孤竹國을 다스리던 孤竹君世上을 떠나면서 伯夷보다도 同生 叔齊가 더 指導力이 있다고 여기고 王位叔齊에게 물려준다는 遺言을 남겼다. 叔齊長男伯夷王位를 이어야 한다며 辭讓했고, 伯夷父王遺言을 따르는 것이 子息 道理라며, 孤竹國을 떠나 隱遁하였다. 事實을 안 叔齊 亦是 나라를 떠나 몸을 숨기고 말았다. 이렇게 나라를 떠나 各者 隱遁 生活을 하던 두 사람은 西伯 昌 (나라 文王)이 어질고 老人恭敬하는 사람이란 所聞을 듣고 마치 約束이나 한 것처럼 西伯 昌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到着했을 때 西伯 昌은 이미 죽고 없었고, 아들 武王이 아버지의 位牌를 안고 나라의 紂王討伐하기 出戰하는 길이었다. 두 사람은 武王의 말고삐를 잡고 했다. “아버지가 죽었는데 葬事도 지내지 않고 싸움을 일으키려 하니 孝道라 할 수 있는가? 臣下諸侯로서 天子弑害하려고 하니 옳은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武王左右에 있던 軍士들이 그들을 죽이려고 하자 太公望 呂尙이들은 로운 사람이다.”라고 하며 죽이지 못하게 했다. 武王나라를 平定하자 온 天下나라를 宗主國으로 받들었다. 伯夷叔齊天道를 거스른 나라의 穀食을 먹지 않겠다며 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꺾어 먹고 살다가 굶어 죽었다. 이때 伯夷叔齊采薇歌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以暴易暴由來했다.

 

登彼西山兮 采其薇矣 : 西山에 올라 고사리를 캔다.

以暴易暴兮 不知其罪矣 : 暴惡함으로 暴惡함을 바꿈이여 그 를 모르는구나.

神農虞夏忽焉沒兮 安適歸矣 : 神農 虞夏 時代忽然히 지나갔으니,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吁嗟徂兮 命之衰矣 : 嗚呼, 가야겠구나. 天命했구나.

 

* 史記 伯夷列傳에 나온다.

 

 

82. 인자무적(仁者無敵)

어진 사람은 널리 사람을 사랑하므로 天下敵對할 사람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 孟子 梁惠王章句上篇

나라 惠王孟子에게 混亂政局助言하자, 孟子仁慈政治를 해서 刑罰을 가볍게 하고, 稅金을 줄이며, 農事철에는 農事를 짓게 하고, 壯丁들에게는 孝誠友愛忠誠信用을 가르쳐 父兄과 윗사람을 섬기게 한다면, 몽둥이를 들고서도 나라와 나라의 堅固軍隊를 이길 수 있다고 對答하였다.

 

그리고 저들은 百姓들이 일할 時期를 빼앗아 밭을 갈지 못하게 함으로써 父母는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兄弟妻子는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듯 저들이 百姓塗炭에 빠뜨리고 있는데, 께서 가서 征伐한다면 누가 對敵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르기를 仁慈한 사람에게는 이 없다(仁者無敵)’고 하는 것입니다. 께서는 疑心치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83. 인자무적(仁者無敵)

仁慈한 사람에게는 이 없다.

 

眞實로 어진 政治를 베풀면서 百姓自身의 몸처럼 여기는 君主에게는 自然百姓들이 따르게 마련이어서 反對하는 勢力이 없게 되고, 비록 戰爭이 일어나더라도 人心이 떠나지 않아 칼로도 어찌할 수 없게 된다는 뜻으로, 仁慈한 사람에게는 이 없다는 말이다.

* 孟子 梁惠王章句 上篇에 나온다.

梁 惠王孟子에게 戰爭에서 진 恥辱을 어떻게 하면 씻을 수 있는지를 묻자, 孟子仁慈政治를 해서 刑罰을 가볍게 하고, 稅金을 줄이며, 農事철에는 農事를 짓게 하고, 壯丁들에게는 孝誠友愛忠誠信用을 가르쳐 父兄과 윗사람을 섬기게 한다면, 몽둥이를 들고서도 나라와 나라의 堅固軍隊를 이길 수 있다고 對答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들은 百姓들이 일할 時期를 빼앗아 밭을 갈지 못하게 함으로써 父母는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兄弟妻子는 뿔뿔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저들이 百姓塗炭에 빠뜨리고 있는데, 께서 가서 征伐한다면 누가 對敵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르기를 '仁慈한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仁者無敵)'고 하는 것입니다. 께서는 疑心하지 마십시오."

 

'仁者無敵'孟子가 지어 낸 말이 아니라, 以前부터 해져 오던 것을 引用한 것이다. 서투른 글이 聰明함보다 낫다는 뜻의 鈍筆勝聰도 같은 理致이다. 무릇 부드러운 것이 한 것을 이기고, 붓이 칼을 꺾는 이다.

 

 

84. 인생감의기(人生感意氣) 人生感意气

사람은 살아가면서 意氣를 느낀다. 意志氣槪에 감동한다는 말이다.

 

中原初逐鹿 : 中原 땅에 처음 帝位 다툼이 일어나자

投筆事戎軒 : 붓을 내던지고 戰爭에 나갔다오

縱橫計不就 : 合縱連橫 이루지 못했어도

慷慨志猶存 : 慷慨한 뜻만은 如前했지

杖策謁天子 : 말채찍 손에 들고 天子를 뵌

驅馬出關門 : 말을 치달려 函谷關을 나왔다오

請纓繫南越 : 밧줄만 주신다면 南越王을 잡아 오고

憑軾下東藩 : 수레에 기댄 채로 나라를 降服시키겠소

鬱紆陟高岫 : 이리 구불 저리 구불 꼭대기 올라

出沒望平原 : 드러났다 숨었다 하는 너른 들판 바라보았소

古木鳴寒鳥 : 오래 묵은 나뭇가지에 겨울새 울어 대고

空山啼夜猿 : 寂寞山中 한밤에 원숭이 울부짖으니

旣傷千里目 : 千 里 故國을 바라보니 마음 아프고

還驚九逝魂 : 놀란 마음 不安하여 集中이 안 된다오

豈不憚艱險 : 힘들고 어려운 일 어찌 꺼려지지 않겠소만

深懷國士恩 : 國使 待接 받은 恩惠 마음 깊이 품겠소

季布無二諾 : 季布承諾을 거듭하는 일이 없었고

侯瀛重一言 : 侯瀛은 한마디의 말을 히 여겼다오

人生感意氣 : 사람은 살면서 意氣를 느끼니

功名誰復論 : 功名을 누가 다시 하겠소

 

* 위징(魏徵) 述懷.

위징(魏徵)唐太宗을 도와 貞觀之治를 이룩한 사람이었지만, 마흔 살이 될 때까지는 그다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었다. 위징(魏徵)登用直後, 山東의 서세적(徐世勣)說得하여 投降시키겠다고 建議하여 皇帝許諾을 받았다. 魏徵潼關해 떠나면서 自己認定해 준 皇帝恩惠報答하고, 氣槪를 지킨 先賢들을 받겠다는 意志를 담은 이 를 지었다.

 

사슴을 쫓는다는 뜻의 逐鹿이란 帝位 다툼을 比喩하는 말이다. 옛날에는 帝位政權을 흔히 사슴에 比喩했다. ‘붓을 내던지고 戰爭에 나갔다는 말은 나라 때 班超가 붓을 내던지고 軍官이 되어 을 세우겠다는 뜻을 세운 것을 말한다. ‘밧줄만 주신다면 南越王을 잡아 오고나라 때 終軍南越王을 잡아 오겠다며 漢武帝에게 밧줄을 내려 줄 것을 했다는 이야기에서 나왔다. ‘수레에 기댄 채로 나라를 降伏시키겠소나라 때 酈食其(역이기)漢高祖 劉邦을 받아 나라 王 田廣說得하여 降服시키고 나라 70如 城나라의 쪽 번국(東藩)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이를 漢書 酈食其傳에서는 그가 수레 앞턱의 가로나무에 기대어 나라 70如 城降伏시켰다.

(食其憑軾下齊七十餘城.)”表現했다. ‘千 里 故國을 바라보니 마음 아프고楚辭 招魂눈으로 멀리 千 里 故國을 바라보니 봄날 마음이 아프고, (몸은 他鄕에 있지만)은 돌아가 江南을 슬퍼한다.(目極千里兮傷春心, 魂兮歸來哀江南.)”에서 따온 것이고, ‘놀란 마음 不安하여 集中이 안 된다오屈原(哀郢)에 나오는 이 하루저녁에 아홉 이나 달아났다.(魂一夕而九逝.)”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에서 由來하여 九逝精神集中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季布나라의 將軍으로 信義가 두텁기로 이름난 사람이고 侯瀛戰國時代 魏나라 信陵君長子로 여겨 上賓으로 모셨던 人物, 信陵君나라를 하려고 떠날 때, 나이가 많아 從軍할 수 없게 되자 魂魄이라도 따르겠다며 自決했다.

 

魏徵54의 나이로 죽었을 때 太宗은 다음과 같이 말하여 嘆息치 못했다.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衣冠을 바르게 할 수 있고, 옛날을 거울로 삼으면 興亡盛衰를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自己行實이 옳은가 그른가를 알 수 있다. 은 일찍이 이 세 가지 거울을 가지고 안으로 自身過失防備했는데, 이제 魏徵이 갔으니 거울 하나가 없어진 것이구나.

(以銅爲鑒, 可正衣冠. 以古爲鑒, 可知興替. 以人爲鑒, 可明得失. 朕嘗保此三鑒, 內防己過. 今魏徵逝, 一鑒亡矣.)

 

 

85. 인생조로(人生朝露)

사람의 은 아침 이슬과 같다. 삶의 덧없음을 比喩

 

* 漢書 蘇武傳.

前漢 武帝蘇武라는 將帥가 있었다. 그의 職責中郞將으로 捕虜交換하기 하여 匈奴의 땅으로 들어갔다가, 匈奴間內紛으로 捕虜가 되고 말았다.

 

匈奴의 우두머리인 선우(單于)蘇武에게 降服하였으나 끝까지 降伏하지 않았으므로 捕虜가 되었고, 北海邊方으로 推放되었다. 그곳에서 蘇武는 들쥐를 잡아 먹고, 풀뿌리를 캐 먹으면서 목숨을 延命하며 반드시 故國으로 돌아가리라는 希望抛棄하지 않았다.

 

十如 年이지난 어느날 蘇武親舊李陵蘇武를 찾아왔다.

李陵蘇武匈奴에 잡힌 이듬해 蘇武救出하고, 匈奴盡滅하려고 5,000軍士를 데리고 匈奴에 쳐들어갔다가, 50,000이 넘는 들과 對峙하다.

衆寡不敵으로 匈奴捕虜가 되고 말았다.

李陵單于提案을 받아들여 그곳에서 結婚하고 그 곳의 將帥가 되었다.

그렇기에 李陵恒常 降將이 된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더욱이 蘇武를 본다는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單于强請에 어쩔수 없이 蘇武懷柔하기 해 찾은 것이다.

 

蘇武를 만난 李陵은 큰 잔치를 벌이고 蘇武慰勞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單于가 내가 자네의 親舊인것을 알고, 자네를 懷柔하여 보라고 나를 보냈네, 무엇때문에 이 苦生을 하고 있나?

10이 넘는 歲月 동안 故國에서는 한 도 자네를 찾으려하지 않았잖는가.

人生은 아침이슬(人生朝露)과 같다고 하지 않는가? 이제 그만 投降하세"

그러나 蘇武投降하지 않고 節槪를 지키며 親舊를 보냈다.

얼마 後 武帝의 아들 昭帝派遣特使智略으로 19만에 풀려나 故國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由來된 말이 人生朝露.

 

 

86. 일가지언(一家之言)

一家의 말. 學問이나 藝術 等分野에서 獨者的境地에 이른 狀態를 가리키는 말이다.

 

나라 때의 史官이었던 司馬遷匈奴投降李陵辯護하다 武帝여움을 사서 宮刑했지만, 挫折하지 않고 心血을 기울여 史記完成하였다. 司馬遷史記 太史公自序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그래서 天下에 흩어져 있는 舊聞網羅하여 王業이 일어난 처음과 끝을 살피고 興盛하고 衰亡한 것을 살펴보았으며, 事實立脚하여 하고 考察했다. 大略 三代推定하여 記述하고, 나라와 나라를 記錄하되 위로는 軒轅으로부터 始作하여 아래로는 只今에 이르기까지 열두 本紀를 지었는데 모두 條例를 나누어 記錄했다. 그러나 時代를 같이하는 것도 있고 달리하는 것도 있어서 年代確實치 않으므로 열 를 만들었다. 時代에 따라 禮樂增減, 法律易法改正, 兵權, 山川, 鬼神, 天人, 時勢 變化에 따라 해지는 것을 살피고 世上變化適應해 나가는 內容으로 여덟 를 만들었다. 스물여덟 의 별자리(宿)北極星을 돌고, 서른 의 바퀴살은 한 의 바퀴하여 끝없이 돈다. 輔弼하는 팔다리 같은 臣下들을 이에 比喩하여 忠臣으로서 하여 君主를 받드는 모습을 三十 個世家로 지었다. 持支하고 才能이 뛰어나서 時期를 놓치지 않고 天下功名을 세운 사람들에 해서는 七十 個列傳을 지었다. 무릇 130526,500로 이를 太史公書라고 한다. 槪略的인 것을 自序로 지어 本文에 빠진 部分을 모으고 補完하여 一家의 말을 이루었다. 六經한 서로 다른 見解들을 整理하고 百家雜多學說整理했다. 正本名山에 깊이 간직하고 副本首都에 두어 後世 聖人君子들의 閱覽을 기다린다. 太史公自序 第70을 지었다.(······罔羅天下放失舊聞, 王跡所興, 原始察終, 見盛觀衰, 論考之行事, 略推三代, 錄秦漢, 上記軒轅, 下至於茲, 著十二本紀, 旣科條之矣. 竝時異世, 年差不明, 作十表. 禮樂損益, 律曆改易, 兵權山川鬼神, 天人之際, 承敝通變, 作八書. 二十八宿環北辰, 三十輻共一轂, 運行無窮, 輔拂股肱之臣配焉, 忠信行道, 以奉主上, 作三十世家. 扶義俶儻, 不令己失時, 立功名於天下, 作七十列傳. 凡百三十篇, 五十二萬六千五百字, 爲太史公書. 序略, 以拾遺補蓺, 成一家之言, 厥協六經異傳, 整齊百家雜語, 藏之名山, 副在京師, 俟後世聖人君子. 第七十.)

 

이처럼 빠진 부분을 모으고 補完하여 一家의 말을 이루었다.’司馬遷의 말에서 一家之言由來했다. 이 말은 司馬遷親舊任安 (少卿)에게 보낸 便紙(報任少卿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요즈음 저는 不遜하게도 잘 쓰지도 못하는 文章寄託하여 예부터 世上해 내려오는 漏落된 이야기를 網羅하여 그 行使考證하고 始作結末宗合하여 成功失敗, 그리고 興盛衰亡理致考察했습니다. 그리하여 위로는 軒轅에서 아래로는 只今에 이르기까지 10, 本記 12, 8, 世家 30, 列傳 70編 等 모두 130을 지어 하늘과 사람의 關係窮究하고 古今變化하여 一家文章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僕竊不遜, 近自託於無能之辭, 網羅天下放失舊聞, 略考其事, 綜其終始, 稽其成敗興壞之紀. 上計軒轅, 下至於茲, 爲十表, 本紀十二, 書八章, 世家三十, 列傳七十, 凡百三十篇, 亦欲以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

 

司馬遷이 말한 一家自身만의 새로운 思想 體系意味하는 것으로 把握된다. 여기서 由來하여 一家之言은 어떤 分野에서 一家를 이룬 사람의 權威 있는 말이나 글 또는 論理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班固典引에서 司馬遷을 써 一家의 말을 이루었다.(司馬遷著書成一家之言.)”記錄했다.

 

 

87. 일일삼추(一日三秋)

하루가 3년이다. 짧은 時間3년같이 느껴질 程度로 그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懇切)한 것을 比喩

 

彼采葛兮 一日不見 如三月兮 : 칡 캐러 가세. 하루 동안 못 봐도 석 달이나 된 듯하네.

彼采蕭兮 一日不見 如三秋兮 : 대쑥 캐러 가세. 하루 동안 못 봐도 아홉 달이나 된 듯하네.

彼采艾兮 一日不見 如三歲兮 : 쑥 캐러 가세. 하루 동안 못 봐도 세 해나 된 듯하네.

 

* 72 采葛(채갈)-詩經 王風(시경 왕풍)

詩經 · 王風 采葛男女 間틋한 사랑을 그린 노래로, ‘一日三秋元來男女가 서로 보고 싶어하는 마음을 表現한 말인데, 에 뜻이 擴大되어 사람이나 事物到着하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心情表現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三秋는 세 가지로 풀이할 수 있다. 첫째, 孟秋 (陰曆 7), 仲秋 ( 陰曆 8), 季秋 (陰曆 9)3個月이고, 둘째는 3個月이 세 지난 9個月이며, 셋째는 3이다.

 

一日三秋一日如三秋一刻如三秋라고도 한다. 은 매우 짧은 時間을 말한다. 古代 中國에서는 하루를 100으로 나누었는데, 節期에 따라 晝夜의 길이가 若干씩 달랐다. 冬至에는 낮이 45, 밤이 55이고, 夏至에는 낮이 65, 밤이 35이다. 春分秋分에는 낮이 55刻 半, 밤은 44刻 半이다. 115이다.

 

 

88. 일거양득(一擧兩得) 一举两得

한 번 들어 둘을 얻는다. 한 가지 일을 해서 두 가지 利益을 보는 것을 말한다.

 

나라와 나라는 서로 싸운 지 一 年이 지나도록 풀지 못하고 있었다. 나라 惠王和解周旋하기 周圍 臣下들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은 周旋하는 便이 낫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周旋하지 않는 便이 낫다고 하였다. 惠王決定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陳軫나라에 와서 秦惠王陳軫에게 意見을 물었다.

 

陳軫이 말했다. “일찍이 卞莊子가 호랑이를 찔러 죽인 일을 들려드린 사람이 있었습니까? 卞莊子가 호랑이를 찔러 죽이려고 하자 旅館의 심부름하는 아이가 말리면서 호랑이 두 마리가 소를 잡아먹으려 합니다. 먹어 봐서 맛이 좋으면 分明히 서로 다툴 것이고, 다투면 반드시 싸울 것이며, 서로 싸우면 큰 놈은 傷處를 입고 작은 놈은 죽게 될 것입니다. 傷處 입은 놈을 찔러 죽이면 한꺼번에 호랑이 두 마리를 잡았다는 名聲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卞莊子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서서 기다렸습니다. 조금 있으니 정말 두 호랑이가 싸워서 큰 놈은 傷處를 입고 작은 놈은 죽었습니다. 이때 卞莊子傷處 입은 놈을 찔러 죽여 한꺼번에 호랑이 두 마리를 잡는 을 세웠다 합니다. 只今 韓나라와 나라가 싸움을 벌인 지 한 해가 넘도록 解決이 나지 않았다면 큰 나라는 打擊을 입고 작은 나라는 滅亡할 것입니다. 打擊 입은 나라를 치면 한꺼번에 둘을 얻는 利得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卞莊子가 호랑이를 찔러 죽인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 우리 主君(나라 )해 바치는 計策께 바치는 計策에 무슨 差異가 있겠습니까?” 惠王은 옳다고 말하고 結局 和解시키지 않았다. 果然 큰 나라는 打擊을 입고 작은 나라는 滅亡하고 말았다. 이에 나라는 軍士를 일으켜 크게 쳐부쉈다. 이것은 모두 陳軫計策에서 나왔다.

(陳軫對曰, 亦嘗有以夫卞莊子刺虎聞於王者乎. 莊子欲刺虎, 館豎子止之, , 兩虎, 方且食牛, 食甘必爭, 爭則必鬪, 鬪則大者傷, 小者死, 從傷而刺之, 一擧必有雙虎之名. 卞莊子以爲然, 立須之. 有頃, 兩虎果鬪, 大者傷, 小者死. 莊子從傷者而刺之, 一擧果有雙虎之功. 今韓魏相攻, 期年不解, 是必大國傷, 小國亡, 從傷而伐之, 一擧必有兩實. 此猶莊子刺虎之類也. 臣主與王何異也. 惠王曰, . 卒弗救. 大國果傷, 小國亡, 秦興兵而伐, 大剋之. 此陳軫之計也.)

 

이 이야기는 史記 張儀列傳에 나오는데, 한꺼번에 호랑이를 두 마리 잡았다는 이야기에서 一擧兩得由來했다. 다음의 典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陽平頓丘 두 고을은 땅이 가깝고 좁습니다. 百姓들을 西州移住시켜 邊方領土充實하게 만들고 10동안 賦稅免除해 줌으로써 移住勞苦慰勞합니다. 들어 둘을 얻으니 밖으로는 實益이 있게 되고, 안으로는 寬容을 베푸는 일이 됩니다.

(陽平頓丘, 二郡田地逼狹, 謂可徙還西州, 以充邊土, 賜其十年之複, 以慰重遷之情. 一擧兩得外實內寬.)

* 晉書 束晳傳.

 

내가 臨淄陷落시키면 西安孤立될 것이니 반드시 다시 할 것입니다. 이른바 一擧兩得이라는 것입니다.(吾得臨淄, 卽西安孤, 必復亡矣. 所謂一擧而兩得者也.)

* 晉書 束晳傳.

 

 

89.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一举手一投足

손 한 번 들고 발 한 옮겨 놓다.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까지를 이르는 말이다.

 

아무 날 아무 일에 再拜합니다. 天地의 물가나 큰 가에 怪物이 산다고 합니다. 이는 普通 비늘을 가진 물고기나 조개 따위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물을 얻으면 變化를 일으켜 비바람을 몰아치게 하고, 하늘을 아래위로 오르내리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을 만나지 못하면 平凡한 작은 물고기에 不過할 뿐입니다. 높은 이나 丘陵이 없어도 길은 멀어지고 끊기고 險峻해져 막히고 떨어지게 됩니다. 물이 말라 버리거나 옅은 물에 있다면 스스로 물에 갈 수가 없어서 水㺚 따위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境遇가 열에 여덟아홉입니다. 그러나 萬若 힘 있는 사람이 그 말라 버린 것을 안타깝게 여겨 옮겨 준다면 그것은 손 한 움직이고 다리 한 움직이는 勞苦不過하지만, 怪物에게는 뭇 動物보다 다름을 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또 모래나 진흙에서 문드러져 죽어도 내 차라리 즐거워할지언정, 머리를 숙이고 귀를 늘어뜨리고 꼬리를 흔들며 가엾음을 求乞하는 것은 저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이런 까닭으로 힘 있는 사람을 만나면 仔細히 보지만 마치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 죽고 사는 것은 眞實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只今 힘 있는 사람이 그 앞에 서 있어 試驗 삼아 고개를 들고 한 우렁차게 울어 봅니다. 어찌 힘 있는 사람이 그 말라 버린 것을 애달프다 여겨 손 한 움직이고 다리 한 움직이는 勞苦를 잊어버리고, 그를 맑은 물에 옮겨 두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애달프게 여기는 것도 運命이고 여기지 않는 것도 運命에 달렸다는 것을 알고도 또 울부짖는 것 亦是 運命입니다. 저는 只今 眞實로 이와 같은 處地이니 이런 까닭으로 不足하고 어리석은 허물도 잊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閣下께서 가엾게 여겨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月日, 愈再拜. 天池之濱, 大江之濆, 曰有怪物焉. 蓋非常麟凡介之品彙匹儔也. 其得水, 變化風雨. 上下於天不難也. 其不及水蓋尋常尺寸之間耳. 無高山大陵, 曠途絶險爲之關隔也. 然其窮, 涸不能自致乎水. 爲濱獺之笑者, 蓋十八九矣. 如有力者哀其窮而運轉之, 蓋一擧手一投足之勞也. 然是物也, 負其異於衆也. 且曰, 爛死於沙泥, 吾寧樂之若, 俛首帖耳. 搖尾而乞憐者, 非我之志也. 是以有力者遇之, 熟視之若無睹也. 其死其生固不可知也. 今又有有力者, 當其前矣. 聊試仰首一鳴號焉. 庸詎知有力者不哀其窮, 而忘一擧手一投足勞, 而轉之淸波乎. 其哀之命也, 其不哀之命也, 知其在命, 而且鳴號之者亦命也. 愈今者實有類於是, 是以忘其疎愚之罪, 而有是說焉. 閣下其亦憐察之.)

 

나라 韓愈科擧應試하면서 사람에게 보내는 便紙라는 뜻의 (應科目時與人書)인데, 여기에 一擧手一投足이 나온다.

 

나라 때의 科擧 試驗은 먼저 禮部에서 試驗을 치르고, 여기서 合格한 사람들은 다시 吏部試驗을 치러야 했다. 韓愈25禮部 試驗通過했지만 吏部 試驗에서는 몇 應試했어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當時에는 書生들이 自身能力을 알리기 위해 미리 지은 詩文試驗官에게 보내는 慣行이 있었는데, 韓愈吏部 試驗失敗하고 난 뒤 試驗官에게 이 便紙를 보냈다.

 

 

90. 일망타진(一網打盡) 一网打尽

한 번의 그물질로 모두 잡다. 犯人을 한꺼번에 모조리 잡는 것을 比喩

 

나라 仁宗實力 있는 人才들을 널리 登用하고, 民生安定시키는 等 內治에서 많은 業積을 남겨 나라 文帝와 더불어 代表的인 어진 皇帝로 불렸다. 當時 朝廷에는 韓琦, 范仲淹, 歐陽修, 司馬光, 張載, 程顥 等의 뛰어난 人才들이 仁宗輔佐하여 內治를 다졌는데, 仁宗 때의 年號慶曆을 따서 이를 慶曆'라고 한다. 하지만 빼어난 人才들이 많았던 까닭에 名論卓說紛紛하여 衝突이 잦았다. 또 이들이 黨派를 이루어 兩黨交代政權을 잡아 20동안 內閣이 무려 17나 갈릴 程度黨派 間 對決했는데, 世上에서는 이를 두고 慶曆黨議라 했다.

 

이즈음 詩人 蘇舜欽范仲淹推薦으로 進奏院 (地方行政機具駐京 事務所)主官이 되었고, 范仲淹을 우두머리로 하는 革新派參與했다. 蘇舜欽當時 政治得失해 여러 차례 仁宗에게 上疏를 올려 當時宰相이던 呂夷簡批判했다. 呂夷簡蘇舜欽革新派들을 별렀다. 그러던 어느 해의 가을(陰曆 7), 賽神會가 다가오자 各 官署들은 慣例대로 남은 物件들을 팔아 그 돈으로 宴會를 벌였다. 蘇舜欽慣例에 따라 進奏院故紙 (이미 使用公文裏面紙封套 等)를 판 公金에다 蘇舜欽 本人이 낸 돈과 醵出한 돈을 더해 妓女를 불러 酒宴을 베풀었다. 그런데 太子中舍官 李定이 이 宴會參席하게 해 달라고 付託했다가 拒絶하자 怏心을 품고 蘇舜欽公金流用했다고 떠들고 다녔다. 反對派이던 御史 劉元瑜가 이를 알고 皇帝에게 上疎를 올렸고, 宰相 呂夷簡도 옆에서 皇帝에게 蘇舜欽을 헐뜯었다. 皇帝大怒하여 蘇舜欽故紙를 판 公金橫領事實監守自盜罪規定하고 蘇舜欽官職을 박탈(剝奪)하는 한편 그 宴會參席했던 사람들을 免職이나 降等, 地方으로 左遷시키는 을 내렸다. 이로써 革新派는 큰 打擊을 입게 되었다.

* 宋史 문원전(文苑傳) · 소순흠(蘇舜欽)에 나온다.

 

范仲淹蘇舜欽才能 있음을 알고 薦擧했고, 皇帝는 그를 불러다 面接을 하고 集賢校理, 監進奏院職責을 주었다. 舜欽宰相 杜衍의 딸을 婦人으로 맞아들였다. 杜衍當時 范仲淹, 富弼 等과 함께 政府에 있으면서 名望 있는 人事들을 起用하여 모든 일을 改革하려고 努力했다. 御史中丞 拱辰 等은 이런 일들을 不便하게 여겼다. 얼마 後 進奏院祭祀가 있자 蘇舜欽右班殿直 劉巽 等과 함께 故紙를 판 公金으로 妓女를 불러 歌舞를 벌이고 저녁에는 손님들을 待接했다. 王拱辰은 이를 調査하여 眞相을 알아냈고, 그의 麾下 魚周詢 等을 시켜 彈劾을 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杜衍을 흔들어 대기 함이었다. 이 일은 開封部下達되어 다스려지게 되었고, 蘇舜欽劉巽 等은 모두 自盜罪除名되었다. 그리고 잔치에 參席했던 들은 모두 知名度가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이에 緣坐되어 四方으로 逐出40如 名이나 되었다. 世上 사람들은 이를 지나치게 하다고 여겼지만, 王拱辰 等은 스스로 기뻐하며 말했다. “一擧에 다 그물질을 했다.”

(范仲淹薦其才, 召試, 爲集賢校理, 監進奏院. 舜欽娶宰相杜衍女, 衍時與仲淹, 富弼在政府, 多引用一時聞人, 欲更張庶事. 御史中丞王拱辰等不便其所爲. 會進奏院祠神, 舜欽與右班殿直劉巽輒用鬻故紙公錢召妓樂, 間夕會賓客. 拱辰廉得之, 諷其屬魚周詢等劾奏, 因欲搖動衍. 事下開封府劾治, 於是舜欽與巽俱坐自盜除名, 同時會者皆知名士, 因緣得罪逐出四方者十餘人. 世以爲過薄, 而拱辰等方自喜曰, 吾一擧網盡矣.)

 

이 이야기에서 나오는 一擧網盡에서 一網打盡이 나왔는데, 이는 나라 魏泰東軒筆錄에서 찾아볼 수 있다.

 

待制 劉元瑜蘇舜欽彈劾하자 緣坐히 많았으며, 이와 同時人才들이 거의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劉元瑜宰相을 보고 말했다. “제가 相公해 한 의 그물질로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잡았습니다.”

(劉待制元瑜旣彈蘇舜欽, 而連坐者甚衆, 同時俊彦爲之一空. 劉見宰相曰, 聊爲相公一網打盡.)

 

賽神會을 맞아들여(迎神) 祭祀를 지내는 儀式을 말한다. 賽神會起源古代 周나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라 武王의 아들이며, 成王同生叔虞해졌는데, 이이가 宣祖이다. 그의 後裔들은 晉水 가에 祠堂을 짓고 이를 晉祠라고 했다. , 北宋 太平興國 9(984), 晉祠에다 聖母殿建立하고, 叔虞의 어머니 邑姜 (武王夫人이자, 姜太公의 딸)祭祀했는데, 여기에서 賽神會始作되었다. 儀式陰曆 71부터 始作하여 聖母(邑姜)誕辰日陰曆 72高調를 이룬다.

 

自盜혹은 監守自盜職務利用하여 利益하는 것을 말한다.

李定宴會參席하려다 拒絶한 이야기는 다음의 典籍에 나온다.

李定仲求洪州사람이며 晏元獻公의 조카로서 文章이 뛰어났다. 賽神會參詣하고자 했으나 蘇子美, 蘇舜欽)가 그의 職權으로 拒絶했다.

(李定, 字仲求, 洪州人, 晏元獻公之甥, 文亦奇. 欲預賽神會, 而蘇子美以其任子距之.)

* 나라 王明淸揮麈前錄.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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