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ㅂ-3 백중지간~)
21. 백중지간(伯仲之間) 伯仲之间
첫째 兄과 둘째 兄 사이. 勢力이 엇비슷해 優劣을 가릴 수 없는 것을 比喩
「文人들이 서로 輕視한 것은 옛날부터 그러했다. 傅毅가 班固에게는 百仲之間일 뿐이다.(文人相輕, 自古而然. 傅毅之於班固, 伯仲之間耳.)」
曹丕의 《典論》에 나오는 말로, 後漢의 文章家 傅毅와 班固의 文才가 엇비슷해 優劣을 가릴 수 없다는 뜻이다. ‘伯仲之間’은 ‘伯仲之勢’라고도 한다.
傅毅(武仲)는 後漢 章帝 때 班固와 함께 蘭臺令史를 지냈다. 蘭臺令史란 宮中 藏書를 保管하던 蘭臺를 管掌하는 官職이다. 班固(孟堅)는 後漢 初期의 文學家이자 歷史家로 《漢書》를 지었다.
古代 中國에서 庶民들이 아들을 낳으면 一般的으로 伯 · 仲 · 叔 · 季의 順序에 따라 字를 붙였다. 例를 들면 漢高祖 劉邦은 劉季로, 우리말로 하면 ‘劉 막내’ 或은 ‘劉 넷째’ 程度의 號稱이다. 劉邦의 兄은 ‘유 둘째’라는 뜻의 劉仲이었다.
22. 병입고황(病入膏肓)
病이 고황(膏肓)에까지 들다. 病이 깊어져 더 以上 治療가 不可能한 것을 比喩하는 말이다. ‘膏’는 心臟 밑, ‘肓’은 橫隔膜 위를 말한다.
春秋戰國時代 晉나라 景公의 꿈에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땅에 닿도록 늘어뜨린 幽靈이 가슴을 치며 나타나 景公에게
“나의 子孫들을 죽인 것은 不義한 짓이므로, 天帝께 請하여 그대에게 罰을 주도록 許諾을 받았느니라.”라고 말하면서 大門과 寢室의 門을 부수고 들어왔다. 景公이 무서워 居室로 避하자, 幽靈은 다시 房門을 부수었다. 꿈에서 깨어난 景公이 무당을 불러 물어보니, 그 무당도 景公이 꾼 꿈을 딱 알아맞히며, 햇보리를 먹지 못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
「景公은 그날로 病이 들어, 사람을 보내 秦나라의 名醫를 모셔 오게 했다. 秦나라의 桓公은 晉나라와 좋은 關係를 維持하기 爲해 秦나라 最高의 名醫인 완(緩)을 보내 주었다. 그런데 緩이 晉나라에 到着하기 前에, 景公은 또 以上한 꿈을 꾸었다. 꿈에 病이 두 名의 더벅머리 少年으로 변하더니 그 中 하나가 말했다. “그 사람이 용한 醫員이어서 우리들을 傷하게 할 텐데 어디로 逃亡하지?” 다른 하나가 대꾸했다. “肓의 위와 膏의 아래 사이에 가 있으면 우리를 어떻게 하겠어?” 醫員이 와서 景公을 診脈하고 말했다. “이 病은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病이 肓의 위와 膏의 아래 사이에 있어 針을 놓아도 이르지 못하고, 藥을 써도 미치니 못하니 治療할 수가 없습니다.” 景公은 醫員을 名醫라고 致賀하며 厚한 賞을 내리고 돌려보냈다.
(公疾病, 求醫於秦, 秦伯使醫緩爲之, 未至, 公夢疾爲二豎子, 曰 彼良醫也. 懼傷我, 焉逃之. 其一曰, 居肓之上, 膏之下, 若我何. 醫至. 曰, 疾不可爲也. 在肓之上, 膏之下, 攻之不可, 達之不及, 藥不至焉, 不可爲也. 公曰, 良醫也. 厚爲之禮而歸之.)」
6月, 景公이 새로 난 보리를 먹고 싶어하여 새 보리로 料理한 飮食을 床에 올렸다. 景公은 무당을 불러 이를 보여 주고 거짓을 容恕치 않겠다며 무당을 죽여 버렸다. 그리고 막 飮食을 먹으려고 하는데 배가 부풀어 올랐다. 景公은 急히 便所로 달려갔다가 그만 빠져 죽고 말았다. 한편, 이날 새벽 景公을 업고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는 한 臣下는 正午 무렵 景公을 便所에서 업고 나온 後 殉死했다.
이 이야기는 《左傳 成公 10年》에 나온다. 醫員의 말에서 ‘病入膏肓’이 由來했는데, 나쁜 習慣이 몸에 배어 도저히 고칠 수 없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도 使用된다.
23. 보거상의(輔車相依)
수레의 덧방나무(輔)와 바퀴(車)가 서로 依支한다. 서로 도와서 依支하는 깊은 關係
中國春秋時代 末葉 紀元前 655年 晉나라 헌공(獻公 晉나라 王)은 虢 나라를 征伐하기 위해 虞나라 王에게 虞나라 領土를 지나가도록 길을 빌려 줄 것을 要請했다.
晉나라에서 虢나라로 가려면 虞나라를 반드시 通過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前에도 晉나라는 虞公(虞나라 王)에게 膳物을 많이 주고 虢나라를 懲伐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虢나라를 징벌(懲伐)하기 위함이 아니라 아예 滅亡시킬 料量으로 虞나라 王에게 眞貴한 膳物을 많이 보내 付託을 한 것이다.
그러나 虞나라에는 上大夫 宮之奇라는 賢人이 있어 晉나라 獻公의 속셈을 看破하고 虞公에게 諫하여 말했다.
‘길을 빌려줘서는 안 됩니다. 虞와 虢 나라는 서로 依存해야 할 小國입니다. 俗談에도 수레의 짐받이 판자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輔車相依),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라고 했습니다. 虢나라가 亡하면 虞나라 亦是 禍를 當할 것입니다. 그러니 晉나라에 길을 내주어서는 안 됩니다. '
그러나 晉나라의 賂物을 받고 있는 虞王은 宮之奇의 말을 따르지 않고, 晉나라 軍의 通過를 許諾했다.
궁지기(宮之奇)는 災殃이 몸에 미칠 것을 두려워하며「虞나라는 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家族을 이끌고 虞나라에서 逃亡쳤다.
그 해 8月에 晉나라는 虢나라를 攻擊하여 12月에 滅亡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虞나라도 攻擊하여 滅亡시켜 버렸다.
24. 보원이덕(報怨以德) 报怨以德
德으로써 怨恨을 갚다. 怨恨을 怨恨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德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作爲가 無爲을 行하고, 일이 없음(無事)을 일하며, 맛이 없음(無味)을 맛본다. 큰 것은 작은 것이고, 많은 것은 적은 것이니 怨讐를 德으로 갚는다. 어려운 것을 꾀하려면 쉬운 것부터 하고, 큰 것을 하려면 작은 것부터 한다. 天下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만들어지고, 天下의 큰일은 반드시 작은 일에서 만들어진다. 이런 까닭에 聖人은 끝내 큰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能히 큰일을 이룰 수 있다. 무릇 가볍게 承諾하는 일에는 반드시 믿음이 不足하며, 쉬워 보이는 일이 많으면 반드시 어려움이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聖人은 어렵게 여기기 때문에 끝내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 大小多少, 報怨以德. 圖難於其易, 爲大於其細. 天下難事, 必作於易. 天下大事, 必作於細. 是以聖人終不爲大, 故能成其大. 夫輕諾必寡信, 多易必多難. 是以聖人猶難之, 故終無難矣.)」
* 老子 63章 에.
25. 복룡봉추(伏龍鳳雛) 伏龙凤雏
엎드려 있는 龍과 봉황(鳳凰)의 새끼. 草野에 숨어 있는 훌륭한 人才를 比喩
諸葛亮은 어려서 父母를 여의고 叔父를 따라 荊州의 襄陽으로 避亂 왔다가, 叔父가 죽자 襄陽의 西쪽에 있는 隆中에 定着하여 隱居하면서 讀書로 歲月을 보냈다. 이 當時 劉備는 自身이 活動할 수 있는 根據地를 얻지 못하고 荊州에 와서 劉表에게 依託하고 있으면서 人才를 찾으러 다니기 始作했다.
「어느 날 劉備가 司馬徽에게 時局에 對해 묻자 司馬徽가 對答했다.
“俗世의 儒生이 어찌 時務를 알겠소. 時務를 아는 것은 俊傑들인데, 이곳에도 伏龍과 鳳雛가 있습니다.” 伏龍과 鳳雛가 누구냐고 劉備가 묻자 司馬徽는 諸葛孔明과 龐士元이라고 對答해 주었다.
(劉備訪世事於司馬德操. 德操曰, 儒生俗士, 豈識時務. 識時務者在乎俊杰. 此間自有伏龍鳳雛. 備問爲誰, 曰, 諸葛孔明, 龐士元也.)」
이 이야기는 《三國志 · 蜀書 諸葛亮傳》의 裴松之 注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由來하여 伏龍과 鳳雛가 ‘草野에 묻혀 알려지지 않은 人才’를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諸葛亮을 臥龍先生이라고도 하는 까닭에 ‘臥龍鳳雛’라고도 하며, ‘龍駒鳳雛’로 쓰기도 한다.
26. 봉시장사(封豕長蛇) 封豕长蛇
큰 돼지와 긴 뱀. 돼지처럼 飮食을 탐내어 먹고 긴 뱀같이 음험(陰險)하다는 뜻으로, 慾心이 많고 殘忍한 사람을 比喩
伍子胥는 楚나라 平王에게 아버지와 兄이 殺害 當하자 楚나라를 滅亡시켜 復讐하겠다고 盟誓하였다. 伍子胥의 親舊인 申包胥는 私事로운 怨恨 때문에 祖國을 背叛하여서는 안 된다며, 萬若 伍子胥가 楚나라를 滅亡시킨다면 自身이 반드시 나라를 復興시키겠다고 盟誓하였다. 伍子胥는 吳나라에 亡命하여 闔閭를 도와 王位에 오르게 한 뒤, 楚나라를 攻擊하여 首都 영(郢)까지 進擊하였다. 이때 平王은 이미 죽은 뒤였고, 平王의 아들 昭王은 脫出하여 逃亡했다. 伍子胥는 昭王을 잡지 못하게 되자, 代身 平王의 무덤을 파헤쳐 屍身에 300番이나 매질을 함으로써 怨恨을 풀었다. 申包胥는 이 消息을 듣고 激憤하여 昭王을 찾아가서 나라를 復興시킬 計劃을 相議하였으나 힘이 없었다.
「申包胥는 秦나라에 가 (昭王의 外祖父인 晉나라의 哀公에게) 救援兵을 要請하며 말했다. “吳나라는 貪慾스러운 큰 돼지와 긴 뱀같이 줄곧 中原의 諸侯國들을 侵略하여 삼키려고 합니다. 가장 먼저 侵害를 받은 것은 楚나라로, 楚나라의 君主는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풀이 우거진 들판에 있습니다. 臣을 使者로 보내어 急한 事情을 알리게 하면서 ‘오랑캐의 慾心은 限이 없어 萬一 (吳나라가) 貴國과 이웃하게 된다면 國境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吳나라가 楚나라를 完全히 平定하지 못한 때를 틈타 王께서 自己 몫을 차지하십시오. 萬一 楚나라가 亡하게 된다면 그 땅은 王의 땅입니다. 萬一 王의 恩德으로 楚나라가 安定을 찾게 된다면 楚나라는 代代로 王을 섬길 것입니다.” 秦나라 哀公은 사람을 보내 緩曲하게 拒絶하면서 말했다. “寡人은 그대의 말에 따르겠소. 于先 暫時 客館에서 쉬도록 하시오. 考慮를 해 본 後에 다시 알려 주리다.” 申包胥가 對答했다. “우리 君主는 풀이 우거진 들판에 있으면서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있는데, 臣下 된 사람이 어찌 便安히 있겠습니까?” 그리고 朝廷의 담에 기대어 哭하기를 밤낮으로 繼續하며 이레 동안 물도 마시지 않으면서 버텼다. 秦나라 哀公이 無衣를 지어 읊자 申包胥는 아홉 番이나 절을 한 後에야 앉았다. 秦나라는 出兵하였다.
(申包胥如秦乞師, 曰, 吳爲封豕長蛇, 以薦食上國, 虐始於楚. 寡君失守社稷, 越在草莽, 使下臣告急曰, 夷德無厭, 若鄰於君, 疆場之患也. 逮吳之未定, 君其取分焉. 若楚之遂亡, 君之土也. 若以君靈, 撫之, 世以事君. 秦伯使辭焉, 曰, 寡人聞命矣. 子姑就館, 將圖而告. 對曰, 寡君越在草莽, 未獲所伏, 下臣何敢卽安. 立依於庭牆而哭, 日夜不絶聲, 勺飮不入口, 七日. 秦哀公爲之賦無衣, 九頓首而坐. 秦師乃出.)」
마침 吳나라에는 闔閭의 아우가 政變을 일으켜 王位를 簒奪하는 일이 일어났다. 闔閭는 急히 楚나라와 强化를 하고 急히 退軍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左傳 定公 4年》에 실려 있는데, 申包胥가 말한 ‘封豕長蛇’는 飮食을 貪내는 돼지와 통째로 먹이를 삼키는 뱀처럼 貪慾스러운 惡人을 比喩하는 말로 使用된다.
‘封豕’는 ‘封豨’라고도 하는 一種의 큰 멧돼지로 桑林에 살았는데, 이빨이 길고 발톱이 銳利하며 힘은 소보다 센 兇測한 짐승이라고 한다. ‘長蛇’는 ‘修蛇’라고도 하는 큰 뱀으로 洞庭湖에 살며, 길이가 百 자나 되고, 등에는 가시 같은 털이 돋았으며, 울음소리는 木鐸을 두들기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런 怪獸에 對한 이야기들은 《淮南子》와 《山海經》 等에 나온다.
本文에 나오는 上國은 春秋時代의 中原의 諸侯國들을 말하는 것으로, 中原 地域이 아닌 吳나라와 楚나라의 立場에서 相對的으로 부르는 號稱이다. 秦나라 哀公이 읊은 〈無衣〉는 《詩經 秦風》의 詩로, 相對方을 도와 出兵하여 함께 戰爭을 치르겠다는 뜻을 含有하고 있는 詩이다. (秦庭之哭 同義語)
27. 부언시용(婦言是用) 妇言是用
婦女子의 말이 옳다고 여겨 쓰다. 女性의 말을 無條件 옳다고 여기고 잘 듣는 것을 말한다.
殷 王朝의 마지막 임금인 주왕(紂王)은 夏나라의 마지막 王 걸왕(桀王)과 더불어 中國 歷史上 兩大 暴軍으로 有名하다. 紂王은 資質이 뛰어나고 識見이 높았으며, 頭腦가 明晳하여 남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聰明할 뿐만 아니라 勇力도 뛰어나, 猛獸를 맨주먹으로 때려잡을 程度로 體力과 힘이 强했다. 그런데 이렇게 뛰어난 資質을 德을 쌓는 데 쓰지 않고, 自慢에 빠져 臣下들이 諫하는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뛰어난 입담으로 自身의 非行을 合理化하거나 덮어 버렸다. 그는 天下에 自己보다 나은 사람은 存在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酒色과 享樂에 對해서도 아주 豪宕하여 妲己라는 女人에게 푹빠졌다.
妲己는 有蘇氏의 딸로서, 일찍이 紂王이 有蘇氏를 討伐했을 때 戰利品으로 獲得한 美女였다. 紂王은 妲己를 얻고 아주 기뻐했으며, 妲己의 아름답고 妖艶한 姿態에 빠져 그 女의 歡心을 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했다. 紂王은 妲己가 願하는 대로 宮中의 音樂을 더욱 官能的이고 奔放한 音樂으로 바꾸고, 首都 朝歌에 鹿臺라는 巨大한 金庫를 만들어 무거운 稅金으로 그 金庫를 채웠으며, 鉅橋라는 穀食 倉庫를 세워 穀食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沙丘의 離宮을 擴張하여 그 안에 禽獸 놓아길렀다. 妲己는 이 沙丘의 離宮을 特히 좋아했다. 紂王은 또한 妲己의 請을 받아들여 술로 채운 蓮못과 고기 按酒를 매단 나무로 이루어진 酒池肉林을 만들어 數많은 알몸의 男女들을 데리고 跌宕하게 놀았다.
奢侈와 歡樂에 빠진 王의 生活에 對해 不平을 하는 百姓들에게는 恐怖政治의 一環으로 불구덩이 위에 기름을 칠한 구리 기둥을 걸어 놓고 그 위를 걷게 하는 殘忍한 刑罰인 炮烙의 刑을 施行하였다. 忠臣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紂王에게 諫하였지만 大部分 죽임을 當했거나 스스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王子 比干이 諫하자 紂王은 “聖人의 心臟에는 일곱 個의 구멍이 있다고 하던데 比干도 그러한가 보자.”며 比干을 죽여 心臟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으며, 箕子는 獄에 갇혔다. 紂王은 이 밖에도 姙娠한 女子의 배를 가르고, 뼈가 시려 江을 건너지 못하는 老人의 다리를 자르는 等, 暴惡한 짓을 恣行하였다.
武王은 天命을 거스른 紂王에게 天命에 따라 天罰을 내린다는 名分을 가지고 東쪽을 向해 進軍을 繼續하여 殷의 郊外인 牧野에서 陣을 쳤다. 紂王도 70萬의 兵力을 動員해서 牧野로 나왔다. 두 나라의 軍隊는 드디어 乾坤一擲의 大決戰을 벌였다. 하지만 紂王의 暴政에 시달리던 殷나라 軍隊는 大部分 武王의 討伐을 鶴首苦待하고 있었으므로 降伏하거나 오히려 武器를 거꾸로 들고 周나라 軍隊에 加擔해 버렸다. 殷나라 軍隊는 一敗塗地하고 말았고, 紂王은 牧野에서 逃亡쳐 首都 趙歌에 있는 鹿臺 위로 올라가 불을 지른 後, 寶石으로 裝飾한 옷을 입고 그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로써 殷 王朝는 初代 湯王부터 紂王에 이르기까지, BC17世紀부터 BC11世紀에 이르는 約 600年의 歷史를 마감했다. 이 이야기는 《史記》의 (殷本紀)와 (周本紀)에 나온다.
當時 武王은 軍士를 일으키면서 다음과 같이 紂王의 罪를 밝혀 말했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암탉은 새벽을 알리지 않으며,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亡한다고 했다. 只今 商나라의 王은 오직 婦女子의 말만 옳다고 여겨서 따르고 있다. 祖上의 祭祀도 廢하여 (祖上에게) 報答하지 않고, 先王이 남기신 同生들을 버려 登用하지 않고 있다.
(古人有言曰, 牡鷄無晨, 牡鷄之晨, 惟家之索. 今商王受, 惟婦言是用. 昏棄闕肆祀, 弗答, 昏棄闕遺王父母弟, 不迪.)”」
이 이야기는 《書經 · 周書 목서(牧誓)》에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암탉과 婦女子는 바로 달기(妲己)를 가리킨다.
28. 부족치치아간(不足置齒牙間)
이빨 사이에 둘 것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말할 만한 가치가 없거나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秦나라 始皇의 아들 胡亥는 2世 皇帝로 保衛에 오른 뒤 政事는 돌보지 않고 享樂과 放蕩에 빠져 있었으며, 옳고 쓴소리를 하는 사람은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다. 그러다 보니 官吏들은 腐敗해지고, 社會가 極度로 混亂해졌으며, 百姓들은 搾取와 勞役에 시달려 죽을 地境이 되었다. 이때 陳勝이란 者가 機會를 틈타 山東地方에서 農民들을 扇動해 叛亂을 일으키는 바람에 現地의 使者가 都城에 올라와 胡亥한테 報告했다.
“農民들이 叛亂을 일으켜 나라를 뒤흔들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뭐라고? 네 이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天子인 朕의 앞에서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다니, 저놈을 當場 下獄하라!”
胡亥는 怒發大發하며 소리쳤다. 뒤이어 두 番째 使者가 到着했는데, 그는 앞사람이 當한 일을 알고는 이렇게 아뢰었다.
“하찮은 盜賊떼가 騷動을 일으켰지만, 곧 鎭壓될 것입니다. 陛下께서는 조금도 念慮하실 必要가 없습니다.”
“그럼 그렇지.”
胡亥는 洽足해서 두 番째 使者에게는 厚한 賞을 내렸다. 그러나 事態는 漸漸 惡化되어 갔다. 時間이 지날수록 叛亂軍은 數效가 늘어나면서 勢力이 더욱 强大해졌고, 及其也 官軍들까지 合勢하기 始作했다. 그제야 뭔가 尋常찮다고 느낀 胡亥는 뒤늦게 重臣 會議를 召集하고 對策을 물었다. 임금이 비로소 事態를 똑바로 바라보기 始作했다고 여긴 重臣들은 躊躇하지 않고 아뢰었다.
“臣下된 者나 微賤한 百姓이나 敢히 叛逆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그들은 叛逆의 마음을 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한 罪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陛下. 急히 軍隊를 派遣하여 鎭壓하도록 하십시오.”
그 말을 들은 胡亥의 顔色이 兇하게 變했다. 自己 앞에서 ‘叛逆’이라는 말을 敢히 꺼내는 自體를 容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입에서 불號令이 떨어지려는 刹那, 叔孫通이 얼른 앞으로 나서며 아뢰었다.
“陛下, 여러 大臣들의 말은 틀렸습니다. 只今 天下는 統一되어 한 집을 이루고 있고, 各 郡과 縣의 城을 허물었으며, 武器는 다시 使用하지 못하도록 녹여서 農器具를 만들었습니다. 令名하신 陛下께서 이처럼 健在하시고, 서릿발 같은 法令이 儼然히 살아 있으며, 百姓들은 各者 生業에 從使하며 넉넉한 生活을 누리면서 陛下의 恩德을 稱頌하고 있는데, 어느 어리석은 者가 無嚴하게 敢히 叛亂을 꾀하겠습니까? 只今 若干의 騷亂을 일으키고 있는 盜賊들은 穀食을 훔치는 쥐새끼나 物件을 훔치는 개에 不過합니다. ‘이빨 사이에 둘 價値도 없는’ 것들이지요. 只今 現地 官員들이 잡아다 嚴하게 罪를 다스리고 있으니 조금도 念慮하지 마십시오.”
그 말을 듣고서야 顔色이 돌아온 胡亥는 御使로 하여금 叛逆을 말한 臣下들을 問招해 다스리라고 命했다. 그리고는 叔孫通에게 좋은 옷 한 벌과 緋緞 20疋을 下賜하고 博士에 任命했다. 叔孫通이 御殿을 물러나오자, 待期하고 있던 다른 大臣들이 險惡한 얼굴로 둘러쌌다.
“아니, 事情을 뻔히 알면서 陛下 앞에서 그런 터무니없는 阿諂을 늘어놓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오?”
大臣들이 異口同聲으로 꾸짖자, 叔孫通은 泰然히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여러분들이 只今 이렇게 盛한 몸으로 서 있을 수 있겠소? 아무튼 나는 더 以上 입 벌리고 있는 호랑이 앞에서 떨고 있고 싶지 않소이다.”
그리고는 當場 짐을 싸들고 薛地方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29. 부형청죄(負荊請罪) 负荆请罪
가시나무를 지고 罰을 주기를 請하다. 自身의 잘못을 謝過하면서 嚴한 處罰을 要求하는 것을 比喩
戰國時代, 趙나라 惠文王 때에는 藺相如와 將軍 廉頗가 있어 强國인 秦나라도 敢히 趙나라를 넘보지 못했다. 藺相如는 元來 宦者令 繆賢의 舍人에 不過했지만, 趙나라와 秦나라 사이의 和氏璧 問題를 解決함으로써 一躍 上大夫에 올랐다.
그로부터 3年 後, 秦王이 趙王에게 澠池에서 會同을 要請했다. 趙王은 秦나라가 두려워 會同에 應하고 싶지 않았으나 廉頗와 藺相如의 勸告로 應하였다. 藺相如가 隨行했고, 廉頗는 國境까지 餞送했다. 廉頗는 王과 下直하며 말했다. “王께서 無事히 다녀오시기를 빕니다. 거리를 計算해 볼 때 會合을 마치고 돌아오시기까지 30日을 넘지 않을 것 같습니다. 30日이 지나도록 돌아오시지 않으면 太子를 王位에 세워 秦나라의 野望을 끊어 버리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王은 이를 許諾하고, 마침내 秦王과 澠池에서 만났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秦王이 말했다.
“寡人은 趙王께서 音樂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瑟을 彈奏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趙王이 瑟을 演奏하자 秦나라의 御史가 앞으로 나와 ‘某年 某月 某日 秦王이 趙王과 만나 술을 마시며 趙王에게 瑟을 타게 했다.’고 記錄했다. 藺相如가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趙王께서도 秦王께서 秦나라 音樂에 能하다고 들었습니다. 請컨대 盆缻를 演奏하여 서로가 즐기도록 해 주십시오.” 秦王은 怒여워하며 許諾하지 않았다. 藺相如는 盆缻를 받쳐 들고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秦王에게 請했다. 秦王은 缻를 두들기려 하지 않았다. “大王과 臣의 거리는 다섯 걸음도 안 됩니다. 제 목의 피로써 大王을 적실 수도 있습니다.” 藺相如의 脅迫에 左右의 사람들이 藺相如를 칼로 치려고 했다가 藺相如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자 모두 뒤로 물러났다. 秦王은 마지못해 缻를 한 차례 두들겼다. 藺相如는 趙나라의 御史를 불러 ‘某年 某月 某日 秦王이 趙王을 爲해 缻를 쳤다.’고 적게 했다. 暫時 後 秦나라 臣下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趙나라가 열다섯 城을 바쳐 秦王의 壽를 祝福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藺相如도 맞받아쳤다. “秦나라의 咸陽을 들어 趙王의 壽를 祝福해 주셨으면 하오.” 秦王은 酒席이 罷할 때까지 趙나라를 누를 수가 없었다. 趙나라 亦是 軍隊를 配置하여 秦나라에 對備했으므로 秦나라도 敢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藺相如는 이 功勞로 上卿에 任命되었다.
澠池의 會同 後 藺相如가 廉頗의 윗자리에 오르자 廉頗는 매우 不快했다. “나는 趙나라의 將軍으로 戰爭에 큰 功이 있었다. 그런데 藺相如는 겨우 입과 혀를 수고롭게 했을 뿐인데 나보다 윗자리에 있다. 게다가 相如는 本來 賤한 出身이다. 부끄러워 도저히 그의 밑에 있을 수 없다.” 廉頗는 公公然히 다음과 같이 말하고 다녔다. “藺相如를 만나면 期必코 侮辱을 주고 말겠다.” 이 말을 傳해 들은 藺相如는 廉頗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藺相如는 朝會 때마다 病을 稱하고 나가지 않았다. 廉頗와 地位 다툼을 하지 않기 爲해서였다. 藺相如는 外出을 했을 때 멀리 廉頗가 오는 것이 보이면 수레를 끌고 避해 숨어 버리곤 했다.
藺相如의 舍人들이 不平을 쏟아 놓았다. “저희가 親知를 떠나 當身을 모시는 것은 當身의 높은 義氣를 欽慕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當身은 廉頗와 同列에 있으면서 廉頗가 나쁜 소리를 하고 다니는데 그가 두려워 피해 숨으시며 甚히 두려워하십니다. 이는 平凡한 사람들도 부끄러워하는 일이거늘, 하물며 將軍이나 宰相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저희는 不肖하여 떠나갈까 합니다.” 藺相如가 이들을 挽留하며 물었다. “그대들이 볼 때 廉將軍과 秦王 中 누가 더 무서운 사람인가?” “秦王만 못하지요.” “그런 秦王의 威嚴을 相對하여 나는 宮廷에서 그를 꾸짖고 그 臣下들을 辱되게 했다. 내 비록 魯鈍하나 어찌 廉將軍을 두려워하겠는가? 생각해 보건대 强한 秦나라가 敢히 우리 趙나라를 攻擊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只今 두 마리 호랑이가 싸우게 되면 形勢로 보아 둘 다 無事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國家의 急한 것을 앞세우고 私事로운 怨恨을 뒤로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傳해 들은 廉頗는 웃옷을 벗고 가시나무 회초리를 등에 지고 藺相如의 집 門 앞에 이르러 謝罪했다. “卑賤한 사람이 將軍께서 이토록 寬大한 줄을 알지 못했소.” 두 사람은 마침내 和解를 하고 刎頸之交를 맺었다.
(廉頗聞之, 肉袒負荊, 因賓客至藺相如門謝罪. 曰, 鄙賤之人, 不知將軍寬之至此也. 卒相與驩, 爲刎頸之交.)」
이 이야기는 《史記 廉頗藺相如列傳》에 나오는데, 廉頗가 웃통을 벗고 가시나무를 등에 지고 藺相如를 찾아갔다는 말에서 ‘負荊請罪’가 由來했다. ‘肉袒負荊’이라고도 한다.
藺相如가 이처럼 澠池의 會同에서 始終一貫 秦王을 壓倒할 수 있었던 것은, 勿論 基本的으로는 藺相如의 能力이 뛰어난 德分이기도 했지만, 팽팽하게 形成된 各國 間의 對決 構圖를 잘 利用했기 때문이었다. 當時 秦나라는 楚나라를 칠 計劃으로 主力部隊를 이미 國境으로 移動시킨 狀況이었다. 秦나라가 安心하고 楚나라를 치기 爲해서는 趙나라를 묶어 둘 必要가 있었기 때문에 秦王은 一旦 趙나라의 氣勢를 꺾어 놓으려고 會同을 要請했던 것이고, 秦王의 생각과 計劃을 꿰뚫고 있던 藺相如는 이런 狀況을 最大한 利用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趙나라 王이 탄 瑟은 絃樂器이고, 秦나라의 樂器인 盆缻는 打樂器 축에 들지도 못하는 打樂器이다. 秦나라는 戎狄과 國境을 마주하고 있는 西쪽의 偏僻한 地域으로 아직은 文化가 發達하지 않았으며, 그 音樂도 水準을 論하기에는 아직 距離가 있었다. 藺相如는 文化的 自尊心을 건드려 相對方을 壓倒한 것이다. 秦나라의 水準 낮은 音樂에 對해서는 秦始皇을 道와 天下를 統一하는 데 큰 功을 세운 李斯의 諫逐客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大抵 甕器를 치고 장군(缶)을 두드리며, 箏을 타고 넓적다리를 두드리며, 우우 하고 노래하며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眞正한 秦나라의 소리(音樂)입니다.
(夫擊瓮叩缶, 彈箏搏髀而歌呼嗚嗚快耳者, 眞秦之聲也.)」
여기서 말하는 ‘장군’이 바로 盆缻로, ‘부(缶)’라고도 한다.
不足置齒牙間은 이빨 사이에 두기에 充分하지 못하다는 말로 다시 말해 입에 올릴 價値도 없다는 뜻이다.
30. 부화뇌동(附和雷同)
우렛소리에 맞춰 함께하다. 自身의 뚜렷한 所信 없이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
「너의 容貌를 바르게 하고 말씀을 들을 때는 반드시 恭遜히 하라. 다른 사람의 主張을 取하여 自己의 主張인 것처럼 말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自己의 생각 없이 無條件 따라 하지 말라. 반드시 옛것을 本받고 先王의 일을 본받아라. (正爾容, 聽必恭. 毋勦說, 毋雷同. 必則古昔, 稱先王.)」
이 이야기는 《禮記 曲禮》에 나오는데, ‘雷同’은 鄭玄의 注에 依하면 다음과 같다.
「우레가 울리면 萬物이 同時에 이에 應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사람의 말은 마땅히 自己에게서 나와야지 그렇게(우레에 應하듯이) 해서는 안 된다.
(雷之發聲, 物無不同時應者. 人之言當各由己, 不當然也.)」
‘附和雷同’은 元來 ‘雷同’이었는데, 後에 ‘附和’라는 말이 添加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말을 《論語》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孔子가 말했다. “君子는 和合하지만 附和雷同하지 않고, 小人은 附和雷同 하지만 和合하지 않는다.”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 論語 子路에. 論語(논어) 13. 子路(자로)
君子는 義를 崇尙하고 남을 自己 自身처럼 생각하여 和合하지만, 小人은 利益을 따져 利害關係가 맞는 사람끼리 行同하므로 사람들과 和合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雷同附和’, ‘附付雷同’이라고도 한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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