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ㅍ- 1 파경~ )
1. 파경(破鏡)
깨어진 거울. 이지러진 달을 比喩的으로 이르는 말. 夫婦가 因緣을 끊음
* 神異經의 太平廣記에
陳의 宮中 官吏였던 徐德言은 隋나라의 大軍이 쳐들어오자 아내에게 ‘當身은 奴隸가 되어 隋나라의 貴族에게 잡혀갈 것이니, 우리 證標로 이것을 나눠 가집시다. 當身은 來年 正月 대보름날, 長安의 길거리에서 팔도록 하시오.’하고는 거울을 꺼내 두쪽으로 깨뜨린(破)다음 나누어 가졌다.
果然 陳나라가 亡하고 아내는 長安으로 잡혀가 隋나라 貴族 楊素의 奴隸가 되었다. 이듬해 正月 대보름날, 徐德言은 長安의 길거리에서 老婆가 깨어진 거울을 팔고 있는 모습을 發見했다. 슬그머니 다가가 맞추어 보았더니 零落없는 아내의 거울이었다.
남의 집에 매인 몸이라 長安으로 갈수없어 보름날 한 老婆를 代身 내 보낸 後로 아내는 그때부터 食飮을 全閉하고 울기만 했다. 異常히 여긴 楊素가 事緣을 듣고 感動하여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었으며, 마침내 옛날처럼 幸福하게 살 수 있었다.
오늘날 破鏡은 本來 故事의 뜻과는 달리 夫婦間의 갈라섬을 意味하고 있다. 한便 龜鑑이란 말은 處身과 關聯하여 생겼다. 옛날 中國에서는 거북의 등을 불에 구워 갈라지는 금을 보고 吉凶을 占쳤다. 그것을‘龜’라 했는데, 龜는 거북의 모습을 위에서 본 그림이다.‘鑑’은 거울이 없던 時節 거울 役割을 했던 물그릇에 비춰진 모습이다. 그러므로 龜鑑이란 말은 거북과 거울에 나타난 兆斟이나 모습을 보고 自身을 바로 잡는다는 뜻이다. 이에 由來하여 오늘날 龜鑑은‘거울 삼아 本받을 만한 模範’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2. 파과지년(破瓜之年)
오이를 깨는 나이. ‘瓜’ 字를 破字하면 八 字가 둘이므로 二八 十六이 된다. 곧, 女子의 나이 16歲를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오이를 깬다는 뜻의 ‘破瓜’에서 오이가 女性을 比喩하는 말로 쓰여, 女子가 處女性을 잃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또는, 八八 六十四로 男子 나이 64歲를 가리켜, 벼슬에서 물러날 때를 말하기도 한다.
「東川 盧八座가 歌姬 한 사람을 보냈는데, 아직 16歲가 되지 아니하였는데도 玉피리에 能했다.
(獨東川盧八座送一歌姬, 未當破瓜之年, 亦以玉簫爲好)
* 范攄의 雲溪友議 韋皐에.
碧玉은 當年에 아직 16歲가 되지 아니하였는데 歌舞를 배워 諸侯의 집에 들어갔다.
(碧玉當年未破瓜, 學成歌舞入侯家)
* 陸遊의 無題 詩에
「風俗에서는 女子가 몸을 亡치는 것을 破瓜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瓜 字를 깨면 두 個의 八 字가 되는데 이는 二八 十六 歲를 말한다.
(俗以女子破身爲破瓜, 非也. 瓜字破之爲二八字, 言其二八十六歲耳.)」
* 淸나라 翟灝의通俗編에.
「破瓜를 어떤 사람은 첫 月經이 始作되었을 때라고 하며 오이를 깨면 紅潮가 보인다고 풀었는데 그렇지 않다. 大槪 瓜 字를 縱橫으로 깨면 두 個의 八 字가 된다.
(破瓜或解以爲月事初來, 如破瓜則見紅潮者. 非也. 蓋瓜縱橫破之成二八字.)」
* 淸나라 袁枚의 詩論 隨園詩話에
以上은 16歲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 境遇이고, 다음의 境遇는 女性의 첫 性交 經驗을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碧玉破瓜時 : 碧玉이 첫 經驗을 할 때
郎爲情顚倒 : 님은 情을 쏟아붓는다.
感君不羞赧 : 님의 마음 느껴 부끄러워하지 않고
廻身就郎抱 : 몸을 돌려 님의 품에 안겼네.
* 晉나라 孫綽의 情人碧玉歌에
「杜十娘은 13歲에 첫 經驗을 했는데, 只今 19歲이다. 7年 동안 얼마나 많은 王公貴族들이 거쳐 갔는지 알 수가 없다.
(那杜十娘自十三歲破瓜, 今一十九歲. 七年之內, 不知歷過了多少公子王孫.)」
* 警世通言의 杜十娘怒沉百寶箱에.
다음의 境遇에는 男子 나이 64歲를 말하고 있다.
功을 이룬 것은 破瓜年으로, 張洎(장계)는 64歲에 죽었다.
(功成當在破瓜年, 洎年六十四歲卒)
* 唐나라 呂巖(字는 洞賓)의 贈張洎詩 에
3. 파죽지세(破竹之勢) 破竹之势
대나무를 쪼개는 氣勢. 勢力이 强하여 敵을 거침없이 물리치고 쳐들어가는 氣勢, 或은 일이 거침없이 잘 풀리는 貌樣을 比喩
魏 나라의 司馬炎은 元帝를 廢한 뒤 265年 스스로 帝位에 올라 國號를 晉이라 했다. 그가 바로 武帝이다. 이제 魏 · 吳 · 蜀 三國 가운데 남은 것은 吳나라였다. 武帝는 鎭南大將軍 杜預 等에게 軍士를 주어 吳나라를 치게 했다. 279年, 杜預는 20萬 大軍을 거느리고 湖北의 江陵으로 進擊했고, 王濬은 水軍을 이끌고 長江을 거슬러 進擊했으며 王渾은 首都 建業으로 進擊했다. 다음 해인 280年 2月, 武昌을 攻略한 杜預의 軍隊는 王濬의 軍隊와 合流하여 戰列을 整備하고 向後의 攻擊 計劃에 對해 會議를 했다. 한 將帥가 곧 江물이 汎濫할 時期가 다가오고 또 언제 傳染病이 發生할지 모르니 一旦 後退했다가 겨울에 다시 攻擊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意見을 내었다. 그러자 杜預가 斷乎하게 말했다. 「“只今 우리 軍士들의 士氣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 대나무를 쪼개는 것에 比喩할 수 있다. 몇 마디가 쪼개지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을 대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져 다시 손 댈 곳조차도 없게 된다.
(今兵威已振, 譬如破竹. 數節之後, 皆迎刃而解, 無復著手處也.)”」
杜預는 곧바로 軍士를 再整備하여 吳나라의 都邑인 建業으로 進擊하여 單숨에 陷落시켰다. 吳王 孫晧는 손을 뒤로 묶고 수레에 棺을 싣고 降服해 왔다. 杜預는 吳나라를 平定한 功으로 當陽侯에 封해졌다. 杜預는 晩年에는 學者로서 學文과 著述에 힘을 기울여 春秋釋例, 左傳集解 等의 著書를 남겼다.
이 이야기는 晉書 杜預傳에 나오는데, 杜預의 말에서 ‘破竹之勢’가 由來하여 거침없이 일이 잘 풀리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勢如破竹’으로도 쓰며, 칼날이 닿으면 쪼개진다는 뜻의 ‘迎刃而解’라고도 한다. 많은 사람들(甚至於 中國人들까지도)이 ‘迎刃而解’를 ‘迎刀而解’로 쓰고 있는데, 아마 刃 字와 刀 字가 비슷하고, 뜻도 큰 差異가 없기 때문인 데다, 發音하기에 ‘迎刀而解’가 더 쉽기 때문인 것으로 推測된다.
(迎刃而解 y?ng r?n ?r ji?, 迎刀而解 y?ng d?o ?r ji?) 中國 大部分의 書籍에는 ‘迎刀而解’란 말은 실려 있지 않다.
4. 파부침주(破釜沈舟) 破釜沉舟
솥을 깨뜨리고 배를 가라앉히다. 살아 돌아갈 期約을 하지 않고 죽을 覺悟로 싸우겠다는 굳은 決意를 比喩
急激히 推進된 秦나라의 統一 政策과 大規模 土木工事 等으로 百姓들의 負擔이 加重되면서 民心이 動搖하기 始作하자, 秦始皇帝 末年에 極端的인 彈壓 政策이 始作되었다. 秦나라의 暴政을 견디다 못한 百姓들은 始皇帝의 죽음을 契機로 하여 여기저기서 들고일어났다.
一個 품팔이꾼이던 陳勝(陳涉)과 吳廣이 蜂起해 張楚를 세우고 秦나라에 抗拒하다가 失敗한 後, 楚나라의 貴族 出身인 項粱이 會稽郡守 殷通을 죽이고 그곳을 基盤으로 軍士를 일으켰다. 그리고 謀士 范增의 計策에 따라, 일찍이(BC299) 秦나라와 會盟을 하러 갔다가 秦나라에 抑留되어 結局은 돌아오지 못하고 客死하고 만 否運(비운) 의 懷王 (在位 BC328∼BC299)의 孫子인 熊心을 찾아내어 懷王으로 擁立하고 楚나라를 再建했다.
當時 邊方의 下級 官吏인 亭長에 不過했던 劉邦은 驪山陵(秦始皇의 陵) 工事에 動員되는 人夫들을 引率하고 가던 中, 脫走者가 速出하자 아예 人夫들을 解散시켜 버리고 自己 地域에서 小規模의 反亂을 일으켰다. 劉邦은 沛縣의 書記 蕭何와 獄吏 曹參, 그리고 개白丁 樊噲 等의 支持에 힘입어 沛縣(江蘇省) 를 接收하고 縣令으로 推戴되어 活躍하다가 項梁에게 加擔했다.
項梁은 章邯을 擊破하고 軍隊를 이끌고 定陶에 이르러 다시 秦나라 軍士를 깨뜨렸다. 項羽와 劉邦은 秦나라 軍隊와 雍丘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李由(李斯의 아들)의 목을 베었다. 項梁이 더욱 進軍을 가볍게 보고 驕慢한 氣色을 보이자 宋義가 諫했다. “戰爭에 이겨 將帥가 驕慢해지고 兵卒이 게을러지면 敗하게 됩니다.” 하지만 項梁은 듣지 않았다. 秦나라 二世皇帝가 軍隊를 모두 일으켜 章邯에게 보태 주자, 章邯이 楚軍을 쳐 定陶에서 크게 깨뜨리고 項梁을 죽였다.
章邯은 勝勢를 몰아 趙나라의 邯鄲을 擊破하고, 巨鹿을 包圍했다. 趙나라는 楚나라에 救援을 要請했다. 楚의 懷王은 宋義를 上將에, 項羽를 次將에, 范增을 末將으로 任命하여 5萬의 援兵을 派遣했다. 하지만 宋義는 安陽(山東省 曹縣)까지 와서 무려 46日 동안을 움직이지 않고 戰爭 狀況을 觀望만 하고 있었다. 趙나라 軍隊가 이기면 그 機會를 타서 함께 秦나라 軍隊를 擊破하고, 萬若 秦나라 軍隊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힘이 弱해져 있을 테니 그때 가서 秦나라 軍隊를 쳐도 된다는 計算이었다. 項羽의 생각은 달랐다. 秦나라 軍隊가 趙나라를 攻擊하는 사이 楚나라 軍隊가 秦나라 軍隊를 攻擊하여 안팎에서 協攻을 하는 形勢를 取해야 한다는 것이 項羽의 主張이었다.
「그런 사이 11月 中旬이 되자 兵士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만 갔다. 더 以上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項羽는 帳幕 안으로 들어가 宋義를 베고 軍隊를 모두 이끌고 黃河를 건너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깨뜨리고, 幕舍를 불태우고, 사흘치 糧食을 지니고서 士卒에게 죽음으로 싸우겠다는 意志를 보여 주었는데, 누구 하나 마음을 돌이키는 者가 없었다. 그리하여 秦나라 軍隊와 아홉 番 만나 싸워 크게 쳐부수고 王離를 사로잡았다. 이로써 楚나라 軍隊가 諸侯群의 으뜸이 되었고, 項羽는 비로소 諸侯의 上將軍이 되었으며, 諸侯가 모두 그의 所屬이 되었다.
(十一月, 項羽卽其帳中, 斬宋義, 乃悉引兵渡河, 皆沉船破釜甑, 燒廬舍, 持三日糧, 以示士卒必死. 無一還心. 於是, 與秦軍遇九戰大破之, 虜王離. 當是時, 楚兵冠諸侯, 於是始爲諸侯上將軍, 諸侯皆屬焉.)」
이 이야기는 史記 項羽本紀에 나오는데, 項羽가 軍士를 이끌고 黃河를 건너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깨뜨린 데서 由來하여 ‘破釜沈舟’는 죽을 覺悟를 하고 싸우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破釜沉船’, 或은 食糧을 버리고 배를 가라앉혔다는 뜻의 ‘棄糧沉船’ 이라고도 한다.
王離는 일찍이 項梁의 아버지 項燕을 죽인 秦나라의 將軍 王翦의 孫子이니, 項羽로서는 間接的이나마 할아버지의 怨讐를 갚은 셈이 된다.
5. 파부침주(破釜沈舟)
가마솥을 부수고 배를 沈沒시킨다. 곧 決死的이란 뜻
* 必死則生이라 했다. 죽기를 覺悟하고 싸움에 臨하면 살 수도 있다는 것으로 背水陣이나 비슷한 決死戰이다.
① 背水陣은
秦이 崩壞되고 天下가 無主空山일 때 漢의 劉邦을 도와 楚의 項羽를 쳤던 名將 韓信이 使用했던 兵法으로 일부러 江을 등지고 싸우도록해 물러나면 죽음뿐이니 活路를 뚫기 爲해서는 前進하며 싸우는 수 밖에 없도록하여 大勝을 거둔 戰術이었다.
② 破釜沈舟
項羽가 썼던 兵法이다.
秦의 運命이 風前燈火에 놓이자 各 地方에 蜂起가 일어났다.
秦의 將軍 章邯이 趙의 鉅鹿에게 包圍되자 秦의 隊長 陳餘가 項羽에게 救援兵을 要請하자 그가 軍을 끌고 戰場에 臨하였다.
麾下 兵卒이 모두 渡江하자 그는 破釜沈舟의 命令을 내리고 兵卒에게는 사흘分의 食糧만 주었다. 돌아갈 배도 없고 밥지을 솥도 없으니 오로지 싸워 이겨 虜獲하는 수밖에 없었다. 9番의 進退를 거듭하며 敵의 主力部隊를 壞滅시키고 戰勝을 거두었다.
6. 파천황(破天荒)
天地가 아직 열리지 않은 混沌 狀態인 天荒를 깨뜨리다. 이제까지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내거나 처음으로 일을 해낸 것을 比喩
「唐나라 荊州의 官吏들과 名望 있는 집안에서 해마다 擧人을 選拔해서 (中央의 試驗에)보냈지만 모두 落榜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地域을 天荒이라 했고, 選發되어 나간 사람을) 天荒解라고 불렀다. 그런데 유태(劉蛻)가 처음으로 荊州의 解로서 及第하자 (天荒을 깬 사람이 나왔다 해서) 破天荒이라고 불렀다.
(唐荊州衣冠藪澤, 每歲解送擧人, 多不成名, 號曰天荒解. 劉蛻舍人以荊解及第, 號爲破天荒.)」
이 이야기는 宋 孫光憲의 北夢瑣言 나오는데, 여기에서 由來하여 ‘破天荒’은 이제까지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내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當時에 劉蛻의 及第가 얼마나 話題가 되었는가 하면, 그때 荊南軍節度使이던 魏國公 崔鉉이 ‘破天荒錢’이라고 하여 70萬 錢을 劉蛻에게 보낼 程度였다. 劉蛻는 이 돈을 받지 않았다. ‘解’는 地方 試驗인 鄕試에 合格하여 中央의 會試에 應試할 資格을 갖춘 擧人을 말한다. 鄕試는 解試라고도 했다.
7. 패군지장(敗軍之將) 败军之将
싸움에 진 軍隊의 將軍. 싸움에 진 將軍은 勇氣가 무엇인지 말할 資格이 없다는 말이다.
楚霸王 項羽에게 漢中 땅으로 쫓겨난 劉邦이 陳倉 길로 隱密히 나와 中原을 奇襲한 것이 漢나라 元年 8月, 그러니까 BC206年인데, 그해 三秦을 平定하고, 다음 해인 漢나라 2年(BC205)에 魏나라 南쪽 땅을 차지했다. 그리고 韓王(殷王)을 擊破하고, 齊나라와 趙나라 軍士를 合쳐 함께 楚나라를 攻擊했다. 하지만 그해 4月, 彭城에서 楚나라 軍隊에 大敗하자 애當初 漢나라에 降服했던 諸侯나 將帥들이 모두들 다시 漢나라를 背叛하고 楚나라 쪽에 붙게 된다. 이제 漢나라는 項羽와 決戰이 重要한 것이 아니라 먼저 將軍의 手足이 된 諸侯들을 다시 我軍으로 만드는 일이 더 時急해진 것이다. 漢王 劉邦은 使者를 派遣하여 說得 作戰을 펴 보았으나 모두 失敗하고 말았다.
劉邦은 張耳를 보내 韓信과 함께 軍士를 이끌고 諸侯들을 치게 했다. BC204年, 韓信과 張耳는 2萬如 兵士를 거느리고 趙나라를 攻擊했다. 趙나라 王 歇과 成安君 陳餘는 20萬 精銳部隊를 井陘口에 集結해 놓고 敵을 맞이할 準備를 했다. 이때 廣武君 李左車가 陳餘에게 計策을 올렸다. “井陘(정형)으로 通하는 길은 幅이 좁아 수레 두 臺가 나란히 지나갈 수 없고, 말 탄 軍士도 列을 지어 지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한 길이 數百 里나 繼續되므로, 物資의 補給은 自然히 훨씬 뒤로 처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3萬의 軍士를 奇襲 部隊로 編成하여 저에게 주시면, 샛길로 가서 그들의 補給을 끊어 버리겠습니다. 當身은 도랑을 깊이 파고 壁을 높이 쌓아 굳게 지키며 敵과 對戰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敵은 나아가도 싸울 수 없고, 물러가려 해도 돌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 奇襲 部隊가 그들의 背後를 遮斷하고 敵에게 掠奪할 場所를 주지 않으면, 열흘이 채 못 되어 韓信과 張耳 두 將軍의 머리를 楚王 項羽의 麾下에 보내 드릴 수가 있게 됩니다. 부디 제가 말한 計策에 留意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當身은 두 將軍에게 捕虜가 되고 말 것입니다.”
陳餘는 元來가 선비였다. 그래서 恒常 正義의 軍隊를 標榜하여 남을 속이는 꾀라든가 奇發한 計策 같은 것을 쓰기를 꺼렸다. 陳餘는 “兵法에 ‘兵力이 열 倍가 되면 敵을 包圍하고 두 倍가 되면 나가 싸운다.’고 했소. 只今 韓信의 軍士는 말로는 數萬이 된다지만 實은 數千에 지나지 않소. 그것도 千 里나 되는 먼 곳에서 우리나라를 쳐들어오므로 지칠 대로 지쳤을 것이오. 只今 이만한 敵을 避하고 맞아 싸우지 않는다면 앞으로 큰 敵을 만났을 때는 어떻게 相對하겠소?
諸侯들이 우리나라를 怯쟁이로 깔보고 쉽사리 우리를 칠 거요.”라고 말하며 李左車의 計策을 默殺해 버렸다.
趙나라의 動向을 探知하기 爲해 풀어 놓은 諜子가 돌아와 李左車의 計策이 採擇되지 않았다는 事實을 報告했다. 韓信은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便, 크게 기뻐하며 果敢히 軍隊를 이끌고 井陘의 좁은 길로 내려가 井陘口에서 30里 떨어진 곳에 幕舍를 쳤다. 韓信은 먼저 가볍게 武裝한 騎兵 2千을 뽑아 各各 붉은 旗를 가지고 샛길로 나아가 趙나라 陣地를 바라보는 山속에 숨어있도록 했다. 이들의 任務는 趙나라 軍隊가 陣地를 비워 두고 거짓으로 敗走하는 漢軍을 뒤쫓으면 재빨리 趙나라 陣地로 뛰어들어 趙나라 旗를 뽑아 버리고 漢나라의 붉은 旗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兵士 1萬을 보내 江의 東쪽에 背水陣을 치도록 했다. 적은 人員으로 많은 敵을 相對하기 爲한 劇藥處方이었다. 趙나라 軍士들은 이것을 바라보고 크게 웃었다.
이튿날 새벽, 韓信과 張耳는 軍隊를 이끌고 趙나라 陣營으로 쳐들어갔다. 趙나라 軍隊는 陣門을 열어젖히고 漢나라 軍隊를 猛烈히 攻擊했다. 韓信의 軍隊는 暫時 激戰을 벌인 다음, 북과 旗를 버리고 거짓으로 江까지 退却하여 背水陣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部隊와 合流했다. 韓信의 豫想대로 趙나라 軍士는 本陣을 비워 두고 韓信의 軍隊를 뒤쫓았다. 漢나라의 軍士들은 더 以上 물러날 수 없음을 알고 죽을힘을 다하여 싸웠다. 한便, 山속에 숨어 때를 기다리던 2千 名은 이 機會를 틈타 一齊히 趙나라의 陣地로 달려 들어가 趙나라의 旗를 뽑아 버리고, 漢나라의 赤旗 3千如 個를 세웠다. 背水陣을 친 漢나라 軍隊의 猛烈한 抵抗으로 趙나라 軍隊는 싸움에 이기지 못하고 할 수 없이 陣地로 되돌아갔지만, 陣地의 城壁 위가 온통 붉은色의 漢나라 깃발뿐인 것을 보고, 漢나라가 벌써 趙나라의 將軍들을 모두 사로잡은 것으로 생각하여 精神을 잃고 달아나기 始作했다. 趙나라 將守들이 逃亡하는 軍士들의 목을 베며 督戰을 하였으나 달아나는 軍士들을 막을 方法이 없었다. 漢나라 軍隊는 趙나라 軍隊를 兩쪽에서 協攻하여 大破하고 軍士들을 捕虜로 잡았으며, 陳餘의 목을 베고 趙王 歇을 사로잡았다.
「韓信은 廣武君 李左車를 極盡히 禮遇하며 물었다. “北쪽으로 燕을 치고 東쪽으로 齊를 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功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廣武君 李左車가 辭讓하며 말했다. “싸움에서 敗한 將帥는 武勇을 말할 수 없고, 滅亡한 나라의 大夫는 나라를 存續시키는 일을 圖謀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只今 저는 敗亡한 捕虜에 不過한데, 어떻게 큰일을 꾀할 수 있겠습니까?” 韓信이 말했다. “百里奚가 虞에 있었을 때 虞나라는 亡했지만, 그가 秦나라에 있을 때에는 秦나라가 覇者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百里奚가 虞나라에 있을 때에는 어리석었다가 秦나라로 가서는 賢明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를 登用했는가 안 했는가, 그의 말을 받아들였는가 받아들이지 않았는가에 달렸던 것입니다. 萬若 成安君이 當身의 計策을 들었다면, 只今쯤은 내가 當身의 捕虜가 되었을 것입니다. 多幸히 當身의 計策을 쓰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當身에게 가르침을 請할 機會를 얻게 된 것입니다. 眞心으로 當身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니 辭讓하지 마십시오.”
(於是信問廣武君曰, 僕欲北攻燕, 東伐齊, 何若而有功. 廣武君辭謝曰, 臣聞敗軍之將, 不可以言勇, 亡國之大夫, 不可以圖存. 今臣敗亡之虜, 何足以權大事乎. 信曰, 僕聞之, 百里奚居虞而虞亡, 在秦而秦霸, 非愚於虞而智於秦也. 用與不用, 聽與不聽也. 誠令成安君聽足下計, 若信者亦已爲禽矣. 以不用足下, 故信得侍耳. 因固問曰, 僕委心歸計, 願足下勿辭.)」
李左車는 韓信에게 燕나라와 齊나라의 討伐 方法을 알려 주었다. 이 이야기는
* 史記 淮陰侯列傳에.
三秦은 關中 땅을 말한다. 天下를 爭覇하게 된 項羽는 BC206年 西楚를 建國하고, 스스로 楚覇王이라 稱했다. 이로써 秦나라는 秦始皇이 天下를 統一한 지 16年 만에 完全히 막을 내렸고, 天下는 項羽의 손아귀로 떨어진 듯 보였다. 楚覇王 項羽는 謀士 范增의 計策에 따라 楚懷王을 義帝로 擁立하고 18名의 諸侯王을 封했다. 그리고 亦是 范增의 計策에 따라 危險人物인 劉邦을 中原에서 永遠히 쫓아내기 爲해 劉邦을 漢王으로 封하고 漢中 땅을 더해 只今의 四川省에 該當하는 巴蜀 땅으로 보냈다. 그리고 劉邦이 漢中에서 中原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遮斷하기 爲해 길목에 該當하는 關中 땅을 나누어 秦나라에서 投抗한 將帥인 章邯을 雍王, 司馬欣을 塞王, 董翳를 翟王으로 各各 封하여 駐屯시킨 다음, 劉邦을 監視하고 그의 進出을 막으라는 任務를 주었다. 여기에서 由來하여 이곳을 三秦의 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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