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ㅈ- 4 중과부적~ )
31. 중과부적(衆寡不敵) 众寡不敌
적은 무리로 많은 무리와 對敵할 수 없다. 力量 差異가 커서 相對가 되지 못하는 것을 比喩
戰國時代 여러 나라를 巡訪하며 왕도정치(王道政治)를 力說하던 孟子가 齊나라 宣王을 만나 對話를 나누던 中, 齊宣王이 패도정치(霸道政治)에 對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看破하고 말했다.
「“그렇다면 王께서 크게 所望하시는 바를 알 수 있겠습니다. 領土를 擴張하고 秦나라, 楚나라와 같은 큰 나라들을 入朝하게 하여 天下에 君臨하고 四方의 野蠻國들을 掌握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方法을 가지고 그와 같은 큰 所望을 이루시려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잡자는 것과 같습니다.” “그토록 터무니없는 일입니까?” “아니, 그보다 더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잡는 것은 못 잡아도 後患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方法을 가지고 그와 같은 큰 所望을 이루시려고 하신다면 全心全力을 다하여 애쓰더라도 뒤에 반드시 災殃이 생기게 됩니다.”
“어째서 입니까?”
孟子가 말했다. “추(鄒)나라 사람이 초(楚)나라 사람과 戰爭을 하면 누가 이긴다고 생각합니까?” “楚나라 사람이 이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은 나라는 眞實로 큰 나라를 對敵할 수 없으며, 적은 숫자로 眞實로 많은 사람을 對敵할 수 없으며, 弱한 나라는 眞實로 强한 나라를 對敵할 수 없습니다. 只今 天下에 四方 千 里나 되는 나라가 아홉인데, 齊나라는 그 中의 하나입니다. 하나로써 여덟을 屈服케 하려는 것이 어찌 鄒나라가 楚나라를 對敵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그 根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제 王께서 仁政을 베풀어 天下의 선비로 하여금 모두 다 王의 朝廷에 서고 싶어하도록 만들고, 天下의 農民들이 모두 다 王의 들판에서 밭 갈고 싶어하도록 만들며, 온 天下의 장사치들이 모두 다 王의 市場에서 장사하고 싶어하게 하고, 旅行하는 者들이 모두 다 王의 길에 나아가고 싶어하게 하면 天下에 自己 王을 미워하는 者가 모두 다 王께 따라와서 하소연하려 할 것이니, 이와 같으면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曰, 然則王之所大欲可知已. 欲辟土地, 朝秦楚, 敍中國而撫四夷也. 以若所爲求若所欲, 猶緣木而求魚也. 王曰, 若是其甚與. 曰, 殆有甚焉. 緣木求魚, 雖不得魚, 無後災. 以若所爲, 求若所欲, 盡心力而爲之, 後必有災. 曰, 可得聞與. 曰, 鄒人與楚人戰, 則王以爲孰勝. 曰, 楚人勝. 曰, 然則小固不可以敵大, 寡固不可以敵衆, 弱固不可以敵彊. 海內之地方千里者九, 齊集有其一. 以一服八, 何以異於鄒敵楚哉. 蓋亦反其本矣. 今王發政施仁, 使天下仕者皆欲立於王之朝, 耕者皆欲耕於王之野, 商賈皆欲藏於王之市, 行旅皆欲出於王之塗, 天下之欲疾其君者皆欲赴愬於王. 其若是, 孰能禦之)」 孟子(맹자) 7. 齊桓晉文(제환진문)
이 이야기는 《孟子 梁惠王上》에 나오는데, ‘적은 숫자로 많은 사람을 對敵할 수 없다.’는 말에서 ‘衆寡不敵’이 由來했다.
32. 중구난방(衆口難防) 众口难防
여러 사람의 입을 막기는 어렵다. 大衆의 言路와 思想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말이다.
周나라의 厲王은 暴政을 일삼은 暴君이었다. 召公이 厲王에게 여러 차례 諫言하였으나 厲王은 暴政을 그만두기는커녕 오히려 魏나라에서 무당을 데려와 占을 치게 하여 不滿을 품은 사람들을 索出하여 處斷하였다. 百姓들은 厲王을 怨望하였으나 길거리에서 서로 눈짓으로 不滿을 表示할 뿐, 敢히 말을 하지 못했다. 厲王은 이를 두고 太平聖代라면서, 自身에 對하여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得意滿滿해하였다.
「이에 對해 召公은 다음과 같이 諫言했다. “이는 誹謗을 막은 것에 不過합니다. 百姓의 입을 막는 것은 냇물을 막는 것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냇물을 둑으로 막았다가 무너지면 傷하는 사람이 반드시 많아지게 되는데, 百姓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냇물을 爲하는 者는 물이 잘 흐르도록 물길을 터 주고, 百姓을 爲하는 者는 自由롭게 말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召公曰, 是鄣之也. 防民之口, 甚於防川. 川壅而潰, 傷人必多, 民亦如之. 是故爲川者, 決之使導. 爲民者, 宣之使言)」
하지만 厲王은 끝내 듣지 않고 暴政을 繼續하였다. 結局, 3年도 지나기 前에 民亂이 일어나 厲王은 王位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國語 周語》와 《史記 周本紀》에 나오는데, ‘百姓의 입을 막는 것이 냇물을 막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바로 ‘衆口難防’의 基源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防民之口甚於防川)’도 나왔다. ‘衆口難防’에 對한 이야기는 다음의 典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宋나라에서는 城壁을 쌓았다. 華元이 우두머리가 되어 工事를 巡視하였는데 城을 쌓던 者들이 노래를 불렀다. “딱부리 배불뚝이가 甲옷을 버리고 돌아왔구나. 甲옷을 버린 채 또 왔구나.”(이는 그가 한 때 鄭나라의 捕虜가 되었다가 돌아온 것을 비꼰 것이었다.) 華元은 수레에 함께 타고 있는 黲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宋나라에는 소가 많으니 쇠가죽도 많다. 外뿔소나 들소도 如前히 많은데 甲옷쯤 버린들 어떻겠는가.” 일꾼들이 말했다. “가죽이 있다고 해도 거기에 칠할 丹砂나 옻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자 華元이 말했다. “가자. 저 사람들은 입이 많고 우리는 적구나.”
(宋城, 華元爲植, 巡功. 城者謳曰, 睅其目, 皤其腹, 棄甲而復. 於思於思, 棄甲復來. 使其黲乘謂之曰, 牛則有皮, 犀兕尙多, 棄甲則那. 役人曰, 從其有皮, 丹漆若何. 華元曰, 去之, 夫其口衆我寡)」
* 左傳 宣公 2年에.
以上의 이야기에서 ‘衆口難防’이 由來했는데, 이 成語는 中國에서는 뭇 사람들의 입이 쇠를 녹인다는 뜻의 ‘衆口鑠金’으로 쓴다.
33. 중석몰족(中石沒鏃) 中石没镞
돌에 적중하여 화살이 깊이 박히다. 精神을 集中해서 全力을 다하면 어떤 일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比喩
漢나라의 將軍 李廣은 匈奴族의 땅에 隣接한 隴西 地方의 武將 집안 出身으로, 特히 弓術과 騎馬術이 뛰어난 勇將이었다. 文帝 14年(BC166), 李廣은 肅關을 侵犯한 匈奴를 무찌른 功으로 侍從武官이 되었다. 또, 그는 皇帝를 護衛하여 사냥을 나갔다가 혼자서 큰 호랑이를 때려잡아 天下에 勇猛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그 後 李廣은 守備大將으로 傳任되자 邊境의 城塞를 轉輾하면서 匈奴를 討伐했는데, 恒常 이겨 常勝將軍으로 通했다. 匈奴는 그를 ‘漢나라의 飛將軍’이라 부르며 敢히 國境을 넘보지 못했다.
「어느 날, 李廣이 사냥을 나갔다가 풀밭에 있는 돌을 호랑이로 보고 활을 쏘았는데, 돌에 的中하여 화살촉이 박혀 버렸다. 그런데 仔細히 보니 돌이었다. 李廣은 다시 몇 番 활을 쏘아 보았는데, 아무리 해도 화살촉이 돌에 박히지 않았다.
(廣出獵, 見草中石, 以爲虎而射之, 中石沒鏃, 視之石也. 因復更射之, 終不能復入石矣)」
이 이야기는 《史記 李將軍列傳》에 나온다.
‘中石沒鏃’은 ‘돌을 쏘아 화살의 깃털까지 박히다.’라는 뜻의 ‘射石飮羽’ 或은 ‘射石沒羽’라고도 하는데, 이는 다음의 典籍에서 찾아볼 수 있다.
「養由基가 활을 外뿔소에 쏘았는데 돌에 的中해 화살의 깃털까지 박혔다. 이는 외뿔소에 精神을 集中했기 때문이다.(養由基射先, 中石, 矢乃飮羽, 誠乎先也)」
* 呂氏春秋 精通에
‘先’은 외뿔소 (시兕)의 誤字라고 한다. 《論衡 儒增》과 《文選 七啓》의 李善 注와 《路史 發揮三》에는 모두 ‘시兕’로 되어 있다.
「옛날에 楚나라의 熊渠子가 밤길을 가다가 누워 있는 바위를 엎드려 있는 호랑이로 보고 활을 힘껏 당겨 쏘았는데 화살의 깃까지 박혔다. 내려가 보고서야 그것이 돌인 줄 알았다.
(昔者楚熊渠子夜行, 寢石, 以爲伏虎, 彎弓而射之, 沒金飮羽. 下視, 知其爲石)」
* 韓詩外傳에.
같은 이야기가 劉向의 《新序》에도 나온다.
34. 중원축록(中原逐鹿)
中原에서 사슴을 쫓다. 帝位나 政權 따위를 얻으려고 다투는 일을 比喩
漢高祖 劉邦을 도와 天下를 制覇한 韓信은 그 功으로 楚王에 封해졌지만, 項羽와의 戰爭 때 項羽의 部下로서 漢高祖를 괴롭혔던 親舊 鍾離眛를 保護하다가 謀叛의 嫌疑를 받고 逮捕되어 淮陰侯로 降等되었다.
怏怏不樂하며 지내던 韓信은 陳豨를 부추겨 謀叛을 꾀했다. 漢高祖 劉邦이 韓信의 使嗾를 받고 謀叛을 일으킨 陳豨를 치러 간 사이, 劉邦의 夫人 呂后는 蕭何의 計策에 따라 陳豨의 反亂이 이미 平定되었다는 거짓 所聞을 흘리는 꾀를 써 韓信을 逮捕했다. 韓信은 죽기 前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괴통(蒯通)의 꾀를 듣지 않은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結局 兒女子의 속임수에 넘어갔으니 어찌 天命이 아니겠는가.”
「陳豨의 謀叛을 平定하고 돌아온 劉邦은 蒯通을 잡아들이라고 命令했다. 蒯通이 오자 劉邦이 말했다. “네가 淮陰侯를 謀叛하게 했느냐?” “그렇습니다. 臣이 그렇게 하도록 했습니다. 그 더벅머리 아이놈이 臣의 計策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이렇게 죽임을 當하게 된 것입니다. 萬若 그 더벅머리 아이놈이 臣의 計策을 썼다면 陛下께서 어떻게 韓信을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 劉邦이 火가 나서 소리쳤다. “삶아 죽여라.” 蒯通이 말했다. “아, 삶아 죽임을 當하기는 너무 抑鬱합니다.” 劉邦이 말했다. “네가 韓信을 謀叛하게 했는데 어째서 抑鬱하다는 것이냐?” 蒯通이 對答했다. “秦나라의 紀綱이 무너지고 思惟가 解弛해져(法度가 무너져) 山東에 大亂이 일어나자 異姓 諸侯들이 다 같이 일어나고 英雄들이 雲集했습니다. 秦나라가 사슴을 잃자 天下 사람들이 다 이를 쫓고 있었으니, 才주가 높고 발 빠른 사람이 먼저 얻게 마련이었습니다. 盜跖의 개가 堯임금을 보고 짖는 것은 堯임금이 어질지 않아서가 아니라, 개는 그 主人이 아니면 짖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當時에 臣은 韓信만 알았지, 陛下는 알지도 못했습니다. 또한, 天下에는 武器를 날카롭게 해서 陛下가 하신 일을 하려고 했던 사람이 數없이 많았습니다만, 그들은 能力이 不足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다 삶아 죽일 수 있겠습니까?”
(乃詔齊捕蒯通. 蒯通至, 上曰, 若敎淮陰侯反乎. 對曰, 然, 臣固敎之. 豎子不用臣之策, 故令自夷於此. 如彼豎子用臣之計, 陛下安得而夷之乎. 上怒曰, 烹之. 通曰, 嗟乎, 冤哉烹也. 上曰, 若敎韓信反, 何冤. 對曰, 秦之綱絶而維弛, 山東大擾, 異姓竝起, 英俊烏集. 秦失其鹿, 天下共逐之, 於是高材疾足者先得焉. 跖之狗吠堯, 堯非不仁, 狗固吠非其主. 當是時, 臣唯獨知韓信, 非知陛下也. 且天下銳精持鋒, 欲爲陛下所爲者甚衆, 顧力不能耳. 又可盡烹之邪)」 劉邦은 蒯通을 풀어 주었다.
이 이야기는 《史記 淮陰侯列傳》과 《漢書 蒯通傳》에 나온다. 옛날에는 帝位나 政權을 흔히 사슴에 比喩했다. 그래서 ‘逐鹿’ 或은 ‘中原逐鹿’이 帝位 다툼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山東은 秦 · 漢 때에 崤山 或은 華山의 東쪽을 가리키는 말로 關東이라고도 하며, 秦나라를 除外한 戰國 6國의 故地를 말한다.
唐나라 魏徵의 詩 述懷, (出關이라고도 함)에는 ‘中原逐鹿’이란 成語를 利用한 「中原 땅에 처음 帝位 다툼이 일어나자 붓을 던지고 戰爭에 나갔다.(中原初逐鹿, 投筆事戎軒)」는 句節이 나온다.
35. 증참살인(曾參殺人) 曾参杀人
증참(曾參)이 사람을 죽이다. 헛소문도 여러 차례 반복되면 사실처럼 된다는 것을 比喩
「옛날 曾子가 魯나라의 費邑에 있을 때, 費邑 사람 가운데 曾子와 이름과 姓이 같은 一族이 있었는데, 그가 사람을 죽였다. 어떤 사람이 달려와 曾參(曾子)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曾參이 사람을 죽였답니다.” 曾參의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 아들이 사람을 죽일 리가 없소.” 曾參의 어머니는 泰然하게 베 짜는 일을 繼續했다. 얼마 後에 또 다른 사람이 와서 “曾參이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말했지만 曾參의 어머니는 (그 말을 믿지 않고) 如前히 泰然하게 베를 짰다. 다시 얼마 後, 또 다른 사람이 달려와 曾參의 어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曾參이 사람을 죽였어요.” 曾參의 어머니는 두려운 나머지 베 짜는 북을 내던지고 담장을 넘어 逃亡했다. 曾參의 賢明함과 어머니의 信賴에도 不拘하고, 여러 사람이 그를 疑心하자 慈愛로운 어머니조차도 믿지 못하게 된 것이다.
(昔者, 曾子處費, 費人有與曾子同名族者而殺人. 人告曾子母曰, 曾參殺人. 曾子之母曰, 吾子不殺人. 織自若. 有頃焉, 人又曰, 曾參殺人. 其母尙織自若也. 頃之, 一人又告之曰, 曾參殺人. 其母懼, 投杼踰牆而走. 夫以曾參之賢與母之信也, 而三人疑之, 則慈母不能信也)」
이는 秦나라의 左丞相 甘茂가 武王에게 自身을 믿어 달라고 하면서 比喩로 든 이야기로,
* 戰國策 秦策에 나온다.
36. 지록위마(指鹿爲馬) 指鹿为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다. 윗사람을 농락하고 함부로 권세를 부리는 것을 比喩
天下를 統一한 秦始皇은 自身을 秦나라의 처음 皇帝라는 뜻의 始皇帝라 稱하고 後繼者들을 二世 皇帝, 三世 皇帝라는 式으로 號稱하도록 만들어 秦나라가 永遠히 繁榮하기를 祈願했지만, 第5次 巡行 途中에 重病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自身의 天壽가 다했음을 直感했던지 宦官 趙高에게 命하여 큰아들 扶蘇에게 주는 便紙를 만들게 하였다. 便紙에는 ‘軍士를 몽념(蒙恬)에게 맡기고 咸陽에서 나의 棺을 맞아 葬事를 지내도록 하라.’고 쓰도록 했다. 큰아들 扶蘇에게 自身의 葬禮를 主管케 하라는 遺書였던 것이다. 便紙가 封緘되어 使者의 손에 傳해지기도 前에 始皇이 昇遐하였다. 便紙와 玉璽는 모두 宦官 趙高가 지니고 있었다. 始皇의 죽음을 아는 사람은 다만 胡亥와 丞相 李斯와 趙高, 그리고 心腹 宦官 五六 名뿐이었다. 趙高는 먼저 胡亥를 說得한 다음, 懷柔와 脅迫을 動員하여 丞相 李斯까지 說得하는 데 成功했다. 세 사람은 秘密裏에 談合하여 胡亥를 皇位 繼承者로 세우고, 扶蘇와 蒙恬 將軍에게 自決하라는 內容의 遺書를 造作했다. 扶蘇는 自殺했고, 蒙恬은 自決을 拒否하다가 叛逆罪로 잡혀 死刑을 當했다. 二世皇帝가 된 胡亥의 無能을 利用하여 趙高는 모든 權力을 쥐었으며, 及其也는 謀叛罪를 뒤집어씌워 丞相 李斯까지 除去해 버리고 自身이 丞相이 되었다.
「趙高는 이에 滿足하지 않고 皇帝의 자리를 노리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여러 臣下들이 따라 주지 않을 것이 두려웠다. 하여 趙高는 臣下들을 試驗하기 爲해 사슴을 二世 皇帝에게 바치면서 말했다. “이것은 말입니다.” 二世 皇제가 웃으며 말했다. “丞相이 잘못 본 것이오. 사슴을 일러 말이라 하는구려.” 趙高가 大臣들을 둘러보며 묻자 어떤 사람은 말이라고 하며 趙高의 뜻에 迎合했다. 어떤 사람은 사슴이라고 對答했는데, 趙高는 사슴이라고 말한 者들을 暗暗裏에 모두 處刑했다. 모든 臣下들은 趙高를 두려워했다.
(趙高欲爲亂, 恐群臣不聽. 乃先設驗, 持鹿獻於二世曰馬也. 二世笑曰, 丞相誤邪. 謂鹿爲馬. 問左右, 左右或言馬, 以阿順趙高. 或言鹿者, 高因陰中諸言鹿者以法. 候群臣皆畏高)」
이 이야기는 《史記 秦二世本紀》에 나오는데, 趙高가 臣下들을 試驗해 보기 爲해 사슴을 말이라고 했다는 말에서 ‘指鹿爲馬’가 由來했다.
37. 지상담병(紙上談兵) 纸上谈兵
종이 위에서만 兵法을 말한다. 실제의 일에는 밝지 못하면서 卓上空論만 일삼는 것을 比喩
趙나라 孝成王 7年(BC260), 秦나라가 趙나라를 치기 爲해 出兵했다. 兩側의 軍隊는 長平에서 맞섰다. 趙나라에서는 廉頗를 將軍에 任命하여 秦나라 軍隊에 對敵하게 했다. 廉頗의 趙나라 軍隊는 秦나라 軍隊가 여러 차례 挑戰해 와도 應戰하지 않고 防壁을 굳게 지키기만 했다. 秦나라는 이 戰鬪가 始作되기 前에 趙나라의 名將 廉頗를 除去하지 않으면 어렵다는 事實을 알고 눈엣가시인 廉頗를 除去하기 爲해 諜者를 풀어 秦나라가 두려워하는 것은 廉頗가 아니라 馬服君 趙奢의 아들 趙括이라고 헛所問을 퍼뜨렸다. 秦나라의 心理戰에 넘어간 趙나라 孝成王은 廉頗를 罷免하고 趙括을 將軍으로 삼으려 했다.
藺相如가 反對했다. 「“王께서는 이름만으로 趙括을 쓰시려고 하는데, 그것은 거문고 기러기발을 풀로 붙여 둔 채 거문고를 타려는 것과 같습니다. 趙括은 다만 그의 아버지가 남긴 (兵法에 關한) 典籍 (或은 著作)을 읽은 것뿐으로 臨機應變을 모릅니다.
(王以名使括, 若膠柱而鼓瑟耳. 括徒能讀其父書傳, 不知合變也.)”」
趙王은 듣지 않고 趙括을 將軍으로 任命했다.
趙括은 少年 時節부터 兵法을 배워 軍事에 關한 이야기를 잘했다. 天下에 兵法家로서는 自己를 當할 사람이 없다고 自負했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趙奢도 함께 兵法을 討論했을 때 趙括을 當해 내지 못했다. 그러나 趙奢는 아들을 稱讚한 的이 없었다. 趙括의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묻자, 趙奢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걱정을 하였다. “戰爭이란 죽음의 땅이다. 그런데 括은 그것을 가볍게 말한다. 趙나라가 括을 將軍에 任命하는 일이 없다면 多幸이겠지만, 萬若 그 애가 將軍이 되면 趙나라 軍隊를 亡칠 者는 趙括이 될 것이다.” 趙括의 어머니는 아들이 出發하기에 앞서 王에게 글을 올려 아들이 將軍으로서 資質이 不足하다는 것을 說明하고 將軍으로 삼지 말 것을 建議했다. 하지만 王은 말을 듣지 않고 趙括을 보내 廉頗를 代替했다. 結局 趙括은 이 戰鬪에서 秦나라의 上將軍 白起에게 大敗했고, 무려 40萬의 兵士가 歿殺當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史記 廉頗藺相如列傳》에 나오는데, 大部分의 公舊書에서는 藺相如가 말한 ‘ 趙括은 다만 그의 아버지가 남긴 兵法에 關한 典籍을 읽은 것뿐으로 臨機應變을 모릅니다.’ 라는 말에서 ‘紙上談兵’이 由來했다고 (卽, 出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趙括이 生存해 있던 時代는 아직 종이가 나오기 前이었다. 종이는 西漢 때 發明되기는 했으나 東漢 때에 이르러 蔡倫이 이를 改良한 後에야 널리 쓰이게 되었으며, 魏晉時代에 비로소 簡牘을 代身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종이가 없었던 戰國時代의 趙括에 對한 이야기가 ‘紙上談兵’의 ‘出典’이라고 하는 것은 좀 억지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元文에 나오는 ‘書傳’은 종이로 만든 冊이 아닌, 竹簡으로 만든 ‘冊’이나, 緋緞에 쓴 ‘帛’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出典’은 어느 典籍일까? 아쉽게도, 正確한 出典은 糾明되어 있지 않다. 다만, 다음과 같은 淸代 前期의 典籍에서 成語 ‘紙上談兵’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이 趙括에 對한 이야기를 그 出典으로 하고 있다는 根據는 찾아볼 수 없다.
「이는 先生이 몸소 보고 듣고 經驗해 본 바라서 이처럼 正確하여 다른 사람이 종이 爲에서 兵法을 論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此先生親身閱歷之言, 故鑿鑿如此, 非他人紙上談兵也)」
* 湯斌의 答孫屺瞻侍郞書에.
「종이 위에서 兵法을 論하고 障壁 위에서 보며, 文章을 쓰거나 理論을 세우면서 功을 세우는 것이 어렵다고 먼저 생각한다.(紙上談兵壁上觀, 立言先慮立功難)」
* 張問陶의 卽事에.
다음은 ‘紙上談兵’의 變形된 形態인데, 亦是 이것이 趙括에 對한 이야기를 그 出典으로 하고 있다는 根據는 찾아볼 수 없다.
「한 番 行함이 千 마디 말에 該當하고, 꽃을 심는 것은 씨앗이 맺어지기를 바라기 때문. 兵法을 종이 위에서 論한다면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一行抵千言, 栽花期落實. 兵從紙上談, 制勝那能必)」
* 張問陶의 題常蘭陔侍御爲人四箴에.
「楚나라 亦是 霸國의 남은 熱情이 있었지만 세 番 싸움에 首都 영(郢)까지 이르렀는데 堅固한 城이 없었으니, 孫子兵法 13篇이 종이 위의 兵法이 아니었다. (楚亦霸國之餘烈, 三戰及郢, 遂無堅城, 則十三篇非紙上之兵矣)」
* 朱之瑜의 孫武子像贊에.
「몸소 보고 듣고 經驗해 본 바라서 眞實로 선비들이 종이 위에서 空談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一身親歷之事, 固與士子紙上空談者異也)」
* 朱之瑜의 答小宅生順書十九首에.
다시 거슬러 올라가 明나라 때의 ‘紙上談兵’에 關聯된 記錄을 보면, 明初의 人物 劉如孫(劉三吾)의 詩 (湘南雜咏三首) 中 第2首에 나오는 ‘紙上兵’을 ‘紙上談兵’의 出典으로 보아야 한다는 意見이 있는데, 이 亦是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이 詩에 나오는 ‘紙上兵’은 다만 當時의 形勢를 舒述한 말일 뿐, 史記 廉頗藺相如列傳에 나오는 趙括에 關한 이야기를 典故로 했다는 것을 證明하거나 主張할 만한 何等의 聯關性도 發見할 수 없기 때문이다.
遣使頻年赴帝京 : 使者를 派遣하여 해마다 서울로 보내는데 名分은
名爲計事豈眞情 : 朝廷을 爲해 計策을 세운다지만 그게 어찌 본뜻이겠소.
鄂垣槿有湘南地 : 鄂垣 (武昌)은 湖南 땅에 있는데
朝野猶夸紙上兵 : 朝廷과 地方에서는 如前히 종이 위의 軍士를 자랑하는구려.
諸鎭一如唐末歲 : 모든 都市가 完全히 唐나라 末年과 같은 狀況인데
孤忠誰是李長城 : 李牧 將軍이 長城을 지킨 것처럼 홀로 忠情을 가진 者가 누구인가?
山河依舊天如水 : 山河는 依舊하고 하늘은 물과 같아
愁聽寒鴉日暮聲 : 날은 스산한데 해질녘 우는 까마귀 소리 서글프게 들린다.
이 詩의 作者인 劉如孫은 元末明初 사람으로, 明나라에서 벼슬을 했지만 元나라 時代에 大部分의 生涯를 보냈으며, 元나라에서 벼슬도 했다. 劉三吾는 元나라 末에 兵亂을 避해 湘南으로 갔는데, 이 詩는 그 時期에 지은 것으로, 元나라 末期의 混亂스런 狀況을 慨嘆한 것이다. ‘鄂’은 湖北과 湖南 一帶로, 當時의 大行政區域 中의 하나였다. 이 詩를 쓸 때는 湘南 地域은 아직 元나라의 統治下에 있던 땅이었고, 다른 地域은 陳友良, 張士誠, 朱元璋 (後의 明太祖)等 軍閥의 割據地였다. 當時의 狀況을 唐나라 末年에 比較한 것은, 唐나라 末年에 節度使들이 나라의 存亡을 돌아보지 않고 自己 兵力을 가지고 割據했었는데 元나라 末期의 群雄割據 狀況이 바로 唐나라 末期와 같았기 때문이다. 李長城은 秦나라의 白起와 王翦, 그리고 趙나라의 廉頗와 더불어 戰國時代 4大 名將으로 꼽히는 趙나라의 名將 李牧을 말한다. 李牧은 長城을 맡아 匈奴와 맞서 趙나라를 지켜 냈으며, 莫强한 秦나라와의 싸움에서도 여러 차례 勝利를 거두었다. 하지만 後에 李牧은 秦나라의 反間計에 當한 幽穆王, (在位 BC236∼BC228)에 依해 죽임을 當했는데, 李牧 死後 趙나라는 바로 秦나라에 滅亡當했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 宋 代의 記錄을 보면 ‘紙上’이나 ‘談兵’이란 말을 各各 따로 使用한 典籍은 적지 않지만, ‘紙上談兵’이란 말을 使用한 典籍은 찾아볼 수 없다.
「孫子와 吳起는 종이 위가 아니다. 才略은 適切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孫吳非紙上. 才略要從宜)」
* 누모 (樓玥) 背水陣詩에.
「擧子 (科擧 應試生)들이 종이 위에서 六韜를 배우는 것을 배우지 말고, 썩어 빠진 儒學者들이 억지로 五經에 注를 다는 것을 배우지 말라.
(不學擧子紙上學六韜, 不學腐儒穿鑿注五經)」
* 劉過 多景樓醉歌에.
「皇帝가 左右에 말했다. “朕이 儒學者들이 兵法을 論하는 것을 보니 술盞과 炙臺 사이(宴會席)나 벼루와 座席 사이(工夫를 하거나 가르치는 자리)에서 하는 말에 不過하여, 그들이 쓰는 文字는 孫子와 吳紀의 引用일 따름이요, 形勢를 舒述하는 것은 閑暇한 淸談이라고 할 수 있다.”
(上謂左右曰, 朕見儒人談兵, 不過講之於樽俎硯席之間, 於文字則引孫吳, 述形勢則閑暇淸論可也)」
* 五朝名臣言行錄의 錢若水에.
趙括을 直接 擧名한 것이 있긴 하지만 兵法을 論한다는 뜻의 ‘談兵’일 뿐, ‘紙上談兵’과는 아무런 聯關이 없다.
「젊어서는 趙括처럼 兵法을 論했으나, 늙어 가면서 漸次로 理致가 흐려졌다.
(少豪頗似括談兵, 老去方漸理未明)」
* 劉克莊의 答傅監倉에.
以上의 典籍들을 살펴보면, ‘紙上談兵’이란 成語가 나온 것은 大略 明淸 代로 볼 수 있으며, 이 말이 가리키는 對象도 儒學者나 선비 等으로 趙括과는 何等의 關係가 없다. 그러므로 趙括의 이야기를 ‘紙上談兵’의 ‘出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萬若 ‘紙上談兵’과 趙括의 이야기를 聯關시킨다면 趙括의 이야기가 ‘紙上談兵’의 典故라고 말하는 것은 無妨할 것이다.
38. 지자막여부(知子莫如父)
子息을 아는 데는 父母만 한 사람이 없다. 子息에 對해서는 父母가 가장 잘 아는 法이라는 말이다.
韓非子는 《韓非子 十過》에서 君主의 열 가지 허물을 이야기했는데, 그 中 여덟 番째 허물에 對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덟 番째는 過誤를 저지르고도 忠臣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獨斷的으로 自身의 뜻을 行하는 것으로, 이는 崇高한 名聲을 잃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始作이다.
(八曰, 過而不聽於忠臣, 而獨行其意, 則滅高名, 爲人笑之始也)」
그리고 이 여덟 番째 過誤에 對한 例로 齊나라 桓公이 管仲의 勸告를 듣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다.
「무엇을 이르러 잘못이 있으면서도 忠臣의 勸告를 듣지 않는다고 하는가? 옛날 齊나라 桓公은 아홉 차례나 諸侯들과 會同하고 天下를 바로잡아 春秋五覇의 長이 되었는데 이는 管仲이 그를 輔佐한 德分이었다. 管仲이 늙어 더 以上 國事를 볼 수가 없게 되어 집에서 養病을 하며 쉬었다. 桓公이 집에까지 찾아가 물었다. “仲父께서 집에서 養病을 하고 계신데 不幸히도 이 病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면 政治를 누구에게 맡겨야 합니까?” 管仲이 말했다. “臣은 늙었으니 묻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만 臣은 臣下를 알아보는 것은 임금보다 나은 사람이 없고, 子息을 알아보는 데에는 아비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폐하(陛下)께서 마음으로 헤아려 決定하십시오.”
桓公이 물었다. “포숙아(鮑叔牙)가 어떻습니까?” 管仲이 對答했다. “안 됩니다. 鮑叔牙의 됨됨이는 强硬하고 固執스러우며 凶暴합니다. 强硬하면 百姓들을 甚하게 다룰 수 있고, 固執스러우면 民心을 얻을 수 없습니다. 凶暴하면 아랫사람들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 마음에 두려운 것이 없으니 패자(覇者)를 輔佐할 그릇이 아닙니다.” 桓公이 물었다. “수조(竪刁)는 어떻습니까?” 管仲이 對答했다. “안 됩니다. 人情 中에 自己 몸을 사랑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王께서 질투(嫉妬)를 잘하고 女色을 좋아하시는데, 수조(竪刁)는 自身을 去勢하고 內宮을 管理하고 있습니다. 自身의 몸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君主를 사랑하겠습니까.” 桓公이 물었다. “그렇다면 衛나라 公子 開方은 어떻습니까?” 管仲이 對答했다. “안 됩니다. 齊나라와 魏나라는 不過 열흘의 距離입니다. 開方이 王을 모시면서 王의 뜻에 迎合하기 爲해 15年 동안이나 父母를 뵈러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人之常情이 아닙니다. 父母에게 忠誠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君主에게 忠誠과 사랑을 바치겠습니까.” 桓公이 물었다. “그렇다면 易牙는 어떻습니까?” 管仲이 對答했다. “안 됩니다. 易牙는 王을 爲해 食事를 管理하는데, 王께서 오직 人肉만을 먹어 보지 못했다고 하자 易牙가 自己 아들의 머리를 삶아 올렸던 것을 王께서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人情 中에 子息을 사랑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이제 그가 自己 아들을 料理로 만들어 王께 바쳤는데, 自己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王을 사랑하겠습니까.”
桓公이 물었다. “그렇다면 누가 좋겠습니까?” 管仲이 對答했다. “습붕(隰朋)이 괜찮습니다. 그의 됨됨이는 마음은 强하고 行爲는 淸廉潔白하며, 慾心이 없고 信義가 있습니다. 마음이 强하면 軍臣들의 師表가 될 수 있으며, 行爲가 淸廉潔白하면 大任을 맡을 수 있습니다. 慾心이 없으면 百姓들을 다스릴 수 있으며, 信義가 있으면 隣接國과 親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覇王의 輔佐가 될 그릇입니다. 王께서는 그를 重用하십시오.” 齊桓公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一 年 뒤에 管仲이 죽었다. 桓公은 隰朋을 登用하지 않고 竪刁를 重用했다. 竪刁가 執政한 지 3年째 되던 해, 桓公은 南쪽의 堂阜에 遊歷했다. 竪刁는 그 틈을 타 易牙와 公子 開方, 그리고 大臣들을 거느리고 謀叛을 일으켰다. 桓公은 목마르고 굶주린 狀態에서 南門의 寢室, 卽 公族들이 지키는 房에서 죽었다. 桓公이 죽은 지 3個月이 지나도록 屍身을 收拾하지 않아 屍體에 벌레가 생겨 門밖까지 기어 나왔다. 桓公의 軍隊가 天下를 橫行하고 桓公은 五覇의 長이 되었지만, 마지막에는 臣下에게 弑害를 當하고 崇高한 名聲마저 잃고 天下의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이는 무엇 때문인가? 바로 管仲의 말을 듣지 않은 過失이다. 그러므로 過誤를 저지르고도 忠臣의 勸告를 듣지 않고 獨斷的으로 自己의 뜻을 行하는 것은 崇高한 名聲을 잃고 世上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始作인 것이다.
(奚謂過而不聽於忠臣. 昔者齊桓公九合諸候, 一匡天下, 爲五伯長, 管仲佐之. 管仲老, 不能用事, 休居於家. 桓公從而問之曰, 仲父家居有病, 卽不幸而不起此病, 政安遷之. 管仲曰, 臣老矣, 不可問也. 雖然, 臣聞之知臣莫若君, 知子莫若父. 君其試以心決之. 君曰, 鮑叔牙何如. 管仲曰, 不可. 鮑叔牙爲人, 剛愎而上悍. 剛則犯民以暴, 愎則不得民心, 悍則下不爲用. 其心不懼, 非霸者之佐也. 公曰, 然則竪刁何如. 管仲曰, 不可. 夫人之情莫不愛其身, 公妒而好內, 竪刁自獖以爲內治, 其身不愛, 又安能愛君. 公曰, 然則衛公子開方何如. 管仲曰, 不可. 齊衛之間不過十日之行, 開方爲事君, 欲適君之故, 十五年不歸見其父母, 此非人情也. 其父母之不親也, 又能親君乎. 公曰, 然則易牙何如. 管仲曰, 不可. 夫易牙爲君主味, 君之所未嘗食唯人肉耳, 易牙蒸其子首而進之, 君所知也. 人之情莫不愛其子, 今蒸其子以爲膳於君, 其子弗愛, 又安能愛君乎. 公曰, 然則孰可. 管仲曰, 隰朋可. 其爲人也, 堅中而廉外, 少欲而多信. 夫堅中, 則足以爲表, 廉外, 則可以大任. 少欲則能臨其衆, 多信則能親鄰國. 此霸者之佐也, 君其用之. 君曰, 諾. 居一年餘, 管仲死. 君遂不用隰朋而與竪刁. 刁莅事三年, 桓公南遊堂阜. 竪刁率易牙, 衛公子開方及大臣爲亂. 桓公渴餒而死南門之寢, 公守之室. 身死三月不收, 蟲出於戶. 故桓公之兵橫行天下, 爲五伯長, 卒見弑於其臣, 而滅高名, 爲天下笑者, 何也. 不用管仲之過也. 故曰, 過而不聽於忠臣, 獨行其意, 則滅其高名, 爲人笑之始也)」
‘知子莫如父’의 代表的인 이야기는 다음의 典籍에서 찾아볼 수 있다.
「陶朱公이 陶에 있을 때 막내아들을 낳았다. 막내아들이 長成하여 壯年의 나이가 되었을 때, 陶朱公의 둘째 아들이 殺人을 해서 楚나라의 監獄에 갇혔다. 陶朱公은 “사람을 죽였으니 死刑이 마땅하지만, 千金을 가진 富子의 아들은 저잣거리에서 죽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라고 말하며 黃金 千 일(鎰, 2萬 4千 냥)을 褐色 器物에 넣어 소가 끄는 수레에 실은 다음 막내아들을 보내려고 했다. 陶朱公의 큰아들이 自己가 가겠다고 固執했지만 陶朱公이 듣지 않자 큰아들이 “집안에 큰아들이 있는 것은 집안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只今 同生이 罪를 지었는데 저를 보내지 않고 막내를 보내시는 것은 저를 無能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自殺을 하려고 했다. 그러자 陶朱公의 아내가 아들 便을 들어 말했다. “막내아들을 보낸다고 둘째가 살아온다는 保障도 없는데, 이제 큰아들이 먼저 헛된 죽음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陶朱公은 할 수 없이 큰아들을 보내기로 하면서, 便紙를 한 桶 써 以前에 親하게 지냈던 莊生에게 傳해 주라고 申申當付를 했다. “到着하면 千金을 莊生의 집에 두고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라. 絶對 그와 맞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큰아들은 떠나면서 個人的으로도 數百 金을 가져갔다. 楚나라에 到着해 보니 莊生의 집이 城廓에서 가까운 풀이 茂盛한 곳에 있는데, 집 門 앞에 이르러 보니 집안이 아주 貧寒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吩咐에 따라 書信과 千金을 바쳤다. 莊生이 말했다. “여기에 머물지 말고 最大로 빨리 돌아가시게. 그리고 同生이 풀려나도 그 理由를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하네.” 큰아들은 莊生의 집에서 떠나 莊生과 相議하지도 않고 楚나라에 머물며 個人的으로 지니고 간 돈을 楚나라의 重要한 職責을 맡고 있는 貴人에게 바쳤다. 莊生은 비록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골목 안에서 살고 있었지만 淸廉하고 正直해 名聲이 全國에 알려져 있었으며, 楚王 以下 모든 사람들이 스승으로 尊敬했다. 그는 陶朱公이 바친 돈을 받고 싶어서 받은 게 아니라 일이 이루어진 後에 다시 돌려주어 信義를 表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돈을 받자 그의 婦人에게 말했다. “이것은 陶朱公의 돈인데 마치 病이 있으면 오랫동안 머무를 수 없는 것과 같이 後에 돌려줘야 할 것이니 손대지 마시오.” 陶朱公의 큰아들은 莊生의 뜻을 알지 못하고 돈을 莊生에게 주어 봐야 別로 큰 效果가 없을 것으로만 생각했다.
莊生이 機會를 엿보아 入宮하여 楚王을 謁見하며 어떤 별자리가 어디에 있는데 이것은 楚나라에 害로운 徵兆라고 말했다. 楚王은 平素에 莊生을 信賴했으므로 물었다. “그럼 只今 어떻게 해야 합니까?” 莊生이 對答했다. “恩德을 베풀면 害를 免할 수 있습니다.” “말씀하지 않아도 行하겠습니다.” 楚王은 使者를 보내 三錢의 官衙를 封하도록 했다. 楚나라의 貴人이 기뻐하며 이 事實을 陶朱公위 큰아들에게 알려주며 말했다. “楚王이 罪人을 大大的으로 赦免하려고 합니다.” 큰아들이 물었다. “어떻게 아셨소?” “楚王이 罪人을 赦免할 때마다 三錢의 官衙를 封하는데, 어제 저녁에 楚王이 使者를 보내 三錢의 官衙를 封했습니다.” 큰아들은 楚王이 赦免을 내리면 同生은 當然히 釋放되는 것인데 千金을 空然히 莊生에게 주어 봐야 아무런 所用이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莊生을 찾아갔다. 莊生이 놀라 물었다. “어째서 아직도 돌아가지 않았는가?” “아직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當初 同生의 問題로 어르신을 찾아뵈었는데, 同生 問題는 楚王이 赦免을 決定하였으니 自然스레 赦免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르신께 人事를 드리고 가려고 한 것입니다.” 莊生은 큰아들의 뜻이 돈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直接 房에 들어가 돈을 가져가시게.” 큰아들은 房에 들어가 돈을 가지고 가면서 기뻐했다.
莊生은 큰아들에게 籠絡을 當하자 甚히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다시 入宮하여 楚王을 謁見하고 말했다. “제가 며칠 前에 한 별자리 이야기에 대해 王께서는 德을 닦는 方法으로 報答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내가 밖에 나가 보니 사람들이 모두 陶 땅의 富子 朱公의 아들이 사람을 죽여 楚나라에 갇혔는데 그의 집안사람이 많은 돈을 가지고 王의 部下를 買收하였기 때문에 王의 大赦免은 楚나라의 百姓들을 불쌍히 여겨서가 아니라 朱公의 아들을 罪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 爲해서였다고들 말합니다.” 楚王은 大怒하여 “내가 비록 德은 없지만 무엇 때문에 朱公의 아들로 因하여 恩惠를 베풀겠소?”라고 말하고 朱公의 아들을 죽이라고 命令을 내렸다. 그리고 다음 날 赦免令을 내렸다. 큰아들은 同生의 屍身을 가지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집에 到着하자 어머니와 洞네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는데 朱公만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 녀석이 同生을 죽일 줄 알고 있었다. 그 녀석이 同生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차마 財物을 버리지 못해서이다. 그 녀석은 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하면서 내가 살기 爲해 苦生하는 것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財物을 抛棄하는 일을 絶對로 못 한다. 하지만 막내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내가 아주 富裕한 것을 보면서 자랐으며, 堅固한 수레를 타고 名馬를 타며 恒常 밖에 나가 사냥을 했으며, 財産이 어디에서 생기는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財産을 가볍게 버리고도 아까워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막내아들을 보내려고 했던 것은 막내는 財物을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큰아들은 財物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結局은 同生을 죽게 만든 것이다. 理致가 그러하니 슬퍼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率直히 말해서, 나는 그 녀석이 屍身을 가지고 돌아올 것을 밤낮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 史記 越王勾踐世家에 나온다.
‘知子莫如父’의 또 하나의 代表的인 이야기는 戰國時代 趙나라의 名將 趙奢와 그의 아들 趙括의 이야기이다. 趙括은 少年 時節부터 兵法을 배워 軍事에 關한 이야기를 잘했다. 天下에 兵法家로서는 自己를 當할 사람이 없다고 自負했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趙奢도 함께 兵法을 討論했을 때 趙括을 當해 내지 못했다. 그러나 趙奢는 아들을 稱讚을 한 적이 없었다. 趙括의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묻자, 趙奢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걱정을 하였다. “戰爭이란 죽음의 땅이다. 그런데 括은 그것을 가볍게 말한다. 趙나라가 括을 將軍에 任名하는 일이 없다면 多幸이겠지만, 萬若 그 애가 將軍이 되면 趙나라 軍隊를 亡칠 者는 趙括이 될 것이다.” 趙括은 아버지 趙奢가 憂慮한 대로 結局 長平의 戰鬪에서 趙나라의 40萬 大軍을 歿殺當하게 만들고 自身도 戰死하고 말았다.
39. 지피지기(知彼知己)
相對를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 相對便과 나의 弱點과 强點을 充分히 알면 相對方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까닭에 戰爭의 勝利를 알 수 있는 것이 다섯 가지가 있다. 더불어 싸울 것인가와 더불어 싸우지 않을 것인가를 아는 쪽은 勝利하고, 兵力의 많고 적음에 따라 用兵할 줄 아는 쪽은 勝利하고, 위아래가 一致團結하여 함께하려고 하는 쪽은 勝利하고, 萬般의 態勢를 갖추고 相對의 未備함을 기다리는 쪽은 勝利하고, 將帥가 有能하고 君主는 干涉하지 않는 쪽이 勝利한다. 이 다섯 가지는 勝利를 아는 方法이다. 그러므로 相對를 알고 自身을 알면 百 番 싸워도 危殆하지 않으며, 相對를 알지 못하고 自身을 알면 한 番 이기고 한 番 지며, 相對를 알지 못하고 自身도 알지 못하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危殆롭다고 하는 것이다.
(故知勝有五. 知可以戰, 與不可以戰者勝. 識衆寡之用者勝. 上下同欲者勝. 以虞待不虞者勝. 將能而君不御者勝. 此五者, 知勝之道也. 故曰, 知彼知己, 百戰不殆.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
* 孫子 謀攻에.
孫子는 여기에서 여러 가지 勝利의 方法을 이야기했는데, 戰爭에서 이기는 要諦는 바로 敵을 알고 나를 아는 것, 卽 ‘知彼知己’라고 說明하고 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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