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ㅎ- 3 해의주식~ )
17. 해의추식(解衣推食)
옷을 벗어 주고 밥을 나누어 주다. 남에게 각별(各別 恪別)히 親切하게 對하는 것을 比喩
韓信이 漢王 劉邦의 命을 받아 齊나라를 치러 가는 途中, 劉邦의 命을 받은 역이기(酈食其)가 세 치 혀로 齊나라를 降伏시켰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齊나라 征伐을 中止하려고 했다. 이때 辯士인 괴통(蒯通)이 韓信에게 齊나라를 치도록 說得했다. 비록 漢王이 密使 酈食其를 보내 齊나라의 降服을 받아 내긴 했지만 韓信에게 齊나라 攻擊을 中止하라는 命令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과, 한낱 儒生에게 功을 넘길 수 없다는 것이 그 理由였다. 韓信은 蒯通의 말을 따라 齊나라를 攻擊했다. 한便, 齊나라에서는 酈食其의 說得에 넘어가 漢나라에 降服하기로 하고, 軍士를 거두고 酈食其를 잘 接待했다. 韓信은 그 틈을 타 齊나라를 襲擊하여 首都 臨淄까지 肉薄해 들어갔다. 齊王 田廣은 酈食其가 自己를 속였다고 생각하고 酈食其를 삶아 죽여 버리고, 高密로 달아나 楚나라 項羽에게 使臣을 보내 救援兵을 要請했다. 項羽는 용저(龍且)를 大將으로 하여 20萬 軍士를 派遣하여 齊나라를 救하게 했다.
韓信의 軍隊와 龍且가 이끄는 齊 · 楚 聯合軍은 濰水를 사이에 두고 對峙했다. 韓信은 夜陰을 틈타 部下들에게 모래주머니 1萬 個를 만들어 江 上流를 막도록 했다. 그러고는 軍隊를 이끌고 江을 半쯤 건너가서 龍且의 軍隊를 攻擊하다가 거짓으로 敗한 척하며 돌아서서 달아났다. 平素 韓信을 怯쟁이라고 無視하며 驕慢을 떨던 龍且는 韓信을 追擊하기 始作했다. 龍且의 軍士들이 半쯤 건너왔을 때 韓信이 막아 놓았던 모래주머니를 터뜨리게 했다. 큰물이 갑자기 쏟아져 내리자 이미 건너간 軍士와 아직 건너지 못한 軍士가 兩分되고 말았다. 龍且가 漢軍에게 죽자 龍且의 軍隊는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고, 齊王 田廣도 달아났다. 韓信은 이들을 追擊하여 齊王과 楚나라 軍士들을 모두 사로잡고, 齊나라를 平定했다.
龍且가 韓信에게 敗해 戰死하자 項羽는 두려운 나머지 武涉을 韓信에게 보냈다. 武涉이 말했다. “天下가 오랫동안 秦나라의 시달림을 받았기 때문에 힘을 合쳐 秦나라를 쳤습니다. 秦나라가 滅亡을 當한 뒤 各其 그 功積에 따라 땅을 나눠 王의 자리에 앉고 兵士들을 故鄕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劉邦은 다시 軍士를 일으켜 南의 땅을 빼앗으며 諸侯들의 軍士를 거두어 楚나라를 쳤습니다. 天下를 통째로 집어삼키기 前에는 軍士를 거두지 못하겠다고 끝없는 貪慾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劉邦은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 只今 足下께서는 劉邦을 爲해 모든 힘을 다 바치고 계십니다만 언젠가는 그에게 잡히고 말 것입니다.”
「韓信은 그의 提案을 拒絶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項羽를 섬길 때 官職은 郎中에 不過했고, 地位는 執戟에 지나지 않았소. 進言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고 計策을 올려도 쓰지 않았소. 그러므로 楚나라를 背信하고 漢나라에 歸復한 것이오. 漢王은 나에게 上將軍의 印綬를 주었고 數萬 大軍을 統率하도록 해 주었소. 옷을 벗어 나에게 입게 해 주고 밥을 나누어 먹게 해 주었소. 그리고 나의 建議를 듣고 計策을 써 주었소. 그런 까닭에 내가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오. 다른 사람이 나를 깊이 믿어 주는데 내가 背信하는 것은 祥瑞롭지 못한 일이오. 비록 죽을지언정 마음을 바꾸지 않겠소. 나를 爲해 項王에게 謝過해 주기 바라오.”
(韓信謝曰, 臣事項王, 官不過郎中, 位不過執戟, 言不聽, 畫不用, 故倍楚而歸漢. 漢王授我上將軍印, 予我數萬衆, 解衣衣我, 推食食我, 言聽計用, 故吾得以至於此. 夫人深親信我, 我倍之不祥, 雖死不易. 幸爲信謝項王.)」
이 이야기는 《史記 淮陰侯列傳》에 나오는데, 漢高祖 劉邦이 옷을 벗어 입게 해 주고 밥을 나누어 먹게 해 주었다는 韓信의 말에서 由來하여 ‘解衣推食’은 다른 사람에게 恪別히 親切하게 對하거나 돌보아 주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18. 현두자고(懸頭刺股)
‘머리칼을 매달고 넓적다리를 찌르며’ 졸음을 쫓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문에 힘쓴다는 뜻
두 사람의 故事에서 따와 合成한 四字成語. 宋나라 李昉이 編纂한 百科辭書 '太平御覽'에 머리카락 이야기가 실려 있다. 宋 太宗이 1000券이 넘는 冊을 1年에 걸쳐 읽었다고 하여 이름을 얻은 冊이다. 漢나라 때 學者인 孫敬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집에서 冊만 읽어 閉戶先生이란 別號로 불렸다. 졸리기라도 하면 그 時間까지 아끼려 노끈으로 머리칼을 大들보에 매달고 工夫했다.
(好學 晨夕不休 及至眠睡疲寢 以繩繫頭懸屋梁)
넓적다리 이야기는 戰國時代 때 强國 秦에 對抗하려면 6國이 聯合해야 한다는 合從策을 主唱했던 蘇秦에서 由來한 말로 한때 遊說에 失敗하고 집에서 밤낮 가리지 않고 工夫할 때 한밤 잠이 오면 다리를 송곳으로 찔렀다. 잘못 찔러 피가 흐르면 복사뼈까지 이를 程度였다고 하는데 이런 努力의 結果 蘇秦은 6國의 宰相이 되었다. 劉向이 戰國時代 戰略家들의 策略을 모은 '戰國策'에 나오는 故事.
19. 견두각(見頭角) 见头角
뿔을 드러내다. 頭角을 드러내다. 뛰어난 學識이나 才能을 드러내 主目을 받는 것을 比喩
子厚는 어릴 때부터 聰明하고 敏捷하여 모든 것에 通達했다. 父親이 生存했을 때 나이는 어렸지만 이미 完成의 境地에 達해 있었으며, 進士 試驗에 及第하여 單然 出衆한 成積을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柳氏 家門에 子息다운 子息이 났다고 말했다. 그 뒤 폭넓은 學問과 뛰어난 文章으로 集賢殿 正字에 除授되었다.
(子厚少精敏, 無不通達. 逮其父時, 雖少年, 已自成人, 能取進士第, 嶄然見頭角. 衆謂柳氏有子矣. 其後以博學宏詞, 授集賢殿正字.)」
* 韓愈의 柳子厚墓誌銘에.
子厚는 柳宗元의 字이다. 韓愈와 柳宗元은 모두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唐나라의 代表的 文章家이자 古文 運動의 主唱者로 文學史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柳宗元은 21歲에 進士가 되고, 26歲에 博學宏詞科에 合格하는 等 일찍부터 筆名을 드날렸지만 王叔文의 新政에 參與했다가 失敗하여 43歲에 湖南의 領主로 左遷되었다. 그리고 柳州刺史에 任職하던 中에 47歲의 나이로 世上을 떠나고 말았다.(柳宗元은 韓愈보다 다섯 살 적었지만 5年 먼저 世上을 떠났다.) 새 任地로 赴任해 가는 途中에 柳宗元이 世上을 떴다는 消息을 들은 韓愈는 任地에 到着하자마자 墓地名을 지어 柳宗元의 죽음을 哀悼하고 冥福을 빌었다. 이 글에서 由來하여 頭角을 나타낸다는 뜻의 ‘見頭角’이 나왔다. ‘頭角’이라고도 한다.
20. 형설지공(螢雪之功) 萤雪之功
개똥벌레와 눈(雪)으로 이룬 功. 개똥벌레의 불빛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 가며 이룩한 成功이란 뜻으로, 어려운 生活 속에서도 갖은 苦生을 하며 부지런히 學問을 닦는 것을 比喩
‘螢雪之功’은 개똥벌레의 불빛으로 工夫한 故事와 눈빛으로 工夫한 故事가 合해져 만들어진 成語이다.
개똥벌레의 불빛으로 工夫한 이야기는 車胤의 故事에서 찾아볼 수 있다.
「車胤은 恭遜하고 부지런하며 널리 배우고 多方面에 通했는데, 집이 가난하여 恒常 기름을 얻을 수 없자 여름철에 明紬 주머니에 數十 마리의 개똥벌레를 넣어 冊에 비춰 가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冊을 읽었다.
(胤恭勤不倦, 博學多通, 家貧不常得油, 夏月以練囊, 盛數十螢火以照書, 以夜繼日焉.)」
* 晉書 車胤傳에.
눈빛으로 工夫한 것은 孫康의 故事에서 찾아볼 수 있다.
孫康은 집안이 貧寒하여 恒常 눈 빛에 비추어 冊을 읽었다.
(孫康家貧, 常映雪讀書)
* 宋齊語를 引用한 初學記에.
「文書를 베껴 주거나 남의 書籍을 筆寫해 주고 生計를 維持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冊을 모아 學問을 이루었다. 개똥벌레를 모으고 눈에 비추어 冊을 보고, 부들 잎과 버들을 엮어 冊을 만들었다.
(旣筆耕爲養, 亦擁書成學. 至乃集螢映雪, 編蒲緝柳.)」
* 南朝 · 梁 林昉의 爲蕭揚州薦士表에.
이 글은 《文選》에 실려 있는데, 李善 注에서는 《孫氏世錄》을 引用하여 다음과 같이 注를 달았다.
「晉나라의 孫康은 눈에 비춰 冊을 읽었으며,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사귀는 것과 노는 것이 잡스럽지 않았다.
(晉孫康, 嘗映雪讀書. 淸介, 交遊不雜.)」
이처럼 車胤과 孫康의 이야기에서 書窓을 螢窓, 書案을 雪案이라 하게 되었으며, ‘螢窓雪案’, 눈에 비추어 冊을 읽었다는 뜻의 ‘映雪讀書’, 개똥벌레를 모으고 눈에 비추었다는 뜻의 ‘集螢映雪’ 等의 成語가 由來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螢雪之功’이라는 成語가 나왔다. 이 故事에 引用된 《孫氏世錄》과 《宋齊語》는 일찍이 산일(散佚)되어 傳하지 않는다.
21. 호가호위(狐假虎威)
여우가 호랑이의 威勢를 빌리다. 남의 權勢를 빌려 虛勢를 부리는 것을 比喩
楚나라 宣王 때 昭奚恤이라는 宰相이 있었는데, 韓, 魏, 趙, 齊나라가 한결같이 昭奚恤을 두려워하였다. 宣王이 臣下들에게 물었다. “듣자하니 北쪽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昭奚恤 宰相을 두려워한다고 하는데 어찌 된 일인가?” 臣下들 가운데 누구 하나 제대로 對答을 못 하고 있는데 江一이 對答했다.
「“호랑이가 모든 짐승들을 잡아 먹이로 하다가 하루는 여우를 잡았습니다. 여우가 (죽지 않으려고)말했습니다. ‘그대는 敢히 나를 먹지 못할 것이다. 天帝께서 나를 온갖 짐승의 우두머리로 삼았으니, 只今 나를 먹으면 天帝의 命을 거스르는 것이 된다. 나를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앞장설 테니 내 뒤를 따라와 봐라. 나를 보고 敢히 달아나지 않는 짐승이 있는가 보아라.’ 호랑이는 一理가 있다고 생각하고 여우와 함께 갔습니다. 짐승들이 보고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습니다. 호랑이는 짐승들이 自己를 두려워해 달아난다는 것을 모르고 여우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했습니다. 大王께서는 只今 國土가 四方 5千 里, 軍士가 百萬인데 이를 昭奚恤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므로 北方의 나라들이 昭奚恤을 두려워하는 것은 事實은 大王의 軍隊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마치 짐승들이 호랑이를 두려워하듯이 말입니다.”
(虎求百獸而食之, 得狐, 狐曰, 子無敢食我也. 天帝使我長百獸, 今子食我, 是逆天帝命也. 子以我爲不信, 吾爲子先行, 子隨我後, 觀百獸之見我而敢不走乎. 虎以爲然, 故遂與之行. 獸見之皆走. 虎不知獸畏己而走也, 以爲畏狐也. 今王之地方五千里, 帶甲百萬, 而專屬之昭奚恤. 故北方之畏奚恤也, 其實畏王之甲兵也. 猶百獸之畏虎也.)」
이 이야기는 《戰國策 楚策》에 나오는데, 江一이 楚宣王에게 들려준 여우의 寓話에서 ‘狐假虎威’가 由來했다.
22. 호구지계(狐丘之誡) 狐丘之诫
狐丘의 敎訓. 남에게 미움 살 일을 하지 않도록 操心하라는 敎訓을 말한다.
「楚나라의 狐丘라는 마을에 사는 한 老人이 楚나라의 大夫 孫叔敖에게 물었다.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미워하는 對象이 있는데 그걸 아십니까?”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地位가 높은 사람을 猜忌하고, 임금은 벼슬이 높은 臣下를 미워하며, 祿을 많이 받는 사람은 世人의 미움을 받습니다.” 孫叔敖가 말했다. “제 職位가 올라갈수록 저의 뜻은 더욱 낮추고, 제 벼슬이 높아질수록 저의 마음을 더욱 작게 가지며, 제 祿이 많아질수록 제가 베푸는 것을 더욱 넓게 한다면, 이 세 가지 미워함을 免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孫叔敖가 病이 들어 죽을 때가 되자, 아들에게 訓戒했다. “임금께서는 자주 나를 封하려 했지만 받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임금께서는 分明히 너를 封할 것이다. 絶對로 좋은 땅을 받아서는 안 된다. 楚나라와 越나라 사이에 寢丘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利롭지도 않고 評도 아주 나쁘다. 楚나라 사람들은 鬼神을 믿고, 越나라 사람들은 조짐을 믿으니, 오래도록 차지할 수 있는 곳은 그곳뿐이다.” 孫叔敖가 죽자 果然 王은 그의 아들을 기름지고 좋은 땅에 封하려고 했다. 아들이 辭讓하며 받지 않고 寢丘 地方을 달라고 請했다. 王은 이 땅을 주었는데 只今까지 잃지 않고 차지하고 있다.
(狐丘丈人謂孫叔敖曰, 人有三怨, 子知之乎. 孫叔敖曰, 何謂也. 對曰, 爵高者人妒之, 官大者主惡之, 祿厚者怨逮之. 孫叔敖曰, 吾爵益高, 吾志益下. 吾官益大, 吾心益小. 吾祿益厚, 吾施益博. 以是免於三怨, 可乎. 孫叔敖疾將死, 戒其子曰, 王亟封我矣, 吾不受也. 爲我死, 王則封汝. 汝必無受利地. 楚越之閒, 有寢丘者, 此地不利而名甚惡. 楚人鬼而越人禨, 可長有者唯此也. 孫叔敖死, 王果以美地封其子. 子辭而不受, 請寢丘. 與之, 至今不失.)」
이 이야기는 《列子 說符》에 나오는데, 狐丘에 사는 老人이 준 敎訓에서 ‘ 狐丘之誡’가 由來했다. ‘ 狐丘之誡’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미워하는 것이 있다는 뜻의 ‘人有三怨’이라고도 한다.
23. 호복기사(胡服騎射)
오랑캐의 옷을 입고 말을 타면서 화살을 쏜다는 뜻으로, 非效率的인 傳統方式에 얽매이지 않고 實用性을 追求하여 根原的인 問題와 體質을 改革하려는 問題解決 姿勢를 意味한다.
司馬遷이 著述한 史記의 趙世家에서 由來되었다.
中國 戰國時代 趙나라 武寧王 때에 趙나라는 中山國이나 樓煩 等과 같은 北方 遊牧民族과 戰爭에서 番番이 敗하였다. 武寧王은 遊牧民族이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는 가장 큰 理由가 소매도 짧고 허리도 졸라매는 簡便한 胡服 때문이라 생각하고, 趙나라 軍隊도 胡服을 입고 말을 타고 활을 쏘아야 强力해질 수 있다고 確信했다. 武寧王은 戰鬪에서 가장 重要한 要所인 機動性을 確保하기 爲해 軍隊를 改編하기로 決心했다. 于先 오랑캐 옷을 입으라는 措置를 取했다. 하지만 激烈한 反對가 일어났다. 오랑캐 옷을 입는다는 것은 祖上代代로 내려오는 傳統的 禮義에 어긋난다는 保守的인 思考方式이 改革의 걸림돌이었다. 特히, 當時 元老大臣인 王의 叔父 公子 成의 反對가 甚했다. 이에 맞서 武寧王은 옷이라는 것은 사람이 便하게 입고자 하는 것인데 한 가지 服飾을 固執할 理由가 어디에 있느냐며, 賢明한 者는 法을 바꾸고 어리석은 者는 法에 얽매이는 것이라고 雄辯을 吐했다. 한바탕 激한 論爭 끝에 武寧王은 公子 成을 說得하는데 成功하고 象徵的 몸짓으로 公子 成이 胡服을 입고 朝會에 나타남으로써 反撥을 잠재웠다. 保守的인 다른 元老大臣들은 믿었던 公子 成마저 說得 當하자 곧 胡服騎射를 따랐다. 結局 胡服騎射 改革을 成功시킨 武寧王은 所願대로 中山國을 滅亡시키고 北쪽 邊境의 遊牧民族을 내쫓아 무려 1,000里나 되는 땅을 開拓했다. 永永 弱小國으로만 남을 것 같던 趙나라는武寧王의 改革을 通해 西方 强國 秦나라에 버금가는 强國으로 浮上하게 되었다. 武寧王으은 果敢하고 根元的인 改革精神과 더불어 世代 間 葛藤을 잘 調和시켰다. 武寧王은 가장 큰 權力을 가진 最高 統帥權者였지만 끊임없이 元老大臣과 旣得權層을 說得해 나가는 疎通의 政治家였다.
24. 호사다마(好事多魔) 好事多磨
좋은 일에는 이(頉 탈)가 많다. 좋은 일에는 妨害가 많이 따른다는 것을 比喩하거나, 어떤 일을 實現하기 爲해서는 많은 風波를 겪어야 한다는 것을 比喩
「그런 紅塵 世上에 즐거운 일들이 있지만 永遠히 依支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물며 또 ‘美中不足, 好事多魔' (玉에도 티가 있고, 좋은 일에는 頉도 많다)라는 여덟 글字는 서로 緊密하게 連結되어 있어서 瞬息間에 또 즐거움이 다하고 슬픈 일이 생기며, 사람은 物情에 따라 바뀌지 않는 法이니, 結局은 모든 것이 꿈이며 모든 것이 빈 것으로 돌아가니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那紅塵中有卻有些樂事, 但不能永遠依恃. 況又有美中不足, 好事多魔八個字緊相連屬, 瞬息間則又樂極悲生, 人非物換, 究竟是到頭一夢, 萬境歸空, 倒不如不去的好.)」
이 이야기는 曹雪芹의 《紅樓夢》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好事多魔’가 由來했다. 이 成語는 《紅樓夢》 以前의 典籍에서는 ‘好事多磨’로 記錄되어 있다.
참으로 이른바 좋은 時期는 얻기 어렵고, 좋은 일을 이루려면 많은 風波를 겪어야 한다.
(眞所謂佳期難得, 好事多磨.)
* 金나라 董解元의 西廂記諸宮調에.
옳은 것은 옳은 것인데, 元來 좋은 일에는 어려움이 많은 것.
(是卽是, 從來好事多磨難.)
* 宋나라 晁補之의 詞 安公子에.
좋은 일에 어려움 많고 風波가 일어날 것을 누가 알겠는가?
(誰知好事多磨起風波.)
* 琵琶記의 幾言諫父에.
우리나라에서는 ‘好事多魔’를 쓰고 中國에서는 ‘好事多磨’를 쓴다.
25.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뜻으로, 사람의 삶은 후세에 기억될 ‘이름(명성/업적)’을 남기는 데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中國 唐나라 末期의 朝廷은 外戚과 宦官들의 角逐場이 되고 朝臣들은 朋黨을 結成하여, 兩者가 野合하거나 鬪爭하는 形象을 낳았다. 이러한 支配勢力의 政治的 腐敗와 不正行爲에 더 以上 百姓을 統制할 수 있는 힘을 잃게 되었고, 中央 官僚들의 無分別과 奢侈·貪慾의 負擔은 全部 百姓들에게 돌아가게 되어 良民들의 苦痛은 날로 深化되었다. 雪上加霜으로 해를 잇는 가뭄과 洪水 等의 自然災害로 因한 飢饉에 굶주린 農民들의 大規模의 反亂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中國 統一帝國으로는 漢나라 以後 第2의 全盛期를 謳歌하던 290年 歷史의 唐朝를 滅亡케 한 이른바 “黃巢의 亂”이다.
當時의 貴한 生必品이었던 소금의 販賣商들이 買占賣惜으로 暴利를 取하자 소금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며 치솟았고 及其也 朝廷에서는 소금의 去來에 稅金을 물리기에 이르렀다. 이쯤 되자 소금 密賣가 盛行하게 되었고 密賣를 爲한 組織이 形成되기 始作했다. 이때 寃句地方(只今의 山東省)의 소금 密賣業者의 頭目인 黃巢가 朝廷의 腐敗와 無能에 성난 農民들을 煽動하여 亂을 일으켰던 것이다. 뜻을 같이하는 絶對多數 農民들의 加擔으로 黃巢의 軍隊는 今方 눈덩이처럼 불어나 河南·山東省 一帶를 쉽게 占領하였고 結局 都邑인 長安을 陷落, 皇帝 僖宗을 四川省으로 쫒아버렸다.
黃巢는 都城 長安에 스스로 政權을 세우고 國號를 大齊, 年號를 金統이라 부르며 降服한 官吏도 起用하여 統治를 굳히려고 하였다. 그러나 唐나라의 兵馬使 李克用의 討伐軍에게 擊破되어 3年 後에는 長安으로부터 東方으로 退却, 이듬해 山東省의 泰山 附近에서 自決하였다. 이 亂으로 唐나라는 23年 間 存屬하기는 하지만 命脈만을 維持했을 뿐 結局 唐나라는 崩壞되고 말았다.
統一新羅末期 當代의 碩學이며 詩文集《桂苑筆耕》의 著者로 절 알려진 海雲 崔致遠이 唐나라로 留學, 벼슬을 할 때 討伐總司令官 고변(高騈)의 麾下에서 從軍하며 黃巢를 聲討하기 爲하여 쓴 글이 바로 討黃巢檄文이다. 黃巢는 이 檄文을 읽다가 너무 놀라서 寢床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는 逸話가 傳할 만큼 뛰어난 文章이었다.
또한 當時 中國에서는 “亂을 일으킨 黃巢를 擊退한 것은 李克用의 칼이 아니라 崔致遠의 檄文이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程度로 崔致遠의 文章力은 唐나라 全體를 뒤흔들었다고 한다.
『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行하는 것을 道라 하고, 危險한 때를 當해서 變通하는 것을 權이라 한다. 知慧로운 사람은 때에 順應해 成功하지만 어리석은 者는 理致를 거슬러 敗하는 法이다. 온 天下 사람들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地下의 鬼神들까지 너를 죽이려 이미 議論했을 것이다. 나는 한 張의 글을 남겨서 너의 거꾸로 매달린 危急함을 풀어주려는 것이니, 너는 미련한 짓을 하지 말고 일찍 機會를 보아 좋은 方策을 세워 잘못을 고치도록 하라. 』
* 崔致遠의 討黃巢檄文 中에.
中國의 歷史에서 唐나라가 滅亡한 907年부터 宋나라가 建立된 960年까지, 黃河를 中心으로 華北을 統治했던 5個의 王朝(五代)와 華中·華南과 華北의 一部를 支配했던 여러 地方政權 (十國)이 興亡을 거듭한 政治的 激變期를 일러 五代十國時代라고 한다.
이 五代王朝 中의 하나인 後梁에 王彦章이라는 猛將이 있었는데, 一個 兵卒로 始作해 後梁의 太祖 朱全忠의 莫大한 信任을 받는 軍將이 된 그는 百 斤이 훨씬 넘는 쇠槍을 들고 싸운다하여 ‘王鐵槍’이라고도 불리었다.
《五代史》〈王彦章傳〉의 記錄에 依하면 晉나라가 國號를 後唐으로 바꾸고 後梁을 쳐들어갔을 때, 王彦章이 將帥로 出戰했으나 크게 敗해 罷職을 當했다. 그 後 後唐이 再次 後梁을 侵入했을 때, 그는 또다시 將帥로 起用이 되었으나 이番에는 捕虜가 되고 말았다. 싸움에서 이긴 後唐의 王이 王彦章의 勇盟無雙함을 높이 사 後唐으로 歸順할 것을 慫慂했으나 王彦章은 斷乎히 拒絶하며,
"아침에 梁나라를 섬기던 몸이 어찌 저녁에 晉나라를 섬길 수 있겠소. 내가 祖國 梁나라의 恩慧를 입은 몸으로 나라가 滅하였음에 죽음이 아니면 무엇으로 그 恩慧를 갚겠소. 이제 살아서 무슨 面目으로 世上 사람들을 對하겠소이까?” 라며 죽음을 擇했다.
王彦章은 生前에 글을 배우지 못해 거의 文字를 알지 못했으나 언제나 즐겨 引用하는 俚諺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의 ‘虎死留皮 人死留名’이었다.
王彦章은 座右銘으로 삼았던 ‘虎死留皮 人死留名’처럼 苟且하게 목숨을 求乞하지 않고 名譽로운 죽음을 擇해 그 이름을 後世에 길이 남겼다. 中國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醉翁 歐陽修의 《五代史記》의 (死節傳)에는 세 사람의 忠節을 記錄하고 있는데, 그中에서도 特히 王彦章의 忠節을 가장 높이 評價하였다.
一國의 將帥로서 絶體絶命의 生死岐路의 狀況에서 自身의 名譽를 더럽히지 않고 오직 祖國에 對한 굳은 節槪를 지키기 爲해 守節死義한 將帥 王彦章의 名譽롭고 義로운 選擇을 했다.
26. 호시탐탐(虎視眈眈) 虎视眈眈
호랑이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다. 남을 攻擊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기 爲해 形勢를 살피며 機會를 엿보는 것을 比喩
「六四 (아래에서 네 番째 陰爻), 거꾸로 길러지는 것 (아랫사람에게 길러지는 것)도 吉하다. 호랑이가 노려보듯 하여 하고자 하는 바대로 좇아도 허물이 없다.
(六四, 顚頣, 吉. 虎視眈眈, 其欲逐逐, 無咎.)」
이는 《周易》 (頣)卦의 六四爻의 爻辭인데, 여기에서 ‘虎視眈眈’이 由來했다.
‘頣’는 아래턱을 가리키는 말로 기른다는 意味가 있다. ‘頣卦’의 卦形은 두 陽爻가 맨 위와 맨 아래로 있고, 네 個의 陰爻가 가운데 끼여 있는 形象이다. 마치 사람이 입을 벌린 모습과 비슷하여, 飮食으로 사람의 몸을 기른다는 意味에서 기른다는 뜻이 생겨났다. 頣卦는 天子를 輔佐하여 天下의 萬民을 기르는 代身의 地位에 比喩할 수 있는데, 陰柔함으로 힘이 不足하여 혼자의 힘으로는 天下의 萬民을 기르기는커녕 自己의 몸을 기르는 일조차도 不安하다. 그러므로 아래에 있는 百姓과 위에 있는 天子의 도움이 必要하다. 위에 있는 사람이 虎視眈眈하여 威嚴이 있으면 아랫사람도 敢히 가벼이 보지 못하고 받들게 될 것이다. 또 사람에게 길러짐을 求할 때는 그 願하는 바에 따라서 끊임없이 하면 일이 成就되고, 이렇게 하여 이미 威嚴을 갖추고 사람에게 길러짐을 求하는 데 게으르지 않으면 허물을 얻지 않는다.
‘虎視眈眈’은 元來는 호랑이가 노려보는 것처럼 威嚴이 있다는 뜻이었는데, 後에 남을 攻擊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기 爲해 形勢를 살피며 機會를 엿보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27. 호연지기(浩然之氣) 浩然之气
天地間에 가득 차 있는 넓고 큰 氣運
「公孫丑가 물었다. “先生님이 齊나라의 경상(卿相)에 오르셔서 先生님의 道를 펼치실 수 있게 된다면, 비록 이로 말미암아 齊나라 임금을 覇王이 되게 하시더라도 異常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마음이 動搖하지 않으시겠습니까?” 孟子가 말했다. “아니다. 내 나이 四十 歲가 되어서부터 마음이 動搖하지 않게 되었다.” 公孫丑가 말했다. “그러시면 先生님께서는 孟賁보다 훨씬 더 뛰어나십니다.” 孟子가 말했다. “이것은 어렵지 않다. 告子도 나보다 앞서 마음이 動搖하지 않았다.” 이어 孟子는 眞情한 勇氣에 對해 이야기하면서 勇氣가 있었던 사람들을 例로 들며 眞正한 勇氣란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不動心)이라고 말했다. ······ 그러자 公孫丑가 물었다. “敢히 여쭙겠습니다. 先生님의 不動心과 告子의 不動心에 對하여 들려주시겠습니까?” 孟子가 말했다. “告子는 ‘남이 하는 말에 理解가 가지 않는 것을 마음에서 求하지 말며, 마음에 理解가 가지 않는 것을 氣에서 求하지 말라.’고 했다. 마음에 理解가 가지 않는 것을 氣에서 求하지 말라 함은 옳지만, 남이 하는 말에 理解가 가지 않는 것을 마음에서 求하지 말라 함은 옳지 않다. 大抵 뜻은 氣의 統帥요, 氣는 몸에 가득 찬 것이다. 뜻이 確立되면 氣가 다음에 따라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自己의 뜻을 올바로 지켜서, 自己의 氣를 害치지 말라고 한 것이다.” 公孫丑가 말했다. “뜻이 確立되면 氣가 다음에 따라오는 것이라고 하시고 나서, 또 自己의 뜻을 올바로 지켜서 自己의 氣를 害치지 말라 하심은 어째서입니까?” 孟子가 말했다. “뜻을 오로지 하나에만 쓰면 氣가 움직이고, 氣를 오로지 하나에만 쓰면 곧 뜻이 움직인다. 이제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달음질하는 것이 氣이기는 하나, 그것이 도리어 마음을 動하게 한다.” 公孫丑가 말했다. “敢히 묻습니다. 先生님께서는 어느 것을 잘하십니까?” 孟子가 말했다. “나는 말을 알며, 나의 浩然之氣를 잘 기르노라.” 公孫丑가 말했다. “敢히 묻습니다. 무엇을 浩然之氣라고 합니까?” 孟子가 말했다. “말로 하기가 어렵다. 그 氣 됨이 다시없이 크고 다시없이 强하여 곧게 기르는 데 害하는 것이 없으면 곧 天地間에 가득 차게 된다. 그 氣는 언제나 義와 道에 짝하여 함께하니 이것이 없으면 虛脫이 오게 된다.”
(公孫丑問曰, 夫子加齊之卿相, 得行道焉, 雖由此覇王不異矣. 如此, 則動心否乎. 孟子曰, 否. 我四十不動心. 曰, 若是, 則夫子過孟賁遠矣. 曰, 是不難, 告子先我不動心. ······ 曰, 敢問夫子之不動心, 與告子之不動心, 可得聞與. 告子曰,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得於心, 勿求於氣. 不得於心, 勿求於氣, 可.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可. 夫志, 氣之帥也. 氣, 體之充也. 夫志至焉, 氣次焉. 故曰, 持其志, 無暴其氣. 敢問夫子惡乎長. 曰, 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 敢問何謂浩然之氣. 曰, 難言也. 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於天地之間.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 餒也.)」
* 孟子의 公孫丑上에. 孟子(맹자) 2. 浩然之氣(호연지기)
告子는 孟子와 같은 時期의 사람으로 姓은 告이고, 이름은 傳해지지 않는데, 一說에 依하면 不害라고도 한다. 告子는 儒家와 墨家의 道를 兼備했다고 한다. 孟賁은 春秋時代 齊나라의 勇士이다.
28. 호접지몽(胡蝶之夢) 胡蝶之梦
나비가 된 꿈. 莊子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닌 꿈이라는 뜻으로, 物我一體의 境地, 또는 人生의 無常함을 比喩
「莊周 (莊子)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펄펄 나는 것이 確實히 나비였다. 스스로 愉快하여 自己가 莊周인 것을 몰랐다. 그러나 얼마 後 문득 꿈에서 깨어 보니 자기는 틀림없이 莊周였다. 莊周가 나비 된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莊周가 된 꿈을 꾼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莊周와 나비는 分明히 區分이 있을 것이니, 이를 일러 萬物의 變化라고 하는 것이다.
(昔者莊周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이 이야기는 《莊子 齊物論》에 나온다. 莊子는 여기에서 莊周와 나비는 分明 別個의 事物이지만, 物我의 區別이 없는 萬物一體의 絶對 境地에서 보면 莊周도 나비도 꿈도 現實도 區分이 없으며, 다만 있는 것은 萬物의 變化일 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由來하여 ‘胡蝶之夢’은 彼我의 區別을 잊는 것, 또는 物我一體의 境地를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는데, 오늘날에는 人生의 덧없음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史記 老子韓非列傳》에 따르면 莊子는 蒙 사람으로 이름은 周이다. 일찍이 蒙의 漆園의 官吏가 되었다. 梁惠王, 齊宣王과 同時代 사람으로, 博學하여 모든 書籍에 막히는 것이 없었는데 學文의 根本은 老子에 두었다.
(莊子者, 蒙人也. 名周. 周嘗爲蒙漆園吏. 與梁惠王, 齊宣王同時. 其學無所不窺, 然其要本歸於老子之言)
그는 物의 是非, 善惡, 眞僞, 美醜, 貧富, 貴賤을 超越하여 自然 그대로 살아가는 無爲自然을 提唱했으며, 愚話를 많이 利用했다.
29. 혼정신성(昏定晨省)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엔 問安을 드리다. 子息이 아침저녁으로 父母를 보살피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무릇 사람의 子息으로서의 禮는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해 드리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整頓해 드리고 새벽에는 問安 人事를 드리며, 同輩끼리 다투지 않는다.
(凡爲人子之禮, 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 在醜夷不爭)」
* 禮記 曲禮에.
‘昏定晨省’은 밤에 잘 때 父母의 寢所에 가서 잠자리를 해 드린다는 뜻의 ‘昏定’과, 아침 일찍 父母의 寢所에 가서 問安 人事를 드린다는 ‘晨省’이 合해져 만들어졌다. 父母님께 孝道를 다하는 것을 ‘溫凊定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겨울에는 따뜻하게(溫) 여름에는 시원하게(凊) 해 드리고, 밤에는 이부자리를 펴고(定) 아침에는 問安을 드린다(省)는 뜻이다.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서늘하게 한다는 뜻의 ‘冬溫夏凊’도 같은 뜻으로 使用된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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