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ㅁ-6 물극필반)
45. 물극필반(物極必反)
事物은 極에 達하면 반드시 되돌아오게 된다. 興亡盛衰는 反復되는 것이므로 모든 일에 지나치게 慾心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宮女로서 두 名의 皇帝(太宗, 高宗)를 섬겼고, 一個 宮女에서 皇后의 자리까지 올랐으며, 두 名의 皇帝(中宗, 睿宗)를 낳았고, 스스로는 中國 歷史上 唯一無二한 女皇帝가 된 則天武后는 뛰어난 政治的 度量을 지닌 女傑 中의 女傑로 元名은 武曌(무조)다.
元來 太宗의 後宮이었던 그女는 太宗이 病이 든 後 皇太子 李治 (後의 高宗)와 서로 戀慕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太宗이 죽자 感業寺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後嗣를 보지 못한 宮女는 自己가 모시던 皇帝가 죽으면 宮에서 나가 절이나 道場(도량)에 들어야 한다는 規定에 依해서였다. 그런데 太宗의 뒤를 이은 高宗이 後宮 蕭淑妃를 寵愛하자, 王皇后는 武曌를 利用해 高宗과 蕭淑妃 사이를 갈라놓을 생각으로 비구니가 된 武曌를 還俗시키고 다시 宮으로 불러들였다.
宮中으로 돌아온 武曌는 高宗과 王皇后의 사랑과 信任을 받아 昭儀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王皇后와 한便이 되어 蕭淑妃를 謀陷하여 幽廢시킨 後, 陰謀를 꾸며 王皇后까지 몰아내고 皇后가 되었다. 皇后의 자리에 오른 그女는 勢力 構築에 熱을 올리는 한便, 高宗과 함께 垂簾政治를 하면서 政治에 깊이 介入했다. 高宗이 죽고 中宗이 卽位하자 攝政을 하였으며, 마침내는 中宗을 廢位시키고 스스로 皇帝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고는 나라 이름도 周로 바꾸고 스스로 神聖皇帝라 稱했다. 則天武后는 690年부터 705年까지 15年 동안 皇帝의 자리를 지켰는데, 事實上 權力을 掌握한 期間은 皇后가 된 655年부터 치자면 무려 50年이나 된다.
則天武后는 高宗이 죽고 어린 中宗이 卽位하자 攝政을 했는데, 中宗이 親政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如前히 攝政을 그만두지 않았다. 大臣들은 이에 對해 不滿을 갖고 여러 차례 上疏를 올렸다. 그 中 大臣 蘇安桓은 上疏를 올려 다음과 같이 諫言하였다.
「이제 太子를 생각해 보면 나이도 적지 않고 才德도 갖추고 있는데, 陛下께서는 皇帝의 保衛를 貪하여 母子之間의 情을 잊고 계십니다. ······ 陛下께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슨 얼굴로 唐 王朝의 宗廟를 뵐 것이며, 무슨 告明으로 大帝의 陵墓를 謁見할 것입니까. 陛下께서는 무슨 까닭에 밤낮으로 근심을 쌓으시며 이미 새벽鐘이 울리고 물時計의 물이 다 떨어진 것(나이 먹고 힘은 달려 末年이 가까웠음)을 모르십니까? 臣이 알기로는 하늘의 뜻과 百姓의 마음은 모두 李氏에게 돌아갔습니다. 武后께서는 便安하게 皇帝의 자리에 계시지만, 事物이 極에 達하면 반드시 反轉하고, 그릇도 가득 차면 넘친다는 道理를 모르고 계십니다. 옛말에 “마땅히 끊어야 할 때 끊지 않으면 그 混亂을 입게 된다.”고 했는데 바로 이를 이르는 말입니다.
(當今太子追回, 年德俱盛, 陛下貪其寶位而忘母子深恩, ······ 惟陛下思之, 將何聖顔以見唐家宗廟, 將何誥命以謁大帝墳陵. 陛下何故日夜積憂, 不知鐘鳴漏盡. 臣以爲天心人事, 還歸李家. 陛下雖安天位, 殊不知物極必反, 器滿則傾. 故語曰, 當斷不斷, 將受其亂. 此之謂也.)」
* 新唐書 蘇安桓傳에 나온다.
‘物極必反’의 典故는 禮記, 呂氏春秋, 鶡冠子 等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릇이 가득 차면 기울게 되고, 뜻이 가득 차면 뒤집히게 된다.
(器滿則傾, 志滿則覆)」* 禮記 曲禮에.
「穩全해지면 반드시 이지러지고, 極에 達하면 반드시 뒤집힌다.
(全則必缺, 極則必反)」* 呂氏春秋 博志에.
「事物이 極에 達하면 뒤집히게 되니 이를 環流라고 한다.
(物極則反, 命曰環流.)」* 鶡冠子 環流에.
* 歷史 · 文化 資料
(唯一無二한 女皇帝, 則天武后)
高句麗를 征伐하고 東北亞의 새로운 秩序를 改編하려고 計劃했던 唐太宗 (在位 626∼649)은 高句麗 征伐에 失敗한 後, 再次 遠征을 準備하던 中에 利病 (痍疾)으로 死亡했다. 649年, 太宗의 나이 51歲 때였다.
貞觀의 마지막 해인 649年, 病이 날로 惡化되자 太宗은 皇太子 李治를 翠微宮으로 불렀다. 翠微宮에 든 太子는 太宗 곁에서 病시중을 들고 있는 한 宮女의 모습에 마음이 사로잡히고 말았다. 太子와 宮女는 太宗의 病床 앞에서 서로 눈이 맞아 戀慕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自己보다 네 살이나 年上인 아버지의 後宮을 사랑한 아들, 그리고 이 後宮의 運命은 將次 어떻게 될까?
이 宮女가 바로 두 名의 皇帝 (太宗), (高宗)를 섬겼고, 一個 宮女에서 皇后의 地位까지 올랐으며, 두 名의 皇帝 中宗, 睿宗를 낳았고, 스스로는 中國 歷史上 唯一無二한 女皇帝가 된 媚娘이라는 宮女로서, 歷史에서는 則天武后, 或은 武則天이라고 부른다. ‘則天’이란 號稱은 그 女의 아들 中宗이 올린 尊號 ‘則天大聖皇帝’와, 그 女가 죽은 後 나라에서 내린 諡號 ‘則天大聖皇后’에서 由來한 것이다.
媚娘의 姓은 武, 이름은 照로 幷州 山西省 文水縣 出身으로 알려져 있다. 勿論 그 女의 出生地에 對해 論難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擧論하지 말기로 하자. 媚娘의 아버지 武士彠(무사확)은 木材商으로서 많은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唐高祖 李淵을 도운 功으로 後에 工部尙書 (建設部 長官)에 올랐으나, 門閥을 重視했던 當時 社會에서는 보잘것없는 家門에 屬했다. 當時는 士農工商의 順으로 地位를 嚴格히 따졌고, 武士彠은 가장 下位 階層인 商 出身이었기 때문이다.
媚娘은 成長할수록 더욱 아름다워졌다. 그 女의 美貌가 빼어나다는 所聞은 마침내 宮中에까지 알려져 及其也는 太宗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當時 이미 40歲가 넘은 太宗은 14歲밖에 안 된 媚娘을 宮中으로 불러들이고 武媚娘이라는 號를 내렸다. 媚娘이란 요즘 式으로 하면 이쁜이 아가씨쯤이나 될까? 媚娘은 5品 後宮인 才人에 封해져 太宗의 寵愛를 받았으나, 세 名의 皇帝가 나온 以後 武氏 姓을 가진 女人의 天下가 된다는 謠言이 떠돌아다니자 太宗은 媚娘을 멀리 하게 되었다.
媚娘은 美貌와는 달리 性質이 아주 거세었다. 媚娘이 宮中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太宗이 獅子驄이라 불리는 名馬 한 마리를 얻었는데, 몹시 사나워 아무도 길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太宗이 皇后와 妃嬪 等 宮女들을 거느리고 말을 구경하는 자리에서 媚娘이 이 말을 길들이겠다고 自願하고 나섰다. 사나운 말을 어떻게 길들일 수 있겠냐고 太宗이 놀라며 묻자 媚娘이 答했다. “저에게 쇠 채찍과 쇠망치, 칼을 주시옵소서. 저 말이 제 말을 듣지 않으면 쇠 채찍으로 몸뚱이를 때리고, 그래도 안 되면 쇠망치로 머리를 쳐 버릴 것입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칼로 목을 따 버리겠습니다.”
649年, 太宗이 病死하자 皇太子 李治가 太宗의 뒤를 이어 皇帝가 되었는데, 이이가 바로 高宗 (在位 649∼683)이다. 太宗의 後宮이었던 26勢의 媚娘은 머리를 깎고 感業寺로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當時 皇帝가 死亡하면 皇帝의 後宮들이 갈 길은 세 가지였다. 첫째, 子女가 있으면 그 子女를 따라 밖으로 나가 살면서 比較的 安穩하게 餘生을 보낼 수가 있었다. 둘째, 子女는 없으나 特技가 있으면 새로운 皇帝의 밑에서 皇帝를 도와 特技를 살려 일을 할 수 있었다. 셋째, 子女도 없고 特技도 없는 境遇에는 宮에서 나가 國家에서 指定한 절이나 道場에 들어가 女僧이나 女道士가 되어 平生을 보내야 했다. 14歲에 太宗의 後宮이 된 武媚娘은 長長 12年을 虛送勢月하고 品階도 처음 들어갈 때의 5品 才人인 채로 結局 꿈을 접어야 하는 運命에 處하게 되었다. 하지만 武媚娘은 感業寺에 비구니로 있으면서도 決코 꿈을 抛棄하지 않고, 皇帝가 된 李治와의 連結 고리를 끊지 않으려고 모든 方法을 動員하여 努力을 기울였다. 高宗에게 모든 運命을 걸었던 그 女의 눈물겨운 努力을 엿볼 수 있는 代表的인 證據가 바로 그 女가 高宗에게 自身의 感情을 傳達하기 爲해 쓴 〈如意娘〉이란 詩이다.
看朱成碧思紛紛 : 붉은色 푸르게 보이고 머릿속이 온통 어지러우며
憔悴支離爲憶君 : 顔色이 憔悴하고 온몸이 무너져 내림은 그대를 못 잊기 때문
不信比來常下淚 : 요즈음 눈물로 지낸다는 것을 믿지 못하신다면
開箱驗取石榴裙 : 箱子를 열어 石榴빛 붉은 치마를 살펴보시길
임 생각에 붉은 色이 푸르게 보일 程度로 精神이 昏迷하고, 임을 못 잊어 每日 눈물을 흘리는 愛慕의 情이 切切히 드러나는 이 詩는 後에 詩仙 李白이 읽고 感歎을 禁하지 못하며 自身도 到底히 따라갈 수 없는 傑作이라고 稱讚했을 程度로 아름답고 뛰어난 ‘愛慕의 詩’이다. 特히 눈물 범벅이 된 石榴빛 붉은 치마가 내가 當身을 그리워하느라 每日 눈물을 흘리는 것을 證明하고 있다는 마지막 절은 壓卷이라는 생각이 든다. 武媚娘의 이런 努力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運命의 장난이었는지는 모르겠으되, 비구니가 되어 永遠히 꿈을 접을 運命에 處한 것으로만 보였던 媚娘에게 奇跡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高宗은 正妻 王氏 外에 蕭氏라는 女人을 사랑했다. 高宗이 卽位하면서 王氏는 皇后로 冊立되었고, 蕭氏에게는 淑妃라는 爵位가 내려졌다. 淑妃는 皇后 다음의 品階로 正1品 後宮이니, 後宮 中에서 崔高 品階다. 王皇后와 蕭淑妃 사이에는 高宗의 寵愛를 놓고 暗鬪가 벌어지기 始作했다. 以夷制夷라고 했던가, 高宗이 太子 時節부터 武媚娘을 戀慕하고 있다는 事實을 알고 있던 王皇后는 蕭淑妃에게 기울고 있는 高宗의 마음을 돌리기 爲해 媚娘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하여, 王皇后는 感業寺에 있는 媚娘에게 즉시 머리를 기르고 還俗하여 宮中으로 돌아올 것을 命했다. (늑대를 잡기 위해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줄도 모른 채) 宮中으로 돌아온 媚娘은 거친 性質을 죽이고 얌전하고 상냥하게 行動해 高宗과 王皇后의 사랑과 信任을 받아 昭儀 자리에 올랐다. 昭儀란 正2品 後宮으로 淑妃 다음의 品階에 該當한다. 昭儀 자리에 오른 媚娘, 卽 武昭儀는 王皇后와 한便이 되어 蕭淑妃를 謀陷하여 그女를 幽廢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武昭儀의 野望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이番에는 攻擊 目標를 王皇后로 돌렸다. 武昭儀는 自身이 낳은 公主를 窒息시킨 後 그 罪를 王皇后에게도 뒤집어씌우는 等, 여러 가지 陰謀를 꾸며 王皇后의 罪를 捏造했다.( 王皇后가 다녀간 後 딸이 죽어 있었는데, 王皇后는 武昭儀의 딸을 죽여야 할 理由가 없었다.) 王皇后는 高宗의 怒여움을 샀으며, 漸次 高宗의 사랑을 잃게 되었다. 武昭儀는 이런 식으로 自身이 皇后의 자리에 오르는 길목에 놓인 障碍物들을 하나하나 除去해 나갔다.
宮中에서는 武昭儀의 皇后 冊封에 對한 問題가 擧論되기 始作했다. 元老大臣 褚遂良과 長孫無忌는 武昭儀가 名門 出身이 아니며 일찍이 太宗의 侍女였다는 事實을 들어 反對를 했고, 于志寧은 沈默을 지켰으며, 이적(李勣)은 病을 稱하고 會議에 參席하지 않았다. 高宗은 重臣들의 意見을 默殺할 수가 없었으므로 이 案件을 一旦 留保했다. 野望을 가지고 있던 武昭儀는 心腹을 長孫無忌에게 보내 自己便으로 끌어들이기 爲해 工作을 폈으나 拒絶當하고 말았다. 武昭儀는 抛棄하지 않고 高宗에게 베갯밑訟事를 벌여 褚遂良과 長孫無忌를 讒訴했다. 武昭儀의 이 같은 執拗한 作戰이 主效하여 褚遂良은 南方으로 左遷되었다가 病死하였고, 長孫無忌는 金州로 流配되었다가 謀叛罪를 뒤집어쓰고 죽임을 當했다. 臣下들 가운데 李義府와 許敬宗과 같은 무리들은 재빨리 狀況을 읽고 武昭儀 側에 붙어, 한 사람은 武昭儀를 皇后로 冊立해야 한다는 上奏文을 올리고, 또 한 사람은 宮庭에서 輿論을 換氣시키는 作業을 했다. 雰圍氣가 造成되자 高宗은 앞선 御前會議에 稱病하고 參席하지 않았던 元老大臣 李勣을 불러 그의 意思를 물었다. “이 問題는 陛下의 집안일입니다. 外部 사람에게 下問하실 일이 아닌 줄로 아옵니다.” 李勣의 말에 힘을 얻은 高宗은 마침내 武昭儀의 皇后 冊立을 決心했다.
655年, 武昭儀가 32歲 되던 해, 禮服을 입은 武昭儀, 아니 武皇后는 淑儀門에서 皇后의 印綬를 목에 걸고 文武百官들의 賀禮를 받았다. 皇后 冊立에 功이 컸던 李義府와 許敬宗 等은 出世街道를 달려 마침내 宰相의 자리까지 올랐다. 王皇后와 , 蕭淑妃는 則天武后의 命令에 의해 棍杖 100臺씩을 맞고 手足이 잘린 채로 술항아리에 던져져 죽임을 當했다. , 蕭淑妃는 淑妃의 職位를 빼앗겼을 때 憎惡에 찬 얼굴로 則天武后를 辱하며, 自身은 來世에 고양이로 還生하여 쥐로 還生한 則天武后의 목을 물어뜯어 버리겠다고 高喊을 질러 댔다. 그 後 則天武后는 宮에서 고양이 기르는 것을 禁했으며, 蕭淑妃의 妄靈이 붙을까 두려워 長安의 宮보다는 洛陽에서 사는 일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女가 고양이를 싫어했다는 이야기는 事實 與否를 斷定하기 어렵다.
皇后의 자리에 오른 則天武后는 勢力 構築에 熱을 올리는 한便, 政治에까지 손을 뻗쳐 마침내 高宗과 함께 垂簾政治를 하게 되었다. 垂簾聽政, 卽 垂簾聽政이란 元來 年少한 太子가 王位를 이었을 때 母后(太后)가 代身 執政하는 制度인데, 當時 則天武后와 高宗의 이런 政治 行態는 常識的으로는 理解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어쨌든 날이 갈수록 則天武后의 權力이 强大해졌기 때문에 高宗도 그女의 氣勢에 눌릴 地境이었다. 하여, 高宗은 宰相인 上官儀와 隱密히 議論하여 則天武后를 廢할 計劃을 세웠는데, 그만 事前에 들통이 나고 말았다. 上官儀가 모든 罪를 뒤집어쓰고 處刑되었고, 高宗은 一體의 責任을 上官儀에게 돌림으로써 무서운 아내로부터 겨우 自身을 保護할 수 있었다.
則天武后는 後宮 劉氏의 所生인 皇太子 李忠을 廢하고, 겨우 5歲밖에 안 된 自身이 낳은 李弘을 皇太子로 세웠다. 李弘은 어질고 孝誠스러웠지만, 옳은 일에 對해서는 어머니의 神經을 거스르더라도 直言을 아끼지 않았다. 則天武后는 自身이 낳은 아들이었지만 李弘을 別로 탐탁하게 여기기 않았다. 674年, 則天武后는 只今까지 使用해 오던 皇帝, 皇后의 稱號를 고쳐 天皇, 天后라 稱했다. 政治는 漸次 則天武后의 손으로 넘어가고 高宗은 아무런 實權도 없는 허수아비로 轉落하고 말았다. 다음 해에 皇太子 李弘은 宮中에 幽廢되어 있는, 蕭淑妃의 딸인 義陽公主와 宣城公主를 結婚시켜야 한다고 高宗에게 上奏했다. 高宗은 皇太子의 請願을 允許했는데, 그 後 皇太子 李弘이 急死하는 變이 일어났다. 病死했다는 說도 있고 則天武后가 毒殺했다는 說도 있는데, 이 亦是 事實 與否를 斷定하기 어렵다. 當時 皇太子 李弘은 肺結核 3期의 重病에 걸려 있었으므로 가만히 놔두어도 죽을 사람이었다. 則天武后가 굳이 政治的 冒險을 敢行할 理由가 없었다는 主張은 相當히 說得力이 있다고 생각된다.
李弘이 죽자, 高宗의 여섯째 아들인 22歲의 李賢이 皇太子로 冊封되었다. 李賢은 武后가 前 皇太子 李弘 다음에 낳은 아들로 알려져 있지만, 事實은 則天武后의 언니 韓國夫人이 未亡人이 된 後 宮中에 出入하다 高宗과 關係를 가져 낳은 아들로 推定되며, 이로 因해 韓國夫人이 同生 則天武后에게 殺害되었다고 傳해진다. 李賢은 學識이 豊富하고 性格이 좋아 그의 周邊에는 學者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는 이 學者들과 함께 范曄이 지은 後漢時代의 歷史인 《後漢書》의 注釋을 달기도 했다. 則天武后는 自身의 野望을 達成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이 聰明하고 勇敢한 皇太子 李賢을 警戒하여, 母子 사이에 葛藤 關係가 形成되기 始作했다.
則天武后는 明崇儼이라는 方士를 背後에서 調縱하여 李賢을 헐뜯기 始作했다. 그런데 어느 날 明崇儼이 暗殺되었다. 則天武后는 李賢을 嫌疑者로 指目하고 暗暗裏에 調査를 했는데, 太子府의 馬廐間에서 數百 벌의 甲옷이 發見되었고, 이를 機會로 생각한 則天武后는 太子에게 謀叛罪를 뒤집어씌워 皇太子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말았다. 當時 武器는 아주 嚴하게 管理되고 있어서 武器를 빌리면 반드시 當日에 返納해야 한다는 規定이 있었는데, 實質的으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則天武后는 이어 李賢을 追從하는 勢力들을 抹殺해 버렸다. 李賢은 얼마 後 自殺하고 말았다. 그 뒤로 高宗의 일곱째 아들 李顯이 皇太子가 되었다.
高宗이 則天武后를 사랑하고 그女에게 꼼짝을 못 했던 理由는 性格과 關係가 깊다. 高宗은 孝順하고 友愛롭고 聰明한 反面, 年上의 女人에 依存性이 强한 柔弱한 性格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高宗이 사랑했던 女人은 모두 性格이 强하고 高宗 代身 決定을 내려 줄 수 있는 女性들이었다. 高宗은 훌륭한 家門에서 좋은 敎育을 받아 敎養이 넘치고 端雅했던 皇后 王씨를 좋아하지 않았고, 性格이 强한 蕭淑妃를 좋아했다. 그리고 蕭淑妃와 比較도 할 수 없을 程度로 强한 則天武后를 더 좋아했다. 則天武后가 이처럼 高宗을 꼼짝 못 하게 만들고 마지막에는 中國의 唯一無二한 女皇帝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다 그만한 背境과 理由가 있었던 것이다.
683年, 高宗이 죽고 皇太子 李顯이 그 뒤를 이어 卽位하니, 이이가 中宗 (在位 683∼684, 705∼710)이다. 則天武后는 皇太后가 되었다. 當時 高宗은 56歲, 則天武后는 60歲, 李顯은 28歲였다. 中宗의 皇后 韋氏, 卽 韋皇后는 皇后의 자리에 오르기 前부터 시어머니 則天武后를 보면서 權限이 대단한 皇后의 자리를 羨望했다. 그리고 皇后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親庭아버지를 門下侍中이라는 要職에 起用하려고 했다. 이제 갓 皇后의 자리에 오른 며느리가 親庭의 榮達을 計劃하고 있다는 事實에 크게 怒한 則天武后는 아내를 다스리지 못한 中宗을 容恕하지 않았다. 中宗은 卽位하여 親政에 臨한 지 36日 만에 皇帝에서 廢出되어 廬陵王에 封해졌다. 高宗의 여덟째 아들 李旦이 22歲의 나이로 그 뒤를 이어 皇帝가 되었으니, 이이가 睿宗 (在位 684∼690, 710∼712)이다. 睿宗 亦是 幽廢와 다름없는 生活을 했을 뿐, 政治에는 關與하지 못했다.
皇帝의 자리를 놓고 벌어졌던 則天武后와 그의 男便 高宗,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의 熾熱한 싸움은 마침내 則天武后의 勝利로 막을 내렸고, 690年, 67歲의 則天武后는 皇帝의 자리에 올랐다. 則天武后는 나라 이름을 周로 고치고, 東都 洛陽을 神都라 일컫고 主로 그곳에서 政務를 보았다. 그리고 自身을 神聖皇帝라 稱하고, 睿宗을 皇嗣로 定하고 姓을 武氏로 고쳤다. 則天武后는 690年부터 705年까지 15年 동안 皇帝의 자리를 지켰는데, 事實上 權力을 掌握한 期間은 皇后가 된 655年부터 치자면 무려 50年이 되었다.
則天武后는 男便 高宗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唐 王朝의 皇族들을 누르고 周나라를 세우고 李氏의 唐 王朝를 武氏의 天下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武氏 姓을 가진 조카들을 宰相과 將軍으로 起用하고 功이 있는 者들에게 武氏 姓을 下賜하는 等, 武氏 勢力을 擴大하여 周邊을 튼튼히 만들어 놓은 다음, 親庭 조카인 武承嗣를 帝位 繼承者로 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則天武后의 이 같은 생각에 同意하지 않는 狄仁傑 等 元老 宰相들은 武后에게 다음과 같이 進言했다. “조카와 아들, 어느 쪽이 陛下에게 더 孝道를 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陛下께서 親히 낳으신 아들을 皇太子로 세우신다면 千年萬年 子子孫孫 이어 가며 祭祀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카가 伯母의 祭祀를 지낸다는 말을 臣 等은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陛下께서 萬若 조카를 皇太子로 세운다면 先帝(高宗)의 陵墓도 荒廢해질 것입니다.” 則天武后는 宰相들의 이런 말이 마음에 걸려 좀처럼 조카 武承嗣를 皇太子로 세울 決心이 서지 않았다.
74勢의 高齡인 則天武后는 이 問題로 苦心하느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則天武后는 꿈에 두 날개가 잘린 鸚鵡새 한 마리를 보았다. 그리고 宰相 狄仁傑에게 그 꿈이 무슨 徵兆인지를 물었다. 狄仁傑은 좋은 機會라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進言했다. “鸚鵡의 鵡 字는 武 字와 同一합니다. 따라서 鸚鵡는 陛下를 가리키는 것이고, 두 날개는 두 분의 殿下라고 생각됩니다. 萬若 陛下께서 두 분의 殿下를 起用하신다면 두 날개가 힘차게 펼쳐질 것입니다.” 則天武后는 武承嗣를 皇太子로 세울 생각을 斷念하고, 自身이 낳은 셋째 아들 廬陵王에 李顯(中宗)을 다시 皇太子로 冊封했다. 皇嗣인 넷째 아들 李旦(睿宗)도 兄 李顯을 皇太子로 세우는 데 同議했다. 則天武后가 조카를 皇太子로 세울 생각을 斷念한 主된 理由는 조카들이 皇帝가 될 그릇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番 廢出되었던 李顯을 皇太子로 세운 主된 理由는 皇嗣인 李旦은 오랜 期間 中央에 있으면서 나름대로 그를 支持하는 組織을 形成했지만, 李顯은 中央 舞臺를 떠난 지 오래되어 中央에 組織이 없었기 때문이다.
705年, 무려 半世紀에 걸쳐 君臨했던 女傑 則天武后도 나이가 들어 病床에 눕게 되자 더 以上 힘을 쓸 수 없었다. 狄仁傑의 推薦으로 則天武后에게 拔擢되어 宰相이 된 當時 80歲의 高齡 張柬之가 親衛軍 司令官과 公募하여 親衛軍 500名을 動員하여 內亂을 鎭壓한다는 名分으로 宮中에 進入했다. 이 事件을 神龍政變이라고 하는데, 當時 則天武后의 男寵으로서 權力을 휘두르고 李顯의 皇位 繼承에 威脅이 되었던 張昌宗, 張易之 兄弟를 除去하는 것이 이 政變의 主要 目的이었다. 張氏 兄弟를 除去함으로써 所期의 目的을 達成한 張柬之 等은 臥病 中인 則天武后를 脅迫하여 帝位를 皇太子에게 讓位하게 하고, 그 女를 上陽宮으로 옮겼다.
則天武后는 順順히 그의 말에 따랐을 뿐만 아니라, 自身이 세웠던 周 王朝를 廢하고 唐 王朝를 回復시킬 것을 指示했고, 自身은 皇帝가 아닌 高宗의 皇后로 남겠다는 것을 闡明했다. 말하자면 自己가 흐트린 모든 局面을 元狀復歸시킨 것이다. 아마 曖昧한 簒奪者의 汚名을 뒤집어쓰느니 차라리 男便의 皇后이자 아들의 母后로 남는 것이 自身의 무덤에 永遠히 香火가 끊기지 않게 하는 最善의 方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해 겨울, 則天武后는 82歲를 一期로 世上을 떠났다. 나라에서는 그女의 所望에 따라 ‘則天大聖皇后’라는 諡號를 내렸다. 같은 해, 中宗 李顯이 다시 皇帝의 자리에 올라 則天武后가 세웠던 周의 國號를 廢하고, 唐의 國號를 回復시켰다.
中宗은 아버지 高宗이 죽자 帝位에 올랐지만, 中宗의 夫人 韋皇后가 親庭아버지를 要職에 起用하려다가 則天武后의 怒여움을 산 까닭으로 親政에 臨한 지 36日 만에 쫓겨나 廬陵王으로 左遷되어 房州 (湖北省 竹山縣) 等地에 있다가 3年 만에 洛陽으로 돌아와 皇太子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8年 後에 다시 皇帝의 자리에 올랐다. 勿論 그의 夫人 韋氏도 皇后로 復位되었다. 中宗은 房州에 있을 때, 언젠가는 則天武后의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두려운 나머지 여러 차례 自殺을 企圖했다. 그때마다 夫人 韋氏가 그를 慰勞하고 勇氣를 북돋아 주며 생각을 바꾸게 해 주었다. 中宗은 韋氏를 끔찍이 사랑하여 그女에게 다음과 같이 約束을 했다. “내가 後에 多幸히 幽廢 生活에서 解放되어 하늘을 우러러보게 된다면 그대가 하고자 하는 일을 絶對 妨害하지 않으리다.” 中宗이 復位하자 韋皇后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政事에 關與하기 始作했다. 則天武后가 高宗을 代身하여 政務를 보았던 것과 똑같은 行態였다.
中宗의 딸 安樂公主는 則天武后의 一族인 武三思의 아들과 結婚했는데, 武三思는 安樂公主의 媤아버지라는 地位를 利用하여 자주 宮中에 出入하다가 韋皇后와 不倫 關係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中宗은 이를 全혀 눈치채지 못하고 武三思를 信任하여 政治 問題까지 議論하였다. 韋皇后는 自身의 執權에 妨害가 되는 人物을 除去하기 爲해 武三思와 共謀하고 中宗에게 張柬之 等을 讒訴했다. 中宗은 讒訴를 믿고 張柬之 等 元老大臣들에게 各各 王號를 주어 政治에서 손을 떼게 하고, 얼마 後 地方으로 左遷시켰다가 모두 죽여 버렸다. 그런데 燕欽融이라는 사람이 韋皇后의 淫行을 中宗에게 알렸다가 韋皇后의 一黨에게 죽임을 當한 일이 생긴 後부터 中宗은 韋皇后를 疑心하기 始作했다. 韋皇后와 그女의 寵愛를 받고 있는 一黨들은 일이 發覺될까 戰戰兢兢하다가 마침내 中宗 弑害 陰謀를 꾸몄다.
韋皇后는 第2의 則天武后를 꿈꾸고 있었다. 則天武后는 皇后에서 皇太后가 되고 다시 女皇帝가 되었는데, 只今 自身도 그렇게 될 수 있는 狀況이 展開되고 있는 것이다. 韋皇后의 머릿속에는 男便 中宗을 죽인 다음 皇太后가 되고, 그다음엔 女皇帝가 된다는 靑寫眞이 그려지고 있었다. 韋皇后의 一黨은 710年 6月 고기饅頭 속에 毒을 넣어 中宗을 弑害한 後, 中宗의 遺詔를 憑恣하여 넷째 아들 溫王 李重茂를 皇帝로 세웠다. 그리고 韋皇后 自身은 皇太后가 되어 攝政을 始作했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놀라운 것은 中宗 弑害 事件에 그의 親딸 安樂公主도 加擔했다는 事實이다. 安樂公主도 그 나름대로 計算이 있었다. 바로 어머니 韋皇后가 皇帝가 되면 自身은 後繼者인 皇太女가 되어 第3의 則天武后가 되겠다는 것이 그女의 腹案이었던 것이다.
韋皇后와 그 一黨들은 韋氏의 王朝를 세울 境遇 가장 妨害가 되는 人物로 睿宗 李旦과 則天武后의 막내딸 太平公主를 指目했다. 太平公主는 性格이 沈着하면서도 敏捷하고 權謀와 智略이 뛰어난 女子로, 則天武后가 살아 있을 때 恒常 自己를 닮았다고 稱讚한 人物이었다. 그리하여 韋皇后 一黨은 이들을 除去하기 爲해 차근차근 準備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韋皇后 一黨과 平素 가까이 지내던 兵部侍郞 (國防 次官) 崔日用이 이런 움직임을 李隆基에게 傳했다.
當時 25歲의 李隆基는 睿宗의 셋째 아들로, 일찍부터 韋氏 一族의 專橫에 憤怒를 느끼고 있었으며, 韋氏 一族의 打倒를 爲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事態가 急迫해지자 李隆基는 擧事를 서둘렀다. 李隆基의 命을 받은 쿠데타軍의 中心人物 葛福順이 先頭에 서서 親衛軍 軍營에 突入하여 韋氏 一族 將軍들의 목을 베었다. 急報를 傳해 들은 韋皇后는 飛騎宮으로 逃亡했으나, 그곳 兵士들에게 목이 잘리고 말았다. 安樂公主는 이런 事實도 모르고 鏡臺 앞에 느긋하게 앉아 눈썹을 그리다가 斬首되었다. 韋氏 一族이 滅亡當하자 갓 卽位한 李重茂는 睿宗 李旦에게 皇位를 내주었다. 李重茂는 歷代 皇帝의 名單에 包含되어 있지 않다. 쿠데타를 成功시킨 李隆基는 平王에 封해졌다가 이어 皇太子로 冊立되었다.
睿宗이 復位하는 데는 누이 太平公主의 힘이 컸는데, 그女는 元來 權謀와 智略이 뛰어난 데다가, 이番 쿠데타에 그의 아들을 參與시키는 等 功勞가 많아 自然 權力의 相當한 持分을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점잖은 人物이었지만 別로 有能하지는 못한 睿宗 밑에 太平公主와 皇太子 李隆基라는 두 實勢가 存在함으로써 宮廷의 勢力은 漸次 두 派로 갈려 熾熱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睿宗은 苦心하던 끝에 皇太子에게 讓位하여 두 派의 싸움을 終熄시키려고 했다. 712年, 28歲의 皇太子 李隆基가 卽位하였는데, 이이가 바로 唐나라 時代의 黃金期를 이룬 玄宗 (在位 712∼756)이다. 睿宗은 上皇이 되어 뒷전으로 물러났다.
玄宗이 卽位하여 表面上으로는 實權을 잡은 듯했으나, 事實은 그렇지가 않았다. 國政을 左右하는 重臣 7名 中에 5名이 太平公主派의 人物이었다. 太平公主는 이런 人脈을 背景으로 한 데다, 上皇의 命令을 憑恣하여 重臣들의 任免權을 行使할 程度로 實權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繼續되면 玄宗은 허수아비로 轉落할 뿐만 아니라 帝位를 지키는 것마저 不安해질 것이 分明했다. 太平公主는 이런 有利한 狀況을 利用하여 玄宗 暗殺 陰謀를 꾸미기에 이르렀다. 玄宗과 그의 追從者들은 太平公主 打倒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開元 元年인 713年 7月, 玄宗은 太平公主派의 急襲하여 瞬息間에 一黨을 打倒했다. 太平公主는 어느 절로 逃亡했다가 3日 後에 돌아와 그 女의 집에서 죽임을 當했다. 太平公主가 죽음으로써 半世紀에 걸친 女人 天下가 무너지고, 政權은 完全히 玄宗의 손으로 넘어왔다.
玄宗의 治勢는 姚崇 · 宋璟 · 張說(장열) · 張九齡 等 名相의 도움을 얻어 이루어졌다. 안으로는 民生 安定을 꾀하고 漕運 改良과 屯田 開發 等으로 經濟를 充實히 하였으며, 府兵制의 崩壞에 對處하여 新兵制를 整備하였다. 밖으로는 東突厥·吐蕃·契丹 等의 國境 地帶 防備를 튼튼히 하여, 開元·天寶 時代 數十 年의 太平天下를 謳歌하였다. 그러나 老年에 접어들자 政治를 等寒히 하고, 35歲나 年下인 며느리 楊貴妃를 宮內로 끌어들인 뒤 政事를 抛棄하다시피 하고 權臣 李林甫에게 國政을 一任하였다. 瞬息間에 政治는 腐敗했으며 社會 制度가 무너져 混亂이 惹起되었다. 755年 安祿山의 亂이 일어나 國家는 混亂에 빠졌으며, 楊貴妃는 親衛軍들에게 殺害되었다. 玄宗은 이듬해 아들 肅宗에게 讓位하고 上皇이 되어 隱居하였으며, 長安으로 돌아온 뒤 죽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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