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자이푸르(Jaipur)에서~델리(Delhi)까지 6시간 버스를 타고
2017. 2. 18.
6시간(7:30~13:30) 버스로 이동하며 창밖에 보이는 풍경을 담아본다. 오후엔 꾸뜹 미나르 승전탑을 관광하고 델리 공항에서 17:40 비행기로 인천으로 향한다.
워터팰리스를 뒤로하며 자이푸르를 출발하여 델리로 이동하였답니다.
인도는 세계 7위 면적을 가지며 인구수(1,266,883,598명 2016년)로는 세계 2위이며 수도는 뉴델리이다. 인더스 강의 도시 문명은 4대 문명 중 하나이고 불교와 자이나교가 발상지이기도 하다. 18세기부터는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1947년에 간디의 기여로 독립하였다. 내적으로 인종과 종교 갈등이 지속되었다. 주요농산물로는 쌀, 밀, 면화, 사탕수수, 고무 등이 있다. 제조업 분야에서 고도의 기술 산업이 발달했다.
델리(Delhi)는 인도 북부에 있는 도시 및 연방직할지로 인구의 대부분은 올드델리와 뉴델리에 집중해 있다. 델리 직할지는 올드델리로 알려진 델리와 새로 생긴 뉴델리와 그 주변지역으로 이루어진다. 갠지스 강의 지류인 야무나 강의 서쪽 기슭에 있으며, 펀자브 지방과 갠지스 강 유역과의 교통 중심지여서 고대부터 이 지방의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을 이루었다.
도로가에 NIMS UNIVERSITY 교문이 보이는군요.
17∼18세기에 이슬람교 무굴 제국의 수도로서 특히 번영하였으며, 다시 1912년 콜카타를 대신하여 당시 영국령 인도 전체의 수도로 정해져서 더욱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1931년 이래 남쪽 교외에 새로운 도시 뉴델리가 건설되어 정식 수도가 되었다. 올드델리는 고대 이래 7차례나 다시 건설되었으며, 현재의 것은 1638년 샤 자한제(帝)가 건설한 것으로서 샤자하나바드란 별칭이 있다.
당시의 유적으로서는 빨간 사암으로 쌓은 성벽(랄키라성)이 있고, 그 안에는 궁전이 여러 군데 있다. 그 중 특히 보석을 박은 벽이나 대리석 기둥이 서 있는 디와니이하스트 궁전은 유명하다.
또 성의 남서에는 인도 최대라고 하는 자마마스지드 이슬람교 사원이 있다. 성의 카시미리문(門) 부근은 19세기 중엽의 ‘세포이 반란’의 격전장으로서 그 기념탑도 있다.
다시 동서로 뻗어나간 큰 거리(찬도니 초크 거리)는 구시가지 중 제일의 번화가로, 상점이나 군중에게서 전통적인 인도 도시의 특색을 볼 수 있다.
또 금·은·상아 등 전통적인 미술공예품의 생산이 성하다. 델리대학·자와하를랄네루대학 및 농업·기술·의학 등의 여러 연구소가 있다.
가장 규모가 큰 이슬람사원, 자미 마스지드(JamiMasjid)
델리에는 인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슬람 사원이 있다. 이 건물을 건축한 이는 타지마할을 지은 샤 자한(ShahJahan) 황제. 그가 마지막으로 세운 건축물인 이 사원에서는 2만여 명이 동시에 알라신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를 올릴 수 있다고 한다.
인도와 이슬람 양식이 융합된 무굴 건축의 걸작인 이 사원은 1644년에 착공하여 15년 뒤인 1658년에 완공되었는데, 붉은 사암과 하얀 대리석으로 쌓아 올린 40m의 뾰족탑이 특히 볼 만하다.
두 개의 탑 중 일반인에게 공개된 남쪽의 탑에 올라서면 델리의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너비 60m, 길이 36m의 거대한 모스크, 흰 대리석 돔을 보면 인도에서 가장 큰 이슬람사원이라는 것이 실감난다.
무슬림이 인도에 들어와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8세기경부터이지만, 인도의 지배적 종교인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사이는 오랫동안 좋지 않았고 여전히 좋지 않다.
근본적으로 화합할 수 없는 사상과 문화를 가진 이들은 심각한 유혈사태를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19세기말 인도를 식민지 삼았던 영국이 분리통치정책의 일환으로 힌두-무슬림의 종파적 갈등을 이용하는 바람에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독립으로 치달으며 충돌하여 백만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현재 인도에 거주하는 무슬림은 약 1억 2천만. 소수집단인 이들은 정부의 무슬림 포용정책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도 내에서 종파갈등을 겪고 있다.
평등의 이름, 구르드와라 방글라 사힙(Gurdwara Bangla Sahib)
이곳을 방문했던 구루 하르 크리샨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
시크교도들의 성전 ‘구루드와라 방글라 사힙’은 8대 시크교 구루인 하르 크리샨이 1664년 왕의 초대로 델리를 방문했을 때 머문 곳에 지어졌다.
당시 인도 왕인 라자 자이 싱의 소유였던 이 건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황금 돔이다. 모든 순례자에게 아침 3시부터 저녁 9시까지 열려 있는 이 예배당의 동쪽에는 무료로 매일 식사를 제공하는 채식식당이 있다.
이곳을 방문하던 당시 구루 하르 크리샨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 다섯 살 때 손수건 하나로 나병환자를 낫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그는 천연두와 콜레라가 돌던 델리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빈민가를 방문하여 새 옷을 주고 치유력이 있는 성수라 알려진 방글라 사힙의 우물물을 나누어 주었다. 현재에도 이곳의 물은 치료에 효과가 있는 성수로 여겨진다. 결국 하르 크리샨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던 중 그들에게 옮은 천연두 때문에 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된다.
시크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합친 종교로, 16세기 초반에 구루인 나나크 데브(1469∼1539)가 주창했다. 시크교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신과 여신간에도 차이가 없고 남자, 여자, 부자, 가난한 자, 종교, 인종 모두 평등하다. 시크교는 카스트 제도를 거부한다.
어떤 동물도 죽이지 않는다. 시크교에 따르면, 인간은 신에 대한 사랑과 현세의 선행으로만 구제된다. 대부분의 남자신도들은 머리털과 수염을 절대 깎지 않아 외모만 보더라도 시크교도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종교를 아우른다는 바하이 사원(BahaiHouseofWorship)
바하이교는 아름다운 사원(연꽃사원)으로 더욱 알려졌다.
그토록 종교가 많은 인도. 모든 종교를 한꺼번에 아우르는 종교는 없을까? 있다. 19세기 초에 바하 올라(1817~1892)에 의해 중동에서 시작되어 1844년 인도로 들어온 ‘바하이’는 모든 종교들은 넓은 가슴으로 품는다.
이슬람교의 한 분파로 시작한 신흥종교인 바하이는 이슬람교의 ‘성전’을 거부하고 평화를 가장 큰 가치로 여긴다. 부처, 예수 등은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한 화신이라고 여긴다. “전 세계는 하나의 나라이고 인류는 그 나라의 시민들이라”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 전 인류는 형제라 여기고 모든 국가는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또 가르친다. “자기 조국을 사랑하는 자신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사랑하는 자신을 자랑해야 한다. 지구는 한 나라요, 인류는 그 백성이다”라고. 미국, 독일, 호주, 파나마 등 세계 곳곳에 사원이 있지만, 특히 델리에 있는 바하이 사원은 그 아름다움으로 눈길을 끈다.
1980년에서 86년에 걸쳐 지어진 이 사원은 연꽃의 모양이다. 이란의 건축가 파리부르즈 사바(FariburzSahba)가 설계한 이 사원은 아홉 개의 연꽃잎이 삼층으로 겹쳐져, 총 27개의 연꽃잎이 정갈하게 모여 있다. 사원 주위의 아홉 개의 연못은 연꽃을 둘러싼 푸른 잎이다. 아홉이라는 숫자가 반복되는 이유는 바하이에서 9가 통합을 의미하는 숫자이기 때문.
지름 70m, 높이 34.27m의 바하이 사원의 실내에서는 1300명이 함께 앉아 집회를 가질 수 있다. 어떤 신전과도 다른 특징은 신을 묘사하는 조각, 그림, 글씨는 물론이거니와 제단도 없다는 것이다. 방문자들이 제각각의 신에게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의자만 비치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신분, 종교와 상관없이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하고 명상할 수 있다.
철학자의 신격화, 간디 슴리티(GandhiSmriti) 라즈가트 (RAJGHAT, 간디 화장터)
간디는 인도인들 사이에서는 신에 가까운 존경을 받고 있다.
간디는 인도의 철학자이자 정치적 지도자로, 인도인들에게는 거의 신격화에 가까운 사랑을 받고 있다. 간디에게 ‘위대한 영혼’이라는 의미의 ‘마하트마’라는 호칭을 부여한 것은 인도의 시성 타고르이다.
그는 “참된 사랑이 인도문 어귀에 모습을 드러내자 문이 활짝 열렸다. 모든 망설임은 사라졌다. 진리는 진리를 불러일으켰다. 진리의 힘을 눈에 보이게 한 마하트마를 찬양하라!”고 그를 우러렀다.
1948년 1월 30일, 저녁기도를 하기위해 정원을 가로지르던 간디는 한 힌두 광신도가 쏜 총을 맞고 쓰러진다. 그때 간디의 나이 79세였다. 그가 죽기 직전 144일간 머물렀던 그의 후원자 비를라의 저택 뜰에는 그가 죽기 전에 걸어갔던 마지막 발자국이 시멘트 모형으로 남아 있다.
그 저택은 현재 ‘간디 슴리티’라는 이름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간디의 침대, 그의 둥근 안경과 지팡이, 그가 늘 곁에 두었던 물레와 신던 샌들, 책 몇 권을 볼 수 있다. 그에 관한 영화도 상영한다.
그는 살생을 하지 않는 아힘사의 계율을 지키는 한편, 비폭력을 주장했다. 그는 억압받는 이에게 증오와 이기심을 누르고 정의, 사랑, 자기희생의 정신을 갖기를 요구했는데, 그의 비폭력 정신은 억압자들에게도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인도 각지에 남아있는 간디의 흔적은 그가 아직도 인도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보여준다.
뉴델리(New Delhi)
뉴델리(New Delhi)는 인도의 수도. 인도 북부 갠지스강(江)의 지류인 야무나강 서안에 있다. 델리, 즉 흔히 올드델리로 불리는 지구의 남쪽에 펼쳐진 지구로, 두 지구와 그 주변지구가 합쳐져서 인도정부의 직할지 델리를 형성한다.
1912년 영국령 인도의 수도가 콜카타에서 델리로 옮겨진 것과 때를 같이하여 신도시 건설이 계획되어, 1927년 건설이 완료되었고 1931년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올드델리가 전통적·인도적인 도시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근대적·서구적인 외관을 보여준다.
시가지는 서쪽을 북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은 '리지'라고 부르는 구릉지대와, 동쪽을 남북방향으로 흐르는 야무나강에 둘러싸인 해발고도 218m의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기온은 1월 평균 13.8℃, 6월 평균 33.6℃이고, 강수량은 연평균 700mm 정도다. 시가지는 직교(直交)·사교(斜交)하는 많은 도로에 의해 정연하게 구획되어 있다
시가지의 중심을 이루는 곳은 서부의 중앙관청지구로, 대통령관저를 둘러싸고 장대한 여러 관공서가 자리 잡고, 원형의 국회의사당이 새로운 인도를 표상하고 있다. 관청가에서 동쪽의 전승기념문(인디아게이트)에 이르는 가로가 라지파드(옛 이름 킹스웨이), 라지파드와 직교하여 남북으로 뻗은 가로가 잔파드(옛 이름 퀸스웨이) 대로이다.
그 북쪽 끝에 있는 동심원형의 코너트 광장은 뉴델리 유일의 상점가로, 고급 상품의 쇼핑과 레크리에이션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그러나 뉴델리 전체의 분위기는 정치·외교를 중심으로 한 형식적인 작용이 강하여, 민중의 도시라는 색채는 희박하다. 그런 특색은 인구 구성면에도 반영되어, 정부 직할지인 델리 전체인구의 90% 이상이 올드델리 지구에 밀집되어 있다.
자이푸르에서 출발하여 지루한 6시간을 버스에서 보내고 델리에 도착하였군요.
어느 한국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꾸뜹 미나르 승전탑을 관람하였답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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