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ㅊ- 1 창씨고씨~ )
1. 창씨고씨(倉氏庫氏)
어떤 事物이나 사람이 오래도록 變하지 않음을 比喩할 때 쓰는 成語이다.
옛날 中國에서 倉氏와 庫氏가 代代로 곳집을 맡아 보았다는 데서 由來한 用語로, 司馬光의 資治通鑑에 이와 關聯된 이야기가 나온다.
中國 북위(北魏)의 孝文帝 때 倉氏와 庫氏가 子孫들에게 代代로 自身들의 官職인 곳집 일을 물려주었다는 故事가 그것이다. 이는 倉氏와 庫氏 집안이 代代로 곳집 지키는 일을 잘 處理했기 때문인데, 이렇듯 두 姓氏가 變하지 않고 自身들의 職分을 充實히 遂行했다는 데서 오래도록 變치 않는다는 뜻이 붙었다.
物件을 간직해 두는 곳을 뜻하는 고간(庫間)도 庫氏의 '庫'에서 由來한 것이고, 亦是 곳집을 뜻하는 漢字語 창고(倉庫)도 倉氏와 庫氏의 앞 글자를 그대로 빌려 쓴 것이다.
2. 창해일속(滄海一粟) 沧海一粟
망망한 바다에 좁쌀 한 톨. 극히 하찮거나 微微한 것을 比喩
「‘달이 밝으니 별은 성긴데, 까막까치 南쪽으로 날아간다.’ 이것은 曹孟德(曹操)의 詩가 아니겠소? 西쪽으로 夏口를 바라보고 東쪽으로 武昌을 바라보니 山川이 서로 얽혀 검푸르기만 한데, 이곳이 바로 孟德이 周郞(周瑜)에게 困辱을 當한 곳이 아니겠소? 바야흐로 荊州를 깨뜨리고 江陵으로 내려갈 제, 물길 따라 東쪽으로 흘러가는데, 배는 千 里에 이어지고 깃발은 하늘을 가렸다오. 술을 걸러 江물을 굽어보며 槍을 비껴들고 詩를 읊을 때에는 眞實로 一世의 英雄이었더니, 只今 어디에 있는가? 하물며 나와 그대가 江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하며, 물고기들과 짝하고 들짐승들과 벗함에 있어서이겠는가. 나뭇잎 같은 조각배를 타고 술盞을 들어서 서로 勸하니, 이 天地間의 하루살이같이 덧없는 生命이요, 저 드넓은 바다의 좁쌀 한 알과 같은 微微한 存在가 아니겠소? 내 삶의 暫時 짧음을 슬퍼하며 저 長江의 끝이 없음을 부러워하는 것이라오.
(月明星稀, 烏鵲南飛, 此非曹孟德之詩乎. 西望夏口, 東望武昌, 山川相繆, 鬱乎蒼蒼. 此非孟德之困於周郞者乎. 方其破荊州, 下江陵, 順流而東也, 舳艫千里, 旌旗蔽空. 釃酒臨江, 橫槊賦詩. 固一世之雄也. 而今安在哉. 況吾與子, 漁樵於江渚之上, 侶魚蝦而友慧麋鹿. 一葉之片舟, 擧匏樽以相屬, 蜉蝣於天地, 渺蒼海之一粟. 哀吾生之順臾, 羨長江之無窮.)」
* 蘇軾 赤壁賦, 前文에. 前赤壁賦(전적벽부) : 소식(蘇軾)
赤壁賦의 作者 蘇軾은 宋나라 神宗 때 黃州의 團練副使로 左遷되었는데, 黃州에 赴任한 後, 두 番 赤壁을 遊覽하고 前赤壁賦와 後赤壁賦를 지었다. ‘滄海一粟’은 前赤壁賦에 나오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는 太倉一粟, 大倉稊米가 있다.
赤壁은 《三國志》에 나오는 ‘赤壁大戰’이 일어났던 곳인데, 實은 蘇軾이 노닐었던 赤壁과 曹操가 싸웠던 赤壁은 同一한 곳은 아니다. 曹操의 赤壁은 湖北省 赤壁市에 있으며, 武赤碧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蘇軾의 赤壁은 그보다 하류에 있는 湖北省 黃岡市 赤鼻磯로, 文赤碧이라고도 한다.
3. 천고마비(天高馬肥) 天高马肥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다. 맑고 풍요로운 가을의 날씨를 比喩
北地寒應苦 : 北方의 추위 苦痛스러울 텐데
南庭戍未歸 : 匈奴의 朝廷에 戍자리 간 사람들 아직 돌아오지 않았네.
邊聲亂羌笛 : 邊方의 갖은 소리들 오랑캐의 피리소리 어지럽히고
朔氣卷戎衣 : 北方의 찬바람에 軍服이 말리네.
雨雪關山暗 : 비와 눈에 關山 어두워지고
風霜草木稀 : 바람과 서리에 草木은 드물어졌네.
胡兵戰欲盡 : 오랑캐 軍隊는 戰意가 다하고
漢卒尙重圍 : 漢나라 兵卒들 겹겹이 둘러쌌네.
雲淨妖星落 : 구름은 깨끗하고 妖邪스런 별도 떨어져
秋深塞馬肥 : 가을 하늘은 높고 邊方의 말도 살찌네.
据鞍雄劍動 : 말鞍裝에서 英雄의 칼을 움직이고
搖筆羽書飛 : 붓을 휘둘러 격문(檄文)을 날리네.
輿駕還京邑 : 수레와 말들 都邑으로 돌아오고
朋遊滿帝畿 : 親舊들 京畿 땅에 가득하네.
方期來獻凱 : 돌아와 勝利의 消息을 바치고
歌舞共春輝 : 노래 부르고 춤추며 봄날의 風光 함께 하리.
두심언(杜審言)(贈蘇味道)의 이 詩는 參軍으로 北쪽 邊方에 나가 있는 親舊 蘇味道가 하루빨리 長安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지은 것인데, 이 詩의 秋深塞馬肥에서 秋高馬肥가 나왔으며 이 ‘秋高馬肥’가 ‘秋高馬肥’가 되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最終的으로 ‘秋高馬肥’로 쓰이게 되었는지는 正確하게 糾明되어 있지 않다.
‘秋高馬肥’는 오히려 위의 詩보다는 다음의 典籍에서 由來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臣은 가을이 깊어지고 말이 살찌면 오랑캐들이 다시 쳐들어와 以前의 盟約을 責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臣恐秋高馬肥, 虜必再至, 以責前約)」
* 宋나라 李綱의 靖康傳信錄에.
‘秋高馬肥’나 ‘秋高馬肥’의 典故는 《史記》와 《漢書》에서 찾아볼 수 있다.
「正月이면 모든 長들이 單于의 朝廷에서 작은 모임을 갖고 祭祀를 지낸다. 5月에는 蘢城에서 큰 모임을 갖고 先祖와 하늘과 鬼神에 祭祀한다. 가을에 말이 살찌면 蹛林에서 큰 모임을 갖고 家畜들의 數를 比較한다.
(歲正月, 諸長小會單于庭, 祠. 五月, 大會蘢城, 祭其先天地鬼神. 秋, 馬肥, 大會蹛林, 課校人畜計)」 * 史記 匈奴列傳에.
이 中 ‘ 蹛林’에 對해서《漢書音義》에서는
「匈奴가 가을 土地神에게 祭祀하는 8月에 모두 모여 祭祀 지내는 곳(匈奴秋社八月中皆會祭處)」이라고 說明하고 있는데, 이처럼 ‘秋高馬肥’는 北方의 遊牧民族 匈奴가 活動하기 가장 좋은 季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廣闊한 草原에서 봄부터 여름까지 풀을 먹은 말은 가을에 토실토실하게 살이 찌는데, 해마다 가을철이면 그 말을 타고 邊方에 쳐들어와 穀食과 家畜을 노략(擄掠)질해 갔으므로, 邊方의 中國人들은 가을이 되면 언제 匈奴의 侵入이 있을지 몰라 戰戰兢兢했다고 한다. ‘單于’는 匈奴가 그들의 君主나 族長을 높여 부르던 이름이다.
以上의 典籍에 依하면, ‘秋高馬肥’는 元來 匈奴의 노략(擄掠)질에 對한 邊方 百姓들의 삶의 苦痛과 切迫한 心情을 比喩한 말이었으나, 後에 뜻이 變하여 맑고 豊饒로운 가을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4. 창업수성(創業守成) 创业守成
創業과 守成. ‘創業’은 어떤 事業을 始作하는 것을 말하고, ‘守成’은 이루어 놓은 成果를 잘 지키는 것을 말한다.
‘創業’은 이웃 나라의 威脅 때문에 걱정하는 滕文公에게 孟子가 해 준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滕文公이 (孟子에게)물었다. “齊나라 사람들이 薛에다 城을 쌓으려고 하여 무척 두려운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孟子가 對答했다. “옛날 太王은 빈(邠)에서 狄人들이 侵入해 오자 그곳을 버리고 岐山 밑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곳을 擇해서 取했던 것이 아니고, 不得已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眞實로 善한 일을 한다면 後世의 子孫들 中에서 반드시 王者가 생겨날 것입니다. 君子가 創業을 하여 國統을 傳하는 것은 그것을 繼承해 나갈 수 있게 하기 爲함입니다. 成功은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王께서 저 齊나라 사람들을 어떻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힘써 善을 行할 따름이지요.”
(滕文公問曰, 齊人將築薛, 吾甚恐, 如之何則可. 孟子對曰, 昔者大王居븜, 狄人侵之, 去之岐山之下, 居焉. 非擇而取之, 不得已也. 苟爲善, 後世子孫, 必有王者矣. 君子創業垂統, 爲可繼也. 若夫成功則天也. 君如彼, 何哉. 疆爲善而已矣.)」
* 孟子 梁惠王下에. 孟子(맹자) 14. 齊人將築薛(제인장축설)
‘守成’은 公孫弘이 皇帝에게 올린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루어 놓은 것을 지키는 데는 文을 崇尙해야 하고, 變亂을 當했을 때는 武를 崇尙해야 합니다.(守成尙文, 遭遇右武)」 * 漢書 公孫弘傳에.
그리고 創業과 守成이 合해져 이루어진 ‘創業守成’은 다음의 典籍에서 찾아볼 수 있다.
「貞觀10年, 唐 太宗이 臣下들에게 말했다. “創業과 守成 中에서 어떤 것이 어렵소?” 房玄齡이 對答했다. “天地가 渾沌스러울 때 여러 英雄이 다투어 일어나 힘을 겨루어 이긴 後에야 臣下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로써 말하자면 創業이 어렵습니다.” 魏徵이 말했다. “예로부터 임금의 자리는 艱難 속에서 얻어 安逸 속에서 잃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守成이 어렵습니다.” 太宗이 말했다. “옛날에 房玄齡은 나를 따라 天下를 取하면서 數많은 죽음에 나아가 살아남았소. 그래서 創業의 어려움을 알고 있소. 魏徵은 나와 더불어 天下를 安定시키며, 驕奢는 富貴에서, 禍亂은 疏忽함에서 온다는 것을 恒常 憂慮하고 있소. 그래서 守成의 어려움을 알고 있소. 그러나 이제 創業의 어려움은 끝이 났소. 守成의 어려움에 對해서는 여러분과 함께 愼衆하게 해 나갈까 하오.”
(貞觀十年, 上問侍臣曰, 創業與守成孰難. 房玄齡曰, 草昧之初, 與群雄幷起, 角力而後臣之, 創業難矣. 魏徵曰, 自古帝王莫不得之於艱難, 失之於安逸, 守成難矣. 上曰, 玄齡與吾共取天下, 出百死, 得一生, 故知創業之難. 徵與吾共安天下, 常恐驕奢生於富貴, 禍亂生於所忽, 故知守成之難. 然創業之難, 旣已往矣. 守成之難, 方當與諸公愼之.)」
* 自治通鑑 唐紀》에 나온다.
같은 이야기가 唐太宗의 貞觀之治를 記錄해 놓은 《貞觀政要》에도 나온다.
隋나라는 煬帝 때에 이르러 高句麗 征伐과 無理한 土木工事, 그리고 暴政으로 因해 民生이 疲弊해지자 各地에서 反亂이 일어났다. 李淵은 關中의 治安을 맡고 있다가 民亂을 鎭壓하라는 命令을 받들어 아들 李世民과 함께 山西, 河東 等 곳곳에서 民亂을 鎭壓했다. 煬帝는 李淵의 人相이 凡常치 않을 뿐 아니라 當時 流行하던 圖讒說에 深水沒黃楊이란 豫言도 있던 터라 李淵을 警戒했다. ‘深水’는 깊은 물로 李淵의 이름字 淵을 뜻하고, ‘黃楊’의 楊은 隋나라 皇帝의 姓이므로, ‘깊은 蓮못이 버드나무를 潛기게 하다.’, 卽 李淵이 隋나라를 滅亡시킨다는 뜻을 內包하고 있다.
그런데 李淵이 太原 留守로 있을 때 隋나라의 混亂을 틈타 突闕族이 國境 地帶를 侵入했는데, 李淵은 이들과의 싸움에서 많은 兵力을 잃고 말았다. 煬帝는 李淵을 江都로 連行해 오라는 命令을 내렸다. 江都에서는 嚴한 刑罰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이 分明할 터, 둘째 아들 李世民의 說得에 힘입은 李淵은 反亂을 일으켜 首都 長安으로 進擊했다. 長安 入城에 成功한 李淵은 百姓들을 鎭撫하는 한便, 大王 楊侑를 皇帝로 擁立하고, 江都로 避身해 있던 煬帝를 太上皇으로 받들었다. 唐國公이었던 李淵은 唐王이 되어 皇帝를 代身하여 政務를 폈다. 이 모든 것이 禪讓을 爲한 準備 過程이었다. 한便, 義氣가 完全히 꺾인 煬帝는 마치 모든 것을 抛棄한 것처럼 江都의 離宮에서 美女들에게 둘러싸여 遊興에 젖어 살다가 不滿이 쌓여 쿠데타를 일으킨 親衛軍에 依해 죽고 말았다.
煬帝가 江都에서 弑害되었다는 消息이 長安에 傳해지자 李淵은 그해 5月, 禪讓의 形式을 빌려 長安에서 皇帝의 位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唐이라 했다. 이이 過程에서 李世民의 活躍이 뛰어나 아버지로부터 “天下는 모두 네가 이룩하여 놓은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李世民이 아버지를 도와 天下를 統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生死를 같이한 많은 人才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後, 李世民은 宮殿의 北門인 玄武門에서 兄弟들을 殺害하고 李淵의 뒤를 이어 皇帝가 되었는데, 그가 太宗이다. 李淵은 退位하여 太上王이 되었다. 太宗은 그 後 地方에 割據하던 群雄을 服屬시키고 學問을 奬勵하여 民心을 가라앉혔다. 또, 그는 凌煙閣을 지어 開國 때부터의 功臣 24名의 肖像畵를 그려 걸어 놓게 했다. 그리고 貞觀 10年에 開國功臣들과 더불어 위와 같은 對話를 나누었다.
5. 천도시비(天道是非)
하늘의 道가 옳으냐 그르냐는 뜻으로, 하늘의 天道라는 것이 疑心스럽다는 뜻.
* 史記 伯夷叔齊列傳에.
漢나라 武帝 때, 司馬遷은 太史令이었다.
當時, 李陵이 5千의 軍士로 匈奴와 對敵하다 捕虜가 되었다. 이를 두고 武帝와 朝廷의 百官들이 李陵을 非難하였다. 그러나 司馬遷 혼자 李陵을 庇護하였다.
이것이 武帝의 脾胃를 건드려 抑鬱하게 宮刑을 當하였다. 正當한 일을 正當하게 主張하다 刑을 받은 自身의 處地와 比較하여, 司馬遷은 《史記》 伯夷叔齊列傳에서 天道에 對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天道는 公平無私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의 便을 든다.' 그렇다면 伯夷叔齊와 같은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은 仁과 德을 쌓고 淸廉 高潔하게 살다가 굶어 죽었다.
그리고 孔子는 七十 弟子 中에 오직 顔回만을 學問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推賞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끔 뒤주가 비어 있었으며, 지게미나 쌀겨도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끝내 夭折하였다. 하늘은 착한 사람에게 報答한다는데, 이것은 都大體 어찌된 셈인가?
한便 盜跖은 날마다 罪 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肝을 膾치는 等, 暴惡 放恣하여 數千 사람의 徒黨을 모아 天下를 橫行하였지만 天壽를 누렸다. 그렇다면 그가 都大體 어떤 德行을 쌓았단 말인가? 이러한 것들은 가장 顯著한 例라 하겠지만, 近世에 이르러서도 所行이 道를 벗어나 오로지 惡行만을 저지르는데 終身토록 逸樂하고 富貴가 子孫代代로 끊이지 않는다.
이와 달리 正當한 땅을 골라서 딛고 正當한 發言을 해야 할 때만 말을 하며 恒常 큰길을 걸으며 公明正大한 理由가 없으면 發憤하지 않고, 始終 謹直하게 行動하면서도 오히려 災禍를 當하는 例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나는 疑心한다. 天道는 果然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或曰: 「天道無親, 常與善人?」若伯夷 叔齊, 可謂善人者非邪? 積仁絜行如此而餓死! 且七十子之徒, 仲尼獨薦顏淵爲好學? 然回也屢空, 糟糠不厭, 而卒蚤夭? 天之報施善人, 其何如哉? 盜蹠日殺不辜, 肝人之肉, 暴戾恣睢, 聚黨數千人橫行天下, 竟以壽終?
是遵何德哉? 此其尤大彰明較著者也? 若至近世, 操行不軌, 專犯忌諱, 而終身逸樂, 富 厚累世不絕? 或擇地而蹈之, 時然後出言, 行不由徑, 非公正不發憤, 而遇禍災者, 不可 勝數也? 余甚惑焉, 儻所謂天道, 是邪非邪?
6.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
天道는 都大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漢武帝 때 太史令이었던 司馬遷은 아버지의 遺志를 받들어 歷史 著述에 着手했다. 하지만 그가 歷史 執筆에 沒頭한 지 7年이 經過한 어느 날, 靑天霹靂과 같은 災殃을 當하게 된다. 當時 漢武帝는 匈奴에 對해 强攻策을 펴고 있었는데, 名將인 李陵이 別動隊 5千을 이끌고 匈奴의 땅에 깊숙이 侵入하여 匈奴의 精兵과 싸우다가 화살과 食糧이 다 떨어지자 할 수 없이 匈奴에 降伏하고 말았다. 武帝는 이로 因해 大怒하여 李陵의 罪를 問責하는 御前會議를 열었는데, 어느 누구도 李陵을 庇護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司馬遷은 武帝의 火를 暫時나마 누그러뜨려 주기 爲해 李陵의 過去의 戰功과 人品을 들어 그의 投降에 對해 辨明하고 나섰다가 그만 武帝의 震怒를 사, 罪人의 몸이 되어 男子로서 가장 恥辱的인 腐刑 (男性의 生殖器를 除去하는 刑罰, 宮刑이라고도 함)을 當하고 말았다. 하지만 司馬遷은 여기서 挫折하지 않고, 위로 黃帝부터 始作하여 當時까지의 歷史를 總網羅하여 12篇의 本紀, 30篇의 世家, 10篇의 表, 8篇의 書, 70篇의 列傳 等 모두 130篇, 52萬 6千5百 字로 記錄된 大作인 《史記》를 完成했다.
《史記》의 〈列傳〉의 첫 篇인 伯夷列傳에서, 司馬遷은 착한 사람들이 오히려 해를 當하고 惡人들이 富貴와 長壽를 누리는 世態를 들어 天道에 對해 疑懼心을 품으며 다음과 같이 記錄했다.
「어떤 사람이 ‘天道는 私事로움이 없어 언제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伯夷叔齊와 같은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은 仁과 德을 쌓고 淸廉 高潔하게 살다가 굶어 죽었다. 그리고 孔子는 七十 弟子 中에 오직 顔回만을 學問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稱讚했다. 그러나 그는 가끔 뒤주가 비어 있었으며, 지게미나 쌀겨조차도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끝내 夭折하고 말았다. 하늘은 착한 사람에게 報答한다는데, 이것은 都大體 어찌 된 셈인가? 盜跖은 날마다 罪 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肝을 膾 치는 等 暴惡 放恣했으며, 數千 名의 徒黨을 모아 天下를 橫行하였지만 天壽를 누렸다. 그렇다면 그가 都大體 어떤 德行을 쌓았단 말인가? 이러한 것들은 가장 두드러진 例라 하겠지만, 近世에 이르러서도 所行이 道를 벗어나 오로지 惡行만을 저지르는데도 終身토록 安樂하게 살고 富貴가 子孫 代代로 끊이지 않는다. 이와 달리, 正當한 땅을 골라서 딛고 正當한 發言을 해야 할 때만 말을 하며 恒常 큰길을 걸으며 公明正大한 理由가 없으면 發奮하지 않고 始終 勤直하게 行動하면서도 오히려 災禍를 當하는 例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나는 甚히 唐惑스럽다. 都對體 天道는 옳은 것인가, 아니면 그른 것인가?
(或曰, 天道無親, 常與善人. 若伯夷叔齊, 可謂善人者非耶. 積仁潔行如此而餓死. 且七十子之徒, 仲尼獨薦顔淵爲好學. 然回也屢空, 糟糠不厭, 而卒早夭. 天之報施善人, 其何如哉. 盜跖日殺不辜, 肝人之肉, 暴戾恣睢, 聚黨數千人橫行天下, 竟以壽終. 是遵何德哉. 此其尤大彰明較著者也. 若至近世, 操行不軌, 專犯忌諱, 而終身逸樂, 富厚累世不絶. 或擇地而蹈之, 時然後出言, 行不由俓, 非公正不發憤, 而遇禍灾者, 不可勝數也. 余甚惑焉, 倘所謂天道是耶非耶)」
처음에 引用한 ‘天道는 私事로움이 없어 언제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는 말은 《老子》에 나온다.
7. 천려일득(千慮一得) 千虑一得
千 번 생각하면 한 가지라도 얻는다. 아무리 우둔(愚鈍)한 사람이라도 깊고 세밀하게 생각하면 한 가지쯤은 좋은 생각을 해낼 수 있다는 말이다.
齊나라의 大夫 晏嬰은 그의 아버지가 죽은 後 아버지의 宰相 地位를 이어받아 靈公, 莊公, 景公을 섬겼다. 晏嬰은 사람됨이 正直하고 淸廉했으며 아주 儉素한 生活을 했다. 어느 날, 晏嬰이 點心을 먹고 있는데 景公이 사람을 보내 晏嬰을 만나도록 했다. 晏嬰은 自己가 먹을 밥을 나누어 王이 보낸 사람에게 點心을 待接했다. 景公이 이 事實을 알고 嘆息했다. “宰相이 이토록 貧寒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니. 이건 나의 잘못이다.” 景公은 사람을 시켜 晏嬰에게 千 金을 보냈다. 晏嬰은 이 財物을 받지 않고 가지고 온 사람을 시켜 돌려보냈다. 景公이 다시 보냈지만 晏嬰은 亦是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景公이 다시 財物을 보내자 晏嬰이 말했다. “大王께서 주신 俸祿으로도 우리 집안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賓客을 接待하기에 充分할 뿐만 아니라 어렵게 사는 百姓들도 救濟할 수 있으니, 大王께서 내리신 財物을 받을 수 없다고 傳해 주시게.” 景公이 보낸 사람이 아주 難處해하자 晏嬰이 그와 함께 가서 景公을 만났다. 景公은 桓公 때의 宰相 管仲의 例를 들며 말했다. “管仲은 桓公을 覇者의 자리에 올리는 큰 功을 세우고 桓公이 封地를 내리자 辭讓하지 않고 받았소. 그런데 宰相은 어째서 내가 보낸 財物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오?”
「晏嬰이 對答했다. “제가 들으니 聖人이라도 깊고 細密하게 생각을 하면서 分明 한 가지쯤은 錯誤가 있을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깊고 細密하게 생각하면 分明 한 가지라도 얻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管仲이 잃은 것이고 제가 얻은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再拜하고 命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晏子曰, 嬰聞之, 聖人千慮, 必有一失. 愚人千慮, 必有一得. 意者管仲之失, 而嬰之得者耶. 故再拜而不敢受命)」
이 이야기는 晏子春秋 · 內篇 雜下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千慮一得’과 ‘千 가지 생각 가운데에서 한 가지의 失手’란 뜻으로 智慧로운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하나쯤 失手를 하게 된다는 말인 ‘千慮一失’이 나왔다. ‘千慮一得’과 ‘千慮一失’은 다음의 典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廣武君이 말했다. “저는 ‘智慧로운 者라도 千 番 생각하여 한 番의 失手가 있을 수 있으며, 어리석은 者라도 千 番의 생각 가운데 한 番쯤은 좋은 計策을 낼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친 사람의 말에서라도 聖人은 골라 取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의 計策이 쓰기에 足하지는 않지만, 어리석은 저의 忠誠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廣武君曰, 臣聞智者千慮, 必有一失. 愚者千慮, 必有一得. 故曰狂夫之言, 聖人擇焉. 顧恐臣計未必足用, 願效愚忠.)」
* 史記 淮陰侯列傳에 나온다.
廣武君은 戰國時代 趙나라의 名將이자 빼어난 戰略家였던 李左車이다.
8. 천리안(千里眼)
千 里 밖을 볼 수 있는 눈. 世上事를 꿰뚫어 보거나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直感的으로 感知하는 能力을 말한다.
북위(北魏) 末葉, 19歲의 양일(楊逸)이 光州刺史에 부임(赴任)했다. 그는 自身을 낮추고 百姓들을 慰撫하였으며, 民生 業務에 힘을 기울였다. 해가 기울도록 먹는 것도 잊고 밤 늦도록 자지도 않으며 일을 했다. 兵士들이 服務하러 갈 때는 반드시 親히 餞送을 했다. 바람이 부는 날이나 비와 눈이 오는 날에 사람들이 수고로움을 堪耐하지 못하는데도 그는 조금도 疲困한 氣色이 없었다. 法은 嚴格히 施行하였으나 너그러움과 嚴格함이 서로 調和를 이루어 官內가 모두 恭敬하고 두려워하여 敢히 罪를 犯하지 못했다. 當時 天災로 因해 收穫이 좋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자, 楊逸은 食糧 倉庫를 열어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눠 주려 했다. 그런데 擔當 官吏가 罪를 입을까 두려워하자 楊逸이 말했다. “나라는 百姓을 根本으로 삼으며, 사람은 먹는 것을 命으로 삼는다. 百姓들이 滿足하지 못하면 王이 누구와 더불어 滿足할 수 있겠느냐? 萬若 이것으로 罪를 얻게 된다면 내가 달게 받겠다.” 이렇게 食糧을 放出하고 또한 늙은이나 病者에게는 밥을 지어 주어 數萬 命을 救했다. 皇帝가 이를 듣고 嘉賞하다고 여겼다.
「楊逸은 百姓들을 사랑하고 奸巧한 것을 미워하여 널리 自己의 耳目 (諜報員)을 심었다. 兵士나 官吏들이 所屬 고을로 出場을 갈 때는 스스로 食糧을 지니고 갔으며, 百姓들이 飮食을 待接하면 隱密한 곳이라 할지라도 들어가지 않고, 모두 “楊 刺史가 千 里를 내다보는 눈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속일 수 있겠소?”라고들 말했다.
(逸爲政愛人, 尤憎豪猾, 廣設耳目. 其兵吏出使下邑, 皆自持糧, 人或爲設食者, 雖在闇室, 終不進, 咸言楊使君有千里眼, 那可欺之)」
고을의 政事 實積은 더욱 좋아졌다. 하지만 楊逸은 皇帝 자리를 엿보던 朱仲 一族에게 미움을 받아 害를 當하고 말았다. 當時 그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 魏書 楊播傳의 楊逸에 나온다.
千里眼은 順風耳와 더불어 中國의 民間 傳說에 나오는 道敎의 守護神이다. 千里眼은 千里 밖의 事物을 볼 수 있는 眼力을 가지고 있으며, 順風耳는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千 里 밖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封神演義》, 《西遊記》 等의 小說에 登場한다.
9. 천여불취반수기구(天與弗取反受其咎) 天与弗取反受其咎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허물을 받게 된다. 機會가 왔을 때 일을 成事시키지 못하면 도리어 그로 因해 禍를 입거나 낭패(狼狽)를 보게 된다.
「범여(范蠡)가 말했다. “會稽의 일은 하늘이 越나라를 吳나라에게 준 것인데 吳나라가 받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늘이 吳나라를 우리 越나라에게 주는 것이니, 越나라가 하늘의 뜻을 拒逆하면 되겠습니까? 또한 王께서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政務에 힘쓴 것이 吳나라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22年 동안이나 圖謀하고서 하루아침에 버리면 되겠습니까?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허물을 받게 됩니다. 도낏자루를 자르는 데 그 法則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方法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實踐하는 데 있는 것임을 比喩하는 말) 王께서는 會稽의 不幸을 잊으셨습니까?”
(范蠡曰, 會稽之事, 天以越賜吳, 吳不取. 今天以吳賜越, 越其可逆天乎. 且夫君王蚤朝晏罷, 非爲吳邪. 謀之二十二年, 一旦而棄之, 可乎. 且夫天與弗取, 反受其咎. 伐柯者其則不遠. 君忘會稽之厄乎.)」
* 史記 越王勾踐世家에.
吳越 戰爭 때, 吳나라에 降服했던 越나라가 다시 軍隊를 일으켜 吳나라를 攻擊하여 到處에서 吳나라의 軍隊를 擊破하고, 3年에 걸쳐 吳나라의 首都를 包圍했다. 吳王 夫差는 더 以上 버틸 수가 없자 勾踐에게 降伏했다. 越王 勾踐은 吳王 夫差를 가엾게 여겨 降伏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자 范蠡가 “會稽의 일은 하늘이 越나라를 吳나라에 준 것인데 吳나라가 받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늘이 吳나라를 우리 越나라에 주는 것이니 하늘의 뜻을 拒逆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며 反對하고 나섰다. 吳王 夫差는 自殺했다. 本文에 나오는 ‘伐柯者其則不遠’은 《詩經 · 豳風 伐柯)》의 한 句節이다.
‘天與弗取反受其咎’는 다음의 典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齊나라 사람 괴통(蒯通)이 天下를 저울질할 수 있는 힘이 韓信에게 있음을 알고, 奇發한 計策을 가지고 韓信을 움직이게 하기 爲해 韓信을 찾아갔다. ······ “當身의 賢能함과 聖德, 그리고 가지고 있는 많은 兵力으로 强大한 齊나라를 차지하고 燕나라를 逼迫하고 趙나라를 屈服시킨 다음 劉邦과 項羽의 손이 닿지 않는 빈 곳을 차지하고 그들의 背後에서 牽制하는 한便, 百姓들의 願하는 바에 順應하여 西쪽으로 가 劉邦과 項羽의 싸움을 制止시켜 百姓들의 聖名을 保全시켜 주기를 要求하면 天下가 빠른 速度로 일어나 饗應할 테니, 누가 敢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런 後에 큰 나라의 疆土를 갈라 强한 나라의 勢力을 弱하게 만들어 諸侯들을 分蜂하여 諸侯들이 일어서면 天下는 그 德에 感服하여 齊나라에 歸服할 것입니다. 齊나라의 疆土를 잘 지키고 膠河와 泗水 流域을 占據하고 恩德으로 諸侯들을 感服시키고 恭遜하고 謙讓하면 天下의 王들이 서로 거느리고 齊나라에 朝會를 할 것입니다. ‘하늘이 준 것을 取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허물을 받게 될 것이며, 때가 이르렀는데도 行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災殃을 받게 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齊人蒯通知天下權在韓信, 欲爲奇策而感動之. ······ 曰, 夫以足下之賢聖, 有甲兵之衆, 据彊齊, 從燕趙, 出空虛之地而制其後, 因民之欲, 西鄕爲百姓請命, 則天下風走而響應矣, 孰敢不聽. 割大弱彊, 以立諸侯, 諸侯已立, 天下服聽而歸德於齊. 案齊之故, 有膠泗之地, 懷諸侯以德, 深拱揖讓, 則天下之君王相率而朝於齊矣. 蓋聞天與弗取, 反受其咎. 時至不行, 反受其殃. 願足下孰慮之.)」
* 史記 淮陰侯列傳에.
楚漢 戰爭 때 韓信이 劉邦의 命을 받아 齊나라를 攻擊했다. 項羽는 龍且를 救援兵으로 派遣했으나, 龍且의 軍隊는 韓信에게 大敗했고 용저(龍且)는 戰死하고 말았다. 齊나라를 平定한 韓信은 齊王으로 封 함을 받았다.
韓信의 勢力이 커지자 項羽는 두려운 나머지 武涉을 보내, 漢나라를 背叛하고 王이 되어 天下를 三分하자고 韓信을 설득했다. 韓信은 劉邦과의 義理를 들어 이 提案을 拒絶했다. 武涉이 떠나간 다음, 天下를 저울질할 수 있는 힘이 韓信에게 있는 것을 본 韓信의 謀士 蒯通이 韓信에게 이番 機會에 劉邦을 背叛하고 天下를 三分하라고 說得했다. 韓信은 蒯通의 말에 마음이 暫時 기울긴 하였지만, 躊躇躊躇하다가 結局 漢나라를 背叛하지 못했으며, 또한 스스로 세운 功이 많으므로 漢나라가 自身의 齊나라를 빼앗지는 못하리라 생각하고 마침내 蒯通의 提案을 拒絶하고 말았다.
하지만 나중에 韓信은 劉邦의 牽制를 當해 謀叛罪로 몰려 淮陰侯로 降等되었고, 陳豨와 더불어 謀叛을 꾀하다가 結局 劉邦의 皇后인 呂后와 蕭何의 計略에 속아 逮捕되어 斬首刑을 當했다. 韓信은 蒯通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後悔하면서 죽었다.
산과바다 이계도
'**한자성어(漢字成語)** > 고사성어(故事成語)'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사성어(故事成語) (ㅊ- 3 청출어람~ ) (0) | 2026.03.07 |
|---|---|
| 고사성어(故事成語) (ㅊ- 2 천의무봉~ ) (0) | 2026.03.07 |
| 고사성어(故事成語) (ㅈ- 5 진인사대천명~ ) (0) | 2026.03.07 |
| 고사성어(故事成語) (ㅈ- 4 중과부적~ ) (0) | 2026.03.07 |
| 고사성어(故事成語) (ㅈ- 3 조명시리~ ) (0) | 2026.03.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