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ㅊ- 5 치주안족사~ )
31. 치주안족사(巵酒安足辭) 卮酒安足辞
한 盞의 술을 어찌 辭讓하겠는가? 술을 勸하거나 억지로 勸하는 술을 마실 때 使用하는 말로 쓰인다.
最初로 天下를 統一한 秦始皇이 죽은 後, 到處에서 秦나라의 暴惡한 政治에 抗拒하는 反亂이 일어났다. 楚나라의 貴族 出身인 項梁(項羽의 叔父)도 反亂을 일으켜 楚나라 懷王의 孫子를 찾아 懷王으로 擁立하고 楚나라를 再建했다. 邊方의 下級 官吏인 亭長에 不過했던 劉邦도 小規模의 反亂을 일으켜 活躍타가 項梁에게 加擔했다. 얼마 後 項梁은 秦나라와 싸우다가 戰死했고, 項羽가 實勢로 浮上했다. 懷王은 秦나라의 首都 咸陽을 中心으로 하는 首都圈 地域인 關中 땅을 먼저 征服하는 사람을 그곳의 王으로 삼겠다고 公約했다. 懷王이 이런 提案을 했을 當時, 아직은 秦나라가 天下의 主人으로서 莫强한 軍士力을 保有하고 있었기 때문에 大部分의 將帥들은 선뜻 나서지 않았으나, 項羽가 劉邦과 함께 關中을 攻擊하기를 希望하고 나섰다. 懷王은 “寬厚한 사람을 보내 義로써 秦나라 百姓을 다스려 그들의 協力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을 將軍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는 老將들의 意見에 따라 關中을 칠 征西軍의 將軍에 劉邦을 任命했다. 項羽가 巨鹿에서 秦나라 軍隊와 맞서 激戰을 벌이고 있을 때, 劉邦은 征西軍을 이끌고 關中을 向해 出發했다. 劉邦은 여러 城들을 平定하는 한便 百姓들을 鎭撫해 가면서 咸陽까지 進擊했다.
이러는 사이 秦나라 內部에서는 權力을 掌握한 宦官 趙高가 스스로 皇帝가 되기 爲해 二世皇帝를 逼迫하여 自殺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따르려 하지 않자, 할 수 없이 얼마 前 自己의 計略으로 因해 自殺한, 秦始皇의 큰아들인 扶蘇의 아들 子嬰을 擁立했다. 皇帝라 稱하지 않고 스스로 秦王을 稱한 子嬰은 計略을 써 趙高를 殺害하고, 그의 목을 梟首했으며, 그의 三族을 滅해 버렸다. 그러고는 마침 咸陽을 向해 進擊해 오는 劉邦에게 나라를 들어 降服하고 말았다. 劉邦은 子嬰의 降服을 받아들이고 咸陽에 入城했다. 劉邦은 宮中에 쌓여 있는 엄청난 財物과 後宮을 가득 채운 美女들에 對한 誘惑을 떨치기 어려웠지만 더 먼 未來를 爲해 손 하나 대지 않았고, 咸陽에서 軍士를 물려 覇上에 駐屯했다. 그리고 民心을 얻는 데만 힘을 기울였다. 그 代表的인 것이 秦나라의 煩多하고 無慈悲한 法을 모두 廢하고 約法三章을 發表하여 民心을 收拾한 것이다. 約法三章이란 사람을 殺害한 者는 死刑에 處하고, 사람을 傷하거나 남의 物件을 훔친 者는 그에 對한 죗값을 받는다는 極히 簡略한 法令이다.
한便, 巨鹿의 戰鬪에서 秦나라 將軍 章邯의 降服으로 勝利한 項羽는 서둘러 關中으로 向했다. 그런데 項羽가 關中에 到着했을 때에는 이미 劉邦이 秦王 子嬰으로부터 降服을 받고, 咸陽에 入城하여 터를 잡고 民心까지 다스려 놓은 狀態였다. 函谷關에서 劉邦에게 沮止를 當하자 項羽의 憤怒는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項羽는 英布(黥布)를 시켜 函谷關을 攻略하고, 鴻雁川에 陣營을 構築했다. 狀況이 이렇게 되자 劉邦의 左司馬 曹無傷이 劉邦을 背信하고 項羽에게 사람을 보내, 劉邦아 咸陽 宮殿의 金銀寶貨와 美女들을 自己 所有로 만들고 關中의 王으로 封함을 받으려 한다고 告者질했다. 이 말을 들은 項羽는 크게 怒하여 劉邦의 軍士를 屠戮하기로 決心했다. 劉邦을 제대로 본 范增도 劉邦이 天子의 氣運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機會에 處置해야 한다며 項羽를 부추겼다.
그날 밤, 項羽의 叔父 項伯은 일찍이 亡命 生活을 하면서 身世를 진 張良이 걱정되어 劉邦의 本陣에 찾아가 張良을 만나 現在 펼쳐지고 있는 危急한 狀況을 알려 주었다. 劉邦은 項伯을 極盡히 待接했고, 及其也 劉邦은 사람은 口頭로 査頓 關係를 맺게 된다. 劉邦은 自己가 먼저 咸陽을 接受하고 宮殿의 寶物 倉庫를 封한 것은 項羽에게 바치기 爲함이었고, 函谷關을 封鎖한 것은 다른 盜賊들의 侵入을 막기 爲한 것이었다고 辨明을 늘어놓으면서, 項羽에게 잘 말해 달라고 懇曲히 付託했다. 項伯은 欣快히 許諾하고 內日 아침 劉邦도 親히 項羽를 찾아가 謝罪를 할 것을 勸했다. 項伯은 돌아가 劉邦을 爲해 辨明해 주었고, 項羽는 火가 많이 누그러졌다.
當時 項羽의 軍隊는 精兵 40萬으로, 10萬을 거느린 劉邦은 相對가 될 수가 없었다. 劉邦은 元來 項羽의 咸陽 入城을 沮止하고 關中 땅의 王이 될 생각이었지만, 勢 不利를 實感하고 어쩔 수 없이 項羽에게 咸陽 入城을 請했다. 劉邦은 于先 살아남는 것이 重要하다고 생각하고, 直接 項羽의 陣營을 찾아가 自臣을 臣이라 稱하며 項羽에게 咸陽을 바쳤다. 어젯밤 項伯으로부터 仔細한 說明을 들었던 項羽는, 劉邦이 이처럼 몸을 굽히자 마음이 녹아내렸다. 氣分이 좋아진 項羽는 劉邦을 머물게 하고 잔치를 벌였다. 이것이 바로 有名한 鴻門宴, 卽 鴻門의 잔치이다.
잔치 자리에서 項羽의 謀士 范增이 여러 차례 劉邦을 죽이라고 信號를 보냈지만 項羽는 이를 默殺했다. 范增이 信號를 보낸 方法은 玦을 드는 것이었다. 玦은 한쪽이 터진 圓形의 佩玉으로 決, 卽 決行을 하라는 뜻을 內包하고 있다. 첫 番째 方法이 失敗로 돌아가자 范增은 項羽의 四寸인 項莊에게 劍舞를 추게 하면서 劉邦을 殺害하도록 했지만, 이番에는 같은 便인 項伯이 나서서 함께 劍舞를 추면서 劉邦을 保護했다. 이 部分을 《史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記錄하고 있다.
「沛公(劉邦)은 다음 날 아침 一百如 騎를 거느리고 項王(項羽)을 만나러 가서 鴻門에 이르러 謝過를 했다. “臣과 將軍이 죽을 힘을 다해 秦나라를 攻略하여, 將軍은 黃河의 北쪽에서 싸우고 臣은 黃河의 南쪽에서 싸웠습니다. 그런데 내 뜻과는 달리 먼저 關中에 들어와 秦나라를 무너뜨리고 여기에서 다시 將軍을 뵙게 되었습니다. 이제 小人輩의 말로 因해 將軍과 臣 사이에 틈이 生기고 말았습니다.” 項王이 말했다. “그것은 沛公의 左司馬 曹無傷이 한 말이오.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이르게 했겠소.” 項王은 그날로 沛公을 머무르게 하고 더불어 마시자고 했다.
項王과 項伯이 東쪽으로 앉고, 亞父가 南쪽으로 앉았다. 亞父는 范增이다. 沛公이 北쪽으로 앉고 張良은 西쪽에서 劉邦을 모셨다. 范增이 여러 차례 項王에게 눈짓을 하며 차고 있던 玉을 들어 세 차례나 信號를 보냈지만 項王은 默默히 있으면서 應하지 않았다. 范增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 項莊을 불러 말했다. “君王의 사람됨이 차마 하지 못하는 性格이다. 네가 들어가 앞에 나아가 (沛公에게)長壽를 祈願해 주고, 祈願이 끝나면 劍舞를 추겠다고 請하고 자리에 앉아 있는 沛公을 (칼로)쳐서 죽여라. 그러지 않으면 너나 우리가 모두 捕虜가 되고 말 것이다.” 項莊이 들어가 長壽를 祈願한 後 말했다. “君王과 沛公께서 술을 드시는데 群衆에는 즐길 거리가 없으므로 劍舞를 출까 합니다.” 項王이 許諾했다. 項莊이 칼을 빼어 들고 춤을 추기 始作했다. 그러자 項伯도 칼을 뽑아 들고 춤을 추면서 自己 몸으로 沛公을 掩護했다. 項莊은 끝내 칠 수가 없었다. 그러자 張良이 軍門으로 가 樊噲를 찾았다. 樊噲가 물었다. “오늘 行事는 어떻습니까?” 張良이 말했다. “일이 急하게 되었소. 只今 項莊이 칼을 뽑아 들고 劍舞를 추고 있는데 그 뜻이 沛公에게 있소.” 樊噲가 말했다. 정말 多急한 狀況이군요. 제가 들어가 運命을 함께해야겠소. 樊噲는 卽時 칼을 차고 防牌를 들고 軍陣의 門으로 들어갔다. 지키고 있는 護衛兵들이 槍을 엇갈리게 들고 막으며 들여보내려 하지 않았다. 樊噲가 그들의 防牌를 비껴 치자 護衛兵들이 땅에 엎어졌다. 樊噲는 안으로 들어가 帳幕을 들추고 西쪽을 向해 서서는 눈을 부릅뜨고 項羽를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이 위로 솟고 두 눈은 부릅떠 찢어질 것만 같았다.
項羽가 말했다. “壯士여, 더 마실 수 있겠는가?” 樊噲가 말했다. “죽음 또한 避하지 않는데, 盞술을 어찌 辭讓하겠습니까. 秦나라 王은 호랑이와 승냥이의 마음이 있어 사람을 죽여도 다 죽이지 못할까 걱정하고, 刑罰을 내려도 무겁지 않을까 두려워했으므로 天下가 모두 그를 背叛했습니다. 懷王께서 여러 將帥와 ‘먼저 秦나라를 쳐부수고 咸陽에 들어가는 者가 王이 되리라.’고 盟約하셨습니다. 只今 覇公이 먼저 秦나라를 쳐부수고 咸陽에 들어갔지만 敢히 터럭만큼도 가까이하지 않았고, 宮室을 封鎖하고 돌아와 覇上에서 駐屯하며 大王께서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일부러 將帥를 보내 關門을 지키도록 한 것은 盜賊들의 出沒과 豫期치 않은 일을 對備한 것입니다. 애써 苦生한 功勞가 이처럼 높은데, 諸侯로 封하는 賞은 내리지 않으면서 小人들의 말을 듣고 功 있는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요. 이는 滅亡한 秦나라를 이어 가는 것일 뿐이니, 大王께서는 取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項羽는 答辯도 하지 못하고 말했다. “앉게.”
(噲卽帶劍擁盾入軍門. 交戟之衛士欲止不內, 樊噲側其盾以撞, 衛士扑地, 噲遂入, 披帷西嚮立, 瞋目視項王, 頭髮上指, 目眥盡裂. 項王按劍而曰, 客何爲者. 張良曰, 沛公之參乘樊噲者也. 項王曰, 壯士, 賜之卮酒. 則與斗卮酒. 噲拜謝, 起, 立而飮之. 項王曰, 賜之彘肩. 則與一生彘肩. 樊噲覆其盾於地, 加彘肩上, 拔劍切而啗之. 項王曰, 壯士, 能復飮乎. 樊噲曰, 臣死且不避, 巵酒安足辭. 夫秦王有虎狼之心, 殺人如不能擧, 刑人如恐不勝, 天下皆叛之. 懷王與諸將約曰, 先破秦入咸陽者王之. 今沛公先破秦入咸陽, 毫毛不敢有所近, 封閉宮室, 還軍霸上, 以待大王來. 故遣將守關者, 備他盜出入與非常也. 勞苦而功高如此, 未有封侯之賞, 而聽細說, 欲誅有功之人. 此亡秦之續耳, 竊爲大王不取也. 項王未有以應, 曰, 坐.)」
이런 機會를 틈타 劉邦은 便所에 가는 척 하고 나와 自身의 陣營으로 逃亡했다. 남아 있던 張良이 項羽에게 白璧玉 한 雙을 바치고 劉邦을 爲해 잘 辨明해 주었다. 范增에게는 玉斗를 바쳤다. 范增은 玉斗를 받아 땅에 내던지고 칼을 뽑아 玉斗를 내리쳐 깨 버리며 長嘆息을 했다. “아, 더벅머리 아이놈과는 일을 꾀할 수가 없구나. 앞으로 項王(項羽)의 天下를 빼앗을 자는 바로 沛公(劉邦)이 되겠구나! 우리는 이제 捕虜가 되고 말 것이야.” 劉邦이 自己 陣營으로 되돌아와 한 첫 番째 일은 曹無傷을 處刑한 일이었다.
이 이야기는 《史記 項羽本紀)》에 나오는데, 結局 劉邦을 죽이지 않은 項羽는 劉邦에게 天下를 빼앗기고 말았으며, 自身은 自殺로 一生을 마감하고 말았다.
32. 칠보지재(七步之才)
일곱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詩를 지을 수 있는 才주. 아주 뛰어난 글才주를 이르는 말이다.
三國時代 魏文帝 曹丕는 그의 아우 東阿王 曹植을 몹시 미워했다. 曹植은 어렸을 때부터 聰明했는데, 特히 열 살 때 벌써 훌륭한 詩를 지을 程度로 글才주가 뛰어났다. 曹操는 셋째인 曹植을 寵愛하여 한때는 曹丕를 제쳐 놓고 後嗣로 삼을 생각까지 했었다. 曹丕는 어릴 때부터 동생 曹植의 글재주를 猜忌해 온 데다 後嗣 問題에서도 밀릴 뻔했던 적이 있어서 曹植을 미워했다.
「어느 날, 曹丕는 曹植을 해칠 目的으로 일곱 걸음을 걸을 동안 詩를 짓지 못하면 大罪로 다스리겠다고 윽박질렀다. 曹植은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詩를 完成했다.
콩을 삶아서 국을 끓이는데
콩을 걸러서 국물을 부었다
콩대는 솥 밑에서 타고
콩은 솥 안에서 울고 있구나
本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어찌하여 이다지도 急히 삶아 대는가.
이 詩를 들은 魏文帝 曹丕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文帝嘗令東阿王七步作詩, 不成者行大法. 應聲便爲詩曰, 煮豆持作羹, 漉菽以爲汁, 萁在釜下燃, 豆在釜中泣, 本自同根生, 相煎何太急. 帝深有慚色.)」
이 이야기는 《世說新語 文學》에 나온다. 어떤 資料에는 ‘菽’을 ‘豉’로 쓴 것도 있다. 이 境遇 ‘된장을 걸러 국물을 부었다.’로 解釋된다.
元來 6句節로 되어 있는 이 〈七步詩〉는 《三國演義》 等에 依해 아래와 같은 4句節로 된 詩로 傳해졌다.
煮豆燃豆萁 :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豆在釜中泣 : 가마솥 속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
本是同根生 : 本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相煎何太急 : 어찌하여 이다지도 急히 삶아 대는가?
이 詩에서 由來하여 글才주가 뛰어난 것을 일러 ‘七步之才’ 或은 ‘七步成章’이라 한다. 그리고 骨肉相殘을 가리켜 콩을 삶는데 콩깍지를 땐다는 뜻의 ‘煮豆燃萁’, 콩깍지와 콩이 서로 삶아 댄다는 뜻의 ‘萁豆相煮’, 서로 삶아 대는 일이 어찌 그리 急하냐는 뜻의 ‘相煮何急’이라고 한다
33. 칠종칠금(七縱七擒) 七纵七擒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사로잡다. 相對方을 自己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것을 比喩
諸葛亮이 北쪽의 魏나라 征伐을 計劃하고 있는데, 南蠻의 孟獲이 叛亂을 일으켰다. 諸葛亮은 北伐을 하기 前에 背後를 平定하기 爲해 孟獲을 征伐하기로 決定했다. 出戰에 앞서 馬謖이 諸葛亮에게 進言했다. “어리석은 所見이 있으니 丞相께서는 헤아려 들으시기 바랍니다. 南蠻은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山勢가 險峻한 것을 믿고 服從하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비록 이番에 擊破한다 해도 來日이면 또다시 背叛할 것입니다. 丞相의 大軍이 이르면 저들이 틀림없이 服從할 것입니다만, 軍士들이 돌아오는 날로 北쪽의 曹丕를 征伐하러 갈 것이므로, 蠻兵들이 우리 內部가 비었다는 것을 알면 재빨리 反逆할 것입니다. 무릇 用兵을 하는 데는 마음을 攻略하는 것이 上策이며, 城을 攻略하는 것은 下策입니다. 心戰이 上手요 兵戰은 下手이니, 바라건대 丞相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服從시켜야 할 것입니다.” 孔明이 感嘆하여 말했다. “참으로 幼常 (馬謖)은 내 肺腑를 꿰뚫어 보는구나!”
孔明은 卽時 馬謖을 參軍으로 삼고 大軍을 統率하여 곧장 進擊해 나갔다. 諸葛亮은 作戰을 펴 孟獲을 쉽게 生捕했고, 孟獲은 抑鬱하다며 놓아주었는데도 다시 싸워 진다면 降服하겠다고 했다. 諸葛亮 孟獲을 풀어 주었다. 孔明이 孟獲을 놓아 보내자, 지켜보던 여러 將帥들이 물었다. “孟獲은 南蠻의 傀首입니다. 이제 多幸히 사로잡아 南方이 겨우 平定되었는데, 丞相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놓아주십니까?” 孔明이 웃으며 對答했다. “내가 孟獲을 사로잡는 것은 주머니 속의 物件을 꺼내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오. 孟獲이 眞心으로 降伏하면 南蠻은 저절로 平定될 것이오.” 孟獲은 또 生捕되었지만 如前히 不服했다. 諸葛亮은 또 孟獲을 풀어 주었다가 다시 사로잡곤 했는데, 그러기를 무려 일곱 차례나 했다. 마침내 感服한 孟獲은 眞心으로 承服하면서 더 以上 對抗하지 않았다. 諸葛亮은 孟獲에게 蜀漢의 官職을 주었는데, 나중에는 御使中丞에까지 이르렀다.
이 이야기는 《三國演義》 第87回와 88回, 89回, 90回에 나오는데, 諸葛亮이 孟獲을 일곱 番 사로잡고 일곱 番 풀어 주었다는 이야기에서 ‘七縱七擒’이 由來했다. 七縱七擒은 事實이 아닌 虛構이다. 諸葛亮이 南蠻을 平定한 일에 對해 《三國志 · 蜀書 諸葛傳》에서는 다음과 같이 簡略하게 記錄하고 있다.
「3年 봄, 諸葛亮이 軍士들을 거느리고 南征을 했다. 그해 가을 모두 平定했다.(三年春, 亮率衆南征, 其秋悉平)」
34. 침어낙안(沈魚落雁) 沉鱼落雁
물고기가 잠기고 기러기는 떨어진다. 美人을 比喩的으로 形容하는 말이다.
「원숭이는 揙狙를 암컷으로 여기고, 고라니는 사슴과 交尾를 하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더불어 노닌다. 毛嬙과 麗姬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여긴다. 하지만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깊이 들어가고 새는 그들을 보면 높이 날고 고라니나 사슴은 그를 보면 逃亡을 친다. 이 넷 中에 어느 것이 天下의 올바른 아름다움을 알고 있겠는가? 내가 보기엔 仁義의 실마리와 是非의 갈림이 뒤섞여 어지럽기만 하다. 그러니 내 어찌 그 區別을 알겠는가?
(猿猵狙以爲雌, 麇與鹿交, 鰌與魚遊. 毛嬙麗姬, 人之所美也. 魚見之深入, 鳥見之高飛, 麇鹿見之而決驟. 四者孰知天下之正色哉. 自我觀之, 仁義之端, 是非之塗, 樊然殽亂. 吾惡能知其辯.)」
《莊子 齊物論》에 나온다. 이는 齧缺과 王倪의 問答 形式으로 되어 있는데, 앞의 이야기는 王叡가 한 말이다. 毛嬙과 麗姬가 사람이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깊이 들어가고, 새는 그들을 보면 높이 난다.’는 말에서 ‘沈魚落雁’이 由來했는데, 이 말은 元來는 ‘人間에게는 美人으로 보이는 것이라 해도 물고기와 새에게는 단지 두려운 存在일 뿐’이라는 뜻으로 쓰였으나, 後에 ‘아름다운 美人’이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齧缺은 堯임금 때의 賢人으로 許攸의 스승이며 王叡의 弟子이다. 王叡 亦是 堯임금 때의 賢人으로 齧缺의 스승이다. 毛嬙은 越王의 愛妾이고 麗姬는 晉獻公의 寵姬이다.
‘沈魚落雁’의 또 하나의 出典은 秦獻公의 寵姬 麗姬이다. 麗姬가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그女의 아름다움에 壓倒되어 ‘물고기는 물속으로 깊이 숨어 버리고 기러기는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隊列에서 떨어졌다.(沉魚落雁)’고 하며, ‘밝은 달은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고 꽃은 부끄러워 시들었다.(閉月羞花)’고 한다. 이처럼 ‘沈魚落雁’과 ‘閉月羞花’는 麗姬의 美貌를 極讚한 말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이에 對한 正確한 根據는 밝혀지지 않았다
35. 침어낙안(浸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
浸魚落雁의 容貌, 閉月羞花의 아름다움 이라는 말로 女人의 아름다움을 表現한다.
中國 古代 4大美人 卽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귀비(楊貴妃)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이들에 對한 재미있는 故事를 보면
(1) 浸魚 ~ 서시(西施)
개울가에서 손手巾을 씻는 西施를 보자 물고기가 헤엄치는 걸 잊고 물속에 가라앉았다.
西施는 中國의 有名한 古代 中國 4大 美女로, 本名은 施夷光이다. 中國에서는 西子라고도 한다. 紀元前 5世紀頃 (春秋戰國時代末期)의 사람이다. 現在의 저장省(浙江省) 사오싱(紹興) 近處(現在의 주지市(諸曁市)) 出身이다.
越王 勾踐이 吳王 夫差와의 戰爭에서 敗北하자 越나라 勾踐의 參謀 范蠡의 戰略에 따라 敗戰의 處理에 對한 貢物로 吳나라 夫差의 女人이 된다. 西施에게 빠진 夫差는 越나라를 끝까지 없애야 한다고 主張하던 伍子胥를 죽이면서까지 越나라 警戒에 疎忽하게 되고, 結局 國力을 키운 越나라에 敗亡하게 된다.
나라가 敗亡한 뒤의 西施는 越王 勾踐의 後宮이 되어 寵愛를 받지만 勾踐의 正夫人에게 秘密裏에 除去當했다고 한다.
(2) 落雁 ~ 왕소군(王昭君)
집떠나 故鄕 생각이 물밀 듯 밀려와서 琴을 탔다. 王昭君의 琴 소리를 듣고 한무리의 기러기가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王昭君 (紀元前 1世紀)은 匈奴의 呼韓邪 單于, 復株累若鞮 單于의 閼氏(單于의 妻)로, 本來 漢나라 元帝의 宮女였다. 이름은 嬙 (出典은 漢書)이다. 姓을 王, 字를 昭君이라고 하여 普通 王昭君이라고 불리며 後日 司馬昭의 諱를 避하여 明妃, 王明君 等으로도 일컬어졌다. 荊州 南郡(現在의 湖北省 沙市) 出身으로 楊貴妃, 西施, 貂蟬과 함께 古代 中國 四大 美人의 한 사람에 손꼽힌다.
前漢의 元帝 時代, 匈奴의 呼韓邪 單于가 漢나라의 女姓을 閼氏(匈奴의 말로 君主의 妻)로 달라고 해, 王昭君이 選擇되어 그의 長男을 낳았다. (當時의 狀況으로 보아 邊方의 勢力을 달래기 爲해 보냈다는 說도 있다) 以後 呼韓邪 單于가 死亡하자, 當時 匈奴의 慣習대로 아들 復株累若鞮 單于의 妻가 되어 둘째 딸을 낳았다. 漢族은 父親의 妻妾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을 꺼려하여, 이것이 王昭君의 悲劇으로 民間에 傳承되었다. 荒凉한 草原地帶가 大部分이었던 匈奴의 땅에서, 王昭君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故鄕땅을 그리며 詩를 남겼는데, 그 詩句 中에 "봄은 왔으나 봄같지 않구나 (春來不似春)"라는 句節은 匈奴 땅의 봄을 맞이했음에도 故鄕 땅의 봄같지 않아 더욱 사무치게 故鄕이 그립다는 그女의 哀絶한 心情이 잘 나타나 있다. 只今도 이 詩句인 春來不似春은 그리움의 引用句로 널리 쓰이고 있다. 以後 72歲가 되던 해에 病을 얻어 돌무덤에 安葬되었는데, 사람들은 그 무덤을 일컬어 昭君墓 或은 겨울에도 이 무덤가에만 푸른풀이 있어 '靑塚'이라고 부른다
(3) 閉月 ~ 초선(貂蟬)
花園에서 달을 보고 있을 때에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웠다. 이에 西施의 養父人 王允이 말하기를 "달도 내 딸에게는 比할 수가 없구나.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고 하였다.
貂蟬은 西施, 王昭君, 楊貴妃와 함께 中國의 4大 美人 가운데 한 사람이다.
《三國志演義》에서 王允의 收養딸로 登場해 董卓과 呂布 사이를 離間질 시키는 役割을 하는 것으로 有名하다. 이는 呂布가 董卓의 侍女와 艶聞을 가졌다는 正史의 記錄과 王允이 呂布를 부추겨 董卓을 죽이게 했다는 事實을 演義에서 脚色한 것이다.
(4) 羞花 ~ 양귀비(楊貴妃)
楊貴妃가 花苑에 가서 꽃을 鑑賞하며 憂鬱함을 달래는데 無意識中에 含羞花를 건드렸다. 含羞花는 바로 잎을 말아 올렸다. 唐明皇이 그女의 '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에 讚嘆하고는 그女를 '絶對佳人'이라고 稱했다.
楊貴妃(719년 ~ 756년)는 唐 玄宗의 後宮이자, 며느리이다.楊貴妃의 이름은 楊玉環이며, 735年 玄宗과 武惠妃의 아들인 第18王子 壽王 李瑁 의 妃로 17歲 때 宮闕에 들어온다. 뛰어난 詩와 노래에 能한 藝術家였던 그는 740年 宦官 高力士의 紹介로 만난 玄宗의 눈에 들게 된다. 玄宗은 그女를 華山의 道士로 出嫁시켜 壽王에게서 빼내고, 宮안의 道敎寺院 太眞宮을 짓고 다시 이곳을 管理하는 女冠으로 불러 들인다. 이때 楊貴妃의 나이 22歲, 玄宗은 57歲였다.
745년 楊玉環이 27歲에 貴妃가 되면서, 唐나라는 서서히 끝자락을 달리게 된다. 唐 玄宗 初期에는 開元의 治를 이룩할 程度로 어진 政治를 하였지만, 楊貴妃의 登場以後 楊貴妃 一家의 專橫이 始作되면서, 唐나라는 漸漸 힘을 잃게 된다. 楊貴妃의 세 오빠에게 모두 높은 벼슬을 주었고, 세 名의 언니들 모두를 國夫人에 策命할 程度로 그女를 寵愛하였다. 그 中 楊貴妃의 四寸 오빠인 양소(楊釗)는 玄宗에게 '國忠'이라는 이름을 下賜받고, 丞相의 地位에까지 올라 國政을 專橫한 人物로 宦官 高力士와 談合하여 唐 玄宗을 政治에서 關心을 멀어지게 한다.
747年 節度使 安祿山이 登場하여, 楊貴妃는 그와 親해지게 된다. 새로운 權力者의 登場에 危機를 느낀 楊國忠은 牽制를 하게 되는데, 이것은 安史의 亂이 일어나 唐나라가 滅亡하는 原因이 된다.
中國사람들이 表現은 過한 測面이 있으나 아주 韻致있게 表現하기도 한다.
* 浸魚 ~ 고기가 아름다움에 놀라 헤엄치는 것을 있고 가라 앉았다..
* 落雁 ~ 기러기가 날아가다가 그女의 琴 소리를 듣고 날개짓하는 것을 잊고 땅에 떨어졌다.
* 閉月 ~ 달이 부끄러워서 구름뒤로 숨었다.
* 羞花 ~ 꽃이 부끄러워 그잎을 말아 올렸다.
이中에서 閉月(貂蟬)은 三國志에 登場하며 實存人物은 아니지만 나머지 3名은 實存했던 것으로 傳해 진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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