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ㅈ- 2 전화위복~ )
11. 전화위복(轉禍爲福) 转祸为福
禍가 變하여 福이 되다.
「燕文公 때, 秦나라 惠王이 그의 딸을 燕나라 太子의 夫人으로 삼게 했다. 燕文公이 죽은 後 이왕(易王)이 王位에 올랐다. 齊나라 宣王이 燕나라의 國喪을 틈타 攻擊하여 10個 城을 빼앗았다.
武安君 蘇秦이 燕나라를 爲해 齊나라 王을 說得했다. 蘇秦은 宣王을 만나자 再拜한 後에 祝賀의 말을 올린 다음 바로 고개를 들고 哀悼의 말을 傳했다. 帝王이 손으로 槍을 잡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선 後에 물었다. “무엇 때문에 祝賀의 말을 하고 곧바로 哀悼의 말을 하는 것이오?” 蘇秦이 對答했다. “사람이 배가 고파도 烏喙 (毒草)를 먹지 않는 것은 設令 배를 채웠다고 해도 죽는 것과 같은 苦痛이 있기 때문입니다. 只今 燕나라는 비록 弱小한 나라이지만 强한 秦나라의 사위 나라입니다. 王께서는 10個 城의 利益을 取하고 强한 秦나라와 깊은 怨恨을 맺은 것입니다. 只今 萬若 弱한 燕나라가 先鋒에 서고 强大한 秦나라가 뒤를 制壓하여 天下의 精兵을 불러 攻擊한다면 이는 烏喙를 먹은 것과 같은 類가 되는 것입니다.”
齊 宣王이 말했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겠소?” 蘇秦이 對答했다. “聖人은 일을 함에 禍를 福으로 돌리고, 失敗로 因하여 功을 이룩합니다. 그래서 齊나라 桓公은 女色에 連累가 되었지만 自身의 聲譽를 더욱 尊貴하게 만들었고, 韓獻子는 殺人罪를 저질렀지만 自身의 地位를 더욱 굳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모두 禍를 福으로 돌리고 失敗로 因하여 功을 이룩한 例입니다. 王께서는 제 말씀을 들으시어 燕나라의 10個 城을 돌려주고 謙虛한 言辭로 秦나라에 謝罪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면 秦王은 自己로 因하여 王께서 燕나라의 城을 돌려준 것을 알고 王을 德이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燕나라는 아무 理由 없이 10個의 城을 얻었으니 燕나라도 王을 德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强한 怨讐를 버리고 두터운 親交를 맺는 것입니다. 또한 燕나라와 秦나라가 다 같이 齊나라를 섬기게 되면 大王의 號令에 天下가 따를 것입니다. 이는 王께서 빈말로 秦나라와 가까워지고 10個의 城으로 天下를 取하는 것으로, 王의 業積이 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禍를 돌려 福으로 만들고, 失敗로 因하여 功을 이룩한다는 것입니다.”
齊王은 이 말을 듣고 아주 기뻐하며 燕나라에 城을 돌려주고, 千金을 풀어 謝過를 한 後, 머리를 조아리며 秦나라에 兄弟의 나라가 될 것과 罪를 容恕해 줄 것을 懇請했다.
(燕文公時, 秦惠王以其女爲燕太子婦. 文公卒, 易王立. 齊宣王因燕喪攻之, 取十城. 武安君蘇秦爲燕說齊王, 再拜而賀, 因仰而吊. 齊王案戈而却曰, 此一何慶吊相隨之速也. 對曰, 人之飢所以不食烏喙者, 以爲雖偸充腹, 而與死同患也. 今燕雖弱小, 强秦之少婿也. 王利其十城, 而深與强秦爲仇. 今使弱燕爲雁行, 而强秦制其後, 以招天下之精兵, 此食烏喙之類也. 齊王曰, 然則奈何. 對曰, 聖人之制事也, 轉禍而爲福, 因敗而爲功. 故桓公負婦人而名益尊, 韓獻開罪而交愈固. 此皆轉禍而爲福, 因敗而爲功者也. 王能聽臣, 莫如歸燕之十城, 卑辭以謝秦. 秦知王以己之故歸燕城也, 秦必德王. 燕無故而得十城, 燕亦德王. 是棄强仇而立厚交也. 且夫燕,秦之俱事齊, 則大王號令, 天下皆從. 是王以虛辭附秦, 而以十城取天下也. 此王之業矣. 所謂轉禍爲福, 因敗成功者也. 齊王大說, 乃歸燕城, 以金千斤謝其後, 頓首中, 願爲兄弟而請罪於秦.)」
* 戰國策 燕策 및 史記 管晏列傳에도 있다.
「그가 政治를 할 때에 災殃이 될 일도 잘 利用하여 福으로 만들었고, 失敗를 돌려 功을 세웠다. 어떤 狀況에서도 그 輕重을 잘 把握하여 均衡을 잃지 않도록 愼重하게 했다.
(其爲政也, 善因禍而爲福, 轉敗而爲功, 貴輕重, 愼權衡)」
12. 절용애인(節用愛人) 节用爱人
財物을 아껴 쓰고 사람을 사랑하라. 나라의 財物을 아껴 쓰고 百姓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孔子가 말했다. 千乘의 나라를 다스리려면 일을 恭敬하고 믿음으로 하며, 쓰기를 節制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百姓을 부리기를 때를 맞추어야 한다.
(子曰, 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 論語 學而에. 論語(논어) 1. 學而(학이)
孔子는 여기에서 나라를 잘 다스리기 爲한 다섯 가지 德目을 말했는데, 이를 具體的으로 풀이면,
첫째는 自己가 맡은 일을 誠實하게 修行할 것(敬事)
둘째는 그리하여 百姓들의 信賴를 얻을 것(信)
셋째는 物資를 아껴 쓸 것(節用)
넷째는 百姓을 사랑할 것(愛人)
다섯째는 賦役은 農事철을 避할 것(使民以時) 等이다.
‘千乘의 나라(千乘之國)’는 一千 臺의 戰車를 保有한 나라, 卽 諸侯國을 말한다. 一 乘은 네 匹의 말이 끄는 戰車 한 臺에 30名의 步兵이 따르는 規模를 말한다.
13. 절차탁마(切磋琢磨)
끊고 갈고 쪼고 갈다. 學問이나 德行을 갈고 닦는 것을 比喩
瞻彼淇奧 : 기수(淇水)라 저 물구비
綠竹猗猗 : 푸른 대 우거졌네.
有匪君子 : 어여쁘신 우리 임은
如切如磋 : 뼈와 象牙 다듬은 듯.
如琢如磨 : 구슬과 돌 갈고 간 듯
瑟兮猗兮 : 嚴하고 너그럽고
赫兮喧兮 : 환하고 의젓한 분.
有匪君子 : 어여쁘신 우리 임을
終不可諼兮 : 끝내 잊지 못하겠네.
* 詩經 · 衛風 기오(淇奧)에. 55 淇奧(기오)-詩經衛風(시경위풍)
이 詩는 衛 武王의 德을 稱頌한 노래인데, 여기에서 ‘切磋琢磨’가 由來했다.
《論語 學而》에서는 孔子가 子貢과 問答하면서 《詩經》의 이 ‘切磋琢磨’를 引用하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子貢이 말했다. “군삭(窘索)해도 卑屈하지 않으며 富裕해도 오만(傲慢)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孔子가 말했다. “옳긴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樂을 알고, 富裕하면서 禮를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겠지.” “詩에 ‘뼈와 象牙 다듬은 듯, 구슬과 돌을 갈고 간 듯’이란 말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孔子가 말했다. “賜 (子貢)야, 이제 비로소 너와 詩를 이야기할 수 있겠구나. 지나간 것을 알려 주었더니 앞으로 올 것까지 알아내니 말이다.”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切磋琢磨’는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뼈를 자르는 것을 切이라 하고, 象牙를 다듬는 것을 磋라 하며, 玉을 쪼는 것을 琢이라 하고, 돌을 가는 것을 磨라고 한다. 切磋琢磨는 貴한 器物을 만드는 것이다. 사람의 學問에 成就가 있으려면 뼈나 象牙나 玉과 같이 切磋琢磨를 해야 한다.
(骨曰切, 象曰磋, 玉曰琢, 石曰磨. 切磋琢磨, 乃成寶器. 人之學問知能成就, 猶骨象玉切磋琢磨也.)」
* 論衡 量知에.
14. 절치부심(切齒腐心)
몹시 분(憤)하여 이를 갈고 마음을 썩임
* 司馬遷의 史記 刺客列傳에.
秦나라의 秦始皇이 中國의 諸侯國들을 征服해 統合시켜 갈 때다. 諸侯國들은 秦始皇의 侵略에 걱정이 泰山같았다. 燕나라도 마찬가지였다. 太子 丹 秦始皇의 野望을 꺾을 解法에 苦心했다. 때마침 秦나라 將軍 樊於期가 秦始皇에게 罪를 짓고 手配되면서 燕나라로 逃亡쳐 왔다. 秦始皇을 두려워했던 燕나라의 臣下들은 樊於期의 亡命要請을 拒否하려고 했다.
그러나 太子 丹은 臣下들의 反對에도 不拘하고 그를 받아들여 燕나라에 머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秦나라는 두려운 相對였다. 樊於期를 받아들였기에 더더욱 戰戰兢兢해야 했다. 太子는 秦始皇의 野望을 說得해 征服戰爭을 그치고 싶었다. 하지만 妙策이 없었다. 그 때 그에게 衛나라 사람인 荊軻가 찾아오면서 秘策을 생각해냈다. 太子는 荊軻에게 刺客을 利用해 秦始皇을 脅迫해 秦始皇 스스로 征服 以前 狀態로 秦始皇이 征服한 諸侯國을 돌려주게 만들고, 秦始皇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刺客으로 하여금 秦始皇을 죽이자는 것이 좋겠다고 提案했다.
荊軻는 太子의 計劃에 贊成하며, 그 刺客의 役割을 自身이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征服過程에서 많은 怨恨을 쌓은 秦始皇은 徹底하게 自身의 身邊을 지켰다. 때문에 秦始皇의 信賴를 얻지 않으면 接近이 不可能했다. 秦始皇의 信任을 얻기 爲해 苦心하던 荊軻는 秦始皇의 憤怒를 산 樊於期를 생각해 냈다. 그는 太子에게 樊於期의 머리를 要求했다. 樊於期의 머리를 가져가 秦始皇의 歡心을 사기 爲한 方法이었다. 그러나 太子는 秦始皇을 避해 歸順한 樊於期를 죽일 수 없다며 反對했다. 그러자 荊軻는 樊於期를 直接 만나 自身의 計劃을 말했다. 그때 樊於期가 말했다.
“그것은 내가 밤낮으로 이를 갈며 마음을 썩이고 벼르는 것이었소(切齒腐心).”
그 直後 樊於期는 秦始皇에게 復讐를 하기 爲해 荊軻가 擇한 方法을 實踐하기 爲해 스스로 목을 찔러 自決했다. 荊軻는 樊於期의 머리를 갖고 秦始皇을 찾아갔다. 그러나 秦始皇을 脅迫해 諸侯國을 되돌리지도, 죽이는 것 모두 失敗했다.
切齒腐心은 "臥薪嘗膽"과 같은 意味다.
15. 절부구조(竊符救趙) 窃符救赵
훔친 兵符로 趙나라를 救하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사소한 情이나 義理는 버려도 無放하다는 것을 比喩
魏公子 無忌는 魏나라 昭王의 막내아들이며, 안희왕(安釐王)의 異腹同生이다. 安釐王은 卽位하자 無忌를 信陵君에 封했다. 魏公子는 사람됨이 어질어 선비를 尊重하였고, 그 선비가 어질거나 不肖하거나를 莫論하고 모두에게 다 謙遜하게 禮를 갖추어 그들과 사귀었으며, 自身이 富貴하다고 해서 선비들에게 驕慢하게 對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선비들이 四方 몇千 里에서 앞을 다투어 모여들어 食客이 3千 名이나 되었다. 當時 諸侯들은 魏公子가 어질고 食客이 많아 敢히 軍士를 일으켜 魏나라를 侵犯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魏나라에 侯嬴이라는 70歲 된 恩師가 있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里門을 지키는 門지기 일을 하고 있었다. 魏公子는 侯嬴을 스승처럼 모셨으며, 侯嬴이 白丁 朱亥가 어질다고 하자 朱亥를 잘 받들었다. 하지만 朱亥는 한 番도 魏公子에게 感謝를 表한 적이 없었다.
魏나라 安釐王 20年에 秦나라 昭王은 長平에서 趙나라 大軍을 쳐부수고 繼續 進擊하여 趙나라의 邯鄲을 包圍했다. 魏公子의 누나는 趙나라 惠文王의 同生 平原君의 夫人이었으므로, 平原君은 여러 차례 安釐王과 魏公子에게 書信을 보내 救援을 要請했다. 安釐王은 將軍 晉鄙에게 10萬의 軍士를 주어 趙나라를 救하게 했다. 그런데 秦나라 王이 使者를 보내 安釐王에게 告했다. “내가 趙나라를 攻擊하여 早晩間에 陷落시킬 것인데, 諸侯 中에 趙나라를 救援하는 者가 있으면 趙나라를 陷落시킨 後에 가장 먼저 攻擊하겠다.” 安釐王은 두려워 晉鄙에게 進軍을 멈추고 鄴에 駐屯하며 事態를 觀望하도록 했다. 平原君은 繼續 使者를 派遣하여 魏公子에게 救援을 要請했다. 魏公子는 여러 차례 安釐王에게 趙나라를 救援해 주기를 請했으나, 安釐王은 秦나라가 두려워 끝내 魏公子의 請을 들어주지 않았다. 魏公子는 自己가 살기 爲해 趙나라를 亡하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賓客들을 모으고 수레 1百如 乘을 準備해 秦나라 軍隊에 뛰어들어 趙나라와 生死를 함께하기로 決定했다.
魏公子가 出發하여 里門을 나가다가 侯嬴을 만나 事情을 이야기하고 作別 人事를 했는데도 侯嬴은 自己는 따라갈 수 없다고만 말할 뿐, 別말이 없었다. 魏公子는 平素 自己가 侯嬴에게 그렇게 잘 對해 주었는데도 一言半口 作別의 人事조차 하지 않은 것은 或是 自己가 무언가 잘못을 저질러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便치 않아, 되돌아와 侯嬴을 만났다.
「侯嬴은 魏公子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며, 사람들을 물리고 남이 듣지 못하도록 秘密裏에 이야기를 했다. “제가 듣기로는 晉鄙의 兵符는 恒常 王의 寢室에 두고 있는데, 가장 寵愛를 받는 如姬만이 王의 寢室에 出入하므로 훔칠 수가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 如姬의 아버지가 殺害를 當했는데, 如姬는 3年 동안이나 王 以下 모든 사람에게 아버지의 怨讐를 갚아 주기를 求했으나 얻지 못했습니다.
如姬가 公子 앞에서 울자 公子께서 사람을 시켜 그 怨讐의 목을 벤 後 如姬에게 보내 주었습니다. 如姬는 公子를 爲해 죽음으로 報答하기를 願하나, 아무런 말이 없으므로 돌아보아도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公子가 입을 열어 付託하기만 하면 如姬는 分明 付託을 들어줄 것입니다. 그러면 虎符를 손에 넣어 晉鄙의 軍士를 빼앗아 北으로 趙나라를 救하고 서로 秦나라를 물리치면 이는 五覇의 征伐에 該當합니다.” 魏公子는 그 計策에 따라 如姬에게 付託을 했다. 如姬는 果然 晉鄙의 兵符를 훔쳐 魏公子에게 주었다.
(侯生乃屛人間語, 曰, 嬴聞晉鄙之兵符常在王臥內, 而如姬最幸, 出入王臥內, 力能竊之. 嬴聞如姬父爲人所殺, 如姬資之三年, 自王以下欲求報其父仇, 莫能得. 如姬爲公子泣, 公子使客斬其仇頭, 敬進如姬. 如姬之欲爲公子死, 無所辭, 顧未有路耳. 公子誠一開口請如姬,如姬必許諾. 則得虎符奪晉鄙軍, 北救趙而西却秦, 此五霸之伐也. 公子從其計, 請如姬. 如姬果盜晉鄙兵符與公子)」
魏公子가 出發하려 하자 侯嬴이 말했다. “將軍이 밖에 있으면 王의 命令도 따르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公子가 가지고 간 兵符가 符合한다고 해도 晉鄙가 이를 疑心하고 確認하면 危險해집니다. 白丁 朱亥와 함께 가십시오. 이 사람은 力士입니다. 萬若 晉鄙가 말을 듣지 않으면 朱亥를 시켜 쳐 죽여 버리십시오.” 侯嬴은 날짜를 따져 魏公子가 晉鄙의 軍中에 到着하는 날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음으로써 魏公子를 餞送하겠다고 말했다. 鄴에 到着해 魏公子가 王命을 詐稱하여 晉鄙를 代身하려 하자 晉鄙는 兵符를 맞추어보고 疑心을 하며 軍士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朱亥가 소매에서 40斤짜리 鐵椎를 꺼내 晉鄙를 때려 죽였다. 魏公子는 軍中에 命을 내렸다. “父子가 함께 軍中에 있으면 아버지는 돌아가라. 兄弟가 함께 軍中에 있으면 兄은 돌아가라. 獨子나 兄弟가 없는 者는 돌아가 父母를 奉養하라.” 이렇게 하여 8萬을 골라 秦나라 軍隊를 攻擊했다. 秦나라는 包圍를 풀고 물러났고, 魏公子는 邯鄲을 救하고 趙나라를 살려냈다. 侯嬴은 魏公子가 晉鄙의 軍中에 到着하여 軍士를 손에 넣은 날, 스스로 목을 찔렀다.
安釐王은 이런 事實을 알고 크게 怒했다. 魏公子는 魏나라에 돌아가기가 두려워 趙나라에 10年 동안 머물렀다. 그러자 秦나라가 자주 魏나라를 侵攻했다. 魏王은 魏公子를 魏나라로 돌아오게 했다. 公子가 魏나라로 돌아와 上將軍이 되자 各 諸侯國이 軍士를 派遣하여 魏나라를 도왔다. 魏公子는 이 軍士들을 이끌고 函谷關까지 秦나라 軍隊를 追擊했다. 秦나라는 魏公子가 上將軍으로 있는 동안 敢히 函谷關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魏公子의 威勢는 天下에 振動했다. 그 後, 秦나라 王이 晉鄙의 食客들을 찾아 魏公子가 王位를 노리고 있다는 所聞을 흘렸다. 反間計에 넘어간 安釐王은 魏公子의 職位를 剝奪했다. 魏公子는 繼續 排斥을 當하자 自身의 食邑에서 蟄居하면서 4年 동안 술과 女子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結局 BC242年에 死亡하고 말았다. 秦나라는 魏公子가 죽었다는 消息을 듣자 魏나라를 攻擊하여 20個 城을 陷落시켰다.
이 이야기는 《史記 魏公子列傳》에 나오는데, 魏公子가 兵符를 훔쳐 趙나라를 救했다는 데서 由來했다.
16. 절함(折檻) 折槛
난간(欄杆)을 부러뜨리다. 간곡(懇曲)한 忠告를 比喩
「成帝때에 이르러 丞相을 지냈던 安昌侯 (張禹)는 皇帝의 스승으로서 特進 (官職 名)의 職位를 가지고 있었다. 皇帝는 그를 대단히 尊重했다. 朱雲이 上疎를 올려서 皇帝에게 謁見을 請하여 公卿들 앞에서 皇帝를 뵙고 말했다. “只今 朝廷 大臣들은 위로는 君主를 바로잡아 주지 못하고 아래로는 百姓들에게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하는 채 오로지 자리만을 지키며 俸祿만 縮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孔子가 말한 ‘鄙陋한 者와는 더불어 君主를 섬길 수 없다.’, ‘寵愛를 잃을까 두려워하면 하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尙方斬馬劍을 下賜하시면 阿諂꾼 臣下 한 사람을 베어 그 나머지 무리를 懲戒하고자 합니다.” 皇帝가 물었다. “그者가 누구인가?” 朱雲이 對答했다. “安昌侯, 張禹입니다.” 皇帝가 크게 怒하여 말했다. “微賤한 臣下가 낮은 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誹謗하고 朝廷에서 皇帝의 스승을 辱보였으니, 그 罪는 死刑으로 容恕할 수 없다.”
御史가 朱雲을 끌어내려고 하자 朱雲이 御殿의 欄干을 붙잡았는데 欄干이 부러졌다. 朱雲이 외쳤다. “臣은 地下로 내려가 龍龐과 比干을 좇아 더불어 노닐면 그것으로 滿足합니다. 그러나 이 朝廷이 어떠한 朝廷이 될 것인지,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御史가 마침내 朱雲을 끌고 갔다.
左將軍 辛慶忌가 冠을 벗고 印綬를 풀어 놓고 御前 아래서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말했다. “이 臣下(朱雲)는 平素에 正直하고 물불 가리지 않는 者로서 世上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말이 옳다고 할 것 같으면 죽여서는 아니 되고, 그의 말이 그르다고 하면 마땅히 容恕해선 않될 것입니다. 臣은 敢히 죽음으로써 諫言합니다.” 辛慶忌가 바닥에 머리를 쳐서 피가 흘렀는데, 皇帝의 火가 풀린 뒤에야 머리를 치는 것을 그쳤다. 그 뒤 부러진 蘭干을 고치려고 하자 皇帝가 말했다. “바꾸지 말라. 本來의 것을 가지고 修理하여 直諫하는 臣下가 드러날 수 있도록 하라.”
(至成帝時, 丞相故安昌侯張禹以帝師位特進, 甚尊重. 雲上書求見, 公卿在前. 雲曰, 今朝廷大臣上不能匡主, 下亡以益民, 皆尸位素餐, 孔子所謂鄙夫不可與事君, 苟患失之亡所不至者也. 臣願賜尙方斬馬劍, 斷佞臣一人以厲其餘. 上問, 誰也. 對曰, 安昌侯張禹. 上大怒, 曰, 小臣居下訕上, 廷辱師傅, 罪死不赦. 御史將雲下, 雲攀殿檻, 檻折. 雲呼曰, 臣得下從龍龐比干遊於地下, 足矣. 未知聖朝何如耳. 御史遂將雲去. 於是左將軍辛慶忌免冠解印綬, 叩頭殿下曰, 此臣素著狂直於世. 使其言是, 不可誅. 其言非, 固當容之. 臣敢以死爭. 慶忌叩頭流血, 上意解, 然後得已. 及後當治檻, 上曰, 勿易. 因而輯之, 以旌直臣.)」
이 이야기는 《漢書 朱雲傳》에 나오는데, 朱雲이 成帝에게 忠諫을 하다가 欄杆을 부러뜨린 데서 ‘折檻’이 由來했다. ‘朱雲折檻’이라고도 한다. 이 이야기에서 자리만 지키며 俸祿만 縮낸다는 뜻의 ‘尸位素餐’도 由來했다. ‘龍龐’은 夏나라 桀王의 臣下인 關龍龐, ‘比干’은 殷나라 紂王의 臣下이다. 두 사람 모두 直諫을 하다 죽임을 當한 忠臣들이다.
17. 점입가경(漸入佳境) 渐入佳境
갈수록 아름다운 景致로 들어가다. 일이 점점(漸漸) 더 재미있는 狀況으로 변해 가는 것을 比喩
顧愷之는 東晉 時代의 畵家로, 書藝의 王羲之와 더불어 當時 藝林의 雙壁을 이룬 사람이다. 「顧愷之는 사탕수수를 즐겨 먹었는데, 恒常 위에서부터 먹어 (뿌리 쪽으로)내려갔다. 사람들이 異常하게 생각하자 顧愷之가 말했다. “갈수록 漸漸 좋은 境地로 들어가기(단맛이 나기) 때문입니다.”
(愷之每食甘遮, 恒自尾至本, 人或怪之. 云, 漸入佳境.)」
이 이야기는 《晉書 顧愷之傳》에 나오는데, 顧愷之의 말에서 비롯하여 ‘漸入佳景’은 景致나 文章 또는 어떤 일의 狀況이 갈수록 재미있게 展開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顧愷之는 그림뿐 아니라 文學과 書藝에도 能하여 많은 作品을 남겼다. 사람들은 그를 三絶, (畵絶, 才絶, 痴絶)이라 稱했는데, 이는 그의 뛰어난 才能과 그림 솜씨, 그리고 特異한 말과 行動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特異한 行動에 對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傳해진다.
南京의 瓦棺寺를 짓기 爲해 僧侶들이 獻金을 걷었는데 뜻대로 募金이 되지를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와서 百萬 錢을 施主하겠다면서 절이 完工되면 알려 달라고 말했다. 절이 完工되자 그 젊은이는 佛堂 壁에 維摩詰居士를 그렸는데, 얼마나 精巧한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이 所聞이 翣時間에 퍼져 구경하러 온 사람들의 施主가 百萬 錢을 넘었다고 한다. 이 젊은이가 바로 顧愷之였다.
18. 정저지와(井底之蛙)
우물 안의 개구리. 식견이 좁거나 편견에 사로잡혀 세상이 넓은 줄을 모르는 사람을 比喩
公孫龍이 魏牟에게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옛 聖王의 가르침을 배웠고, 커서는 仁義와 道德을 알았습니다. 같음(同)과 다름(異)을 뭉뚱그리고 딱딱함(堅)과 흼(白)을 뒤섞으며, 남이 否定하는 것을 肯定하고, 남이 論駁하는 것을 正當化했습니다. 나는 知慧를 자랑하는 學者들을 困惑스럽게 만들고,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最高의 境地에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莊子의 말을 듣고는 놀라 멍해져 버렸습니다. 내가 그보다 論辯이 빠집니까, 아니면 智慧가 못합니까. 그런데도 더 以上 입을 열지 못하겠는 것은 무슨 緣由일까요?”
魏牟는 冊床에 기대어 있다가 嘆息하고 하늘을 우러러 웃으며 말했다.
「“當身은 우물 안의 개구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소? 개구리가 東海바다의 거북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얼마나 즐거운가, 나는! 우물 欄杆에 폴짝거리며 노닐다가 疲困하면 깨진 우물 壁에 들어가 쉬며, 물속을 헤엄치다 疲困하면 턱을 물 위에 내놓고 쉬노니. 뻘 속에 뛰어들면 몸과 발등을 숨겨 危險을 避할 수 있지. 周邊을 둘러보아도 나만 한 장구벌레나 올챙이, 게가 어디 있으리. 게다가 웅덩이며 우물을 獨차지한 즐거움이란 더할 나위 없는 것. 자네도 아무 때나 와서 둘러보게.’
(子獨不聞夫掐井之鼃乎. 謂東海之鼈曰, 吾樂與. 出跳梁乎井干之上, 入休乎缺甃之崖. 赴水則接腋持頤, 蹶泥則沒足滅跗. 還虷蟹與科斗, 莫吾能若也. 且夫擅一壑之水, 而跨跱埳井之樂, 此亦至矣. 夫子奚不時來入觀乎.)」
東海의 거북이가 우물 속으로 왼쪽 발을 내려놓기도 前에 오른쪽 무릎이 걸려 버렸다오. 발을 도로 빼낸 거북이는 未安해하며 바다에 對해 이렇게 들려주었다오. ‘바다는 千 里로도 그 넓이를 재지 못하고, 千 길로도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한다네. 禹王의 時代, 10年에 9年 동안 洪水가 쏟아졌지만 물이 불어나지 않았고, 湯王의 時代, 8年에 7年 동안 가뭄이 타들어 갔어도 줄어들지 않았지. 時間이 흘러도 그만, 물이 들어오고 나가도 그만이라, 이것이 바다의 큰 즐거움이라네.’ 이 말을 듣고 우물 속의 그 개구리는 깜짝 놀라 얼이 빠져 버렸다오.”
이 이야기는 《莊子 秋水》에 나오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있다.
「北海의 海神이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한 것은 自己가 살고 있는 곳만 알기 때문이며, ‘여름 벌레는 얼음을 말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여름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井蛙不可以語於海者, 拘於虛也. 夏蟲不可以語氷, 篤於時也.)」
‘井底之蛙’란 말은 아마도 民間에서 널리 쓰이던 比喩를 莊子나 荀子 等이 引用한 것으로 推測된다. 莊子와 거의 同時代 사람인 荀卿 (荀子)도 《荀子》에서 우물 안 개구리를 ‘識見이 좁고 視野가 막힌 사람’을 比喩하는 말로 使用하고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얕은 것으로는 깊은 것을 재지 못하고, 어리석은 者로는 똑똑한 者와 꾀하지 못하며, 우물의 개구리와는 더불어 東海의 즐거움을 말하지 못한다고 한다.
(語曰, 淺不足與測深, 愚不足與謀知, 坎井之蛙不可與語東海之樂.)」
* 荀子 正論에.
이 成語에 關聯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다. 漢나라 末年, 王莽이 帝位를 無血 簒奪하고 新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王莽의 無理한 改革政策으로 因해 政國은 混亂에 빠졌고, 各處에서 反亂이 일어났다. 新나라는 25年 만에 亡하고 暫時 群雄割據의 時代로 접어들었다. 最後까지 남은 實力者는 後漢의 創業者 劉秀, 河西의 竇融과 隴西의 隗囂, 그리고 蜀의 公孫述이었다. 當時에 馬援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隗囂가 馬援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將軍으로 任命했다. 當時 公孫述은 蜀에서 稱帝하고 있었는데, 隗囂는 洛陽에 있는 劉秀와 公孫述을 놓고 어느 쪽으로 기울 것인가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隗囂는 馬援을 시켜 公孫述을 만나 虛實을 살펴보고 오도록 했다. 公孫述은 武裝한 兵士들을 階段 아래에 세워 倨慢한 態度로 故鄕 親舊인 馬援을 맞이하고는 옛날의 親分을 생각하여 將軍으로 任命하겠다고 했다. 公孫述의 傲慢不遜한 態度에 火가 난 馬援은 서둘러 돌아와서 隗囂에게 말했다. “子陽 (公孫述)은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스스로 잘난 체만 하고 있습니다. 東쪽의 劉秀에게 뜻을 두는 것이 낫겠습니다.
(子陽, 井底之蛙, 而妄自尊大. 不如專意東方.)”
이 成語는 많은 사람들이 引用했다.
「우물 안에서 별을 보면 보이는 별은 몇 個밖에 안 된다.(自井中視星, 所見不過數星.)」
* 尸子에.
「우물에 앉아서 하늘이 작다고 하는 것은 하늘이 작아서가 아니다.(坐井而觀天, 所謂天小者, 非天小也.)」
* 韓愈의 原道에.
그 밖에도 宋나라 陸游의 《劍南詩稿》 그리고 禪宗의 文獻인 《五燈會元》 等에도 引用되고 있다. 그리고 이 成語에서 ‘井蛙之見’, ‘井魚之見’, ‘坐井觀天’, ‘井中視星’ 等이 나왔다.
19. 조강지처(糟糠之妻)
술지게미나 겨와 같은 조악(粗惡)한 飮食을 먹으며 함께 고생하면서 집안을 일으킨 아내를 이르는 말이다.
後漢의 創業者 光武帝가 아끼는 臣下 가운데는 愼重하고 勤厚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 中에 宋弘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未亡人이 된 光武帝의 누이 湖陽公主가 그를 欽慕했다.
「光武帝는 누이의 心情을 알아차리고 두 사람을 맺어 주기 爲해 宋弘과 對話를 나누었다. 湖陽公主는 屛風 뒤에 숨어 있었다. 光武帝가 宋弘에게 말했다. “俗談에 사람이 貴해지면 親舊를 바꾸고, 富해지면 아내를 바꾼다고 하는데, 이것이 人之常情이 아니겠소?” “가난할 때 사귄 親舊는 잊어서는 안 되고, 어려울 때 함께 苦生을 하여 집안을 일으킨 아내는 絶對로 내쳐서는 안 된다고 臣은 들었습니다.”
(謂弘曰, 諺言貴易交, 富易妻, 人情乎. 弘曰, 臣聞貧賤之交不可忘, 糟糠之妻不下堂.)」
光武帝와 湖陽公主는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 後漢書 宋弘傳에 나온다.
20. 조령모개(朝令暮改)
아침에 令을 내리고서 저녁에 다시 바꾼다. 法令의 改定이 너무 빈번(頻煩)하고 政策이 一貫性이 없는 것을 比喩
漢나라 때 匈奴가 자주 邊方을 侵略하여 掠奪을 恣行하자, 邊方에서 收穫하는 穀食만으로는 邊方 地域 사람들의 食糧을 充當하기에 不足하게 되었다. 그래서 百姓들에게 穀食을 獻納받는 사람과 穀食을 邊方까지 輸送할 사람들을 募集하여 벼슬을 내리는 政策을 쓰게 되었다. 《漢書 食貨志》에 依하면, 이런 政策은 景帝 때의 御史大夫 조조(鼂錯)의 獻策을 取한 것이었다. 曹錯의 이 上疎를 論貴粟疏라 하는데, 여기에서 ‘朝令暮改’가 由來했다.
「只今 다섯 名의 食口가 있는 農家에서 勞役을 하는 사람이 두 사람을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들이 耕作하는 땅은 百 畝(묘)를 넘지 않는데, 百 畝의 收穫은 百 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봄에 耕作하고 여름철에 풀 뽑고 가을에 收確하여 겨울에 貯藏하는 것 外에도 나무를 해야 하고, 官廳을 修理하고 賦役에 불려 나가는 等, 봄에는 바람과 먼지를 避할 수 없고, 여름에는 모진 더위를 避할 수 없으며, 가을에는 비를 避할 수 없고, 겨울에는 추위를 避할 수가 없어, 한 해 내내 쉬는 날이 없습니다. 또, 個人的으로는 사람들을 보내고 맞이하며, 죽은 者를 弔問하고 病問安을 가야 하며, 어린 아이들을 기르는 等, 苦生스럽기가 이와 같습니다. 게다가 洪水와 旱魃의 災害를 입었는데 急한 稅金이나 賦役을 賦課하는데, 이는 一定한 때도 定해져 있지 않아 아침에 令을 내리고 저녁에 고치는 狀況입니다. 田畓이 있는 사람은 半값으로 팔고, 없는 사람은 利子가 倍가 되는 빚을 냅니다. 이리하여 農地나 집을 팔고, 아들과 孫子를 팔아 負債를 갚습니다.
(今農夫五口之家, 其服役者, 不下二人. 其能耕者, 不過百畝. 百畝之收, 不過百石. 春耕夏耘秋穫冬藏, 伐薪樵, 治官府, 給繇役. 春不得避風塵, 夏不得避暑熱, 秋不得避陰雨, 冬不得避寒凍, 四時之間, 亡日休息. 又私自送往迎來, 弔死問疾, 養孤長幼在其中, 勤苦如此. 尙復被水旱之災, 急征暴賦, 賦斂不時, 朝令而暮改. 當具有者, 半賈而賣, 亡者, 取倍稱之息. 於是有賣田宅, 鬻子孫, 以償債者矣.)」
曹錯의 上疏文에서 由來하여 ‘朝令暮改’는 法令에 一貫性이 없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는데, 淸나라의 王念孫은 이에 對해 다음과 같이 異義를 提起했다.
「‘朝令而暮改’의 ‘改’는 本來 ‘得’이다. 急한 稅金과 賦役을 賦課하여 아침에 令을 내리고 저녁에 거두어들인다고 해야 한다. 아침에 令을 내리고 저녁에 고친다는 말이 아니다.
(朝令而暮改, 改, 本作得. 言急征暴賦, 朝出令而暮已得. 非謂其朝令而暮改也.)」
* 讀書雜志 漢書에.
‘朝令而暮得’은 아침에 租稅를 賦課하고 저녁에 걷어들인다는 말이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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