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ㅎ- 4 홍일점~ )
30. 홍일점(紅一點) 红一点
붉은 點 하나. 푸른 잎 가운데 한 송이의 꽃이 피어 있다는 뜻으로, 여러 속에서 유난히 異彩를 드러내는 것이나, 많은 男子 사이의 한 사람의 女子를 比喩
萬綠叢中紅一點 : 茂盛한 푸른 잎들 가운데 붉은 點 하나
動人春色不須多 : 사람 마음 움직이는 봄 景致 많을 必要 있을까
* 王安石의 咏石榴花의 詩에
‘萬綠叢中紅一點’ : 온통 푸른 茂盛한 가지들 속에 붉은 點 하나
‘濃綠萬枝紅一點’으로 되어 있는 典籍도 있다. 그런데 이 詩는 王安石이 지은 것이 아니라는 主張이 있다.
《遯齋閑覽》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唐나라 사람의 詩 ‘濃綠萬枝紅一點, 動人春色不須多’에는 지은 사람의 이름이 記錄되어 있지 않다.
鄧元半이 일찍이 介甫 (王安石)가 이 두 句節을 가지고 있던 부채에 親히 쓰는 것을 보았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介甫가 直接 지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건 옳지 않다.
(遯齋閑覽云, 唐人詩濃綠萬枝紅一點, 動人春色不須多, 不記作者名氏. 鄧元半曾見介甫親書此兩句於所持扇上, 或以爲介甫自作,
* 非也의 苕溪漁隱叢話에.
沈彥述이 나에게 말했다. “荊公, (王安石)의 詩로 알려진
‘繁綠萬枝紅一點, 動人春色不須多’나 ‘春色惱人眠不得, 月移花影上欄干'(봄 景致 사람을 煩悶케 해 잠 못 이루는데, 달은 꽃 그림자에서 欄杆 위로 옮겨 가네) 等은 모두 平父(王安國)의 詩이지 荊公의 詩가 아니다.”
(儀眞沈彥述謂余言, 荊公詩, 如繁綠萬枝紅一點, 動人春色不須多. 春色惱人眠不得, 月移花影上欄干等篇, 皆平父詩, 非荊公詩也)
* 竹坡詩話에.
王安石의 作品이라는 主張은 다음의 典籍에서 찾아볼 수 있다.
王直方의 《詩話》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荊公이 內相을 지낼 때 翰苑에 石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가지와 잎이 茂盛한 가운데 꽃이 오로지 한 송이만 피었다. 그래서 荊公이 이 詩를 지은 것인데, 나는 每番 (이 詩의) 全文을 보지 못하는 것이 恨스러웠다.
(王直方詩話云, 荊公作內相詩, 翰苑中有石榴一叢, 枝葉甚茂, 但只發一花. 故荊公題此詩, 余每以不見全篇爲恨)
* 苕溪漁隱叢話 에.
이 典籍들에 나오는 ‘萬綠叢中紅一點’, ‘濃綠萬枝紅一點’, ‘繁綠萬枝紅一點’은 表現은 若干씩 다르지만 뜻은 모두 같으며, 이 詩의 지은이가 王安石이든 아니든 關係없이, 여기에서 由來하여 ‘紅一點’은 많은 男子들 가운데 女子 혼자 있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31. 화룡점정(畵龍點睛) 画龙点睛
龍을 그리고 눈동자(瞳子)를 찍다. 事物의 가장 重要한 部分을 完成시키거나 끝손질하는 것을 比喩
南北朝時代, 南朝인 梁나라의 張僧繇가 金陵에 있는 安樂寺 壁에 龍 네 마리를 그렸는데, 눈瞳子를 그려 넣지 않았다. 그러고는 恒常 “눈瞳子를 그리면 龍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다. 어떤 사람이 그 말을 虛荒된 말로 여기자 龍 한 마리에 눈瞳子를 그려 넣었다. 그러자 갑자기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쳐 壁이 깨지고, 龍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눈瞳子를 그리지 않은 龍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張僧繇於金陵安樂寺, 畵四龍於壁, 不點睛. 每曰, 點之卽飛去. 人以爲誕, 因點其一, 須臾雷電破壁, 一龍乘雲上天. 不點睛者見在)
이 이야기는 《水衡記》에 나오는데, 龍 한 마리에 눈瞳子를 그려 넣자 龍이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는 말에서 龍을 그리고 눈瞳子를 그려 넣는다는 뜻의 ‘畵龍點睛’이 由來했다.
32. 화서지몽(華胥之夢) 华胥之梦
華胥에서 꾼 꿈. 좋은 꿈을 比喩하는 말이다.
「黃帝 卽位 15年, 天下의 사람들이 모두 自己를 推戴하고 있는 것이 기뻐 自己 몸을 健康하게 만들기 爲해 노래와 춤으로 귀와 눈을 즐겁게 하고, 맛있는 飮食으로 코와 입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러나 도리어 皮膚가 검고 瘦瘠해지며 얼굴색이 검어지고 喜 · 怒 · 哀 · 樂 · 怨의 다섯 가지 感情이 迷惑에 빠지게 되었다. 다음의 15年間은 天下가 다스려지지 않는 것을 걱정하여 聽力과 視力을 다하고 智慧와 힘을 짜내어 百姓을 다스리는 일에 힘썼다. 그러나 도리어 皮膚가 검고 瘦瘠해지므로 顔色이 검어지고 五感이 迷惑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皇帝는 “내가 아주 큰 잘못을 한 貌樣이다. 몸을 기르는 것에 힘써도 이처럼 問題가 있고, 百姓들을 다스리는 일에 힘써도 이처럼 問題가 있구나.”라고 嘆息하며, 政事를 버려 두고 宮殿에서 물러나 重臣들도 멀리하고 樂器도 演奏하지 않고 食事를 줄이고 大庭氏의 邸宅에 틀어박혀,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몸을 돌보며 三 個月 동안 政事를 보지 않았다.
어느 날 皇帝는 낮잠을 자다가 華胥氏의 나라에 놀러 간 꿈을 꾸었다. 華胥氏의 나라는 엄주(弇州)의 西쪽, 台州의 北쪽에 있는데, 齊나라와의 거리는 몇 千萬 里인지 알 수가 없었으며, 絶對 배나 수레나 徒步로는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오직 精神만이 놀러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나라에는 다스리는 사람이 없고 自然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百姓들은 嗜好나 欲望이 없고 順理대로 살았다. 그들은 삶을 즐거워할 줄 모르고 죽음을 싫어할 줄 몰랐으므로 夭折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個人的인 欲心을 가질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을 疎忽히 할 줄을 몰랐으므로 사랑과 미움이 없었다. 叛逆할 줄 모르고 順從할 줄도 몰랐기 때문에 利得과 損害가 없었다.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없고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도 없었다. 물에 들어가도 빠져 죽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았다. 칼로 베고 채찍으로 때려도 傷處나 아픔이 없고 손톱으로 긁어 대도 아프거나 가렵지 않았다. 空中에 올라가도 땅을 밟고 있는 것과 같고 虛空에서 잠을 자도 寢床에서 자는 것과 같았다. 雲霧도 그 視覺을 妨害하지 않고 우뢰도 聽覺을 混亂하게 만들지 않았으며, 아름다움과 醜함도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山과 골짜기도 가는 걸음을 막지 못했으며, 모든 것이 精神에 依據하여 움직일 뿐이었다. 皇帝는 꿈에서 깨어나자 깨달음을 얻어 天老와 力牧과 太山稽를 불러 말했다. “나는 三 個月 동안 틀어박혀서 마음을 깨끗이 하고 몸을 가지런히 하여 한 몸을 길러 百姓들을 다스리는 道를 깨달으려고 생각했지만, 그 術法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疲勞하여 잠자고 있는 동안에 이와 같은 꿈을 꾸었는데, 道의 極致란 것은 私事로운 情으로써 求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卿들에게 말로는 일러 줄 수가 없구나.” 그러고서 皇帝는 28年 동안 天下를 크게 다스려서 華胥氏 나라처럼 만들었다. 以後 皇帝가 昇遐하자 百姓들이 울며 그의 죽음을 슬퍼했는데, 무려 200如 年이나 그치지 않았다.
(黃帝卽位十有五年, 喜天下戴己, 養正命, 娛耳目, 供鼻口, 燋然肌色皯黣, 昏然五情爽惑. 又十有五年, 憂天下之不治, 竭聰明, 進智力, 營百姓, 焦然肌色皯黣, 昏然五情爽惑. 黃帝乃謂然讚曰, 朕之過淫矣. 養一己其患如此, 治萬物其患如此. 於是放萬機, 舍宮寢, 去直侍, 徹鍾縣. 減廚膳, 退而閒居大庭之館, 齋心服形, 三月不親政事. 晝寢而夢, 遊於華胥氏之國. 華胥氏之國在險州之西, 台州之北, 不知斯齊國幾千萬里. 蓋非舟四足力之所及, 神遊而已. 其國無帥長, 自然而已. 其民無嗜欲, 自然而已. 不知樂生, 不知惡死, 故無夭殤. 不知親己, 不知疏物, 故無愛憎. 不知背逆, 不知向順, 故無利害. 都無所愛惜, 都無所畏忌. 入水不溺, 入火不熱. 斫撻無傷痛, 指擿無痟癢. 乘空如履實, 寢虛若處床. 雲霧不硋其視, 雷霆不亂其聽, 美惡不滑其心, 山谷不躓其步, 神行而已. 黃帝旣寤, 悟然自得, 召天老力牧太山稽, 告之曰, 朕閒居三月, 齋心服形, 思有以養身治物之道, 弗獲其術. 疲而睡, 所夢若此. 今知至道不可以情求矣. 朕知之矣. 朕得之矣. 而不能以告若矣. 又二十有八年, 天下大治幾若華胥氏之國, 而帝登假, 百姓號之, 二百餘年不輟.)」
이 이야기는 《列子 黃帝》에 나오는데, 皇帝가 華胥氏의 나라에 놀러 간 꿈을 꾸었다는 데서 ‘華胥之夢’이 由來했으며, 좋은 꿈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亦是 이 이야기에서 由來하여 꿈을 꾸는 것을 일러, 華胥의 나라에 놀러 간다는 뜻의 ‘遊華胥之國’이라고 한다.
33. 화이부동(和而不同)
和合하지만 부화뇌동(附化雷同)하지는 않는다. * 부화뇌동(附和雷同) : 일정한 주견이 없이 남의 의견에 따라 같이 행동함. 뇌동부화.
「孔子가 말했다.
“君子는 和合하지만 附化雷同하지 않고, 小人은 附化雷同하지만 和合하지 않는다."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 論語 子路에. 論語(논어) 13. 子路(자로)
34. 화사첨족(畵蛇添足) 画蛇添足
뱀을 그리고 발을 그려 넣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쓸데없이 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것을 比喩
楚나라 懷王 6年, 宰想 昭陽은 軍隊를 出動시켜 魏나라 軍隊를 大破하고 城 여덟 個를 陷落시켰다. 그러고는 다시 軍隊를 移動시켜 齊나라를 攻擊하려고 했다. 齊나라 王은 걱정이 되어 陳軫을 使臣으로 보냈다. 陳軫이 昭陽을 만나 이야기했다. “令尹이라는 자리는 楚나라에 最高位職으로 이미 當身은 그 자리에 있습니다. 제가 比喩를 들어 이야기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舍人들에게 술 한 酒煎子를 주었습니다. 舍人들은 (술이 많지 않은 것을 보고)서로 말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이 술을 마시면 洽足하지 못하다. 그러니 땅에 뱀을 그려 먼저 그리는 사람이 혼자서 이 술을 다 마시도록 하자.’ 한 사람이 ‘내가 뱀을 다 그렸다.’고 말한 後, 술을 들고 일어나면서 또 말했습니다. ‘나는 뱀의 발도 그릴 수 있다.’ 그러고는 뱀의 발을 그리기 始作했습니다. 그러자 나중에 뱀을 다 그린 다른 사람이 그의 손에 있던 술을 가로채 그 술을 마셔 버리고는 말했습니다. ‘뱀은 元來 발이 없는데 발을 그려 넣었으니 그건 뱀이 아니다.’”
(人有遺其舍人一卮酒者, 舍人相謂曰, 數人飮此, 不足以徧, 請遂畵地爲蛇, 蛇先成者獨飮之. 一人曰, 吾蛇先成. 擧酒而起, 曰, 吾能爲之足. 及其爲之足, 而後成人奪之酒而飮之, 曰, 蛇固無足, 今爲之足, 是非蛇也.)
陳軫은 昭陽에게 魏나라를 쳐서 큰 功을 세웠고 地位도 最高에 올라 있으니 齊나라를 쳐서 功을 세워도 더 오를 자리가 없으며, 適當한 線에서 그칠 줄을 모르면 戰爭터에서 죽게 되고 官職도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니, 그러면 뱀의 발을 그려 넣으려던 사람과 마찬가지인 셈이라고 말했다. 이에 昭陽은 齊나라 攻擊을 멈추고 楚나라로 돌아갔다. 이 이야기는 《史記 楚世家》에 나온다. 같은 이야기가 《戰國策 齊策》에도 나오는데, ‘蛇足’에 對한 이야기에서 若干의 差異가 있다.
「楚나라에 祭祀를 지낸 사람이 있었는데 舍人들에게 술 한 酒煎子를 주었다. 舍人들이 (술이 別로 많지 않은 것을 보고)서로 말했다. “여러 사람이 이 술을 마시면 不足하고, 혼자서 마시면 餘裕가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땅에 뱀을 그려 먼저 그리는 사람이 술을 마시도록 하자.” 한 사람이 뱀을 먼저 그린 後에 술을 가져다 마셨다. 그러고는 왼손으로 술 잡고 오른손으로 뱀을 그리면서 말했다. “나는 발도 그릴 수 있다.” 발을 다 그리기 前에 한 사람이 뱀을 다 그리고는 술 酒煎子를 가로채면서 말했다. “뱀은 本來 발이 없는 것인데 그대가 어떻게 발을 그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는 그 술을 마셔 버렸다. 뱀 발을 그린 사람은 結局 술을 잃고 말았다.
(楚有祠者, 賜其舍人卮酒. 舍人相謂曰, 數人飮之不足, 一人飮之有餘. 請畵地爲蛇, 先成者飮酒. 一人蛇先成, 引酒且飮之, 乃左手持卮, 右手畵蛇曰, 我能爲之足. 未成, 一人之蛇成奪取卮曰, 蛇固無足, 子安能爲之足. 遂飮其酒. 爲蛇足者, 終亡其酒.)」
‘畵蛇添足’은 ‘蛇足’이라고도 한다.
35. 화씨지벽(和氏之璧)
和氏의 벽옥(璧玉). 傳說上의 寶物을 比喩 하거나, 사람을 깨우쳐 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比喩
「春秋時代에 楚나라의 卞和라는 사람이 山에서 한 個의 박(璞-玉을 싸고 있는 돌덩어리, 卽 玉의 元石)을 얻어서, 楚厲王에게 바쳤다. 厲王은 玉匠에게 돌을 鑑定하게 했다. 玉匠은 平凡한 돌이라고 말했다. 卞和는 厲王을 속인 罪로 왼쪽 다리를 잘렸다. 楚武王이 卽位하자 卞和는 다시 璞을 가져다 바쳤다. 武王 亦是 玉匠에게 鑑定을 시켰는데, 또 그냥 平凡한 돌덩이일 뿐이라는 答을 얻었다. 卞和는 이번에는 오른 다리를 잘렸다. 楚文王이 卽位하자, 卞和는 璞을 안고 山에 가서 사흘 밤낮 大聲痛哭을 했다. 눈물이 다 마르고 피가 그 뒤를 이었다. 文王이 이를 듣고 奇異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물어보았다. “天下에 다리 두 個 잘린 사람이 當身 하나뿐이 아닌데 왜 이렇게 슬프게 우는가?” “다리 두 個가 잘린 것이 슬퍼서 우는 것은 아닙니다. 玉石을 돌덩이라고 해서 슬픈 것이고, 忠情이 있는 사람이 사기꾼으로 몰리는 것이 슬픈 것입니다.” 楚文王은 玉匠에게 命을 내려 璞을 加工하도록 하여 寶玉을 얻고, 이를 ‘和氏之璧’이라 이름 했다.
(楚人和氏得玉璞楚山中, 奉而獻之厲王. 王使玉人相之. 玉人曰, 石也. 王以和爲誑, 而刖其左足. 及厲王薨, 武王卽位. 和又奉其璞而獻之武王. 武王使玉人相之. 又曰, 石也. 王又以和爲誑, 而刖其右足. 武王薨, 文王卽位. 和乃抱其璞而哭於楚山之下, 三日三夜, 泣盡而繼之以血. 王聞之, 使人問其故曰, 天下之刖者多矣, 子奚哭之悲也. 和曰, 吾非悲刖也, 悲夫寶玉而題之以石, 貞士而名之以誑, 此吾所以悲也. 王乃使玉人理其璞而得寶焉, 遂命曰和氏之璧.)」
‘和氏之璧’은 ‘和氏璧’이라고도 하고, 이 이야기는 元來 《韓非子 和氏》에 나오는데, 實話가 아니라는 主張도 있다. 卽, 韓非子가 當時의 君主들이 法術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마치 楚나라 王들이 和氏璧을 對하는 것과 같으며, 愚眛한 君主를 깨우쳐 주기가 그처럼 어렵다는 것을 說明하기 爲해 比喩한 寓言에 不過하다고 보는 視覺도 있다.
楚文王 以來로 和氏璧은 繼續 楚나라의 所有였다. 楚威王 때, 威王은 功이 많은 楚나라의 宰相 昭陽에게 和氏璧을 賞으로 내렸다. 昭陽이 한 番은 크게 宴會를 열었는데, 이때 和氏璧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런데 宴會 中에 和氏璧을 없어졌다. 當時 張儀도 그 자리에 있었다. 昭陽은 張儀가 훔친 것으로 疑心하고, 張儀를 죽지 않을 만큼 팼다. 後에 昭陽은 千金을 내걸고 이 和氏璧을 사겠다고 했지만 和氏璧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數十 年이 지난 어느 날(大略 BC290年으로 推定), 먼 곳에서 온 손님 하나가 趙나라의 환관(宦官)인 영현(纓賢)의 집에 와서 璧玉을 팔겠다고 했다. 纓賢은 이 璧玉의 價値를 알아보고 500金을 주고 사들였다.(纓賢이 市場에서 샀다는 說도 있다.) 後에 纓賢은 이것이 바로 和氏璧이란 事實을 玉匠에게 듣고 매우 기뻐하며 이를 감추어 두었다. 그러나 이 事實은 趙나라 惠文王의 귀에 들어갔고, 惠文王은 纓賢에게 和氏璧을 내놓으라고 했다. 纓賢이 卽時 바치지 않고 머뭇거리자, 王이 크게 怒하여 사냥하러 가는 길에 갑자기 纓賢의 집에 들이닥쳐 和氏璧을 빼앗아 가 버렸다. (纓賢이 自進해서 趙王에게 獻上했다는 說도 있다.) 하여 和氏璧은 趙나라의 所有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傳說 같은 이야기 外에도 楚나라가 趙나라와 婚姻 關係를 맺으면서 和氏璧을 膳物했다는 說도 있고, 趙나라의 名將 염파(冉頗)가 楚나라를 쳐 和氏璧을 빼앗았다는 說도 있다.
趙나라의 惠文王이 和氏璧을 손에 넣었다는 事實을 알게 된 秦나라 昭王은 秦나라의 15個 城과 和氏璧을 交換하자고 提案했다. 趙王의 命을 받고 使者로 간 인상여(藺相如)는 約束을 지키지 않으면 璧玉을 머리로 받아 깨뜨려 버리겠다고 秦王을 威脅한 後, 몰래 隨行員을 시켜 璧玉을 趙나라로 되돌려 보냈다.
그 後 天下를 統一한 秦始皇이 和氏璧을 손에 넣어, 이것으로 ‘하늘에서 命을 받았으니 오래도록 가고 永遠히 昌盛하라’는 뜻의 ‘受命於天旣壽永昌’이라고 새긴 傳國玉璽를 만들게 했다. 이 傳國玉璽는 始皇帝의 孫子인 子嬰이 劉邦에게 나라를 들어 降服하면서 함께 바쳤으며, 劉邦이 中國을 統一한 뒤 漢나라 皇帝에게 代代로 傳해졌다.
前漢을 滅亡시키고 新나라를 세운 王莽이 暫時 이 옥새(玉璽)를 빼앗았으나, 後漢을 세운 光武帝가 되찾았다. 옥새(玉璽)는 後漢 末年의 混亂期에 遺失되었다가 손견(孫堅)과 원술(袁術)을 거쳐 조조(曹操)의 손에 들어갔다. 以後 魏晉南北朝를 거쳐 隋나라와 唐나라, 그리고 五代十國 時代의 後梁과 後唐까지 傳해지다가, 後唐의 마지막 皇帝인 폐제(廢帝) 이종가(李從珂)가 분신(焚身)할 때 사라진 것으로 傳해지고 있다.
그 後 몇 차에 걸쳐 전국옥새(傳國玉璽)를 찾았다는 消息이 들렸지만 모두 眞짜가 아닌 것으로 判明되었다.
和氏璧의 出沒에도 傳說的인 이야기가 뒤따랐듯이, 和氏璧으로 만든 이 傳國玉璽에도 神秘를 더해 주는 傳說이 붙어 있다. 始皇帝가 배를 타고 洞庭湖 어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風浪이 일어 배가 뒤집힐 뻔하였다. 始皇帝가 황급히 옥새(玉璽)를 湖水에 던지고 神靈께 빌자, 물결이 潛潛해졌다. 8年 뒤 始皇帝의 使臣이 華陰 (陝西省 華陰市 東南) 地方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밤에 어떤 사람이 突然히 나타나 使臣의 길을 가로막고, 龍王이 돌아가셨기에 돌려준다며 옥새(玉璽)를 놓고 바람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36. 화이불류(和而不流)
和合하되 휩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中庸 10章에 나오는 말로 君者의 實行 態度를 가리키는 말이며, 和而不同과 類似한 말이다.
子路問强, 子曰, 南方之强與 北方之强與 抑而强與
寬柔以敎하고 不報無道는
南方之强也이니 君子居之이니라
衽金革하여 死而不厭은 北方之强也이니 而强者居之이니라
故로 君子는 和而不流하나니 强哉矯여
中立而不倚하나니 强哉矯여
國有道에 不變塞焉하나니 强哉矯여
國無道에 至死不變하나니 强哉矯여
子路가 强한 것에 對해 물었는데,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南方의 强함을 말하는 것이냐, 北方의 强함을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너의 强함을 말하는 것이냐?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나에게 無道한 者에게 報復하지 않는 것은 南方의 强함인데, 君子는 이런 方式으로 處身한다.
槍칼과 甲옷을 깔고 자면서 늘 싸울 態勢를 取하고, 그러다가 죽어도 餘恨이 없는 것은 北方의 强함인데, 强한 者는 이런 方式으로 處身한다.
그러므로 君子는 사람들과 和合하면서도 휩쓸리지 않나니, 그 꿋꿋함이여, 참으로 强하구나.
中途에 立脚하고 치우치지 않나니, 그 꿋꿋함이여, 참으로 强하구나.
나라에 道가 있어 榮達했을 때도, 困宮한 時節의 뜻이 變치 않나니, 그 꿋꿋함이여, 참으로 强하구나.
나라에 道가 없어 죽게 되었을 때도, 平素의 志操를 바꾸지 않나니, 그 꿋꿋함이여, 참으로 强하구나.”
孔子의 弟子 中, 사나우면서도 性格이 急한 子路가 스승에게 强함에 關하여 물었을 때, 孔子는 이 質問을 機會 삼아 ‘眞情한 强者의 道理’를 말해주며 그렇게 處身 할 것을 일깨워 주기 爲해 答한 內容 中에 나오는 表現입니다.
孔子는 子路에게 君子는「和而不流하고, 中立而不椅하니, 强哉矯라」 卽, “和合하되 휩쓸리지 아니하고, 가운데 바로 서서 기울어지지 않는 것이 强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아가 眞情한 君子는 “나라가 바르게 다스려질 때라면 어려움 속에서도 지켜온 바 뜻을 變치 말고, 나라가 바르게 다스려지지 않을 때는 비록 죽음에 이르더라도 志操를 變치 않는 것이 强한 것이다.”라고 하셨지요.
兩極端은 紛亂을 惹起합니다. 政治理念的 極右와 極左, 經濟的 兩極化, 宗敎 · 敎派 間 善惡, 異端 是非처럼 二分法的 黑白論理는 反目만 커집니다. 只今이 中庸에서 가르치는 ‘ 和而不流’ 精神을 되새길 때 아닌가요? 孔子는 “和合하되 휩쓸리지 않고, 가운데 바로 서서 기울어지지 않는게 强한 것이다”라고 타이르셨습니다.
37. 화조월석(花朝月夕)
꽃피는 아침과 달 밝은 저녁. 봄과 가을 等 좋은 季節을 이르는 말이다.
「每番 꽃피는 아침과 달 뜨는 저녁이면 賓客과 輔佐들과 詩를 읊으니 아주 興趣가 난다.(每花朝月夕, 與賓佐賦咏, 甚有情致.)
* 舊唐書 羅威傳에.
「2月 15日을 花朝라 하고 8月 15日을 月夕이라 한다.
(二月十五日爲花朝, 八月十五日爲月夕)」
* 提要錄 에.
陰曆 2月 보름이 꽃놀이하기 좋은 날이고, 8月 보름이 달구경하기 좋은 때이므로 이날을 各各 ‘花朝’와 ‘月夕’이라 했는데, 반드시 特定日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고 좋은 季節을 이르러 ‘ 花朝月夕’이라 하게 되었다.
38. 화중지병(畵中之餠) = 화병충기(畵餠充饑, 画饼充饥 )
그림의 떡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다. 이름뿐이고 실속이 없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比喩하거나, 상상으로 스스로를 慰安하는 것을 比喩
三國時代 魏나라 明帝 曹睿의 臣下였던 노육(盧毓)은 中郞將 盧植의 아들이다. 盧毓은 열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戰亂에 두 兄을 잃었다. 猿紹와 公孫瓚이 싸울 때 幽州와 冀州에 兇年마저 들어 홀로된 兄嫂와 조카들을 보살폈고, 學問과 德行으로 世上에 알려졌다. 明帝는 그를 侍中, 吏部尙書, 中書郞 等의 要職에 任命하였다.
「盧毓이 中書郞에 있을 때 明帝가 그에게 말했다. “人才를 얻고 못 얻음은 모두 그대의 손에 달려 있소. 選拔할 때는 名聲이 있는 사람을 뽑지 않도록 하시오. 名聲이란 것은 땅 위에 그려 놓은 떡과 같아 먹을 수 없는 것이라오.” 盧毓이 對答했다. “名聲만으로는 뛰어난 사람을 뽑기에 不足하고 平凡한 선비만 얻을 수 있습니다. 平凡한 선비는 가르침을 두려워하고 善을 欽慕함으로써 名聲을 얻는 것이므로 이를 미워할 바는 아닙니다. ······ 옛날에는 말로써 아뢰고 功으로써 公正하게 試驗했습니다. 只今은 試驗 制度가 廢止되어 誹謗과 稱讚으로써 進退가 決定되므로 眞짜와 가짜가 뒤섞여 있고, 虛와 實을 가리기 어려운 狀況입니다.”
(時擧中書郞, 詔曰, 得其人與, 在盧生耳. 選擧莫取有名, 名如畵地作餠, 不可啖也. 毓對曰, 名不足以致異人, 而可以得常士. 常士畏敎慕善, 然後有名, 非所當疾也. ······ 故古者敷奏以言, 明試以功. 今考績之法廢, 而以毁譽相進退. 故眞僞渾雜, 虛實相蒙.)」
이 이야기는 《三國志 · 魏書 盧傳》에 나오는데, 明帝의 말에서 ‘畵甁充饑’가 由來했다. 그림의 떡이라는 뜻의 ‘畵中之餠’이라고도 한다
39. 화호유구(畵虎類狗)
호랑이를 그리려다 개처럼 그린다. 는 뜻으로, 큰 욕심이나 무모한 모방이 실패로 돌아가 오히려 망신만 남는 상황을 비유할 때 쓴다.
後漢 光武帝 (BC 6~AD 57) 時代의
馬援 (BC 14 ~ AD 49) 이라는 將軍이 前方의 兵營에서 後方에 사는 그의 子息들에게 보냈다는 便紙가 생각난다.
‘나는 너희들이 남의 잘못 듣기를 父母님 이름 듣듯이 하기를 바란다. 卽 귀로는 들을 수 있지만, 입으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남의 長短點을 말하기 좋아하고, 함부로 바른 法을 是非하는 것을 나는 매우 싫어한다.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子孫들이 그런 짓을 한다는 소리는 듣기 싫다. 너희들도 내가 매우 싫어한다는 걸 알겠지만, 그런데도 다시 말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기 爲해서다.
龍伯高는 穩厚하고 愼重하며 儉素하고 謙遜하면서도 威嚴이 있다. 나는 그를 愛之重之하니, 너희들이 그를 本받기 바란다.
杜季良은 豪放하고 義俠心이 있으며, 남의 근심을 함께 걱정하고 남의 즐거움을 함께 즐거워한다. 그의 아버지 葬禮式 때는 여러 고을에서 問喪客이 찾아왔을 程度다. 나 또한 그를 愛之重之하지만, 너희들이 本받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龍伯高를 本받으면 設使 그처럼 되지 못해도 正直하고 謹愼하는 선비는 될 수 있다. 所謂 고니를 그리려다 成功하지 못해도 집오리 비슷하게는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杜季良을 本받다가 그처럼 되지 못하면 天下에 輕薄한 사람이 되고 만다. 所謂 ‘호랑이를 그리려다 成功하지 못하면 도리어 개와 비슷하게 된다.
(畵虎不成 反類狗者)’ 는 것이다.
40. 환골탈태(換骨奪胎) = 탈태환골(奪胎換骨, 夺胎换骨)
뼈를 바꾸고 胎를 빼내다.
환골(換骨)은 옛사람의 詩文을 본떠서 語句를 만드는 것을 말하고, 탈태(奪胎)는 古詩의 뜻을 본떠서 原詩와 多小 다른 뜻을 가지게 짓는 것을 말한다.
탈태환골(奪胎換骨)은 다른 사람의 글에서 그 形式이나 內容을 模倣하여 自己 作品으로 꾸미는 일이나, 容貌를 바꾸어 딴 사람처럼 된 것을 比喩하는 말이다.
「黃山谷이 말했다. 詩의 뜻은 無窮한데 사람의 才주는 限이 있다. 限이 있는 才주로 無窮한 뜻을 좇는다는 것은 비록 陶淵明이나 杜甫라 할지라도 巧妙하게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을 바꾸지 않고 그 말을 만드는 것을 가리켜 換骨法이라 하고, 그 뜻을 本받아 形容하는 것을 가리켜 奪胎法이라 한다.
(詩意無窮, 而人之才有限. 以有限之才, 追無窮之意, 雖淵明少陵不能工也. 然不易其意而造其語, 謂之換骨法. 窺入其意而形容之, 謂之奪胎法.)」
이 이야기는 南宋 惠洪의 《冷齋夜話》에 나오는데, 換骨法과 奪胎法이 합해져 ‘ 奪胎換骨'이 되었다. ‘奪胎換骨’은 ‘換骨奪胎’라고도 한다.
41. 황학루(黃鶴樓)
盛唐 최호(崔顥 704 推定 ~ 754年)의 詩
昔人已乘黃鶴去 : 옛 사람 이미 黃鶴 타고 떠나버렸으니
此地空餘黃鶴樓 : 이곳에는 부질없이 黃鶴樓만 남았구나.
黃鶴一去不復返 : 黃鶴은 한 番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고
白雲千載空悠悠 : 흰 구름만 千 年 동안 그대로 閑暇로이 떠도네.
晴川歷歷漢陽樹 : 개인 날 江 너머 漢陽 땅 숲이 또렷하게 보이고
芳草萋萋鸚鵡洲 : 싱그러운 풀들은 鸚鵡州에 茂盛하게 자랐구나.
日暮鄕關何處是 : 날은 저무는데 내 故鄕 땅은 어느 곳에 있는고?
煙波江上使人愁 : 江 위에 떠있는 물안개가 나로 하여금 愁心에 젖게 하네.
* 黃鶴樓 ~ 후베이省(湖北省) 武漢市 長江 기슭에 있는 樓閣으로 후난省(湖南省) 웨양市 (岳陽市)의 岳陽樓, 장시省(江西省) 난창시(南昌市)의 滕王閣과 함께 江南 3代 名樓의 하나이다. 寰宇記에 蜀의 費褘가 神仙이 되어 黃鶴을 타고 여기 와 쉬었다 하여 이 이름이 由來되었다고도 하고, 武昌誌에는 辛氏가 開設한 酒店에 한 老人(仙人)이 몇달을 外上술을 마셨으나 主人은 늘 變함 없이 極盡히 待接해 주었다. 어느날 老人이 떠나면서 充分한 外上 술값이 되리라며 橘껍질로 壁에 한 마리 鶴을 그려주었다. 壁에 그려진 누런 鶴(黃鶴)은 손님이 오기만 하면 춤을 추었다. 이 所聞이 世上에 퍼지면서, 장사는 날로 繁昌하여 富者가 되었다. 10年 後 어느날 그 老人이 다시 찾아와 이제 外上술값을 다 치른것 같다며 鶴을 타고 구름위로 사라졌다.
辛氏는 感慨無量하여 黃鶴 道士를 記念하기 위해 이곳에 樓閣을 세우고 黃鶴樓라 했다고도 한다. 또 齊諧志에는 仙人 王子安이 黃鶴을 타고 이곳을 지나 近處의 山으로 올라가 山 이름이 黃鶴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後代에 사람들이 山頂에 樓閣을 만들어 黃鶴樓라고 稱하였다고 한다.
* 昔人 ~ ‘옛 사람’이란 뜻으로 仙人 子安을 가리킨다.
* 千載 ~ 오랜 勢月, 千 年을 뜻한다. 좀처럼 얻기 어려운 機會를 千載一遇라고 한다.
* 漢陽 ~ 武漢市 西쪽에 있던 地名으로 漢陽縣이었고 晴川閣이 있다고 한다.
* 鸚鵡洲 ~ 漢水와 長江 合流 地點에 있는 모래톱 섬을 가리킨다. 後漢의 江夏太守 黃祖가 禰衡을 죽인 곳으로, 禰衡은 文人으로 單숨에 글을 잘 짓는 才주로 독수리에 비기기도 했고, 曹操를 侮辱하다가 쫓겨나 黃祖에게 依支해 ‘鸚鵡賦’를 지어 稱讚을 받기도 했으나 黃祖의 脾胃를 거슬려 被殺 當하니, 鸚鵡洲는 그의 ‘鸚鵡賦’에서 따 이름 붙였다고 하는데, 鸚鵡새를 바친 사람이 있어 이름 삼았다는 異說도 있다.
이 詩는 唐詩 七言律詩 가운데 最高의 作品으로 評價 되며, 題目을 ‘登黃鶴樓’라 하기도 한다. 一說에 따르면 天寶 3年에 李白이 黃鶴樓에 올라 즐기고 있다가 崔顥의 詩를 보고는 크게 感服하였으며, 창강(長江)의 그림 같은 風景을 詩로 쓰고자 하였으나 崔顥의 境地를 뛰어넘지 못함을 嘆息하며
“眼前有景道不得 崔顥詩在其上頭” (눈앞에 아름다운 景致가 있어도 詩를 짓지 못하는 것은 崔顥의 詩가 맨 위에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배를 타고 江南으로 떠났다고 傳한다.
李白은 그 後 金陵의 鳳凰臺에 올라 有名한 鳳凰臺 詩를 지어 崔顥의 黃鶴樓 詩와 雙璧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詩의 首聯은 옛날 이 아름다운 黃鶴樓를 짓고 風月을 하며 神仙처럼 살던 사람이 죽고 없는 것을 黃鶴을 타고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傳說上의 仙人을 憧憬했다. 이어서 頷聯에서는 主人이 없는 빈 樓閣만 남은 그 하늘에 흰 구름이 千 年 동안 悠悠히 떠있다며 首聯에서의 憧憬이 헛된 것임을 흰 구름에 依託해 詩想을 이었다. 頸聯은 頷聯과 함께 詩作法대로 對句로 構成하여 눈앞에 펼쳐지는 뛰어난 景致로 詩想을 轉換했다. 그리고 尾聯에서는 아름다운 景致에 醉하여 하루해가 다 가는 줄도 모르고 바라보다가 문득 해가 지는데 黃鶴樓 景致와는 對照的으로 갈 곳 없는 自身의 초라한 行色을 돌아보며 望鄕과 함께 나그네의 시름을 읊으며 詩를 끝내고 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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