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ㅎ- 1 하로동선~ )
1. 하로동선(夏爐冬扇) 夏炉冬扇
여름의 火爐와 겨울의 부채. 철에 맞지 않거나 쓸모없는 物件을 比喩하거나, 아무런 쓸모가 없는 말이나 才주를 比喩
「利로울 것 없는 才能을 바치고 보탬이 되지 않는 意見을 내며, 여름에 火爐를 올리고 겨울에 부채를 바치며, 얻고자 하지 않는 일을 하고 듣고자 하지 않는 말을 올리면서도 禍를 當하지 않는다면 큰 幸運이다.
(作無益之能, 納無補之說, 以夏進爐, 以冬奏扇, 爲所不欲得之事, 獻所不欲聞之語, 其不得禍, 幸矣)」
이 이야기는 王充의 《論衡 逢遇》에 나오는데, 여름에 火爐를 올리고 겨울에 부채를 바친다는 말에서 ‘夏爐冬扇’이 由來했으며, 철에 맞지 않거나 格에 맞지 않는 物建을 比喩하는 말로 쓰인다.
2. 하우불이(下愚不移)
어리석고 못난 사람은 언제나 그대로 있을 뿐, 發展하지 못한다.
* 論語 陽貨篇 17-2-4에. 論語(논어) 17. 陽貨(양화)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人性은 서로 가깝지만, 習慣이 서로 멀게 한다.”
人性이란 사람이 賦與받고 태어난 것이다. 習慣이란 태어난 後에 여러 가지 儀禮를 行하고 익히는 일이다. 사람은 天地의 氣를 갖추어 賦與받고 태어나 비록 도탑거나 엷은 差異가 있지만, 똑같이 氣를 賦與받았기 때문에 서로 가깝다. 알만한 나이에 이르러, 善한 親舊를 만나 서로 本받아 善을 行하고 惡한 親舊를 만나 서로 本받아 惡을 行하면, 善惡이 이미 달라지기 때문에 서로 멀다.
孔子 曰
“오직 聰明한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만이 바뀌지 않는다."
(唯上知與下愚不移)
“가장 聰明한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왜 바뀌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先生이 對答했다.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바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程子의 程伊川의 注釋 中,
“이른바 어리석은 者에는 두 種類가 있으니 自暴와 自棄이다. 사람이 참으로 善으로 스스로를 다스려 간다면 못 고치는 것이 없다. 비록 어둡고(昏) 어리석음(愚)이 至極하다 하여도, 모두 漸漸 갈고 닦아 나아 갈 수 있다. 오직 自暴 者는 막고 겨루어(拒)서 믿지 않고(拒之以不信), 自棄하는 者는 끊어지지(絶) 않는다.(絶之以不爲) 비록 聖人과 더불어 살아도 變化시켜 어리석지 않는 데로 들어오게 하지는 못한다. 仲尼 (孔子)가 말한 바의 下愚이다.”』
3. 하청난사(河淸難俟) 河清难俟
黃河가 맑아지기를 기다리기 어렵다. 아무리 기다려도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나, 期待할 수 없는 일을 比喩
春秋時代 小國인 鄭나라는 北方의 强國 晉나라와 南方의 强國 楚나라 等 大國의 틈바구니에서 나름대로의 生存 戰略을 펼치며 國家의 命脈을 維持하고 있었다. 그런데 周나라 靈王 7年 (BC565), 鄭나라는 楚나라의 屬國인 蔡나라를 侵攻하여 公子 燮을 捕虜로 잡아가면서 禍를 自招하고 말았다. 楚나라는 이를 自國에 對한 挑戰으로 看做하여 子囊에게 鄭나라를 攻擊하라고 命했다. 鄭나라에서는 卿大夫 여섯 名이 對策을 講究하기 爲한 會議를 열었는데, 晉나라에 援兵을 要請하자는 主張과, 楚나라와 講和하자는 主張이 半半으로 나뉘어 팽팽하게 맞섰다.
「이때 和親을 主張하던 子駟가 말했다. “周詩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黃河의 물이 맑기를 기다리지만 사람 壽命은 얼마나 되는가. 이렇게 저렇게 占을 치지만 그물에 얽힌 듯 갈피를 잡지 못하네.’ 于先 楚나라와 講和를 해서 百姓들을 危險에서 救하고 그 다음에 晉나라가 오면 따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子展欲待晉. 子駟曰, 周詩有之曰, 俟河之淸, 人壽幾何. 非云詢多, 職競作羅. 姑從楚, 以紓吾民. 晉師至, 吾又從之.)」
鄭나라는 子駟의 말에 따라 楚나라와 和親하여 危機를 謀免했다.
* 左傳 襄公 8年에 나온다.
여기에서 子駟가 黃河가 맑아지기를 기다린다는 句節을 引用한 것은, 晉나라의 援兵을 기다리는 것은 黃河가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不可能한 일이라는 것을 比喩的으로 說明한 것이다. ‘百年河淸’, 或은 黃河가 맑아지기를 百 年 동안 기다린다는 뜻의 ‘百年俟河淸’이라고도 한다.
4. 하필성문(下筆成文) 下笔成文
붓을 드리우면(붓으로 쓰기만 하면) 文章이 이루어진다. 글재주가 뛰어난 것을 이르는 말이다.
「陳思王 植은 字가 子建이다. 10如 歲에 이미 詩, 論 및 辭賦 數十萬 字를 외웠으며, 글才주도 뛰어났다. 어느 날 曹操(太祖)는 曹植이 쓴 文章을 보고 그 뛰어남에 놀라 물었다. “이것은 남을 시켜 代筆한 것이 아니냐?” 曹植이 무릎을 꿇고 對答했다. “제가 말을 하면 經論이고, 붓을 드리우면 文章이 이루어집니다. (아버지)面前에서 試驗을 해 보시면 아실 텐데 누구에게 代身 써 달라고 할 必要가 있겠습니까?” 마침 鄴에 銅雀臺를 새로 지었는데, 曹操가 모든 將帥와 아들들을 臺 위에 올라가게 하여 賦를 짓게 했다. 曹植은 그 자리에서 붓을 날려 賦를 完成했는데 아주 빼어났다. 曹操는 그의 才能이 아주 뛰어나다고 여겼다.
(陳思王植字子建. 年十歲餘, 誦讀詩論及辭賦數十萬言, 善屬文. 太祖嘗視其文, 謂植曰, 汝倩人邪. 植跪曰, 言出爲論, 下筆成章, 顧當面試, 柰何倩人. 時鄴銅雀臺新成, 太祖悉將諸子登臺, 使各爲賦. 植援筆立成, 可觀, 太祖甚異之.)」
* 三國志 · 魏書 任城陳蕭王傳에.
또 曹植은 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王粲을 높이 評價하여, 王仲宣誄에서 “文章은 봄꽃과 같고, 생각은 샘처럼 솟아오른다. 하는 말마다 읊조릴 만하고, 붓을 드리우면 作品이 된다.
(文若春華, 思若湧泉. 發言可詠, 下筆成篇.)”고 稱頌했다. ‘下筆成文’은 下筆成章, 下筆成篇이라고도 한다.
曹植의 代表的인 作品이 바로 앞의 이야기에서 지은 銅雀臺賦이다. 建安 15年, 曹操는 袁紹와 袁紹의 세 아들을 擊破한 後, 北으로 烏桓을 征伐하고 中國의 北方을 平定했다. 그리고 鄴을 首都로 定하고, 漳水의 河畔에 銅雀臺를 세웠다. 銅雀臺는 높이가 10丈에, 세 個의 樓臺로 이루어졌는데, 各 樓臺의 距離는 約 60步이고, 세 樓臺를 구름다리로 連結시켰다.
〈 銅雀臺賦〉는 《三國演義》에서도 引用했는데, 赤壁大戰 시 諸葛亮이 周瑜를 激發시켜 吳나라를 曹操와의 戰爭에 끌어들이기 爲해 〈 銅雀臺賦〉를 비틀어 利用했다. 元 內容 中에 “두 個의 樓臺를 左右에 세우니 玉龍臺와 金鳳臺라. 東西로 두 다리로 連結시키니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와 같다.
(立雙臺於左右兮, 有玉龍與金鳳. 連二橋於東西兮, 若長空之蝃蝀.)”라는 句節의 뒷부분인 ‘連二橋於東西兮, 若長空之蝃蝀.’을 “두 喬氏를 東南쪽에서 잡아와 아침저녁으로 함께 즐기리.(攬二喬於東南兮, 樂朝夕之與共.)”로 바꾸어 周瑜를 忿怒하게 만들었다. 勿論 이 이야기는 正史에 나오지 않는 虛構이다. 喬氏 姉妹는 各各 孫策과 周瑜의 夫人이다.
5. 하해불택세류(河海不擇細流)
河海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는다. 河水<黃河>와 바다는 작은 물줄기까지도 가리지 않으므로 그같이 깊어질 수 있었다는 말. 海不讓水도 비슷한 말이다.
뒷간의 쥐가 되기는 싫어 楚나라 시골官吏를 집어던지고 荀卿 (荀子)을 찾아가 帝王學을 배운 李斯가 秦나라에 와 秦王 (後에 秦始皇)과 丞相 呂不韋의 눈에 들어 낮은 자리(卑賤之位)를 免하고 出世 길에 들어선 李斯 (字 通古, 楚上蔡人)가 秦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宗室 사람들과 大臣들이 秦나라 사람을 除外한 다른 諸侯國의 臣下들은 믿을 수가 없으니 쫓아내야 한다는 ‘逐客’의 上疎를 秦始皇 (嬴政, 中國 最初의 皇帝, 秦나라 第31代 君主, B.C. 259年 - B.C. 210年, 在位 B.C. 246年 - B.C. 210年, 名 政, 趙나라 邯鄲人)에게 올렸다.
李斯는 自身도 그 名單에 包含된 事實을 알고 秦始皇에게 上秦皇逐客書라는 上疎文을 올렸다.
(秦宗室大臣皆言秦王曰:「諸侯人來事秦者,大抵為其主游間於秦耳,請一切逐客。」李斯議亦在逐中。斯乃上書曰)
“臣이 듣건대 官吏들 中에는 外國 出身 人事들을 쫓아낼 것을 發議한 사람이 있다는 데, 제 생각으로는 잘못된 일이라 여깁니다.
옛날 穆公 (秦나라 第9代 君主, 嬴任好, B.C. 659年 - B.C. 621年)은 선비들을 求한 끝에 西쪽에서는 戎 땅에서 由余를 求하였고, 東쪽에서는 宛 땅에서 百里奚를 얻었으며, 宋나라에서는 蹇叔을 마중해 왔고, 晉나라로부터는 邳豹와 公孫支를 데려왔었습니다. 이 다섯 사람은 秦나라 出身이 아닙니다마는 穆公은 그들을 任用하여 二十 國을 合倂 시켰고, 마침내는 西戎의 覇者가 되었었습니다.
孝公 (秦나라 第25代 君主, B.C. 381年 - B.C. 338年, 在位 B.C. 361年 - B.C. 338年, 姓 嬴, 名 渠梁, 獻公의 아들)은 商鞅 (秦나라 政治家, B.C. 390年 - B.C. 338年, 公孫鞅, 姓 姫, 氏 公孫, 名 鞅, 別稱 衛鞅, 號 商君, 衛나라 庶孽公子)의 法을 應用하여 風俗을 바로잡고 百姓들을 잘살게 하고 나라는 富强케 하여 百姓들은 부림을 當하는 것을 즐기고 諸侯들은 親해지고 服從케 되었었습니다. 그리고 楚나라와 魏나라의 軍隊를 쳐부수고 千里의 땅을 더 넓히어 只今까지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强하게 만들었습니다.
惠王 (B.C. 354年 - B.C. 311年, 在位 : B.C. 337年 - B.C. 311年, 諡號 惠文王, 別稱 惠王, 惠文君, 姓 嬴, 氏 趙, 名 駟, 秦孝公의 아들)은 張儀 (B.C. ? - B.C. 309年, 魏人)의 計策을 使用하여 韓나라 三川의 땅을 빼앗고 西쪽으로는 巴蜀 땅을 合倂하였으며, 北쪽으로는 上郡을 거둬들이고 南쪽으로는 漢中 땅을 빼앗았으며, 여러 南夷들을 合倂시키고 언영(鄢郢)을 制壓하였으며, 東쪽으로는 成皐의 險한 地形에 依支하고 肥沃한 땅을 떼어내게 함으로써 마침내는 六國의 合從策을 無散시키어 그들로 하여금 西쪽으로 向하여 秦나라를 섬기도록 하였으니, 그 功勞는 只今까지 惠澤이 미치게 하고 있습니다.
昭王 (B.C. 324年 - B.C. 251年, 在位 B.C. 306年 - B.C. 251年)은 范雎 ( 魏나라 辯說家, B.C. ? - B.C. 255年, 字 叔, 范雎․范且․范叔․范睢라고도 한다.)를 登用하여 宰相인 穰侯 魏冉을 罷免시키고 華陽君 芋戎을 쫓아내어 秦나라 王室을 强하게 하고 個人的인 집안의 勢力을 막았으며, 諸侯들을 蠶食하여 秦나라로 하여금 帝王의 大業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이들 네 임금은 모두 外國 出身 人事들의 功勞에 依支하였던 것입니다. 이로써 본다면 外國 出身 人事들이 秦나라에 무엇을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전날 萬若에 이 네 임금들이 外國 出身 人事들을 물리치고 나라 안에 들여놓지 않고, 이들을 멀리하고 登用하지 않았더라면 이는 秦나라로 하여금 富하여지고 利롭게 되는 實利를 갖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며, 秦나라는 强大하다는 名聲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臣聞吏議逐客하니 竊以爲過矣니이다. 昔者에 繆公求士할새 西取由余於戎하고 東得百里奚於宛하고 迎蹇叔於宋하고 求邳豹公孫支於晉하니이다. 此五子者는 不産於秦이로대 而繆公用之하사 幷國二十하여 遂覇西戎하니이다. 孝公用商鞅之法하여 移風易俗하여 民以殷盛하며 國以富強하여 百姓樂用하며 諸侯親服하고 獲楚魏之師하여 擧地千里하여 至今治強하니이다. 惠王用張儀之計하여 拔三川之地하고 西幷巴蜀하고 北取上郡하고 南取漢中하고 包九夷制鄢郢하고 東據成皐之險하고 割膏腴之壞하고 遂散六國之從하여 使之西面事秦하여 功施到今하니이다. 昭王得范雎하사 廢穰侯逐華陽하고 彊公室杜私門하며 蠶食諸侯하여 使秦成帝業하시니이다. 此四君子는 皆以客之功이니이다. 由此觀之컨대 客何負於秦哉리오? 向使四君으로 郤客而不內하고 踈士而不用이런들 是는 使國無富利之實이오 而秦無彊大之名也리이다.)
只今 陛下께서는 崑崙山의 玉과 隨와 和의 보배를 갖고 계시며, 明月珠를 드리우고, 太阿劍을 차시며, 纖離馬를 타시며 翠鳳旗를 세우시며, 靈鼉鼓를 세우시니 이런 좋은 것 中에 秦나라에서 生産되는 것은 하나도 없는데도 陛下께서 그것을 좋아하시는 것은 어찌해서 입니까?
반드시 秦나라에서 生産된 것만 좋다하신다면, 夜光璧으로 朝廷을 꾸미지 못하며, 犀象器를 愛護하지 못하며, 鄭나라 衛나라의 女人들로 後宮을 채우지 못하며, 駿馬로 馬廐間을 채우지 못하며, 江南의 金錫을 使用하지 못하며, 西蜀의 丹青으로 꾸미지 못합니다.
또한 後宮을 꾸미고 陳列하며 마음을 즐겁게 하고 耳目을 기쁘게 하는 것들이 반드시 秦나라에서 生産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면, 宛珠의 비녀와 傅璣의 귀걸이, 阿縞의 옷, 錦繡의 裝飾을 主上께 드릴 수 없으며 아름다운 趙나라 女人을 곁에 세울 수 없습니다.
저 甕을 치고 缶를 두드리며 箏을 타고 허벅지를 두드리며 노래하여 耳目을 즐겁게 하는 것만이 本來 秦나라의 音樂이요, 鄭衛의 音樂과 昭虞와 象武는 다른 나라의 音樂이거늘 버리지 않고 演奏하게 하는 것은 어찌해서 입니까?
뜻을 欣快하게 하는 것을 앞에 놓고 보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只今 사람을 쓰는 것은 그렇지 않아서, 可否를 묻거나 曲直을 가리지도 않고서 秦나라 사람이 아닌 者는 떠나가게 하고 손님들은 내 쫓으시려 하시니
(今取人則不然. 不問可否, 不論曲直, 非秦者去, 為客者逐)
그렇다면 重視하는 것은 女色과 音樂과 朱玉이요, 輕視하는 것은 人民에 있는 것이니, 이는 天下를 統治하고 諸侯를 다스리는 方策이 아닙니다.
(今陛下致昆山之玉하며 有隨和之寶하며 垂明月之珠하며 服太阿之劍하며 乘纖離之馬하며 建翠鳳之旗하며 樹靈鼉之皷하시니 此數寶者는 秦不生一焉이어늘 而陛下說之는 何也니까?
必秦國之所生然後可인댄 則是夜光之璧이 不飾朝廷이오 犀象之器가 不爲玩好요 鄭衛之女가 不充後宮이오 而駿良駃騠가 不實外廐요 江南金錫이 不爲用이오 西蜀丹靑이 不爲采며 所以飾後宮充下陳하여 娛心意說耳目者가 必出於秦然後可인댄 則是宛珠之簪과 傅璣之耳와 阿縞之衣와 錦繡之飾이 不進於前이오 而隨俗雅化하여 佳冶窈窕趙女가 不立於側也리이다. 夫擊甕叩缶하고 彈箏搏髀而歌呼嗚嗚하여 快耳目者는 眞秦之聲也요 鄭衛桑間韶虞象武者는 異國之樂也니이다. 今棄擊甕叩缶而就鄭衛하며 退彈箏而取韶虞하니 若是者는 何也니이까? 快意當前하여 適觀而已矣니이다.
今取人則不然하니 不問可否하며 不論曲直하고 非秦者去하며 爲客者逐하니 然則是所重者는 在乎色樂珠玉이오 而所輕者는 在乎人民也니이다. 此非所以跨海內하고 制諸侯之術也니이다.)
臣이 듣건대 땅이 넓은 나라는 穀食이 많고 나라가 크면 人口가 많으며, 軍隊가 强한 나라는 軍士들이 勇敢하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泰山은 흙을 外部에 讓步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巨大해질 수가 있는 것이고, 黃河와 바다는 가는 물줄기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물이 깊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王者는 여러 사람들을 물리치지 않음으로써 그의 德을 밝힐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은 四方을 가리지 않고 모두 그의 땅이 되고, 사람이라면 다른 나라를 따지지 않고 모두 그의 臣下가 되면 사철 언제나 充實하고 아름답게 되고 鬼神도 그에게 福을 내려주게 됩니다. 이것이 옛날 五帝와 三代의 임금들에게는 敵이 있을 수 없었던 根據입니다.
只今 그러나 百姓들을 버리어 敵國의 資産이 되게 하고, 다른 나라 出身 人事들을 물리침으로써 다른 諸侯들의 覇業을 돕고, 天下의 선비들로 하여금 모두가 물러나며 敢히 西쪽 秦나라로 向하지 않고 발을 싸매 놓은 듯이 秦나라로 들어오지 않게 만들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敵에게 武器를 빌려 주고 도둑에게 糧食을 대어 주는 것이나 같은 일입니다. 物件 中에도 秦나라에서 나지 않는 것이면서도 보배가 될 만한 것이 많고, 선비 中에서 秦나라 出身이 아니면서도 忠誠을 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只今 外國 出身 人事들을 내쫓음으로써 敵國에 보탬이 되게 하고 百姓들을 버림으로써 怨讐에게 利益이 되게 한다면 나라 안은 自然히 虛하게 되고 밖으로는 諸侯들에게 怨恨만을 지니게 할 것입니다. 그 나라가 危殆롭지 않게 되려 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臣聞地廣者粟多하고 國大者人衆하고 兵強則士勇이라. 是以泰山不讓土壤이니 故로 能成其大하고 河海不擇細流라 故로 能就其深이니이다. 王者不卻衆庶라 故로 能明其德이니이다. 是以地無四方하며 民無異國하여 四時充美하고 鬼神降福하나니 此五帝三王之所以無敵也니이다.
今乃棄黔首하여 以資敵國하고 郤賓客하여 以業諸侯하여 使天下之士로 退而不敢西向하고 裹足不入秦하니 此所謂藉毬兵而齎盜糧者也니이다. 夫物不産於秦이로대 可寶者多하고 士不産於秦이로대 願忠者衆이어늘 今逐客以資敵國하고 損民以益讎하여 內自虛而外樹怨於諸侯하니 求國無危라도 不可得也리이다.)”
(臣聞吏議逐客,竊以為過矣。昔繆公求士,西取由餘於戎,東得百里奚於宛,迎蹇叔於宋,來丕豹、公孫支於晉。此五子者,不產於秦,而繆公用之,並國二十,遂霸西戎。孝公用商鞅之法,移風易俗,民以殷盛,國以富彊,百姓樂用,諸侯親服,獲楚、魏之師,舉地千里,至今治彊。惠王用張儀之計,拔三川之地,西並巴、蜀,北收上郡,南取漢中,包九夷,制鄢、郢,東據成皋之險,割膏腴之壤,遂散六國之從,使之西面事秦,功施到今。昭王得范睢,廢穰侯,逐華陽,彊公室,杜私門,蠶食諸侯,使秦成帝業。此四君者,皆以客之功。由此觀之,客何負於秦哉!向使四君卻客而不內,疏士而不用,是使國無富利之實而秦無彊大之名也。今陛下致昆山之玉,有隨、和之寶,垂明月之珠,服太阿之劍,乘纖離之馬,建翠鳳之旗,樹靈鼉之鼓。此數寶者,秦不生一焉,而陛下說之,何也?必秦國之所生然後可,則是夜光之璧不飾朝廷,犀象之器不為玩好,鄭、衛之女不充後宮,而駿良駃騠不實外廄,江南金錫不為用,西蜀丹青不為采。所以飾後宮充下陳娛心意說耳目者,必出於秦然後可,則是宛珠之簪,傅璣之珥,阿縞之衣,錦繡之飾不進於前,而隨俗雅化佳冶窈窕趙女不立於側也。夫擊甕叩缶彈箏搏髀,而歌呼嗚嗚快耳者,真秦之聲也;鄭、衛、桑間、昭、虞、武、象者,異國之樂也。今棄擊甕叩缶而就鄭衛,退彈箏而取昭虞,若是者何也?快意當前,適觀而已矣。今取人則不然。不問可否,不論曲直,非秦者去,為客者逐。然則是所重者在乎色樂珠玉,而所輕者在乎人民也。此非所以跨海內制諸侯之術也。
臣聞地廣者粟多,國大者人眾,兵彊則士勇。是乙太山不讓土壤,故能成其大;河海不擇細流,故能就其深;王者不卻眾庶,故能明其德。是以地無四方,民無異國,四時充美,鬼神降福,此五帝、三王之所以無敵也。今乃棄黔首以資敵國,卻賓客以業諸侯,使天下之士退而不敢西向,裹足不入秦,此所謂「藉寇兵而齎盜糧」者也。夫物不產於秦,可寶者多;士不產於秦,而原忠者眾。今逐客以資敵國,損民以益讎,內自虛而外樹怨於諸侯,求國無危,不可得也。)
이에 秦나라 임금이 逐客의 令을 取訴하고 李斯를 復職시켰다.
(秦王乃除逐客之令, 復李斯官)
* 史記 第87卷 李斯列傳에.
6. 학철부어(涸轍鮒魚)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있는 붕어라는 뜻. 處地가 매우 多急하거나 곤궁함을 比喩한 말.
* 莊子 外物篇에
中國 戰國時代, 無爲自然說을 主張한 莊子의 이야기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拘束되지 않고 自由로운 삶을 推求하였기에 王侯에게 무릎끓어 安樂한 生活을 營爲하기 보다는 , 스스로 自由로운 삶을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經濟的으로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끼니를 잇기도 어려운 處地가 되자, 할 수 없이 食貸를 빌리고자 監河侯를 찾아갔다.
그런데 監河侯는 親舊의 付託을 딱 잘라 拒絶할 수 없어서 핑계를 댔다.
"한 2,3日 있으면 稅金이 올라오는데 그때 내가 金 三百을 빌려줌세."
이에 火가난 莊子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이리로 오는 途中,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리의 고인 물 속에서 붕어(涸轍鮒魚)가 나를 부르지 않겠나,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自己에게 물 몇盞만 떠다가 부어 달라는 것이었네,
그런데, 내가 귀찮아서 2,3日 後에 내가 吳나라로 해서 越나라로 遊說를 떠나는데, 그때 내가 가는길에 西江의 맑은 물을 잔뜩 떠다 줄테니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지"
"그랬더니 붕어가 火를 내며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2,3盞의 물만 있으면 되는데, 當身이 기다리라고 하니 나는 틀렸소, 나중에 乾魚物廛에서 나의 屍體나 찾으시오' 라고 말하고 눈을 감더군"
이에서 由來된 말이 涸轍鮒魚다 .
處地가 아주 急迫한 狀況일때 쓰는 말로, 旣往에 도와 주려면 바로 도와주는 것이 가장 좋은일일 것이다
7. 감단지몽(邯鄲之夢)
한단의 꿈이라는 뜻. 전국시대 조나라의 도읍지였던 ‘邯鄲(한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감단지몽’이 아니라 ‘한단지몽(한단지보)’으로 읽는 것이 옳다는 설명이 제시된다.
唐나라 玄宗때의 이야기이다. 道士 呂翁이...
邯鄲 河北省內의 한 酒幕에서 쉬고 있는데, 行色이 초라한 젊은이가 옆에 와 앉더니 山東에 사는 盧生이라며 身世 恨嘆을 하고는 졸기 始作했다.
呂翁이 보따리 속에서 兩쪽에 구멍이 뚫린 陶磁器 베개를 꺼내 주자 盧生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
盧生이 꿈속에서 漸漸 커지는 그 베개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 보니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盧生은 崔氏로서 名門인 그 집 딸과 結婚하고 科擧에 及第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順調롭게 昇進했다.
京兆尹(서울을 다스리는 으뜸 벼슬)을 거쳐 御史大夫 兼 吏部侍郞에 올랐으나
宰相이 妬忌하는 바람에 端州刺史로 左遷되었다.
3年 後 戶部尙書로 朝廷에 復歸한 지 얼마 안 되어 마침내 宰相이 되었다.
그 後 10年間 盧生은 皇帝를 잘 輔弼하여 太平聖代를 이룩한 名宰相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賊으로 몰렸다.
邊方의 將軍과 謀叛을 꾀했다는 것이다.
盧生은 捕縛 當하는 자리에서 嘆息하여 말했다.
“내 故鄕 山東에서 땅뙈기나 부쳐먹고 살았더라면 이런 抑鬱한 陋名은 쓰지 않았을 텐데, 무엇 때문에 애써 벼슬길에 나갔는지 모르겠다. 그 옛날 누더기를 걸치고 邯鄲의 거리를 걷던 때가 그립구나. 하지만, 이제 와서 後悔한들 무슨 所用이 있겠는가…….”
그는 칼을 들어 自決하려 했지만 아내와 아들이 말리는 바람에 未遂에 그쳤다. 盧生과 함께 잡힌 사람들은 모두 處刑 當했으나 그는 宦官이 힘써 준 德分에 死刑을 免하고 邊方으로 流配되었다.
數年 後 冤罪임이 밝혀지자 皇帝는
盧生을 召喚하여 中書令을 除授한 뒤 燕國公에 冊封하고 많은 恩寵을 내렸다.
그 後 盧生은 모두 權門勢家와 婚姻하고 高官이 된 다섯 아들과 열 孫子를 거느리고 幸福한 晩年을 보내다가 皇帝의 御醫가 지켜보는 가운데 80年의 生涯를 마쳤다.
盧生이 깨어 보니 꿈이었다.
옆에는 如前히 呂翁이 앉아 있었고 酒幕집 主人이 짓고 있는 기장밥도 아직 다 되지 않았다.
盧生을 바라보고 있던 呂翁은 웃으며 말했다.
“人生이란 다 그런 것이라네.”
盧生은 呂翁에게 恭遜히 作別 人事를 告하고 邯鄲을 떠났다.
8. 한마지로(汗馬之勞) 汗马之劳
말이 땀투성이가 되는 勞苦. 戰爭에서 세운 큰 功勞를 比喩
韓非子는 學者, 論客, 俠士, 側近, 商工人 等 다섯 部類의 사람들을 나라를 좀먹는 벌레와 같은 存在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五蠹’라고 稱했다.
「學者는 先王들의 道理라고 하며 仁義를 憑藉하여 겉모습을 華麗하게 꾸미고 巧妙한 말솜씨로 當世의 法을 迷惑케 하고 君主의 마음을 混亂하게 한다. 옛것을 말하는 者들은 거짓말과 奸邪한 稱頌으로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 自身의 私利를 이루고, 社稷의 利益을 내버린다. 칼을 차고 다니는 者들은 무리를 모아 自身의 節槪와 志操를 지키며 自身의 이름을 드러내고, 나라에서 禁하는 法令을 어긴다. 君主의 側近에 있는 者들은 自身의 집에 私財를 쌓아 가며 온갖 賂物을 다 받고 權勢 있는 者들의 請託은 들어주면서도, 戰爭터에서 말에게 땀을 흘리게 하며 수고한 사람들의 功積은 물리쳐 버린다. 장사꾼들과 技術者들은 形便없는 物件을 만들고 좋지 않은 物件들을 사 모아 두었다가 때를 기다려 農夫들의 利益을 가로챈다. 이 다섯 部類의 사람들은 나라의 좀이어서 君主가 이 다섯 部類의 좀 같은 者들을 除去하지 않고 正道를 지키는 志士를 扶養하지 않는다면, 天下에 敗亡하는 나라나 滅亡하는 王朝가 생기는 것은 當然한 일이다.
(其學者, 則稱先王之道以籍仁義, 盛容服而飾辯說, 以疑當世之法, 而貳人主之心. 其言古者, 爲設詐稱, 借於外力, 以成其私, 而遺社稷之利. 其帶劍者, 聚徒屬, 立節操, 以顯其名, 而犯五官之禁. 其患御者, 積於私門, 盡貨賂, 而用重人之謁, 退汗馬之勞. 其商工之民, 修治苦窳之器, 聚弗靡之財, 蓄積待時, 而侔農夫之利. 此五者, 邦之蠹也. 人主不除此五蠹之民, 不養耿介之士, 則海內雖有破亡之國, 削滅之朝, 亦勿怪矣)」
이 이야기는 《韓非子 五蠹》에 나오는데, 말에게 땀을 흘리게 하며 수고했다는 말에서 ‘汗馬之勞’가 由來했다. ‘汗馬功勞’라고도 한다.
9. 한우충동(汗牛充棟) 汗牛充栋
소가 땀을 흘리고 대들보까지 가득 차다. 冊을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고 집에 쌓으면 大들보까지 닿는다는 뜻으로, 藏書가 많은 것을 比喩
「孔子께서 《春秋》를 지은 지 1,500年이 되었고, 《春秋傳》을 지은 사람이 다섯 사람인데, 只今 그中 세 個의 傳이 쓰인다. 竹簡을 잡고 勞心焦思하며 注釋을 단 學者들이 千 名에 達한다. 그들은 性品이 뒤틀리고 굽은 사람들로, 말로써 서로 攻擊하고 숨은 일을 들추어내는 者들이었다. 그들이 지은 冊을 집에 두면 房에 가득 차고, 밖으로 내보내면 소와 말이 땀을 흘릴 程度이다. 孔子의 뜻에 맞는 冊이 숨겨지고, 或은 어긋나는 冊이 世上에 드러나기도 했다. 後世의 學者들은 늙음을 다하고 氣運을 다하여 左顧右眄해 보아도 그 根本을 얻지 못하니, 그 배운 것에만 專一하여 서로 다른 바를 誹謗하고, 말라비틀어진 竹簡(오래된 典籍)으로 무리를 삼고, 썩은 뼈(이미 죽은 者)를 지켜 父子가 서로 相對를 다치고 죽게 하고, 임금과 臣下가 非難하고 어그러지기에 이른 者가 以前 世上에는 많이 있었다. 甚하도다. 聖人의 뜻을 알기가 어렵구나.
(孔子作春秋, 千五百年, 以名爲傳者五家, 今用其三焉. 秉觚牘, 焦思慮, 以爲論註疏說者百千人矣. 攻訐狠怒, 以詞氣相擊排冒沒者, 其爲書, 處則充棟宇, 出則汗牛馬. 或合而隱, 或乖而顯. 後之學者, 窮老盡氣, 左視右顧, 莫得而本, 則專其所學, 以訾其所異, 黨枯竹, 護朽骨, 以至於父子傷夷. 君臣詆悖者, 前世多有之. 甚矣, 聖人之難知也.)」
이 글은 柳宗元의 唐故給事中皇太子侍讀陸文通先生墓表의 一部로, 孔子가 春秋를 지은 本來의 意圖는 把握하지 못한 채, 自己의 생각만 主張하는 者들이 쓴 冊이 넘쳐 나는 것을 慨嘆한 글이다. 이 글에 나오는 ‘充棟宇’와 ‘汗牛馬’가 合해져서 ‘汗牛充棟’이 되었다.
孔子의 《春秋》를 解釋한 이들로 左氏, 公羊, 穀梁, 鄒氏, 夾氏의 5家가 있었으나, 鄒氏와 夾氏 失傳되고, 公羊高의 《公羊傳》, 穀梁赤의 《穀梁傳》, 左丘明의 《左傳》이 傳하는데, 이를 ‘春秋三傳’이라 한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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