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ㅊ- 3 청출어람~ )
20. 청출어람(靑出於藍) = 청출우람(青出于蓝)
푸른 물감은 쪽에서 나왔다. 쪽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弟子가 스승보다 더 나음을 比喩
「君子는 말한다. 學問이란 中止할 수 없는 것이다. 푸른色은 쪽에서 取한 것이지만 쪽보다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얼어서)된 것이지만 물보다 차다. 나무가 곧은 것은 먹줄에 符合하기 때문이지만, 구부려 바퀴로 만들면 구부러진 形態가 曲尺에 符合한다. 비록 볕에 말리더라도 다시 펴지지 않는 까닭은 구부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무는 먹줄을 받으면 곧게 되고, 쇠는 숫돌에 갈면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君子는 널리 배우고 날마다 거듭 스스로를 反省하여야 슬기는 밝아지고 行實은 허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山에 올라가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 줄을 알지 못하고, 깊은 골짜기에 가 보지 않으면 땅이 두터운 줄을 알지 못하는 法이다. 선비는 先王의 가르침을 工夫하지 않으면 學問의 偉大함을 알 수 없는 것이다.
(君子曰, 學不可以已. 靑取之於藍, 而靑於藍. 冰水爲之, 而寒於水. 木直中繩, 輮以爲輪, 其曲中規, 雖有槁暴, 不復挺者, 輮使之然也. 故木受繩則直, 金就礪則利. 君子博學而日參省乎己, 則智明而行無過矣. 故不登高山, 不知天之高也. 不臨深谿, 不知地之厚也. 不聞先王之遺言, 不知學問之大也)」
이 말은 《荀子 勸學》에 나오는데, ‘푸른色은 쪽에서 取한 것이지만 쪽보다 푸르다.’는 말에서 靑出於藍靑於藍이 나왔고, 이것이 다시 ‘ 靑出於藍’이 되었다.
‘ 靑出於藍’에 대한 例는 다음의 典籍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北魏의 李謐은 어려서 孔燔을 스승으로 삼아 學問에 精進했다. 몇 年이 지나자 李謐은 學問이 스승을 凌加하게 되었다. 그러자 孔燔은 李謐에게 더 以上 가르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도리어 그를 스승으로 삼기를 請했다. 그러자 同門들이 다음과 같은 詩를 지었다.
「푸른色은 쪽에서 만들어졌지만 쪽이 푸른色보다 못하다네. 어디 不變 固定의 스승이 있다던가. 經典을 밝히 아는 데 있는 것이지.
(靑成藍, 藍謝靑, 師何常, 在明經.)」
이 이야기는 《北史 李謐傳》에 나오는데, 이는 ‘배우는 데는 一定한 스승이 없다.’는 뜻의 ‘學無常師’라는 成語와 同一한 意味를 지니고 있다. ‘ 靑出於藍’은 다음의 典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賦는 古詩의 一種이다. 처음에 荀庚과 宋玉에게서 創始되어 漸次로 賈誼와 司馬相如에게서 넓어졌다. 얼음이 물에서 나온 것처럼 처음에는 三墳五典 (最初의 典籍)에 本을 두었고, 푸른色이 쪽에서 나왔듯이 風과 雅보다 華麗함을 더했다.
(賦者, 古詩之流也. 始草創於筍宋, 漸恢張於賈馬. 氷生乎水, 初變本於典墳. 靑出於藍, 復增華於風雅.)」
* 白居易 부부(賦賦)에.
《三墳》은 伏羲, 神農, 黃帝의 冊으로, 失典되었다. 《五典》은 少昊, 전욱(顓頊), 高辛, 堯, 舜의 冊으로, 亦是 失典되었다
21. 초미지급(焦眉之急)
눈썹이 타는 危急함. 매우 多急한 일을 比喩하는 말이다.
「어떤 중이 佛慧禪師에게 물었다. “禪師님, 어떤 것이 가장 多急한 글귀입니까?” 禪師가 對答했다. “불이 눈썹을 태우는 것이지요.”
(問, 如何是急切一句. 師曰, 火燒眉毛.)」
* 普濟 五燈會元에.
여기에서 나온 火燒眉毛에서 燒眉之急이, 그리고 다시 焦眉之急이 되었다. 燃眉之急이라고도 하며, 焦眉라고도 한다.
22. 초왕실궁 초인득지(楚王失弓 楚人得之)
楚나라 임금이 잃은 활을 楚나라 사람이 얻는다는 말이다. 度量이 좁은 것을 比喩한다.
春秋時代 楚나라 共王이 하루는 사냥을 나갔다가 활을 잃어 버렸다. 共王을 모시고 함께 사냥을 나선 臣下들은 활을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共王은 이렇게 말했다.
"찾지 마시오. 楚나라 王이 잃은 활을 楚나라 사람이 줍게 될 텐데, 무엇하러 찾으려 하느냐?"
臣下들은 임금의 度量이 매우 넓다고 말했다.
그 後 孔子는 이 이야기를 듣고 길게 嘆息하며 말했다.
"안타깝구나, 마음이 좁구나. 사람이 잃은 활을 사람이 얻게 된다고 말하지 못하고 楚나라 사람들에 限定시키다니."
孔子는 楚나라 共王이 잃은 활을 반드시 楚나라 百姓들이 주울 것이라고 限定한 것을 좁은 생각이라고 보았다.
그가 楚나라 百姓이 아니라 國籍을 떠난 모든 사람이 주울 것이라고 했다면 좀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孔子의 생각이다. 곧 度量이 좁음을 이르는 말이다.
孔子家語 好生 篇에
23. 촌철살인(寸鐵殺人) 寸铁杀人
한 치 쇳조각으로 사람을 죽이다. 짤막한 警句나 單語로 사람을 感動시키거나 事物의 核心을 찌르는 것을 比喩
「宗杲가 禪을 論해 말하기를, 比喩컨대 어떤 사람이 武器를 한 수레 가득 싣고 와서 하나를 꺼내 휘두르고, 또 하나를 꺼내 휘둘러도 사람을 죽이는 手段이 되지 못한다. 나는 한 치 쇳조각만 있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宗杲論禪曰, 譬如人載一車兵器, 弄了一件, 又取出一件來弄, 便不是殺人手段. 我則只有寸鐵, 便可殺人.)」
이 이야기는 南宋의 羅大經이 지은 《鶴林玉露》에 나오는데, ‘寸鐵殺人’이란 禪의 核心을 把握한 말로서, 殺人이란 마음속의 잡된 생각을 없애고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意味한다. 精神을 集中하여 修養하면 비록 아주 작은 攄得이더라도 그 작은 것 하나가 事物을 變化시키고 사람을 感動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짤막한 警句로 사람을 感動시키거나, 어떤 일의 核心을 찌르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인다.
24. 추기급인(推己及人)
自身의 處地로 미루어 다른 사람의 形便을 헤아리다. 入場을 바꾸어 남의 處地를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齊나라 景公 때에 눈이 三 日을 내리며 개지 않았다. 景公이 여우겨드랑이 털옷을 입고 섬돌 위에 앉아 있었다. 晏子가 들어와 謁見하고 暫時 서 있는데 景公이 말했다. “怪異한 일이로다. 눈이 三 日을 내리는데도 춥지 않다니.” 晏子가 말했다. “날씨가 춥지 않다는 말씀이신가요?” 景公이 웃자 晏子가 말했다. “제가 들으니 옛날 어진 君主는 배부를 때 百姓들의 굶주림을 알고, 따뜻할 때 百姓들의 추움을 알며, 便安할 때 百姓의 수고로움을 알았다고 하는데, 只今 大王께서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景公이 말했다. “옳은 말이오. 寡人은 그대의 말에 따르리다.” 景公이 令을 내려 갓옷과 穀食을 내 춥고 배고픈 者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길에서 보이는 者에게는 故鄕을 묻지 않으며, 마을에서 보이는 者에게는 그 집을 묻지 않고, 全國的으로 數를 헤아리면서 그 이름을 묻지 않으며, 일할 수 있는 者는 두 달치를, 病든 사람에게는 두 해치를 나누어 주었다. 孔子가 이를 듣고 말했다. “晏子는 願하는 바를 아뢰었고, 景公은 그 일을 훌륭하게 行하였다.”
(景公之時, 雨雪三日而不霽. 公被狐白之裘, 坐於堂側階. 晏子入見, 立有間, 公曰, 怪哉, 雨雪三日而天不寒. 晏子對曰, 天不寒乎. 公笑, 晏子曰, 嬰聞古之賢君, 飽而知人之飢, 溫而知人之寒, 逸而知人之勞, 今君不知也. 公曰, 善, 寡人聞命矣. 乃令出裘發粟, 以與飢寒者. 令所睹於塗者, 無問其鄕. 所睹於里者, 無問其家. 循國計數, 無言其名. 士旣事者兼月, 疾者兼歲. 孔子聞之曰, 晏子能明其所欲, 景公能行其所善也.)」
이 이야기는 《晏子春秋 諫》에 나오는데, 便安한 生活에 묻혀 百姓들의 苦痛에 對해서는 全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景公의 不察을 指摘한 晏子의 말에서 ‘推己及人’이라는 槪念이 由來했다. ‘推己及人’이라는 말이 直接的으로 쓰인 곳은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배우는 사람이 忠과 恕에 있어서 그 사람(相對方)을 參考해 고치는 것을 免하지 못하고 있다. 나를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옳을 것이다.
(學者之於忠恕, 未免參校彼己. 推己及人則宜.)」
* 朱熹의 與范直閣書에.
25. 축록자불견산(逐鹿者不見山) 逐鹿者不见山
사슴을 쫓는 사람은 山을 보지 못한다. 눈앞의 名譽와 利益에 눈이 멀어 도리를 저버리거나, 利益에 눈이 팔려 危驗이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을 比喩
「사슴을 쫓는 사람은 山을 보지 못하며, 돈을 움켜쥔 사람은 사람을 보지 못한다. (逐鹿者不見山, 攫金者不見人.)」
이 말은 《虛堂錄》에 나오는데, ‘逐鹿者不見山’의 典故는 《淮南子 說訓》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짐승을 쫓는 사람은 큰 山을 보지 못한다. 밖으로 快樂과 欲望을 쫓으면 明哲함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逐獸者目不見太山. 嗜欲在外, 則明所蔽矣.)」
짐승을 쫓는 사람은 큰 山을 보지 못한다는 말에서 ‘사슴을 쫓는 사람은 山을 보지 못한다.’가 비롯하였다. 그리고 ‘攫金者不見人’의 典故는 《列子 說符》에서 찾아볼 수 있다.
「齊나라 사람 中에 金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衣冠을 갖추고 金을 파는 곳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손에 金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손으로 낚아채 빼앗았다. 官吏가 그를 逮捕하여 捕縛하며 물었다. “사람들이 모두 있는데 어째서 다른 사람의 金을 빼앗았는가?” “金을 낚아챌 때 사람은 보이지 않고 金만 보였습니다.” (齊人有欲得金者, 淸旦, 被衣冠, 往鬻金者之所, 見人操金, 攫而奪之. 吏搏而柬縛之, 問曰, 人皆在焉, 子攫人之金, 何故. 對曰, 取金之時, 徒見金, 不見人)」
《淮南子 說林訓》에는 ‘逐鹿者不顧兎’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사슴을 쫓는 者는 토끼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으로, 큰일을 이루려는 사람은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比喩하는 말이다.
26.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春来不似春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다.
漢道初全盛 : 漢나라 國運도 처음에는 隆盛했으니
朝廷足武臣 : 朝廷에는 武臣도 넉넉했다네.
何須薄命妾 : 어찌 꼭 薄命한 女人이
辛苦遠和親 : 괴로움을 겪으며 먼 곳까지 和親하러 가야 했던가?
掩涕辭丹鳳 : 흐르는 눈물 가리고 丹鳳城을 떠나
銜悲向白龍 : 슬픔을 삼키며 白龍臺로 向하네.
單于浪驚喜 : 單于는 놀라 기뻐했으나
無復舊時容 : 더 以上 옛날의 그 얼굴 아니었다네.
胡地無花草 :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어
春來不似春 :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 : 옷에 맨 허리끈이 저절로 느슨해지니
非是爲腰身 : 가느다란 허리 몸매를 위함은 아니라오.
* 東方虯(東方) 昭君怨 三首에
(王昭君)의 슬픈 事緣을 노래한 唐나라 詩人 東方虬의 詩 〈昭君怨〉에서 ‘ 春來不似春’이 由來했다.
王昭君에 對한 歷史的 記錄은 《漢書》의 (元帝紀)와 匈奴傳, 그리고 《後漢書 南匈奴傳》에 簡略하게 보이는데, 後世 사람들이 이 歷史的 事實을 土臺로 다듬어 놓은 王昭君의 슬픈 이야기는 大略 다음과 같다.
漢 元帝 建昭 元年(BC38), 全國에 後宮을 募集한다는 詔書를 내렸는데, 全國 各地에서 選拔되어 入宮한 宮女들의 數가 數千 名에 이르렀다.
이때 王昭君(本名 王嬙)도 18歲의 나이에 後宮으로 選拔되었다. 皇帝는 數千 名에 이르는 宮女들의 身上을 一一이 把握할 수 없었기 때문에 毛延壽 等 畵工들에게 宮女들의 肖像畵를 그려 바치게 했다. 富貴한 집안 出身이나 首都 長安에 後援者가 있는 宮女들은 畵工에게 自身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 달라고 賂物을 바쳤으나, 王昭君은 집안이 貧賤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自身의 容貌를 皇帝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賂物을 바치지 않았다. 毛延壽는 賂物을 바치지 않은 王昭君의 容貌를 形便없이 못생기게 그려버렸다. 王昭君은 入宮한 지 5年이 흐르도록 皇帝의 얼굴도 볼 수가 없었다.
元帝 (竟寧) 元年(BC33), 南匈奴의 呼韓邪(호한야) 單于가 元帝를 謁見하기 爲해 長安으로 왔다. 呼韓邪는 毛皮와 駿馬 等 많은 工物을 가지고 와서 元帝에게 恭遜하게 問安을 올렸다. 크게 기뻐한 元帝는 盛大한 宴會를 베풀어 呼韓邪 單于를 歡待했다. 呼韓邪는 元帝에게 皇帝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請하였다. 元帝는 그의 請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公主를 媤집보내기 傳에 먼저 그에게 漢나라 皇室의 威嚴을 誇示하고 싶어 自己 後宮 中에서 아직 寵愛를 받지 못한 美女들을 불러와 술을 勸하게 했다. 宮女들이 들어오자 呼韓邪는 多彩로운 모습에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中에서 絶世의 美人을 發見하고는 卽時 元帝에게 또 다른 提意를 했다. “皇帝의 사위가 되기를 願하지만 꼭 公主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美女들 中의 한 名이어도 괜찮습니다.” 元帝는 元來 宗室의 公主들 中에서 한 名을 擇하려고 하였으나 이제 宮女들 中에서 한 名을 選拔한다면 번거로움을 避할 수 있다는 생각에 呼韓邪의 提意를 卽席에서 受諾하였다. 呼韓邪는 王昭君을 指目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王昭君의 美貌에 元帝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皇帝로서 한 番 내린 決定을 다시 飜覆할 수도 없었다.
元帝는 宴會가 끝난 後 急히 돌아가서 宮女들의 肖像畵를 다시 對照해 보았다. 王昭君의 그림이 本來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것을 發見한 元帝는 毛延壽에 對한 忿怒가 치밀어 올라 眞相을 徹底하게 調査토록 命令하였다. 毛延壽는 結局 皇帝를 欺瞞한 罪로 斬首되었다. 元帝는 呼韓邪에게는 婚需가 아직 準備되지 않았으니 3日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조용히 王昭君을 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 3日 後, 王昭君은 匈奴族 차림으로 丹裝을 하고 未央宮에서 元帝에게 作別을 告하였으며, 元帝는 그女에게 昭君이라는 稱號를 내렸다.
王昭君은 匈奴 땅에서 그곳 女人들에게 길쌈하는 方法 等을 가르쳤고, 漢나라와의 友互的인 關係 維持를 爲해 努力하여 그 後 80如 年 동안 匈奴와 漢의 接戰은 없었다고 한다. 呼韓邪 單于가 죽은 後, 呼韓邪의 本妻 아들인 復株累 單于가 王昭君을 取하려 하자 王昭君은 漢나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成帝에게 書信을 올렸으나 帝는 匈奴의 習俗을 따르라고 命했다. 王昭君은 다시 復株累의 연지(閼氏, 선우의 皇后)가 되어 딸 둘을 낳았다. 王昭君이 죽은 後 그 屍身은 大黑河 南쪽 기슭에 묻혔다. 王昭君의 墓는 內蒙古 후허하오터(呼和浩特) 南쪽 9km 地點에 있다. 傳하는 말에 依하면, 가을에 접어든 以後 北方의 草木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王昭君 무덤의 풀만은 푸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靑塚’이라 하였다고 한다.
* 西京雜記에 나온다.
傳하는 말에 依하면, 王昭君이 匈奴를 向해 떠나갈 때 마지막으로 長安을 한 番 바라본 다음 가슴에 琵琶를 안고 말에 올랐다고 한다. 王昭君 一行이 長安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 나온 사람들이 길을 꽉 메웠다. 王昭君이 情든 故國山川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琵琶로 離別曲을 演奏하고 있는데, 마침 南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琵琶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王昭君의 美貌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由來하여, 王昭君의 美貌를 ‘落雁’이라고 稱하게 되었다. 王昭君에 對한 이야기는 後世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면서 詩歌, 小說, 戱曲 等의 各種 文學 樣式을 通해서 그 形象이 끊임없이 再創造되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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