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ㅂ-1 박학상설~)
1. 박학상설(博學詳說)
널리 배우고, 詳細하게 解說한다.
博學은 ‘여러가지를 배워 많이(博) 안다’로 博識과 같다. 詳說은 ‘仔細히 說明하다(說)’이니, 博學詳說은 ‘널리 배우고, 詳細하게 解說한다’는 말이다.
‘孟子’의 ‘博學而詳說之 將以反說約也’(여러 學問을 배우고 仔細히 說明하는 것은 將次 反對로 簡單 明瞭함을 說明키 爲해서다)에서 나온 成語다.
‘…… 詳說之’의 ‘之’는 詳說의 目的語로 앞의 博學을 나타낸다. ‘反’은 (앞에 舒述한 內容에 對해) ‘오히려’ ‘도리어’ ‘反對로’라는 뜻으로 쓰이며, 說約은 ‘要點을 추려 簡略히 하다’는 意味다.
2. 반골(反骨)
거꾸로 박힌 뼈. 謀叛을 할 骨相이나 背叛의 조짐(兆朕)이 있음을 比喩하거나, 權力이나 權威를 따르지 아니하고 抵抗하는 氣質이나 그런 氣質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三國時代 蜀의 將帥 魏延은 字가 文長으로 劉備가 荊州에 있을 때부터 그의 곁에 있었고, 益州 攻略 때 從軍하여 功을 세웠다. 劉備가 漢中王이 되어 成都로 옮겨 가면서 魏延을 漢中太守로 拔擢했다. 大部分의 사람들은 張飛가 漢中을 맡을 것으로 豫想했었으므로 모두 놀랐다. 劉備가 軍臣들이 모인 자리에서 魏延에게 앞으로 어떻게 이 重任을 遂行 할 것인지 묻자 魏延이 對答했다.
“曹操가 天下를 들어 쳐들어온다면 大王을 爲해 그를 막겠습니다. 偏將이 引率하는 10萬 兵士가 이르면 大王을 爲해 그들을 殲滅시키겠습니다.”
劉備와 사람들은 魏延의 말에 感服했다.
227年, 諸葛亮이 漢中에 駐屯하면서 魏延을 督前部로 삼고 丞相司馬, 凉州刺史로 任命했다. 230年에는 吳懿와 함께 魏의 後將軍 費瑤, 雍州刺史 郭淮와 陽溪에서 싸워 大破해 前軍師 征西大將軍, 假節에 任命되고 南鄭侯에 封해졌다. 魏延은 每番 諸葛亮을 따라 出兵할 때마다 兵士 萬 名만 주면 諸葛亮과는 다른 길로 가겠으니 潼關에서 만나자고 말했는데, 諸葛亮은 이를 許諾하지 않았다. 魏延은 諸葛亮을 怯쟁이라고 말하며 그가 自身의 能力을 펼치지 못하게 한다고 늘 不平했다. 《三國志》의 注로 引用된 어환(魚弮)의 《魏略》에 依하면 諸葛亮의 第1次 北伐 當時 夏侯楙가 長安을 守備하고 있었는데, 魏延은 夏侯㮊가 怯이 많고 智略이 없으므로 子午谷을 通해 長安으로 치고 들어가자는 計策을 내었으나 諸葛亮은 이를 危險하다고 여겨 使用하지 않았다.
「魏延은 士卒을 잘 養成했으며 勇猛함이 다른 사람을 앞질렀고, 또한 性格은 自負心이 强하고 傲慢하여 모두들 그를 꺼렸다.
(延旣善養士卒, 勇猛過人, 又性矜高, 當時皆避下之.)」
特히 楊儀는 魏延을 容認하지 않아 두 사람은 서로 불과 물같이 不和했다. 「234年, 諸葛亮이 北谷口로 出兵할 때 魏延이 先鋒이 되었는데, 머리에 뿔이 난 꿈을 꾸었다. 行軍司馬 趙直에게 묻자 趙直이 魏延을 속여 말했다. “麒麟은 뿔이 있지만 使用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싸우지 않고도 敵이 스스로 깨질 相입니다.” 하지만 물러나서는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角 者는 칼(刀) 아래 용(用) 字가 있다. 머리에 칼을 使用한다는 말이니 甚히 兇하다.”
(延夢頭上生角, 以問占夢趙直, 直詐延曰, 夫麒麟有角而不用, 此不戰而賊欲自破之象也. 退而告人曰, 角之爲字, 刀下用也. 頭上用刀, 其凶甚矣.)」
그해 가을, 諸葛亮은 危篤해지자 秘密裏에 長史 楊儀, 司馬 費褘, 護軍 姜維를 불러 自身이 죽은 뒤에 節度 있게 撤收할 것이며, 魏延에게는 뒤를 끊게 하고 姜維가 그 뒤를 따르라고 命했다. 그리고 或時 魏延이 命令에 따르지 않더라도 出發하라고 했다. 諸葛亮이 죽자 楊儀는 發喪을 하지 않고 費褘를 시켜 魏延에게 가서 그의 마음을 알아보도록 했다. 魏延이 말했다. “丞相이 죽었다지만 내가 있소. 모두들 돌아가 葬禮를 치르시오. 나는 諸軍을 이끌고 敵을 치겠소. 한 사람이 죽었다고 天下의 大事를 廢할 수는 없지 않소.” 費褘는 魏延의 陣營에서 急히 빠져나와 自己 陣營으로 돌아와 全軍을 撤收시켰다. 魏延은 크게 怒하여 部隊를 이끌고 南쪽으로 앞질러 行軍하면서 閣道, 棧道를 불태워 길을 끊어 버렸다. 魏延과 楊儀는 各各 相對方이 謀叛을 일으켰다고 上疏를 올렸다.
蜀의 後主 劉禪은 侍中인 董允 等에게 물었다. 모두들 楊儀를 庇護하고 魏延을 疑心했다. 朝廷에서는 蔣琬을 보내 魏延을 討伐토록 했다. 楊儀는 魏延을 討伐하기 爲해 나무를 잘라 棧道를 補修하여 길을 내고 晝夜 달려 魏延을 追擊했다. 魏延이 軍士를 보내 楊儀의 部隊를 치게 하자 楊儀는 何平을 보내 魏延의 攻擊을 막게 했다. 何平은 魏延의 軍士들을 向해 꾸짖었다. “公께서 世上을 떠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肉身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너희는 이게 무슨 짓이냐.(公亡, 身尙未寒, 汝輩何敢乃爾.)” 魏延의 軍士들은 잘못이 魏延에게 있음을 깨닫고 魏延의 命을 듣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魏延은 홀로 子息들을 데리고 漢中으로 逃亡했다. 楊儀는 馬岱를 보내 魏延을 斬首했다. 楊儀는 魏延의 머리를 밟아 대며 말했다. “어리석은 놈. 다시 또 나쁜 짓을 저지를 거냐?” 그러고는 魏延의 三族을 滅했다. 蔣琬은 軍士들을 거느리고 魏延을 討伐하러 가다가 魏延이 죽었다는 消息을 듣고 軍士를 되돌렸다.
「元來 魏延이 北으로 가 魏나라에 降伏하지 않고 南으로 되돌아온 뜻은 楊儀 等을 除去하기 爲함이었다. 平常時 將帥들의 能力이 (魏延보다) 못하므로 分明 自己가 諸葛亮을 代身하는 쪽으로 論議가 될 것을 期待했기 때문이었다. 本뜻은 이와 같았을 뿐 背叛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原延意不北降魏而南還者, 但欲除殺儀等. 平日諸將素不同, 冀時論必當以代亮. 本指如此. 不便背叛.)」
《三國志 · 蜀書 魏文長傳》에 나온다. 이와 같이 正史 《三國志》에 依하면 魏延은 叛逆을 꾀한 人物이 아니었다. 特히 《三國志》 編纂者는 〈魏文長傳〉末尾 部分에 魏延이 決코 叛逆할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强調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魏延이 叛逆者의 代名詞가 되고, 成語 ‘反骨’의 出典이 된 것은 《三國演義》에 起因한다.
《三國演義》에서는 魏延을 反骨의 將帥로 만들어 놓았다. 처음엔 荊州牧使 劉表 麾下에 있었는데, 劉表 死後 荊州를 물려받은 劉琮이 曹操에게 降伏하려고 하자 이에 反撥하여 大將 文聘과 크게 싸우고 長沙 太守 韓玄에게 간다. 劉備가 長沙를 칠 때 韓玄의 將帥 黃忠과 關羽가 一大 接戰을 벌였다. 첫 番째 싸움에서 關羽는 黃忠을 죽일 機會가 있었는데도 그의 勇猛을 아껴 죽이지 않는다. 다음 날의 싸움에서 黃忠은 前날의 恩惠에 報答하기 爲해 빈 활을 쏘아 恩惠에 報答한다. 韓玄은 黃忠이 關羽를 充分히 활로 쏘아 죽일 수 있었는데도 不拘하고 살려 주었다는 理由를 들어 逆謀를 꾀한다며 黃忠을 斬하려고 한다. 刀斧手가 막 黃忠의 목을 베려는 瞬間 魏延이 뛰어들어 黃忠을 救해 낸 後, 韓玄을 베어 죽이고 劉備에게 歸順한다. 《三國演義》에서는 이렇게 魏延을 隨時로 主君을 바꾸는 叛逆者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다시 諸葛亮의 입을 빌려 魏延을 ‘反骨’로 만들어 버린다. 《三國演義》 第53回에 다음과 같은 內容이 있다.
「雲長(關羽의 字)이 魏延을 데리고 와서 人事시키자 諸葛孔明이 刀斧手에게 끌고 가 魏延을 斬하라고 큰 소리로 命했다. 玄德(劉備의 字)이 놀라 孔明에게 물었다. “魏延은 公을 세운, 罪 없는 사람인데 軍師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오?” 孔明이 對答했다. “그 祿을 먹으면서 主人을 죽이는 것은 不忠입니다. 그 땅에 살면서 땅을 바치는 것은 不義입니다. 내가 보니 魏延의 머리 뒤에 反骨이 있으니 오랜 後에 分明 叛逆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를 베어 禍根을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雲長引魏延來見, 孔明喝令刀斧手推下斬之. 玄德驚問孔明曰, 魏延乃有功無罪之人, 軍師何故欲殺之. 孔明曰, 食其祿而殺其主, 是不忠也. 居其土而獻其地, 是不義也. 吾觀魏延腦後有反骨, 久後必反, 故先斬之, 以絶禍根.)」
이처럼 《三國演義》에는 正史에 나오지 않은 反骨의 相을 添加시켜 魏延을 叛逆者로 만들어 놓았는데, ‘머리 뒤에 反骨이 있다.’는 諸葛亮의 말에서 ‘反骨’이 由來했다. 魏延의 官職名 中 ‘假節’이란 平時에는 사람을 處罰할 수 있는 權限이 없지만 戰時에는 軍令을 犯한 者를 죽일 수 있는 權限을 가진 職責을 말한다.
3. 반근착절(盤根錯節) 盘根错节
구부러진 뿌리와 울퉁불퉁한 마디. 얽히고설켜 處理하기 困難한 事物을 比喩하거나, 世上일에 難關이 많음을 比喩
東漢 때의 우후(虞詡)는 어려서 孤兒가 되어 祖母 膝下에서 자랐다. 縣에서는 그를 官吏로 推薦했으나 그는 할머니를 모시기 爲해 辭讓하다가 할머니가 90歲를 一期로 世上을 떠나자 비로소 太尉 李修의 薦擧로 郎中 벼슬을 했다.
永初 4年, 羌族이 幷州와 凉州를 侵攻했다. 大將軍 등즐(鄧騭)은 軍隊를 둘로 나누어 兵力을 弱化시키느니 차라리 凉州를 抛棄하고 北쪽 邊方에 兵力을 集結시켜 守備를 强化하자고 主張하면서 말했다. “比喩컨대 옷이 해지면 하나를 버려 다른 옷을 기우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두 곳을 다 지킬 수 없게 됩니다.” 모두들 鄧騭의 意見에 同意했지만, 憂詡는 同意하지 않고 太尉 李修에게 建議했다. “옛말에 函谷關의 西쪽은 將軍을 내고 東쪽은 宰相을 낸다고 했습니다. 凉州의 百姓들은 軍事에 對하여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 勇敢하여 戰鬪에 能합니다. 只今 羌族들이 敢히 關中에 侵入하지 못하는 까닭도 事實은 凉州의 百姓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只今 凉州를 抛棄하는 것은 좋은 計策이 아닙니다.” 鄧騭은 憂詡의 말을 傳해 듣고, 憂詡가 自己에게 맞서고 있다고 생각하고 憂詡에게 報復할 생각을 했다.
얼마 後 朝歌에서 民亂이 發生하여 고을의 官吏들을 殺害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朝廷에서도 여러 차례 官吏를 派遣하여 鎭壓하려고 하였지만 番番이 失敗하였다. 鄧騭은 이를 憂詡에게 報復할 수 있는 좋은 機會라고 생각하고, 憂詡를 薦擧하여 朝歌의 縣令으로 赴任하게 만들었다.
「이 消息을 듣고 憂詡의 親知들이 걱정하자 憂詡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쉬운 일만 求하지 아니하고, 어려운 일을 避하지 않는 것이 臣下의 職分이라네. 萬若 구부러진 뿌리와 울퉁불퉁한 마디를 만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날카로운 武器를 區別할 수가 있겠는가?”
(詡笑曰, 志不求易, 事不避難, 臣之職也. 不遇盤根錯節, 何以別利器乎.)」
憂詡는 朝歌에 赴任하여 民亂을 收拾하였다. 朝廷에서는 그의 能力을 높이 사 武都太守에 任命했다. 憂詡는 軍隊를 이끌고 羌族을 물리쳤다.
이 이야기는 《後漢書 虞詡傳》에 나오는데, 구부러진 뿌리와 울퉁불퉁한 마디를 만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날카로운 武器를 區別할 수 있겠느냐는 憂詡의 말에서 ‘盤根錯節’이 由來했다.
‘盤根錯節’은 다음의 典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얽히고설킨 複雜한 일을 만나면 나의 才能을 試驗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바람에 쓸리듯 쫓아가는 일을 만나면 나의 志操를 試驗할 수 있으며,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면 나의 思惟 能力을 試驗할 수 있고, 흔들림을 만나고 敵과 싸워 이기면 나의 힘을 試驗할 수 있으며, 毁妨과 侮辱을 만나면 나의 度量을 試驗할 수 있다.
(盤根錯節, 可以驗我之才. 波流風靡, 可以驗我之操. 艱難險阻, 可以驗我之思. 震撼折衝, 可以驗我之力. 含垢忍辱, 可以驗我之量.)」
* 宋나라 劉淸之의 戒子通錄에.
‘衝’은 戰車의 一種인 ‘衝車’를 말한다. ‘折衝’은 敵의 攻擊에 맞서 敵을 꺾고 이기는 것을 말하며, 交涉이나 談判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單語는 오늘날에도 外交的으로 談判을 하거나 意見 差異를 調整한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4. 반의희(斑衣戱) 斑衣戏
때때옷을 입고 才弄을 부리다. 늙어서도 父母에게 孝誠을 다하는 것을 比喩
「노래자(老萊子)는 楚나라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孝誠이 至極하여 父母에게 맛있고 부드러운 飮食으로 奉養했는데, 나이 70에도 父母가 生存해 계셨다. 老萊子는 늘 알록달록한 때때옷을 입고 父母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才弄을 피웠으며, 늙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父母님께 드리려고 飮食을 가지고 마루 위에 오르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자 老萊子는 엎어진 채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老萊子의 極盡한 孝誠에 對해 周圍의 稱讚이 藉藉하였다. 楚나라 王室이 混亂에 빠졌을 때, 老萊子는 蒙山 南쪽에 숨어 밭을 갈아 生活하며 著述 作業을 했으며, 이때부터 ‘老萊子’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의 마지막에 對해서는 傳해지지 않는다.
(老萊子楚人. 少以孝行, 養親極甘脆. 年七十, 父母猶存. 萊子服荊蘭之衣, 爲嬰兒戱於親前 言不稱老. 爲親取食上堂, 足跌而偃, 因爲嬰兒啼. 誠至發中. 楚室方亂, 乃隱耕於蒙山之陽, 著書號老萊子. 莫知所終.)」
이 이야기는 唐나라 이한(李澣)의 《蒙求 高士傳》에 나오는데, 老萊子가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才弄을 피웠다는 말에서 ‘斑衣戱’가 由來했다. ‘老萊斑衣’ 또는 ‘斑衣戱彩’라고도 한다.
5. 반포지효(反哺之孝)
반포지효는 ‘까마귀 새끼가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효’라는 뜻으로, 자식이 커서 부모의 은혜를 갚는 효성을 상징한다.
이밀(李謐)은 晉나라 武帝가 내린 높은 官職을 받았지만 늙은 할머니를 奉養하기 爲해 官織을 辭讓했다.
그러자 武帝는 李謐에게 크를 火를 냈고 李謐은 自身의 處地를 까마귀에 比喩하면서 武帝에게 "까마귀가 어미 새의 恩惠에 報答하려는 마음같이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는 날까지만 奉養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明나라 때의 藥學書 本草綱目을 보면, 까마귀는 태어난 지 60日 동안은 어미가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지만 새끼가 다 자라면 어미에게 먹이를 가져다 준다고 한다.
까마귀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모습을 보고 自身의 孝道하는 마음을 比喩한 것이다.
6. 발본색원(拔本塞源)
폐단(弊端)의 근본을 뽑고 根源을 除去함
이 말은 '春秋左氏傳' 昭公 9年 條項에 나오는 周王의 말에서 由來.
春秋末期 周나라 王室은 날로 衰해졌다. 當時 國境地域인 周 王室의 땅 甘地와 晉나라의 閻地間에 國境分爭이 났다.
晉이 兵力을 動員해 周를 치자 周의 景王이 大夫 詹桓伯을 보내 점쟎게 꾸짖었다.
"나에게 伯父가 계신것은 마치 衣服에 갓이 있음과 같고, 나무와 물에 根源이 있어야 하듯이 百姓들에게도 그 根源地인 智慧로운 임금이 있어야 한다.
伯父께서 萬一 갓을 찢고 나무의 뿌리를 뽑고 물의 根源을 막아 (拔本塞源) 임금마져 버린다면, 비록 오랑캐라 할지라도 나를 우습게 對할 것입니다"
(我在伯父, 猶衣服之有冠冕. 木水之有本源, 民人之有謀主. 伯父若裂冠毁冕, 拔本塞源, 專棄謀主, 雖戎狄其何餘一人)
* 明나라 王陽明의 弟子들이 編纂한 傳習錄에는
夫拔本塞援之論, 不明於天下, 則天下之學聖人者, 將日繫日難. 斯人淪於禽獸夷而猶自以爲聖人之學
(大抵 拔本塞源의 論議가 世上에 밝혀지지 않는다면 天下에 聖人을 배울 사람은 날로 번거롭고 날로 어렵게 되리라. 이 사람들이 禽獸와 오랑캐와 같은 地境에 빠지고서도 스스로 聖人의 學門을 한다고 여기게 될 것인가) 여기서의 拔本塞源은 天理知慾心棄로 私事로운 貪慾의 根源을 除去함을 이른다.
7. 발분망식(發憤忘食)
끼니까지도 잊을 程度로 어떤 일에 熱中하여 努力함
* 論語 述而에. 論語(논어) 7. 述而(술이)
楚나라 섭현(葉縣)의 沈諸梁이 子路에게 孔子가 어떤 人物인가 물었다. 子路가 對答을 못했다. 이 말을 傳해들은 孔子 曰 "너는 어찌, 그 사람됨이 어떤일에 熱中하면 끼니를 챙겨 밥을 먹는것도 잊고, 이를 즐거워하여 근심도 잊어버려 늙어가는 것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葉公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 汝系不曰其爲人也拔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之爾)
* 史記 孔子世家에서는 孔子를 ~ 學道不倦, 誨人不厭, 發憤忘食(道를 배움에 게으름이 없고 사람을 가르침에 싫어함이 없었다. 어떤 일에 熱中하면 끼니도 잊으셨다)이라 했다.
8. 방약무인(傍若無人)
周圍에 사람이 없는 것 같이 말이나 行動을 함부로 함
戰國의 世上도 거의 秦의 統一로 기울면서 始皇帝의 權威가 群星을 制壓할 즈음이었다.
暴惡無道한 始王을 暗殺하려다 失敗한 사람중에 荊軻라는 刺客이 있었다.
齊나라 사람으로 衛나라에 가서 元君과 國事를 論하다 뜻이 貫徹되지 않자 諸國을 漂泊하였다.
冊 읽기와 劍 쓰기를 좋아했고 各處에 賢人이나 豪傑들도 많이 사귀었다.
그가 山西省 北部를 지나다 갑섭(蓋聶)이라는 者와 劍에 對해 論할 때 蓋聶이 熱을 받아 노려 봄으로 그는 바로 일어나 떠나가 버렸다.
또 邯鄲에 이르러 魯句踐이라는 者와 주사위로 놀음을 하다 魯句踐이 勝負에 執着한 나머지 火를 냄으로 逃亡치듯 그 자리도 避해버렸다.
燕나라에서는 白丁과 筑의 名手 高漸離를 사귀어 늘 저자거리에서 술을 마셨고 醉氣가 돌면 高漸離가 筑를 켜고 그는 노래로 和答하다 感情이 激하면 옆에 아무도 없는 것 처럼 울기도 했다.
傍若無人이란 「史記」의 刺客傳에 나오는 말로 周圍의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멋대로 行動하는 것이다.
當時 사람들은 荊軻의 行動을 그렇게 본 것이다.
荊軻가 燕나라에서 太子 丹을 만났다.
丹의 眞摯한 付託을 받은 그는 秦王(政)을 暗殺하기 爲해 길을 떠날 때 배웅하는 一行中에 高漸離도 함께 있었다.
易水 江가에서 高漸離가 筑을 켜고 荊軻는 '風蘇蘇兮 易水寒'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結局 暗殺에 失敗하고 죽임을 當하였다. 高漸離는 늙어 봉사가 되었으나 親舊 荊軻의 怨讐를 갚으려고 秦王을 노리다 失敗하여 荊軻의 뒤를 따라 怨魂이 되었다.
9. 배수지진(背水之陣)
敵과 싸울 때 江이나 湖水, 바다를 등지고 펼친 陣. 危殆함을 무릅쓰고 必死的으로 단판걸이 勝敗를 다툼의 比喩
史記 '淮陰後列傳'에 信乃使萬人先行 出背水陣 趙軍望見而大笑란 말이 있다.
漢나라 劉邦이 楚나라 項羽를 누르고 天下統一로 漢의 高祖皇帝가 되기 2年前
漢의 精銳部隊를 指揮했던 勇將 韓信은 張耳 將軍과 함께 魏나라 軍士를 擊破한 餘勢를 몰아 趙나라로 進擊했다.
緊急 情報를 받은 趙의 歇王은 成安君 陳餘와 함께 20萬 大軍을 急遽 井輕縣의 좁은 길목 어귀에 集結시켜 튼튼한 陣地를 構築하고 敵軍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廣武君 李左車가 成安君에 建議하길 "韓信은 西河를 건너 魏나라 王 豹와 夏說(하열)을 잡고 連敖를 피로 물드렸는바, 그들의 氣勢를 꺾기는 쉽지않으니 제게 3萬의 奇襲兵士를 주시면 지름길로 달려가 峽谷을 길게 줄지어 들어오는 敵軍의 허리 部分을 埋伏奇襲으로 짤라 숨통을 끊을 것입니다" 라고 했으나 받아 드려지지 않았다.
諜者를 通해 이 事實을 안 韓信은 歡呼하며 急히 兵士를 몰아 10如里에 肉薄해 들어와 陣을 쳤다
韓信은 後方에 1萬如 兵士로 깊고 넓은 江물을 등지고 陣을 치게하였으며, 夜陰을 利用하여 埋伏 奇襲 騎兵 2千名을 뽑아 漢의 붉은 깃발을 나눠주며 本隊가 進擊하여 敵軍을 誘引후 거짓 敗北한양 背水陣까지 물러나 決死抗戰 할 것이니 그 틈에 趙의 城壘로 들어가 그들의 깃발을 漢의 깃발로 바꿔 놓도록 하라고 命令했다.
그리고 나서 主力部隊를 敵陣가까이 移動 前進配置했다.
날이 밝자 趙나라 陣營에선 背水陣을 친 韓軍을 보고선 水葬시킬 좋은 機會다며 크게 웃었다.
이 때 韓信의 部隊가 隊長旗를 앞세우고 軍鼓를 울리며 攻擊하자 趙의 兵士들도 城門을 열고 뛰어나오면서 一進一退를 거듭했다.
戰略대로 漢의 兵士들이 깃발이며 북을 내 팽개치고 後退를 거듭하자. 이 때다 하며 趙의 全軍이 몰려나오며 좁은 길의 追擊이 始作되었다.
江 어귀에 이른 兩 軍의 熾烈한 戰鬪가 벌어졌으며 밀리면 끝장나는 狀況에서 活路를 뚫기 爲한 漢의 兵士들의 決死抗爭에 絶對 多數의 趙나라 軍士들이 조금씩 밀려났다.
作戰上 後退를 하며 돌아섰지만 趙軍의 本營은 이미 占領되어 漢의 붉은 깃발이 걸려있자 趙軍은 갑자기 自中之亂이 일어났다.
때맞춰 前後方에서 漢軍의 攻擊이 始作되자 趙軍은 스스로 瓦解되어 뿔뿔히 흩어져 달아나 結局 漢의 勝利로 끝났다.
背山前江의 陣이 普遍的인데 逆陣을 擇한것도 兵法의 하나로 死地에선 生地를 반드시 찾고야 마는 法이고 自身의 軍隊는 遠征에 지쳐있고 그間 많은 補充兵이 채워져 烏合之卒에 가까워 常識을 깨뜨린 背水陣을 친 것이다.
10. 배난해분(排難解紛) 排难解纷
위난(危難)을 물리치고 분규(紛糾)를 解決해 주다. 남의 어려움이나 問題를 解決해 주는 것을 말한다.
秦나라 昭王이 軍士를 일으켜 趙나라의 都邑 邯鄲을 包圍했다. 趙나라의 孝成王이 魏나라의 안희왕(安釐王)에게 救援을 要請하자 安釐王은 將軍 晉鄙를 派遣하였다. 그러나 晉鄙는 秦나라를 두려워하여 魏나라와 趙나라의 接境 地域인 蕩陰에서 前進을 멈추었다. 安釐王은 辛垣衍을 秘密裏에 邯鄲으로 보내 趙나라의 國相 平原君에게 建議했다. “秦나라가 趙나라를 攻擊하는 目的은 邯鄲을 占令하려는 것이 아니고 天下의 皇帝가 되려는 데 있습니다. 萬若 趙나라 王께서 使臣을 秦나라 王에게 보내어 皇帝라 불러 준다면 틀림없이 기뻐하며 邯鄲의 包圍를 풀 것입니다.” 平原君은 망설이며 決斷을 내리지 못했다.
이때 마침 邯鄲을 訪問한 魯仲連이 이를 알고 平原君을 만난 後 平原君을 通해 申垣衍을 直接 만나 說得했다. “秦王이 皇帝 行勢를 하게 되는 날에는 반드시 갖가지 改革을 斷行할 것이오. 于先 모든 나라 大臣들 中 미워하는 者에게 刑罰을 내리고 그 代身 自己가 아끼는 者들을 박아 넣을 것이오. 또 陰으로 陽으로 奸慝한 計策을 써서 모든 나라를 滅亡시킬 것이오. 그렇게 되면 威王은 便安히 富貴榮華를 누릴 수 있을 것 같소? 將軍은 生命과 벼슬을 保存할 수 있을 것 같소?”
이 말을 들은 申垣衍은 秦나라 王을 皇帝라고 부르며 强化하려던 計策을 抛棄하였다.
한便, 秦나라에서는 邯鄲에 魯仲連이 있다는 消息을 듣자 卽刻 軍隊를 50里 밖으로 退却시켰다. 얼마 後, 魏나라의 信陵君이 晉鄙를 죽이고 軍士들을 統率하여 救援하러 오자 邯鄲의 包圍는 곧 풀렸다. 平原君이 魯仲連에게 領地를 주려고 하자 魯仲連은 이를 辭讓하였다. 平原君은 盛大한 酒宴을 베풀고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魯仲連 앞으로 나아가 千金을 내놓으며 그의 壽를 빌었다.
「魯仲連은 웃으면서 “天下에 貴히 여김을 받는 선비는 남을 爲하여 어려움과 紛亂을 解決하고도 取하지 않는 것입니다. 取하는 바가 있다면 이는 장사치입니다. 나는 그렇게는 차마 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고 平原君을 떠나 一生 동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魯連笑曰, 所貴於天下之士者, 爲人排患釋難解紛亂而無所取也. 卽有所取者, 是商賈之人也. 仲連不忍爲也. 遂辭平原君而去, 終身不復見.)」
이 이야기는 《戰國策 趙策》과 《史記 魯仲連鄒陽列傳》에 나온다. ‘排難解紛’은 ‘排患解紛’이라고도 한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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