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ㅌ- 3 토사구팽~ )
9.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쓸모가 없어진 사냥개를 잡아먹게 된다는 뜻
中國 春秋戰國時代에 越나라의 覇權을 차지한 王 勾踐의 逸話에서 생겨난 成語 이다. 勾踐은 王이 된 後 自身이 王이 되는 데 가장 큰 功을 세운 范蠡와 文宗을 各各 上將軍과 丞相으로 任命했다.
하지만 范蠡는 越나라를 脫出하여
齊나라로 逃亡친 後 文宗에게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감추어지고,(高鳥盡良弓藏) 狡猾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먹는다'(狡兎死良狗烹)라는 內容의 便紙를 通해 文宗에게 避身을 하라고 한다. 하지만 文宗은 越나라에서 避身하는 것을 躊躇했다.
그 後 勾踐에게 叛逆의 疑心을 받고
自決하고 말았다.
兎死狗烹은 이로부터 由來된 成語로
必要할 때에는 쓰다가 必要가 없게 될 때에는 野薄하게 버리는 境遇를 뜻할 때 쓰이게 되었다.
以後 漢나라 高祖 劉邦과 楚王 韓信의
逸話에서 또 登場한다.
楚王 韓信이 項羽의 部下인 鍾離眛를
몰래 숨겨주고 있다고 疑心한 劉邦이 韓信에게 鍾離眛를 押送하라고 指示했다.
韓信은 이를 拒絶했고, 劉邦으로 因해 韓信이 困難해지자 鍾離眛는 自殺하고
韓信은 하는 수 없이 鍾離眛의 목을 가지고 劉邦을 찾아갔으나, 劉邦은 韓信에게 叛逆 嫌疑를 씌워 處罰하려고 했다. 이 때 韓信이 '狡猾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좋은 사냥개도 삶아 먹힌다고 嘆息했다.
10. 토포악발(吐哺握髮)
“나는 한 番 沐浴할 때 세 番 머리를 거머쥐고(一沐三握髮), 한 番 食事할 때 세 番 飮食을 뱉으면서(一飯三吐哺) 찾아오는 天下의 賢人들을 놓치지 않고자 했다.”
中國 周나라 周公이 人才를 얻고자 沐浴과 食事도 제대로 못했다는 故事다. 周公이 나라의 基盤을 닦을 수 있었던 秘訣은 人才를 널리 求함에서다.
周公은 孔子마저 “내가 오래도록 꿈에서 周公을 보지 못하다니(吾不復夢見周公)”라면서 欽慕했던 聖人이다. 이 吐哺握髮의 傳通은 三國志 曹操 (155?220)로 이어진다.
“山은 높아지기를 마다하지 않고, 물은 깊어지기를 마다하지 않는 法, 周公처럼 人才를 얻기 爲해 먹던 飮食을 뱉는다면, 天下가 나를 服從하고 따르리(山不厭高, 海不厭深, 周公吐哺, 天下歸心).”
曹操가 赤壁大戰을 앞두고 읊은 短歌行의 末尾다. 人才에 허기져 하는 그의 心理를 吐露한 것이다.
中國에서 曹操가 되살아나고 있다. 지난 세밑에 中國 허난(河南)省에서 曹操의 무덤이 發掘됐다는 消息이다. 그는 죽기 前에 72個의 眞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무덤인 疑塚을 만들게 했다고 傳한다. 이番에 ‘魏武王이 恒常 使用하던 호랑이를 때려잡는 큰 槍(魏武王常所用格虎大戟)’이라 새겨진 石牌가 發見됐다지만 眞僞 論亂은 如前하다.
曹操 무덤 發掘 消息이 傳해지자 中國의 한 媒體는 발 빠르게 輿論調査를 實施했다. 曹操를 ‘亂世의 奸雄’이라고 評價한 사람은 8.9%인 데 反해, 78.1%가 ‘世上을 號令한 英雄’이라고 答했다. 왜 中國人들은 曹操를 肯定的으로 評價할까? 『品三國』의 著者 이중톈(易中天)은 曹操의 用人術에서 答을 찾는다. 曹操는 赤壁大戰 2年 後인 210年부터 세 차례에 걸쳐 널리 人才를 求하는 ‘求賢令’을 頒布했다. 名聲과 出身보다 實力과 才能을 重視해 ‘人才만을 登用한다’는 政策이다.
11. 투편단류(投鞭斷流) 投鞭断流
채찍을 던져 江의 흐름을 끊다. 兵力이 많고 强大함을 比喩
4世紀 初 西晉이 滅亡할 무렵, 中國의 北部와 西部에 根據地를 두고 있던 匈奴, 羯, 氐, 羌, 鮮卑 等 五胡들이 다투어 中原 地域에 그들의 政權을 樹立, 마침내 長江 上流와 黃河 流域에는 무려 16個의 나라가 割據하는 樣相을 띠게 되었는데, 이를 五胡十六國이라 한다. 그中에서도 四川 · 陝西 · 甘肅省 一帶에 살고 있던 異民族인 氐族의 苻氏가 세운 秦나라가 가장 큰 나라였는데, 歷史에서는 이를 前秦 或은 苻秦이라 한다.
372年(高句麗 小獸林王 2年)에 前秦의 중 順道를 高句麗에 派遣하여 佛經과 佛像을 보내는 等, 처음으로 韓半島에 佛敎를 傳한 人物로 우리에게 알려진 前秦王 苻堅은 여러 民族을 團結시켜 天下를 아우르고자 하는 野望을 가지고 있었다. 하여 韓族, 匈奴族, 鮮卑族, 羌族, 羯族 等 여러 民族의 指導者를 重用했는데, 그中에서도 符堅의 顧問으로 그를 도와 北中國을 統一하는 데 重要한 役割을 한 사람은 韓族 出身의 王猛이었다. 王猛은 軍隊 改革, 敎育 振興, 水利施設 開發, 農業과 養蠶의 振興에 全力을 기울이는 等, 富國强兵 政策을 펼쳤다. 符堅의 天下 統一에 對한 强한 意志와 王猛의 뛰어난 政策으로 前秦은 强大國이 되었으며, 北中國의 大部分을 統一하게 되었다. 苻秦이 이렇게 强盛하게 된 것은 戰國時代를 統一했던 秦나라 以後, 實로 700如 年 만에 實施된 强力한 改革開放 政策 德分이었다. 이제 天下의 版圖는 前秦과 東晉의 對決로 壓縮되었다. 東晉보다 훨씬 優勢한 戰力을 가지고 있는 符堅은 솟아오르는 東晉 征伐에 對한 慾心을 누를 수가 없었다. 하여 符堅은 重臣 會議를 열고 意見을 물었다. 大部分의 臣下들이 反對 意見을 내었는데, 그中 권익은 ‘東晉에는 賢臣이 많다.’는 理由로, 또 石越은 ‘별자리를 보니 南晉하는 데 適合하지 않다. 그리고 東晉은 長江의 險峻함에 依據하고 있고 그 朝廷에 混亂의 徵候도 없으므로 軍士를 움직이는 것은 不利하다.’며 出兵을 反對했다.
「그러나 符堅은 軍隊의 强함만 믿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듣기로 周나라 武王도 紂王을 칠 때, 때를 거스르고 별자리를 犯했다고 한다. 天道는 幽遠하여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옛날 夫差는 諸侯國들에 威嚴을 떨쳤지만 句踐에게 滅亡을 當했다. 孫權 (仲謀)은 온 吳나라를 潤澤하게 했다. 孫皓는 三代의 業積을 繼承했으나 龍驤將軍(王浚)의 호통에 임금과 臣下들이 손을 뒤로 묶여 降服했다. 長江이 있다고 해도 그게 어찌 堅固한 要塞이겠는가. 나의 大軍으로 江에 채찍을 던져 넣게 하면 그 흐름을 끊을 수 있다. (長江의)險固함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吾聞武王伐紂, 逆歲犯星. 天道幽遠, 未可知也. 昔夫差威陵上國, 而爲句踐所滅. 仲謀澤洽全吳, 孫皓因三代之業, 龍驤一呼, 君臣面縛. 雖有長江, 其能固乎. 以吾之衆旅, 投鞭於江, 足斷其流. 何險之足恃.)」
石越이 말한 별자리와 長江의 險固함에 對해 反駁하여 한 말로, 별자리는 믿을 바가 못 되고, 長江을 天險의 要塞로 삼았던 吳王 夫差, 三國時代 吳主 孫皓도 結局 滅亡을 當했다는 이야기이다. 符堅은 步兵 60萬, 騎兵 27萬의 大軍을 거느리고 首都 長安을 出發했다. 그러나 符堅은 謝玄이 이끄는 東晉軍에게 淝水에서 크게 敗해 洛陽으로 逃亡쳤다가 結局 部下에게 殺害되고 말았으며, 前秦은 西秦에 依해 滅亡當했다.
이 이야기는 《晉書 苻堅載記》에 나온다. ‘投鞭斷流’는 처음에는 虛張聲勢를 부린다는 뜻으로 쓰였지만, 後에는 軍隊가 莫强한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12. 투필종융(投筆從戎) 投笔从戎
붓을 던지고 軍隊를 따르다<戰爭터로 나아가다>. 文人이 글쓰기를 抛棄하고 從軍하는 것을 比喩
《漢書》를 編纂한 班固의 同生 班超는 어렸을 적부터 勤勉하였으며, 여러 書籍을 두루 涉獵하였다. 하지만 집안 살림이 넉넉하지 못해 官家의 文書를 베껴 주거나 남의 書籍을 筆寫해 주고 번 돈으로 生計를 維持했다. 그의 兄 班固가 校書郞에 任命되어 어머니와 함께 洛陽으로 移住하였으나, 집안은 如前히 가난하여 班超는 官廳에서 文書를 베껴 주는 일을 하여 어머니를 奉養했다.
「어느 날, 班超는 官廳에서 文書를 베껴 쓰는 일을 하다가 문득 붓을 던져 버리고 嘆息했다. “大丈夫로서 이렇다 할 뜻과 方略이 없다면 마땅히 傅介子와 張騫을 본받아 異域에서 功을 세워 封侯의 자리를 얻어야지, 어찌 붓과 벼루 사이에서 오래 지낼 수 있겠는가.” 左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久勞苦, 嘗輟業投筆嘆曰, 大丈夫無他志略, 猶當效傅介子張騫, 入功異域以取封侯, 安能久事筆硯間乎. 左右皆笑之.)」
그 後 班超는 軍官이 되어 匈奴와 싸워 크게 이겼고, 西域에 出使해서는 무려 31年 동안이나 머물면서 匈奴의 支配를 받던 西域 國家들을 征服하고, 50如 個의 나라들과 關係를 改善하는 等, 漢나라의 勢力을 擴張하는 데 功을 세웠다.
이 이야기는 《後漢書 班超傳》에 나온다. 傅介子는 漢昭帝 때 西域의 龜玆와 樓蘭이 匈奴와 聯合하여 漢나라 官吏를 射殺하고 財物을 掠奪하자 大宛에 使者로 가 漢昭帝의 命을 받들어 樓蘭과 龜玆에게 責任을 묻고 匈奴의 使者를 죽이는 等의 功을 세운 사람이고, 張騫은 漢武帝의 命을 받고 西域에 가다가 匈奴에게 잡혀 10如 年間의 苦生 끝에 逃亡하여 온 사람으로, 실크로드를 開拓한 사람이다. ‘投筆從戎’은 ‘棄筆從戎’이라고도 한다. 唐나라 魏徵의 詩 述懷(出關이라고도 함)에 ‘投筆從戎’이란 成語를 利用한 「中原 땅에 처음 帝位 다툼이 일어나자, 붓을 던지고 戰爭에 나갔다.(中原初逐鹿, 投筆事戎軒.)」는 句節이 나온다.
13. 추고(推敲)
미는 것(推)과 두드리는 것(敲). 詩文의 字句를 여러 番 고치는 것을 말한다.
「賈道가 처음 科擧를 보러 서울에 가던 길에 하루는 나귀 등에서 ‘새는 못가에 있는 나무에 깃들이고 중은 달빛 아래 門을 두드린다.’라는 詩句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推’ 字를 쓸까 하다가 다시 ‘敲’ 字를 쓸까 하며 決定을 못 하고 나귀 위에서 때때로 손짓으로 밀거나(推) 두드리는(敲) 動作을 하니, 보는 사람마다 異常하게 생각했다. 때마침 京尹 벼슬에 있던 韓愈의 行次를 만났는데, 賈道는 그 行次 隊列의 第3列 안에까지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左右의 사람들이 賈道를 붙들고 韓愈의 앞에 끌고 갔다. 賈道는 詩句에 對한 이야기를 했다. 韓愈는 말을 세워놓고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賈道에게 ‘敲’ 字가 좋겠다고 말해 주었다. 두 사람은 고삐를 나란히 하고 돌아가 함께 詩를 論하며 여러 날을 함께 머무르며 親舊가 되었다.
(島初赴擧京師. 一日於驢上得句云, 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 始欲着推字, 又欲作敲字, 煉之未定, 遂於驢上吟哦, 時時引手作推敲之勢, 觀者訝之. 時韓愈吏部權京兆, 島不覺衝至第三節. 左右擁至尹前, 島具對所得詩句云云. 韓立馬良久, 謂島曰, 作敲字佳矣. 遂與幷轡而歸, 共論詩. 道留連累日, 與爲布衣之交.)」
이 이야기는 《劉公嘉話》를 引用한 《湘素雜記》와 《苕溪漁隱叢話前集》, 그리고 《鑒戒錄 賈忤旨》 等에 나오는데, 賈道가 ‘퇴(推)’ 字를 쓸까 ‘고(敲)’ 字를 쓸까를 골똘히 생각한 일에서 由來하여 ‘推敲’는 詩文의 字句를 고치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賈道의 ‘推敲’에 關한 이야기는 《唐詩紀事 題李凝幽居》에도 나오는데, 여기에는 詩의 全文이 실려 있다.
閑居少鄰竝 : 閑暇롭게 사니 함께하는 이웃도 드물고
草徑入荒園 : 풀숲 오솔길은 荒廢한 뜨락까지 通한다.
鳥宿池邊樹 : 새는 蓮못가 나무에 깃들이고
僧敲月下門 : 중은 달빛 아래 門을 두드린다.
過橋分野色 : 다리를 건너니 들판의 色깔도 나뉘고
移石動雲根 : 돌을 옮기니 구름의 뿌리가 움직인다.
暫去還來此 : 暫時 떠났다가 다시 이곳에 돌아오니
幽期不負言 : 그윽한 期約 말을 어기지나 말았으면
賈道(779∼843)는 字가 浪仙으로 河北省 范陽 사람이다. 여러 차례 科擧에 應試하였으나 失敗하고 중이 되었다가, 811年 洛陽에서 韓愈와 交流하면서 還俗하였다. 다시 벼슬길에 오르기를 希望하여 進士 試驗에 應試하였으나 及第하지 못하고, 837年에 四川 長江縣의 主簿가 되었고, 이어 四川 安岳縣 普州의 司倉參軍으로 轉職되었다가 病으로 죽었다. 作品 으로는 詩集 《賈浪仙長江集》(10券)이 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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