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산에는 꽃이 피네
禪詩/禪是佛心

趙州禪師의 무자공안(無字公案)

by 산산바다 2007. 6. 29.

산과바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조주가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趙州禪師의 무자공안(無字公案)

 

 

* 화두(話頭) - 참선(參禪)하는 이에게 도를 깨치기 위해 내는 과제(1,700종류가 있음). 공안(公案)

 

남전보원(南泉普願)의 등불을 전해 받은 사람 가운데는 유명한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선사가 있다. 조주는 어린 시절에 출가하여 남전보원에게 참학하였고, 여러 곳을 유력하다가 나이 80이 되어서야 조주성(趙州城) 동쪽 관음원(觀音院)에 정착하여 선법을 떨쳤다. 120세까지 장수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주선사는 많은 공안을 남겼는데 전회에서 서술한 무자공안(無字公案)도 그 중 하나이다. 조주선사가 남긴 유명한 공안 몇 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의 무자공안(無字公案)

중국 당나라시대 조주종심(趙州從, 778~897) 선사와 수행승 사이에 이루어진 문답에 관한 것이다. 이 내용은 훗날 중국 남송 중기 임제종(臨濟宗)에 속하는 거장 무문 혜개(無門慧開, 1183~) 화상의 저작 <무문관(無門關)>에 수록돼 있다. 무문 선사는 선가 공안 중 48칙을 뽑아 평과 설명을 붙여 <무문관>을 엮으면서 구자무불성화두를 제1칙으로 꼽았다.

 

 

어느 날 한 수행승이 조주 선사를 찾아와서 묻기를,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니, 조주 선사가 있다고 대답을 했다.

이미 불성이 있으면 어찌 그런 가죽을 썼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알면서도 짐짓 범()했느니라라고 했다.

그런데 그 후 어느 날 조주 선사의 제자인 사미(沙彌) 문원(文遠)이 개를 안고 와서 조주 선사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여쭈니, 이번에는 조주 선사가 없다()”고 답했다. 이에 문원이 되물었다.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에는 일체중생에 모두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습니까?”라고 하니, 조주 선사는,

업식성(業識性-분별심)이 있기 때문이니라.”고 했다.

그런데 조주 선사가 원래 공안(公案)을 만들기 위해 이런 문답을 나눈 것은 아니다. 다만 학인 스님이 분별로써 물었던 질문에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실상을 있는 그대로 답한 것뿐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천하의 납자(衲子)들이 모두 조주가 무엇 때문에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하는 이것을 화두(話頭)로 삼아서 오늘에 이르도록 이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를 참구하는 사람이 많다.  

불성(佛性)은 부처의 본성(本性)’ 또는 ()’을 뜻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다시피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에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해서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모든 것에는 인간과 같은 마음을 가진 중생 뿐 아니라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이름 없는 초목 등 마음을 갖지 않은 산천초목이 모두 포함된다. 그러니 에게 불성이 있음은 당연하다.

초목성불(草木成佛)을 주장한 길장(吉藏, 549~623) 스님은 무정(無情)에게도 불성을 인정한 이유를 유정과 무정 사이의 구분은 궁극적으로 공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운문 문언(雲門文偃, 864~949) 선사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무정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설했다. 이런 여러 가지 해석이 있었다.

헌데 불성(佛性)이라는 것은 수행을 통해 넣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불성(佛性)이라는 것은 형이상학적 주제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유() 혹은 무() 둘 중의 하나로 선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만약 개에게도 지능()이 있습니까?’라는 식으로 과학적 질문을 했다면, 이는 분명히 유 ? 무로 답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성의 유무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자 화두는 불성의 유무에 관한 문제로 유 ? 무 그 어느 답도 맞출 수 없고, 억지로 정답을 내 놓으라면 부처님의 침묵[무기(無記)]’ 이외의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주 선사가 ()’라고 한 것은 <열반경>의 글귀를 외워 알고 있는 제자에게 경책을 한 것이지 개의 불성 유무를 답한 것이 아니다. 조주 선사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도를 구하고자 하는 수행승이 유 ? 무의 분별심을 일으키면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성사상에 입각하면 일체중생 모두에게 불성이 있고, 개에게도 틀림없이 불성이 있는데, 왜 없다고 했을까 하고 의문을 가지고, 그 연유에 몰두해 계속 집중하되 나중에는 ()”라는 생각마저 잊어버리고, 산란됨이 없이 집중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게 될 때, ‘()’는 참구(參究)하는 단서가 됨으로써 바로 공안(公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공안을 조주무자(趙州無字)’라고도 한다.

이리하여 무문(無門慧開) 선사도 조주무자화두를 받아 깨닫는데 6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무문관>에는 이 '무자(無字)'의 탐구가 전편에 깔려 있다고 하겠다. <무문관>은 조주무자가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며, 나머지 47칙은 모두 이 조주무자를 철저히 투과했는지를 다시 점검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주무자에 대해서 무문 선사는 ()’를 종문(宗門)의 일관(一關)이라 부르고, 이 일관을 뚫고 나아가면 몸소 조주로 모실 뿐 아니라 역대 조사와 손을 잡고 함께 행동하며 더불어 견문을 나누는 즐거움을 같이 하게 된다고 했다.

()-위의 일관(一關)에서 ()’말하거나 생각하는 대상으로 하다는 뜻이다.

 

그만큼 무문(無門) 선사가 조주무자(趙州無字)를 중요하게 생각했듯이 우리나라의 선종(禪宗)에서도 깨달음을 위한 화두로서 구자무불성을 많이 채택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선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 의문을 해결해 견성(見性)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무()자를 화두로 한 간화선이 성행했다는 말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불교에서 불성사상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을 대변하는 한 단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주 선사는 원래 개에게 불성이 있을까, 없을까를 고민하는 분별심을 질책해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주의 유 ? 무는 답이 하나의 정해진 해답으로 굳어지는 것을 방비한 장치이다. 즉 의심의 뭉치를 고의로 만들어서 공부의 틀을 만들어 주고자 한 것이다. , 조주 선사가 있다라고 답했다가 다시 없다라고 해서 상호 모순되는 답을 하면서 노리는 것은 언어 외적인 것으로서, 질문한 학승에게 의단(疑團)을 만들어 주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무()자 화두는 이후 잘못 알고 깨달은 알음알이를 두드려 없애는 무기(武器)와 같은 것이 됐다. 그리고 일체 중생이 불성이 있는데 개는 어찌해서 없습니까?"라는 물음에 업식(業識)’이라고 한 것은 지식으로서 자꾸 알려고 하는 잘못된 습관을 지적한 것이다. 불성은 지식이나 습관으로는 체득할 수 없다. 업식이 있는 까닭이란 지식이나 습관으로서는 체득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체득하게 되면 그때 이 말을 알게 된다고 했다.

업식성(業識性)이란 업을 짓는 성품으로서 차별의식과 분별의식을 가리킨다.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남자다 여자다 등 흑백논리로 따지는 마음을 업식성 또는 중생심이라 한다. 조주 선사가 제자 수행승에게 없다고 한 것은, 그대가 만일 개가 짐승이라고 해서 불성이 없을 것이라고, 혹은 영리한 짐승이라 불성이 있을 것이라고, 분별심을 갖는다면, 그것은 결국 어리석은 중생심으로서 깨달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있다 없다고 하는 분별심을 갖지 말라는 말이다. 어디까지나 분별심은 망상이고, 깨달음을 막는 장애이기 때문이다. 분별은 선택을 요구하고, 선택은 집착을 낳는다. 집착은 중생심으로서 괴로움과 번뇌를 낳는다. 깨달음은 분별 망상과 집착을 여의는 데에 있다.

따라서 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있다!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싸움질 좀 그만해라! 있으면 어쩔 것이고, 없으면 어쩔 것이냐. 부질없는 망상 집어치워라! 그래도 떨쳐버릴 수 없다면 그 속에 들어가 보거라. 일단 들어가면 60일 정도 있어야 나온다. 누구든 개새끼가 돼 나온다. 이 얼마나 통렬하게 비꼬는 말인가. 개에게 불성이 있다 혹은 없다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있다, 없다고 하는 분별심을 먼저 버리는 것이다. 분별심을 가지는 한 성불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개에게 불성이 있고, 없고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 쓸데없는데 시간 보내지 말고 네가 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말이다.

또한 조주 무자(無字)에 대해 예로부터 각각 자기의 이견(異見)을 붙여서 어떤 이는 없다는 공()에 집착하고, 어떤 이는 있다는 유()에 집착하고, 어떤 이는 단견(斷見)에 집착하고 어떤 이는 상견(相見)에 집착한다.

이렇게 해서 없는 것에 집착한 이는 말하되, 조주가 무()라고 함은 만법(萬法)이 본래 없음이요, 본성(本性)이 없는 것이니 어찌 있다고 의심하겠는가 한다. 그리고 있다는 유()에 집착한 이는 조주가 무라고 한 것은 있는 것을 가르침이다. 없다고 말하는 무()가 없는 가운데 곧 있다는 것이니 어찌 또 의심하겠는가 한다. 또한 단견에 집착한 이는 조주의 무자는 만유(萬有)가 다 공()해 하나도 가히 취할 것이 없다는 말이니 무엇을 다시 의심하리요 한다. 그런가 하면, 상견에 집착한 이는 조주의 무자는 우리의 참된 성품이 항상 있어 적연(寂然)해 움직이지 않음을 뜻함이니 무엇을 다시 의심하리요 한다. 이렇게 자기들이 집착한 소견대로 주창(主唱)하고 망견망상(妄見妄想)으로 말을 해서 다른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공부를 해서 법에 대한 안목이 생겨나기 시작한 불자도 조주 선사께서 말씀하신 ()’라는 대답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비록 유무를 초월한 무()라고 여기고는 있겠지만 그것은 단지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는 알기가 쉽지 않다. ()에서는 이것을 소지장(所知章) 즉 알음알이의 장애라고 부르고 있다. 비록 깨어남의 체험으로 번뇌장(煩惱障)을 넘어섰다 하더라도 유와 무를 초월한 무()를 증득하고 소지장(所知障)을 넘어서야만 공부에 또 다른 성취를 이룰 수 있다.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말은 아무리 깨어남의 체험을 했다고 해도 바로 이해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주객(主客)이 사라진다는 말은 공()의 증득에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이러한 공()의 증득은 이 소지장(所知章)을 넘어서야만 가능하다. 경전이나 공안이나 법에 관한 모든 설명과 이해는 마음의 사용설명서일 뿐이다. 아무리 좋은 설명서를 보고 스스로는 이해가 된다고 여기고 있어도 스스로 설명서에 따라서 마음의 소멸을 이루지 못하면 그 많은 경전과 선사들의 말씀이 다만 그림의 떡이다.

 

이 화두를 참선하는 방편으로 제시한 이는 송나라의 대혜종고(大慧宗? 1089~1163) 선사로서, 당시의 승려와 속인들에게 권고해 실천하게 했다. <대혜어록(大慧語錄)>은 주로 이런 화두 공부하는 방편을 지도한 서신 문답을 모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화두에 의거해서 수행인들을 지도한 최초의 인물은 고려 중기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이다. 그는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을 지어 이 화두를 잡는 법을 명시했고, 지눌 이후 조계산 수선사(修禪社) - 지금의 순천 송광사(松廣寺)에서는 혜심(慧諶, 1178~1234)을 비롯한 16국사들이 모두 이 화두로써 참선하는 방편을 삼았으며, 그 뒤부터 수선사는 물론 다른 9산선문(九山禪門)에서도 이 화두법을 널리 채택했다. 특히 지눌은 수제자인 혜심에게 이 화두로써 수행하게 했으며, 이 화두를 들 때 일어나기 쉬운 10종의 병통(病痛)을 자세히 해설하게 했다. 이에 혜심은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을 지어서 이 화두를 잡는 방법의 지침을 제시했다.

조선 중기의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休靜, 1520~1604)<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이 화두를 경절문(徑截門)의 방편으로 삼아 수행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 뒤 우리나라의 선원에서는 이 화두를 가장 많이 채택하게 됐으며, 불교의 1,600가지 화두 중 이 화두를 깨쳐서 견성한 사람이 가장 많다.

그리고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은 간화선법(看話禪法)의 지침서로 지은 <구자무불성화간병론>에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는 화두를 들 때 생기기 쉬운 여러 가지 마음의 병통(病痛)을 열거해 놓았다.

 

즉 수행자들이 이것을 극복하고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해 지은 글인데, 요지는 아래와 같다.

개에게 불성이 있다 없다고 하는 입장에서 무()를 유()에 대응한 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무란 유무를 초월한 무이다. - 유와 무, 있고 없음의 의미를 같은 차원에서 수평적으로 인식하는 한 도저히 깨칠 수 없는 화두란 말이다.

유무에 상대되는 무가 아니라고 해서 진무(眞無)의 무, 즉 참으로 없는 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라고 한 데에는 특별한 묘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갖가지 생각으로 무의 뜻을 억지로 해석하려고 이리저리 헤아려서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미간을 찡그리고 눈을 깜짝깜짝하는 그것이 신호나 방편의 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담겨 있는 참뜻을 깨닫기 위한 의심은 하지 않고, ‘구자무불성의 자구에 집착하거나, 다른 사람의 말에서 답을 찾으려 하거나, 말 재주로써 활계(活計:살릴 계책)를 짓지 말아야 한다.

마음을 모두 비워서 생각을 하지 않아서 일 없는 굴속에 주저앉지 말아야 한다.

화두에 어떤 묘한 뜻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법의 기연이 되는 문답하는 곳에서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옛 스승이 한 말을 인증(引證)해 그 뜻을 풀이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즉 문자 중에서 인증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어느 때인가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혜심은 다시 이 열 가지 병통을 요약해서 유심(有心) ? 무심(無心) ? 언어(言語) ? 적묵(寂默)에 빠지는 것이라고 했다. , 깨달음은 유심으로도 구할 수 없고, 무심으로도 얻을 수 없으며, 언어로 지어낼 수도, 적묵으로 통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구자무불성화두에 하나의 의심덩이를 집결시켜서 오로지 무슨 뜻으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는가.’를 생각하되 마치 맹렬한 불덩이처럼 화두를 들 것을 가르쳤다. 잡념과 망상이 맹렬한 의심의 불덩이 속에서 사라지고 ()’자만이 홀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화두를 잡는 근본요령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끽다거(喫茶去). 조당집에는 이 공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주스님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여기에 온 적이 있는가?” 그러자 그 스님이 답하기를 온 적이 있습니다.” 조주가 말하길 차나 마시러 가라.”했다. 또 다른 스님에게 묻기를 일찍이 여기에 온 적이 있는가?” 스님이 답하기를 온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또 조주스님이 말하기를 차나 마시러 가라.”했다. 이에 원주가 묻기를 스님은 어찌하여 온 적이 있는 사람에게도 차를 마시러 가라하고, 온 적이 없는 사람에게도 차를 마시러 가라고 하십니까?”하니, 조주가 원주야!”하고 불렀다. 원주가 대답하자 선사가 말했다. “차나 마시러 가라.”

차나 마시러 가라[喫茶去]’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 앉아서 차나 한잔 하게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조주가 살았던 중국의 당나라 시대에는 오늘날처럼 차를 일상적으로 마시는 풍습이 없었다. 차가 일상화되는 것은 송대 이후이며, 당대에는 차가 귀해서 매일 마실 수 없었고 배가 아플 때 일종의 약처럼 마시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주가 차나 마시러 가라고 한 것은 차나 마시고 정신차려!’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 중국어에서 ()’는 분명히 가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발우거(洗鉢盂去). 조주의 공안 중에는 세발우거(발우를 씻으러 가라)’가 있다. 무문관(無門關)7칙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승이 조주스님에게 말하기를 저는 총림에 갓 들어왔으니 스승님의 가르침을 바랍니다.” 고 했다. 그러자 조주스님이 죽은 다 먹었느냐?”고 물었다. 승이 다 먹었습니다.”하니 조주스님이 발우를 씻으러 가거라.”했다. 승은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이제 막 출가한 신참스님이 어느 날 조주스님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그런데 조주는 단지 아침 죽은 다 먹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승이 다 먹었습니다고 하니 이제는 발우를 씻으러 가라고 한다. 이 말에 승은 언하에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다.

과연 이 신참의 승은 무엇을 깨달았던 것일까? 당대(唐代)의 선은 일상(日常)의 선을 강조한다. 즉 밥 먹고 똥 누고 오줌 누는 행위가 바로 선인 것이다. 여기서도 죽을 먹는 행위그 외에 별다른 도()가 없음을 보이고 있다. 죽은 다 먹었느냐?’는 조주의 말 속에 이미 가르침이 다 들어있는 것이다. 승은 이것을 깨달은 것이다.

청규가 정비된 이후에는 먹는 그 자리에서 바로 발우를 씻었지만 당대에는 아마도 옥외의 우물이나 냇가에서 발우를 씻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조주는 발우를 씻으러 가라고 했던 것이다.

 

중국 백림선사앞 <뜰앞에 잣나무니라......>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조당집에는 이 공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祖師西來意]입니까?” 그러자 조주가 대답했다.뜰 앞의 잣나무니라.” 화상께서는 경계를 들어 사람에게 보이지 마십시오.” “나는 경계를 들어 사람에게 보이지 않느니라.” 그러자 스님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조주가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달마가 서쪽(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뜻을 가리키는데, 불법(佛法)의 핵심을 말한다. 즉 질문자인 스님은 무엇이 불법의 핵심입니까?’ 하고 바로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해 조주는 절 마당에 있는 잣나무니라고 답한다. 그러자 스님은 화상께서는 경계를 들어 사람에게 보이지 마십시오하고 불만을 토로한다. 경계란 나[]인 주관과 상대되는 말로서 객관세계를 가리킨다. 바깥의 객관적인 사물로서 보이지 마십시오란 불만이다. 이에 대해 조주는 나는 객관세계로서 보인 적이 없다고 답한다. 이에 대해 스님이 다시 조사서래의를 묻자, 조주는 다시 뜰 앞의 잣나무니라고 답한다.
이 공안에서 조주가 답한 정전백수자란 나와 상대되는 개념으로서의 객관세계가 아니라, 주객이 나누어지기 이전의 사물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나와 백수자가 하나 된 세계이다.

 

진주(鎭州)의 큰무우[大蘿蔔頭]. 벽암록30칙에는 다음과 같은 공안이 실려 있다.

어떤 승이 조주에게 말했다. “들으니 스님은 남전화상을 친견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그러자 조주가 답하기를 진주에는 큰 무가 난다네.”

진주(鎭州)는 조주(趙州) 근처의 지역으로서 당시에 아마도 무[大蘿蔔頭]의 산지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조주의 답인 진주에는 큰 무가 난다네는 무슨 의미일까? 일설에는 큰 무란 조주 자신을 가리킨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 화두(話頭) 불교에서 참선수행자(參禪修行者)가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참구(參究참선하여 진리를 찾음)하는 문제. 

내용공안(公案고칙(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話頭)()’는 말이라는 뜻이고, ‘()’는 머리, 즉 앞서 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화두는 말보다 앞서 가는 것, 언어 이전의 소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참된 도를 밝힌 말 이전의 서두, 언어 이전의 소식이 화두이며, 언어 이전의 내 마음을 스스로 잡는 방법을 일러 화두법(話頭法)이라고 한다공안이라고 할 때의 ()’공중(公衆), 누구든지라는 뜻이고, ‘()’은 방안이라는 뜻이다. 누구든지 이대로만 하면 성불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불교 선종(禪宗)의 조사들이 만들어 낸 화두의 종류로는 1,700여 종류가 있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 참선수행자들이 널리 채택하여 참구한 화두는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 ‘이 무엇고?(是甚麽)’,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삼서근(麻三斤)’, ‘마른 똥막대기(乾尿橛)’ 등이다. ‘구자무불성은 무자화두(無字話頭)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의 고승들이 이 화두를 참구하고 가장 많이 도를 깨달았다고 한다. 한 승려가 조주(趙州)스님을 찾아가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를 물었을 때 ()”라고 답하여 이 화두가 생겨났다. 부처님은 일체 중생에게 틀림없이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조주스님은 왜 없다고 하였는가를 의심하는 것이 무자화두법이다.

 

 

이 무엇고?’ 是甚麽  화두는 이 몸을 움직이게 하는 참된 주인공이 무엇인가를 의심하는 것으로, 무자화두 다음으로 널리 채택되었다. 또한, 뜰 앞의 잣나무어떤 승려가 조주스님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祖師西來意)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을 때 답한 말이다. 삼서근어떤 것이 부처인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운문종(雲門宗)의 수초선사(守初禪師)가 답한 말이며, 마른 똥막대기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는 물음에 대하여 문언선사(文偃禪師)가 답한 말이다.

 

 

이와 같이 화두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고 있는 문답에 대하여 의문을 일으켜 그 해답을 구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할 때는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기를 마치 닭이 알을 품은 것과 같이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하며, 어린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화두에 대한 의심을 풀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하여 조선 중기의 고승 휴정(休靜)은 그의 선가귀감 禪家龜鑑에서 닭이 알을 안을 때에는 더운 기운이 늘 지속되고 있으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에는 마음과 눈이 움직이지 않게 되고, 주린 때 밥 생각하는 것이나 목마를 때 물 생각하는 것이나 어린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고 억지로 지어서 내는 마음이 아니므로 간절한 것이다. 참선하는 데 있어 이렇듯 간절한 마음이 없이 깨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 현대의 고승 일타선사(日陀禪師)화두를 드는 법에는 특별한 요령이 없다. 일념으로 간절히 참구하는 방법 외에는 별다른 요령이 없다. ‘간절 절()’이야말로 화두를 드는 데 있어 가장 요긴한 것이다. 간절한 일념으로 크게 의심해 나가는 것이 화두법의 가장 요긴한 점이요, 크게 의심하는 가운데 대오(大悟)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그러나 일반인들이 조사의 1,700여 가지 화두가운데 한 가지를 취하여 참선해 보면 쉽게 화두에 집중하지 못한다. 화두는 자꾸 달아나고 번뇌망상이 자꾸 스며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화두에 대하여 집중이 되지 않고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입으로 화두를 외우는 송화두법(誦話頭法)을 권하기도 한다.

 

 

입으로 계속해서 송화두를 하다 보면 굳이 입으로 하지 않아도 화두가 목구멍 속에서 저절로 나오는 염화두(念話頭) 바뀌게 되고, 그것을 놓치지 않고 계속하게 되면 일을 하거나 말을 하면서도 화두가 또렷하게 들리는 간화두(看話頭)가 이루어진다. 간화두가 되었을 때 거듭 대용맹심을 불러일으키면 참의심眞疑이 생겨나서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닌 대무심(大無心)의 경지에 들게 되는데, 이때의 화두를 참화두(參話頭)라고 한다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며칠이 지나지 않아 도를 깨치게 된다고 한다. , 화두가 또렷하게 잡혀서 놓아지지 않는 경지, 밤이나 낮이나 잠을 자나 꿈을 꾸나 항상 참화두가 되는 경지에 이르면 7일을 넘기지 않고 확철대오(廓徹大悟확연히 꿰뚫어 크게 깨우침)하게 된다.

 

 

 

산과바다 이계도

'禪詩 > 禪是佛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정스님 입적  (0) 2010.03.12
空手來空手去(공수래공수거)  (0) 2007.07.07
선禪이란? 견성성불(見性成佛)  (0) 2007.06.29
혜능대사와 六祖壇經  (0) 2007.03.20
염불(念佛)  (0) 2006.10.1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