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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禪詩/禪師들의 禪詩

證道歌 증도가

by 산산바다 2015. 3. 18.

산과바다

 

 

 

 

證道歌 증도가

 

증도가(證道歌)는 영가(永嘉)스님이 지었습니다. 중국 당나라 때의 승려 영가(永嘉) 현각(玄覺: 665713)의 시편.

영가(永嘉)스님의 휘()는 현각(玄覺)이요, ()는 도명(道明)이며, 성은 대()씨이며, 절강성 온주부 영가현 사람이다. 어릴 때 출가하여 안으로는 삼장(三臟)을 두루 섭렵하고 밖으로는 외전에도 널리 통달하였다고 한다.

천태(天台)를 공부하였으며, 남종선의 시조인 6조 혜능(慧能)에게서 선요(禪要)를 듣고 하룻밤에 증오(證悟)를 얻은 저자가 그 대오의 심경에서 증도의 요지를 247814자의 고시체로 읊은 시이다.

 

찬술연대는 705년경으로 유려한 문체일 뿐 아니라 선의 진수를 기술한 것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널리 독송 ·해설되어 왔다. 진단성자대승결의경(震旦聖者大乘決疑經)이라는 이름으로 인도에 전해졌다고 하지만 명확하지 않다. 둔황[敦煌]에서 출토된 문헌에 증도가와 내용이 같은 선문비요결(禪門秘要訣)이 있다.

 

영가(永嘉)스님은 본래 천태종계통의 스님으로 천태지관을 많이 익혀서 그 묘를 얻고 항상 선관(禪觀)으로 수행하였다. 천태종 팔조인 좌계 현랑법사와는 동문이며, 나중에 도를 성취하고 난 뒤에도 서로 서신 왕래를 하였다고한다.

일찍이 온주의 개원사에 있으면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지내며 효순하기로 소문이 났으나, 누님까지 함께 지내니 두 사람을 보살피고 있다하여 온 사중과 동구에서 비방을 하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별세하여 상복을 입고서도 누님을 떠나보내지 못하니 사람들의 비방이 더욱 심했으나 영가스님은 전혀 그러한데 개의치 않았다.

 

영가(永嘉)스님이 천태종에 있으면서 선관을 닦고 선종과 비슷한 길을 밟았다. 어느 날 개원사 복도로 현책(玄策)이라는 선사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나이는 육십여 세였다. 이때 그의 누님이 발 밖으로 그 노숙을 보고 저 노스님을 방으로 청해서 대접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영가(永嘉)스님이 얼른 나가서 노스님을 청했더니, 노숙이 들어오지 않으려 하다가 스님의 간절한 청에 못이겨 방에 들어왔다. 그 노숙과 법에 대해 여러 가지로 토론해 보니 자신의 견처나 노스님의 견처가 같은 점도 있고 독특한 점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현책(玄策)스님은 영가(永嘉)스님에게 물었다.

"그대의 법사는 누구인가?"

"제가 방등경론을 배울 때는 각각 스승이 계셨으나, 뒤에 유마경에서 불심종을 깨치고는 아직 증명을 하실 분이 없습니다."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노스님은 영가(永嘉)스님의 기상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고 또 그 누님에게도 협기가 있음을 느끼고 다음과 같이 권하였다.

 

"부모와 형제에게 효순하는 일도 한가지 길이지만, 그대는 불법의 이치를 밝히기는 했으나 스승의 인가를 얻지 못하고 있다. 과거의 부처님들도 성인과 성인이 서로 전하시고 부처와 부처가 서로 인가하였다. 석가여래께서도 연등불의 수기를 받으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연외도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남방에 큰 스승으로 육조 혜능선사가 계신다. 그곳으로 가서 발아래 예배하고 스승으로 섬기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자 영가(永嘉)스님은

"다른 분을 증명법사로 모실 것이 아니라 스님께서 법이 수승하신 듯 하니 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시면 좋겠습니다. 저를 위해서 허락해 주십시오."

 

하자 현책스님이

"나로서는 그대의 증명법사가 되기는 곤란하다. 지금 조계에는 육조대사가 계셔서 사방에서 학자가 운집하여 법을 받는 터이니 만약 그대가 가겠다면 함께 가리라."

 

그러나 영가스님은 누님 홀로 남겨두고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누님은 "나는 다른데 의지해서 지낼 수 있으니 나를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시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현책스님과 함께 떠났는데, 그때 영가스님의 나이는 31세였다.

 

그럭저럭 시흥현 조계산에 이르니 때마침 육조대사께서 상당법문을 하고 있었다. 이에 영가스님은 절도 하지 않고 선상을 세 번 돌고 나서 육환장을 짚고 앞에서 우뚝 서있자 육조대사께서 물었다. 

"대저 사문은 삼천위의와 팔만세행을 갖추어서 행동이 어긋남이 없어야 하거늘, 대덕은 어디서 왔기에 도도하게 아만을 부리는가?"

그러자 영가스님이

"나고 죽는 일이 크고 무상이 신속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육조스님이

"어찌하여 남()이 없음을 체험해 얻어서 빠름이 없는 도리를 요달하지 못하는가?"

라고 즉시 반문하는 말에 영가스님은 그만 크게 깨닫고 말았다.

그리하여 즉석에서 "본체는 곧 남이 없고 본래 빠름이 없음을 요달하였습니다." 라고 말을 던졌다.

 

그러자 육조스님이

"네 말과 같다, 네 말과 같다."하고 인가하니, 천 여 명의 대중이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때서야 영가스님이 비로소 동랑(東廊)으로 가서 육환장을 걸어 놓고 위의를 갖추어 육조스님께 정중히 예배하였다. 위의를 갖춘다는 것은 큰 가사를 입고 향을 피우고 스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영가스님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나서 바로 하직 인사를 드리자 육조스님이

"왜 이리 빨리 돌아가려고 하느냐?"

"본래 스스로 움직이지 않거니 어찌 빠름이 있겠습니까?"

"누가 움직이지 않는 줄 아느냐?"

"스님께서 스스로 분별을 내십니다."

"네가 참으로 남이 없(無生)는 도리를 알았구나?"

"남이 없음(無生)에 어찌 뜻(도리)이 있겠습니까?"

"뜻이 없다면 누가 분별하느냐?"

"분별하는 것도 뜻이 아닙니다."

 

 

* 깨달음 후 분별을 하는 것은 심의식(心意識)의 사량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眞如)를 사용하는 것이라는 영가스님의 답변이다.

그러자 육조스님께서 선상에서 내려오셔서 영가스님의 등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였다.

"장하다. 옳은 말이다 손에 방패와 창을 들었구나. 하룻밤만 쉬어가거라."

그리하여 그때 사람들이 영가스님이 조계산에서 하룻밤만 자고 갔다하여 일숙각(一宿覺)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튿날 육조스님께 하직을 고하니 육조스님은 몸소 대중을 거느리시고 영가스님을 전송 하셨는데, 영가스님이 열 걸음쯤 걸어가다가 석장을 세번 내려치고 말했다.

"조계를 한 차례 만난 뒤로는 나고 죽음과 상관이 없음을 분명히 알았노라!"

 

선사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그의 소문은 먼저 퍼져서 모두들 그를 부사의(不思議)한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영가스님은 선천 (서기 713)十七일에 세수 39세에 입적하니 시호는 무상대사, 탑호는 정광(政光)이라 하였다. 그 해에 스승 육조스님께서도 돌아가시니 세수 76세였다.

영가 스님의 누나는 영가스님의 가(), (), (), ()을 모아서 증도가(證道歌)를 편찬하였다.

 

 

증도가(證道歌)에 살펴본 영가스님의 깨달음과 관련된 게송(偈頌)이다.

遊江海涉山川 尋師訪道爲參禪 自從認得曹溪路 了知生死不相干

강과 바다를 지나고 산을 건너서

스승을 찾아 도를 물음은 참선 때문이라

스스로 조계의 길을 인식하고부터는

생사와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頓覺了知如來禪 六度萬行體中圓 夢裏明明有六趣 覺後空空無大千

여래선을 단박에 깨치니

육도만행이 본체 속에 원만함이라.

꿈속에는 육취(六趣)가 분명하였는데

깨달음 후에는 비고 비어서 대천세계가 없도다.

 

* 육도만행(육도만행) : 6가지 수행

* 육취(六趣) : 윤회하는 6세계

 

 

<증도가(證道歌)>라 하였는데 증()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를 살펴봅시다.

()이란 구경(究竟)을 바로 체득함을 말합니다.

깨달음[]에도 증오(證悟)와 해오(解悟)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해오(解悟)란 견해(見解), 지해(知解)를 말하는 것으로, 알기는 분명히 알지만 실제 마음으로 체득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얼음이 본래 물인 줄은 알았지만 아직 녹지 않고 얼음 그대로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얼음을 녹여 물로 쓰고 있지는 못하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인 줄은 분명히 알았지만 번뇌망상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서 중생 그대로인 것, 그것을 해오(解悟)라고 말합니다.

증오(證悟)란 얼음을 완전히 녹여서 물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 자체도 볼 수 없는 경계, 따라서 중생의 번뇌 망상이 다 끊어져서 제팔 아뢰야 근본무명까지 끊어진 구경각을 말하니 곧 실지로 성불한 것, 견성한 것을 증오(證悟)라 하고 간단히 줄여서 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가(敎家)에서든지 선가(禪家)에서든지 증()이라 하면 근본적으로 체달한 구경각(究竟覺)을 말하는 것이지 그 중간에서 뭘 좀 아는 걸 가지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통된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이 노래에 증()자를 붙였냐 하면, 선종에서 깨쳤다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증오(證悟)를 근본적으로 삼았지 해오(解悟)로서는 근본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가에서 깨쳤다고 하는 것,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한다는 것은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란 무엇인가?

莫道無心云是道하라

無心猶隔一重關이니라

무심이 도라고 일컬어 말하지 말라.

무심도 오히려 한 겹 두터운 관문이 막혀 있느니라.

 

外息諸緣하고 內心無喘
心如墻壁하사와 可以入道니라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이 곧 도()이며 도()가 곧 증()이라 하는 것입니다.

 

 

 

 

 

 

證道歌 증도가

1. 君不見

군불견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대'라는 것이 자성을 가리킨다고 보아 '자성을 깨치지 못했느냐'고 보는 것이며, 또 하나는 바로 뒤에 나오는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을 보지 못하였느냐'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를 자성이라 하여도 자성이 바로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이므로 별 관계가 없습니다.

 

 

2.  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절학무위한도인 부제망상불구진이라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으니

 

배움이 끊어졌다 함은 계(),(),() 삼학의 수행을 다 마쳐 다시 더 배울 것이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배울 것이 있고 공부할 것이 있다면 이것은 '배움이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든 배울 것이 더 떨어져서 다시는 더 배울 것이 없는 이것이 구경각인 것입니다. 그래서 [증도가]의 증()이란 구경각(究竟覺)을 말하며 구경적으로 자성(自性)을 깨쳐서 실지로 자성을 체달한 것을 말합니다. 

'하릴없다'함은 진여(眞如)를 말하니 진여를 바로 깨친 것을 가리킵니다. 배울 것이 하나도 없고 하릴없게 되면 자연히 '한가한 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선종에서 깨쳤다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모든 것을 완전히 다 닦아서 더 닦을 것이 없고 더 나아갈 수 없어 '배움이 끊어져 버려서 아무런 할 일이 없는 한가한 도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증도한 사람을 표현한 말로서 선종에서 '깨쳤다'고 하는 그 깨침()의 내용이 구경각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한가한 도인은 무엇을 하느냐?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흔히 이 구절을 잘못 보아서 '모든 망상이 없앨 것도 없고 참됨을 구할 것도 없다. 망상이 일어나도 이대로가 참됨이며 참됨과 망상이 본래 완전히 통해 있기 때문에 망상 이대로가 참됨이며 망상 내놓고 달리 참됨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잘못 해석합니다. 그렇게 보면 앞 구절의 '절학무위한도인'과는 근본적으로 반대가 됩니다. '절학무위絶學無爲는 일체망념이 완전히 끊어져서 구경을 성취한 사람인데 거기에 상대법인 참됨과 망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증도가]가 가운데서 영가스님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공하다.[眞不立妄本空]' 참됨도 설래야 설 수 없고 망상도 본래 공하여 찾아볼래야 볼 수 없는 참됨과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데서 하는 말입니다. 망상 이대로가 참됨이기 때문에 끊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절학무위한도인'을 모르는 것이고 영가스님의 뜻을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3.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무명실성즉불성이요 환화공신즉법신이로다.

무명의 참 성품이 바로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로다.

 

무명(無明)이라 하면 아직 생멸법인데 이것이 불성(佛性)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면 무명이 불성인 것이 아니라, 무명의 참 성품이 곧 불성이라는 것입니다.

 

 

4.  法身覺了無一物    本源自性天眞佛

법신각료무일물하니 본원자성천진불이라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법신이라고 하면 무슨 물건이 있는 줄로 생각하기 쉬운데 법신을 턱 깨치고 보니 거기에는 한 물건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물건도 찾아볼 수 없다면 텅 비어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본래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고 하여 거기에는 대광명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을 차(), 막아서 전체를 부정하는 것을 말하고 '본래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조(), 비추어서 전체를 긍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의 중도(中道) 공식은 앞에서 차()하면 뒤에서는 반드시 조()하는 것이어서, 앞에서 부정을 하면 뒤에서는 반드시 긍정을 하여 부정은 분명히 긍정을 전제로하고 긍정은 부정을 전제로 해서, 쌍차쌍조(雙遮雙照)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한 면만 강조해서는 중도 공식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라고 하여 조()의 입장에서 긍정을 이야기하면, 법신이 또 흙덩이나 돌덩이처럼 무슨 물건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기 때문에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다'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일체 망념이 다 떨어져서 한 물건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공공적적(空空寂寂)을 말합니다. 공공적적하다고 하면 또 오해하여 단멸공(斷滅空)에 떨어지기 쉬우므로, 다시 공공적적한 이대로가 대광명체라는 말로서 '본래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고 하여 자성의 항사묘용이 현전하다는 것을 부정 뒤에 긍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5.  五陰浮雲空去來    三毒水泡虛出沒

오음부운공거래하고 삼독수포허출몰이로다

오음의 뜬 구름이 부질없이 가고 오며 삼독의 물거품은 헛되이 출몰하도다.

 

내가 법신을 깨쳐 '본래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임을 확실히 알고 보니 오음의 뜬 구름이 공연히 왔다 갔다 하고 삼독의 물거품이 생겼다 없어졌다 하며 생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음이나 삼독은 법성과 천진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음이나 삼독은 아직 중도를 깨치기 전 생멸의 쪽, 중생 쪽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실지로 중도를 바로 깨쳐서 정각을 이루어 법신을 확철히 깨치게 되면, 한 물건도 없어서 오음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고 삼독을 찾아볼래야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삼독과 오음이 그대로 있다면 법신을 바로 깨친 것이 아니고 '자성이 천진불'임을 바로 안 것이 아닙니다.

 

 

6.  證實相無人法   刹那滅却阿鼻業

증실상무인법하니 찰나멸각아비업이라

실상을 증득하여 인(), ()이 없으니 찰나에 아비지옥의 업을 없애버림이라.

 

오음이나 삼독은 거짓 모습[假相]이고, 불성이라든지 법성이라든지 자성이라든지 구경각이라든지 하는 것은 참모습[實相]을 표현해 말하는 것입니다. 실상을 증득하면 인()과 법() 즉 주관과 객관이 없습니다. 여기서 증자를 쓰는 것은, 선종에서 주장하는 깨침[]이라는 것은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가 아니기 때문에 '실상을 증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상을 증득하면 주관과 객관이 없어져서 인과 법의 양변을 여읜 중도실상을 증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인과법이 떨어진 곳을 알고 실상을 알려면 증오해야만 알지 해오로써는 도저히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상을 증득하여 주관이 공하고 객관이 공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찰나 사이에 아비지옥의 업이 없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아비(阿鼻)란 간단(間斷)이 없다, 쉴사이 없다는 뜻으로 무간지옥(無間地獄)을 말하며, 아비업(阿鼻業)이란 아비지옥 곧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받아야 하는 죄업을 말합니다. 중생이란 여러 무수겁을 윤회하면서 한량없는 죄를 지어 갈 곳은 무간지옥 뿐입니다. 거기는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지옥이며 죄의 고통이 쉬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아비지옥이란 꼭 땅 밑으로 들어가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들은 앉으나 서나 가나오나 언제나 자기가 계속해온 업에 따라 항상 쉴 사이 없이 업고(業苦)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 받고 있는 처소가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업이 남아 있으면 업을 따라 고()가 따라 다녀서 전체가 아비지옥입인 것입니다. 어느 특정한 처소를 설정해서 아비지옥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업이 있고 업보가 따라 갈 때는 생각 생각이 서로 이어져 쉴 사이 없으므로 어느 곳에 있든지 처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중생세계 전체가 아비지옥이고 아비업이라는 것입니다.

일 찰나간에 아비업이 없어져서 버린다고 했는데, 육조스님께서도 '미혹하여 들으면 여러 겁이 걸리고 깨친 즉 찰나간이라[迷聞이면 經累劫이요 悟卽刹那間이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입니다. 깨침에 무슨 시간적 간격을 두고 닦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종에서 돈오(頓悟)라고 하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 모든 것을 다 성취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이 어려운 것 같지만 이것은 그 닦는 방법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우리가 서울 가기 위해서 걸어간다면 한량없는 날들이 걸리지만 비행기를 타버리면 잠깐 사이에 가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종에서 제시하는 방법에 따라서 공부할 것 같으면 일 찰나간에 구경각인 실상을 증득해서 아비업이 없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7.  若將妄語誑衆生    自招拔舌塵沙劫

약장망어광중생하면 자초발설진사겁이로다

거짓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진사겁토록 발설지옥 보를 스스로 부르리로다.

 

'내가 만약 거짓말로 중생을 속이는 것이라면 내 스스로 진사겁토록 발설지옥에 간다'는 말씀입니다. 발설지옥이란 사람들이 거짓말을 많이 하면 죽어서 가는 지옥으로 그곳에서는 혀를 빼내어 쟁기질을 하는데 그 고통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선종에서는 인과 법, 즉 주관과 객관이 떨어지면 찰나간에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고 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것이 거짓말이 아님을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는 사람은 이 말을 들으면 의심이 없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차원이 높은 이야기라서 이해하기 어렵고 자꾸 거짓말처럼 들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영가스님이 중생들이 너무나 딱하게 생각되어 자기말이 절대로 참말이지 거짓말이 아니란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기는 하나, 어떻게 보면 영가스님이 참 딱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말이 어느 정도 권위가 설 것 같으면 누가 듣든가 말든가 상관 않겠지만 오죽했으면 '내가 거짓말할 것 같으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혀를 빼는 지옥에 가서 고생을 받겠다'고 맹세까지 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맹세한다는 것은 남에게 내가 불신임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만 하여도 선()에 대해서 일반의 인식도가 낮고 이해를 잘못했지 때문에 선()이란 것을 남에게 이해시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해서 이런 구구한 말씀을 하신 걸로 볼 수 있습니다.

 

 

8.  頓覺了如來禪   六度萬行體中圓

돈각료여래선하니 육도만행체중원이라

여래선을 단박에 깨치니 육도만행이 본체 속에 원만함이라

 

육도(六度)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말합니다. 바라밀이란 도()라든가 도피안(到彼岸)이라고 번역하여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육도란 저 언덕인 해탈에 이르는 여섯가지 방법이니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를 말합니다. 만행(萬行)이란 육바라밀을 실천 궁행하여 보살도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확철히 깨친다고 함은 여래선을 깨치는 것인데 여래선의 본체 가운데는 육도만행이 원만구족해 있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나무를 벨 때 그 밑 뿌리를 자르면 전체가 다 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마음의 근본자리를 바로 깨치기만 하면 육도만행을 닦고 안닦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원만구족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도만행을 달리 어떻게 닦으려 하지 말고 영가스님 자기가 소개하는 여래선을 바로 깨치기만 하면 전체가 모두 따라 욹쨈잔것입니다. 근본을 바로 알면 지엽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니 지엽적으로 나아가 육도만행을 닦는다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근본적인 여래선을 바로 깨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9.  夢裏明明有六趣    覺後空空無大千

몽리명명유육취러니 각후공공무대천이로다

꿈속에선 밝고 밝게 육취가 있더니 깨친 후엔 비고 비어 대천세계가 없도다.

 

육취란 육도(六道)로서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을 말하니 중생은 지은 업에 따라 윤회 전생(轉生)하는 세계의 모양입니다.

대천(大千)이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뜻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쓰이는 말로서 수미산(須彌山)을 중앙으로 하여 일곱개의 산과 여덟개의 바다가가 둘러싸고 있으며 그 밖으로 철위산(鐵圍山)이 에워싼 공간을 한 개의 소세계라 하며, 이 소세계를 천개 합친 것이 소천, 소천을 천개 합친 것이 중천, 중천을 천개 합친 것이 대천이니 이것을 삼천대천세계라고 합니다. 육취니 사생이니 삼천대천세계니 하는 것은 전체가 다 망상으로 일어난 업연(業緣)의 기멸(起滅)에서 생긴 이름들일 뿐 자성을 바로 깨친 대원경지에서는 부처나 조사도 찾아볼 수 없는데 하물며 육취인들 찾아볼 수 있으며 중생인들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육취라 하니 육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체만법 전체가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천당이니 지옥이니 부처니 중생이니 하나님이니 하는 것은 모두가 꿈속에서 하는 소리지 꿈을 바로 깨놓고 보면 부처도 찾아볼 수 없고 조사도, 중생도, 하나님도 외도도 또한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삼천대천세계도 찾아볼 수 없어서 깨끗하고 깨끗하여 아무것도 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설 수 없는 거기에서 진여대용인 대지혜광명의 항사묘용이 발현되게 되는 것입니다.

 

 

10.  無罪福無損益    寂滅性中莫問覓

무죄복무손익하니 적멸성중막문멱하라

죄와 복이 없고 손해와 이익도 없나니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묻고 찾지 말라.

 

여래선을 확철히 깨쳐 돈오(頓悟)하면 모든 것이 원만구족한데, 거기에는 죄도 없고 복도 없으며 손해도 없고 이익도 없다는 말입니다. 비단 손해와 이익, 죄와 복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남, 옳고 그름의 모든 변견이 완전히 떨어지면 적멸한 성품이 발현하는 것이니 그 가운데서 무엇을 묻고 찾을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주관과 객관이 다 떨어진 곳이 쌍차이며, 쌍차(雙遮)이면 쌍조(雙照)로써 거기에서 중도정견(中道正見)의 항사묘용이 발현함을 알아야 합니다.

 

 

11. 比來塵鏡未曾磨    今日分明須剖析

비래진경미증마러니 금일분명수부석이로다

예전엔 때 낀 거울 미처 갈지 못했더니 오늘에야 분명히 닦아 내었도다.

 

진경(塵鏡) 때 낀 거울이란 중생의 마음을 가리킨 것으로써 맑은 거울 위에 먼지가 덮혀 있으면 거울 빛이 드러나지 못함과 같이 중생의 근본 자성은 본래 청정한 것인데 번뇌망상의 티끌이 꽉 차서 지혜광명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은 업을 따라 생사윤회를 거듭하면서 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잘 몰라서 이 마음을 닦지 못했지만, 오늘에는 참됨도 버리고 거짓됨도 버리고 죄도 버리고 복고 버리고 옮음도 버리고 옳지 않음도 버려서, 모든 상대의 양변을 완전히 여의였기 때문에 중도 정견이 발현하여 근본법을 분명히 밝혀내었다는 것입니다.

 

 

12.  誰無念誰無生  若實無生無不生

수무념수무생 약실무생무불생이니

누가 생각이 없으며 누가 남이 없는가 진실로 남이 없으면 나지 않음도 없나니

 

앞에서는 때 낀 거울로써 나고 죽음의 망상을 말하고, 이 귀절에 이르러서는 무생법인을 이루어 대원경지를 분명히 성취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생각이 없으며 누가 나는 것이 없느냐'는 것은 때 낀 거울에서 때를 닦아 내면 그 사람이 확실히 무념의 경계를 성취한 사람이고 무생법인을 증()한 사람을 견차繭遮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참으로 나는 것이 없으면 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곧 전체가 다 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쌍차(雙遮)하면 쌍조(雙照)가 됩니다. 모든 일체의 망()이 다하면 이것은 나는 것이 없는 것이며[無生], 거기에서 항사묘용의 무진법문(無盡法門)이 난다는 것입니다.

실지로 무념(無念)을 성취하고 무생(無生)을 증했으면 그만인데 왜 또 '남이 없으면 나지 않음이 없다'고 하느냐하면, 혹 어리석은 중생이 잘못 이해하여 무생이나 무념에 응체하여 단견에 빠질까 염려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한 가지 말할 것은 '약실무생무불생(若實無生無不生)''실지로 나는 것이 없으면 나지 않음도 없다'고만 해석한다면 이것은 전체를 까뭉게 버리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렇게 하면 뜻이 정반대가 되어 버려서 쌍차쌍조(雙遮雙照)가 되질 않습니다. 주의하여 해석하야 합니다.

 

 

13.  喚取機關木人問    求佛施功早晩成

환취기관목인문하라 구불시공조만성이로다

기관목인을 불러 붙들고 물어보라 부처 구하고 공 베품을 조만간 이루리로다.

 

기관목인이란 나무로 사람을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서 인형극 하듯이 나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기관목인에게 물어보라'는 것은 곧 '나무 장승에게 물어보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부처구하고 공을 베품이 조만간에 이룬다'하는 것은 흔히 어떻게 해석하느냐하면, '나무 장승에게 물어 보면 부처를 구해 공을 베품들 어느 때 이루리오'하고 합니다. 결국 무생물인 장승에게 물어가지고는 영원토록 성불하지 못하고 만다는 말인데 그리되면 쌍차(雙遮)는 표현이 되지만, 앞 구절의 '약실무생무불생(若實無生無不生)'과 서로 연관시켜 보면 그와는 뜻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 放四大莫把捉     寂滅性中隨飮啄

방사대막파착하고 적멸성중수음탁이어다

사대를 놓아 버려 붙잡지 말고 적멸한 성품 따라 먹고 마실지어다.

 

나지 않는 것[無生]은 나무 장승과 같은 것이고 나지 않는 것이 없는 [無不生]은 진여의 항사묘용을 말함인데, 그러면 우리가 실지로 진여를 완전히 깨쳐서 무생법인을 증하고 항사묘용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사대 오온을 다 놓아 버려서 붙잡지 말고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자유자재 활동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지() () () ()의 사대와 색() () () () ()의 오온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생멸하는 것으로서 거기에 집착하면 영원토록 이 남이 없음[無生]을 모르게 됩니다. 이 사대나 오온이라는 것은 우리가 꿈속에서 거짓모습을 망견으로써 집착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사대가 본래 공하고 오온이 모두 공하여서 사대를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고 오온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대와 오온이 본래 공한 경계를 증해 버려야만 그것이 적멸입니다. 대적멸 경계 가운데서 우리가 임의자재하게 노니는 것을 '수음탁(隨飮啄)'이라고 합니다.

 

 

15.  諸行無常一切空    卽是如來大圓覺

제행무상일체공하니 즉시여래대원각이로다

모든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하니 이는 곧 여래의 대원각이로다.

 

일체의 모든 행이 영원한 것이 없고 일체가 공하여 아무 것도 찾아볼 수 없는 이것은 곧 여래의 대원각이라는 것입니다.

일체가 공하다는 것은 마구니와 부처를 찾아볼 수 없는 데서 하는 말이며 그러면 일체가 텅 빈 그것뿐이냐 하면 거기에서 진여의 항사묘용이 현발하는 것이니, 대원각이 항사묘용이며 항사묘용 이대로가 '일체 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이 곧 공 아님이요 공 아님이 곧 공이며, 나는 것이 곧 나지 않음이요 나지 않음이 곧 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같은 말을 자꾸 되풀이 하는 것은 듣기가 귀찮지만 그것은 쌍차 이대로가 쌍조이며 쌍조 이대로가 쌍차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행이 무상하니 일체가 공'이라 함은 쌍차를 말하고, '곧 이것이 여래의 대원각'이라 함은 쌍조를 말하고,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자유자재하다'함은 쌍조를 말합니다. 다 버리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단멸공(斷滅空)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서 자유자재한 항사묘용이 현발하여 중도정견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16. 決定設表眞乘   有人不肯任情徵

결정설표진승 유인불긍임정징이라

결정된 말씀과 참됨을 나타낸 법을 어떤 사람은 긍정치 않고 정에 따라 헤아림이라

 

결정설(決定設)이란 근본적으로 변경시킬 수 없는 확실한 정설(定說)을 말합니다. [증도가]에서 주장하는 것은 자성을 깨쳐서 성불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근본이기 때문에 결정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조사가 그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의 마음을 깨쳐서 성불하였지, 자기의 마음을 깨치지 않고 성불한 사람은 한 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쳐서 성도(成道)한다는 것은 불교의 근본 생명선인 동시에 억천만겁이 지나도 절대로 변함없는 만고불변의 결정적인 근본 대원칙인 것입니다. 마음을 깨쳐 성불하기만 하면 일체가 다 원만 구족하여 육도만행과 삼신사지(三神四智)가 다 갖추어져 있어서 다시는 더 밖으로 구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깨치는 법이 결정된 정설이며 따라서 참으로 진실한 최상승의 법문이라는 뜻으로 표진승(表眞乘)이라 한 것입니다.

 

 

17. 直截根源佛所印    摘葉尋枝我不能

직절근원불소인이요 적엽심지아불능이로다

근원을 바로 끊음은 부처님 인가 하신 바요. 잎 따고 가지 찾음은 내 할 일 아니로다.

 

나는 지름길로 바로 질러가서 근원적인 자성을 바로 깨치는 것으로 으뜸을 삼지 가지나 더듬고 잎을 따는 지엽적인 짓을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무를 벨 때에 밑뿌리만 끊어 버리면 전체가 다 넘어져서 가지나 잎은 저절로 따라 오는데 무엇 한다고 잎을 자꾸 따고 가지를 끊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쓸데없이 시간과 노력만 낭비할 뿐이지 절대로 바른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근원을 끊는다'는 것은 자성을 바로 깨치는 것을,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견성 성불 하는 바른 길을 말하는 것이요, 그렇지 않고 저 육도만행을 닦는다든지 뭘 한다든지 하는 것은 가지를 찾고 잎을 딴다는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

 

 

18. 摩尼珠人不識    如來藏裏親收得

마니주인불식하니 여래장리친수득이라

마니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여래장 속에 몸소 거두어들임이라

 

마니란 인도말로써 여의(如意)라는 뜻이니 마니주는 그 쓰임이 무궁무진해서 무엇이든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하여 이 구슬을 우리의 자성에 비유한 것입니다. 한 번 내 마음을 깨쳐 놓으면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하여 여의자재(如意自在)하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마니주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마음 속에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다 지니고 있어서 찾기만 하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이것을 활용하여 자유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을 터인데, 이 보배구슬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자꾸 바깥으로만 돌면서 경전을 본다, 육도만행을 한다, 뭘 한다 하면서 바로 찾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여래장 속에서 몸소 얻어 거두어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래장이란 진여불성을 말합니다. 여래장을 달리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하지만 여기서는 진여불성을 여래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9.  六般神用空不空    一顆圓光色非色

육반신용공불공이요 일과원광색비색이로다

여섯가지 신통묘용은 공하면서 공하지 않음이요. 한 덩이 둥근 빛은 색이면서 색이 아니로다.

 

육반신용은 여섯 가지 신통묘용을 말하는데 이것은 육신통(六神通)이라 해도 괜찮지만 육신통을 따라 세울 것은 없고 안() () () () () ()의 육근(六根)의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여불성 가운데 마니주를 찾으니 육근 이대로가 전체로 신통이며 모두가 진여대용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여래장을 열어서 마니보주를 얻지 못하면 육근이 모두 여섯 가지 도적[六賊]이지만, 여래장을 열어 마니주를 얻어 진여자성을 깨치면 육근 전체가 육신통 즉 진여대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 () () () ()를 통한 전체 진여대용 이것이 공()이면서 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이란 일체 명상(名相)이 다 떨어진 쌍차(雙遮)를 말하고, 공하지 않다는 것은 단공(斷空)이 아니라 거기에 묘유가 있다는 것으로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그래서 여섯가지 진여대용이 공했으면서 공하지 않고 공하지 않으면서 공했으며, 진공이면서 묘유고 묘유이면서 진공 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쌍차이면서 쌍조이며 쌍조이면서 쌍차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가 되는 것이니 중도의 참 정의를 우리가 여기서 체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론으로써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니주를 완전히 얻고보면 '육반신용' 가운데서 중도의 대용(大用)을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여섯가지 신통묘용'이라고 하여 여섯가지가 각각 다른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은 하나입니다.

 

 

20.  淨五眼得五力   唯證乃知難可測

정오안득오력 유증내지난가측이라

오안을 깨끗이 하여 오력을 얻음은 증득해야만 알 뿐 헤아리긴 어렵도다.

 

오안, 다섯 눈이란 첫째는 육안(肉眼)이니 우리들 중생의 육신이 가지고 있는 눈을 말하며, 둘째는 천안(天眼)이니 색계(色界)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육안으로 멀고 가까움과 안과 밖,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볼 수 있는 눈을 말하며, 셋째는 혜안(慧眼)이니 이승(二乘)의 사람들이 가진 눈으로써 연기의 실상을 보는 지혜의 눈을 말하며, 네째는 법안(法眼)이니 보살이 가지고 있는 눈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일체의 법문을 비춰 보는 지혜의 눈을 말하며, 다섯째는 불안(佛眼)이니 부처님이 가지고 있는 눈으로써 일체를 알며 일체를 비춰보는 눈이니 앞의 네 가지 눈을 모두 구비한 눈을 말합니다. 

영가스님은 바로 이 오안을 깨끗이 하면 오력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오력(五力)이란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의 하나로써 첫째는 신력(信力)이니 신근(信根)을 증장케 하여 모든 삿된 믿음을 깨뜨리는 것이며, 둘째는 정진력(精進力)이니 정진근(精進根)을 증장케 하여 신테의 게으름을 물리치는 것이며, 셋째는 염력(念力)이니 염근(念根)을 증장케 하여 모든 사념(邪念)을 깨뜨리는 것이며, 넷째는 정력(定力)이니 정근(定根)을 증장케 하여 모든 어지러운 생각을 끊어버리는 것이며, 다섯째는 혜력(慧力)이니 혜근을 증장케 하여 삼계의 모든 미혹을 끊는 것을 말합니다.

 

 

21.  鏡裏看形見不難  水中捉月爭拈得

경리간형견불난  수중착월쟁염득

거울 속의 형상 보기는 어렵지 않으나 물속의 달을 붙들려 하나 어떻게 잡을 수 있으랴.

 

'거울 속에 환하게 비친 내 얼굴을 본다'는 것은 자성을 바로 깨쳐서 오안과 오력을 자유자재하게 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서 확철히 깨쳐서 증지(證智)를 성취하면 대지혜 광명이 현전하는데, 자기 자성을 보는 것이 비유컨대 거울 속에 환하게 비친 얼굴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하다고 밝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볼 물건이 있고 볼 사람이 있어서 보는 줄 알면 큰일이니 여기서는 모든 주관과 객관이 다 떨어져 버린데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별망상과 티끌 그림자를 따라가다가는 또 영원토록 자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니 '물속의 달을 붙들려하나 어찌 잡을 수 있으랴'라고 하고 있습니다. 경전에도 이러한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만, 원숭이가 물속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달려들지만 천년 만년 잡으려 해 보았자 그 것은 헛일이니 어찌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물속에 비친 달이란 분별망상을 말하는 것이니 망상과 티끌 그림자를 가지고는 우리의 자성을 영원히 깨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성을 깨치려면 분별 망상뿐만 아니라 제팔 아뢰야의 근본 무명까지도 뿌리를 뽑아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영원토록 자성을 깨칠 수 없다는 것을 비유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 망상과 티끌 그림자를 버리고 회광반조하여 진여본성을 바로 깨쳐야 하는 것이니 외변으로 돌면서 헤매서는 안 되며 근원을 바로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2.  常獨行常獨步    達者同遊涅槃路

상독행상독보하니 달자동유열반로로다

항상 홀로 다니고 항상 홀로 걷나니 통달한 이 함께 열반의 길에 노닐도다.

 

우리가 참으로 깨쳐서 증지(證智)를 성취하였는데 어째서 '항상 홀로 다니고 홀로 걷느냐'하면 깨친 경계에서는 부처와 부처가 서로 보지 못하고 조사와 조사가 서로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佛佛不相見이요 祖祖不相逢이라]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일체의 명상(名相)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니 천상천하에 오직 나 혼자 높아서 천하를 횡행하고 허공 위를 혼자 걸어가는 것입니다. 아무 짝도 없고 걸림도 없이 자기 혼자 노닐게 되므로 서로서로 반려가 없습니다. 반려가 없다는 것은 절대로서 상대가 없다는 것이며 모든 명상의 양변이 다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려가 없다고 해서 혼자만 다니고 혼자만 걸으면 그만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깨친 사람들은 서로서로 손을 잡고 열반의 길에서 함께 노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을 빨리 알려면 '이것이 무엇인고'를 부지런히 해서 깨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영가스님이 이런 좋은 글을 만들어 놓고 내가 아무리 입이 아프도록 말해 보았자 쓸 데 없는 말일 뿐입니다. 오직 눈을 바로 뜨고 광명을 보아야 합니다.

 

 

23.  調古神淸風自高  貌悴骨剛人不顧

조고신청풍자고 모췌골강인불고로다

옛스런 곡조 신기 맑으며 풍체 스스로 드높음이여 초췌한 모습 앙상한 뼈 사람들 거들떠보지 않는 도다.

 

홀로 다니고 홀로 걸어 열반의 길에서 노닐면 참으로 '곡조가 옛스럽고 신기는 맑고 풍채가 스스로 드높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느냐 하면 고불고조(古佛古祖)들이 맨손에 단도를 쥐고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는 대기대용(大機大用)을 말한 것입니다. 그냥 운치가 좋고 풍채가 높다는 것이 아니라 빈손에 청룡도를 하나 들고 내 마음대로 자유자재하게 써서 죽이는 것만 마음대로 하느냐 하면 살리는 것도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역대의 조사들을 죽이려고 하면 한 칼에 다 죽여 버리고, 살리려고 하면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들 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을 한 날 한 시에 살릴 수 있는 살활자재(殺活自在)한 전기대용(全機大用)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처럼 살활자재한 전기대용이 현저한 그 사람의 모양이 어떠한가 하면, '얼굴은 초췌하고 뼈는 앙상해서 사람들이 돌아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피부가 다 탈락되어 하나의 진실제 뿐[皮膚脫落盡 唯一眞實際]'이라고 함과 같이, 일체 번뇌망상은 피부가 탈락되듯이 다 끊어져 버리고 오직 진여본성의 뼈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모양이 초췌하다는 것은 일체 망상의 모양이 다 끊어졌음을 말하고, 뼈가 단단하다는 것은 금강반야가 현저하여 진여의 뼈가 단단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망정이 다 떨어져서 살활자재한 전기대용이 현저하여 거기서는 부처와 조사도 찾아볼 수 없고 중생과 마구니도 찾아볼 수 없는 인상(人相)과 아상(我相)이 다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냥 사람의 모습이 야위고 뼈만 앙상해서 사람들이 보기 싫다고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알면 피상적일 뿐만 아니라 영가스님의 참 뜻과는 정반대가 되고 맙니다.

 

 

24.  窮釋子口稱貧     實是身貧道不貧

궁석자구칭빈하나 실시신빈도불빈이라

궁색한 부처님 제자 입으로는 가난타 말하나 실로 몸은 가난해도 도는 가난치 않음이라

 

'궁색한 부처님 제자'라 하니 무엇이 궁색하다는 말인가? 돈이 없고 옷이 없고 쌀이 없고 또 무슨 물건이 없다는 말인가?

예전 스님네 하시는 말씀이 '도를 배우려면 마땅히 가난함부터 먼저 배우라[學道先須學貧]'고 하였습니다. 중생이란 그 살림이 부자입니다. 84천석이나 되는 온갖 번뇌가 창고마다 가득가득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고마다 가득찬 번뇌를 다 쓰지 못하고 영원토록 생사윤회를 하며 해탈의 길을 걸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답게 도를 배우려면 84천석이나 되는 번뇌의 곳집을 다 비워버려야만 하는 것이니 그렇게 할 때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84천석이나 되는 번뇌를 다 내버리고 나면 참으로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이 되어서 텅텅 빈 창고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 뜻은 실지로 진공(眞空)을 먼저 깨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주 가난한 진공(眞空) 이것은 가난한 것도 없는데서 하는 말입니다.

 

 

25.  貧則身常披縷褐     道則心臟無價珍

빈즉신상피루갈이요 도즉심장무가진이로다

가난한 즉 몸에 항상 누더기를 걸치고 도를 얻은 즉 마음에 무가보(無價寶)를 감추었도다.

 

'가난한 즉 몸에 누더기를 걸친다.'고 하는 것은 안팎이 함께 가난함을 말합니다. 안으로 번뇌망상이 다 떨어져서 탐심과 구하는 마음이 없어지니 밖으로야 무슨 금은보화가 필요하겠습니까? 안과 밖이 함께 가난하면 어떻게 되느냐?

안과 밖이 함께 가난해서 철두철미하게 진공(眞空)을 성취하면 거기서 항사묘용의 다 쓸 수 없는 보고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도를 얻은 즉 마음에 값할 수 없는 보배'를 지니는 것입니다. 삼천대천세계가 아무리 크고 넓다하지만 설사 그것을 억천만개를 합한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무진장의 '값할 수 없는 보배'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들 마음속에 천상천하에 비교할 수 없는 값진 보배를 가지고 있느니 만큼 하루 빨리 개척해서 그것을 마음대로 써야 할 것입니다.

 

 

26.  無價珍用無盡     利物應時終不吝

무가진용무진하니 이물응시종불인이라

무가보는 써도 다함이 없나니 중생 이익하며 때를 따라 끝내 아낌이 없음이라

 

이것은 우리 진여자성의 쓰임[]을 말합니다. 일체만물을 이롭게 하고 일체시(一切時)에 응하여 쓰더라도 끝내 아끼는 것이 없어 영원토록 다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27. 三身四智體中圓    八解六通心地印

삼신사지체중원이요 팔해육통심지인이로다

삼신사지는 본체 가운데 원만하고 팔해탈 육신통은 마음 땅의 인()이로다.

 

삼신(三身)이란 법신(法身), 보신(報身), 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을 말하고 사지(四智)란 대원경지(大圓鏡地), 평등성지(平等性地),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를 말합니다.

삼신과 사지를 성취하면 이를 부처라 하는데, 우리가 마니주를 완전히 알아서 자성을 바로 깨치면 삼신사지가 원만구족해서 다시는 더할래야 더할 것이 없고 덜래야 덜 것이 없는 구경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값할 수 없는 보배는 써도 다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혹 어떤 사람은 '깨쳤다고 해서 삼신사지가 그대로 원만구족 할 수 있나?'하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증지(證智)라는 것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고, 깨친 것 돈오(頓悟)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돈오(頓悟)를 한 사람은 삼신사지가 원만구족 안할래야 안할 수 없습니다.

이런 좋은 마니보주를 사람사람이 다가지고 있건만 이것을 모르고 깨쳐서 쓸려고 하지 않으니 이보다 한심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삼신사지가 원만구족하면 팔해탈과 육신통이 그 가운데 다 갖추어 있다는 것입니다.

팔해탈은 진여해탈의 경계를 여덟가지로 분류한 것인데 각각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여의 대용인 줄 알면 됩니다. 육신통이란 천안통(天眼通),천이통(天耳通),신족통(神足通),숙명통(宿命通), 타심통(他心通), 누진통(漏盡通)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마음에 체득을 해보아야 아는 것이지 말로만 해서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항상 '이것은 무엇인고'를 부지런히 해서 자성을 하루 빨리 깨쳐야 합니다. 금강산이 좋다고 아무리 말해 주어도 '어디 그런 좋은 산이 있을라고! 거짓말이다.'하면서 가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원히 금강산을 보지 못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삼신사지와 팔해탈육신통이 구족한 값할 수 없이 귀한 마니주가 사람 사람에게 다 있어서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들이 모두 다 개발하여 다함이 없이 썼는데도 이것을 믿지 않고 거짓말이라고 의심하다가 영원토록 성불하지 못하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중생그대로 남게 됩니다.

 

 

28.  上士 一決一切了    中下多聞多不信

상사일결일체료하고 중하다문다불신이라

상근기는 한 번 결단하여 일체를 깨치고 중, 하근기는 많이 들을수록 더욱 믿지 않는도다.

 

참으로 영리한 상근기의 사람은 이런 좋은 법문을 한번 들으면 일체가 이해되어 버려서 다시는 더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리하지 못한 중,하근기의 사람은 값할 수 없이 귀한 마니주가 자기 마음 가운데 있다고 입이 아프도록 말해 주어도 믿지를 않고 의심만 한다는 말입니다. 관운장이 안량과 문추의 목을 베듯이 한꺼번에 해치워 버려야지 이리저리 빙빙 돌면서 허송세월해서야 되겠습니까?

 

 

29.  但自懷中解垢衣  誰能向外誇精進

단자회중해구의 수능향외과정진

스스로 마음의 때 묻은 옷 벗을 뿐 뉘라서 밖으로 정진을 자랑할건가

 

신신명의 '참됨을 구하려 말고 망령된 견해만 쉴 뿐이라[不用求眞唯須息見]'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마니주는 본래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데 오직 때 묻은 옷, 즉 번뇌망상 때문에 쓰지를 못하는 것이니, 때 묻은 옷을 벗어 버리듯이 번뇌망상, 분별취사심만 쉬어 버린다면 그것을 쓴다 해도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해가 시방세계 비치고 있지만 해를 보지 못하는 것은 구름이 가려 있기 때문입니다. 해를 억지로 볼려고 하지 않아도 구름만 걷히면 해는 저절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와 같이 오직 때 묻은 옷만 벗어 버리고 망상을 쉬어버릴 뿐입니다. 도를 성취한다 하여 겉으로 육도만행을 한다 무엇을 한다 하여 가지를 더듬고 잎이나 따는 등 공연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30.  從他謗任他非     把火燒天徒自疲

종타방임타비하라 파화소천도자피로다

남의 비방에 따르고 남의 비난에 맡겨두라. 불로 하늘을 태우려하나 공연히 자신만 피로하리라.

 

저 사람이 비방하고 욕하는 것을 가리지 말고 탓하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좋은 마니주가 있다고 입이 아프도록 말해줘도 도리어 반대하고 욕하는 것은 그 사람이 몰라서 그런 것이지 알고서는 그렇게 욕하고 비방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불을 들고 하늘을 태우려는 사람과 같이 헛되이 스스로만 피로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31.  我聞恰似飮甘露    銷融頓入不思議

아문흡사음감로하야 소융돈입부사의로다

내 듣기에 마치 감로수를 마심과 같아서 단박에 녹아서 부사(不思議) 해탈경에 들어가도다.

 

이 법을 모르는 사람은 욕을 하고 비방을 하지만 아는 사람은 남이 욕하고 헐뜯어도 마치 감로수를 마시는 것과 같아서 팔만사천가지 병이 눈깜짝 할 사이에 다 나아버린다는 것입니다. 병이 나음과 동시에 삼신사지와 팔해탈 육신통이 원만구족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중생이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할 수 없는 부사의 대해탈경계로 우리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상승 무상묘법을 듣고 비방만 하지 말고 부사의 해탈경계에 들어가서 일체중생과 더불어 화장찰해(華藏刹海)에서 영원토록 자유자재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모르면 자꾸 비방하고 반대하는 것은 옛날이니 지금이나 같습니다. 부처님 당시도 그랬고 육조스님, 영가스님 당시도 그랬으며 현재도 그렇습니다. 이 불법(佛法)이란 것이 하도 신기하고 묘한 것이여서 중생이 알기 어렵고 믿기 어렵기 때문에 비방하고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들어서 영가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2. 觀惡言是功德    此則成吾善知識

관악언시공덕이니 차즉성오선지식이라

나쁜 말을 관찰함이 바로 공덕이니 이것이 나에게는 선지식이 됨이라

 

부처님께서는 오역죄(五逆罪)를 짓는 것보다도 정법(正法)을 비방하는 죄가 더 크다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오역죄를 지은 죄는 참회하면 다시 돌이킬 수 없지만 정법을 비방하면 불법에 인연을 끊어 버려서 그 사람은 영원토록 성불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미워서 죄가 크다는 것이 아니라 정법을 비방하여 불법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릴 것 같으면 영원히 성불할 길이 막히기 때문에 죄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소한 욕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정법을 비방하는 큰 욕도 나에게는 큰 공덕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비방을 하고 욕을 하는 것도 조금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저쪽에서는 독을 주어도 이쪽에서는 감로수로 받아 마시면 그것이 오히려 살이 되고 뼈가 되어서 부처가 안 될래야 안될 수 없고 자성을 깨치지 않을래야 깨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나에게 독을 준다고 나도 함께 독을 내놓으면 내 몸과 마음이 영원히 독이 되어 지옥만 깊어져 버리고 자성을 깨칠 수 없어 성불은 영원히 할 수 없게 됩니다. 저쪽에서 아무리 비방하고 욕을 하더라도 그 비방과 욕을 감로수로 삼아서 성불의 길을 걸어가야지, 같이 상대를 해서 비방하고 욕하며 싸워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니 오히려 그것을 나의 선지식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33.  不因訕謗起怨親 何表無生慈忍力

불인산방기원친 하표무생자인력

비방 따라 원망과 친한 마음 일지 않으면 하필이면 남이 없는 자비인욕의 힘 나타내 무엇 할 것인가

 

일반적으로 비방하면 원수가 되고 칭찬하면 친구가 되는데 도를 닦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수행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참으로 수행할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나를 아무리 비방하고 욕을 하더라도 거기에 얼마만큼 움직이느냐, 감로수로 받아 마시느냐 못마시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누가 비방을 해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마음을 기울이지 아니할 것 같으면 '하필이면 남이 없는 자비 인욕의 힘을 나타낼 것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남이 없는 자비 인욕의 힘'이란 구경법을 성취하면 발현되는 대자대비의 힘을 말하는데 그렇게 되면 아무리 저쪽에서 나에게 해독을 끼치려고 해도 그것은 독이 아닌 은혜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부처님 말씀과 같이 '원수를 부모같이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내 듣기엔 마치 감로수를 마심과 같다'는 것은 한편으론 내가 정법을 들을 것 같으면 감로수를 마신 것 같아서 부사의해탈경계에 들어간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나를 욕하는 것을 들을 것 같으면 감로수를 마심과 같아서 부사의해탈경계에 들어간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욕하고 비방하는 것을 감로수처럼 받아 들인다'고만 하면 '걸왕을 도와 학정을 위한 것[助桀爲虐]'이 되지 않느냐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옛날 중국 은나라 마지막 임금에 걸왕(桀王)이 있었는데 학정이 심해서 마침내 쫓겨난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나쁜 사람을 징계하지 아니하고 나쁜 짓들만 좋게만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을 언제 고칠 수 있으며 점점 더 나쁘게만 만들지 않느냐 하는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자비로써 베풀며 어떤 때는 위엄으로써 다스려서 어떻게 하면 저 사람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쪽으로 자비만을 집착해 나가다 보면 오히려 저쪽에 해독을 주게 되어 버리는 그것은 참된 자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비방을 받아도 원수를 맺지 않는다.'든가 '남이 없는 자비 인욕의 힘'을 베푼다는 것도 무조건적인 자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위엄을 겸한 것을 말합니다. 한쪽으로만 국집하면 실지의 중도정견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대자대비를 성취한 불보살은 중생을 상대할 때 어떻게 하면 저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겠나 하는 생각뿐입니다. 그래서 혹은 자비로써 대하기도 하고 혹은 위엄을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중생을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자비가 됩니다.

 

 

34.  宗亦通設逆通     定慧圓明不滯空

종역통설역통이여 정혜원명불체공이로다

종취도 통하고 설법도 통함이여 선정과 지혜가 뚜렷이 밝아 공에 응체하지 않는도다.

 

자성을 확철히 깨쳐서 구경각을 성취하여 중도를 체달한 것을 '종취를 통한다[宗通]'고 말합니다. 종취를 통하여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하면 중생을 위해서 한량없고 걸림 없이 설법을 할 수 있는 변재가 발현되는 것이니 이것을 '설법도 통한다[設通]'고 말합니다. 그러면 일대시교(一代時敎)를 꼭 보아야 하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육조스님과 같이 무식하여도 '종취를 통함'이 확철하면 사람에 그림자 따라 가듯이 '설법도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취를 통하는 것과 설법을 통하는 것을 둘로 나누냐? 아무리 종취를 통했다 하여도 중생을 위하고 중생을 상대로 하지 않는다면 설법을 통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불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중생을 위한 것일 뿐 결코 자기 개인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 개인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니 누구든지 확철히 깨쳐서 일체종지를 성취한 뒤에는 반드시 '설법을 통해서' 일체중생을 교화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종취와 설법을 완전히 통해 버리면 '선정과 지혜가 뚜렷이 밝아 공에 응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든 중생은 있음[]에 많이 집착하게 되는데 그 있음[]을 부수어서 있음[]이 소멸되면 또 어떤 병이 생기냐 하면 공에 집착하는 공병이 생기게 됩니다. 공에 집착하여 머물러 있으면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은 무애자재한 구경법을 성취하지 못하고 맙니다. 그래서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으려면 반드시 공적(空寂)한 제팔 아뢰야 무기공(無記空)까지 타파하여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은 대자재(大自在)는 절대로 성취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바로 깨쳐서 종취와 설법을 함께 통달하여 무애자재하게 되면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아 차조동시(遮照同時)가 되어서 공()에 머물래야 머물 수 없습니다. 공에 머무름이 없는데 있음[]에 머무름이 없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니, ()과 있음[]을 초월하면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아 구경법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35.  非但我今獨達了  河沙諸佛體皆同

비단아금독달료 하사제불체개동이로다

나만 이제 통달하였을 뿐 아니라 수많은 부처님 본체는 모두 같도다.

 

자성을 확철히 깨쳐 진여본성을 확실히 알아서 정각을 성취한 이 경계는 나 혼자만 지금 통달한 것이 아니요, 간지스강의 모래 알 같이 수많은 모든 부처님들의 본체도 모두 다 똑 같다는 것입니다. 종취를 통하고 설법을 통하여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은 이 경계는 남녀노소를 묻지 않고 깨치면 모두가 같은 부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 말하기를 자고로 불()자 붙은 사람은 사바세계에서 석가모니불 한 분 뿐인데 그 뒤에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은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제팔 아뢰야 근본 무명을 완전히 끊고 쌍차쌍조하여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은 중도를 성취하면 그 사람이 부처[]이지 따로 부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래알 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들도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은 것은 똑같아서 그 본체가 둘이 아닌 것입니다.

 

 

36. 獅子吼無畏設    百獸聞之皆腦裂

사자후무외설이여 백수문지개뇌열이라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뭇 짐승들 들으면 모두 뇌가 찢어짐이라.

 

사자는 백 가지 짐승 가운데서 가장 무섭고 위엄 있는 짐승으로서 한번 표효하면 모든 짐승들이 무서워 벌벌 떤다고 합니다. 최상승인 자성을 바로 깨쳐 중도를 정등각한 사람의 법문을 '사자후'라고 하고 '무외설'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짐승 가운데서는 사자가 가장 높아서 위가 없듯이 불법 가운데서는 밝은 그 도리를 체달한 그 사람이 최상이기 때문이니 그 사람의 법문을 '사자후'라 하고 '두려움 없는 설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자가 한 번 소리 지르면 백 가지 짐승들의 머리가 터져 죽어 버린다'는 것은 부처님의 '두려움 없는 설법' 한 마디에 일체 중생의 모든 무명이 끊어져 버리고 자성을 깨쳐 성불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중생의 모든 업장이 다 녹아 버리고 근본 무명이 다 끊어져 버려서 중생이라는 것은 완전히 죽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위없는 법문을 듣고 발심해서 이 법을 따라 오면 결국에는 중생을 볼래야 볼 수 없고 성불 안할래야 안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머리가 터져 버린다'는 것은 중생이 모두 다 성불해 버린다는 말이지 그냥 죽어 버린다는 말이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37.  香象奔波失却威    天龍寂聽生欣悅

향상분파실각위하고 천룡적청생흔열이로다

향상은 분주하게 달아나 위엄을 잃고 천룡은 조용히 듣고 희열을 내는도다.

 

향상(香象)은 성문(聲聞),연각(緣覺)과 같은 이승(二乘)을 비유한 것입니다. 짐승 가운데서도 코끼라 하는 것은 덕이 높고 기운이 세어 지위가 높은 짐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생 가운데서도 성문이나 연각 같은 사람들을 보면 지위가 좀 높지만 이 '사자후'를 들을 것 같으면 분주하게 달아나서 위없음을 잃고 망연자실해서 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천룡(天龍)이란 천상인(天上人)이나 용왕같이 무애자재한 능력을 가진 이들을 비유해서 말한 것입니다. 향상(香象)은 발로써 땅 위를 걸어 다니기만 하지만 천룡은 부처님이나 대보살들처럼 큰 자유는 없지만 부분의 자유는 있습니다. '천룡이 조용히 듣고서 환희심을 낸다'는 것은 '이 무상대법을 듣고서 일체 중생이 이 법에 의지해서 한 날 한 시에 일체 종지를 성취케 하여지이다.'하는 큰 서원을 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며 또 무상대법을 의지해서 공부를 하여 누구나가 성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에서는 백 가지 짐승들이 사자후를 듣고 머리가 깨져서 죽듯이 중생이 '무외설'을 듣고 망상을 모두 끊고서 성불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향상이 무슨 죄가 있어서 제도를 받지 못하나 하는 것입니다. 향상은 불법 가운데 있기는 하나 정법에 바로 들어오지는 못했으므로 '사자후'를 듣고서는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룡처럼 어느 정도까지 자유를 가진 사람들은 끝내 중도에 들어오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결국 향상도 천룡과 마찬가지로 모두 백수(百獸)들 인지라 사자가 한 번 소리 지르면 모두 머리가 터지는 것이니, 머리가 터져서 죽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역시 모두 성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8.  遊江海涉山川 尋師訪道爲參禪

유강해섭산천하야 심방도위참선이라

강과 바다에 노닐고 산과 개울을 건너서 스승 찾아 도를 물음은 참선 때문이라

 

강과 바다를 건너고 태산과 개울을 넘어서 공부하러 다닌다는 말입니다. 공부하는데 있어서 그냥 가만히 앉아 있다고 저절로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니고 공부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천리만리를 멀다하지 아니하고 넓은 바다를 넓다하지 않으며 높은 산 넘기를 겁내지 않고 스승을 찾고 도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어떤 고생이 있더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대법을 위하고 불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몸을 돌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 스님들이 공부를 위해 이와 같이 몸을 돌보지 아니한 예를 몇 가지 들어보고자 합니다. 설봉(雪峰)스님이라면 천하에 유명한 분입니다. '세 번 투자산에 가고 아홉 번 동산에 갔다[三到投子九至洞山]'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투자산과 동산과의 거리는 오륙천리나 되는 거리인데 그런 먼 길임에도 세번이나 투자를 찾아가고 아홉번이나 동산을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리 멀고 먼 길, 아무리 험하고 높은 산일지라도 멀고 험하다고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도를 위해서 몸을 아끼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했다는 것입니다. 설봉스님은 암두(岩頭)스님과 흠산(欽山)스님과 더불어 세 분이서 항상 도반이 되어 함께 다녔습니다. 설봉스님은 어디를 가든지 공양주만 하여서 쌀 이는 조리를 늘 가지고 다녔고, 암두스님은 어디를 가나 항상 채소밭을 가꾸는 원두(園頭)만을 보아서 괭이와 호미를 늘 가지고 다녔으며, 흠산스님은 어디를 가나 바느질만 해서 실뭉치와 바늘을 늘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셋이서 어느 처소에 가든지 설봉스님은 공양주만 맡아서 대중의 공양을 지어 올리고, 암두스님은 채소밭을 가꾸어서 대중의 반찬을 해 올리고, 흠산스님은 온 대중의 바느질이란 바느질은 전부 도맡아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셋이서 도반을 지어 천하를 다니면서 공부하여 마침내 세 분이 다 공부를 성취하여 후세에 모범적인 대도인들이 되었습니다. 선문염송(禪門拈頌)에 보면 이 세 분 스님들의 무서운 법문들이 많이 나옵니다. 

선종사에 있어서 최초로 대중을 많이 거느린 스님이 설봉스님인데 평생에 늘 천오백명 이상의 대중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그때는 선종초기로서 중간에 와서는 더러 이삼천명의 많은 대중을 거느리는 총림도 있었지만 초기에는 그렇게 많이 모여 살지를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선이 제대로 보급이 되지 않기도 했지만 선만 전문으로 하는 처소도 거의 없었습니다. 

설봉스님은 일천오백 명 대중을 보고 늘 하는 말씀이 "너희 일천오백 명 대중이 모두 나의 이 조리 속에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복혜쌍수(福慧雙修)를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참으로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공양주를 많이 했기 때문에 대중들이 많이 모이는 이런 복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공부하는데 있어서 한편으론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간다'는 최상승의 공부를 바로 지어가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들이나 중생들을 섭수하는 방편으로써 중생의 생멸복인 추복(:거칠추)이 아닌 청복(淸福)을 설봉스님이 공양주를 하며 닦아 가듯이 닦아 가야만 원만한 법을 성취할 수 있다고 예전 큰 스님네들이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강과 바다를 건너고 산천을 밟고 다녀도 설봉스님과 같이 발심해서 법을 위해 몸을 돌보지 않는 사상을 가지지 않는다면 산이나 보고 물이나 구경하는 유람꾼이지 참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유람꾼이 되지 않고 진정한 구도자가 되려면 설봉스님처럼 법을 위해 몸을 잊어버리는 철두철미한 발심을 해야 합니다. 

나는 요사이 발심해서 공부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전부가 유람꾼들 뿐입니다. 해제(解制)하기가 바쁘게 "이번은 어느 산을 구경할까? 어느 섬을 가보고 싶네!"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산이나 놀러 다니고 물 구경이나 하는 사람들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야 하는 것이니 그와 같은 한가로운 유람꾼이 되어서는 어느 시절에 대도를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공부하는 근본 자세는 나[]라는 생각을 버려 버리고 제방으로 지도자를 찾아가서 철저한 지도를 받을 수 있도록 되어야지 "너나 내나 똑같은데 네 말을 들을 것이 뭐 있나!" 하는 아만으로 가득차서 공부할 것 같으면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옛날 오대산에 구정조사(九鼎祖師)라는 큰스님이 계셨는데 그 스님의 부도(浮圖)가 지금도 월정사 옆에 있습니다. 어느 겨울에 그곳에 가서 내가 보았습니다. 어째서 구정조사냐 하면 북대(北坮)에 무념(無念)이라는 큰스님이 계셨는데 구정조사는 무념스님이 큰스님이라는 말을 듣고 도를 배우러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공부에 대해서는 한 마디 일러주지도 않고 "밥 해 먹는 솥이 잘못 걸렸는데 이 솥을 한 번 잘 걸어보아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구정조사가 보니 솥은 반듯하게 잘 걸려 있는데 어째서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큰스님이 솥이 잘못 걸렸다고 다시 잘 걸라고 하시니 할 수 없이 전부 뜯어 가지고 다시 정성껏 솥을 잘 걸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솥을 다 걸었습니다." 고 여쭈었더니, 큰 스님이 보시고 화를 벌컥 내시면서 "이리 걸면 안돼! 다시 걸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새로 솥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또, "틀렸어. 다시 걸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리도 걸어보고 저리도 걸어봐도 다 툇짜를 맞았습니다. 이러기를 아홉번을 되풀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솥을 아홉번 옮겨 걸었다고 하여 '구정(九鼎)스님'이라 하였습니다.

 

큰스님의 뜻은 솥을 잘 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놈이 나를 찾아와서 믿고 공부를 배우겠다고 하니 내 말을 어느 정도 복종하고 듣느냐는 것을 시험하기 위해서 일부러 트집을 잡아서 솥을 아홉 번이나 걸게 해 보았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한두 번 걸고 나서 다시 걸라고 하면 "저 스님 정신 나간 모양이야. 이렇게 반듯한 솥을 자꾸 다시 걸라고 하니 누가 믿겠어!" 하고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달아나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구정선사는 그런 생각이 아니고 "오직 내가 저 스님을 믿고 왔으니 어찌 됐든지 저 스님시키는 대로 무조건 복종해서 도를 배우는 것이 목적이지 이까짓 솥을 천 번 걸고 만 번 걸라한들 나에게 무슨 상관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를 배움에 있어서 나[]라는 생각은 모조리 내버리고 오직 법은 위해 내 몸을 돌보지 않는 발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발심한 이에게는 어떤 욕을 하고 어떤 고통을 주어도 감내 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정선사는 그 큰 스님 밑에서 공부를 성취하여 유명한 <구정조사>가 되었고 이것이 천추만대로 도를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구정조사와 같은 그런 발심과 신심으로 참선하러 다녀야지 다만 조금이라도 아상(我相)을 가지고 다닌다면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 공부하러 다니는 사람이 아니고 산에나 놀러 다니고 물 구경이나 다니는 유람꾼이지 '스승을 찾고 도인을 방문하여 참선하는 태도'는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출가하였으면 참으로 공부인이 되어야지 유람꾼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한 가지 예를 더 들면 운문종(雲門宗)의 개조(開祖)인 운문스님의 일입니다.

그 당시 황벽스님의 제자 되는 목주(睦州)스님이 유명한 큰스님이라는 말을 듣고 찾아 갔습니다. 목주스님은 대중을 거느리지도 않고 짚신이나 삼으면서 조그마한 허물어져가는 토굴에 살았는데 토굴 주위를 높게 담을 쌓고 대문을 만들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걸어 잠그고 그 안에서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운문스님이 그 토굴로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니 목주스님이 방문을 열고 나오면서 "누구냐?" 하니 엉겁결에 "운문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너 뭐하러 여기 왔느냐?"

"제가 스님을 찾아 뵈옴은 도를 배우기 위해서 입니다."

목주스님이 대문을 열자 운문스님이 토굴 안으로 들어가려고 발을 밀어 넣으니 목주스님이 운문스님의 멱살을 콱 움켜잡고는 "한 마디 말해 보라 한 마디 말해 보라" 고 다그쳤습니다. 그렇게 다그침에도 운문스님이 아무 말도 못하자 목주스님이 뒷 등덜미를 콱 밀어 부치면서 "산 송장놈이 왔구나! 문은 왜 두드려..."하고 투덜대면서 문을 잠그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날은 그렇게 쫓겨나고 그 이튿날 또 목주스님을 찾아갔으나 어제와 같이 한 마디 대답도 못하고 쫓겨나기만 했습니다. 사흘째 가서는 "오늘은 어떻게 해서라도 문전에서 쫓겨나지 않고 기어이 토굴에 들어가고 말리라." 고 결심하고 다시 목주스님을 찾아 갔습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목주스님이 문을 열자 "한 마디 말해보라"는 운도 떼기 전에 운문스님이 문안으로 발을 들이 밀고 들어가려고 하자 목주스님은 있는 힘을 다하여 문을 닫아 버리니 그 사이에 운문스님의 다리가 문틈에 끼어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어찌나 아프던지 [!]하고 소리치는 그 순간에 확철히 깨쳤습니다. 그리하여 다음에 운문종의 개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법을 위하여서는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오직 도를 성취할 생각만을 할 뿐이지 다리 부러지고 머리 터지는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하여서 운문스님은 대조사가 되었는데, 그렇지만 평생 내내 절름발이로 다리를 절룩이며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종문(宗門)에서는 운문스님의 절름발이와 이조 혜가스님이 팔을 베어 도를 구한 일은 법을 위해 몸을 잊어버리는 좋은 일화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비록 일부러 부뚜막을 헐고 솥을 새로 걸고 다리를 부러뜨리고 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구정조사가 한만큼은 못한다 해도 공부하는 사람은 아상(我相)을 근본적으로 내버려야 합니다. 다만 조금이라도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다니면 어느 곳을 가던지 서로서로 상대가 되어 싸움만 했지 이익은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스승을 찾고 도인을 뵙고 참선하는 사람도 못되고 산천구경하는 유람꾼만 되는데, 그것도 산만 보고 강만 보고 놀러 다니는 사람이면 그래도 일 없는 한가한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아상(我相)을 가지고 돌아다니면 어디를 가나 시비꾼만 되고 불집을 일으키는 싸움꾼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를 구하려 공부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단단히 가져 법을 위해 내 몸을 돌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나[]를 버리고 살아야 함을 우리 깊이 명심합시다.

 

 

39.  自從認得曹溪路   了知生死不相干

자종인득조계로 요지생사불상간이로다

조계의 길을 인식하고 부터는 생사와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영가스님이 어릴 때부터 출가해서 공부를 하여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확철히 정각을 이루지 못했다가 현책(玄策)의 권유에 따라서 육조스님을 찾아뵙고 법문 끝에 확철히 깨쳤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조스님을 찾아가서 조계의 길을 확철히 깨쳐 얻어서 생사가 서로 관계없음을 밝게 알았다는 것입니다. 생사를 해탈하여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무애경계를 증득한 것은 많이 노력한 곳에서 얻어진 것이지 게으르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곳에서 이루어진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스승을 찾고 도를 물어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얻어진 것입니다. 영가스님도 그렇게 육조스님을 찾아가서 확철히 깨쳐 영원히 생사와 상관없는 해탈의 길을 얻었던 것입니다.

 

 

40.  行亦禪坐亦禪     語黙動靜體安然

행역선좌역선이니 어묵동정체안연이라

다녀도 참선이요 앉아도 참선이니 어묵동정에 본체가 편안함이라

 

다녀도 참선이고 앉아도 참선이니 말하거나 묵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언제든지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아 본체가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흔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나는 지금 깨치지 못했어도 가나오나 화두가 그대로 있으니 가도 선이고 앉아도 선이 아닌가! 말하거나 말하지 않거나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화두가 그대로 있으니 이것이 참선 잘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런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참선이 아니라 전체가 망상입니다.

 

선이란 일체 망상을 떠나서 오매일여(寤寐一如)한데서 확철히 깨쳐 대원경지가 현발되어야 합니다. 자성을 완전히 깨쳐서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은 경계가 참으로 선이지 그전에는 전체가 망상인 줄 알아야 합니다. 화두가 조금 잘 된다고 참선 잘 하는 줄 알아서는 천부당만부당이니 그 사람은 망상 피우는 사람이지 참선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선방에 앉아서 화두 한다고 해도 망상하는 것이지 참선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자성을 깨친 뒤부터가 실제 참선이지 깨치기 전에는 참선이 아니고 망상인 줄 알아야 합니다. 언젠가도 말했지만 원오스님이 확철히 깨치고 나니 오조법연(五祖法然)선사가 대중들에게 "내 시자(侍者)가 오늘부터 참선할 줄 안다[我侍者參得禪也]" 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성을 깨친 뒤부터가 실제 참선이지 확철히 깨치기 전에는 선이 아니라 모두가 망상(妄想)인 줄 분명히 알아서 경계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제팔 아뢰야 무기식(無記識) 경계에 있으면 대무심지에 있는 것 같아서 어느 정도 자재하지만 그것은 크게 죽은 것이고 아직 살아나지 못한 것이므로 옛 스님들은 그 경계가 공부를 마친 것으로 잘못 알기 쉽다고 하여 제팔마계(第八魔界)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이란 것은 제팔 아뢰야의 무기무심까지도 벗어나 대원경지가 현발한 그 때가 비로소 선인 것입니다.

 

영가스님이 선이라고 하는 것은 조계의 길을 깨쳐서 구경각을 성취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구경각을 깨치고 보니 가나오나 앉거나 서거나 말하거나 말하지 않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간에 선이 아닐래야 아닐 수 없으니 그 때가 무애자재한 열반의 길에서 노니는 때이며 이것이 선이라는 말입니다. ()과 망()을 구별해야지 화두 한다고 하면서 선방에 앉았다고 다 참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나오나 앉거나 서거나 말하거나 묵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간에 모두가 진여대용이 되는 때가 참으로 참선하는 때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41.  縱遇鋒刀常坦坦     假饒毒藥也閑閑

종우봉도상탄탄하고 독약야한한이로다

창과 칼을 만나도 언제나 태연하고 독약을 마셔도 한가롭고 한가롭도다.

 

도를 성취하면 칼과 창으로 목을 천번 만번 끊는다 해도 항상 태연하여 조금도 겁낼 것이 없어 대자유자재하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구마라습(九摩羅什)스님의 제자에 승조(僧肇)법사라는 분이 있었는데 구마라습스님의 뛰어난 제가가 열 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사철(四哲)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승조법사의 자격과 재질이 특이하고 뛰어났으므로 그 당시 요진(姚秦)나라 임금이 "승조법사를 환속시켜 재상으로 삼으면 천하가 요순세계로 돌아가 태평시절이 될 것이다."고 생각하고 구마라습스님에게도 청하고 승조법사에게도 간청을 하였습니다.

"스님 머리를 기르고 재상이 되어 정치를 한다면 천하에 명 재상이 되어 백성들이 편안할 것이니 환속해서 부디 재상직을 맡아 주시오" 하니, 승조법사가 끝내 허락하지 않고서 "재상이 다 무엇이냐! 일국의 재상이란 꿈속의 꿈이고 어린애 잠꼬대 같은 소리다. 나는 무상대도를 얻어 영원토록 자유자재하여 일체 중생을 위해 살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아무리 권해도 듣지 않으므로 마침내 옥에 가두어 버리고 "끝까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고 위협하여도 막무가내였습니다. 나중에 정말 왕이 죽이려고 하니 승조법사께서 "나를 꼭 죽일려면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 하고는 그 동안에 [보장론(寶藏論)] 한 권을 지었습니다. 일명 [조론(肇論)]이라고도 하는데, 그 문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불법의 진리가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책입니다. 우리 팔만대장경에도 들어있는 책입니다. 일주일 뒤에 형틀에 올려놓고 죽이려 하니 게송을 읊었습니다.

 

四大元無主 五陰本來空

將頭臨白刀 猶似斬春風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음이요

오음은 본래 비었음이라

 

머리를 흰 칼날 아래 내미니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 같도다.

 

자기로서는 사대가 주인이 없고 오음이 본래 비어 일체가 다 공함을 깨쳐서 불생불멸하고 쌍차쌍조한 대도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허공은 열 번 쪼개고 부술 수 있어도 자기는 죽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몸뚱이는 죽는 것 같지만 실지로 자기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이며 자성을 확철히 깨쳐서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칼로 천번 만번 내리쳐도 자기한테는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창과 칼을 만날지라도 항상 탄탄하다'는 것은 승조법사의 이러한 경계를 말한 것입니다.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는 뜻만이 아니라 자성을 깨치면 영원토록 손익이 없고 생멸이 없는 경계를 '항상 탄탄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내 목에 칼을 맞는 것이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독약을 먹는 것은 어찌 되느냐?

 

달마스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달마스님 당시에 보리유지삼장(菩提流支三藏)과 광통율사(光統律師)는 승단 가운데 뛰어난 스님들로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달마대사와 토론을 벌려 시비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달마대사가 고준하게 법을 설하여 중생들에게 크게 덕화를 끼침을 보고 다투어 해치려는 마음을 내어 자주 독약을 음식에 넣었습니다. 어떨 때는 독약을 먹고 나서 토하니 비위가 갈라지더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렇게 여섯 번이나 독약을 드셨는데 그 여섯번째에 이르러서는 세상에 교화할 인연도 다하였고 법을 전할 혜사스님도 만난 뒤였으므로 독약을 드시고 조용히 앉아서 돌아가셨습니다. 이때는 후위(後魏)의 여덟째 임금인 효문제(孝文帝) 태화(太和) 19(서기 495)이었다고 합니다. 웅이산(熊耳山)의 오판(吳板)에서 장사 지내고 정림사에 탑을 세웠습니다.

 

그 뒤로 삼년 만에 위()나라의 송운(宋雲)이라는 이가 서역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총령(蔥嶺)에서 달마대사를 만났는데 손에 짚신 한 짝을 들고 훌훌히 혼자 지나가시므로 송운이 물었습니다.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서천으로 돌아가오. 그대의 나라 천자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오." 송운이 이 말을 듣고 돌아와 보니 과연 문제(文帝)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송운이 이 사실을 자세히 보고 하므로 황제가 광()을 열어 보게 하니 빈 관속에는 정말 짚신 한짝만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달마스님이 모르고서 여섯번이나 독약을 드셨느냐 하는 것인데 모르고서 드셨다고 하면 달마스님이 아닙니다. 알고도 드신 것입니다. 여섯번째 가서는 세연(世緣)이 다했음을 아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보통 볼 때는 독약에 돌아가신 것으로 보겠지만 세연이 다해서 자신이 독약을 드시고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그 뒤에 신짝 하나를 들고 총령을 넘어갔으니 그것을 죽었다고 해야될 것입니까, 살았다고 해야 될 것입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러한 대자유한 경계를 체득한 사람, 바로 깨친 사람, 다녀도 참선이요 앉아도 참선이요 어묵동정에 본체가 편안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칼날도 소용없는데 무엇을 겁내고 무엇을 무서워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무서운 칼날에도 항상 태연하고 독약에도 한가로워 독약을 꿀같이 보고 칼날도 꽃같이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확철히 깨쳐서 자유자재한 사람의 행리처(行履處)요 생활인 것입니다.

 

 

42.  我師得見燃燈佛     多劫曾爲忍辱僊

아사득견연등불하고 다겁증인욕선이로다

우리 스승께서 연등불을 뵈옵고 다겁토록 인욕선인 되셨도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과거 도를 위해 공부하시던 전생담입니다. 그 인행(因行)시에 연등불이 마침 진흙 위를 지나가시게 됨을 보고 자기의 머리를 풀어서 그 진흙 위에 깔아서 발에 흙이 묻지 않고 지나가시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머리 푼 공양의 공덕으로 연등불께서 수기를 주셨는데 "네가 미래세에 부처가 되어 이름을 석가모니라 하리라" 하셨습니다. 위 귀절은 그 전생담을 인용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느냐 하면 공부를 하려면 하심(下心)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철저하게 하심하는 신심과 발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머리를 풀어 부처님이 밟고 지나가도록 한 것은 참으로 아상(我相)이란 하나도 없고 오직 구도심, 신심 하나만 가지고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의 머리를 풀어서 밟고 지니 가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내가 대자유자재한 공부를 성취한 것도 이런 하심을 했기 때문이라는 영가스님의 말씀입니다.

()은 곧 선(), 신선이란 말이니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신선이 아니고 성불한 것을 신선이라고 하니 부처님을 대금선(大金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사해탈하여 자유자재한 것을 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연등불을 위해 진흙땅에 머리를 풀어 공양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다겁동안 인욕의 선인이 되어 공부를 했기 때문에 성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리왕 때의 일입니다.

산중 토굴에서 공부를 하고 있자니 그 때 가리왕(哥利王)이 신하들과 궁녀들을 많이 거느리고 사냥을 나왔다가 인욕선인의 토굴 있는 데로 오게 되었습니다. 가리왕이 사냥을 하고 있는 동안에 궁녀들이 산책하다 보니 스님 한 분이 토굴 속에서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앉아 있는데 그 모습이 하도 거룩해서 숭배심이 일어나 그 앞에 가서 모두 예배를 드리고 또 드리며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가리왕이 사냥에서 돌아와 보니 자기가 총애하는 궁녀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으므로 "이것들이 다 어디로 갔나?" 하면서 찾아보니 남루한 옷을 입고 토굴에 앉아 있는 스님을 보고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가리왕은, "저 놈이 내 계집들을 다 빼앗아 가려고 한다."고 생각하고는 그만 분한 마음을 내어서 그 인욕선인을 잡아가 사지를 마디마디 잘라 고통을 주며 죽여 버렸습니다. 그 때 인욕선인이 만약 아상(我相)이나 인상(人相)이 조금이라도 붙어 있었더라면 참으로 원한심을 품었을 것이고 그것이 원결이 되어서 세세생생으로 호랑이가 되든지 칼이 되든지 해서 가리왕을 뜯어 먹거나 찌르든지 하여서 원수를 갚으려고 자꾸 달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직대도를 위하고 법을 위해 몸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거기에 무슨 원수라든가 한이 맺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어도 조금도 원한이 없이 인욕선인 노릇을 하며 많은 겁을 닦아 내려왔기 때문에 오늘 내가 확철히 깨쳐서 부처도 되고 조사도 되고 하는 것이지 공연히 일조일석에 조그마한 생각을 가지고 공부 한다며서 쓸 데 없이 이 길 저 길을 오가며 산이나 보고 물이나 구경하고 다녀서는 절대로 공부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43.  幾廻生幾廻死 生死悠悠無定止

기회생기회사 생사유유무정지

몇 번을 태어나서 몇 번이나 죽었던가. 생사가 아득하여 그침이 없었도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법을 위해 몸을 잊어 버려야 하고 마디마디를 토막 내는 그런 욕을 참아가면서 공부를 해야 되며 도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람쥐 체바퀴 돌듯이 도는 우리들의 생사윤회의 세계는 억천만겁토록 사생육도를 이리 돌고 저리 돌아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말할 수 없는 고()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수억겁의 생사를 해탈하려면 반딧불 같은 조그마한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인욕선이 되어 가리왕의 고()도 받고, 어떤 때는 연등불에게 하듯이 하심(下心) 공양도 하고, 어떤 때는 혜가스님처럼 눈 속에 서서 팔뚝을 자르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운문스님처럼 다리도 부러뜨리는 식으로 법을 위해 몸을 바치는 그러한 노력과 공부가 있어야만 참으로 억천만겁의 생사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노력한 수행의 결과는 무엇인가?

 

 

44.  自從頓悟了無生  於諸榮辱何憂喜

자종돈오료무생 어제영욕하우희

단박에 깨쳐 남이 없음을 요달하고 부터는 모든 영욕에 어찌 근심하고 기뻐하랴.

 

확철히 깨쳐서 남이 없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요달 하여 일체경계에 대무심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돈오(頓悟)라 하면 흔히 이치는 알았으나 객진번뇌는 전과 다름이 없이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생멸이지 돈오가 아니며 무생이 아닙니다. 돈오(頓悟)란 제팔 아뢰야 무기무심을 완전히 끊은 대원경지의 무생(無生)을 말합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돈오하여 무생법인을 증득하면 어떻게 되느냐? 영광스러움과 욕됨에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기뻐하겠습니까? 영화로운 일이든지 욕된 일이든지 근심하거나 기뻐한다는 것은 전부다 생멸 변견에서 하는 일이며 돈오해서 무생을 증득하면 변견을 여의고 중도를 정등각한 것이므로 그때에 있어서는 영화로움과 욕됨과 근심과 기쁨이 완전히 떨어진다는 것이니 곧 양변이 다 떨어져다는 말입니다. 여기 와서는 혹은 앉고 혹은 서더라도 절대로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야만 자유가 있는 것이지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면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오하여 무생(無生)을 밝혔다는 것은 구경각을 말한 것이며, 구경각을 성취하면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팔풍(八風)에 움직이지 아니하며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열반로에서 놀며 절대로 생사의 길은 밟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사 없는 열반로에서 어떻게 사느냐?

 

 

45.  入深山住蘭若     岑崟幽邃長松下

입심산주란야하니 잠음유수장송하로다

깊은 산에 들어가 고요한 곡에 머무니 높은 산 그윽하여 낙락장송 아래로다.

 

깊은 산중에 들어가 토굴 생활을 하니 산은 첩첩하고 물은 깊으며 낙낙장송 우거진 심산유곡에서 새소리 물소리 들으며 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46.  優遊靜坐野僧家     闃寂安居實蕭灑

우유정좌야승가하니 격적안거실소쇄로다

한가히 노닐며 절 집에서 조용히 앉았으니 고요한 안거 참으로 소쇄하도다.

 

그러면 도를 깨친 사람이 깊고 깊은 산중에서만 사는가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산중에 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들녘에 나와 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야승가(野僧家)란 서울 한 복판에 살기도 하고 인연 따라서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면서 자유자재하게 생활함을 말합니다. 도를 깨쳐 대자재를 얻은 사람은 아무리 깊은 산중에 있다 하여도 적적함이 없어 분주한 도시에 있는 것과 같고 아무리 분주한 도시 가운데 있다 해도 저 심산궁곡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해야 진실로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는 것이지 깊은 산중에 들어가면 조용해서 마음이 편하고, 도시에 나가면 분주해서 싫다면 실로 바로 깨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되면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지 진실로 자유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47. 覺卽了不施功  一切有爲法不同

각즉료불시공이니 일체유위법부동이로다

깨친 즉 그만이요 공 베풀지 않나니 모든 유위법과 같지 않도다.

 

깨치면 그만이어서 다시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병이 다 나으면 약이 더 필요 없듯이 확철히 깨쳤는데 무슨 공부를 다시 더 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환자는 병이 다 나은 사람이 아니듯이 선가에서는 십지,등각(十地,等覺)도 환자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깨쳤다 하는 것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해서 중도를 정등각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병이 다 나아 약이 더 필요 없게 된 것이므로 거기서 공부를 더 한다는 것은 우수운 소리가 되고 '베움이 끊어진 한가한 도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돈오(頓悟)했는데 점수(漸修)할 것이 있다면 이것은 돈오가 아닌 것입니다. 무생(無生)을 증해 버린 여기서는 모든 유위법과는 틀려서 참으로 무위법도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위법이란 유위법에 상대한 무위법이지 바로 깨친 사람에게는 유위, 무위가 다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위법도 상관하지 않는데 유위법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전 스님들은 목우(牧牛)하느니 보임(保任)을 하느니 하는 것은 모두가 대자재한 경계에서 하는 말이지 아직 약을 쓸 필요가 있고 닦을 데가 있어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닦을 것이 있다면 이것은 유위법입니다. 깨치면 전체가 다 끝났기 때문에 절대로 후수(後修)가 없습니다. 마조스님과 꼭 같이 후수(後修)가 없는 것입니다.

 

 

48.  住相布施生天福  猶如仰箭射虛空

주상보시생천복이나 유여앙전사허공이라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하늘에 나는 복이나 오히려 허공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도다.

 

남에게 쌀 한 움큼 주고 돈 한푼 주고 옷 한 가지 주는 것이 좋은 일임에는 분명하나 모양[]이 있는 유위법으로는 그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천상락은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니 꼭 천상에 가야만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과보로써 좋은 행복을 누리게 되면 그것이 천상락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복은 한정이 있는 것으로서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49.  勢力盡箭還墜  招得來生不如意

세력진전환추하니 초득래생불여의로다

세력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나니 내생에 뜻과 같지 않은 과보를 부르리로다.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행복을 누리더라도 한정이 있기 때문에 허공에 쏜 화살이 힘이 다하면 다시 땅으로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복이 다하면 내생에는 뜻과 같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자유를 얻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모양에 머물러 보시하는 것은 삼생(三生)에 원수라 했습니다. 금생(今生)에는 모양에 집착한 복을 닦느라고 공부를 못하고 내생(來生)에는 금생에 닦을 복을 받느라고 공부를 못하고 내래생(來來生)에는 복이 다하면 타락하여 고()를 받느라고 공부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모양에 집착하여 보시하는 것은 삼생의 원수라고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 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양에 머문 보시가 삼생의 원수가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으로 모양에 머물지 않는 보시를 해야 합니다. 모양에 머물음이 없는 보시란 내 마음 속에 있는 양변, 변견을 다 버려버리는 것이 참다운 보시라는 것입니다. 보시를 이렇게 해야만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지 수도인이 되어서 삼생의 원수인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양무제를 만나니 양무제가 물었습니다.

"짐이 만승천자가 되어 절도 많이 짓고 경전도 많이 펴고 탑도 많이 세우고 보시도 많이 하였는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공덕이 없습니다."고 달마스님이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은 '모양에 머문 보시이기 때문이니 당신이 실제로 불법을 위하여 공덕을 쌓으려거든 자성을 깨치라'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자성을 깨치는 이것이 참공덕이라는 것입니다.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삼생의 원수이니만큼 수행하는 사람은 자성을 바로 깨쳐서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삼생의 원수는 맺지 않는 것이 아닌가, 혹 이리도 생각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최상승법을 바로 알아서 그 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고행난행(苦行難行)하는 것은 모양에 머무는 보시가 아니라 최상승법을 빨리 성취시키는 방편입니다. 그래서 고불고조(古佛古祖) 무상대도를 성취시키기 위해 신심을 조장시키는데 있어서는 모든 고행난행(苦行難行)을 해야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처님의 정법이 십대제자 가운데 두타제일(頭陀第一)인 가섭존자에게 갔습니다. 왜 그런가 하니 가섭존자와 같이 고행난행하는 철두철미한 신심을 가지고 부처님 말씀을 믿고 공부해야만이 이 무상대법을 깨칠 수 있다는 근본 표본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섭존자의 고행난행은 자성을 깨쳐서 모든 모양으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에 전체가 모두 대기대용의 현발입니다.

 

예전의 총림에서 큰 스님네들이 공부하는 사람이 최상승법을 모르고서 다만 모양에 머무는 보시를 하는 것만을 배격하였지, 그 이외의 최상승법의 성취를 위한 고행난행은 누구에게든지 장려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백장스님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고 하여 구십평생을 호미를 들고 살았듯이 이 고행난행을 하지 않고 공부한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양에 머무는 보시와 예전 큰 스님네들의 조도방편(助道方便)을 혼동하면 큰 오해가 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종문에서 하는 공부는 모양에 머무는 보시도 아니고 삼생의 원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고행난행을 하여 신심이 고양되어 최상승법을 하루 빨리 깨치게 하는 것이 그 근본 방침이기 때문입니다. 예전 어느 큰 스님이든지 고행난행하는 철두철미한 신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섭수해 나갔지 이것을 배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최상승법으로 들어가서 모든 모양을 떠난 공부를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50.  爭似無爲實相門   一超直入如來地

쟁사무위실상문 일초직입여래지리오

어찌 함이 없는 실상문에 한 번 뛰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감과 같으리오.

 

모양에 머무는 보시를 하면 삼생의 원수가 되어서 세력이 다하면 윤회를 거듭하고 말지만,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함이 없는 실상문에 바로 들어가면 눈 깜짝할 사이에 구경각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가(敎家)에서는 삼아승지겁을 거쳐서 육도만행을 닦아 구경각을 성취할 수 있다고 했는데, 선가에서의 '한번 뛰어넘어 여래 지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교가에서 강변합니다. 특히 천태종이 [증도가] 가운데서 가장 반대하는 대목이 바로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간다.'는 귀절입니다. 교가의 교리상으로 볼 때는 구경각은 성취하는 기간이 무한한 시간이 걸리고 무한한 노력이 드는 것인데 어째서 자기 마음을 닦을 것 같으면 단박에 구경각을 성취할 수 있느냐, 그렇게 될 수 없다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외별전인 비밀방법을 참으로 모르는데서 하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모양에 집착해서 자꾸 뜀밖으로 나간다면 말할 수 없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렇지 않고 모양을 완전히 떠나서 자신을 바로 닦아 나갈 것 같으면 단도직입으로 구경각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선문의 정설입니다.

 

황벽스님 법문에 "힘 쎈 사람이 구슬이 자기의 이마에 박혀 있는 것을 모르고 시방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밖으로만 찾아다녀도 끝내 찾지 못하다가 지혜로운 이가 가르쳐주면 당장에 구슬이 이마에 본래대로 있음을 아는 것과 같다."는 말씀처럼, 구슬은 본래 이마에 있는데 자꾸만 외변으로만 돌면서 저 미국으로 영국으로 달나라로 다녀 보았자 구슬은 못 찾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구슬이 너의 이마에 있지 않느냐"고 바로 가르쳐 주면 스스로 더듬어 만져보아 알게 되니 이것이 바로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드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모양에 머물러 보시하는 방법과 함이 없는 실상문의 방법과는 이렇게 근본적으로 틀리다는 것입니다. 모양에 머물러 보시하는 방법으로 공부를 한다면 삼아승지겁이 아니라 미래겁이 다하도록 성불하기가 곤란할 것 같으면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육조스님께서도 '미혹하여 들으면 여러 겁이 걸리고 깨치면 찰나간'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즉 자기의 마음을 깨치면 눈 깜짝할 사이에 구경각을 성취해 버리는 것이지 절대로 많은 시간이 필요 없으므로 누구든지 이 법을 바로 믿고 선택해서 부지런히 닦기만 하면 금생에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앞에서도 '만약 거짓말로써 중생을 속인다면 발설지옥에서 진사토록 지낼 화를 자초한다.'고 맹세까지 하셨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중생의 업이 너무 두터워 참으로 믿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노파심절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든지 '함이 없는 실상문'에 바로 들어 갈 것 같으면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부지런히 부지런히 공부한다면 옛사람과 같이 눈 깜짝할 사이에 구경각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51.  但得本莫愁末   如淨瑠璃含寶月

단득본막수말이니 여정유리함보월이로다

근본만 얻을 뿐 끝은 근심치 말지니 마치 깨끗한 유리가 보배 달을 머금음과 같도다.

 

앞에서도 여러 번 강조한 바와 같이 뿌리를 끊어버리면 나무 전체가 넘어지는 것인데 어리석은 사람은 외변으로 공연히 잎만 따고 가지만 찾고 하여 무한한 세월과 한없는 노력을 허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근본 자성을 닦으면 거기에 육도만행이 원만히 다 갖추어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달마스님께서도 '마음을 관찰하는 한 가지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觀心一法總攝諸行]'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관찰하여 마음을 바로 깨칠 것 같으면 전체 불교가 그 가운데 다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완전히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경각을 성취하면 어찌 되느냐?

 

한 번 뛰어넘어 여래지에 들어가서 자성을 깨치면 내심외경(內心外境) 곧 안의 마음과 밖의 경계 전체가 원융무애하여 통연히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유로 '맑은 유리병 속에 보배 달을 넣어 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맑은 유리병 속에 보배달을 넣어두면 그 속이 환한 동시에 그 빛이 밖으로 시방세계를 비추어 내외가 명백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맑은 유리병 속에 보배달을 넣어 둔 것과 같다[如淨瑠璃含寶月]'는 말은 [능엄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공부를 해가는 중간의 해오(解悟)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구경각을 성취하여 삼현십지(三賢十地)와 등각(等覺)을 넘어서서 구경의 묘각(妙覺)을 성취하여 무소득(無所得)의 경계를 체달하는 것을 말하니 진여를 바로 깨쳐서 진여의 광명이 내외에 통철하고 무장무애하여 시방세계에 두루 비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경계에서 성취되느냐?

 

제팔 아뢰야 무기무심인 가무심(假無心)에서 벗어나 진여의 대무심지가 현발한데서 성취되는 것이니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大死却活] 경계인 것입니다. 진여의 대무심지에 이르면 일체번뇌망상이 완전히 다 끊어져 제팔 아뢰야 근본무명이 뿌리채 뽑히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진여의 보배 달이 떠올라 시방세계를 비추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의 경계이므로 말로만 보배 달을 운위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몸소 체험해야 합니다. 그 경계에 있어서는 오매일여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밥 먹을 때나 일할 때나 자나 깨나 말하거나 않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어느 때는지 그 경계는 꼭 같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공부를 해가다가 조금되는 것 같다하더라도 거기에 조금의 간단(間斷)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공부가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공부해서 간단 없음을 성취하여 객진번뇌(客塵煩惱)가 다 떨어진 구경에서 진여 보배 달이 떠오르면 억천만겁이 지나도 옛이 아니어서[歷天劫而不古]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이처럼 선종에서 깨쳤다고 하는 것은 구경각을 성취한 것으로써, '깨끗한 유리병 속에 보배달을 담은 것과 같은 것'을 돈오(頓悟)라 하였지 그 중간의 해오(解悟)를 돈오라 하지 않았습니다.

 

 

52. 旣能解此如意珠    自利利他終不竭

기능해차여의주하니 자리이타종불갈이로다

이미 여의주를 알았으니 나와 남을 이롭게 하여 다함이 없도다.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가서 마치 유리병 속에 보배 달을 담은 것'같은 그러한 대진여광명을 우리가 완전히 체득하여 증하고 나면 이 여의주를 항상 옳게 수용하여 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를 위해서도 한없는 힘을 발휘하여 무한한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을 위해서도 미래겁이 다하도록 한없는 대자대비를 베풀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구경각을 완전히 성취하여 여의주를 완전히 얻는 것이어서 진여본성을 바로 깨친 것이며 진여본성을 바로 깨치었다면 영원토록 이것을 나와 남을 위해서 활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53.  江月照松風吹     永夜淸霄何所爲

강월조송풍취하니 영야청소하소위

강엔 달 비치고 소나무엔 바람 부니 긴긴 밤 맑은 하늘 무슨 하릴 있을건가

 

모든 것을 완전히 끊고 해탈하여 한가한 도인이 되고 보니 강물 위에 달 비치고 솔밭에 바람 부는 경계더라는 것입니다. 그 경계에 있어서는 긴긴 밤 하늘은 맑은데 아무런 하릴없어 자유롭고 영원토록 걸림 없다는 말입니다. '강 위에 달 비치고 솔 바람 분다.'는 것은 실제 자성을 깨침에 있어서 자성의 체()와 용()을 분명히 표현한 것입니다.

 

 

54.  佛性戒珠心地印     霧露雲霞體上衣

불성계주심지인이요 무로운하체상의로다

불성계의 구슬은 마음의 인()이요. 안개 이슬 구름 노을은 몸 위의 옷이로다.

 

확철히 깨쳐 마니주를 얻으면 불성계의 구슬은 마음 땅의 도장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도장이란 우리의 근본자성을 말함이고, 안개 이슬 구름 노을은 생멸하는 것이므로 몸에 걸친 옷처럼 중생의 망정을 말한 것이 아니냐'고 흔히 해석하는데 그렇게 해석하게 되면 여의주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안으로는 마음 땅이 개척되어 불성계의 구슬이 둥글고 밝은 동시에 밖으로는 안개, 이슬, 구름, 노을이 몸 위에 걸친 옷으로써 모두가 진여대용이라는 말입니다. 안개, 이슬, 구름, 노을도 진여대용이고, 꽃은 붉고 버들이 푸르름도 진여대용이며, 산은 높고 물이 깊은 것도 진여대용입니다. '불성계의 구슬'은 안으로 자성을 표현하여 하는 말이고, '안개, 이슬, 구름, 노을이 몸위에 걸친 옷이라'하는 것은 밖으로 일체가 진여의 발현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불성계의 구슬이란 내 마음 자리를 확철히 깨친데서 한 말로써 마니주 광명이 사방세계를 비추어 진진찰찰(塵塵刹刹)이 진여광명 아님이 하나도 없는데 안개, 이슬, 구름, 노을인들 어찌 빼놓을 수 있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진진찰찰 전체가 다 진여대용임을 표현함에 있어서 이것들을 예로 들어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 땅의 도장[心地印]은 자성을 말함이고 안개, 이슬, 구름, 노을은 생명하는 것이므로 망상이라고 해석하면 여의주도 영가스님의 뜻도 모르는 사람이니 여기에 특히 주의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55. 降龍鉢解虎錫    兩鈷金環鳴歷歷

항룡발해호석이여 양고금환명역력이로다

용을 항복받은 발우와 범 싸움 말린 석장이여 양쪽 쇠고리는 역력히 울리는도다.

 

'용을 항복 받은 발우'라는 말은 출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삼가섭(三迦葉)을 제도 하셨다는 [본행경(本行經)]의 이야기와 육조스님의 일화입니다. 육조스님이 보림사(寶林寺)에 계실 때 절 앞뜰에 큰 용소(龍沼)가 있어서 거기에 독룡이 살면서 수풀을 휘젓고 사람에게 해를 끼침에 하루는 그 독룡이 큰 몸뚱이를 물 위에 나투는 것을 보시고 육조스님께서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네가 다만 큰 몸은 나툴줄은 알되 작은 몸은 나투지 못하는 구나. 신룡(神龍)이라면 마땅히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고 하시니 이에 그 큰 독룡이 홀연히 없어지더니 작은 몸을 나투어 물위에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 때 육조스님께서 발우를 내밀면서 "노승의 발우 속으로 들어와 보아라."고 하시니 그 독룡이 헤엄쳐서 다가오므로 육조스님께서 그 작아진 독룡을 발우에 담아 법당으로 가셔서 상당(上堂)하여 설법하시니 그 용이 드디어 몸을 벗어 화거(化去)하여 제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를 들어 '용을 항복받은 발우'라 하는 것입니다.

'싸움하는 범을 말린 석장'이란 것도 일화가 있습니다. 승조(僧稠)라는 스님이 산길을 가다보니 범 두 마리가 길가에서 서로 싸우고 있으므로 두 범이 상할 것을 염려하여 육환장으로 두 범 사이를 떼어 놓으면서 "싸울 일이 뭐 있나 서로 잘 지내거라." 하면서 육환장으로 범 대가기를 몇 번 툭툭 건드리니 서로 헤어져 가더라는 얘깁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호랑이 담배 피울 때 하는 말이라고 웃을 런지 모르지만 실지로 이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요즈음 심리학적으로 볼 때도 인간이 짐승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어 있습니다. 그런 만큼 호랑이 싸움을 말려 그치게 했다는 것도 빈 말이 아닙니다.

 

석장(錫杖)이란 육환장(六環杖)을 말합니다. 육환장 머리에 두 개의 걸이가 붙어 있고 또 한 쪽 걸이마다 세개씩 조그만 고리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육환장은 양 걸이마다 세개씩 모두 여섯개의 고리가 달려 있는 나무지팡이입니다.

 

그런데 그 육환장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느냐 하면 양 걸이는 진속이제(眞俗二諦)를 표현한 것이고 여섯개의 고리란 육바라밀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심의 나무 지팡이는 중도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환장은 그저 나무 지팡이가 아니라 중도위에 서 있는 이제(二諦)가 원융하고 육도가 원만구족한 불교 진리 전체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 스님들은 이 육환장을 지팡이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 진리 전체를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육환장을 짚고 다니면서 불법을 항상 실천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부터 스님들이 이 육환장을 짚고 다녔습니다. 육환장을 짚고 다닌다는 것은 중도에 의지해서 중도를 정등각한다는 것이고 진속이제와 육도를 원만히 성취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그것을 성취하지 못한 사람은 성취도도록 닦아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환장을 육환장이라 부르지 않고 중도장(中道杖)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56.  不是標形虛事持   如來寶杖親蹤跡

불시표형허사지 여래보장친종적이로다

이는 모양을 내려 헛트로 지님이 아니요. 부처님 보배 지팡이를 몸소 본받음이로다.

 

육환장을 짚고 다니는 것은 모양을 내기 위해서 공연히 쓸데없이 짚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여래의 보배 석장을 몸소 본받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여래의 보배 석장이란 중도를 말한 것이니 그 뜻이 나무 지팡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 지팡이에 있다면 지팡이는 아무데나 있는 것이니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출가사문(出家沙門)이 되면 반드시 육환장을 짚도록 되어 있는 것은 언제든지 중도를 바로 깨쳐서 중도를 바로 행하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육환장을 짚는 동시에 중도를 바로 깨쳐 행하는 그 사람이 여래의 보배 석장을 본받는 사람이고, 중도를 깨치지 못하고 중도를 모르는 사람은 껍데기는 육환장을 짚고 다니지만 실지로는 육환장을 내버리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중도란 자성이니 자성을 깨치기 전에는 여래의 보배석장을 본받는 사람이 되지 못하니 어서 중도를 깨쳐 안팎으로 중도를 구비하여 육환장을 항상 짚고 다녀야 하겠습니다.

 

 

57. 不求眞不斷妄    了知二法空無相

불구진부단망하니 요지이법공무상이로다

참됨도 구하지 않고 망령됨도 끊지 않나니 두 법이 공하여 모양 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앞에서 중도를 정등각한 사람만이 여래의 보배 석장을 짚고 다니는 사람이고 여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며 여래의 길을 같이 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내용이 어찌 되어서 그러냐 하면 참됨도 구하지 않고 망도 끊지 않아서 참됨도 버리고 망도 다 버려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됨과 망이 다 공하여 모양이 없음을 밝게 알기 때문인 것입니다. 참됨이니 망이니 하는 것은 중생의 변견 망정에서 하는 소리일 뿐이고 참됨도 설 수 없고 망이 본래 공해서 참됨과 망이 다 거짓말인 것이고 변견인 것이며,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그것이 중도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중도장, 육환장을 짚고 다녀야 하는데 중도장의 내용은 참됨과 망을 떠난 쌍차이면서 쌍조한 차조동시(遮照同時)인 것을 확철히 깨친 사람만이 중도장을 바로 짚고 다니는 사람이며 양변을 여읜 중도를 정등각한 사람입니다.

 

 

58. 無上無空無不空     卽時如來眞實相

무상무공무불공이여 즉시여래진실상이로다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아님도 없음이여 이것이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아님도 없다'는 것은 전체를 다 막아 버리는 것이니 청룡도를 가지고 전체를 다 끊어버리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체가 다 끊어진 곳에서 일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고 항사묘용이 나는 것이니 이것이 여래의 진실상이며 중도의 보배 석장이라는 것입니다.

 

 

59.  心鏡明鑑無碍     廓然瑩徹周沙界

심경명감무애하야 확연영철주사계로다

마음의 거울 밝아서 비침이 걸림 없으니 확연히 비치어 항사세계에 두루 사무치도다.

 

마음 거울이 환희 밝아 그 비치는 것이 걸림 없이 자재하여 그 광명은 삼천대천세계를 비추고 또 비춘다는 것입니다.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는 여래의 진실한 모습을 확철히 깨치면 전체가 다 끊어져서 거기서 참으로 항사묘용인 진여대용의 광명이 현출하여 시방세계를 비춰 두루하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60. 萬象森羅影現中     一顆圓明非內外

만상삼라영현중이요 일과원명비내외로다

만상삼라의 그림자 그 가운데 나타나고 한 덩이 뚜렷이 밝음은 안과 밖이 아니로다.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는 진심 실상(實相)'을 안다면 그 광명이 시방세계를 비치는 동안에 시방세계의 진진찰찰이 그 광명 아님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삼라만상 전체가 다 중도실상, 진여대용, 진여광명 가운데 건립되어 있는 것이지 진여광명 내놓고는 삼라만상이 따로 없습니다. 따라서 만상삼라가 진여대용 가운데 있는 것이며 그 밖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진법계(一眞法界)요 무진법계(無盡法界)며 무진연기(無盡緣起)라는 것입니다.

 

삼라만상이라 하니 조각조각 나 있어 통일성이 없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한 덩이 구슬이 빛을 내는 것과 같아서 아주 밝고 둥글어 안과 밖이 없으니 안과 밖이 끊어진 그곳에서는 유한이다 무한이다 할 것이 없습니다. 진진찰찰이 진여대용 아님이 없고 삼라만상 전체가 진여대용이어서 진진찰찰이 각각 차별이 있는 가운데 전체가 다 그대로 진여광명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금덩어리도 여러 가지 모양의 물건을 만들면 모양은 달라도 모두가 다 진금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늘과 땅에 천만상지만상(天萬象地萬相)으로 벌어져 있는 모든 것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진여광명 밖에는 따로 없습니다. 여기서는 중생을 볼래야 볼 수 없고 부처를 볼래야 볼 수 없어서 모두 다 진여대용입니다. 이것을 바로 깨쳐야만 불교를 바로 아는 사람이고 실지로 스님 될 자격이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여래의 보배 석장을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한 것이 되고 억천만겁을 살아도 육환장을 헛짚고 산 것입니다.

 

 

61. 豁達空撥因果    茫茫蕩蕩招殃禍

활달공발인과하야 망망탕탕초앙화로다

활달히 공하다고 인과를 없다하면 아득하고 끝없이 앙화를 부르리도다.

 

앞에서는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아님도 없다'고 쌍차(雙遮)를 말하여 청룡도를 가지고 싹둑 끊어 버리듯이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게 되면 흔히 공변(空邊)에 떨어져서 인과를 다 내버리는 것이 됩니다.

예전에 그런 일이 많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일체가 다 공함을 알게 되면 선과 악이 다 공해 버려서 선이 곧 악이고 악이 곧 선이 됩니다. 그런 경계에 떨어지면 흔히 사람을 죽이든, 소를 잡아먹든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일체가 다 공한데 무슨 인과가 있겠느냐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되면 한없는 지옥의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그림자 따르듯이 선인(善因)에 선과(善果)로 인과는 역연한 것이어서, 무생(無生)을 철증(徹證)하기 이전에는 지은 업을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62. 棄有著空病亦然    還如避溺而投火

기유착공병역연이니 환여피익이투화로다

있음을 버리고 공에 집착하면 병이기는 같으니 물을 피하다가 도리어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도다.

 

있다[]는 견해를 버리라고 하면 공()에 집착하는 수가 많은데 그러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앙화를 받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있음을 버리고 공에 집착하며 그 병은 있음에 집착하는 병과 똑같아서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피하다가 도리어 불에 타 죽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물이란 있음[]에 비유한 것이고 불이란 공에 비유한 것입니다. ()도 병이고 있음[]도 병이므로 공과 있음을 한꺼번에 버려야만 참다운 해탈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공을 버리고 있음[]을 집착하거나 있음[]을 버리고 공()에 집착하거나 하면 병은 같다는 말입니다. 영원한 생사윤회의 길은 마찬가지로서 해탈의 길을 성취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우리가 자성을 바로 깨쳐서 불법을 성취하려면 공()과 있음[]을 다 버리라 하는 것입니다. 있음[]과 공()을 완전히 버리기 전에는 중도와 실상을 모르는 것이고 공부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되어 생사윤회의 쳇바퀴를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63. 捨妄心取眞理   取捨之心成巧僞

사망심취진리 취사지심성교위로다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면 취사하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루도다.

 

있음[]을 버리고 공()을 취하려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망상을 버리고 진리를 취하려고 한다면 이것도 양변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공부를 성취하고 중도를 바로 알려면 버리고 취하는 취사심을 다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망상을 버리고 진리를 취하려는 것도 병이고 진리를 버리고 망상을 취하는 것도 모두가 병이므로 진리와 망상을 한꺼번에 다 버려야만 중도실상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지, 진리와 망상 어느 것에든지 집착한다면 전부가 다 병이므로 중도실상은 영원토록 모르는 것입니다. 양변을 다 버려서 쌍차(雙遮)가 되면 쌍조(雙照)가 안될래야 안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루면 영원토록 중도를 모르게 되니 자성을 깨치지 못하고 불법을 성취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64. 學人不了用修行    眞成認賊將爲子

학인불료용수행하니 진성인적장위자로다

배우는 사람이 잘 알지 못하고 수행하나니 참으로 도적을 아들로 삼는 짓이로다.

 

'배우는 사람이 잘 모르고 수행한다.'는 것은 망상을 버리고 진리를 취하려는 것과 같이 공부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참된 중도정견이 아니고 바른 길이 아니므로 그렇게 공부하면 어떻게 되느냐? 도적놈을 인정하여 자기 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버리고 망상을 취하려 하든지 망()을 버리고 진리를 취하려 하든지 간에 양변에 집착하기만 하면 변견이 되어서 불법과는 정반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중도를 정등각해서 바른 길로 가려면 진(), ()을 다 버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한쪽으로 집착만하면 도적놈을 자식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법을 절대로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진(), ()의 양변을 다 버리고 중도를 정등각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버리고 망을 취하거나 망을 버리고 진리를 취한다고 하는 그 취사심은 왜 생기는 것인가?

 

 

65.  損法財滅功德   莫不由斯心意識

손법재멸공덕 막불유사심의식이라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앰은 심, , 식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이라

 

'법의 재물을 손해내고 공덕을 없애는 병은 심, , 식에 있다'는 말입니다. ()은 제팔 아뢰야식, ()는 제칠 말라식, ()은 제육 의식을 말하는 것으로서 통팔식(通八識) 전체를 말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여 법의 재물을 성취하고 공덕을 완성시키려면 근본 장애물인 심, , 식의 근본을 뽑아 버려야지 이것이 조금이라도 붙어 있으면 절대로 공부를 성취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종에 있어서 공부라는 것이 심리학적으로 볼 때도 분별의식인 제육 의식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중간의 식인 제칠 말라식과 제팔 아뢰야식의 무기무심까지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심이 도라고 말하지 말라, 무심도 오히려 두터운 관문이 격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 망상을 버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기무심인 제팔 아뢰야식까지 완전히 버려야만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고 자성을 바로 깨친 것이며, 중도를 성취한 것입니다.

자성을 깨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심, , 식의 구름이 진여본성을 덮어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므로 이 심, , 식의 구름부터 걷어 버려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영원히 자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66. 是以禪門了却心    頓入無生知見力

시이선문료각심하고 돈입무생지견력이로다

그러므로 선문에선 마음을 물리치고 남이 없는 지견의 힘에 단박에 들어가도다.

 

마음[]이란 제팔 아뢰야를 말한 것인데 제팔 아뢰야 근본무명을 완전히 끊어버리면 제칠 말라식과 제육 의식은 자연히 끊어져 버리는 것이므로 마치 나무뿌리를 뽑아 버리면 가지나 잎은 저절로 말라 죽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선종에 있어서는 근본무명인 제팔 아뢰야인 심() 이것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아야지 그것을 뿌리 뽑기 전에는 공부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종에서는 깨쳤다고 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제팔 아뢰야식을 멸각하여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이니 제팔 아뢰야식을 뿌리 뽑기 전에는 절대로 깨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제팔 아뢰야식의 근본무명을 끊어버리면 '남이 없는 지견의 힘'에 들어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돈오(頓悟)며 증오(證悟)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종에서 주장하는 '남이 없는 지견''제팔 아뢰야 무기식을 다 부셔버리고 미세망상까지도 뿌리를 뽑아 버린 것'이므로 아직 분별심, 생멸심이 그래도 남아있는 것을 깨친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선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분별심은 말할 것도 없고 무분별심인 제팔 아뢰야 무기무심까지도 뿌리채 뽑아 버리면 '남이 없는 것[無生]'이 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즉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들어가는 것'이며, '마치 맑은 유리병 속에 보배달을 담은 것과 같은 것'이며, 중도실상이며, 견성이며, 구경각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부처님과 부처님, 조사와 조사가 전한 것이지 딴 것을 전한 것은 아닙니다.

 

 

67.  大丈夫秉慧劍     般若鋒兮金剛焰

대장부병혜검하니 반야봉혜금강염이로다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반야의 칼날이요 금강의 불꽃이로다.

 

대장부가 제팔 아뢰야 근본무명을 완전히 타파하고 진여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면 그때가 바로 출격대장부,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인 것입니다.

우리가 출격대장부가 되어서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하면 그 때는 대지혜의 검을 손에 잡게 된 때라는 것입니다.

반야의 칼날이란 칼날같이 서슬이 시퍼렇게 무섭고, 금강의 불꽃이란 불꽃처럼 맹렬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가 어리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성을 완전히 깨쳐서 무생법인을 증득하면 그 반야의 칼날이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살리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살리는 대자유로운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금강의 불꽃이란 부술래야 부술 수 없어서 부처도 손 댈 수 없고 조사도 손댈 수 없으며, 그런 동시에 시방세계를 다 태우는 맹렬한 불꽃보다 더 무서워서 부처와 조사도 거기에 어리댈 수가 없는 것이니 자칫 잘못하다간 부처와 조사가 상신실명(喪身失命)하는 곳입니다. 그러한 반야의 칼날과 금강의 불꽃을 성취하는 것은 남이 없는 지견의 힘에 단박에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68.  非但能摧外道心     早曾落却天魔膽

비단능최외도심이요 조증락각천마담이로다

외도의 마음만 꺾을 뿐 아니요. 일찍이 천마의 간담을 떨어뜨렸도다.

 

반야의 칼날과 금강의 불꽃이 되어 외도의 마음만 부숴버리는 것이 아니요 일찍이 천상의 마구니를 낙담시켰다는 것입니다. 또 외도와 천상의 마구니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과 조사도 여기서는 설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69.  震法雷擊法鼓   布慈雲兮灑甘露

진법뢰격법고 포자운혜쇄감로로다

법의 우뢰 진동하고 법고를 두드림이여 자비의 구름을 펴고 감로수를 뿌리는 도다.

 

'법의 우뢰가 진동한다'함은 하늘을 울리고 천지를 진동하는 사자후가 삼천대천세계를 뒤흔들고도 남는다는 것이며, '법의 북을 두두린다'는 것은 시방세계에 그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것입니다. '법의 북'이란 보통의 북이 아니라 '도독고(塗毒鼓)'라 하여 북에다 독을 잔뜩 발라서 누구든지 그 소리를 들으면 죽지 않는 중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생이 다 죽는다는 것은 중생의 근본무명이 다 끊어져서 모두가 부처가 된다는 말입니다.

법의 우뢰가 진동하고 법의 북이 울리면 일체 중생이 다 죽으니 그 때 모두가 부처가 되어 근본무명이 끊어지며 대자대비의 구름이 시방세계를 덮고 감로수가 시방세계에 뿌려져서 일체 중생이 해탈케 된다는 것입니다.

 

 

70. 龍象蹴踏潤無邊     三乘五性皆惺悟

용상축답윤무변하니 삼승오성개성오로다

용상이 차고 밟음에 윤택함이 그지없으니 삼승과 오성이 모두 깨치는 도다.

 

용과 코끼리는 짐승 중에서는 가장 수승한 것인데 중생 가운데 삼현(三賢), 십성(十聖)등의 훌륭한 이를 비유해서 말한 것입니다. 용과 코끼리가 감로수를 마시고 도독고의 소리를 들어 중생의 무명이 다 끊어져서 도를 이루고 열반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용과 코끼리가 서로 차고 밟는다.'는 것은 싸움한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붐빈다는 뜻으로 서로서로 발길을 부비고 내왕하여 활동한다는 것이며 '윤택하기 그지없다'는 것은 그 활동이 자유자재함을 말한 것입니다.

'삼승과 오성이 다 깨쳤다'는 것은 일체 중생이 성불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모두가 다 포함됩니다.

삼승(三乘)은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을 말합니다. 오성(五性)이란 원각경에서는 첫째 범부성(凡夫性)으로서 한 털끝만치도 미혹을 끊지 못한 사람을 말하며, 둘째 이승성(二乘性)으로서 성문, 연각의 이승을 말하며, 셋째 보살성(菩薩性)으로서 육도만행을 닦아서 성불한다는 사람을 말하며, 네째 부정성(不定性)으로서 범부라 할 수도 없고 이승이라 할 수도 없고 보살이라 할 수도 없는 사람을 말하며, 다섯째 외도성(外道性)으로서 외도의 삿된 말을 믿고 아직 불교의 바른 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원각경]에서는 이 오성(五性)의 사람들이 어쨌든 모두 성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가스님 말씀은 결국 외도든가 부정이든가 마구니든가 할 것 없이 북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고 감로수를 한 방울이라도 마시면 전체가 다 깨쳐 가지고 성도(成道)를 해 버린다는 말입니다. 곧 이 반야의 힘이 광대무변하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71.  雪山肥膩更無雜     純出醍醐我常納

설산비니갱무잡이라 순출제호아상납이로다

설산의 비니초는 다시 잡됨이 없어 순수한 제호를 내다 나 항상 받는도다.

 

비니란 히말라야산에서 나는 풀이름인데 천상천하에 그렇게 곱고 부드럽고 맛이 있는 풀이 없다고 합니다. 백우(白牛)가 있어 이 비니초만 먹고 산다는데 백우는 우리의 자성을 비니초란 진여대용을 비유한 것입니다.

 

설산의 비니초가 있는 곳에는 다른 풀이 하나도 없듯이 진여대용 가운데는 객진번뇌, 번뇌망상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이 볼 때는 잡초와 가시덤불만이 가득한데 어째서 비니초만 예를 들어서 말하느냐 하고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눈 감은 사람은 언제든지 캄캄하고 암흑뿐이라도 눈 뜬 사람이 볼 때는 모두가 밝고 밝은 광명뿐이기 때문입니다. 눈 감은 사람이 '어둡다'한다고 어두운 것이 있느냐 하면 어두운 것은 없으며, 어둡다고 하는 그 사람도 광명 속에 살면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둡다 어둡다'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방세계를 돌아봐도 비니초를 내놓고는 다른 풀이 없듯이 중생이 모두 진여의 대광명속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호란 지금의 치즈같은 것인데 비니초만 먹고 사는 흰 소의 젖을 짜서 최고로 맛 좋은 치즈로 만든 것을 제호상미(上味)라 합니다. 이것도 진여자성을 비유한 것으로 백우가 비니초를 먹고 내놓은 것을 제호상미라고 하니 모든 것이 진여뿐이고 진여자성을 제하고는 다른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시방세계를 둘러봐도 진여광명과 진여대용 뿐인데 그것을 이름하여 비니초 또는 제호상미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무상정각을 이룬 최상의 풀이요 최상의 불사약인 것입니다. 그러면 비니초를 먹고 사는 백우가 내놓은 제호상미를 먹고 사는 사람, 이런 사람은 어찌 되냐?

 

 

72. 一性圓通一切性    一法徧含一切法

일성원통일체성하고 일법변함일체법하니

한 성품이 뚜렷하게 모든 성품에 통하고 한 법이 두루하여 모든 법을 포함하나니

 

[화엄경]에도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만 영가스님이 자신의 깨 친 경계에서 보니 누구든지 자성을 완전히 깨칠 것 같으면 이처 럼 융통자재하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73. 一月普現一切水   一切水月一月攝

일월보현일체수 일체수월일월섭이로다

한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고 모든 물의 달을 한 달이 포섭하도다.

하늘에 있는 달은 하나뿐인데 이것이 천강만수(千江萬水)에 비치어서 달이 천개 만개가 되고, 그 천강만수(千江萬水)에 있는 달은 모두 하늘에 있는 달 하나가 거두워 잡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주변함용관(含容觀)과 같습니다. 주변이란 전체를 비추는 것을 말하며 함용(含容)이란, 사사무애(事事無碍)하여 참으로 원융자재한 것을 말하니 이것을 부사의해탈경계(不思議解脫境界)라 합니다.

누구든지 자성의 마니주를 확실히 알아서 중도를 성취하면 원융자재한 부사의해탈경계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과 조사가 이 부사의해탈경계인 중도정각을 성취한 것입니다.

 

 

74.  諸佛法身入我性    我性還共如來合

제불법신입아성하고 아성환공여래합이라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 들어오고 나의 성품이 다시 함께 여래와 합치하도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내 자성 가운데로 들어온다 하니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있는 것으로 안다면 큰 잘못입니다. 말로 표현 하자니 이렇게 말하는 것인데 내 자성이대로가 모든 부처님의 법신 이고, 모든 부처님의 법신 이대로가 내 자성이라는 말입니다. 자성이 즉 법신이고 법신이 즉 자성이라는 것입니다.

 

'내 자성이 여래와 합해 있다'하는 것은 서로서로 둘이 아니어서 부처가 곧 중생이고 중생이 곧 부처로서, 부처 내놓고 중생이 따로 없고 중생 내놓고 부처가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천상에 있는 달 내놓고 물에 비친 달이 따로 없고 물에 비친 달 내놓고 천상에 있는 달이 따로 없듯이, 중생이 곧 부처고 부처가 곧 중생 이며 법성(法性)이 즉 아성(我性)이고 아성이 즉 법성이라 서로 서로 원융자재해서 부사의해탈경계를 이루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75. 一地具足一切地    非色非心非行業

일지구족일체지하니 비색비심비행업이로다

한 지위에 모든 지위 구족하니 색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행업도 아니로다.

 

'하나가 곧 일체'라는 말을 한 번 더 강조하는 것입니다. '한지위에 모든 지위가 구족한다'하니 어떤 모양이 있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양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행업도 아니며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어서 일체 명상이 다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명상이 다 떨어지면 그것뿐이냐?

 

 

76.  彈指圓成八萬門     刹那滅却三祗劫

탄지원성팔만문하고 찰나멸각삼지겁이로다

손가락 퉁기는 사이에 팔만법문 원만히 이루고 찰나에 삼아승지겁을 없애버리도다.

 

'손가락을 퉁긴다.'는 것은 한가로운 모습으로 짧은 시간과 힘 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색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행업도 아니다'함은 쌍차(雙遮)한 데서 말한 것이고, 여기서 전부를 긍정한 쌍조(雙照)로써 대광명 의 세계를 말한 것입니다.

 

팔만사천법문이 여기에 원만구족하여 색도 있고 마음도 있고 중생도 있고 부처도 있고 천당도 있고 지옥도 있어서, 산은 산, 물은 물 그래도 완연하게 현저합니다. 현저하다고 하여 어떤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니고 무장애부사의법계(無障碍不思義法界) 속 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삼아승지겁이 없어져 버려서 시간과 공간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아니하고 대대(待對)가 끊어져서 결국에 가서는 절대(絶對)라 는 이름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로 하자니 어쩔 수 없이 이것을 부사의해탈경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77.  一切數句非數句 與吾靈覺何交涉

일체수구비수구 여오영각하교섭

일체의 수구와 수구 아님이여 나의 신령한 깨침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수구비수구(數句非數句)'[능가경]에 나오는 말로써 여러가지 불교의 법수(法數)를 많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수구비수구 '란 차별 법상(法相)을 나열한 것으로 그것은 중생을 위해서 부처님이 방편으로 이런 말씀 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실지 자성 을 깨친 분상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수구비수구'만 관계없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자성을 깨쳐놓고 보면 부처님이 설하시고 조사스님네가 설하신 팔만대장경과 천칠백 공안이 여기 와서는 모두 빙소와해(氷銷瓦解)로 소용없다 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부처와 조사도 여기 와서는 아무 교섭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활구(活句) 곧 산 법문을 바로 깨치고 보면 팔만대장경과 부처와 조사도 관계없고 공안도 관계없는 대열반의 활로를 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팔만대장경도 종기나 부스럼의 고름을 닦아낸 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성을 깨친 모습은 어떤 것인가?

 

 

78. 不可毁不可讚  體若虛空勿涯岸

불가훼불가찬  체약허공물애안

훼방도 할 수 없고 칭찬도 할 수 없음이여 본체는 허공과 같아서 한계가 없도다.

 

깨달음의 세계는 부처와 조사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니 오직 증득해야만 알지 증득하지 않고서는 모르는 것이며, 또한 물을 먹어 봐야만 물의 덥고 차가운 것을 알 수 있듯이 깨치지 못한 사람은 깨친 소식을 영원히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칭찬해야 되겠느냐, 욕을 해야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그러나 깨달음의 세계는 비방하여 반대할 수도 없고 칭찬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무슨 명상(名相)이 있어 야만 욕을 하거나 칭찬을 할 수 있는 것인데 일체 명상이 다 떨어졌는데 어찌 거기 가서 칭찬할 수 있으며 욕을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삼세의 부처님들이 일시에 출현해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찬탄한다 해도 이것을 털끝만큼도 찬탄할 수 없고 시방세계 전체가 마구니 입이 되어 미래겁이 다하도록 욕을 한다하여도 털끝만큼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명상이 다 떨어진 곳이 과연 어떤 것이냐 하면 '본체가 허공과 같아서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성은 마치 허공이라 어떤 명상도 없어서 무엇을 붙잡을 수도 없고 보고 욕을 할 수도 칭찬을 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즉 허공이란 누구든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고 기와 끝이 없어서 무한하다고 하나 무한하다는 그런 명상조차도 붙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성을 바로 깨치면 이것을 소개하여 칭찬하려고 해도 칭찬할 수 없고 마구니가 아무리 이것을 욕하려고 해도 욕할 수 없으니 그것은 실제로 허공과 같이 명상이 다 떨어지고 시간과 공간이 끊어져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억지로 진()이 라 하기도 하고 자성(自性)이라 하기도 하고 불성(佛性)이라 하기도 하고 부처[]라 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여기에 하나도 해당이 되지 않는 말들이라는 것입니다.

 

 

79. 不離當處常湛然     覓則知君不可見

불리당처상담연하니 멱즉지군불가견이로다

당처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니 찾은 즉 그대를 아나. 볼 수는 없도다.

 

우리가 일상 행(),(), (), ()에서 이 물건을 떠날 래야 떠날 수 없고 언제든지 이 가운데서 살고 있으면서도 진리 의 광명은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지 항상 그 광명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처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다'는 것입니다. 담연(湛然)이란 청정하여 때가 없는 것을 말합 니다. 진여자성이란 일체 중생인 유정(有情), 무정(無情)인이 다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항상 청정하여 때가 없습니다. '찾은 즉 그대를 아나. 볼 수는 없다' 함은, 찾으면 분명히 알지만 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배고프면 밥 달라하고 추우면 옷 달라고 하니 분명히 알지만 그 자체를 찾아보려고 하면 미래겁 이 다하도록 찾아도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찾은 즉 그대를 안다'는 것은 쌍조(雙照)를 말한 것으로 진여 대용이 그대로 있으니 분명히 알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쌍차(雙 遮)가 되어서 일체 명상이 다 끊어졌기 때문에 볼래야 볼 수 없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이차(照而遮)하고 차이조(遮而照)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을 '모든 것이 다 청정무구(淸淨無垢)하여 일체 망상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그걸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 볼 수 없다'고 해석하는데, 그렇게 되면 명상이 끊어진 것만 가지고 주장하게 되는 것으로서 쌍차쌍조(雙遮雙照)한 중도정견은 아닙니다.

혜가스님이 '밝고 밝게 항상 아니, 말로써 미칠 수 없다[了了常知言之不可及]'는 말씀과 같으니 거기에서 해가스님은 달마스님에게서 인가를 받았던 것입니다.

'밝고 밝게 항상 안다'는 것은 곧 '찾은 즉 그대를 안다'는 것 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말로써 미칠 수 없다'는 것은 모든 명상이 다 끊어져서 말할래야 말할 수 없고 볼래야 볼 수 없으며 들을래야 들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석해야만 쌍차쌍조 한 차조동시가 되어 전체가 다 드러나서 중도정견이 되지만 그렇지 않고 '찾으려 해도 볼 수 없다'고 하면 이것은 바른 해석이 아니라 변견적인 해석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80. 取不得捨不得    不可得中只嚰得

취부득사부득하니 불가득중지마득이로다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나니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얻을 뿐이로다.

 

모든 명상이 다 떨어진 진여자성에서는 한 명상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취할래야 취할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명상이 다 떨어졌다는 것 뿐만 아니라 삼라만상 전체가 허 공속에 건립되어 있지만, 허공은 잡을래야 잡을 수 없고 버릴래 야 버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이 뜻은 모든 명상 이 본래 공한 것을 나타낸 것이니, 앞 귀절의 '당처를 여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 없는 거기에서 그치고 만다면 일종의 단견에 떨어지게 되므로 중도정견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중도정견이 되느냐?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니 '찾은 즉 그대를 아나. 볼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찾아보면 분명 하게 역력히 항상 알 수 있지만 모든 명상이 다 떨어져서 생각할 래야 생각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할래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불교의 근본인 중도정견이 확립되는 것이지 만약 '취할래야 취할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다'는 여기에 만 치우쳐 해석하게 되면 실지로 정견이 아니고 변견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취할래야 취할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운데 분명히 이렇게 할 수 있다'고 하여야만 위 귀절의 바른 해석입니다.

 

 

 

81. 默時說說時默    大施門開無壅塞

묵시설설시묵이요 대시문개무옹색이라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 없음이여 크게 베푸는 문을 여니 옹색함이 없도다.

 

82. 有人問我解何宗     報道摩訶般若力

유인문아해하종하면 보도마하반야력하리라

누가 나에게 무슨 종취를 아느냐고 물으면 마하반야의 힘이라고 대답해 주리라.

 

 

 

 

83. 或是或非人不識     逆行順行天莫測

혹시혹비인불식이요 역행순행천막측이라

혹은 옳고 혹은 그릇됨을 사람이 알지 못하고 역행. 순행은 하늘도 헤아리지 못하도다.

 

 

 

 

84.  吾早曾經多劫修     不是等閑相誑惑

오조증경다겁수이니 불시등한상광혹이라

나는 일찍이 많은 지나며 수행하였으니 부질없이 서로 속여 미혹케 함이 아니로다.

 

 

 

 

85. 建法幢立宗旨   明明佛勅曹溪是

건법당입종지 명명불칙조계시로다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일으킴이여 밝고 밝은 부처님법 조계에서 이었 도다.

 

 

 

 

86. 第一迦葉首傳燈     二十八代西天記

제일가섭수전등이니 이십팔대서천기

첫번째로 가섭이 맨 먼저 등불을 전 하니 이십팔대는 서천의 기록이로다.

 

 

 

 

87. 法東流入此土   菩提達磨爲初祖

법동류입차토 보리달마위초조

법이 동쪽으로 흘러 이 땅에 들어와서는 보리달마가 첫 조사 되었도다.

 

 

 

 

88.  六代傳衣天下聞  後人得道何窮數

육대전의천하문 후인득도하궁수

육대(六代)로 옷 전한 일 천하에 소문났고 뒷사람이 도 얻음을 어찌 다 헤아리랴.

 

 

 

 

89.  眞不立妄本空     有無俱遣不空空

진불립망본공이여 유무구견불공공이라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 공함이여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니 공하지 않고 공하도다.

 

 

 

 

90.  二十空門元不著     一性如來體自同

이십공문원불착하니 일성여래체자동이라

이십공문(二十空門)에 원래 집착하지 않으니 한 성품 여래의 본체와 저절로 같도다.

 

 

 

 

91.  心是根法是塵     兩種猶如鏡上痕

심시근법시진이니 양종유여경상흔이라

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둘은 거울 위의 흔적과 같음이라.

 

 

 

 

92.  痕垢盡除光始現     心法雙亡性卽眞

흔구진제광시현이고 심법쌍망성즉진이라

흔적인 때 다하면 빛이 비로소 나타나고 마음과 법 둘 다 없어지면 성품이 곧 참되도다.

 

 

 

 

93. 嗟末法惡時世     衆生薄福難調制

차말법악시세하니 중생박복난조제로다

말법을 슬퍼하고 시세를 미워하노니 중생의 복 얇아 조복받기 어렵도다.

 

 

 

 

94.  去聖遠兮邪見深     魔强法弱多怨害

거성원혜사견심이요 마강법약다원해로다

성인 가신 지 오래고 사견이 깊어짐이여 마구니는 강하고 법은 약하여 원해(怨害)가 많도다.

 

 

 

 

95.  聞說如來頓敎門      恨不滅除令瓦碎

문설여래돈교문하여도 한불멸제령와쇄로다

여래의 돈교문 설교를 듣고서는 부숴 없애버리지 못함을 한탄 하는도다.

 

 

 

 

96.  作在心殃在身     不須怨訴更尤人

작재심앙재신하니 불수원소갱우인이로다

지음은 마음에 있으나 재앙은 몸으로 받나니 모름지기 사람을 원망하고 허물치 말지어다.

 

 

 

 

97. 欲得不招無間業     莫謗如來正法輪

욕득불초무간업인데 막방여래정법륜이로다

무간지옥의 업보를 부르지 않으려거든 여래의 바른 법륜을 비방하지 말아라.

 

 

 

 

98. 旃檀林無雜樹     鬱密深沈師子住

전단림무잡수하니 울밀심침사자주

전단향나무 숲에는 잡나무가 없으니 울창하고 깊숙하여 사자가 머무는도다.

 

 

 

 

99. 境靜林閒獨自遊     走獸飛禽皆遠去

경정림한독자유하니 주수비금개원거이라

경계고요하고 숲 한적하여 홀로 노니니 길짐승과 나는 새가 모두 멀리 달아나도다.

 

 

 

 

100.  師子兒衆隨後  三歲卽能大哮吼

사자아중수후  삼세변능대효후

사자 새끼가 사자 무리를 뒤따름이여 세 살에 곧 크게 소리치는도다.

 

 

 

 

101.  若是野干逐法王  百年妖怪虛開口

약시야간축법왕  백년요괴허개구

여우가 법왕을 쫓으려 한다면 백년 묵은 요괴가 헛되이 입만 엶이로다.

 

 

 

 

102. 圓頓敎人情    有疑不決直須爭

원돈교몰인정이니 유의불결직수쟁이로다

원돈교는 인정이 없나니 의심 있어 결정치 못하거든 바로 다툴 지어다.

 

 

 

 

103.  不是山僧逞人我   修行恐落斷常坑

불시산승영인아 수행공낙단상갱이로다

산승이 인아상을 들어냄이 아니요 수행타가 단().()의 구덩이에 떨어질까 염려함이로다.

 

 

 

 

104.  非不非是不是   差之毫釐失千里

비불비시불시 차지호리실천리

그름과 그르지 않음과 옳음과 옳지 않음이여 털끝만큼 어긋나도 천리길로 잃으리로다.

 

 

 

 

105.  是卽龍女頓成佛    非卽善星生陷墜

시즉용녀돈성불이요 비즉선성생함추

옳은 즉 용녀가 단박에 성불함이요 그른 즉 선성(善星)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짐이로다.

 

 

 

 

106.  吾早年來積學問    亦曾討疏尋經論

오조년래적학문하야 역증토소심경론이로다

나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쌓아서 일찍 주소를 더듬고 경론을 살폈도다.

 

 

 

 

107.  分別名相不知休  入海算沙徒自困

분별명상부지휴 입해산사도자곤이라

이름과 모양 분별함을 쉴 줄 모르고 바다속 모래 헤아리듯 헛되이 스스로 피곤하였도다.

 

 

 

 

108.  却被如來苦呵責     數他珍寶有何益

각피여래고가책하니 수타진보유하익

문득 여래의 호된 꾸지람을 들었으니 남의 보배 세어서 무슨 이익 있을 건가.

 

 

 

 

109.  從來蹭蹬覺虛行    多年枉作風塵客

종래층등각허행하니 다년왕작풍진객이로다

예전엔 비칠거리며 헛된 수행하였음을 깨달으니 여러 해를 잘못 풍진객(風塵客) 노릇 하였도다.

 

 

 

 

110.  種性邪錯知解    不達如來圓頓制

종성사 착지해 부달여래원돈제로다

성품에 삿됨을 심고 알음알이 그릇됨이여 여래의 원돈제(圓頓制)를 통달치 못함이로다.

 

 

 

 

111.  二乘精進勿道心    外道聰明無智慧

이승정진물도심이요 외도총명무지혜

이승은 정진하나 도의 마음이 없고 외도는 총명해도 지혜가 없도다 

* 二乘 : 대승(大乘)과 소승(小乘),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 성문승(聲聞僧)과 보살승(菩薩僧)을 아울러 이르는 말.

 

 

 

 

112. 亦愚癡亦小駭    空拳指上生實解

역우치역소애이니 공권지상생실해로다

우치하고도 겁이 많으니 빈주먹 손가락 위에 실다운 견해를 내는도다.

 

 

 

 

113.  執指爲月枉施功    根境塵中虛捏怪

집지위월왕시공하고 근경법중허날괴로다

손가락을 달로 집착하여 잘못 공부하니 육근. 육경. 육진 가운데서 헛되이 괴이한 짓 하는도다.

 

 

 

 

114.  不見一法卽如來    方得名爲觀自在

불견일법즉여래이니 방득명위관자재이라

한 법도 볼 수 없음이 곧 여래니 바야흐로 이름하여 관자재라 하는도다.

 

 

* 觀自在 : 번뇌와 집착에서 벗어나 사물의 모습이 자유자재로 바르게 보임을 이르는 말.

 

 

 

 

115. 了卽業障本來空     未了還須償宿債

요즉업장본래공이요 미요환수상숙채

마치면 업장이 곧 공함이요 마치지 못하면 도리어 묵은 빚 갚으리로다.

 

 

 

 

116.  飢逢王膳不能飡    病遇醫王爭得差

기봉왕선불능손하니 병우의왕쟁득차

굶다가 임금 수라 만나도 먹을 수 없으니 병들어 의왕 만난들 어찌 나을 수 있으랴.

 

 

 

 

117.  在欲行禪知見力    火中生蓮終不壞

재욕행선지견력하니 화중생련종불괴로다

욕망 속에서 참선하는 지견의 힘이여 불 속에서 연꽃 피니 끝내 시들지 않 는도다.

 

 

 

 

118.  勇施犯重悟無生    早是成佛于今在

용시범중오무생하니 조시성불우금재로다

용시비구는 중죄 짓고도 남이 없는 법을 깨달으니 벌써 성불하여 지금에 있음이로다.

 

 

 

 

119.  師子吼無畏說    深嗟慒懂頑皮靼

사자후무외설이여 심차종동완피단이라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어리석은 완피단을 몸시 슬퍼하는도다.

 

 

 

 

120.  只知犯重障菩提  不見如來開秘訣

지지범중장보리  불견여래개비결

중죄 범하면 보리를 막는 줄만 알 뿐 여래께서 비결 열어 두심은 보지 못 하도다.

 

 

 

 

121.  有二比丘犯淫殺  波離螢光增罪結

유이비구범음살  파리형광증죄결

어떤 두 비구 음행과 살생 저지르니 우바리의 반딧불은 죄의 매듭 더하였고

 

 

 

 

122.  維摩大士頓除疑  還同赫日消霜雪

유마대사돈제의  환동혁일소상설

유마대사 단박에 의심을 없애줌이여 빛나는 해가 서리 눈 녹임과 같도다.

 

 

 

 

123.  不思議解脫力  妙用恒沙也無極

부사의해탈력  묘용항사야무극

부사의(不思議)한 해탈의 힘이여 묘한 작용 항하사 같아 다함없도다.

 

 

 

 

124.  四事供養敢辭勞  萬兩黃金亦銷得

사사공양감사로  만냥황금역소득

네 가지 공양을 감히 수고롭다 사양하랴. 만양(萬兩) 황금이라도 녹일 수 있도다.

 

 

 

 

125.  粉骨碎身未足酬   一句了然超百億

분골쇄신미족수 일구요연초백억이라

뼈가 가루되고 몸이 부숴져도 다 갚을 수 없나니 한 마디에 요연히 백억 법문을 뛰어 넘도다.

 

 

 

 

126.  法中王最高勝  沙如來同共證

법중왕최고승  항사여래동공증

법 가운데 왕 가장 높고 수승함이여 항하사같이 많은 여래가 함께 증득 하였도다.

 

 

 

 

127.  我今解此如意珠  信受之者皆相應

아금해차여의주  신수지자개상응

내 이제 이 여의주를 해설하오니 믿고 받는 이 모두 상응하리도다.

 

 

 

 

128 了了見無一物  亦無人兮亦無佛

요요견무일물  역무인혜역무불

밝고 밝게 보면 한 물건도 없음이여 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129.  大千世界海中漚   一切聖賢如電拂

대천세계해중구 일체성현여전불이라

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이요 모든 성현은 번갯불 스쳐감과 같도다.

 

 

 

 

130.  假使鐵輪頂上旋      定慧圓明終不失

가사철륜정상선이라도 정혜원명종부실이라

무쇠바퀴를 머리 위에서 돌릴지라도 선정과 지혜가 두렷이 밝아 끝내 잃지 않는도다.

 

 

 

 

131.  日可冷月可熱  衆魔不能壞眞說

일가냉월가열  중마불능괴진설

해는 차게 하고 달은 뜨겁게 할지언정 뭇 마구니가 참된 말씀 부술 수 없도다.

 

 

 

 

132.  象駕崢嶸漫(嶸謾)進途  誰見螳螂能拒轍

상가쟁영만진도         수견당랑능거철

코끼리 수레 끌고 위풍당당히 길을 가거니 버마재비 수레길을 막는 걸 누가 보겠는가.

 

 

 

 

133.  大象不遊於兎徑     大悟拘於小節

대상불유어토경이요 대오불구어소절이라

큰 코끼리는 토끼 길에 노닐지 않고 큰 깨달음은 작은 절개에 구애되지 않나니

 

 

 

 

134.  莫將管見謗蒼蒼    未了吾今爲君()

막장관견방창창하라 미요오금위군결이라

대통같은 소견으로 창창히 비방하지 말라. 알지 못하기에 내 이제 그대 위해 결단해 주는도다. ()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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