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ㅋ- 1 쾌독파거~ )
1. 쾌독파거(快犢破車)
性質이 快活한 송아지가 수레를 부순다. 性質이 사나운 송아지는 이따금 제가 끄는 수레를 부수기도 하지만, 자라서는 호쾌(豪快)한 소가 된다는 뜻으로, 어렸을 때의 性品이나 所行만으로는 어떤 사람의 將來性을 速斷할 수 없다는 말이다.
* 晉書 石季龍의 載記에.
石季龍은 中國五胡十六國 하나인 後趙의 第3代 皇帝로 第1代 皇帝인 石勒의 조카였으나 어려서 性格이 殘忍하고 사냥하기를 좋아하며 放蕩하고 노는 데에 節制를 몰랐다. 더욱이 활쏘기를 즐겨 사람을 쏘는 일이 잦으니 軍中에서 憂患으로 여겨 죽이느니 하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壯快한 소는 송아지 時節에 수레를 부술 수가 있는 法이니 마땅히 暫時 참아야 한다".
(快牛爲犢子時, 多能破車, 汝當小忍之) 고 하여 모두들 納得하였다. 그는 以後 武將으로서의 統率力에 能하여 王의 信任을 얻었고 그의 功으로 後趙가 華北을 統一할 수 있었다.
그런데 333年 王 石勒이 죽어 그의 太子 弘이 趙帝가 되자 이듬해 그를 죽이고 스스로 王이 되었다. 그는 都邑을 襄國에서 鄴으로 옮기고 土木工事를 크게 벌이는 한便, 遠征 戰爭을 세 番이나 일으키며 暴政을 行하였다. 때문에 百姓은 草根木皮로써 목숨을 延命하는 者가 不知其數였다. 마침내 349年 在位 15年에 그가 病死하자, 子息들이 帝位를 놓고 서로 싸우며 죽이다가, 漢人 冉閔에 依하여 그 一族이 滅해지고 後趙는 滅亡하였다.
2. 타산지석(他山之石)
남의 山 돌. 다른 山의 돌을 自己 山의 玉돌을 가는 데에 쓸 수 있다는 뜻으로, 남의 말이나 行動이 自身의 人格을 修養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比喩
鶴嗚於九皐 : 鶴이 먼 못가에서 우니
聲聞於野 : 그 소리 들판에 울려 퍼지고
魚潛在淵 : 물고기는 蓮못 깊이 숨어 있다가
或在於渚 : 때로는 물가에 나오기도 하네.
樂彼之園 : 즐거워라, 저기 저 동산 속에는
爰有樹檀 : 심어 놓은 박달나무 있고
其下維蘀 : 그 아래는 落葉만 수북이 쌓여
他山之石 : 다른 山의 돌이라도
可以爲錯 : 구슬 가는 숫돌이 된다네.
鶴嗚於九皐 : 鶴이 먼 못가에서 우니
聲聞於天 : 그 소리 하늘 높이 울려 퍼지고
魚在於渚 : 고기는 물가에서 노닐다가
或潛在淵 : 때로는 蓮못 깊이 숨기도 하네.
樂彼之園 : 즐거워라, 저기 저 동산 속에는
爰有樹檀 : 심어 놓은 박달나무 있고
其下維穀 : 그 아래에 닥나무 있네.
他山之石 : 다른 山의 돌도
可以攻玉 : 玉을 갈 수 있다네.
* 詩經 · 小雅 학명(鶴鳴)에 190. 鶴鳴(학명)-詩經 小雅(시경 소아)
이 詩의 他山之石可以爲錯과 他山之石可以攻玉에서 ‘他山之石’이 由來했는데, ‘돌’을 小人에 比喩하고 ‘玉’을 君子에 比喩하여 君子도 小人에 依해 修養과 學德을 쌓아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3. 타초경사(打草驚蛇) 打草惊蛇
풀을 쳐서 뱀을 놀라게 하다. 일 處理가 敏捷하지 못하고 行動이 愼重하지 못해 남들의 警戒心을 자아내는 것을 比喩 하는 말. 또는 한쪽을 징벌해서 다른 한쪽을 警戒하도록 하는 것을 比喩
* 古代 中國의 兵法인 三十六計秘本兵法의 第13計이다.
「唐나라의 王魯가 當塗의 首令으로 있을 때 온갖 非理로 瀆職을 하자, 百姓들이 連名으로 告發狀을 써 主簿가 非理를 저지른다고 告發했다. 王魯는 다음과 같이 判決을 했다. “그대는 풀을 쳤을 뿐이지만 나는 이미 놀란 뱀이 되었다.”
(王魯爲當途宰, 瀆物爲務, 會部民連狀訴主簿貪. 魯乃判曰, 汝雖打草, 吾已驚蛇)」
王魯는 百姓들이 自己 部下들의 非理를 告發한 것은 곧 迂廻的으로 自身의 非理를 告發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레 怯을 먹은 것이다.
* 宋代 鄭文寶의 南唐近事와 段成式의 隨筆集인 酉陽雜俎에 나온다.
‘打草驚蛇’는 古代 中國의 兵法인 '三十六計秘本兵法'의 第13計로서, 뱀을 찾기 위해 풀밭을 두드린다는 뜻으로 敵情을 미리 살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4. 탁발난수(擢髮難數) 擢发难数
머리카락을 뽑아도 다 헤아리기 어렵다. 지은 罪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程度로 많은 것을 比喩
戰國時代 魏나라에 범수(范睢)라는 사람이 있었다. 范睢는 魏나라의 大夫 須賈의 門客으로, 須賈를 따라 齊나라로 出使했다. 누구 못지않게 人才를 尊重했던 齊襄王은 范睢의 뛰어난 才能을 알아보고 賞을 내렸다. 別 所得도 없이 出使를 마치고 魏나라로 돌아온 須賈는 相國인 魏齊에게 范睢가 齊襄王과 私的으로 交流한 事實을 告해바치고, 失敗의 責任을 范睢에게 뒤집어씌웠다. 魏齊는 范睢를 相府로 끌어가서 半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팬 後, 廁間 옆에 거적을 깔고 그곳에 范睢를 내버렸다. 술 醉한 손님들이 거적에 쓰러져 있는 范睢의 몸뚱이에 小便을 보았다. 며칠이 지난 後 精神을 차린 范睢는 相府의 大廳을 지키는 兵卒에게 自身을 救해 달라고 哀願했다. 范睢를 가엽게 여겼던 兵卒은 술에 醉해 있는 魏齊에게 范睢가 죽었다고 거짓 報告 했고, 魏齊는 屍體를 城 밖에 버리도록 命令했다. 다음 날, 魏齊는 范睢의 屍體가 없는 것을 알고 全國에 范睢룰 逮捕하도록 命令했다. 范睢는 切親한 이웃인 鄭安平의 집에 숨어 살면서, 張祿으로 이름을 바꾸고 魏나라를 脫出할 機會를 노리고 있었다. 鄭安平은 마침 秦昭王의 使臣으로 魏나라에 온 王稽에게 范睢를 紹介했고, 范睢의 才能에 感服을 한 王稽는 秘密裏에 范睢를 데리고 魏나라 都城인 大梁을 빠져나와 秦나라로 들어갔다. 秦나라 昭王은 范睢를 重用했고, 范睢의 計策을 採擇하여 外戚인 穰侯와 華陽君을 몰아내고 王室을 튼튼히 만들었으며, 그의 遠交近攻 計策을 받아들여 諸侯들을 蠶食하는 기틀을 세웠다.
范睢는 秦나라의 宰相이 된 뒤, 秦昭王에게 魏나라를 치도록 勸했다. 魏나라는 秦나라가 東으로 漢나라와 魏나라를 친다는 말을 듣고 須賈를 秦나라에 使臣으로 派遣했다. 范睢는 이 消息을 듣고 身分을 감추고 해진 옷을 입고 須賈가 投宿한 旅館으로 찾아가 須賈를 만났다. 須賈는 范睢를 보자 깜짝 놀라며 말했다. “范叔 (范睢)은 그동안 無事했던가?” “그렇습니다.” 須賈는 웃으며 말했다. “范叔은 秦나라에서 遊說를 하는가?” “그렇지 못합니다. 저는 그때 魏나라 宰相에게 罪를 지었으므로 逃亡쳐 이곳으로 왔는데 어떻게 遊說를 할 景況이 있겠습니까?” “그럼 只今 무엇을 하는가?” “남의 집에서 날품팔이를 하고 있습니다.” 須賈는 마음속으로 불쌍한 생각이 들어 들어와 앉으라고 하고 飮食을 주면서 말했다. “范叔이 이렇게까지 困窮하게 되었구려.” 그리고 두터운 明紬 솜옷 한 벌을 주면서 물었다. “秦나라는 張君 (張祿)을 宰相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자네도 아는가? 王의 信任을 얻어 天下의 모든 일이 그에 依해 決定된다고 들었다네. 只今 내 일은 宰相에게 달려 있다네. 或時 宰相과 親한 사람을 알고 있지는 않은가?” 范睢가 말했다. “저의 主人이 잘 압니다. 그래서 저도 宰相을 뵌 적이 있습니다. 제가 主人에게 付託해서 宰相을 만나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須賈가 말했다. “내 말은 病이 들었고 車軸도 부러졌다네. 네 마리 말이 끄는 큰 馬車가 아니면 外出을 할 수 없을 텐데.” “그럼 大監을 爲해 主人에게 네 마리 말이 끄는 큰 馬車를 빌려 오겠습니다.”
「范睢는 돌아가서 네 마리 말이 끄는 큰 馬車를 準備한 다음, 須賈를 태우고 손수 말을 몰아 秦나라 宰相의 廳舍로 들어갔다. 廳舍 안에 있던 사람들 中 范睢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避해 숨어 버렸다. 須賈는 異常한 생각이 들었다. 廳舍 正門에 이르자 范睢가 須賈에게 말했다. “여기서 좀 기다리십시오. 제가 먼저 들어가서 宰相께 말씀드리겠습니다.” 須賈는 門間에서 기다렸는데, 수레를 멈춰 둔 지 오래되었는데도 范睢가 나오지 않자 門지기에게 물었다. “范叔이 나오지 않으니 어찌 된 까닭이오?” 門지기가 말했다. “范叔이란 사람은 없습니다.” “아까 나와 함께 수레를 타고 와서 들어간 사람 말이오.” “그분은 우리 宰相 張君입니다.” 須賈는 크게 놀라 웃통을 벗고 무릎걸음으로 기어 들어가 門지기를 通해 罪를 빌었다. 范睢는 帳幕을 치고 數많은 모시는 者들의 護衛를 받으며 須賈를 만나 주었다.
須賈는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스스로 죽을罪를 지었음을 告白하며 말했다. “이 須賈는 宰相께서 이렇게 出世를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須賈는 이제 다시는 天下의 冊들을 읽지 않겠으며, 天下의 일에도 關與하지 않겠습니다. 제게는 기름 가마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罪가 있습니다. 그러니 容恕를 빌고 스스로 北쪽 오랑캐 땅으로 물러가고자 합니다. 宰相의 處分만 바랍니다.” 范睢가 말했다. “너의 罪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느냐?” 須賈가 對答했다. “제 머리카락을 다 뽑아서 저의 罪를 헤아리면 머리카락이 오히려 不足할 것입니다.” (擢髮難數) 范睢가 말했다. “그대에게는 세 가지 罪가 있다. ······ 그대는 내가 齊나라와 內通했다고 魏齊에게 나쁘게 말했다. 이것이 첫 番째 罪다. 魏齊가 便所에서 나를 辱보일 때 그대는 말리지 않았다. 이것이 두 番째 罪다. 사람들이 醉해 나에게 오줌을 쌀 때 그대는 모른 척했다. 이것이 세 番째 罪다. 그러나 내가 그대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에게 솜옷을 주며 옛情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를 풀어 준다.”
(范睢歸取大車駟馬, 爲須賈禦之, 入秦相府. 府中望見, 有識者皆避匿. 須賈怪之. 至相舍門, 謂須賈曰, 待我, 我爲君先入通於相君. 須賈待門下, 持車良久, 問門下曰, 范叔不出, 何也. 門下曰, 無范叔. 須賈曰, 鄕者與我載而入者. 門下曰, 乃吾相張君也. 須賈大驚, 自知見賣, 乃肉袒膝行, 因門下人謝罪. 於是范睢盛帷帳, 待者甚衆, 見之. 須賈頓首言死罪, 曰, 賈不意君能自致於靑雲之上, 賈不敢複讀天下之書, 不敢複與天下之事. 賈有湯鑊之罪, 請自屛於胡貉之地, 唯君死生之. 范睢曰, 汝罪有幾. 曰, 擢賈之髮以續賈之罪, 尙未足. 范睢曰, 汝罪有三耳. ······ 公前以睢爲有外心於齊而惡睢於魏齊, 公之罪一也. 當魏齊辱我於廁中, 公不止, 罪二也. 更醉而溺我, 公其何忍乎. 罪三矣. 然公之所以得無死者, 以綈袍戀戀, 有故人之意, 故釋公.)」
范睢는 王宮으로 가 魏나라에서 있었던 일의 自初之終을 昭王에게 말하고 須賈의 使臣 資格을 剝奪한 다음 本國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須賈가 范睢에게 下職 人事를 하러 갔다. 范睢는 크게 宴會를 벌이고 諸侯들의 使臣을 招待하여 함께 大廳 위에 앉아 豊盛한 飮食을 待接했다. 그리고 須賈를 大廳 밑에 앉힌 다음, 그 앞에 여물과 콩을 놓고 이마에 먹물을 넣은 두 罪人을 兩쪽에 세워 須賈에게 말을 먹이듯 먹이면서 꾸짖어 말했다. “當場 魏齊의 목을 가져오라고 魏王에게 알려라. 그러지 않으면 大梁을 屠戮해 버리겠다.” 須賈는 돌아가 魏齊에게 이 事實을 傳했다. 魏齊는 趙나라 平原君에게 가 몸을 숨겼다가 다시 楚나라로 逃亡쳤지만 받아 주는 곳이 없자 할 수 없이 自決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史記 范睢蔡澤列傳》에 나오는데, ‘擢賈之髮以續賈之罪, 尙未足’ 卽 ‘나, 須賈의 머리카락을 다 뽑아서 한 올에 罪를 하나씩 쳐서 세면 머리카락이 오히려 모자랄 程度로 罪가 많다.’는 말에서 ‘擢髮難數’가 由來했다. (‘續’은 헤아린다는 뜻의 ‘數’로 解釋되는데, 北方 音에서는 ‘續’ 字와 ‘數’ 字의 音이 비슷하여 이런 解釋이 나온 것으로 推定되고 있다.)
5. 탐천지공(貪天之功) 贪天之功
하늘의 功을 貪내다. 남의 功을 自身의 功으로 돌리는 것을 比喩
아버지 獻公에게 追放되어 19年 동안 떠돌이 生活을 하던 重耳는 秦나라 穆公의 도움으로 晉 懷公을 죽이고 王位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晉 文公이다. 當時 나이는 62歲였다. 文公은 떠돌이 生活을 하는 동안 自己에게 忠誠을 다했던 臣下들에게 厚한 賞을 내리고 그들을 重用함으로써 그들에게 報答하였다. 그런데 정작 曹나라에서 굶주리고 있던 重耳에게 自身의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인 介之推(介子推라고도 한다)는 아무런 褒賞도 받지 못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自身의 功을 밝히면서 褒賞을 要求했지만 介之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文公 또한 그에게 賞을 내리지 않았다.
「介之推는 功積을 부풀려서 褒賞을 받아 내는 사람들을 보고 말했다. “獻公의 아들 아홉 사람 中에 唯一하게 主君만이 살아 계신다. 惠公과 懷公이 가까운 사람이 없어서 國內와 國外에서 모두 그들을 버렸는데도 하늘이 秦나라를 없애지 않은 것은 반드시 나라에 主宰者가 있게 하려 한 것이다. 秦나라의 祭祀를 主宰할 사람이 主君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實로 하늘이 主君을 임금으로 세운 것인데 몇몇 사람은 自身들의 功勞로 여기니,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남의 財物을 훔치는 것도 오히려 도둑이라 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功勞를 貪하여 自身들의 功勞로 삼으니 다시 말할 것이 있겠는가? 아랫사람은 그 罪를 義로 여기고 윗사람은 그 奸惡한 行爲에 賞을 내려 上下가 서로 속이니, 저들과 함께 處하기가 어렵구나.”
(推曰, 獻公之子九人, 唯君在矣. 惠懷無親, 外內棄之, 天未絶晉, 必將有主. 主晉祀者, 非君而誰. 天實置之, 而二三子以爲己力, 不亦誣乎. 竊人之財, 猶謂之盜, 況貪天之功以爲己力乎. 下義其罪, 上賞其姦, 上下相蒙, 難與處矣.)」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어찌하여 너도 賞을 求하지 아니하느냐? 이대로 죽으려 한다면 누구를 怨望할 게 있겠느냐?” 介之推가 對答했다. “저들의 行爲를 허물로 여기면서 그 허물을 本받는다면 罪가 더욱 甚해집니다. 또, 怨望하는 말을 내었으니 다시는 그의 祿을 먹지 않겠습니다.” “임금에게 너의 생각을 알리는 것이 어떻겠느냐?” “말은 몸을 꾸미는 것입니다. 將次 몸을 숨기려 하면서 무엇 때문에 꾸미겠습니까? 萬若 꾸민다면 이는 顯達하기를 求하는 것입니다.” 介之推 어머니와 함께 綿上의 山에 들어가 숨어 살다가 죽었다. 文公은 後에 介之推를 생각하고 四方으로 그를 찾아보았으나 結局 찾지 못하였다. 文公은 綿上 一帶를 介之推의 封土로 삼고 말했다. “이로써 나의 잘못을 記憶하게 하며, 훌륭한 사람을 表彰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左傳 僖公 24年》에 나오는데, 介之推가 한 말에서 ‘貪天之功’이 由來하여 남의 功을 自身의 功으로 돌리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一說에 依하면, 文公은 後에 介之推가 綿山에 들어가 隱居한다는 것을 알고 그를 나오게 하기 爲하여 山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그러나 介之推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고, 불이 꺼진 後 介之推가 어머니를 업은 채 불에 타 죽은 것이 發見되었다. 훗날 사람들은 介之推를 記念하기 爲해 해마다 淸明節 하루 前날을 寒食節로 삼았으며, 各 家庭에서는 불씨를 없애고 찬 飮食을 먹었다. 그리고 綿山은 介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介之推는 介子推라고도 한다
6. 태산북두(泰山北斗)
泰山과 北斗星. 學問이나 藝術 分野의 大家나 많은 사람의 尊敬을 받는 훌륭한 存在를 比喩
「韓愈는 六經의 文章으로 여러 學者들의 唱道者가 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그의 學說이 天下에 떨쳤으므로, 學者들은 그를 泰山北斗처럼 우러러보았다.
(愈以六經之文, 爲諸儒倡. 自愈沒, 其言大行, 學者仰之, 如泰山北斗云)」
* 新唐書 韓愈傳에.
韓愈는 唐나라 때의 文學者이자 思想家로,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25歲 때 進士科에 及第한 뒤 벼슬이 吏部尙書까지 올랐으나, 皇帝가 關與하는 佛事를 諫하다가 潮州刺史로 左遷되었다. 天性이 剛直했던 韓愈는 그 後에도 여러 차례 左遷과 罷職을 當하기도 했는데, 晩年에 吏部侍郞을 지낸 뒤 57歲의 나이로 죽었다. 韓愈는 順坦하지 못했던 벼슬살이와는 달리 學文과 思想 分野에서 뚜렷한 業積을 남겼다. 柳宗元 等과 古文運動을 提唱하여 古文이 宋代 以後 中國 散文 文體의 標準이 되도록 만들었다. 思想 面에서는 道敎와 佛敎를 排擊하고 儒家의 思想을 尊重하여 儒學 發展에 힘썼다. ‘泰山北斗’는 줄여서 ‘泰斗’ 或은 ‘山斗’라고 하는데, 特히 學術的 業積이 뛰어난 學者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7. 태산불사토양(泰山不辭土壤) 泰山不辞土壤
(泰山은 흙덩어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度量이 큰 것을 比喩
楚나라 上蔡 사람 李斯는 年少時節 고을의 下級 官吏가 되었다. 어느 날, 官廳 뒷간의 쥐가 不潔한 것을 먹으며 사람이나 개가 가까이 가면 놀라서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李斯는 또 광 안의 쥐는 貯藏된 쌀을 먹으면서도 사람이나 개가 가도 그리 놀라는 빛이 없고 또한 넓은 지붕 밑에 사는 것을 보았다. 李斯는 嘆息하며 말했다. “사람이 賢明하다 어리석다 하는 것은 比喩하자면 쥐와 같아서 스스로 있는 곳에 따라 다르구나.” 李斯는 荀卿을 섬기며 帝王의 統治術을 배웠다. 그는 工夫를 마치자 楚나라의 王은 섬길 만한 人物이 못 되며 여섯 나라들 모두 弱小하여 功을 세울 만한 나라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西쪽 秦나라로 들어가기로 했다.
秦나라에 이르렀을 때, 마침 莊襄王이 죽었으므로 李斯는 秦나라의 宰相 文信侯 呂不韋의 家臣이 되었다. 呂不韋는 그를 賢明한 者로 認定하고 郎에 任命하였다. 李斯는 이로 因해서 秦王에게 遊說할 機會를 얻게 되었다. 秦나라 王은 李斯를 客卿으로 삼았다. 그런데 韓나라에서 온 鄭國이 논밭에 물을 댄다는 理由로 運河를 만드는 일을 하여 秦나라의 人力과 費用을 消費시켜 東쪽 征罰을 抛棄하도록 하려고 했다가 發角되었다. 王族과 大臣들은 賓客들을 逐出하자고 외쳤으며, 秦王은 逐客令을 내렸다. 李斯 亦是 逐出 對相에 包含되었다. 李斯는 上疎를 올렸는데, 그것이 바로 '諫逐客書'이다. 李斯의 글을 읽은 秦王은 곧 逐客令을 거두어들이고 李斯의 官職을 回復시켰으며 그의 計策을 받아들였다. 李斯가 올린 諫逐客書에는 다음과 같은 內容이 들어 있다.
「땅이 넓은 곳은 穀食이 많고, 나라가 큰 곳은 사람이 많으며, 軍隊가 强하면 兵士들이 勇氣가 있다고 臣은 들었습니다. 泰山은 흙덩어리를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큼을 이룰 수 있었고, 큰 江과 바다는 작은 물줄기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깊음을 이룰 수 있었으며, 君王은 百姓들을 물리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 德을 밝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땅에는 四方이 없고, 百姓들에게는 本國과 外國의 境界가 없으며, 四時가 恒常 아름다움으로 차 있고 鬼神이 福을 내려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五帝와 三王이 敵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臣聞地廣者粟多, 國大者人衆, 兵彊則士勇. 是以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王者不卻衆庶, 故能明其德. 是以地無四方, 民無異國, 四時充美, 鬼神降福, 此五帝三王之所以無敵也.)」
이 이야기는 《史記 李斯列傳》에 나오는데, 李斯의 글에서 由來하여 ‘泰山不辭土壤’은 度量이 큰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諫逐客書〉 箋文은 오늘날 書藝家의 一筆揮之 아래 자주 登場하는 名句가 되었다.
事實은 李斯가 春秋時代 齊나라의 名宰相 管仲의 著書 《管子》의 文章을 비틀고 늘리고 깎고 다듬어 놓은 것으로, 李斯가 얼마나 學文에 該博하고 古今의 典籍에 通達한 人物인가를 보여 주는 좋은 例가 된다.
《管子》의 文章은 다음과 같다.
「바다는 물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깊어질 수 있었고, 山은 흙과 돌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높아질 수 있었다. 밝은 君主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무리를 이룰 수 있었고, 선비는 배움을 싫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聖스러움을 이룰 수 있었다.
(海不辭水, 故能成其深. 山不辭土石, 故能成其高. 明主不厭人, 故能成其衆, 士不厭學, 故能成其聖)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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