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경주 분황사(芬皇寺)에 들려보다.
2015. 6. 3.
산과바다는 꽃돼지님과 대릉원을 둘러보고 경주 분황사와 분황사 남쪽에 위치한 황룡사지를 둘러보았다.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절
원효(元曉)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華嚴經疏》·《금광명경소 金光明經疏》 등의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교학(敎學)이 이절을 중심으로 하여 널리 퍼지게 됨에 따라 분황사는 법성종(法性宗)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이다. 전불시대(前佛時代)의 가람터라고 전하는 칠처가람(七處伽藍) 중의 하나로서, 634년(선덕여왕 3)에 용궁(龍宮)의 북쪽에 건립되었다.
643년에 자장(慈藏)이 당나라로부터 대장경 일부와 불전(佛殿)을 장식하는 번(幡)·당(幢)·화개(花蓋) 등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한 뒤 많은 급여를 내리고 호위를 붙이는 등 대접을 극진히 하였다.
특히 원효(元曉)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華嚴經疏》·《금광명경소 金光明經疏》 등의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교학(敎學)이 이절을 중심으로 하여 널리 퍼지게 됨에 따라 분황사는 법성종(法性宗)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또 원효가 죽은 뒤 아들 설총(薛聰)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만들어서 이 절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다하였다. 하루는 설총이 옆쪽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는 원효의 소상이 남아 있었으며, 그때까지도 소상이 고개를 돌린 채로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이 절에는 솔거(率居)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있었고, 좌전(左殿)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千手大悲)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하다.
경덕왕 때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여자 희명(希明)의 아이가 다섯 살 때 갑자기 눈이 멀게 되었다. 희명은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나아가서 도천수대비가 禱千手大悲歌〉를 가르쳐 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755년(경덕왕 14)에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안하였는데, 그 무게는 30만6700근이었고, 만든 사람은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말(强古乃末)이었다.
고려시대에는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이 지은 원효의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건립되었다. 이 비는 1101년(숙종 6) 8월에 내린 숙종의 조서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숙종은 원효와 의상(義湘)이 동방의 성인인 데도 불구하고 비기(碑記)와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서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유사(有司)로 하여금 연고지에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다.
그 뒤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이 절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며,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약사여래입상을 모신 보광전(普光殿)과 승당(僧堂)·종각(鍾閣)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국보 제30호인 분황사석탑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화쟁국사비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인 석정(石井) 등이 있다.
이 중 석탑은 원래 9층이었으나 현재 3층만이 남아 있는 모전탑으로서,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헐었다고 한다. 그 뒤 절의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하여 헐었더니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출토되었는데, 그 구슬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하였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대면 불길이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이것을 백률사(栢栗寺)에 보관하였다.
화쟁국사비의 비편은 지금도 가끔씩 발견되고 있는데, 비신(碑身)을 받쳤던 비대(碑臺)는 절 근처에서 발견되어 김정희(金正喜)가 이를 확인하였다. 현재 비대에는 ‘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차신라화쟁국사지비석)’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석등·대석과 많은 초석들이 남아 있으며, 1974년의 발굴조사에서 금동보살입상과 귀면와(鬼面瓦), 신라 및 고려시대의 와당 등이 발견되었다.
또 탑 옆에 있는 석정은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고 불리는 신라시대의 우물로 틀의 외부는 8각,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圓融)의 진리를 뜻한다.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는데 795년(원성왕 11)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길을 떠났다.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사실을 아뢴 뒤 남편을 찾아줄 것을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빼앗아다 우물에 놓아주고 다시 살게 하였는데, 그 뒤부터 삼룡변어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분황사앞의 넓은터의 황룡사지에 당간지주가 보이는군요.
경주에 있는 원효대사가 머물렀다는 분황사와 황룡사지를 들러보았답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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