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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한자성어(漢字成語)**/고사성어(故事成語)

고사성어(故事成語) (ㅈ- 3 조명시리~ )

by 산산바다 2026. 3. 7.

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글 목록

 

 

 고사성어(故事成語) (- 3 조명시리~ )

 

 

21. 조명시리(朝名市利)

名聲朝廷에서 다투고 利益은 저자에서 다투어라. 무슨 일이든 에 맞는 곳에서 해야된다는 것을 比喩

 

나라 惠王 , 사마조(司馬錯)張儀惠王 앞에서 爭論을 벌였는데, 司馬錯征伐하면 國土도 넓어지고 財物도 쌓일 것이므로 一擧兩得이라며 을 칠 것을 主張했다. 張儀는 다음과 같이 主張했다. “나라는 于先 魏두 나라와 友互 關係를 맺고, 나라의 三川 地方으로 出兵後 周나라의 外廓威脅하면 나라는 스스로 九鼎, (天子象徵하는 寶物)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그 寶物을 내놓을 것입니다. 그때 天子를 끼고 天下號令하면 누가 服從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王業이라는 것입니다.

只今 蜀西쪽의 偏僻된 나라로 오랑캐의 우두머리입니다. 征伐해 봐야 軍士百姓疲弊케 할 뿐 名利를 이룰 수 없으며, 그 땅을 빼앗아 봐야 아무런 利得이 없습니다. 이 듣자니 名聲朝廷에서 다투고 利益은 저자에서 다툰다.’고 합니다. 只今 三川 地方天下의 저자이고, 나라 王室天下朝廷입니다. 께서 이것을 다투려 하지 않고 오랑캐의 을 다투면 王業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今夫蜀, 西辟之國, 而戎狄之長也. 弊兵勞衆, 不足以成名. 得其地不足以爲利. 臣聞爭名者於朝, 爭利者於市. 今三川, 周室天下之市朝也. 而王不爭焉, 顧爭於戎狄, 去王業遠矣.)

 

그러나 惠王張儀進言을 받아들이는 代身, 司馬錯進言에 따라 의 오랑캐를 征伐하고 國土를 넓히는 데 注力했다.

* 戰國策 秦策에 나온다.

 

 

22. 조삼모사(朝三暮四)

아침에 세 , 저녁에 네 . 잔꾀로 남을 속이는 것을 比喩

 

나라에 狙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원숭이를 사랑하여 여러 마리를 길렀다. 狙公은 원숭이들의 뜻을 알 수 있었으며, 원숭이들 亦是 狙公의 마음을 알았다. 狙公은 집안 食口들의 먹을 것을 줄여 가면서 원숭이의 欲求를 채워 주었다. 그러나 얼마 먹이가 떨어져 가서 앞으로 그 먹이를 줄이려고 했으나, 원숭이들이 말을 잘 듣지 않을 것을 憂慮하여 먼저 속임수를 써 말했다. “너희에게 도토리를 주되 아침에 세 를 주고 저녁에 네 를 주겠다. 滿足하겠느냐?” 원숭이들이 다 일어나서 를 냈다. 狙公은 바로 말을 바꾸었다. “너희에게 도토리를 주되 아침에 네 를 주고 저녁에 세 를 주겠다. 滿足하겠느냐?” 여러 원숭이가 다 엎드려 절하고 기뻐하였다.

(宋有狙公者, 愛狙, 養之成羣. 能解狙之意, 狙亦得公之心. 損其家口, 充狙之欲. 俄而匱焉, 將限其食. 恐衆狙之不馴於己也, 先誑之曰, 與若芧, 朝三而暮四, 足乎. 衆狙皆起而怒. 俄而曰, 與若芧, 朝四而暮三, 足乎. 衆狙皆伏而喜.)

 

이 이야기는 列子 黃帝에 나온다. 列子는 이 이야기를 쓴 뒤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事物知慧로써 서로를 속이는 것이 다 이와 같다. 聖人知慧로써 어리석은 群衆들을 속이는데, 亦是 狙公智慧로 원숭이들을 속이는 것과 같다. 이름과 實狀을 훼손(毁損)하지 않고 그들을 기쁘게도 하고 하게도 한다.

(物之以能鄙相籠, 皆猶此也. 聖人以智籠群愚, 亦狙公之以智籠衆狙也. 名實不虧亏, 使其喜怒哉.)

 

朝三暮四莊子 齊物論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음을 괴롭혀서 하나로 만들려고만 했지, 본디 同一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을 일러 朝三이라고 한다. 朝三이란 무엇인가? 狙公이 도토리를 주려고 하면서 아침에는 세 , 저녁에는 네 를 주겠다.”고 하였더니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내었다. “그러면 아침에 네 , 저녁에 세 를 주겠다.”고 하였더니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는 말이 그것이다. 이름과 實狀에 다름이 없는데도 기쁨과 성냄의 作用은 달랐으니, 이는 또한 主觀的判斷으로 해서이다. 그러므로 聖人是非調和시켜 自然에 맡겨 가지런히 만든다. 이를 옳고 그름이 함께한다고 하는 것이다.

(勞神明爲一, 而不知其同也, 謂之朝三. 何謂朝三. , 狙公賦芧, , 朝三而暮四, 衆狙皆怒. , 然則朝四而暮三, 衆狙皆悅. 名實未虧, 而喜怒爲用, 亦因是也. 是以聖人和之以是非, 而休乎天釣, 是之謂兩行.)

 

 

23. 종남첩경(終南捷徑) 终南捷径

終南山이 지름길이다. 어떤 目的達成하기 위한 便法的手段比喩

 

盛唐時代에는 世上距離를 두고 숨어 사는 隱者名利超然하고 學問이 높은 高邁한 선비로 여기는 風潮가 있었으며, 朝廷에서는 이런 사람을 官吏招聘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過去隱去政治 舞臺로 나서는 지름길로 여기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속에 隱去했다가 이름이 알려지면 官吏招聘되는 일이 잦았다.

 

盧藏用이라는 書生進士登用되지 못하자 長安 附近終南山으로 들어가 隱居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隨駕隱士 (帝王御駕를 뒤쫓는 隱士)라 불렀다. 盧藏用隱者行勢한 지 얼마 되지 않아 名聲을 얻었고, 마침내 뜻한 바대로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다. 그 무렵, 司馬承幀이라는 道士天臺山隱居하고 있었는데, 朝廷에서는 그가 賢人이라는 所聞을 듣고 여러 차례 그를 招聘하려 했으나 그는 眞實로 벼슬에 뜻이 없었기 때문에 拒絶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司馬承幀皇帝의 부름을 받아 下山하였다가 으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盧藏用終南山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안에도 아주 좋은 곳이 있답니다.” 司馬承幀이 천천히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終南山但只 官吏가 되는 지름길일 뿐이오.” 盧藏用은 부끄러워했다.

(司馬承禎嘗召至闕下, 將還山, 藏用指終南曰, 此中大有嘉處. 承禎徐曰, 以僕觀之, 乃仕宦之捷徑. 藏用慚.)

 

이 이야기는 新唐書 盧藏用傳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由來하여 終南捷徑出世의 지름길을 比喩하거나, 目的達成하기 便法的手段動員하는 것을 諷刺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24. 종호귀산(縱虎歸山) 纵虎归山

호랑이를 풀어 놓아 산으로 돌아가게 하다. 禍根을 남겨 두는 것을 比喩

 

劉備徐州呂布와 싸워서 한 뒤 曹操를 찾아가 依託했다. 曹操劉備를 기꺼이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어 歡迎하고 豫州牧했다. 그러자 程昱이 말했다. “劉備는 큰 뜻을 품고 있으며 英雄氣槪가 있습니다. 只今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禍根이 될 것입니다.” 郭嘉反對하며 말했다. “依支해 온 사람을 죽인다면 丞相名譽損傷시키고 天下 統一放害가 될 것입니다.” 曹操郭嘉意見을 따랐다.

 

이듬해, 袁術玉璽를 가지고 冀州袁紹를 찾아가 皇帝에 오를 것을 하려고 한다는 所聞이 들렸다. 劉備는 그 말을 듣고 이 機會曹操로부터 脫出할 생각을 하고 曹操에게 말했다. “袁術袁紹를 찾아가려면 반드시 徐州를 지나갈 것입니다. 제가 部隊를 이끌고 이들을 쳐서 袁術을 사로잡아 오겠습니다.” 다음 날, 劉備獻帝拜謁하고 出征許諾받았다. 曹操劉備에게 軍士 5을 주고 朱靈路昭를 딸려 보내 劉備監視하게 하였다. 劉備許昌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침 外地로 나가 있던 程昱郭嘉가 돌아와 曹操를 찾았다.

 

程昱이 말했다. “劉備豫州牧으로 있을 때 없애라고 말씀드렸는데 丞相께서는 듣지 않았습니다. 只今 그에게 兵馬를 주는 것은 을 바다에 풀어 놓고 호랑이를 풀어 놓아 으로 돌려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나중에 가서 다스리려고 하면 그게 可能하겠습니까?”

(程昱曰, 昔劉備爲豫州牧時, 某等請殺之. 丞相不聽. 今日又與之兵, 此放龍入海, 縱虎歸山也. 後欲治之, 其可得乎.)

曹操히 사람을 보내어 撤軍하였지만, 劉備는 듣지 않았다.

* 三國演義 第21에 나온다.

 

 

25. 좌고우면(左顧右眄) 左顾右眄

를 바라보고 를 돌아보다. 여러 갈래로 생각하고 仔細히 살펴보는 것을 말한다. 또는, 決斷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을 比喩

 

(曹植)이 아룁니다. 季重 足下官吏登用되어 저와 가깝게 자리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여러 날 잔치 자리에서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만나는 일이 드물어져 오히려 쌓인 勞苦를 다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을 올리면 앞에서 물결이 넘실거리는 것 같고, 퉁소와 피리가 뒤에서 겹게 演奏되면 하는 그 風采를 독수리처럼 드날려서 鳳凰歎服하고 호랑이가 凝視하는 것과 같으니, 蕭何曹參도 그대의 짝이 될 수 없고, 衛靑霍去病도 그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왼쪽을 돌아보고 오른쪽을 살펴보아도 사람다운 사람이 없다고 하실 것이니, 어찌 當身한 뜻이 아니겠습니까. 고깃집 앞을 지나가면서 크게 씹는 흉내를 내면, 비록 고기를 못 먹었더라도 하고 痛快한 뜻일 것입니다.

(植白, 季重足下, 前日雖因常調, 得爲密坐. 雖燕飮彌日, 其於別遠會稀, 猶不盡其勞積也. 若夫觴酌凌波於前, 簫笳發音於後, 足下鷹揚其體, 鳳歎虎視, 謂蕭曹不足儔, 衛霍不足侔也. 左顧右眄, 謂若無人, 豈非吾子壯志哉. 過屠門而大嚼, 雖不得肉, 貴且快意.)

 

이 이야기는 曹植與吳季重書에 나온다. ‘左顧右眄元來 左右를 살펴보아도 自己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自身滿滿한 모습을 形容하는 말이었는데, 에 그 意味가 바뀌어 이리저리 仔細히 살피는 모습, 또는 어떤 일에 대한 考慮가 지나쳐서 決斷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吳季重朝家長官을 지낸 사람으로 本名吳質이며, 季重은 그의 이다. 蕭何曹參漢高祖 劉邦을 도와 天下統一하고 나라를 創業參謀들이고, 衛靑霍去病漢武帝將軍들로 匈奴征伐名將들이다.

 

 

26. 주마등(走馬燈) 走马灯

두 겹으로 된 틀의 안쪽에 갖가지 그림을 붙여 놓고 을 켠 후 틀을 돌려 그림이 바깥쪽에 비치게 만든 을 말한다. 여기에서 由來하여, ‘走馬燈事物이 덧없이 빨리 하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使用된다.

 

正月 보름에 燈 市場을 열어 소나무잎을 모아 사거리로 하는 곳의 울타리에 엮어 놓고 그 아래에 華麗을 건다. 에는 여러 種類가 있는데 그 안에 종이로 만든 사람과 말을 걸어 놓고 불을 回轉시키는 것을 일러 走馬燈이라 했다.

(正月上日作燈市, 採松葉結柵子於通衢, 下綴華燈, 燈有諸品. 其懸紙人馬於中以火運, 曰走馬燈)

* 荊楚歲時記.

 

中國古代부터 正月 보름날에 各樣各色을 다는 風習이 있었는데, 中 代表的인 것이 바로 走馬燈이다. 위에 둥근 圓盤을 올려놓고 圓盤의 가장자리를 따라 말이 달리는 그림을 붙인 , 밑에서 촛불을 밝히면 燈 內部空氣對流現像을 일으켜 圓盤을 돌게 하는데, 圓盤이 돌면 마치 말이 疾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走馬燈이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由來하여, ‘走馬燈歲月의 빠름이나 어떤 事物이 하루가 다르게 하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27. 주지육림(酒池肉林)

술로 만든 못과 고기로 이룬 숲. 극히 호사(豪奢)스럽고 방탕(放蕩)한 술잔치를 比喩

 

나라의 마지막 王 桀荒淫無道하고 貪慾스러웠으나 남다른 힘과 知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를 無氣力하게 만들고 나라를 하게 한 女人이 있었는데, 바로 妺喜라는 女子이다. 桀王이 한창때, 有施氏小國攻擊했다. 有施氏對抗할 힘이 없어 많은 進上品을 바치고 降服했다. 進上品 가운데 妺喜라는 女人이 끼어 있었다. 桀王妺喜에게 한눈에 반해 빠지고 말았다. 妺喜宮闕을 다시 짓게 하고, 酒池肉林을 만들어 跌宕하게 놀면서 腐敗하게 만들었다. 妺喜는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을 꾸미어 夏 王朝國力을 기울게 만들었다. 桀王의 이런 行態를 보다 못 한 賢臣 關龍逢은 눈물을 흘리면서 하다가 斬首되고 말았으며, 膳官 (宮闕廚房을 맡은 官吏) 伊尹忠諫을 듣지 않는 桀王을 버리고 當時 商나라의 首都였던 박()으로 逃亡)을 섬겨 나라 創業一等 功臣이 되었다. 當時 湯王을 갖춘 君長으로 諸侯들의 協力을 얻어 國力擴張해 가고 있었다. 桀王橫暴가 날로 滋甚하여 百姓들의 마음이 그를 떠났다는 것을 안 湯王은 드디어 桀王 打倒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桀王鳴條의 싸움에서 大敗하여 달아나다가 南巢에서 죽었다. 이로써 初代 王 禹로부터 17代 王 桀까지 500에 걸쳐(BC22世紀BC17世紀) 存在하였던 中國 最初王朝였던 나라는 을 닫고 말았으며, 湯王나라가 그 자리를 代身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史記 夏本紀에 나온다.

 

그런데 나라(나라)의 마지막 紂王나라 마지막 王 桀王前轍을 밟고 말았다. 紂王資質이 뛰어나고 識見이 높았으며, 頭腦明晳하여 남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聰明할 뿐 아니라 勇力도 뛰어나 猛獸를 맨주먹으로 때려잡을 程度로 뛰어난 體力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뛰어난 資質을 쌓는 데 쓰지 않고, 自慢에 빠져 臣下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뛰어난 입담으로 自身非行合理化하거나 덮어 버렸다. 그는 天下自己보다 나은 사람은 存在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酒色享樂해서도 아주 豪宕하여 妲己라는 女人에게 빠지고 말았다. 妲己有蘇氏의 딸로서, 일찍이 紂王有蘇氏討伐했을 때 戰利品으로 獲得美女였다. 紂王妲己를 얻고 아주 기뻐했으며, 妲己의 아름답고 妖艶姿態에 빠져 그歡心을 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했다. 紂王妲己하는 대로 宮中音樂을 더욱 官能的이고 奔放音樂으로 바꾸고, 首都 朝歌鹿臺라는 巨大金庫를 만들어 무거운 稅金으로 그 金庫를 채웠으며, 鉅橋穀食 倉庫를 세워 穀食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沙丘離宮을 더욱 擴張하여 그 안에 길짐승과 날짐승을 놓아길렀다. 그는 鬼神해서도 傲慢하고 不敬했다. 紂王은 또한 妲己을 받아들여 술로 채운 못과 고기 按酒를 매단 나무로 이루어진 酒池肉林을 만들어 많은 알몸의 男女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게 하고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益廣沙丘苑臺, 多取野獸飛鳥置其中. 慢於鬼神. 大聚樂歡於沙丘, 以酒爲池, 懸肉爲林, 使男女裸相逐其間, 爲長夜之飮.)

 

不平을 하는 百姓들에 恐怖政治一環으로 불구덩이 위에 기름을 칠한 구리 기둥을 걸어 놓고 그 위를 걷게 하는 炮烙施行하였다. 當時 殷 王朝에는 天子政治輔佐하는 三公으로 西伯昌(周文王), 九侯, 鄂侯가 있었다. 九侯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어 紂王夫人이 되었는데 紂王에게 죽임을 하였으며, 九侯도 죽임을 하여 그 屍體가 젓으로 담가졌다. 鄂侯가 이를 하다가 亦是 죽임을 하고 屍體로 만들어졌다. 西伯 昌은 이를 듣고 嘆息하다가 유리(羑里)에 갇히고 말았다. 西伯家臣들이 紂王에게 美女財物을 바치고 그를 釋放시켰다. 西伯自身領土一部洛西의 땅을 바치고 炮烙免除받은 , 自己 땅으로 돌아갔다. 忠臣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紂王하였지만 大部分이 죽임을 하거나 스스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王子 比干하다가 心臟을 갈기갈기 찢겼으며, 箕子에 갇혔다. 紂王은 이 밖에도 姙娠女子의 배를 가르고, 뼈가 시려 을 건너지 못하는 老人의 다리를 자르는 , 暴惡한 짓을 恣行하였다.

 

西伯 昌이 죽고 그의 아들 이 그 뒤를 이었으니, 그가 바로 나라의 公式的初代 王武王이다. 武王은 아버지 西伯 昌文王으로 追贈하고 太公望 呂尙師傅로 삼아 民心을 끌어모으고 軍隊整備하여 暴惡紂王膺懲하기 準備를 해 나갔다. 그리고 때가 되자 武王紂王하기 쪽을 進軍繼續하여 郊外牧野 (河南 淇縣 西南)에서 을 쳤다. 紂王70兵力動員해서 牧野로 나왔다. 하지만 紂王暴政에 시달리던 나라 大部分軍隊武王討伐鶴首苦待하고 있었으므로 降服하지 않으면 나라 軍隊加擔해 버렸다. 나라 軍隊一敗塗地하고 말았고, 紂王牧野에서 逃亡首道 趙歌에 있는 鹿臺 위로 올라가 불을 지른 , 寶石으로 裝飾한 옷을 입고 그 속으로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史記 殷本紀史記 周本紀에 나오는데, 나라의 桀王나라의 紂王各各 妺喜妲己에 빠져 술로 채운 못과 고기 按酒를 매단 나무로 숲을 만들어 즐겼다는 말에서 酒池肉林由來했다.

 

 

28. 죽림칠현(竹林七賢) 竹林七贤

대나무 수풀 속의 일곱 賢人. 三國時代의 위()나라 末期 사마씨(司馬氏) 一族들이 國政掌握하고 전횡(專橫)을 일삼자 이에 등을 돌리고, 老莊無爲自然 思想深醉하여 當時 社會諷刺하고 傍觀者的立場했던 知識人들을 말한다.

 

이들 완적(阮籍) · 혜강(嵆康) · 산도(山濤) · 향수(向秀) · 유령(劉伶) · 완함(阮咸) · 왕융(王戎) 7竹林七賢이라 한다. 이들은 나라의 황위(皇位)를 찬탈(簒奪)하고 나라를 세운 司馬炎 等 司馬氏 一族에 회유(懷柔)당해 解散되었다. 하지만 혜강(嵆康)만은 끝까지 司馬氏의 회유(懷柔)를 뿌리치다 結局 死刑을 당했다.

 

竹林七賢이란 名稱은 다음의 典籍들에서 由來했다.

 

陳留阮籍, 譙國嵆康, 河內山濤 等 阮籍이 나이가 비슷한데 嵆康이 조금 어렸다. 이 모임에 參與沛國劉伶, 陳留阮咸, 河內向秀, 琅邪(낭야)王戎이었다. 이 일곱 사람이 恒常 竹林의 아래에 모여 마음 내키는 대로 술을 즐기며 지냈으므로, 世上에서 그들을 竹林七賢이라 불렀다.

(陳留阮籍, 譙國嵆康, 河內山濤, 三人年皆相比, 康年少亞之. 預此契者, 沛國劉伶, 陳留阮咸, 河內向秀, 琅邪王戎. 七人相集於竹林之下, 肆意酣暢, 故世爲竹林七賢)

* 世說新語 任誕.

 

阮咸仲容으로, 性品活達하고 拘束받는 것을 싫어했다. 叔父阮籍과 함께 竹林에서 노닐었다. (咸字仲容, 任達不拘, 與叔父籍爲竹林之遊.)

* 晉書 阮咸傳.

 

이들 以後亂世를 살면서 世俗의 어지러움에 휩쓸리지 않고 山水에 묻혀 사는 風潮盛行하기 始作했다. ‘竹林七賢人物들은 種種 故事成語主人公이나 附隨的人物登場하는데, 阮籍江東步兵’, ‘金蘭之交’, ‘得義忘形’, ‘未能免俗’, ‘白眼視에 나오고, 嵆康鶴立鷄群’, ‘金蘭之交에 나오며, 山濤金蘭之交’, ‘泥醉에 나오고, 阮咸未能免俗’, ‘野渡花爭發에 나오며, 王戎道傍苦李에 나온다.

 

 

29. 죽두목설(竹頭木屑) 竹头木屑

대나무 조각과 톱밥. 쓸모가 없거나 하찮은 것도 모아 두면 후에 긴히 쓰일 수 있다는 것을 比喩

 

나라 , 鄱陽 사람 陶侃은 매우 淸廉하고 儉素生活을 하는 官吏였다. 그는 어릴 때 父親을 여의고 偏母膝下에서 자랐으며, 집안 살림도 넉넉하지 못했다. 陶侃이 젊었을 때 養魚場管理하는 下級 官吏로 있었는데, 어느 날 절인 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와서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어머니는 기뻐하기는 커녕 오히려 나라의 物件을 가져온 아들을 꾸짖었다. 陶侃廣州刺史를 지낼 때, 公務가 없는 날은 閑暇롭게 지내지 않고 每日 아침 一百 個의 벽돌을 書齋 밖으로 옮겨 놓았다가 저녁에는 다시 書齋로 날라 들이곤 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陶侃對答했다. “中原收復하기 해 힘을 쏟아야 하는데, 安逸生活을 하다 보면 나중에 그 일을 堪當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그러는 것이오.” 그는 이런 으로 意志와 힘을 길렀다. 陶侃은 무엇을 하든지 恒常 節約하였다.

 

은 배를 만드는 일을 管理하게 되었는데, 배를 만드는 過程에서 남은 대나무 조각과 톱밥 을 사람들을 시켜 全部 모아 記錄해 놓도록 指示했는데 모두들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새해 모임이 있던 날, 눈이 내린 날씨가 개자 官廳의 밖은 온통 진흙탕이 되었다. 陶侃卽時 톱밥을 꺼내 길 위에 뿌렸다. , 桓溫征伐하기 하여 兵船을 만들 때 (널빤지는 많았지만 대나무못이 不足하였는데) 陶侃保管해 두었던 대나무 조각들을 桓溫에게 보내 대나무 못으로 使用하여 배를 만들도록 하였다.

(時造船, 木屑及竹頭悉令擧掌之, 咸不解所以. 後正會, 積雪始晴, 廳舍前餘雪猶濕, 於是以屑布地. 及桓溫伐蜀, 又以侃所貯竹頭作丁裝船.)

 

이 이야기는 晉書 陶侃傳에 나오는데, 陶侃이 톱밥과 대나무 조각을 모아 두었다가 할 때에 使用한 이야기에서 竹頭木屑由來했다. 이 이야기는 世說新語 政事에도 실려 있다.

 

陶侃儉素했으며 부지런히 政事했다. 荊州刺史 再任 時에는 배를 管理하는 官吏에게 하여 톱질하고 남은 톱밥을 모두 모으게 했는데, 制限을 두지 않았다. 모두들 陶侃의 뜻을 理解하지 못했다. 正會 (正月 初하루의 集會) , 마침 눈이 쌓였다가 날이 갰는데, 官廳 廳舍 앞의 階段이 눈이 온 라 아주 질척했다. 그런데 톱밥을 깔자 조금도 問題가 없게 되었다. 官廳에서 대나무를 使用할 때는 두꺼운 대나무 뿌리를 모으게 하여 처럼 쌓아 놓았다. 桓宣武 (桓溫)땅을 征伐하기 해 배를 만들 때 모두 못으로 使用하였다.

(陶公性檢厲, 勤於事. 作荊州時, 敕船官悉錄鋸木屑, 不限多少. 咸不解此意. 後正會, 値積雪始晴, 聽事前除雪後猶濕. 於是悉用木屑覆之, 都無所妨. 官用竹, 皆令錄厚頭, 積之如山. 後桓宣武伐蜀, 裝船, 悉以作釘)

 

陶侃陶淵明曾祖父이다. 元文蒐集하다, 모으다는 뜻이고, ‘聽事官廳廳舍를 말한다.

 

 

30. 죽마고우(竹馬故友)

대나무 말을 함께 타던 벗으로, 어릴 때 아주 긴밀했던 親舊를 뜻하는 말

 

桓溫東晉8代 皇帝簡文帝때 사람으로 叛亂機微가 있는 땅을 平定하고 돌아온 威勢에 힘입어 朝野信望集中되는 바람에 임금도 함부로 할 수 없을 程度로 큰 勢力形成하게 되었다.

簡文帝桓溫暗暗裏牽制目的으로 殷浩라고 하는 사람을 拔擢하여 楊州 刺史任命하고 建武將軍이라는 官爵을 내리는 等 意式的으로 優待했다. 桓溫이 어릴 적 親舊이기도 한 殷浩學問才能이 뛰어난 人物이었는데, 그가 官職에 오른 날로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옛날의 關係無色하다 할 程度冷冷하였다.

 

그 무렵 五胡十六國의 하나인 後趙內紛發生하여 混亂스럽다는 情報가 들어왔으므로, 東晉朝廷緊張했다.

波及效果가 어떨지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便으로는 오랑캐들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을 絶好機會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論議 끝에 軍隊動員하여 쳐올라가기로 하고, 大將殷浩任命했다.

그리하여 殷浩軍隊를 이끌고 出發했는데, 途中에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싸움다운 싸움도 못 해 본 채 慘敗하고 말았다.

이에 桓溫殷浩하는 上疏를 임금한테 올렸고, 敗戰儼然過失이 있는 以上 임금도 殷浩를 감싸 주고 싶어도 감싸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殷浩結局 邊方으로 귀양(歸鄕)가고 말았고 桓溫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殷浩는 나와 어릴 때 竹馬를 같이 타고 놀던 親舊 (竹馬故友)였다오. 하지만 그는 恒常 내가 버리는 竹馬를 주워서 타곤 했지요. 그러니 그가 내 앞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當然한 일 아니겠소?”

殷浩桓溫이 끝내 불러들이지 않는 바람에 配地서 죽고 말았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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