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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음(秦中吟)之十 6. 입비(立碑) - 백거이(白居易)

by 산산바다 2021.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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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중음(秦中吟)之十 6. 입비(立碑) - 백거이(白居易)

          진의 수도 장안에서 읊는다.(비석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

 

 

백거이는 시경(詩經)300편의 필법을 본받아 시는 반드시 육예(六藝)에 부합되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이라 여겼다. 따라서 그의 풍유시는 완전히 풍아비흥(風雅比興)의 작품이다. <신악부서(新樂府序)>에는 그의 이러한 일면이 아주 잘 반영되어 있다.

 

"9252자를 50편으로 나누었다. 각 편에는 정해진 구수(句數)가 없고, 각 구에는 정해진 자수가 없으며, 내용에 중점을 두었지 문식(文飾)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 첫구에는 시의 제목을 나타내었으며, 마지막 장에서는 그 뜻을 명백히 말하였다. 이것이 바로 시경300편의 방법이다."

(凡九千二百五十二言, 斷爲五十篇. 篇無定句, 句無定字, 繫於意, 不繫於文. 首句標其目, 卒章顯其志, 詩三百之義也.)

 

백거이는 스스로 이러한 풍유시를 가장 높게 평가하였으며, <진중음><신악부>로 대표되는 172수의 풍유시를 통해서 당시의 혼란한 시대상을 철저하게 파헤쳤다. 당시에 그의 풍유시의 내용이 어떠했는가는 일일이 그의 작품을 살펴보지 않더라도 <여원구서(與元九書)>에서 말한 풍유시에 대한 각계의 반응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나의 <하우(賀雨)>시를 듣고 여러 사람들이 떠들어대며 옳지 않다고 말하였고, <곡공감(哭孔戡)>시를 듣고는 서로 쳐다보며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진중음>을 듣고 권세 있고 지위 높은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며 파랗게 질렸고, <등낙유원기족하(登樂遊園寄足下)>시를 듣고 집정자들은 팔뚝을 걷어부치고 격분하였으며, <숙자각촌(宿紫閣邨)>시를 듣고 군부의 요인들은 이를 갈았다. 대체로 이와 같으나 전부 다 열거할 수는 없다. 나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내가 명예를 구한다느니, 남의 단점만 욕한다느니, 남을 비방한다느니 하였고, 진실로 나에게 동조하는 사람은 우승유(牛僧孺)처럼 나에게 경계시켰다. 심지어 친척이나 처자까지도 내가 잘못이라고 하였으니, 나를 비난하지 않은 사람은 온세상에 두 세명에 불과하였다."

(凡聞僕賀雨詩, 衆口籍籍, 已謂非爲左右終言之, 凡聞僕哭孔戡詩, 衆面脈脈, 盡不悅矣, 聞秦中吟詩, 則權豪貴近者, 相目而變色矣, 聞登樂遊園寄足下詩, 則執政柄者, 扼腕矣, 聞宿紫閣邨詩, 則握軍要者, 切齒矣. 大率如次, 不可徧擧, 不相與者, 號爲沽譽, 號爲詆評, 號爲訕謗, 苟相與者, 則牛僧孺之戒焉, 乃至骨肉妻孥, 皆以我爲非也.)

 

그는 간관의 책임을 다하고 서민의 고통을 구제한다는 취지에서 풍유시를 창작하였지만, 그 결과는 과격한 내용에 반발한 구관료 계층에 의해 배척당하였으며, 이로써 그의 시의 내용은 끝내 현실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진중음> 10수는 <신악부> 50수와 더불어 백거이 풍유시의 대표작이다. 형식은 모두 5언고시로 되어 있고 글자수도 비교적 많은 편이며, 내용은 당시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상과 정치사회 문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진중음서(秦中吟序)>에서는

"정원, 원화 때에 내가 장안에서 보고 들은 것 중에 슬퍼할 만한 것이 있어 그 사실을 바로 노래하고 이름을 '진중음'이라 하였다.

(貞元元和之際, 予在長安聞見之間, 有足悲者, 因直歌其事, 命爲秦中吟.)"라고 하여

아주 간략하게 <진중음>의 저작 시기와 동기를 서술하고 있는데, 그 시기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백거이가 교서랑(校書郞)이 되기 전인 정원 10(29) 이전에는 풍유시를 쓰지 않았고, 또 원화 10(44) 강주로 좌천된 후에도 거의 풍유시를 쓰지 않았으므로 일단은 <진중음>은 정원 16~ 원화 10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백거이가 본격적으로 "문장은 시대를 위해서 지어야 하고 시가는 시사를 위해서 지어야 한다."는 시론에 입각하여 풍유시를 쓴 것은 그가 한림학사(翰林學士)로 발탁된 후의 일이었다.

따라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그가 한림학사로 발탁된 헌종 원화 2(36) 이후부터 원화 10(44)까지로 볼 수 있다. 또 그것의 저작 동기를 "장안에서 보고 들은 것 중에 슬픈 것이 있어"라고 한 것은 그가 장안에서 관직생활을 할 때 보았던 당시 정치와 사회 문제에 분개하여 이를 점차 개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장안은 옛날 진()나라의 수도이니 "진중음"은 바로 진의 수도 장안에서 읊는다는 뜻이다.

 

1. 의혼(議婚 : 혼인을 논하다)

2. 중부(重賦 : 과중한 세금)

3. 상택(傷宅 : 호화저택으로 인한 상심)

4. 상우(傷友 : 벗으로 인한 상심)

5. 불치사(不致仕 : 퇴직하지 않는 관리들)

6. 입비(立碑 : 비석 세우기)

7. 경비(輕肥 : 가벼운 가죽옷과 살찐 말)

8. 오현(五絃 : 오현금)

9. 가무(歌舞 : 노래와 춤)

10. 매화(買花 : 꽃을 사다)

 

 

            6. 입비(立碑) - 백거이(白居易)

             비석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

 

勳德旣下衰(훈덕기하쇠) : 공적과 덕행이 미미하면

文章亦陵夷(문장역릉이) : 그것을 기록한 글도 그것에 맞아야지.

但見山中石(단견산중석) : 산속에 있는 돌덩이로 보았던 것을

立作路旁碑(립작로방비) : 길가에 비석으로 세운단다.

銘勳悉太公(명훈실태공) : 새긴 공적은 모두가 태공처럼 높고

敍德皆仲尼(서덕개중니) : 적은 내용은 공자 같은 덕행이란다.

復以多爲貴(부이다위귀) : 또 글자가 많아야 좋다고 여기고

千言直萬貲(천언직만자) : 많은 돈을 들여서 일천자를 새긴단다.

爲文彼何人(위문피하인) : 비문을 지은 자는 누구일까

想見下筆時(상견하필시) : 생각해 보니, 비문을 지을 때

但欲愚者悅(단욕우자열) : 어리석은 자들의 기쁨만 생각해 지었단다.

不思賢者嗤(부사현자치) : 현자들의 비웃음은 생각지 못했으니

豈獨賢者嗤(기독현자치) : 어찌 현자들만 비웃으리오.

仍傳後代疑(잉전후대의) : 후대까지 전해지며 의심을 사리라

古石蒼苔字(고석창태자) : 오래된 돌에 푸른 이끼 낀 글자들이

安知是愧詞(안지시괴사) : 어찌 부끄러운 말뜻을 알겠는가.

我聞望江縣(아문망강현) : 내가 들으니, 망강현의 현령은

麴令撫惸嫠(국령무경리) : 외로운 백성들을 위로하였단다.

在官有仁政(재관유인정) : 관리로 있을 때에 어진 정치 베풀었으나

名不聞京師(명부문경사) : 그 명성이 서울에는 들리지 않았단다.

身歿欲歸葬(신몰욕귀장) : 죽은 후 고향에 장사지내려 했으나

百姓遮路岐(백성차로기) : 백성들이 그 길을 가로막았단다.

攀轅不得歸(반원부득귀) : 수레 끌채를 잡고 가지 못하게 만류하니

留葬此江湄(류장차강미) : 망강 강변에 그를 장사지냈단다.

至今道其名(지금도기명) : 지금도 그의 이름을 부르면

男女涕皆垂(남녀체개수) : 남자와 여자들 모두가 눈물 흘린다.

無人立碑碣(무인립비갈) : 비석을 세운 사람 아무도 없어도

唯有邑人知(유유읍인지) : 고을 사람들은 그의 공덕을 다 알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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