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ㅅ-6 선종외시~ )
41. 선종외시(先從隗始) 先从隗始
먼저 곽외(郭隗)부터 始作하라.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始作하라는 말이다.
戰國時代 燕나라 昭王은 안으로는 內紛으로 混亂스럽고, 밖으로는 齊나라에 많은 領土를 빼앗겨 國力이 弱해진 狀態에서 王位에 올랐다. 昭王은 宰相 곽외(郭隗)에게 失地 回復에 必要한 人才 登用 方策을 물었다. 郭隗가 對答했다. “옛날에 어떤 王이 千 金으로 千里馬를 求하려고 하였으나 3年 동안이나 求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下級 官吏 하나가 千里馬를 求해 오겠다고 했습니다. 王은 그에게 말을 사 오라고 보냈습니다. 그는 석 달 뒤에 千里馬가 있는 곳을 알아냈으나 千里馬는 이미 죽고 없었습니다. 그는 죽은 말의 뼈를 五百 金을 주고 사 왔습니다. 王은 大怒해 말했습니다. ‘산 말을 사 오라고 했더니 죽은 말을 五百 金이나 주고 사다니.’ 官吏가 對答했습니다. ‘죽은 말의 뼈를 五百 金이나 주고 샀으니 千里馬를 가진 者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果然 1年도 지나지 않아 千里馬가 세 匹이나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제 王께서 선비들을 모으려 하신다면 먼저 이 외(隗)부터 始作하십시오. 제가 待遇를 받는 것을 보면 저보다 賢明한 사람들이 千 里를 멀다 하지 않고 몰려올 것입니다.” 昭王은 새로 宮室을 짓고 郭隗를 스승으로 모셨다.
(今王誠欲致士, 先從隗始. 隗且見事, 況賢於隗者乎. 豈遠千里哉. 於是昭王爲隗築宮而師之.)
昭王은 弟子의 禮로써 郭隗를 섬기고, 親히 大廳에 꿇어앉아 가르침을 받고, 食事 때면 손수 郭隗에게 밥상을 갖다 바치고 아침저녁으로 問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昭王은 역수(易水)가에다 높은 臺를 세우고 그 위에 많은 黃金을 쌓아 두었다. 곧, 天下의 어진 人物을 求하기 爲해서라면 그 黃金을 아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 臺를 招賢臺, 或은 黃金臺라고 한다.
昭王이 어진 선비를 求한다는 所聞은 天下에 두루 퍼졌다. 魏나라에서는 名將 樂毅가, 趙나라에서 劇辛이, 周나라에서는 蘇代가, 齊나라에서는 鄒衍이 오는 等, 天下의 선비들이 燕나라로 속속 모여들었다. 昭王은 이들의 힘을 빌려 國家를 富强하게 만든 다음, 樂懿를 上將軍으로 삼고, 晉나라 楚나라 三晉과 聯合하여 齊나라를 쳐 卽墨을 除外한 70如 個 城을 陷落시키고 지난날의 怨恨을 雪辱했다.
이 이야기는 《戰國策 燕策》에 나오는데, 郭隗가 먼저 自己부터 待遇를 하라고 한 말에서 ‘先從隗始’가 由來했다. ‘先從隗始’는 ‘先始於隗’라고도 한다.
42. 선칙제인(先則制人)
무슨 일이든 남보다 먼저 하면 有利하다. 先은 '먼저'라는 뜻이고 制人은 '사람을 制壓하다'라는 말이다.
秦始皇의 暴政에 시달려온 農民들과 各 地方 有力者들은 秦始皇이 죽자 各地에서 反亂을 일으켰다.
이때를 틈타 勢力을 다지려던 殷通은 有能한 項梁을 불러들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먼저 손을 쓰면 남을 制壓할 수 있고 남이 먼저 손을 쓰면 내가 制壓當한다고 하였소. 나는 그대의 도움을 받아 軍士를 일으키려하오."
그러자 항양(項梁)은 조카 항우(項羽)와 함께 일을 꾸몄다. 卽 項梁이 信號를 하면 項羽가 殷通을 害치기로 한 것이다.
結局 項羽는 猛烈한 氣勢로 軍士를 일으켜 殷通을 害치웠다.
43. 섭공호용(葉公好龍) 叶公好龙
섭공(葉公)이 龍을 좋아한다. 겉으로는 좋아하는 듯하지만 實際로는 좋아하지 않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子張이 魯나라의 哀公을 찾아갔으나 이레가 지나도록 哀公은 子張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子張은 哀公의 臣下에게 이렇게 傳해 달라고 付託하고 떠났다.
“저는 임금께서 선비를 좋아하신다는 所聞을 들었기 때문에 千 里를 멀다 하지 않고 서리와 이슬, 티끌과 먼지를 무릅쓰고 100舍 (1舍는 30里)의 먼 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쉬지 않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레가 지나도록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니, 임금께서 선비를 좋아하는 것은 마치 섭공 자고(葉公子高)가 龍을 좋아하는 것과 恰似합니다. 葉公 子高는 龍을 얼마나 좋아했던지 허리띠 裝飾에도 龍을 그렸고, 연못을 파도 龍 貌樣으로 했으며, 집도 모두 龍 무늬로 새겨서 꾸몄습니다. 이에 眞짜 龍이 所聞을 듣고 내려와서 머리를 窓틀에 대고 들여다보며 꼬리는 마루로 늘어뜨렸습니다. 葉公은 이를 보고 모든 것을 버리고 달아나며 精神을 잃고 顔色이 파랗게 질려 버렸다. 葉公은 龍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龍과 비슷하지만 龍이 아닌 것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只今 제가 임금께서 선비를 좋아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千 里를 멀다 하지 않고 왔는데 이레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니, 임금께서는 선비를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비 같으나 선비는 아닌 사람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詩經》에 ‘마음속 깊이 간직하니, 언제나 잊힐까나.’라고 하였습니다. 敢히 臣下에게 이 말을 付託하고 떠나갑니다.”
(子張見魯哀公, 七日而哀公不禮, 託僕夫而去曰, 臣聞君好士, 故不遠千里之外, 犯霜露, 冒塵垢, 百舍重趼, 不敢休息以見君, 七日而君不禮. 君之好士也, 有似葉公子高之好龍也. 葉公子高好龍, 鉤以寫龍, 鑿以寫龍, 屋室雕文以寫龍. 於是夫龍聞而下之, 窺頭於牖, 拖尾於堂. 葉公見之, 棄而還走, 失其魂魄, 五色無主, 是葉公非好龍也, 好夫似龍而非龍者也. 今臣聞君好士, 不遠千里之外以見君, 七日不禮, 君非好士也, 好夫似士而非士者也. 詩曰, 中心藏之, 何日忘之. 敢託而去.)」
이 이야기는 《新序 雜事》에 나온다. 葉公이 龍을 좋아해 龍 貌樣으로 온갖 裝飾을 했지만 정작 眞짜 龍을 만나게 되자 精神을 잃고 逃亡갔다는 말에서 ‘葉公好龍’이 由來하여, 겉으로는 좋아하는 듯하지만 實際로는 좋아하지 않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44. 성하지맹(城下之盟)
城 아래의 맹약(盟約). 힘에 屈服하여 屈辱的인 條約을 맺는 것을 比喩
「楚나라가 絞나라를 侵攻하여 絞나라 都城의 南門까지 肉薄해 들어갔다. 絞나라 軍士들은 城門을 굳게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楚나라의 屈瑕가 意見을 내었다. “絞나라는 작고 사람들이 輕率한데, 輕率하면 知謀가 不足합니다. 그러니 나무하는 使役兵에게 護衛兵을 붙이지 말고 내보내어 저들을 誘引하십시오.” 그 말대로 實行했더니 絞나라 사람들이 城에서 나와 楚나라 사람 30如 名을 잡아갔다. 다음 날에도 兵士들을 나무꾼으로 假裝시켜 山에서 나무하는 척하게 했더니 絞나라 사람들이 다투어 나와 山中으로 그들을 追擊했다. 미리 埋伏해 있던 楚나라 軍士들이 都城의 北門을 막고 絞나라 軍隊를 크게 쳐부순 다음, 都城의 城壁 아래에서 盟約을 맺고 돌아갔다.
(楚伐絞, 軍其南門, 莫敖. 屈瑕曰, 絞小而輕, 輕則寡謀. 請無閑采樵者以誘之. 從之. 絞人獲三十人. 明日絞人爭出, 驅楚役徒於山中, 楚人坐其北門, 而覆諸山下, 大敗之, 爲城下之盟而還.)」
이 이야기는 《左傳 桓公 12年》에 나온다. 絞나라 사람들이 楚나라가 計略에 大敗하고 城壁 아래에서 屈辱的인 盟約을 맺은 데서 由來하여, ‘城下之盟’은 屈辱的인 條約을 맺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45. 소이장도(笑裏藏刀)
웃음 속에 칼을 숨기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陰險한 생각을 품고 남을 害치는 것을 比喩하는 말이다. 古代 中國의 兵法인 三十六計秘本兵法의 10番째 計策이기도 하다.
唐나라 太宗 때 李義府는 阿附하는 才주가 뛰어나 皇帝의 깊은 歡心을 산 德分에 벼슬이 繼續 높아져 처음에는 太子舍人이었다가, 高祖 때에는 吏部尙書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中書令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李義府는 겉모습은 穩和하고 恭遜했으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는 즐겁게 微笑를 띠었으나 속이 좁고 陰險했다. 이미 要職에 있고 權勢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自己에게 붙기를 바랐으며, 自己 뜻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는 사람에게는 謀害를 加했다. 그래서 當時 사람들은 李義府의 웃음 속에는 칼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義府貌狀溫恭, 與人語必嬉怡微笑, 而褊忌陰賊. 旣處要權, 欲人附己, 微忤意者, 輒加傾陷. 故時人言義府笑中有刀.)」
언젠가 監獄에 淳于라는 姓을 가진 美貌의 女罪囚가 있다는 말을 들은 李義府는 獄吏인 畢正義를 甘言利舌로 꾀어 그 女罪囚를 釋放하도록 한 後에, 그 女子를 自己가 차지해 버렸다. 後에 王義方이 畢正義를 告發하자, 李義府는 畢正義를 윽박질러 自殺하게 만들고 그를 告發한 王義方을 罷職시켜 먼 邊方 地域으로 流配시켜 버렸다.
이 이야기는 《舊唐書 李義府傳》에 나오는데, 李義府의 웃음 속에는 칼이 들어 있다는 말에서 ‘笑裏藏刀’가 由來했다. 唐玄宗 때의 權臣 李林甫의 故事에서 由來한 ‘口蜜腹劍’과 같은 意味를 가지고 있다.
46. 소심익익(小心翼翼)
마음을 細心하게 쓰고 操心하다. 每事에 操心하고 삼간다는 말이다.
《詩經 · 大雅 蒸民》 266. 烝民(증민)-詩經 大雅(시경 대아)
仲山甫之德 : 仲山甫의 德은
柔嘉維則 : 훌륭하고 法度가 있네.
令儀令色 : 아름다운 擧動에 훌륭한 모습이요
小心翼翼 : 操心하고 恭敬하며
古訓是式 : 옛 가르침을 本받으며
威儀是力 : 威儀를 갖추기에 힘쓰고
天子是若 : 天子를 따르며
明命使賦 : 밝은 命令을 펴 드리네
이는 周나라 宣王을 잘 輔弼한 名宰相 仲山甫의 德을 讚揚하는 詩로서, 그가 王命을 받들어 齊나라에 城을 쌓으러 갈 때 尹吉甫가 餞送하면서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小心’은 慾心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翼翼’은 謹愼하고 恭敬하는 모습을 말한다. ‘小心翼翼’은 元來 每事에 恭敬하고 謹愼하는 것을 가리켰으나, 現代에 와서는 그 뜻이 邊하여 道量이 좁고 겁이 많은 것을 比喩하는 말로 使用된다.
47. 속수지례(束脩之禮) 束修之礼
육포(肉脯) 묶음의 禮節. 弟子가 되려고 스승을 처음 뵐 때 드리는 禮物을 말한다. 古代에는 스승에게 가르침을 請 할 때 열 조각의 肉脯를 묶어 드렸다.
「孔子가 말했다. “束脩 以上을 行한 者부터 내 일찍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子曰, 自行束脩之以上, 吾未嘗無誨焉.)」
* 論語 述而에 論語(논어) 7. 述而(술이)
‘束’은 열 개 묶음 한 다발을 말하며,
‘脩’는 말린 고기 脯를 말한다. 束脩는 열 조각의 肉脯로 禮物 가운데 가장 弱小한 것이다. 當時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러 갈 때는 반드시 禮物을 가지고 갔다. 孔子는 모든 가르침은 禮에서 始作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弟子들에게 束脩 以上의 禮物을 가지고 오도록 함으로써 禮를 지키도록 만들었다.
48. 송양지인(宋襄之仁)
宋나라 襄公의 仁. 쓸데없는 人情을 베풀거나 不必要한 同情이나 配慮를 하는 어리석은 行動을 比喩
春秋時代 宋나라 桓公이 世上을 떠나자 太子 玆父(襄公)가 뒤를 이어 王位에 올랐다. 襄公은 庶兄인 目夷를 宰相에 任命했다. 襄公 7年, 宋나라 땅에 隕石이 비처럼 쏟아졌는데 이를 본 襄公은 自身이 覇者가 될 徵兆라며 野望을 품기 始作했다. 이듬해인 襄公 8年, 當時의 覇者인 齊나라 桓公이 죽었다. 襄公은 野望을 이루기 爲해 齊나라로 쳐들어가 公子 昭를 세워 追從 勢力을 만들었다. 當時 齊나라 桓公은 管仲이 죽은 後에 管仲이 推薦한 隰朋을 登用하지 않고 自身이 信任하는 內侍 竪刁를 宰相에 任命하였다. 竪刁는 宰相이 된 지 3年 만에 開方, 易牙 等과 共謀하여 亂을 일으켜 桓公을 南門에 있는 寢殿 守衛의 房에 가두어 굶어 죽게 만들었다. 桓公이 죽자 그의 다섯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잇기 爲해 서로 다투느라 葬禮도 치르지 못해 桓公의 屍體가 67日 동안 放置되어 屍體에서 생긴 구더기가 門밖까지 기어 나올 程度였다. 襄公은 이 틈을 타 齊나라를 친 것이다.
襄公은 漸漸 驕慢해졌다. 目夷는 “작은 나라가 覇權을 다투는 것은 禍根”이라며 諫言했으나 襄公은 듣지 않았다. 그해 가을 盂 땅에서 會盟했는데, 楚나라가 襄公을 捕虜로 잡아갔다가 겨울에 풀어 주었다. 이런 恥辱을 當하고도 襄公의 野望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듬해 여름, 襄公은 自己를 無視하고 楚나라와 通交한 鄭나라를 쳤다. 그러자 그해 가을, 楚나라는 鄭나라를 救援하기 爲해 大軍을 派兵했다. 襄公이 楚나라와 싸우기로 決定하자 大夫 子魚가 不可하다고 諫했지만, 襄公은 楚나라 軍隊를 泓水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다. 宋나라 軍隊가 먼저 泓水에 到着했고, 楚나라 軍隊는 나중에 到着하여 막 江을 건너고 있었다. 目夷가 建議했다. “저쪽은 數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건너기 前에 쳐야 합니다.(彼衆我寡, 及其未濟擊之.)” 그러나 襄公은 듣지 않았다. 楚軍이 江을 건너와 戰列을 整備하고 있자 目夷가 只今 치자고 했다. 襄公은 敵軍이 陣容을 整備한 後에 치자고 했다. 楚나라 軍隊가 戰列을 가다듬은 後에 宋나라가 攻擊을 했는데 宋나라는 大敗했고, 襄公 自身도 허벅다리에 負傷을 입고 말았다. 사람들은 모두 襄公을 非難했다. 그러자 襄公이 말했다. “君子는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處해 있을 때 困難하게 만들지 않고, 戰列을 갖추지 않은 相對方을 攻擊하지 않는다고 했소.(君子不困人於阸, 不鼓不成列.)” 子魚가 嘆息했다. “싸움이란 勝利하는 것이 功을 세우는 것이다. 무슨 禮義가 必要하다는 말인가. 王의 말대로 해야 한다면 처음부터 싸울 必要도 없이 奴隸가 되었어야 하지 않은가!
(兵以勝爲功, 何常言與. 必如公言, 卽奴事之耳, 又何戰爲.)” 襄公은 이 싸움에서 입은 負傷으로 因해 다음 해에 世上을 떠났다.
* 史記 宋微子世家에 나온다.
‘宋襄之仁’의 故事에 對해 《左傳 僖公 22年》에는 다음과 같이 記錄되어 있다.
「宋襄公이 泓水에서 楚나라와 싸웠다. 宋나라 軍隊는 戰列을 갖추었고 楚나라 軍隊는 아직 江을 건너지 못했다. 司馬, (子魚)가 말했다. “저쪽은 數가 많고 우리는 적습니다. 아직 건너지 못했으니 只今 치도록 합시다.” 宋襄公이 말했다. “안 되오.” 楚나라 軍隊가 江을 건넜으나 아직 戰列을 갖추지 못했다. 子魚가 攻擊하자고 다시 告하자 宋襄公은 또 안 된다고 했다. 楚나라 軍隊가 戰列을 갖춘 다음에 宋나라가 攻擊을 했으나 宋나라 軍隊는 大敗했고, 宋襄公은 다리를 다쳤다. 그의 護衛武士들은 모두 殺傷을 當했다. 宋나라 사람들이 宋襄公을 허물하자 宋襄公이 말했다. “君子는 負傷當한 敵의 兵士를 다시 殺傷하면 안 되고, 나이 많은 사람을 捕虜로 잡으면 안 되는 것이오. 옛날의 軍士作戰은 地勢가 險峻한 곳에 依支하지 않았었소. 寡人은 비록 亡國(商나라. 宋나라는 옛날 商나라 땅으로, 宋人은 商나라의 後孫들이다. 그래서 宋나라를 가리킬 때 商이라고도 한다.)의 後裔지만 戰列을 갖추지 않은 敵을 攻擊할 수는 없소.” 子魚가 말했다. “戰爭을 모르시는군요. 强한 敵이 地勢가 險한 곳에서 아직 戰列을 갖추지 못한 것은 하늘이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不利 한 地形에 있을 때 攻擊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두려워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只今 强한 者들은 모두 우리의 敵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도 捕虜로 잡아야 할 판에, 半白의 늙은이를 가엽게 여길 必要가 있겠습니까? 兵士들에게 무엇이 恥辱이라는 것을 밝히 알게 하고 作戰을 하는 것은 敵을 죽이기 爲함입니다. 負傷을 當해 아직 죽지 않았는데 왜 再次 殺傷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차마 再次 殺傷을 못 한다면 그들을 애當初 殺傷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차마 半白의 늙은이를 捕虜로 잡지 못한다면 敵에게 屈伏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軍隊는 有利한 局面을 利用해 싸우는 것이고, 북과 징을 울려 士氣를 돋우는 것입니다. 有利한 局面을 利用하는 것이라면 敵이 困境에 處했을 때를 利用해야 하고, 士氣를 돋웠다면 敵이 戰列을 갖추지 않았을 때 攻擊하는 것이 當然하지 않겠습니까?” (宋公及楚人戰於泓. 宋人旣成列, 楚人未旣濟. 司馬曰, 彼衆我寡, 及其未旣濟也, 請擊之. 公曰, 不可. 旣濟而未成列. 又以告. 公曰, 未可. 旣陣而後擊之, 宋師敗績. 公傷股, 門官殲焉. 國人皆咎公. 公曰, 君子不重傷, 不擒二毛. 古之爲軍也, 不以阻隘也. 寡人雖亡國之餘, 不鼓不成列. 子魚曰, 君未知戰. 勍敵之人, 隘而不列, 天贊我也. 阻而鼓之, 不亦可乎. 猶有懼焉. 且今之勍者, 皆我敵也. 雖及胡耇, 獲則取之, 何有於二毛. 明耻敎戰, 求殺敵也. 傷未及死, 如何勿重. 若愛重傷, 則如勿傷, 愛其二毛, 則如服焉. 三軍以利用也, 金鼓以聲氣也. 利而用之, 阻隘可也. 聲盛致志, 鼓儳可也.)」
世上 사람들은 宋襄公의 이런 行爲를 두고 ‘宋나라 襄公의 仁(宋襄之仁)’이라며 비웃었다고 한다.
* 十八史略에.
「宋襄公이 諸侯의 覇子가 될 慾心으로 楚나라와 戰爭을 했다. 公子 目夷가 楚나라 軍隊가 아직 陣을 形成하지 못했을 때 치자고 請했다. 襄公이 말했다. “君子는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處했을 때 困難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오.” 그러다가 楚나라에 敗했다. 世上 사람들은 이를 宋나라 襄公의 仁이라고 하며 비웃었다.
(宋襄公欲霸諸侯, 與楚戰. 公子目夷, 請及其未陣擊之. 公曰, 君子不困人於厄. 遂爲楚所敗. 世笑以爲宋襄之仁.)」
* 十八史略 春秋戰國에.
그런데 ‘宋襄之仁’과 같이 理解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은 當時의 戰爭 方式 때문이었다. 春秋時代에는 相對國을 服屬시키는 것이 戰爭의 主된 目標였으므로 戰爭이 제법 紳士적으로 進行되었는데, 例를 들면 다음과 같다.
「戰爭의 元則은 다음과 같다. 農事철에는 戰爭을 일으키지 않고, 百姓들에게 疾病이 도는 때를 擇해 戰爭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는 自國의 百姓을 保護하기 爲함이다. 敵國이 國喪을 當하면 戰爭을 일으키지 않고, 相對方 나라의 飢饉을 틈타 戰爭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는 敵國의 百姓들을 保護하기 爲함이다. 한겨울과 한여름에는 戰爭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는 自國과 敵國 兩國의 百姓들을 保護하기 爲함이다.
(戰道. 不違時, 不歷民病, 所以愛吾民也. 不加喪, 不因凶, 所以愛夫其民也. 冬夏不興師, 所以兼愛民也.)」
* 司馬法 에.
「싸울 場所나 時間을 定하고, 북이 울리면 戰爭을 始作하고, 奇襲 攻擊은 絶對 안 되고 正面攻擊만 許諾되었다. (不偏戰).」
* 公羊傳 桓公 10年의 何休 注에
「半白의 늙은이를 捕虜로 잡으면 안 되고(不擒二毛), 負傷當한 敵의 兵士를 再次 殺傷하면 안 되었다 (不重傷).」
* 左傳 僖公 22年에.
그런 反面에, 戰國時代에는 春秋時代와는 달리 戰爭의 目標가 相對國의 領土를 兼倂하고 軍士力을 抹殺시키는 쪽으로 變하여 戰爭이 殘忍해지고 奇計가 百出하면서 兵法이 發達하고 더욱 巧妙하고 熾熱했다.
49. 수구지정(首丘之情)
머리를 丘陵 향해 두는 마음. 여우는 죽을 때 여우 窟이 있던 丘陵을 향해 머리를 둔다. 自身의 根本을 잊지 않거나 或은 죽어서라도 故鄕 땅에 묻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比喩
「姜太公은 齊나라의 營丘에 封해져 5代에 이르기까지 살았으나 周나라에 와서 葬禮를 지냈다. 君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音樂은 그 自然的으로 發生하는 바를 즐기고, 禮는 그 根本을 잊지 않는 것이다. 옛사람의 말에 ‘여우가 죽을 때 언덕으로 머리를 向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仁이다.”
(太公封於營丘, 比及五世, 皆反葬於周. 君子曰, 樂, 樂其所自生, 禮, 不忘其本. 古之人有言曰, 狐死正丘首, 仁也.)」
* 禮記 檀弓上에.
楚나라의 詩人이자 政治家인 屈原은 九章 · 涉江에서 다음과 같은 句節을 썼다.
새는 날아서 故鄕으로 돌아가고, 여우는 죽으면 머리를 언덕으로 向한다.
(鳥飛反故鄕兮, 狐死必首丘)
‘首丘之情’은 首丘初心, 或은 狐死首丘라고도 한다.
50. 수락석출(水落石出)
물이 빠져 바닥의 돌이 드러나다. 元來는 물가의 겨울 景致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後에는 어떤 事件의 眞相이 明白하게 드러나는 것을 比喩
宋나라 神宗 때 王安石의 新法이 施行되자 舊法黨에 屬해 있었던 蘇軾은 湖北 黃州로 左遷되었다. 그는 틈나는 대로 周邊의 明勝地를 遊覽하였는데, 赤壁을 찾아 赤壁賦 2首를 지었다. 7月에 〈前赤壁賦〉를 짓고, 3個月 後인 10月에 〈後赤壁賦〉를 지었는데, 여기에서 ‘水落石出’이 나온다.
「이해 10月 보름에 雪堂으로부터 걸어서 臨皐亭으로 돌아가려 할 때에 두 客이 나를 따랐다. 黃泥재를 넘으니 서리와 이슬이 내렸고 落葉은 다 떨어져 있었다. 땅에 그림자가 비치기에 고개를 들어 밝은 달을 바라보면서 서로 돌아보고 즐거워하면서 노래를 불러 서로 和答했다. 이윽고 내가 嘆息하며 말했다. “벗이 있는데 술이 없고, 술이 있더라도 按酒가 없구나. 달은 밝고 바람 맑은데 이렇게 좋은 밤을 어이한단 말인가?” 客이 말했다. “오늘 저녁 무렵에 그물을 들어 고기를 잡았는데, 입이 크고 비늘이 가는 것이 松江의 農魚 같았습니다. 허나 어디에서 술을 求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와 아내와 相議하니 아내가 말했다. “술 한 말이 있어 當身이 不時에 必要할 때를 對備하여 保管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에 술과 고기를 가지고 다시 赤壁江 아래에서 놀았는데, 江물 흐르는 소리 들려오고 (물 빠져)끊긴 江둑은 千 길이나 되었다. 山 높으니 달은 작게 보이고 물이 줄어 바위가 드러나 있었다. 歲月이 얼마나 흘렀다고 江山을 알아볼 수 없단 말인가? 나는 옷자락을 걷어붙이고 올라가서 높은 바위를 밟고 우거진 풀 속을 헤치고, 호랑이 貌樣의 바위에 걸터앉기도 하고 뱀이나 龍 貌樣을 한 나무에 올라가기도 하고, 새매가 살고 있는 높은 둥지에 올라가기도 하고, 馮夷의 그윽한 宮殿(깊은 물속)을 굽어보기도 했다. 두 客은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문득 길게 소리를 외치니 草木이 振動하고 山이 울리고 골짜기가 메아리치며 바람이 일고 江물이 솟는 듯하였다. 나 또한 超然히 슬퍼지고 肅然히 두려워지며 몸이 오싹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되돌아와 배에 올라 물 흐르는 대로 내맡겨 江 가운데서 멈추게 내버려 두었다. 때는 한밤中이 되어 가는데 四方을 돌아보니 寂寞하기만 했다. 마침 외로운 鶴 한 마리가 江을 가로질러 東쪽으로 날아왔다. 날개는 수레바퀴만 하며 검은 치마에 흰옷을 입었는데 길게 울면서 내 배를 스쳐 西쪽으로 날아갔다.
暫時 後에 客이 떠나가고 나 또한 잠이 들었다. 꿈에 道士 하나가 깃으로 만든 옷을 펄럭이면서 臨皐亭 아래를 지나다가 나에게 揖하고 말했다. “赤壁의 뱃놀이는 즐거웠소?” 姓名을 물었으나 머리를 숙인 채 對答하지 않았다. “嗚呼라! 슬프구나. 내 그대를 알겠소. 지난밤에 울면서 내 배를 스쳐 지나간 것이 그대가 아니오?” 이렇게 물으니 道士가 돌아보며 웃었다. 나 또한 놀라 잠에서 깨어나 窓門을 열고 내다보았으나 그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是歲十月之望, 步自雪堂, 將歸於臨皐, 二客從予. 過黃泥之坂, 霜露旣降, 木葉盡脫. 人影在地, 仰見明月, 顧而樂之, 行歌相答. 已而歎曰, 有客無酒, 有酒無肴, 月白風淸, 如此良夜何. 客曰, 今者薄暮, 擧網得魚, 巨口細鱗, 狀如松江之鱸. 顧安所得酒乎. 歸而謀諸婦, 婦曰, 我有斗酒, 藏之久矣, 以待子不時之需. 於是携酒與魚, 復遊於赤壁之下. 江流有聲, 斷岸千尺, 山高月小, 水落石出. 曾日月之幾何, 而江山不可復識矣. 予乃攝衣而上, 履巉巖披蒙茸, 踞虎豹, 登蛇龍, 攀棲鶻之危巢, 俯馮夷之幽宮, 蓋二客之不能從焉. 劃然長嘯, 草木震動, 山鳴谷應, 風起水涌. 予亦悄然而悲, 肅然而恐, 凜乎其不可留也. 反而登舟, 放乎中流, 聽其所止而休焉. 時夜將半, 四顧寂寥, 適有孤鶴, 橫江東來, 翅如車輪, 玄裳縞衣, 戛然長鳴, 掠予舟而西也. 須臾客去, 予亦就睡. 夢一道士, 羽衣翩躚, 過臨皐之下, 揖予而言曰, 赤壁之遊樂乎. 問其姓名, 俛而不答. 嗚呼噫憙. 我知之矣. 疇昔之夜, 飛鳴而過我者, 非子也耶. 道士顧笑. 予亦驚悟, 開戶視之, 不見其處.)」
이처럼 ‘水駱石出’은 本來 물가의 景致를 描寫하는 말로 使用되었지만, 나중에는 물이 줄어들어 돌이 드러나는 것처럼 어떤 일의 眞相이 드러나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水落石出’은 歐陽修의 醉翁亭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해가 떠 숲에 안개가 개고 구름이 돌아가 바위 굴이 어두워져 어둠과 밝음이 變化하는 것은 山속의 아침저녁이다. 들꽃이 피어 그윽한 香氣가 풍기고, 아름다운 나무가 빼어나 茂盛한 그늘이 지며, 바람과 서리 高潔하고, 水位가 떨어져 바닥의 돌이 드러나는 것은 山間의 四時이다.
(若夫日出而林霏開, 雲歸而巖穴暝, 晦明變化者, 山間之朝暮也. 野芳發而幽香, 嘉木秀而繁陰, 風霜高潔, 水落而石出者, 山間之四時也.)」
歐陽脩(1007∼1073)가 醉翁亭記를 쓴 것은 宋나라 仁宗 慶曆 6年, 卽 1046年이고, 蘇軾(1037∼1101)이 〈前赤壁賦〉와 〈後赤壁賦〉를 쓴 것은 各各 神宗 元豊 5年, 卽 1082年의 7月과 10月이다. 年代順으로 보면 ‘水落石出’의 出典은 歐陽脩의 醉翁亭記라고 해야 옳겠지만, 大部分의 出典은 蘇軾의 後赤壁賦로 召介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蘇軾의 赤壁賦가 歐陽脩의 醉翁亭記보다 더 널리 알려졌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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