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ㅂ-5 비견접종~)
40. 비견접종(比肩接踵)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발꿈치가 서로 닿다. 사람들이 아주 많아서 붐비는 모양(貌樣)을 比喩
春秋時代 齊나라의 晏嬰은 세 名의 王(靈公 · 莊公 · 景公) 밑에서 宰相을 지냈으며, 平生 節儉과 力行의 삶을 살았다. 그는 宰相 이 된 뒤에도 밥床에는 고기飯饌을 올리지 않았고 아내에게는 緋緞옷을 입히지 않았으며, 朝廷에 들어가면 임금께서 묻는 말에만 對答할 程度로 스스로 品行을 操心하였다. 또한 達辯과 臨機應變으로도 有名했다. 그러나 外貌는 볼품없고 키는 아주 작았다. 어느 해, 그는 楚나라에 使臣으로 가게 되었다. 平素 晏嬰이 뛰어난 智謨의 所有者라는 所聞을 들은 楚의 靈王은 晏嬰을 試驗하기 爲해 大門 옆에 작은 門을 내어 晏嬰을 그리로 案內하도록 했다. 晏嬰은 들어가기를 拒否하면서 말했다. “개나라 使臣이나 개門으로 드나들게 해야지. 나는 楚나라의 使臣이니 이 門으로 들어갈 수 없다.
(使狗國者, 從狗門入. 今臣使楚, 不當從此門入.)” 靈王은 이 말을 듣고 城門을 열고 晏嬰을 맞이하게 했다.
「이튿날 晏嬰은 王宮으로 가 靈王을 謁見했다. 靈王이 입을 열었다.
“齊나라에는 사람이 없소? 그대 같은 사람을 使臣으로 보내다니.”
晏嬰이 對答했다.
“齊나라 都城 臨淄는 3萬 戶에, 길 가는 사람들이 서로 어깨를 부딪치고, 팔을 들어 올리면 해가 가려지고 땀을 흘리면 비가 내릴 程度로 많습니다. 어찌 사람이 없다 하십니까?”
“그런데 어째서 卿과 같은 사람을 使臣으로 보냈단 말이오?”
晏嬰이 對答했다.
“齊나라에서는 使臣을 보낼 때 相對國에 맞게 사람을 보냅니다. 賢明한 者는 賢明한 王에게 보내고, 無能한 者는 無能한 王에게 보냅니다. 저는 가장 無能하기 때문에 楚나라로 오게 된 것입니다.”
(見楚王. 王曰, 齊無人耶, 使子爲使. 晏子對曰, 齊之臨淄三百閭, 張袂成陰, 揮汗成雨, 比肩繼踵而在. 何爲無人. 王曰, 然則何爲使子. 晏子對曰, 齊命使, 各有所主. 其賢者使使賢王, 不肖者使使不肖王. 嬰最不肖, 故直使楚矣.)」
이 이야기는 《晏子春秋》에 나온다. ‘比肩接踵’은 ‘比肩繼踵’이라고도 한다.
比肩과 接踵을 따로 使用할 境遇, ‘比肩’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能力이 비슷한 것을 比喩하는 말이고, ‘接踵’은 발꿈치가 맞닿을 程度로 사람들이 잇달아 到着하는 것을 比喩하는 말이 된다.
41. 비방지목(誹謗之木) 诽谤之木 =요고순목(堯鼓舜木)
誹謗하는 나무. 百姓이 王에게 苦痛을 呼訴하고 所願을 告하는 나무 기둥. 훌륭한 政治의 標本이 되는 物件이나 事件을 比喩
* 堯鼓舜木(요고순목)은 요임금과 순임금이 각각 ‘북(鼓)’과 ‘나무(木)’를 세워 백성이 간언·경계할 수 있게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다른 사람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는 태도를 뜻한다.
「漢나라 孝文帝가 말했다. “옛날에 天下를 다스리는 方法에는 進善之旌, 敢諫之鼓, 誹謗之木이 있었다. 只今 法에 誹謗妖言의 罪가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漢孝文皇帝曰, 古之治天下, 朝有進善之旌, 敢諫之鼓, 誹謗之木. 今法有誹謗妖言之罪, 謬矣.)”」
이 말은 《史記 孝文本紀》에 나온다. ‘進善之旌’은 그 아래에서 政治에 對해 좋은 意見을 自由롭게 發言하도록 세운 깃발이고, ‘敢諫之鼓’는 잘못된 政治가 있으면 地位 高下를 莫論하고 두드리도록 宮闕 門 앞에 設置한 북이며, ‘誹謗之木’은 自身의 그릇된 政治를 指摘받기 爲해 宮闕 다릿木에 세운 나무로, 모두 堯임금이 設置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淮南子 主術訓》에 依하면 ‘誹謗之木’은 舜임금이, ‘敢諫之鼓’는 堯임금이 세웠다고도 한다.
42. 비육지탄(髀肉之嘆)
成功할 機會를 잃고 虛送歲月함의 嘆息
後漢時代의 建安 元年, 曹操는 憲帝가 都邑을 옮겨 洛陽에서 許昌으로 떠나도록 일을 꾸민 다음 이를 맞이하여 自稱 大將軍이 되고 朝廷의 實權을 掌握하였다. 當時 劉備도 한창 人品과 勇猛을 떨쳐 注目을 받았으나 曹操의 奸計로 呂布와 袁術의 合同攻擊을 받고 힘에 밀려 曹操에게 依託하는 身世가 되었다.
스스로 漢나라의 王室의 後裔라 自處하고 언제든지 漢의 復興을 꿈꾸든 그는 함께 있던 將帥 董承과 結託하여 隱密히 曹操를 除去할 計劃을 세웠으나 綻露가 나면서 危機一髮 地境에서 艱辛히 脫出하였다(三國志에)
劉備는 冀州로, 汝南으로 轉轉하다가 無數한 戰鬪를 겪는 사이 六年이 덧없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에 曹操와 어깨를 겨룰만큼 큰 勢力으로 떠오른 이는 江東地方의 有利한 地理的 條件을 차지한 孫權 뿐이었다.
劉備는 다시 曹操에게 쫓겨 荊州의 劉表에게로 갔다. 十如年 歲月은 非運의 連續이었다.
그 사이 曹操는 袁術, 袁紹, 呂布 等의 軍士를 무찌르고 河北一帶를 制壓했다.
이에 對抗할 만한 勢力이라면 孫堅의 뒤를 이은 吳나라의 孫權 程度였지 劉備가 身世를 지고 있는 劉表도 僅僅히 自己地盤이나 維持하고 있어 天下를 넘보기엔 不足한 材木이었다.
그런 人物 밑에서 客將이라는 形式으로 新野의 조그마한 城 한 채를 맡았을 따름이니 초라한 處地가 되었고 나이도 五十을 바라보고 있었다.
關羽, 張飛 等의 豪傑들이 있었으나 그들 亦是 確固한 地盤이 없었다.
"언제 말 위에 올라 앉아 天下를 號令하고 漢室의 再建復興을 이룩할 건가?" 그는 늘 이런 생각에 汨沒하며 한숨을 쉬었다.
어느날 劉表와 같이 앉았다가 안쪽 복숭아뼈에 살이 쪄 있는 것을 보고선
"이게 무슨 꼴인냐? 天下를 號令할 내가" 라며 중얼거리다 물러나 술상을 마주하며 눈물을 흘렸다. 七尺五寸의 巨軀 大丈夫의 눈물을 본 劉表가 異常히 여겨 묻자
"一生을 말을 타고 戰場을 누비다보니 복숭아뼈 안쪽에 살이 찐일이 없었는데 只今보니 비지살이 찌었기에 歲月의 無雙함에 暫時 肅然해서 였습니다" 髀肉之嘆이다.
몇 해가 그렇게 흘러 劉表도 떠나고 그의 아들 종은 怨讐인 曹操에게 降伏하고 말았다.
43. 비장수기(飛將數奇) 飞将数奇
비장군(飛將軍)은 運數가 사납다. 才能이 있지만 不運한 사람을 比喩하는 말이다.
飛將은 漢나라 때의 將軍 李廣이며, 數奇는 運數가 사납다는 말이다. 옛날 中國에서는 偶數 (짝數)를 吉하다 여기고 奇數 (홀數)를 不吉하다 여겼다.
李廣은 漢나라 文帝, 景帝, 武帝 時代의 將軍이다. 當時 漢나라는 줄곧 匈奴와 戰爭을 치르고 있는 狀況이었다. 李廣은 70如 차례나 匈奴와 싸웠으나 特別히 功을 세우지는 못했고, 높은 벼슬도 받지 못했으며, 한 番은 적은 兵力을 이끌고 匈奴族의 大軍과 싸우다가 捕虜가 되기도 하였다. 李廣은 敵의 監視가 疎忽한 틈을 타서 逃亡쳐 돌아왔으나, 軍法에 따라 死刑을 當할 危機에 處하여 贖錢을 물고 목숨을 건졌다.
李廣은 60歲가 넘었을 때, 大將軍과 驃騎大將軍이 大大的으로 匈奴 攻擊에 나서자 自己도 싸움에 나가고 싶다고 여러 番 請했다. 天子는 그가 늙었다고 許諾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야 許諾하고 前將軍으로 삼았다. 李廣은 大將軍 衛靑을 따라 匈奴를 攻擊했다. 要塞를 나왔을 때 衛靑은 敵兵을 잡아 單于가 있는 곳을 알아내어 스스로 精兵을 이끌고 그곳으로 가면서, 李廣에게는 右將軍의 軍隊와 合流하여 東쪽 길로 나가도록 했다. 李廣이 抗議했으나 大將軍 衛靑은 들어주지 않았다.
衛靑은 天子로부터 警戒하라는 命을 받아 ‘李廣은 늙고 運數가 좋지 않은 사람이다. 單于와 對敵하게 해서는 안 된다. 對敵한다고 해도 바라던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大將軍靑亦陰受上誡, 以爲李廣老, 數奇, 毋令當單于, 恐不得所欲.) 李廣의 部隊는 途中에 길을 잃어 指定된 期限에 到着하지 못하였다. 이 일로 問責을 當하게 되자 李廣은 部下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칼로 自決하였다. “나는 젊은 時節부터 匈奴와 七十如 차례 크고 작은 싸움을 했다. 이제 多幸히도 大將軍을 따라 出戰하여 單于의 軍士와 맞서 싸우려고 했는데 大將軍이 내 部署를 옮겨 길을 멀리 돌아가게 하였고, 더욱이 길을 잃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天命이 아니겠는가? 내 나이 예순이 넘었는데 只今에 와서 刀筆吏의 審問에 對答할 수는 없다.”
(廣謂其麾下曰, 廣結髮與匈奴大小七十餘戰. 今幸從大將軍出接單于兵, 而大將軍又徙廣部行回遠, 而又迷失道, 豈非天哉. 且廣年六十餘矣. 終不能複對刀筆之吏.)
文帝는 일찍이 李廣을 보고 “哀惜하구나. 그대는 때를 만나지 못했구나. 萬一 그대가 高帝 時代에 태어났더라면 萬戶侯가 어찌 足했겠는가!”라며 그의 勇盟을 높이 評價했으며, 士卒들은 李廣의 指揮에 따르기를 즐겼고, 匈奴는 그를 ‘飛將軍’이라 稱하며 두려워했다. 李廣의 四寸同生인 李蔡는 李廣과 같이 末端 官吏로 出發하였고 그 名聲이 李廣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으나 나중에 三公의 地位까지 올랐다.
이 이야기는 《史記 李將軍列傳》에 나오는데, 李廣은 늙고 運數가 사나운 사람이라는 말에서 ‘飛將數奇’가 由來하여, 才能이 있지만 不運한 사람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44. 빈계지신(牝鷄之晨) 牝鸡之晨
암탉이 울어 새벽을 알리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亡한다는 것을 比喩
殷나라의 紂王이 妲己와의 歡樂에 빠져 奢侈와 浪費를 일삼고 暴政을 저지르자 百姓들의 怨望이 하늘을 찔렀다. 周나라 武王은 塗炭에 빠진 殷나라의 百姓들을 救한다는 名分을 가지고 紂王을 討伐할 決心을 했다. 武王은 兵士를 이끌고 殷나라의 牧野까지 進出하여 다음과 같이 紂王의 罪를 밝혀 말했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암탉은 새벽을 알리지 않으며,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亡한다고 했다. 只今 商나라의 王은 오직 婦女子의 말만 옳다고 여겨 따르고 있다. 祖上의 祭祀도 廢하여 (祖上에게) 報答하지 않고, 先王이 남기신 同生들을 버려 登用하지 않고 있다.
(古人有言曰, 牝鷄無晨, 牝鷄之晨, 惟家之索. 今商王受惟婦言是用. 昏棄闕肆祀, 弗答, 昏棄闕遺王父母弟, 不迪.)”」
이 이야기는 《書經 · 周書 목서(牧誓)》에 나오는데, 여기서 암탉과 婦女子는 바로 妲己를 가리킨다. 이 이야기에서 ‘牝鷄之晨’과 ‘婦言是用’의 두 가지 成語가 나왔다.
45. 빈자일등(貧者一燈) 贫者一灯
가난한 사람의 燈 하나. 가난한 사람이 바치는 燈 하나라는 뜻으로, 物質의 많고 적음보다 精誠이 重要함을 比喩
코살라國(kosala國은 印度 갠지스江 中部 流域 古代 王國)의 舍衛에 難陀라는 가난한 女人이 살고 있었는데, 求乞로 겨우 목숨을 이어 갈 程度로 가난했다. 어느 날 釋迦牟尼가 舍衛城에 온다는 消息이 傳해지자 파세나디王과 모든 百姓은 燈불 供養을 올리기 爲해 奔走히 움직였다. 難陀는 비록 가난하였지만 이 世上에서 가장 尊貴한 분을 爲해 燈불 供養을 올리기 爲해 거리에서 終日 求乞해 얻은 돈 두 닢을 들고 기름집으로 달려갔다. 기름집 主人은 女人의 갸륵한 마음에 感動하여 기름을 갑절이나 주었다. 難陀는 기쁨에 넘쳐 燈 하나에 불을 밝혀 釋迦牟尼께 바쳤다. 밤이 깊어 가고, 세찬 바람이 불어 다른 燈불은 다 꺼졌으나 難陀의 등불만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燈불이 다 꺼지기 前에는 석가모니(釋伽牟尼)가 잠을 자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侍者 아난이 袈娑 자락으로 燈을 끄려 하였으나 燈은 꺼지지 않았다. 이때 釋迦牟尼가 아난에게 말했다. “아난아, 부질없이 애쓰지 말아라. 그것은 가난하지만 마음 착한 한 女人의 넓고 큰 誓願과 精誠으로 켠 등불이니 결코 꺼지지 않으리라. 그 燈불의 功德으로 이 女人은 앞으로 30劫 뒤에 반드시 成佛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須彌燈光如來’라 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賢愚經 貧女難陀品》에 나오는데, 가난한 女人이 燈 하나를 釋迦牟尼에게 바친 데서 ‘貧者一燈’이 由來했다.
46. 빈축(嚬蹙)
눈살을 찌푸리고 얼굴을 찡그림. 빈(嚬)이나 축(蹙)은 둘다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지만 빈(嚬)은 兩眉間을, 축(蹙)은 이마를 찡그림이다. 볼썽 사납다는 말이다.
齊나라 名門貴族에 陳仲子는 母親을 모시고 高官에 爵祿이 萬金이나 되는 兄님 戴의 집에 살았다.
家門의 榮華로 好衣好食함이 分數에 넘친다며 스스로 自給自足하며 살아가겠다고 於陵으로 潛跡하였다.
於陵에서 사흘을 굶자 귀가 잘 들리지 않고 눈도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우물가에 벌레가 파먹고 남은 오얏을 더듬거려 찾아 먹고 多少 氣力을 찾았다.
乞人처럼 떠돌다 歸家하니 어떤 사람이 거위 한 마리를 兄 戴에게 膳物하였다.
이를 지켜본 그는 甚하게 嚬蹙을 했다.
며칠 뒤 어머니가 몸이 虛弱해 진 陳仲子를 爲해 잡아 먹였다. 別 생각없이 먹은 그가 兄이 膳物 받은 거위임을 알고 밖으로 나가 모두 吐해버렸다.
孟子에 나오는 말로 古今 區分없이 不正한 蓄財는 嚬蹙의 對象이 된다.
47.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 冰炭不相容
얼음과 숯<불>은 서로 容納할 수 없다. 서로 어긋나 맞지 않는 사이나 서로 和合할 수 없는 사이를 比喩
漢나라 武帝 때의 東方朔은 楚나라의 憂國 詩人 屈原을 追慕하여 七諫 七首를 지었는데, 그 中 慈悲에 다음과 같은 內容이 들어 있다.
氷炭不可以相幷兮 : 얼음과 숯이 서로 같이할 수 없음이여
吾固知乎命之不長 : 내 本디 목숨이 길지 못한 것을 알았노라.
哀獨苦死之無樂兮 : 홀로 苦生하다 죽어 樂이 없음이여
惜子年之未央 : 그대 年數를 다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노라.
屈原은 楚나라의 王族으로 태어나 楚나라 懷王 때에 左徒(輔佐官)에 任命되어 內政과 外交에서 活躍하였으며, 三閭大夫 (昭 · 屈 · 景의 세 貴族 집안을 다스리던 벼슬)에 올랐으나, 法令 立案 때 근상(靳尙) 等 政敵들의 中傷謀略으로 王의 곁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屈原은 齊나라와 同盟하여 秦나라에 對抗해야 한다는 合縱策을 主張했으나, 懷王은 連橫策을 받아들여 齊나라와 斷交하고 晉나라와 和親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晉나라에 欺瞞을 當했으며, 兩國의 强化를 爲해 自進하여 楚나라의 人質이 된 張儀마저 釋放하였다. 그 後 晉나라의 昭王이 懷王에게 晉나라 訪問을 要請했다. 屈原은 이를 反對했지만 懷王은 막내아들 子蘭의 勸誘에 따라 晉나라를 訪問했다가 抑留當해 結局 돌아오지 못하고 客死하고 말았다. 큰아들 橫이 그 뒤를 이었고(頃襄王), 막내아들 子蘭은 令尹 (宰相)으로 任命되었다. 屈原은 子蘭이 아버지를 客死하게 한 張本人이라고 非難하다가 또다시 謀陷을 받아 長江 以南의 沼澤池로 追放되었다. 屈原은 멱라(汨羅)에 몸을 던져 죽었다. ‘氷炭不相容’은 이처럼 屈原의 剛直한 忠誠과 奸臣들의 阿諂이 서로 容納될 수 없음을 比喩하여 쓴 말이다.
48. 빙탄불용(氷炭不容)
흔히 도저희 어울릴 수 없는 사이를 두고 '물과 기름'의 關係에 比喩하곤 한다.
'氷炭不(相)容' 또한 같은 뜻으로, 얼음은 불에 녹고, 불은 얼음에 꺼짐에 比喩
漢 武帝 때 名臣 東方朔은 怪짜다.
博學多識하고 才致와 諧謔, 辯舌은 靑山流水라 王의 寵愛를 받아 側近에서 補佐했다. 御前에서 飮食을 下賜 받으면 남은 飮食을 官服에 싸서 가다 보니 늘 더럽기 일쑤고, 緋緞을 下賜 받으면 술집에 잡히고 1年을 멀다 않고 美女를 갈아치우며 아내로 맞았다.
그를 사람들은 放蕩하고 放恣한 半狂人으로 여겼다.
그는 사람들은 世上을 避해 山으로 가지만 本人은 朝廷이 隱遁處라고 說破하는가 하면, 狡猾하고 阿諂하는 官吏를 멀리할 것을 隨時로 王에 諫하기도 했다.
괴짜 行動에 反해 不義에 妥協치 않는 剛直한 性品의 所有者였다.
忠節을 固執하다 끝내 罷職 後 流配로 生을 마친 屈原과 恰似하였다.
그가 쓴 '七諫' 慈悲篇에는 屈原을 欽慕하여 '氷炭不可以相竝'이라 表現한 데서 나왔다. 阿諂과 讒言하는 奸臣拜들과 共存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산과바다 이계도
'**한자성어(漢字成語)** > 고사성어(故事成語)'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사성어(故事成語) (ㅅ-2 아이비~ ) (0) | 2026.03.06 |
|---|---|
| 고사성어(故事成語) (ㅅ-1 사가망처~ ) (0) | 2026.03.06 |
| 고사성어(故事成語) (ㅂ-4 불변숙맥~) (0) | 2026.03.06 |
| 고사성어(故事成語) (ㅂ-3 백중지간~) (0) | 2026.03.06 |
| 고사성어(故事成語) (ㅂ-2 배반낭자~) (0) | 2026.03.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