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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한자성어(漢字成語)**/고사성어(故事成語)

고사성어(故事成語) (ㅊ- 1 창씨고씨~ )

by 산산바다 2026. 3. 7.

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글 목록

 

 

 고사성어(故事成語) (- 1 창씨고씨~ )

 

 

1. 창씨고씨(倉氏庫氏)

어떤 事物이나 사람이 오래도록 하지 않음을 比喩할 때 쓰는 成語이다.

 

옛날 中國에서 倉氏庫氏代代로 곳집을 맡아 보았다는 데서 由來用語, 司馬光資治通鑑에 이와 關聯된 이야기가 나온다.

中國 북위(北魏)孝文帝 倉氏庫氏子孫들에게 代代自身들의 官職인 곳집 일을 물려주었다는 故事가 그것이다. 이는 倉氏庫氏 집안이 代代로 곳집 지키는 일을 잘 處理했기 때문인데, 이렇듯 두 姓氏하지 않고 自身들의 職分充實遂行했다는 데서 오래도록 치 않는다는 뜻이 붙었다.

物件을 간직해 두는 곳을 뜻하는 고간(庫間)庫氏''에서 由來한 것이고, 亦是 곳집을 뜻하는 漢字語 창고(倉庫)倉氏庫氏의 앞 글자를 그대로 빌려 쓴 것이다.

 

 

2. 창해일속(滄海一粟) 沧海一粟

망망한 바다에 좁쌀 한 톨. 극히 하찮거나 微微한 것을 比喩

 

달이 밝으니 별은 성긴데, 까막까치 쪽으로 날아간다.’ 이것은 曹孟德(曹操)가 아니겠소? 西쪽으로 夏口를 바라보고 쪽으로 武昌을 바라보니 山川이 서로 얽혀 검푸르기만 한데, 이곳이 바로 孟德周郞(周瑜)에게 困辱한 곳이 아니겠소? 바야흐로 荊州를 깨뜨리고 江陵으로 내려갈 제, 물길 따라 쪽으로 흘러가는데, 배는 千 里에 이어지고 깃발은 하늘을 가렸다오. 술을 걸러 물을 굽어보며 을 비껴들고 를 읊을 때에는 眞實一世英雄이었더니, 只今 어디에 있는가? 하물며 나와 그대가 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하며, 물고기들과 짝하고 들짐승들과 벗함에 있어서이겠는가. 나뭇잎 같은 조각배를 타고 술을 들어서 서로 하니, 天地間의 하루살이같이 덧없는 生命이요, 저 드넓은 바다의 좁쌀 한 알과 같은 微微存在가 아니겠소? 내 삶의 暫時 짧음을 슬퍼하며 저 長江의 끝이 없음을 부러워하는 것이라오.

(月明星稀, 烏鵲南飛, 此非曹孟德之詩乎. 西望夏口, 東望武昌, 山川相繆, 鬱乎蒼蒼. 此非孟德之困於周郞者乎. 方其破荊州, 下江陵, 順流而東也, 舳艫千里, 旌旗蔽空. 釃酒臨江, 橫槊賦詩. 固一世之雄也. 而今安在哉. 況吾與子, 漁樵於江渚之上, 侶魚蝦而友慧麋鹿. 一葉之片舟, 擧匏樽以相屬, 蜉蝣於天地, 蒼海之一粟. 哀吾生之順臾, 羨長江之無窮.)

* 蘇軾 赤壁賦, 前文. 前赤壁賦(전적벽부) : 소식(蘇軾)

 

赤壁賦作者 蘇軾나라 神宗 黃州團練副使左遷되었는데, 黃州赴任, 番 赤壁遊覽하고 前赤壁賦後赤壁賦를 지었다. ‘滄海一粟前赤壁賦에 나오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는 太倉一粟, 大倉稊米가 있다.

 

赤壁三國志에 나오는 赤壁大戰이 일어났던 곳인데, 蘇軾이 노닐었던 赤壁曹操가 싸웠던 赤壁同一한 곳은 아니다. 曹操赤壁湖北省 赤壁市에 있으며, 武赤碧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蘇軾赤壁은 그보다 하류에 있는 湖北省 黃岡市 赤鼻磯, 文赤碧이라고도 한다.

 

 

3. 천고마비(天高馬肥) 天高马肥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다. 맑고 풍요로운 가을의 날씨를 比喩

 

北地寒應苦 : 北方의 추위 苦痛스러울 텐데

南庭戍未歸 : 匈奴朝廷자리 간 사람들 아직 돌아오지 않았네.

邊聲亂羌笛 : 邊方의 갖은 소리들 오랑캐의 피리소리 어지럽히고

朔氣卷戎衣 : 北方의 찬바람에 軍服이 말리네.

雨雪關山暗 : 비와 눈에 關山 어두워지고

風霜草木稀 : 바람과 서리에 草木은 드물어졌네.

胡兵戰欲盡 : 오랑캐 軍隊戰意가 다하고

漢卒尙重圍 : 나라 兵卒들 겹겹이 둘러쌌네.

雲淨妖星落 : 구름은 깨끗하고 妖邪스런 별도 떨어져

秋深塞馬肥 : 가을 하늘은 높고 邊方의 말도 살찌네.

据鞍雄劍動 : 鞍裝에서 英雄의 칼을 움직이고

搖筆羽書飛 : 붓을 휘둘러 격문(檄文)을 날리네.

輿駕還京邑 : 수레와 말들 都邑으로 돌아오고

朋遊滿帝畿 : 親舊京畿 땅에 가득하네.

方期來獻凱 : 돌아와 勝利消息을 바치고

歌舞共春輝 : 노래 부르고 춤추며 봄날의 風光 함께 하리.

 

두심언(杜審言)(贈蘇味道)의 이 參軍으로 邊方에 나가 있는 親舊 蘇味道가 하루빨리 長安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지은 것인데, 秋深塞馬肥에서 秋高馬肥가 나왔으며 이 秋高馬肥秋高馬肥가 되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最終的으로 秋高馬肥로 쓰이게 되었는지는 正確하게 糾明되어 있지 않다.

 

秋高馬肥는 오히려 위의 보다는 다음의 典籍에서 由來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은 가을이 깊어지고 말이 살찌면 오랑캐들이 다시 쳐들어와 以前盟約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臣恐秋高馬肥, 虜必再至, 以責前約)

* 나라 李綱靖康傳信錄.

 

秋高馬肥秋高馬肥典故史記漢書에서 찾아볼 수 있다.

正月이면 모든 들이 單于朝廷에서 작은 모임을 갖고 祭祀를 지낸다. 5에는 蘢城에서 큰 모임을 갖고 先祖와 하늘과 鬼神祭祀한다. 가을에 말이 살찌면 蹛林에서 큰 모임을 갖고 家畜들의 比較한다.

(歲正月, 諸長小會單于庭, . 五月, 大會蘢城, 祭其先天地鬼神. , 馬肥, 大會蹛林, 課校人畜計)* 史記 匈奴列傳.

 

蹛林해서漢書音義에서는

匈奴가 가을 土地神에게 祭祀하는 8에 모두 모여 祭祀 지내는 곳(匈奴秋社八月中皆會祭處)이라고 說明하고 있는데, 이처럼 秋高馬肥北方遊牧民族 匈奴活動하기 가장 좋은 季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廣闊草原에서 봄부터 여름까지 풀을 먹은 말은 가을에 토실토실하게 살이 찌는데, 해마다 가을철이면 그 말을 타고 邊方에 쳐들어와 穀食家畜을 노략(擄掠)질해 갔으므로, 邊方中國人들은 가을이 되면 언제 匈奴侵入이 있을지 몰라 戰戰兢兢했다고 한다. ‘單于匈奴가 그들의 君主族長을 높여 부르던 이름이다.

 

以上典籍하면, ‘秋高馬肥元來 匈奴의 노략(擄掠)질에 邊方 百姓들의 삶의 苦痛切迫心情比喩한 말이었으나, 에 뜻이 하여 맑고 豊饒로운 가을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4. 창업수성(創業守成) 创业守成

創業守成. ‘創業은 어떤 事業始作하는 것을 말하고, ‘守成은 이루어 놓은 成果를 잘 지키는 것을 말한다.

 

創業은 이웃 나라의 威脅 때문에 걱정하는 滕文公에게 孟子가 해 준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滕文公(孟子에게)물었다. “나라 사람들이 에다 을 쌓으려고 하여 무척 두려운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孟子對答했다. “옛날 太王은 빈()에서 狄人들이 侵入해 오자 그곳을 버리고 岐山 밑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곳을 해서 했던 것이 아니고, 不得已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眞實한 일을 한다면 後世子孫에서 반드시 王者가 생겨날 것입니다. 君子創業을 하여 國統하는 것은 그것을 繼承해 나갈 수 있게 하기 함입니다. 成功은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께서 저 나라 사람들을 어떻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힘써 할 따름이지요.”

(滕文公問曰, 齊人將築薛, 吾甚恐, 如之何則可. 孟子對曰, 昔者大王居, 狄人侵之, 去之岐山之下, 居焉. 非擇而取之, 不得已也. 苟爲善, 後世子孫, 必有王者矣. 君子創業垂統, 爲可繼也. 若夫成功則天也. 君如彼, 何哉. 疆爲善而已矣.)

* 孟子 梁惠王下. 孟子(맹자) 14. 齊人將築薛(제인장축설)

 

守成公孫弘皇帝에게 올린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루어 놓은 것을 지키는 데는 崇尙해야 하고, 變亂했을 때는 崇尙해야 합니다.(守成尙文, 遭遇右武)* 漢書 公孫弘傳.

 

그리고 創業守成해져 이루어진 創業守成은 다음의 典籍에서 찾아볼 수 있다.

貞觀10, 唐 太宗臣下들에게 말했다. “創業守成 中에서 어떤 것이 어렵소?” 房玄齡對答했다. “天地渾沌스러울 때 여러 英雄이 다투어 일어나 힘을 겨루어 이긴 에야 臣下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로써 말하자면 創業이 어렵습니다.” 魏徵이 말했다. “예로부터 임금의 자리는 艱難 속에서 얻어 安逸 속에서 잃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守成이 어렵습니다.” 太宗이 말했다. “옛날에 房玄齡은 나를 따라 天下하면서 많은 죽음에 나아가 살아남았소. 그래서 創業의 어려움을 알고 있소. 魏徵은 나와 더불어 天下安定시키며, 驕奢富貴에서, 禍亂疏忽함에서 온다는 것을 恒常 憂慮하고 있소. 그래서 守成의 어려움을 알고 있소. 그러나 이제 創業의 어려움은 끝이 났소. 守成의 어려움에 해서는 여러분과 함께 愼衆하게 해 나갈까 하오.”

(貞觀十年, 上問侍臣曰, 創業與守成孰難. 房玄齡曰, 草昧之初, 與群雄幷起, 角力而後臣之, 創業難矣. 魏徵曰, 自古帝王莫不得之於艱難, 失之於安逸, 守成難矣. 上曰, 玄齡與吾共取天下, 出百死, 得一生, 故知創業之難. 徵與吾共安天下, 常恐驕奢生於富貴, 禍亂生於所忽, 故知守成之難. 然創業之難, 旣已往矣. 守成之難, 方當與諸公愼之.)

* 自治通鑑 唐紀에 나온다.

 

같은 이야기가 唐太宗貞觀之治記錄해 놓은 貞觀政要에도 나온다.

나라는 煬帝 때에 이르러 高句麗 征伐無理土木工事, 그리고 暴政으로 民生疲弊해지자 各地에서 反亂이 일어났다. 李淵關中治安을 맡고 있다가 民亂鎭壓하라는 命令을 받들어 아들 李世民과 함께 山西, 河東 等 곳곳에서 民亂鎭壓했다. 煬帝李淵人相凡常치 않을 뿐 아니라 當時 流行하던 圖讒說深水沒黃楊이란 豫言도 있던 터라 李淵警戒했다. ‘深水는 깊은 물로 李淵의 이름字 淵을 뜻하고, ‘黃楊나라 皇帝이므로, ‘깊은 못이 버드나무를 기게 하다.’, 卽 李淵나라를 滅亡시킨다는 뜻을 內包하고 있다.

 

그런데 李淵太原 留守로 있을 때 나라의 混亂을 틈타 突闕族國境 地帶侵入했는데, 李淵은 이들과의 싸움에서 많은 兵力을 잃고 말았다. 煬帝李淵江都連行해 오라는 命令을 내렸다. 江都에서는 刑罰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이 分明할 터, 둘째 아들 李世民說得에 힘입은 李淵反亂을 일으켜 首都 長安으로 進擊했다. 長安 入城成功李淵百姓들을 鎭撫하는 한便, 大王 楊侑皇帝擁立하고, 江都避身해 있던 煬帝太上皇으로 받들었다. 唐國公이었던 李淵唐王이 되어 皇帝代身하여 政務를 폈다. 이 모든 것이 禪讓準備 過程이었다. 便, 義氣完全히 꺾인 煬帝는 마치 모든 것을 抛棄한 것처럼 江都離宮에서 美女들에게 둘러싸여 遊興에 젖어 살다가 不滿이 쌓여 쿠데타를 일으킨 親衛軍해 죽고 말았다.

 

煬帝江都에서 弑害되었다는 消息長安해지자 李淵은 그해 5, 禪讓形式을 빌려 長安에서 皇帝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이라 했다. 이이 過程에서 李世民活躍이 뛰어나 아버지로부터 天下는 모두 네가 이룩하여 놓은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李世民이 아버지를 도와 天下統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生死를 같이한 많은 人才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李世民宮殿北門玄武門에서 兄弟들을 殺害하고 李淵의 뒤를 이어 皇帝가 되었는데, 그가 太宗이다. 李淵退位하여 太上王이 되었다. 太宗은 그 後 地方割據하던 群雄服屬시키고 學問奬勵하여 民心을 가라앉혔다. , 그는 凌煙閣을 지어 開國 때부터의 功臣 24肖像畵를 그려 걸어 놓게 했다. 그리고 貞觀 10開國功臣들과 더불어 위와 같은 對話를 나누었다.

 

 

5. 천도시비(天道是非)

하늘의 가 옳으냐 그르냐는 뜻으로, 하늘의 天道라는 것이 疑心스럽다는 뜻.

 

* 史記 伯夷叔齊列傳.

나라 武帝 , 司馬遷太史令이었다.

當時, 李陵5軍士匈奴對敵하다 捕虜가 되었다. 이를 두고 武帝朝廷百官들이 李陵非難하였다. 그러나 司馬遷 혼자 李陵庇護하였다.

이것이 武帝脾胃를 건드려 抑鬱하게 宮刑하였다. 正當한 일을 正當하게 主張하다 을 받은 自身處地比較하여, 司馬遷史記伯夷叔齊列傳에서 天道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天道公平無私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의 便을 든다.' 그렇다면 伯夷叔齊와 같은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을 쌓고 淸廉 高潔하게 살다가 굶어 죽었다.

그리고 孔子七十 弟子 中에 오직 顔回만을 學問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推賞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끔 뒤주가 비어 있었으며, 지게미나 쌀겨도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끝내 夭折하였다. 하늘은 착한 사람에게 報答한다는데, 이것은 都大體 어찌된 셈인가?

便 盜跖은 날마다 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치는 , 暴惡 放恣하여 數千 사람의 徒黨을 모아 天下橫行하였지만 天壽를 누렸다. 그렇다면 그가 都大體 어떤 德行을 쌓았단 말인가? 이러한 것들은 가장 顯著라 하겠지만, 近世에 이르러서도 所行를 벗어나 오로지 惡行만을 저지르는데 終身토록 逸樂하고 富貴子孫代代로 끊이지 않는다.

이와 달리 正當한 땅을 골라서 딛고 正當發言을 해야 할 때만 말을 하며 恒常 큰길을 걸으며 公明正大理由가 없으면 發憤하지 않고, 始終 謹直하게 行動하면서도 오히려 災禍하는 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나는 疑心한다. 天道果然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或曰: 天道無親, 常與善人?若伯夷 叔齊, 可謂善人者非邪? 積仁絜行如此而餓死! 且七十子之徒, 仲尼獨薦顏淵爲好學? 然回也屢空, 糟糠不厭, 而卒蚤夭? 天之報施善人, 其何如哉? 盜蹠日殺不辜, 肝人之肉, 暴戾恣睢, 聚黨數千人橫行天下, 竟以壽終?

是遵何德哉? 此其尤大彰明較著者也? 若至近世, 操行不軌, 專犯忌諱, 而終身逸樂, 富 厚累世不絕? 或擇地而蹈之, 時然後出言, 行不由徑, 非公正不發憤, 而遇禍災者, 不可 勝數也? 余甚惑焉, 儻所謂天道, 是邪非邪?

 

 

6.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

天道都大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漢武帝 太史令이었던 司馬遷은 아버지의 遺志를 받들어 歷史 著述着手했다. 하지만 그가 歷史 執筆沒頭한 지 7經過한 어느 날, 靑天霹靂과 같은 災殃하게 된다. 當時 漢武帝匈奴强攻策을 펴고 있었는데, 名將李陵別動隊 5을 이끌고 匈奴의 땅에 깊숙이 侵入하여 匈奴精兵과 싸우다가 화살과 食糧이 다 떨어지자 할 수 없이 匈奴降伏하고 말았다. 武帝는 이로 大怒하여 李陵問責하는 御前會議를 열었는데, 어느 누구도 李陵庇護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司馬遷武帝暫時나마 누그러뜨려 주기 李陵過去戰功人品을 들어 그의 投降辨明하고 나섰다가 그만 武帝震怒를 사, 罪人의 몸이 되어 男子로서 가장 恥辱的腐刑 (男性生殖器除去하는 刑罰, 宮刑이라고도 함)하고 말았다. 하지만 司馬遷은 여기서 挫折하지 않고, 위로 黃帝부터 始作하여 當時까지의 歷史總網羅하여 12本紀, 30世家, 10, 8, 70列傳 等 모두 130, 5265百 字記錄大作史記完成했다.

 

史記列傳의 첫 伯夷列傳에서, 司馬遷은 착한 사람들이 오히려 해를 하고 惡人들이 富貴長壽를 누리는 世態를 들어 天道疑懼心을 품으며 다음과 같이 記錄했다.

 

어떤 사람이 天道私事로움이 없어 언제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伯夷叔齊와 같은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을 쌓고 淸廉 高潔하게 살다가 굶어 죽었다. 그리고 孔子七十 弟子 中에 오직 顔回만을 學問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稱讚했다. 그러나 그는 가끔 뒤주가 비어 있었으며, 지게미나 쌀겨조차도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끝내 夭折하고 말았다. 하늘은 착한 사람에게 報答한다는데, 이것은 都大體 어찌 된 셈인가? 盜跖은 날마다 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치는 等 暴惡 放恣했으며, 數千 名徒黨을 모아 天下橫行하였지만 天壽를 누렸다. 그렇다면 그가 都大體 어떤 德行을 쌓았단 말인가? 이러한 것들은 가장 두드러진 라 하겠지만, 近世에 이르러서도 所行를 벗어나 오로지 惡行만을 저지르는데도 終身토록 安樂하게 살고 富貴子孫 代代로 끊이지 않는다. 이와 달리, 正當한 땅을 골라서 딛고 正當發言을 해야 할 때만 말을 하며 恒常 큰길을 걸으며 公明正大理由가 없으면 發奮하지 않고 始終 勤直하게 行動하면서도 오히려 災禍하는 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나는 唐惑스럽다. 都對體 天道는 옳은 것인가, 아니면 그른 것인가?

(或曰, 天道無親, 常與善人. 若伯夷叔齊, 可謂善人者非耶. 積仁潔行如此而餓死. 且七十子之徒, 仲尼獨薦顔淵爲好學. 然回也屢空, 糟糠不厭, 而卒早夭. 天之報施善人, 其何如哉. 盜跖日殺不辜, 肝人之肉, 暴戾恣睢, 聚黨數千人橫行天下, 竟以壽終. 是遵何德哉. 此其尤大彰明較著者也. 若至近世, 操行不軌, 專犯忌諱, 而終身逸樂, 富厚累世不絶. 或擇地而蹈之, 時然後出言, 行不由俓, 非公正不發憤, 而遇禍灾者, 不可勝數也. 余甚惑焉, 倘所謂天道是耶非耶)

 

처음에 引用天道私事로움이 없어 언제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는 말은 老子에 나온다.

 

 

7. 천려일득(千慮一得) 千虑一得

번 생각하면 한 가지라도 얻는다. 아무리 우둔(愚鈍)한 사람이라도 깊고 세밀하게 생각하면 한 가지쯤은 좋은 생각을 해낼 수 있다는 말이다.

 

나라의 大夫 晏嬰은 그의 아버지가 죽은 아버지의 宰相 地位를 이어받아 靈公, 莊公, 景公을 섬겼다. 晏嬰은 사람됨이 正直하고 淸廉했으며 아주 儉素生活을 했다. 어느 날, 晏嬰點心을 먹고 있는데 景公이 사람을 보내 晏嬰을 만나도록 했다. 晏嬰自己가 먹을 밥을 나누어 이 보낸 사람에게 點心待接했다. 景公이 이 事實을 알고 嘆息했다. “宰相이 이토록 貧寒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니. 이건 나의 잘못이다.” 景公은 사람을 시켜 晏嬰에게 千 金을 보냈다. 晏嬰은 이 財物을 받지 않고 가지고 온 사람을 시켜 돌려보냈다. 景公이 다시 보냈지만 晏嬰亦是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景公이 다시 財物을 보내자 晏嬰이 말했다. “大王께서 주신 俸祿으로도 우리 집안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賓客接待하기에 充分할 뿐만 아니라 어렵게 사는 百姓들도 救濟할 수 있으니, 大王께서 내리신 財物을 받을 수 없다고 해 주시게.” 景公이 보낸 사람이 아주 難處해하자 晏嬰이 그와 함께 가서 景公을 만났다. 景公桓公 때의 宰相 管仲를 들며 말했다. “管仲桓公覇者의 자리에 올리는 큰 을 세우고 桓公封地를 내리자 辭讓하지 않고 받았소. 그런데 宰相은 어째서 내가 보낸 財物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오?”

 

晏嬰對答했다. “제가 들으니 聖人이라도 깊고 細密하게 생각을 하면서 分明 한 가지쯤은 錯誤가 있을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깊고 細密하게 생각하면 分明 한 가지라도 얻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管仲이 잃은 것이고 제가 얻은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再拜하고 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晏子曰, 嬰聞之, 聖人千慮, 必有一失. 愚人千慮, 必有一得. 意者管仲之失, 而嬰之得者耶. 故再拜而不敢受命)

 

이 이야기는 晏子春秋 · 內篇 雜下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千慮一得가지 생각 가운데에서 한 가지의 失手란 뜻으로 智慧로운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하나쯤 失手를 하게 된다는 말인 千慮一失이 나왔다. ‘千慮一得千慮一失은 다음의 典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廣武君이 말했다. “저는 智慧로운 라도 千 番 생각하여 한 失手가 있을 수 있으며, 어리석은 라도 千 番의 생각 가운데 한 쯤은 좋은 計策을 낼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친 사람의 말에서라도 聖人은 골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의 計策이 쓰기에 하지는 않지만, 어리석은 저의 忠誠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廣武君曰, 臣聞智者千慮, 必有一失. 愚者千慮, 必有一得. 故曰狂夫之言, 聖人擇焉. 顧恐臣計未必足用, 願效愚忠.)

* 史記 淮陰侯列傳에 나온다.

廣武君戰國時代 趙나라의 名將이자 빼어난 戰略家였던 李左車이다.

 

 

8. 천리안(千里眼)

千 里 밖을 볼 수 있는 눈. 世上事를 꿰뚫어 보거나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直感的으로 感知하는 能力을 말한다.

 

북위(北魏) 末葉, 19의 양일(楊逸)光州刺史에 부임(赴任)했다. 그는 自身을 낮추고 百姓들을 慰撫하였으며, 民生 業務에 힘을 기울였다. 해가 기울도록 먹는 것도 잊고 밤 늦도록 자지도 않으며 일을 했다. 兵士들이 服務하러 갈 때는 반드시 餞送을 했다. 바람이 부는 날이나 비와 눈이 오는 날에 사람들이 수고로움을 堪耐하지 못하는데도 그는 조금도 疲困氣色이 없었다. 嚴格施行하였으나 너그러움과 嚴格함이 서로 調和를 이루어 官內가 모두 恭敬하고 두려워하여 하지 못했다. 當時 天災收穫이 좋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자, 楊逸食糧 倉庫를 열어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눠 주려 했다. 그런데 擔當 官吏를 입을까 두려워하자 楊逸이 말했다. “나라는 百姓根本으로 삼으며, 사람은 먹는 것을 으로 삼는다. 百姓들이 滿足하지 못하면 이 누구와 더불어 滿足할 수 있겠느냐? 萬若 이것으로 를 얻게 된다면 내가 달게 받겠다.” 이렇게 食糧放出하고 또한 늙은이나 病者에게는 밥을 지어 주어 數萬 命했다. 皇帝가 이를 듣고 嘉賞하다고 여겼다.

 

楊逸百姓들을 사랑하고 奸巧한 것을 미워하여 널리 自己耳目 (諜報員)을 심었다. 兵士官吏들이 所屬 고을로 出場을 갈 때는 스스로 食糧을 지니고 갔으며, 百姓들이 飮食待接하면 隱密한 곳이라 할지라도 들어가지 않고, 모두 楊 刺史千 里를 내다보는 눈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속일 수 있겠소?”라고들 말했다.

(逸爲政愛人, 尤憎豪猾, 廣設耳目. 其兵吏出使下邑, 皆自持糧, 人或爲設食者, 雖在闇室, 終不進, 咸言楊使君有千里眼, 那可欺之)

고을의 政事 實積은 더욱 좋아졌다. 하지만 楊逸皇帝 자리를 엿보던 朱仲 一族에게 미움을 받아 하고 말았다. 當時 그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 魏書 楊播傳楊逸에 나온다.

 

千里眼順風耳와 더불어 中國民間 傳說에 나오는 道敎守護神이다. 千里眼千里 밖의 事物을 볼 수 있는 眼力을 가지고 있으며, 順風耳는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千 里 밖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封神演義, 西遊記小說登場한다.

 

 

9. 천여불취반수기구(天與弗取反受其咎) 天与弗取反受其咎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허물을 받게 된다. 機會가 왔을 때 일을 成事시키지 못하면 도리어 그로 를 입거나 낭패(狼狽)를 보게 된다.

 

범여(范蠡)가 말했다. “會稽의 일은 하늘이 나라를 나라에게 준 것인데 나라가 받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늘이 나라를 우리 나라에게 주는 것이니, 나라가 하늘의 뜻을 拒逆하면 되겠습니까? 또한 께서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政務에 힘쓴 것이 나라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22동안이나 圖謀하고서 하루아침에 버리면 되겠습니까?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허물을 받게 됩니다. 도낏자루를 자르는 데 그 法則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方法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實踐하는 데 있는 것임을 比喩하는 말) 께서는 會稽不幸을 잊으셨습니까?”

(范蠡曰, 會稽之事, 天以越賜吳, 吳不取. 今天以吳賜越, 越其可逆天乎. 且夫君王蚤朝晏罷, 非爲吳邪. 謀之二十二年, 一旦而棄之, 可乎. 且夫天與弗取, 反受其咎. 伐柯者其則不遠. 君忘會稽之厄乎.)

* 史記 越王勾踐世家.

 

吳越 戰爭 , 나라에 降服했던 나라가 다시 軍隊를 일으켜 나라를 攻擊하여 到處에서 나라의 軍隊擊破하고, 3에 걸쳐 나라의 首都包圍했다. 吳王 夫差는 더 以上 버틸 수가 없자 勾踐에게 降伏했다. 越王 勾踐吳王 夫差를 가엾게 여겨 降伏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자 范蠡會稽의 일은 하늘이 나라를 나라에 준 것인데 나라가 받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늘이 나라를 우리 나라에 주는 것이니 하늘의 뜻을 拒逆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며 反對하고 나섰다. 吳王 夫差自殺했다. 本文에 나오는 伐柯者其則不遠詩經 · 豳風 伐柯)의 한 句節이다.

 

天與弗取反受其咎는 다음의 典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라 사람 괴통(蒯通)天下를 저울질할 수 있는 힘이 韓信에게 있음을 알고, 奇發計策을 가지고 韓信을 움직이게 하기 韓信을 찾아갔다. ······ “當身賢能함과 聖德, 그리고 가지고 있는 많은 兵力으로 强大나라를 차지하고 나라를 逼迫하고 나라를 屈服시킨 다음 劉邦項羽의 손이 닿지 않는 빈 곳을 차지하고 그들의 背後에서 牽制하는 한便, 百姓들의 하는 바에 順應하여 西쪽으로 가 劉邦項羽의 싸움을 制止시켜 百姓들의 聖名保全시켜 주기를 要求하면 天下가 빠른 速度로 일어나 饗應할 테니, 누가 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런 에 큰 나라의 疆土를 갈라 한 나라의 勢力하게 만들어 諸侯들을 分蜂하여 諸侯들이 일어서면 天下는 그 感服하여 나라에 歸服할 것입니다. 나라의 疆土를 잘 지키고 膠河泗水 流域占據하고 恩德으로 諸侯들을 感服시키고 恭遜하고 謙讓하면 天下들이 서로 거느리고 나라에 朝會를 할 것입니다. ‘하늘이 준 것을 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허물을 받게 될 것이며, 때가 이르렀는데도 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災殃을 받게 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齊人蒯通知天下權在韓信, 欲爲奇策而感動之. ······ , 夫以足下之賢聖, 有甲兵之衆, 据彊齊, 從燕趙, 出空虛之地而制其後, 因民之欲, 西鄕爲百姓請命, 則天下風走而響應矣, 孰敢不聽. 割大弱彊, 以立諸侯, 諸侯已立, 天下服聽而歸德於齊. 案齊之故, 有膠泗之地, 懷諸侯以德, 深拱揖讓, 則天下之君王相率而朝於齊矣. 蓋聞天與弗取, 反受其咎. 時至不行, 反受其殃. 願足下孰慮之.)

* 史記 淮陰侯列傳.

 

楚漢 戰爭 韓信劉邦을 받아 나라를 攻擊했다. 項羽龍且救援兵으로 派遣했으나, 龍且軍隊韓信에게 大敗했고 용저(龍且)戰死하고 말았다. 나라를 平定韓信齊王으로 함을 받았다.

 

韓信勢力이 커지자 項羽는 두려운 나머지 武涉을 보내, 나라를 背叛하고 이 되어 天下三分하자고 韓信을 설득했다. 韓信劉邦과의 義理를 들어 이 提案拒絶했다. 武涉이 떠나간 다음, 天下를 저울질할 수 있는 힘이 韓信에게 있는 것을 본 韓信謀士 蒯通韓信에게 이番 機會劉邦背叛하고 天下三分하라고 說得했다. 韓信蒯通의 말에 마음이 暫時 기울긴 하였지만, 躊躇躊躇하다가 結局 漢나라를 背叛하지 못했으며, 또한 스스로 세운 이 많으므로 나라가 自身나라를 빼앗지는 못하리라 생각하고 마침내 蒯通提案拒絶하고 말았다.

 

하지만 나중에 韓信劉邦牽制謀叛罪로 몰려 淮陰侯降等되었고, 陳豨와 더불어 謀叛을 꾀하다가 結局 劉邦皇后呂后蕭何計略에 속아 逮捕되어 斬首刑했다. 韓信蒯通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後悔하면서 죽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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