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ㅁ-2 만수무강~ )
11. 만수무강(萬壽無疆) 万寿无疆
萬年을 살아도 壽命이 끝이 없다. 長壽를 祝願하는 人事말이다.
二之日鑿冰冲冲 : 섣달에는 탕탕 얼음을 깨어
三之日納於凌陰 : 正月에는 얼음 倉庫에 넣지
四之日其蚤 : 二月에는 이른 아침 일어나
獻羔祭韭 : 염소와 부추로 祭祀 지내
九月肅霜 : 九月엔 된서리 내리고
十月滌場 : 十月엔 打作 마당 치운다네
朋酒斯饗 : 술 두어 桶 받아 잔치 벌이고
曰殺羔羊 : 염소와 羊을 잡아
躋彼公堂 : 저 公堂(임금 계신 곳)에 올라
稱彼兕觥 : 뿔 술잔을 높이 들어
萬壽無疆 : 임금님의 만수무강 祈願하네.
《詩經 · 빈풍(豳風) 七月》 154. 七月(칠월)-詩經 豳風(시경 빈풍)
이 詩는 豳 地域 農民들의 歲時風俗과 農村의 情景을 노래한 것이다. 詩 原文의 ‘二之日’은 豳 地域의 曆法으로 10月 以後의 두 番째 달, 即 섣달을 말하며, ‘三之日’은 세 番째 달, 즉 正月을 말한다.
12. 만전지책(萬全之策) 万全之策
萬全을 期하는 計策. 아주 安全하거나 完全한 計策을 말한다.
後漢 末期, 建安 5年(201) 曹操의 軍隊와 北方 最大의 實力者인 袁紹의 軍隊가 官渡에서 擊突했다. 袁紹의 軍隊는 10如 萬 名이었고, 曹操의 軍隊는 1萬如 名밖에 되지 않았다. 數的으로는 曹操의 軍隊가 絶對 劣勢에 處해 있었지만 白馬의 싸움에서 袁紹의 名將인 顔良과 文醜를 죽이는 等(政事에는 文醜를 누가 죽였는가에 대한 記錄은 없다.《三國演義》에서는 關羽가 죽인 것으로 되어 있지만, 實際로는 混戰 中에 누군가에 依해 죽었다) 袁紹에게 큰 打擊을 입혔다.
袁紹는 兵力에서는 絶對 優位에 있었지만 形勢가 決코 有利하지만은 않다고 判斷하고 荊州의 劉表에게 支援을 要請했다. 劉表는 말로는 도와주겠다고 하고는 팔짱을 끼고 觀望만 하고 있었다. 劉表의 部下인 韓嵩과 劉先이 進言했다.
「“曹操는 반드시 袁紹를 擊破하고, 그다음엔 우리를 攻擊해 올 것입니다. 우리가 觀望만 하고 있으면 兩쪽의 怨恨을 사게 됩니다. 그러므로 强한 曹操를 따르는 것이 賢明한 萬全之策이 될 것입니다.
(曹操必破袁紹, 後來攻吾等矣. 吾等留觀望, 將受怨於兩便, 故隨强操, 賢且爲萬全之策矣.)”」
그러나 優柔不斷했던 劉表는 決斷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마침내 官渡의 싸움에서 勝利한 曹操에게 荊州를 빼앗기고 말았다.
(劉表 死後, 그의 뒤를 이은 아들 劉琮이 曹操에게 降伏을 했다.)
* 後漢書 劉表傳에.
13. 망국지음(亡國之音) 亡国之音
나라를 망하게 하는 音樂. 淫亂하고 사치(奢侈)한 音樂과 亡한 나라의 音樂, 그리고 지나치게 애조(哀調)를 띤 音樂을 말한다.
「音樂은 사람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感情이 마음에서 움직이면 이로 因해 소리로 나타난다. 소리가 文彩를 이룬 것을 音樂이라고 한다. 따라서 世上이 잘 다스려진 時代의 音樂은 便安하고 즐거우며, 나라 政治도 調和를 이룬다. 어지러운 時代의 音樂은 怨望과 憤怒로 차 있으며, 나라 政治도 바르지 않다. 나라를 亡하게 하는 音樂은 슬픈 마음이 일어나게 하고, 그 百姓들을 困窮하게 한다.
(凡音者, 生人心者也. 情動於中, 故形於聲, 聲成文, 謂之音. 是故治世之音, 安以樂, 其政和. 亂世之音, 怨以怒, 其政乖. 亡國之音, 哀以思, 其民困.)」
* 禮記 樂記에 나온다.
《韓非子 十過》에도 ‘亡國之聲’ 이라는 말이 나온다. 韓非子는 여기에서 王이 政治를 잘못해 나라를 亡치는 열 가지 過失을 列擧하고 있는데, 그中 네 番째 過失인 “統治에 힘쓰지 않고 五音을 좋아하는 것은 自身을 末路로 가게 하는 일이다.
(四曰不務聽治而好五音, 則窮身之事也.)”를 說明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例로 들었는데, 여기에 ‘亡國之音’과 같은 말인 ‘亡國之聲’이 나온다.
「옛날 衛나라 靈公이 晉나라로 가던 途中 濮水 附近에서 留宿하게 되었다. 밤中에 어디선가 북소리와 거문고 소리가 들려왔는데, 前에 들어 보지 못했던 새로운 曲이었다. 魏靈公은 사람을 시켜 左右에 물어보았다. 모두들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靈公은 師涓을 불러 그 音樂을 익히도록 했다. 師涓은 하루를 더 묵으면서 音樂을 익혔다. 다음 날 師涓은 曲調를 다 익히고 晉나라로 갔다.
晉平公이 잔치를 베풀고 魏靈公을 對接했다. 서로 술이 얼근히 醉했을 때, 魏靈公이 일어나 말했다. “새로운 音樂이 있는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晉平公이 좋다고 했다. 師涓을 불러 師曠의 옆에 앉게 했다. 師涓과 晉의 樂師長 師曠이 臺로 올라 같이 앉고서, 師涓이 거문고를 타기 始作했다. 그러나 演奏가 끝나기도 前에 師曠이 거문고를 손으로 덮으며 말했다. “이는 亡國의 音樂이므로 彈奏해서는 안 됩니다.
(此亡國之聲, 不可遂也.)” 平公이 왜냐고 묻자 師曠이 말했다. “이는 師延이 紂王을 爲해 만든 것인데, 柔弱하고 脈 빠지는 音樂입니다. (靡靡之樂.) 武王이 紂王을 쳤을 때 師延은 거문고를 안고 東쪽으로 달아나다가 濮水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音樂을 들었다면 分明 濮水에서였을 것입니다. 이 音樂을 들으면 必히 나라가 亡하게 되니 彈奏하면 안 됩니다.”」
師延은 殷나라 紂王 때의 樂工이다
14. 망매지갈(望梅止渴)
梅花나무를 바라보며 渴症을 그치게 하다. 想像을 通해 마음의 慰安을 삼거나, 빈말로 남의 欲求를 充足시켜 希望을 줄 뿐 實際로는 問題를 解決하지 못하는 것을 比喩
「魏武帝(曹操)가 軍士들을 거느리고 行軍을 하는데, 水源을 찾아내지 못해 兵士들이 飢渴에 허덕였다. 曹操는 꾀를 내어 兵士들을 向해 외쳤다. “저 山 너머에 梅花나무 숲이 있는데 열매가 엄청 많다. 새콤달콤해서 渴症을 풀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兵士들은 입에서 침이 돌아 渴症이 解消되어 繼續 앞으로 나아가 水源을 찾아내었다.
(魏武行役失汲道, 軍皆渴, 乃令曰, 前有大梅林, 饒子, 甘酸可以解渴. 士卒聞之, 口皆出水, 乘此得及前源.)」
이 이야기는 《世說新語 假譎》에 나온다. 그런데《三國演義》에서는 曹操가 劉備에게 이야기해 주는 形式으로 나온다.
劉備가 曹操에게 몸을 依託하고 있을 때, 하루는 曹操가 劉備를 불러 자리를 함께하고는 손을 잡으며 “조금 前 後園의 梅實이 익은 것을 보니 張繡를 征伐할 때의 記憶이 나서 그대와 함께 談笑하며 술이나 마시자고 불렀소.”라고 말하면서, 이 이야기를 劉備에게 들려줬다. 이 場面은 《三國演義》第21回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하루는 關羽와 張飛는 없고 玄德은 後園에서 菜蔬에 물을 주고 있는데, 許褚와 張遼가 數十 名을 데리고 後園으로 들어와 말했다. “丞相의 命이오. 빨리 가 보시오.” ······ 曹操가 말했다. “마침 가지 끝에 梅實이 푸른 것을 보니 갑자기 昨年 張繡를 칠 때가 생각이 나는구려. 길에서 물이 떨어져 將卒들이 모두 飢渴에 허덕였소. 그래서 내가 마음속에 한 가지 計策을 생각해내어 채찍으로 虛空을 가리키며 말했소. ‘앞에 梅花나무 숲이 있다.’ 軍士들이 내 말을 듣고 모두 입에 침이 생겨 목마르지 않게 되었다오. 오늘 이 梅花를 보니 感賞하지 않을 수가 없구려. 마침 술을 데워 따뜻해져 그대를 이 亭子에서 만나자고 招請한 것이라오.” (一日, 關張不在, 玄德正在後園襓菜, 許褚張遼引數十人入園中曰, 丞相有命, 請使君便行. ······ 操曰, 適見枝頭梅子靑靑, 忽感去年征張繡時, 道上缺水, 將士皆渴. 吾心生一計, 以鞭虛指曰, 前面有梅林. 軍士聞之, 口皆生唾, 由是不渴. 今見此梅, 不可不賞. 又値煮酒正熟, 故邀使君小亭一會.)」
以上의 典籍에서 ‘梅花를 바라보며 渴症을 그치게 하다.’라는 뜻의 ‘望梅止渴’이 由來했다.
15. 망양보뢰(亡羊補牢) 亡羊补牢
羊을 잃고서 우리를 고치다. 일을 失敗한 뒤에 바로 收拾을 하면 그래도 늦지는 않다는 것을 比喩
戰國 時代, 楚나라의 襄王이 酒色에 빠져 政事를 돌보지 않자 國勢가 날로 衰弱해져 갔다. 莊辛이 襄王에게 여러 차례 諫言했지만 襄王은 듣지 않고 오히려 火를 내며 莊辛을 꾸짖기만 했다. 莊辛은 할 수 없이 楚나라를 떠나 몸을 避身했다. 5個月 後 秦나라가 楚나라를 侵攻하여 都城까지 짓밟았다. 襄王은 城陽으로 달아났다. 襄王은 그제야 張辛의 忠告가 옳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불러들였다.
張辛이 돌아오자 襄王은 親切히 그를 맞이하면서 말했다. “寡人이 애當初 그대의 말을 들었다면 오늘 이 地境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오. 이제 寡人이 어찌하면 좋겠소?” 張辛이 對答했다. “臣은 일찍이 이런 俗談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토끼를 發見하고 나서 사냥개를 돌아봐도 늦지 않고, 羊을 잃은 後에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다.’고 말입니다.(臣聞鄙語曰, 見菟而顧犬, 未爲晩也. 亡羊而補牢, 未爲遲也.) 옛날에 湯王과 武王은 百 里의 땅에서 나라를 일으켰고, 桀王과 紂王은 天下를 가지고도 滅亡했습니다. 只今 楚나라는 비록 작긴 하지만, 긴 것을 잘라 짧은 것을 기우면(絶長續短) 그래도 數千 里의 땅이 있으니 어찌 百 里의 땅과 比較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戰國策 楚策》에 나온다. 여기에서 使用한 ‘菟’는 ‘兎’의 楚나라 方言이다.
16. 망운지정(望雲之情) 望云之情
구름을 바라보는 情. 子息이 客地에서 父母를 그리는 情을 말한다.
「唐나라 測天武后 時代의 狄仁傑이 幷州의 法曹參軍으로 任命되어 赴任했다. 當時 그의 父母는 河陽의 別莊에 있었는데, 狄仁傑은 父母님이 그리울 때마다 太行山에 올라 외롭게 떠다니는 흰 구름을 보면서 周邊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우리 父母님의 집이 저 아래 있겠지.” 그렇게 오랫동안 슬픈 모습으로 구름을 쳐다보다가 구름이 걷히면 그곳을 떠났다.
(薦授幷州法曹參軍. 親在河陽, 仁傑登太行山, 反顧, 見白雲孤飛, 謂左右曰, 吾親舍其下. 瞻悵久之, 雲移乃得去.)」
이 이야기는 《新唐書 狄仁傑傳》에 나오는데, 이 이야기에서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며 父母를 그리워한다는 뜻의 ‘望雲之情’이 나왔고,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며 그 구름 아래 계실 父母를 그리워한다는 뜻의 ‘白雲親舍’도 나왔다.
17. 망자재배(芒刺在背)
가시가 등에 박히다. 周圍에 꺼리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어 不安하거나 마음이 便치 않거나, 어떤 일을 圖謀하면서 周邊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比喩
霍光은 漢武帝 때 匈奴 征伐에 功을 세운 驃騎將軍 霍去病의 異腹同生으로, 漢武帝를 섬겨 大司馬大將軍 博陸侯에 올랐다. BC87年, 漢武帝가 世上을 떠나자 霍光은 遺詔를 받들어 8歲의 어린 昭帝를 세우고, 昭帝의 異腹兄인 燕王 丹의 反亂을 鎭壓한 後 政權을 掌握했다. 昭帝가 21歲의 나이로 世上을 떠나자 霍光은 漢武帝의 孫子인 昌邑王 劉賀를 皇帝로 세웠다가 그가 行實이 淫亂하다는 理由로 廢하고, 漢武帝의 曾孫子인 劉詢을 帝位에 앉혔는데, 이이가 바로 成語 ‘芒刺在背’의 主人公 宣帝 이다. 宣帝는 하늘을 찌를 듯한 權力을 가진 霍光을 내심 두려워했다.
「宣帝가 卽位한 다음 宗廟社稷에 告하기 爲해 行次할 때 大將軍 霍光이 陪乘하여 護衛했다. 宣帝는 수레 안에서 甚히 不安해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마치 등에 가시가 박힌 것과 같았다.
(宣帝始立, 謁見高廟, 大將軍光從驂乘, 上內嚴憚之, 若有芒刺在背.)」
霍光은 自己 딸을 宣帝의 皇后로 삼게 했지만, BC68年 霍光이 世上을 떠나자 宣帝는 그의 一族을 모두 處刑해 버렸다.
이 이야기는 《漢書 霍光傳》에 나온다. ‘芒刺在背’는 이와 같이 힘을 가진 사람을 두려워하여 마음이 不安하다는 뜻으로 쓰이며, 어떤 일을 圖謀하면서 周邊의 눈치를 살핀다는 뜻으로도 使用되고 있다.
18. 망탁조의(莽卓操懿)
중국 역사에서 왕망(王莽), 동탁(董卓), 조조(曹操), 사마의(司馬懿) 네 인물을 묶어 부르는 표현으로, 한·후한 말기와 삼국지 시대의 난세를 만든 인물들을 가리키는 용례가 확인된다.
中國 歷史上 漢나라 以後부터 趙. 魏 때까지의 4名의 逆賊(當時 基準에서 逆賊. 只今은 權臣)을 가리키는 歷史 用語다. 그들은 왕망(王莽), 동탁(董卓), 조조(曹操), 사마의(司馬懿). 莽卓操懿는 이 4名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말이다. 唐나라 사람 趙璘의 著書 '因話錄'에 처음 登場하는 表現으로 '宋史'에도 같은 表現이 나온다.
이 네 사람 모두 一旦 表面的으로는 自身이 태어나 자라고 俸祿을 먹던 國家를 무너뜨리려 한 者들로, 王莽은 禪讓의 始祖, 더 正確히 말하자면 '簒奪의 始祖'로 이들 中에서 唯一하게 살아있는 동안에 皇帝가 되었다. 董卓은 皇帝를 노렸으나 憲帝의 禪讓이라는 미끼에 걸려 結局 죽음을 當했고 曹操와 司馬懿는 自身의 生前에는 皇帝가 되지 않았으나 그 子孫들이 皇帝가 되면서 皇帝로 追尊 되었다.
結局 이 莽卓操懿 4名은 後世 사람들에게 逆賊에 對한 基準이자 代名詞가 되어서, 누군가가 逆謀를 꾸미거나 或은 맘에 안드는 누군가를 말할 때 반드시 튀어나오는 말이 되었다. 이 構成에서 實際 簒奪은 못한 董卓을 빼고 東晉의 權臣이었던 桓溫을 追加하여 '莽操懿溫'이라고 부르는 境遇도 있다.
1) 王莽
前漢의 官僚로 平帝를 毒殺하고 꼭두각시, 허수아비 皇帝였던 劉嬰에게 形式的인 禪讓을 받아 前漢을 무너뜨리고 新나라를 세웠다.
이미 그는 劉嬰 卽位했을 때 假皇帝와 攝皇帝를 稱하고 그렇게 부르게 했으며 結局 新나라를 세워 百姓들을 塗炭에 빠뜨리고 結局에는 各地에 勢力들이 亂立하게 만들었다. 結局에는 更始帝 劉玄의 攻擊을 받아 長安 漸臺에서 죽음을 當하고 屍身은 數千 갈래로 찢어졌으며 梟首되었다. 더 悲慘한 것은 百姓들이 머리를 때리고 혀를 잘라 베어먹었다. 餘談으로 平帝의 皇后였던 王莽의 딸 黃皇室主는 33살 나이에 불타는 建物 속에 들어가 自殺했고 王莽의 祖上들과 親戚들의 무덤은 모두 파헤쳐졌으며 一族들은 모두 歿殺되는 等 끝이 매우 좋지 못했다.
2) 董卓
後漢 末 十常侍의 亂으로 權力者였던 大將軍 何進과 十常侍들이 모두 죽은 사이에 自身의 軍隊를 이끌고 少帝를 廢하고 憲帝를 擁立하여 自身의 權力을 强化했다. 廢位한 少帝는 李儒에게 시켜 毒殺했고 一個 幷州刺史에 不過했던 董卓 自身은 스스로 相國에 올랐다.
무엇보다도 百姓들에게 各種 虐政들을 일삼고 經濟를 亡쳤으며 首都인 洛陽을 불태우고 後漢 歷代 皇陵을 盜掘하는 等 蠻行을 저질렀다. 特히 아무 고을이나 찍어 自己 兵力들을 풀어서 마음껏 擄掠질하게 했던 것은 董卓의 虐政 中 白眉다. 經濟를 亡친 것 亦是 董卓은 돈이 많기만 하면 最高로 알고 造幣廠에서 貨幣를 마구 찍어댔는데 個中에는 돈인지 쇳조각인지 뭔지 알 수 없는 個體까지 찍혀나왔다.
結局에는 自身의 妾과 놀아나면서 不安해하던 呂布가 司徒 王允의 使嗾를 받고 董卓을 殺害했다. 以後로는 그 罪의 댓가를 받게 된다.
董卓의 一族들은 모두 죽음을 當했고 董卓의 머리는 梟首되었으며 屍體는 길거리에 放置되었다.
董卓의 暴政때문에 苦痛받은 百姓들은 梟首된 董卓의 머리를 때리고 뚱뚱하고 기름진 屍體에 심지를 박아 불을 질렀고 袁氏 門下生들은 그 屍體를 完全히 불태우고 재를 길거리에 뿌렸다.
董卓의 머리는 呂布가 나중에 이각(李傕) 等에게 敗하고 袁術에게 달아날때 말 按裝에 싣고 가져가 버렸다.
以後 權力을 잡은 李傕은 自身의 權力을 强化하기 爲해 前任者였던 董卓을 禮로서 安葬하려고 했지만 겨우 뼛조각 몇 조각만 收拾할 수 있었다. 그는 이것에다 좋은 香나무로 몸을 깎아 王의 禮로 安葬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좋은 날을 잡아도 세 番이나 무덤이 浸水되었고 結局에는 벼락을 맞아 그 남은 뼛조각도 모두 사라졌다.
정말 하늘이 董卓을 이렇게 미워한 듯하다.
3) 曹操
李傕에게서 逃亡친 獻帝를 擁立하고 皇室을 自身의 勢力으로 채워넣어 皇室을 매우 弱化시켰고 結局에는 魏王까지 올라 그 아들 曹丕가 皇帝가 되어 魏나라가 세워지게 만들었다. 實際로 歷史家들의 評價 亦是 曹丕는 이미 아버지가 깔아준 판에 오르는 걸 좀 앞당겼을 뿐이며 實質的인 簒奪者는 曹操라고 못박고 있다.
獻帝를 許昌에서 强制로 擁位한 後 皇帝 앞에서 칼을 차고 다니며 脅迫하는 等의 行步를 보이고, 暗殺 疑惑에 連累되긴 했지만 皇帝의 後宮이자 皇室의 아이를 姙娠 中이었던 董貴妃를 殘酷하게 죽이고 後에 皇后인 伏皇后마저 除去하여 自身의 딸을 그 자리에 들어앉히면서 많은 이들의 共憤을 샀다. 勿論 曹操가 自身을 죽이려는 陰謀 까지도 寬大할 수는 없었겠지만 어쨌든 結果的으로 이 事件은 曹操의 悖倫 스러움을 天下에 알리는 象徵的인 事件이 되었다.
以後 項羽의 秦人 20萬 虐殺事件인 新安 大虐殺 以後 400如 年만에 벌어진 大規模 虐殺劇인 徐州 大虐殺과 袁紹軍 投降兵 8萬 生埋葬 事件, 呂布軍을 攻擊할 때 彭城을 陷落해 虐殺하는 等 여러 虐殺을 일으켰다. 各種 百姓 强制移住政策의 施行 等 中原 爭覇의 結果를 떠나 百姓들의 民心을 잃을 行爲를 많이 했고, 自身의 最高 功臣이자 謀士인 荀彧마저 魏公의 九錫을 받는 것을 反對했다는 理由로 自決하게 함으로서 王朝簒奪의 意志가 있음을 認證, 結局 뛰어난 業積을 많이 세웠음에도 不拘하고 後世人들에게 奸雄의 이미지를 크게 남기고 말았다.
4) 司馬懿
自身이 政權을 掌握하여 두 아들 司馬師와 司馬昭의 代를 지나 結果的으로는 그 孫子 司馬炎이 皇帝에 올라 曹魏 (曹奐)를 무너뜨리고 晉나라를 세웠다. 다만 司馬懿의 境遇 本人은 그냥 權力만 簒奪했고 따로 한 것이 없었으며 實際 帝位簒奪의 作業은 둘째 아들 司馬昭가 主導해 行했다는 點이 좀 다르긴 하다.
그런데 정작 司馬懿의 遺言은 "나라에 忠誠하라."였으나 그 子息들이 말을 안 들은 것 때문에 包含되었으니 좀 抑鬱하겠다. 하지만 일부러 子息들을 爲해 自身은 忠誠을 바치는 式의 演技를 했다는 疑惑도 强하다. 實際로 이 部分은 曹操도 비슷하게 指摘받는 部分이다. 末年에 갑자기 旣存 皇帝가 받던 特典과 같은 것을 누리고 魏王이 되려고 하는 等 權力에 크게 執着하고 漢 皇室의 權威를 最大限 亡가뜨리려는 모습(獻帝의 금교전을 대놓고 使用하거나 獻帝 앞에서 칼을 차고 돌아다니는 等)을 많이 보였는데, 事實上 아들이 皇帝로 쉽게 追尊되게끔 멍석을 깐 걸로 解釋한다.
在美 中國人 리둥팡(黎東方; Orient Lee; 1907년 ~ 1998년)의 境遇 曹操와 司馬懿에 對한 評價가 좀 다르다. 그의 見解에 따르면 曹操-曹丕로 이어진 簒奪의 境遇는 그래도 辯護할 만한게 漢나라는 事實上 曹操가 再建設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卽 丞相으로서 曹操가 再建設한 나라였기 때문에 그 아들인 曹丕가 이어받고 이름을 魏로 바꿔도 그 나라를 만든건 曹操였기 때문에 그나마 辯護가 可能했지만 司馬懿의 境遇는 魏나라 皇帝를 拘束하고 親族들을 죽인데다가 司馬懿가 魏를 建設한데 미친 影響은 曹操가 漢을 再建한데 미친 影響보다 微微하기 때문에 도둑질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結果的으로 當時 後漢은 暗君들과 宦官들의 執政, 黃巾賊의 亂과 董卓의 執權과 이각(李傕)의 執權 以後로 衰弱했던 政權을 曹操가 20如年 동안 安定시켰다는 點에서 辯護해줄 수 있지만, 司馬懿는 魏나라가 아직 衰弱하지 않았음에도 不拘하고 어린 皇帝였던 帝王 曹芳이 卽位한 틈을 타서 曹爽 等을 죽이고 權力을 掌握했다는 點에서 두 사람을 똑같이 待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曹爽이 無能하고 駱谷大戰으로 한 番 敗 했어도 나라를 엎을 程度로 無能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많은 曹操의 一族들을 問招하고 죽였는데 이 過程에서 曹韙는 뛰어난 人才들을 많이 잃었다. 內政에 매우 뛰어난 治積과 業積을 達成한 바 있는 夏侯玄은 끌려가서 死刑當하고 夏侯淵의 次男이자 曹韙 次世代 有望株 格인 將帥인 夏侯覇는 蜀漢으로 逃亡쳐야 했다. 그나마 蜀이 暗君 劉禪과 奸臣 黃皓에 依해, 그리고 吳는 暴君 孫皓와 奸臣 孫峻, 孫綝(성할침), 岑昏 等에 依해 亡해가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逆으로 當했을 것이다. 게다가 馬隆 같은 有能한 人材를 禿髮樹機能의 亂 鎭壓에 投入한 거야 둘째쳐도 그 뒤 西涼에 머물게 하는 等 司馬氏들, 그 中에서 特히 司馬炎은 人才를 보는 눈은 몰라도 人才를 쓰는 能力은 없었다.
뒷날 五胡十六國時代의 後趙를 세운 石勒은 高句麗 使臣 宇文屋孤를 待接하는 자리에서 臣下인 徐光과의 對話를 하던 中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當時 이미 逆賊으로 認定되던 王莽과 董卓은 빼고 曹操와 司馬懿를 말한 것이다.
19. 매사마골(買死馬骨) 선종외시(先從隗始)
별 소용없는 작은 일로 인해 큰 利益이 얻어지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매사마골(買死馬骨)은 ‘죽은 말의 뼈를 사다’라는 말로, 원래는 별 볼 일 없는 것을 사더라도 소중히 대접하면 좋은 것이 자연히 따라온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선종외시(先從隗始)는 ‘먼저 곽외부터 시작하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어떤 일을 이루려면 가까이 있는 자(또는 말을 꺼낸 자)부터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 戰國策 燕策 十八史略에
燕나라(BC323年~BC222年) 昭王이 널리 人材를 求하였는데 어느날 郭隗라는 사람이 찾아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옛날 中國의 어느 한 임금이 나라 안에 千里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求하지 못하여 애태우며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千里馬를 求해 오겠다고 自進해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하긴 그 千里馬가 그토록 몹시 貴했던 때문이다.
바로 이때, 어느 '涓人(宮에서 雜일 하는 사람)'이 임금을 찾아왔다.
"大王님, 제가 大王님을 爲해 千里馬 한 匹을 사올 수 있나이다."
그 말을 들은 大王은 몹시 기뻐하며,
"아니, 그게 정말인고?~" 라고 했다.
"예!~ 言敢生心 어느 앞이라고 거짓을 아뢰겠나이까, 허나 석달을 期限으로 末尾를 주셔야만 되옵니다."
"오! 그리 하도록 하라. 헌데 돈은 몇 萬金이면 되겠느뇨?"
"먼저 한 五百 金이면 足한 줄 아룁니다."
하여 欣快히 大王은 五百金을 내주었다.
드디어 석 달이 다 찬 어느날, 涓人이 千里馬 한 匹을 수레에 싣고 왔다.
千里馬를 사왔다는 傳喝을 듣곤 卽時 文武百官을 거느리고 말 구경을 나왔다.
그러나 수레에서 내리는 말은 산 말이 아닌 죽은 말이었다.
"그래, 고작 사왔다는 千里馬가 이런 것이란 말이냐?"
"예, 大王님! 이것이 金 五百을 주고 사온 죽은 千里馬입니다."
"무엇이? 五百金을 퍼주고 죽은 말을 고작 사왔다?"
임금은 大怒하여 펄펄 뛰었다.
"여봐라!"
임금은 邏卒들에게 當場에 涓人이를 處刑하라고 했다. 그러나, 涓人이는 沈着하게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 大王媽媽, 千里馬란 하도 貴한 것이어서 좀체 쉽사리 살 수가 없었나이다. 그래서 저는 온 나라 坊坊谷谷을 훑어 다니던 中에 한 곳에 이르러 죽은 千里馬가 있기에 이렇게 五百金을 주고 사왔나이다. 이제 죽은 千里馬를 五百金에 샀다는 所聞만 나면, 산 千里馬를 가진 사람들이 죽은 말도 五百金이니, 산 말이야 얼마나 더 많이 받겠느냐고 반드시 千里馬를 앞 다투어 팔러 올 것이라 아뢰나이다."
이 말을 들은 大王이 一理있는 말에 涓人을 죽음만은 免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果然 千里馬를 가진 사람이 세 名이나 나타나서, 그 貴한 千里馬를 세 匹이나 얻었다고 한다.
郭隗는 다시 말을 이어 "제 같은 사람도 한 番 써 보시면 반드시 좋은 人才가 올 것입니다" 라고 아뢰자 昭王은 그를 宰相으로 받아 드렸는데, 이 所聞이 퍼지면서 많은 人才들을 얻을 수 있었다.
王은 다시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이로부터 <買死馬骨> 卽, 죽은 말의 뼈다귀를 산다는 俗談이 생겼는데, 이는 別 소용없는 작은 일로 因해 큰 利益이 얻어지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20. 매처학자(梅妻鶴子) 梅妻鹤子
梅花를 아내로 삼고 鶴을 子息으로 삼다. 俗世를 떠나 自然을 벗 삼으며 悠悠自適하게 사는 선비의 風流 生活을 比喩
「林逋는 杭州의 孤山에 隱居했는데, 두 마리의 鶴을 길렀다. 鶴은 풀어 주면 구름 위까지 날아올라 한참을 날아다니다가 다시 새欌으로 돌아왔다. 林逋는 恒常 작은 배를 타고 西湖 近處의 절들을 찾아 노닐었는데, 或是 손님이 林逋의 집에 찾아오면 童子가 門 앞에까지 나와 손님을 맞이하면서 새欌에 있는 鶴을 풀었다. 그러고 나면 한참 後에 林逋가 배를 저어 돌아왔다. 일찍이 鶴이 나는 것이 (손님이 왔다는)證驗이 되었기 때문이다.
(林逋隱居杭州孤山, 常畜兩鶴, 縱之則飛入雲霄, 盤旋久之, 復入籠中. 逋常泛小艇, 遊西湖諸寺. 有客至逋所居, 則一童子出應門, 延客坐, 爲開籠縱鶴. 良久, 逋必棹小船而歸. 蓋嘗以鶴飛爲驗也.)」
* 沈括의 夢溪筆談 人事에.
辭書의 記錄에 依하면 林逋 (967∼1024)의 字는 君復으로, 浙江 (錢塘, 杭州) 사람이며, 儒學者 집안에서 태어난 北宋 時代의 詩人이다. 그는 젊어서 江淮 地域을 遊歷 하였는데, 나중에는 杭州의 西湖 近處의 孤山에 隱居하여 門 밖으로 나가지 않고 梅花를 심고 鶴을 기르며 悠悠自適 살았다고 한다. 또, 平生 結婚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 對한 이런 이야기에서 ‘梅花를 아내로 삼고 鶴을 子息으로 삼다.’라는 뜻의 ‘梅妻鶴子’가 由來하여, 風流를 즐기며 草野에서 靜閑하게 사는 사람을 가리켜 ‘梅妻鶴子’라 하게 되었다. 이에 對해 中國의 辭書인 《辭海》에서는 다음과 같이 說明하고 있다.
「宋나라 때의 林逋는 杭州 西湖의 孤山에 隱居하였는데 夫人도 없고 아들도 없었다. 梅花를 심고 鶴을 기르며 스스로 즐겼는데, 사람들은 그를 보고 梅花로 아내를 삼고 鶴으로 子息을 삼았다고 말했다.
(宋代林逋隱居杭州西湖孤山, 無妻無子, 種梅養鶴以自娛, 人稱其梅妻鶴子.)」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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