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ㅊ- 4 춘추필법~ )
27. 춘추필법(春秋筆法)
春秋筆法이란 「功은 元師에게 罪는 首惡에 그친다」 後漢書 梁商傳이라고 定義한 春秋大義에 立脚한 記事敍述 基本原則을 말한다.
春秋時代 列國에는 靈公이란 임금들이 많다. 靈이란 放蕩,暴政으로 임금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에게 붙여지는 諡號이다. 다음에 晋靈公 · 鄭靈公의 이야기를 들어 春秋時代에 依한 記錄들을 보면, 晉靈公 은 淫蕩 하고 殘忍한 임금이었다. 稅金을 重課하고 土木工事를 巨創하게 벌였다. 奸臣 屠岸賈를 信任하였고, 絳州城 안에 花園을 造成하여 琪花瑤草를 심어 桃園이라 이름하였다. 이 桃園에 華麗한 3層 樓閣을 세워 江州市內를 굽어 볼 수 있게 하였다.
靈公은 隨時로 이곳에 나아가 屠岸賈와 같이 술과 風樂과 女子를 즐겼다.
樓閣에서 跌宕한 놀음이 벌어지는것을 구경하던 市民에계 靈公은 새잡는 처란(鐵丸)을 마구 던져 눈이 빠지고 머리가 깨지게 했다.
靈公에게는 靈獒란 猛犬이 길러졌으며 사람의 指示에 잘 따랐다. 靈公은 近侍 에게 過誤가 있으면 개에게 물게했다. 개는 사람이 죽지 않으면 물고 놓지 아니했다. 靈公은 개를 恒常 곁에 두어 사람들애게 두려움를 주었다.
이러므로 國民의 怨望은 쌓이고 列國은 晋나라를 멀리했다. 相國 趙盾은 어진 宰相이었다.
여러차례 諫하였으나 靈公은 이를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미워했다.
하루는 趙盾(조둔)과 土會가 國事를 論하다가 朝門을 나서는데 內侍 두 사람이 竹籠을 들고 나갔다.
疑訝한 趙盾은 竹籠을 보았다.
토막이 난 屍體가 들어 있었다.
趙盾이 追窮하자 內侍는 調理師가 態掌을 잘못 料理했다 하여 靈公에게 맞아 죽어, 토막까지 냈다한다. 趙盾은 氣가 막혔다. 國家의 將來가 暗澹했다.
趙盾은 그 길로 靈公을 찾아 諫했다. 靈公은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靈公은 反省의 빛이 없이 다음날에도 桃園으로 나갔다.
趙盾은 한발 앞서 桃園으로 나아가 靈公을 가로 막고 "밝은 임금은 百姓을 즐겁게 하는 일을 落으로 삼고, 어두운 임금은 自身의 즐거움을 樂으로 여깁니다. 華麗한 宮室, 아름다은 女子, 사냥놀이 等은 한몸의 즐거움입니다. 主公께서는 처란을 市民에게 던져 百姓을 傷하게 하였고, 사나운 개를 풀어 사람을 물게하였으며 자그마한 過誤가 있는 調理師를 때려 죽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無道한 임금도 하지 않는 일입니다. 臣은 나라의 危亡을 坐視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屠岸賈가 옆에 있다가 "相國의 말씀은 옳으나 主公께서 예까지 오셨다가 그냥 돌아간다는 것도 웃음을 살 일입니다."했다. 靈公도 이어 "卿과 내일 아침 일찍 만나자!"했다. 趙盾은 어쩔 수 없이 길을 틔어주고 屠岸賈를 흘겨보며 "나라 亡칠 놈"했다. 靈公은 이날의 놀이가 마지막인 듯 跌宕하게 즐기다가 屠岸賈를 돌아보며 "이 늙은이(趙盾)가 있는 限 自由롭지 못할 것이니 어찌할고"했다. 屠岸賈는 "臣에게 鉏麑란 親舊가 있아온데 이 者를 시켜 相國을 죽이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그날밤 鉏麑를 請하여 趙盾을 죽이라 했다.
鉏麑는 다음날 새벽 匕首를 들고 趙相國의 집으로 갔다. 집안을 살펴보니 警備는 別로 없고, 수레(車)를 待機시켜 놓은 채 한 官員이 朝服을 갖추어 端正히 앉아 入朝할 時刻을 기다리고 있었다.
鉏麑는 이 모습을 보고 크게 깨달아 큰소리로 " 나는 鉏麑이다.
임금의 命은 어길지라도 忠臣을 죽일 수 없다. 나는 오늘 죽지만 相國은 다음의 危險을 豫防하도록 하라" 라고 하고 槐木에 머리를 부딪혀 죽었다.
趙盾은 提彌明이 相國의 入朝를 말렸다. 趙盾은 " 主公과 約束하고 내가 나가지 아니하면 이는 無禮를 犯하는 짓이다. 生死는 하늘의 뜻 걱정할 것이 못된다" 라고 하며 서둘러 入朝를 했다. 靈公은 趙盾이 入朝한다는 말을 듣고 屠岸賈를 나무래 물었다.
屠岸賈는 失敗한 事實을 아뢰고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죽일 수 있읍니다."하고 귀엣말로 아뢰자 크게 기뻐하였다. 다음날 靈公은 趙盾을 불러들여 술을내리고 "相國의 찬 칼이 名劍이라 들었소. 구경좀 합시다"라고 했다. 趙盾은 別생각없이 칼을 풀려 했다. 이때 뜰에서 기다리던 提彌明이 큰 소리로
"임금을 모시고 술을 마실 때에는 석盞을 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屠岸賈는
임금앞에서 칼을 뽑으려 한다는 구실로 趙盾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趙盾은 얼른 깨닫고 일어났다. 提彌明이 쫓아 올라와 趙盾을 保護하여 내려갔다.
屠岸賈는 急히 靈獒를 불러 趙盾을 물라 했다. 개는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提彌明은 力士였다.
달려드는 개를 단주먹에 내리쳐 죽였다. 埋伏했던 甲士들이 달려들었다. 提彌明은 혼자 甲士를 相對로 싸우다가 죽고 말았다.
趙盾이 精神없이 달아나는데 한 甲士가 槍을 거꾸로 들고 달려오며 "相國은 安心 하십시오. 제가 모시겠습니다" 하며 달려드는 甲士를 막았다. 趙盾이 疑訝한 눈으로 돌아보자 그 사람은 "相國께서는 얼마전 뽕나무 아래에 허기져 누워있던 者를 記憶하십니까 "한다. 前날 趙盾은 사냥길에서 돌아오다 뽕나무 그늘에서 쉬던中 사흘씩이나 굶주려 허기져 누웠던者를 밥과 고기를 厚히 주어 療飢케
하였던 일이 있었다. 바로 그 靈輒이었다.
趙盾은 靈輒의 도움으로 危機를 벗어나
달아나는데 아들 趙朔이 家兵을 이끌고
달려왔다. 趙盾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못하고 그 길로 秦나라로 亡命하려고 父子가 걸음을 재촉했다.
趙穿은 趙盾의 조카로 兵權을 掌握하고 있었다. 사냥길에서 돌아오다가 叔父와 마주쳤다. 事件內容을 듣고 趙穿은 "叔父는 國境을 벗어나지 말고 며칠만 기다리십시오. 가시더라도 저의 連絡을 기다려 떠나십시오" 하고 돌아갔다.
趙盾은 首陽山에서 며칠을 기다렸다.
귀찮게 굴던 趙盾이 달아나자 靈公은 桃園에 머물면서 宮으로 돌아갈 생각을 아니했다. 趙穿은 桃園의 警備가 不實하다는 핑계로 甲士 2百名을 選拔하여 桃園에 配置하고 술을 마시고 춤을 즐기는 靈公을 弑害하였다.
無道하고 殺人을 좋아하는 靈公이었기에 左右近侍들은 靈公을 保護할 생각을 아니하고 달아나기에 바빴다市民들도 오랜 暴政에 厭症을 느꼇던터라 靈公의 죽음을 快하게 생각하여 趙穿에게 罪를 물으려 아니했다.
相國 趙盾은 即時 돌아왔다.
趙穿의 罪는 묻어두고, 靈公의 屍身을
거두어 葬事지내고, 周나라에 가 있는 公子黑臀을 趙穿에게 모셔오게 하여 새임금으로 세웠다. 이 사람이 晋成公이다.
趙盾은 桃園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史館으로 나아가 그 記錄을 살폈다.
太史 董狐는 分明히 '秋九月 乙丑에 趙盾이 그 임금 夷皐를 桃園에서 弑害하다'라고 적어 놓았다. 趙盾은 깜짝놀라 "내가 絳城밖 2百如里에 있었는데 弑害事件에 關與할 수 있겠는가. 나에게 罪를 돌림은 抑鬱한 일이 아닌가" 하였다.
董狐는 "大監은 相國으로서 달아났어도 國境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돌아와서는 弑逆者를 罰하지 않았으니 大感이 主謀者가 아니라고 그 누가 믿겠읍니까 "하였다. 趙盾이 "고칠 수 없는가"라고 하니 董狐는 "是是非非를 信史라 합니다.
내 머리가 잘리는 限이 있더라도 그 內容은 고칠 수 없읍니다."라고 하였다. 趙盾은 길이 嘆息하며 "史官의 權限은 卿相보다 무겁구나! 내 어찌 國境을 벗어나지 아니하였다가 惡名을 길이 듣게 되었단 말인가! 後悔한들 무슨 所用인가"
하였다. 이로부터 趙盾은 더욱 謹愼하여 成公을 잘 섬기었다.
이에 孔子는 春秋를 編纂하면서 趙盾이 國境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弑害責任을져야 하는 점을 哀惜히 여기면서 史官 董狐의 뜻에 따라 「晋趙盾弑其君夷皐」라 하였던 것이다.
* 左氏 宣二 에.
執政(首相)인 公子歸生과 公子宋은 鄭나라 貴戚으로서 多情한 사이였다.
둘이 아침 일찍 入朝하려고 만났다.
宋의 食指가 갑자기 찌릿찌릿 움직였다. 宋은 그 움직이는 食指를 歸生에게 보이며 "이 손가락이 움직이는 날에는 반드시 別味를 먹었소. 前날 晉에 使臣으로 갔을 때에는 石花魚를 먹었고, 楚에 갔을 때에는 天鵝와 合歡橘을 먹었소.
이런 經驗으로 비추어 오늘 別味를 맛보는 것은 틀림없겠으나 무슨 別味인가 궁금하오"라고 말했다.
둘이 朝門으로 들어가려는데 內侍가 調理師를 急히 불렀다.
宋이 "調理師는 왜 부르는가" 하고 물으니
內侍는 "누가 漢江에서 큰 자라(黿)를 잡았다고 主公께 바쳤습니다.
뜰에 있는데 2百 如斤이나 됩니다.
여러 大夫께 待接하라고 하십니다" 宋이 그것 보라는 듯이 "내 손가락이 헛되이 움직일리가 있나"하며 朝門을 들어서니 매우 큰 자라가 묶여 있었다.
두사람은 마주보며 웃었다.
鄭靈公은 謁見할 때까지 그 웃음기는 가시지 않았다. 靈公이 "卿들에게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歸生이 "宋과 같이 入朝하는데 宋의 食指가 갑자기 움직여서 宋은 말하기를 이 손가락이 움직이면 반드시 別味를 먹는다하여 웃었습니다. 只今 뜰에 보니 큰 자라가 있습니다. 主公께서 드시게 되면 여러 大夫에게도 돌아갈 것이 있을것 같아서 食指의 豫示를 웃은 일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靈公이 말을 듣고 장난기가 서린 눈으로 "맞고 맞지 않는 것은 寡人에게 달려 있다"라고 하였다. 歸生이 靈公 앞을 물러나며 宋에게 "別味는 있으나 임금이 그대를 부르지 아니하면 어쩌지"하고 웃자 宋은 "여러사람을 부르고 나만 빼놓을 리야 있나"라고 하였다.
저녁 때가 되자 內侍는 여러 大夫를 招請했다. 宋은 기쁜 마음으로 들어가며 歸生에게 "임금이 나만 돌려놓을 리가 있나!"라고 했다. 이어 大夫들이 모두 모였다.
자리를 잡자 靈公이 "자라는 水族中의 一味이다. 寡人이 혼자 즐길 수 없어 여러분을 招待한 것이다"라고 하고 여러 大夫에게 한 그릇씩 올리라고 命하였다.
調理師는 아래로부터 차례로 올리다가 끝으로 歸生과 宋의 앞에 와서 靈公에게아뢰기를
"한 그릇만이 남았습니다. 누구에게 올릴까요 " 하니 靈公이 "子家(歸生의 字)에게 주라"했다. 자라 料理는 歸生앞에 놓여졌다. 靈公이 한차례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기 爲하여 故意로 宋에게는 料理가 빠지게 미리 일러놓았던 것이다. 靈公이 웃으며 "寡人이 여러분들에게 고루 나누어 드리도록 하였으나 子公(宋의 字)에게만 빠지게 되었다.
이는 子公이 食福이 없어서이다. 食指의
豫示가 恒常 맞을 수야 있는가. 果히 섭섭히 생각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宋은 百官들 앞에서 自己에게만 料理를 빠뜨리는 임금의 行爲가 侮辱스러웠다. 侮辱이 鬱火로 變하게 되자 앞뒤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宋은 無嚴하게 靈公 앞으로 달려나가 그 앞의
料理 그릇에서 손가락으로 자라고기를 건져먹으며
"臣은 別味를 먹었습니다. 제 손가락은 거짓이 없습니다"라고 하고 물러났다.
靈公은 火가나서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宋의 不遜한 行動이 매우 不快하다.
鄭나라에 목을 칠 쇠붙이 하나 없는 줄 아느냐!"하고 펄펄 뛰며 일어났다.
公子歸生 等은 모두 꿇어 엎드리며
"宋이 主公의 사랑하심을 믿고 取한 行動이니 널리 容恕하십시오"하고 無摩했다. 公子 宋은 靈公이 自己를 罰하기 前에 先手를 써야한다 생각하고 公子歸生에게 協力을 求하였다.
歸生이 拒絶하자 宋은 "歸生이 靈公의 同生 公子去疾과 親하여 아침 저녁으로 만나고 있으니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듯하다"라고 公席에서 떠들었다. 歸生은 怯을 먹고 宋의 팔을 끌면서 "네 意度가 무엇인가"하고 묻자 宋은 "主上이 無道하여 大事를 圖謀하려 한다"라고 했다.
歸生은 "나는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宋은 이에 私兵을 秘密히 動員하여 夜半에 齊宮에서 致齊하는 靈公을 흙負垈로 눌러 弑害하고, 急病으로 죽었음을 發表하였다.
公子歸生이 執政으로서 宋의 行爲를 默認하지 아니한 事實에 對하여 孔子는
春秋에서 靈公 弑害事件의 主犯으로 그 罪를 歸生에게 물어「鄭公子生이 그 人君 夷를 弑하다」라고 筆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事實은 春秋時代의에 依한 '所任이 무거운 者는 責任도 무겁다'라는 原則에 따른 것이며 이것이 곧 春秋筆法인 것이다.
그後 公子 宋은 靈公 弑害에 對한 楚莊王의 問罪를 받아 죽임을 當하였고, 公子
歸生은 이미 죽어 무덤에 刑罰이 加하여지기 까지 하였던 것이다.
* 左氏 宣四에.
28. 취옹지의(醉翁之意)
술 醉한 늙은이의 뜻. 술에 취하는 뜻은 술에 있지 않고 山水를 즐기는 것에 있다는 것으로, 딴 속셈이 있거나 안팎이 다름을 比喩
「저주(滁州)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온통 山이다. 그 西南쪽의 여러 山봉우리는 숲과 골짜기가 더욱 아름다운데, 바라볼 때 鬱蒼하고 깊고 빼어난 것은 瑯琊山이다. 山길로 6, 7里를 더 가면 물소리가 漸漸 잔잔하게 들리다가 두 봉우리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釀泉이다. 봉우리가 돌고 길이 굽어지면서 亭子가 우뚝이 솟아 물가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것이 醉翁亭이다. 亭子를 지은 者는 누구인가? 山의 僧侶인 智仙이다. 亭子의 이름을 지은 者는 누구인가? 太守가 스스로 이름 붙인 것이다. 太守는 賓客들과 이곳에 와서 술을 마시곤 했는데 술을 조금만 마셔도 곧 醉하고 나이가 또한 가장 많았으므로 스스로 號를 술 醉한 늙은이(醉翁)라 하였다.
술 醉한 늙은이의 뜻은 술에 있지 않고 山水의 즐거움에 있다. 山水의 즐거움을 마음에 얻어 이를 술에 부친 것이다. 해가 떠 숲에 안개가 개고 구름이 돌아가 바위 굴이 어두워져 어둠과 밝음이 變化하는 것은 山속의 아침저녁이다. 들꽃이 피어 그윽한 香氣가 풍기고 아름다운 나무가 빼어나 茂盛한 그늘이 지며 바람과 서리 高潔하고 水位가 떨어져 바닥의 돌이 드러나는 것은 山間의 四時이다.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옴에 四時의 景致가 같지 않으니 즐거움 또한 無窮하다. 짐을 진 者가 길에서 노래하고, 길을 가는 者가 나무 그늘에서 쉬며, 앞에 가는 者가 부르고 뒤에 따라가는 者가 應答하여 허리를 구부려 禮義를 表하고 손에 손을 잡고서 往來하여 끊이지 않는 것은 滁州 사람들의 노닒이다. 시냇가에 나아가 고기를 잡는데 시내가 깊어 고기가 살찌고, 샘물을 길어 술을 만드는데 샘물이 시원하여 술이 香氣롭다. 山의 과일과 들의 나물들을 뒤섞어 앞에 펼친 것은 太守의 잔치이다. 잔치의 즐거움은 風樂에 있는 것이 아니다. 활을 쏘아 과녁을 맞히고, 바둑을 두어 이기며, 술盞과 산가지가 뒤섞인 가운데 자리에서 일어나 떠들썩한 것은 바로 손님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푸른 얼굴에 白髮로 그 사이에 쓰러져 있는 것은 술에 醉한 太守이다. 이윽고 夕陽이 山자락에 걸리고 사람의 그림자가 어지러이 흩어지는 것은 太守가 돌아가고 賓客이 따라가는 것이다. 나무 그늘이 어두워지고 지저귀는 새소리가 위아래에서 들리는 것은 놀던 사람들이 떠나가 山새가 즐거워하는 것이다. 새들은 山林의 즐거움은 알지만 사람의 즐거움은 알지 못하며, 사람들은 太守를 따라 놀면서 즐거워할 줄은 알지만 太守가 그 즐거움을 즐기는 것은 알지 못한다. 醉해서는 그 즐거움을 함께할 수 있고 깨어서는 그것을 글로 쓸 수 있는 者는 太守이다. 太守는 누구인가? 廬陵의 歐陽修이다.
(環滁皆山也. 其西南諸峰, 林壑尤美, 望之蔚然而深秀者, 瑯琊也. 山行六七里, 漸聞水聲潺潺, 而瀉出於兩峰之間者, 釀泉也. 峰回路轉, 有亭翼然, 臨於泉上者, 醉翁亭也. 作亭者誰, 山之僧智仙也. 名之者誰, 太守自謂也. 太守與客, 來飮於此, 飮少輒醉, 而年又最高, 故自號曰醉翁也. 醉翁之意不在酒, 在乎山水之樂也. 山水之樂, 得之心而寓之酒也. 若夫日出而林霏開, 雲歸而巖穴暝, 晦明變化者, 山間之朝暮也. 野芳發而幽香, 嘉木秀而繁陰, 風霜高潔, 水落而石出者, 山間之四時也. 朝而往, 暮而歸, 四時之景, 不同而樂亦無窮也. 至於負者歌於塗, 行者休於樹, 前者呼, 後者應, 傴僂提攜, 往來而不絶者, 滁人遊也. 臨溪而漁, 溪深而魚肥, 釀泉爲酒, 泉冽而酒香. 山肴野蔌, 雜然而前陳者, 太守宴也. 宴酣之樂, 非絲非竹. 射者中, 奕者勝, 觥籌交錯, 起坐而諠譁者, 衆賓歡也. 蒼顔白髮, 頹乎其間者, 太守醉也. 已而夕陽在山, 人影散亂, 太守歸而賓客從也. 樹林陰翳, 鳴聲上下, 遊人去而禽鳥樂也. 然而禽鳥知山林之樂, 而不知人之樂. 人知從太守遊而樂, 而不知太守之樂其樂也. 醉能同其樂, 醒能述以文者, 太守也. 太守爲誰. 廬陵歐陽修也.)」歐陽修 (醉翁亭記)
歐陽修는 宋나라의 政治家이며 唐宋八大家 中의 한 사람으로, 〈醉翁亭記〉는 그가 滁州의 太守로 있을 때 쓴 글이다. 醉翁亭은 智仙이라는 중이 歐陽修를 爲해 지은 것인데, 歐陽修가 自身의 號를 따서 ‘醉翁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 글의 醉翁之意不在酒, 在乎山水之間也 句節에서 ‘醉翁之意’가 나왔는데, 元來는 술을 빌려 山水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즐겁게 醉한다는 뜻이었으나, 後에 와서 다른 속셈이 있거나 안팎이 다르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29. 치인설몽(痴人說夢) 痴人说梦
어리석은 사람이 꿈 이야기를 하다. 虛荒된 말을 지껄이거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을 하는 것을 比喩
「唐나라 龍朔 年刊에 한 僧侶가 長江과 淮河 流域을 노닐었는데, 그 行跡이 아주 奇異했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當身은 姓이 무엇이오?(汝何姓)” 僧侶는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姓이 무엇이오? (姓何, ‘姓은 何가요.’로도 解釋됨)” “어느 나라 사람이오? (何國人)” 라 하니 夏나라 사람이오.’로도 解釋 됨)” 後에 唐나라의 書道家 李邕이 이 僧侶의 碑文을 썼는데, 僧侶의 말뜻을 理解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大師의 姓은 何씨이고 何나라 사람이다.’ 이는 바로 어리석은 사람에게 꿈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李邕은 꿈(이야기)을 眞實로 여겼으니 정말로 어리석음의 極致이다.
(僧伽龍朔中遊江淮間, 其迹甚異. 有問之曰, 汝何姓. 答曰, 姓何. 又問何國人, 答曰, 何國人. 唐李邕作碑, 不曉其言, 乃書傳曰, 大師姓何, 何國人. 此正所謂對痴人說夢耳. 李邕遂以夢爲眞. 眞痴絶也.)」
이 이야기는 《冷齋夜話》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由來하여 ‘ 痴人說夢’은 虛荒된 말을 하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龍朔은 唐나라 高宗 李治의 年號, (661∼663)이다. 元文의 江은 長江을, 淮는 淮河를 말한다.
30. 치지도외(置之度外)
考慮 바깥에 두다. 念頭에 두지 않거나, 내버려 두고 問題 삼지 않는 것을 말한다.
漢의 帝位를 簒奪하고 新을 세운 王莽의 改革政治가 完全히 失敗로 돌아가고 오히려 社會經濟가 疲弊해지자 各地에서 王莽 政權에 反對하는 反亂軍이 일어나기 始作했다. 南陽 出身 豪族으로 漢 王朝의 핏줄인 劉縯과 劉秀 兄弟들도 漢 王朝의 復興을 내걸고 軍士를 일으켰다. 劉秀는 最終的으로 群雄割據의 時代를 마감하고 後漢을 세워 皇帝가 되었는데, 이이가 바로 後漢의 初代 皇帝인 光武帝이다.
後漢 初期, 國內는 아직 完全히 統一되지 않았고 群雄들의 割據가 如前히 繼續되고 있었다. 5年如의 戰爭을 겪으면서 函谷關 東쪽의 勢力은 大略 平定되었고, 最終的으로 남은 勢力은 甘肅 地方의 隗囂와 四川 地方의 公孫述이었다. 當時 隗囂는 自身을 臣下라고 稱하면서 아들 隗恂을 洛陽으로 보내 벼슬을 하게 하였으므로 光武帝는 隗囂에 對한 警戒를 暫時 늦추고 있었다. 公孫述은 스스로 皇帝를 稱했지만 割據하던 地域이 地形이 險하고 距離가 먼 四川 地方이었으므로 쉽사리 征伐을 할 수가 없었다. 光武帝 亦是 오랜 戰爭으로 疲勞해진 軍隊를 暫時 쉬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이 두 사람을 于先 그냥 놔두기로 했는데, 이를 歷史에서는 다음과 같이 記錄하고 있다.
「6年, 關東이 모두 平定되었다. 皇帝는 疲勞가 쌓인 軍隊를 쉬게 하고, 隗囂의 아들로 皇帝를 侍奉하게 했다. 公孫述은 멀리 邊方을 割據하고 있었으므로 將軍들에게 말했다. “이 두 사람을 暫時 내버려 둡시다.”
(六年, 關東悉平. 帝積苦兵閒, 以囂子內侍, 公孫述遠據邊陲, 乃謂諸將曰, 且當置此兩子於度外耳.)」
* 後漢書 隗囂傳에
建武 6年(30), 劉秀는 休息을 끝낸 大軍을 이끌고 이들에 對한 征伐에 나섰다. 2年間의 戰爭을 치른 後 光武帝는 隗囂 軍隊를 潰滅시켰으며, 西紀 36年에는 成都를 陷落하고 公孫述을 除去했다. “두 사람을 暫時 내버려 둡시다.”라는 光武帝의 말에서 ‘置之度外’가 由來하였다. ‘置之度外’는 ‘度外視’라고도 한다.
光武帝 劉秀는 漢景帝 劉啓의 後孫이다. 景帝가 한 番은 後宮 中의 하나인 程姬에게 守廳을 들게 했는데, 程姬는 이를 避하며 들어가기를 願치 않았다. 《漢書》의 注에 依하면 程姬는 當時 月經 中이었다) 程嬉는 侍女인 唐兒를 들여보내 景帝를 모시게 했다. 景帝는 當時 滿醉한 狀態였다. 그 後, 唐兒가 姙娠을 하자 景帝는 唐兒를 唐姬에 封했다. 唐姬는 아들을 낳았는데, 이이가 劉發이다. 景帝는 漢景帝 前 2年에 劉發을 長沙王에 封했다. 當時 長沙는 ‘卑濕貧國’, 卽 地帶가 낮아 온통 濕한 아주 가난한 地域으로, 總 家口 數 2萬 5千 戶에 不過한 작은 나라였다.《史記 (五宗世家)》劉發의 아들은 劉買 (舂陵節侯), 唐姬의 아들은 劉外(鬱林太守), 劉外의 아들은 劉回(巨鹿都尉), 劉回의 아들은 劉欽(南頓令)이었는데, 갈수록 벼슬이 낮아지더니 劉欽은 縣令에 不過한 官職을 갖게 되었다. 劉欽은 일찍 죽었다. 그에게는 세 名의 아들이 있었는데, 劉欽이 죽었을 當時 막내아들 劉秀는 9歲에 不過했다. 이 막내아들 劉秀가 바로 後에 後漢을 세운 光武帝이다. 當時 王莽이 漢나라를 簒奪하고 新나라를 세운 後 大大的인 改革政策을 實施했는데, 그 渦中에 劉秀는 아버지가 前職 縣令이었음에도 不拘하고 소를 치는 牧童이 되고 말았다.
漢武帝 以前에는 皇帝들의 年號가 없었다. 그래서 景帝의 境遇 前, 後로 나누어 年代를 表記했다. 漢景帝 前元年은 BC156年이고, 後元年은 BC143年이다. 景帝가 劉發을 長沙王으로 封한 漢景帝 前 2年은 BC155年이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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