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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한자성어(漢字成語)**/고사성어(故事成語)

고사성어(故事成語) (ㅁ-1 마고소양~ )

by 산산바다 2026. 3. 4.

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글 목록

 

 

 고사성어(故事成語) (-1 마고소양~ )

 

 

1. 마고소양(麻姑搔癢) 麻姑搔痒

麻姑가 가려운 데를 긁다.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것을 比喩해 이르는 말이다. 麻姑는 긴 손톱을 가진 仙女이다.

 

나라 桓帝 方平神仙 王遠蔡經의 집에 降臨했다. ······ (方平) 蔡經父母, 兄弟와 서로 人事, 오랫동안 홀로 앉아 있다가 사람을 시켜 (麻姑) 오게 했다.

 

······ 또한 麻姑의 손톱은 사람의 손톱과는 다르게 생겼다. 蔡經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萬一 등이 많이 가려우면 이 손톱으로 긁으면 좋겠다.’ 그러자 方平蔡經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內容을 알고 사람들을 시켜 그를 끌어다 채찍질을 하게 하면서 말했다. “麻姑仙女이다. 너는 어찌하여 갑자기 麻姑의 손톱으로 등을 긁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느냐?”

(又麻姑手爪不如人爪形, 蔡經心中私言, 若背大癢時, 得此爪以爬背, 當佳也. 方平已知經心中所言, 卽使人牽經鞭之, , 麻姑, 神人也. 汝何忽謂其爪可以爬背耶.)

 

이 이야기는 神仙傳에 나오는데, 蔡經이 가려울 때 麻姑의 손톱으로 긁으면 좋겠다고 한 말에서 麻姑搔癢由來했다. ‘ 麻姑搔癢元來는 힘이나 能力을 가진 사람의 도움으로 하는 바를 이루는 것을 가리켰는데, 오늘날에는 뜻이 擴大되어 自己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도 쓰인다. ‘麻姑爬痒이라고도 한다.

이 이야기의 앞部分桑田碧海.

 

 

2. 마부위침(磨斧爲針)

磨斧는 도끼를 간다는 뜻이고, 爲針은 바늘이 된다는 뜻으로, 中斷하지 않고 꾸준히 努力함을 말한다.

 

나라 詩人 李白이 어렸을때 훌륭한 스승을 찾아서 象宜山에 들어가 工夫를 하던 어느날 싫증이 나자 스승에게 말도 없이 을 내려 갔다.

집으로 하던 그가 어느 냇가에 當到 했을 때 한 老婆가 바위에 도끼를 갈고 있었다.

李白"할머니 뭐하세요?"라고 묻자

할머니는 "바늘을 만들기 하여 도끼를 갈고 있단다"

라고 對答했다.

"그렇게 큰 도끼가 아무리 간다고 바늘이 되겠습니까?

"! 中途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야"

李白은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려는

할머니의 努力感明받아서 으로 들어가 熱心工夫繼續하였다 라는 이야기에서 由來하였다.

 

 

3. 馬耳東風 , 马耳东风

말귀에 봄바람이 불다. 남의 말을 새겨듣지 않고 귓등으로 흘리는 것을 比喩

 

人生飄忽百年內 : 人生 아차 하는 사이에 百年도 채우지 못하니,

且須酣暢萬古情 : 술에 萬古 시름 풀어내세.

君不能狸膏金距學鬪鷄 : 그대는 여우 기름 바르고 쇠 발톱 끼워 가며 鬪鷄를 배우지도 못하면서

坐令鼻息吹虹霓 : 앉아 콧김으로 무지개를 날려 버리려 하는가

君不能學哥舒橫行靑海夜帶刀 : 그대는 哥舒翰靑海를 주름잡으며 밤에 칼을 차고

西屠石堡取紫袍 : 西쪽으로 石堡城全滅시켜 紫袍를 받은 일도 배울 수 없네.

吟詩作賦北窓里 : 겨우 에 기대어 앉아 를 읊고 를 짓는다지만

萬言不直一杯水 : 一萬 言을 지어도 술 한 價値도 안 되네.

世人聞此皆掉頭 : 世上 사람 이를 듣고 머리를 흔드는 것이

有如東風射馬耳 : 마치 東風이 말의 귀를 쏘는 듯

魚目亦笑我 : 물고기 눈 또한 우리를 비웃으며

請與明月同 : 밝은 달과 같기를 바란다네

驊騮拳跼不能食 : 驊騮 같은 駿馬는 몸을 구부리고 밥도 못 먹는데

蹇驢得志鳴春風 : 다리 저는 노새는 뜻을 얻어 봄바람을 노래한다네.

 

李白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 中에서

王去一이 밤늦도록 혼자서 술을 마시다가 느낀 感懷를 적어 보낸 李白和答이다. 李白은 추운 밤에 獨酌을 하며 愁心에 잠겨 있을 王去一을 생각하면서 이 를 지었다. 李白은 이 에서 술을 마셔 萬古의 시름을 씻어 버릴 것을 하는 한便, 王侯 사이에서 즐기는 鬪鷄技術을 익혀 그들의 寵愛를 받아 出世하는 가 있는가 하면, 邊境의 싸움에서 작은 을 세우고 마치 忠臣이나 된 양 날뛰는 가 있는 浮薄世上恨嘆했다. 또한 이런 世上이니 高邁人物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北窓에 기대어 詩賦를 짓는 程度인데, 世人들은 이런 詩賦를 들으면 마치 말 귀에 東風 부는 것처럼 머리를 흔들고 말며, 生鮮 눈깔과도 같은 어리석은 들이 明月이나 珠玉과 같은 우리들을 비웃고 地位代身 차지하려고 하며, 名馬와 같은 賢人들은 登用되지 못하는데 다리 저는 당나귀 같은 奸慝들은 得世한다며 世態恨嘆했다.

 

狸膏(여우 기름)鬪鷄 時에 닭의 머리에 바르면 相對 닭이 이 냄새를 맡고 을 내고 逃亡한다고 한다.

金距鬪鷄의 발에 다는 金屬의 칼을 말한다. ‘앉아 콧김으로 무지개를 날려 버리려 하는가(坐令鼻息吹虹霓)’李白의 또 다른 詩 古風의 한 句節引用한 것이다. 唐玄宗鬪鷄를 좋아하여 當時 鬪鷄를 바친 王準, 賈昌 같은 들이 모두 氣勢騰騰했다고 한다. 이런 現狀李白古風 이란 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길에서 鬪鷄하는 들을 만나면 모자와 수레의 덮개가 輝煌燦爛하고, 콧김으로 무지개를 날려버릴 程度여서(氣勢騰騰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다네.

(路逢鬪鷄者, 冠蓋何輝煌, 鼻息乾虹霓, 行人皆怵惕)

 

哥舒翰突厥族 哥舒部 사람으로 일찍이 나라의 隴右, 河西 節度使를 지냈다. 太平廣記 雜錄哥舒翰한 다음과 같은 記錄이 있는데, 여기서 밤에 칼을 차고 다니다.’라는 말이 引用되었다.

 

天寶 年刊哥舒翰安西節度使를 지냈는데, 數千 里의 땅을 掌握하여 威勢四方에 떨쳤다. 그래서 西北 地域 邊方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北斗七星 높이 떴는데 哥舒翰은 밤에 칼을 차고 吐蕃을 모두 죽이고 두 垓字를 팠다네.’

(天寶中, 哥舒翰爲安西節度使, 控地數千里, 甚著威令, 故西鄙人歌之曰, 北斗七星高, 哥舒夜帶刀. 吐蕃總殺盡, 更築兩重濠.)

 

西쪽으로 石堡城全滅시켜(西屠石堡)’라는 말은 舊唐書 哥舒翰傳의 다음 記錄引用한 것이다.

 

吐蕃保石堡城은 길이 멀고 해서 오랫동안 陷落시킬 수가 없었다. 8, 朔方河東群牧들이 哥舒翰에게 10萬 軍士들의 總 指揮委託하여 石堡城攻擊했다. 哥舒翰麾下將軍 高秀巖張守瑜를 시켜 攻擊하여 열흘도 안 되어 陷落시켰다. 皇帝는 그 記錄하고 鴻艫員外卿特進시켰으며, 아들 하나에게 5品官을 내렸고, 千 匹下賜品을 내렸으며, 攝御史大夫(御史大夫 代吏)官職을 더해 주었다.

(吐蕃保石堡城, 路遠而險, 久不拔. 八載, 以朔方, 河東群牧十万衆委翰總統攻石堡城. 翰使麾下將高秀巖張守瑜進攻, 不旬日而拔之. 上錄其功, 拜特進, 鴻艫員外卿, 與一子五品官, 賜物千匹, 莊宅各一所, 加攝御史大夫.)

 

紫袍는 보랏빛 外套를 말하는데, 나라 때 3品官 以上大官들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驊騮나라 穆王名馬를 말하는데, 衒能人才比喩하는 말이다. 蹇驢는 다리를 저는 노새로서, 奸慝들을 比喩하는 말이다.

 

 

4. 마부위침(磨斧爲針) 磨杵作针

쇠 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끈기 있게 努力하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比喩

 

詩仙으로 불리는 李白貿易商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時節에서 보냈다. 젊은 時節 道敎心醉했던 李白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려 四川省 各地을 떠돌기도 했다.

 

하는 바에 따르면, 이때 工夫를 하기 彭山象耳山에 들어갔는데, 工夫를 이루지 못하고 抛棄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골짜기를 지나가다가 한 老婆가 냇가에서 쇠공이를 갈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磨針溪眉州象耳山 아래에 있다. 하는 바에 따르면 李白이 이 에서 工夫를 하다가 學業을 이루지 못하고 抛棄하고 말았다. 돌아가는 길에 이 내를 건너다가 한 老婆가 쇠공이를 갈고 있는 것을 보았다. 李白이 물었다. “할머니, 只今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바늘을 만들려고 한단다.” 李白은 이 말에 크게 깨달은 바 있어 되돌아가 工夫를 마쳤다. 老婆自身武氏라고 했는데, 오늘날 그 내 옆에는 武氏바위가 있다.

(磨針溪, 在眉州象耳山下. 世傳李白讀書山中, 學未成, 棄去. 過是溪, 逢老媪方磨鐵杵. 白問, 何爲. 媪曰, 欲作針耳. 白感其言, , 卒業. 媪自言姓武. 今溪旁有武氏巖.)

 

이 이야기는 南宋祝穆이 지은 方輿勝覽 眉州 · 磨針溪에 나오는데, 할머니가 쇠공이를 간 이야기에서 磨杵作針由來했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의 磨斧作針’, 쇠로 된 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의 鐵杵磨針 이라고도 한다.

 

 

5. 만가(挽歌)

상여를 끌면서 부르는 노래, 죽은 사람을 위해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漢高祖 劉邦韓信에게 나라를 치도록 했다. 韓信軍士를 이끌고 나라를 치러 간 사이, 劉邦을 받은 역이기(酈食其)가 세 치 혀로 나라를 降服시켰다. 이 이야기를 들은 韓信나라 征伐中止할 생각을 했다가 괴통(蒯通)建議에 따라 나라를 攻擊했다. 비록 漢王密使 酈食其를 보내 나라의 降伏을 받아 내긴 했지만 韓信에게 나라 攻擊中止하라는 命令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과, 한낱 儒生에게 을 넘길 수 없다는 것이 그 理由였다. 나라에서는 酈食其說得에 넘어가 나라에 降伏하기로 하고 軍士를 거두었는데, 韓信은 그 틈을 타 나라를 襲擊하여 首都 臨淄까지 肉薄해 들어갔다. 帝王 田廣宰相 田橫酈食其自己를 속였다고 생각하고 酈食其를 삶아 죽이고 달아나, 나라 項羽에게 使臣을 보내 救援兵要請했다. 그러나 救援兵韓信에게 했고, 田廣韓信에게 잡혀 處刑當하고 말았다.

 

田橫나라의 이 되었으나, 미처 軍士整備하기도 나라 將軍 灌嬰이 쳐들어와 나라를 平定해 버렸다. 以後 漢高祖 劉邦天下統一하고 卽位했다. 田橫誅罰할까 봐 두려워 500如 名部下와 함께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高祖田橫反亂을 일으킬까 憂慮하여 그를 容恕하고 불렀다. 田橫은 처음에는 拒絶하다가 나중에 一但 부름에 했으나, 洛陽30如 里 앞두고 그곳에 머물며 賓客들에게 말했다.

 

나는 처음 나라 과 함께 쪽을 바라보고 라 일컬었는데, 只今 漢나라 天子가 되었고 나는 逃亡捕虜의 몸으로 쪽을 하여 그를 섬겨야 하오. 恥辱을 정말 참을 수 없소. 나는 남의 을 삶아 죽였는데 앞으로 그 同生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같은 君主를 섬겨야 하오.(酈食其同生 酈商나라의 將軍이 되었다.) 비록 그가 天子詔書를 두려워하여 나를 어떻게 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 어찌 스스로 마음속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없겠소? 또한 陛下께서 나를 보고자 하시는 까닭은 내 얼굴을 한 보려는 것에 지나지 않소. 陛下께서는 洛陽에 계시니 只今 내 목을 베어 三十 里를 말로 달려가면 모습이 썩지 않아 알아볼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田橫의 목을 高祖에게 한 두 部下를 비롯해서 섬에 남아 있던 500如 名田橫節槪敬慕하여 모두 殉死했다. 高祖는 눈물을 흘리며 哀悼했고, 王子를 갖추어 葬禮를 지내 주고, 두 사람의 食客都尉任命했다.

* 史記 田儋列傳.

 

그 무렵, 田橫門人(薤露蒿里歌)라는 喪歌를 지었다. 田橫自決하자 그 죽음을 哀悼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는데, 崔豹古今注에서는 다음과 같이 說明하고 있다.

 

薤露蒿里田橫門人에게서 나왔다. 田橫自殺하자 門人들이 悲痛하게 여겨 슬픈 노래를 만들었는데, 사람의 목숨은 부추 위의 이슬과 같아 쉬이 마른다고 했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魂魄蒿里로 돌아간다고도 했다. 그래서 두 으로 되어 있다. 喪歌孝武帝 때에 宮中 樂士李延年이 두 을 나누어 두 을 만들었는데, 薤露歌公卿貴人葬禮, 蒿里歌士大夫庶民葬禮 時喪輿꾼에게 부르게 했다. 世上에서는 이를 挽歌라고도 했다.

(薤露, 蒿里, 送哀歌也. 出田橫門人. 橫自殺, 門人傷之, 爲悲歌. 言人命如薤上之露, 易晞滅也. 亦謂人死, 魂精歸於蒿里, 故有二章. 至孝武帝時, 李延年乃分二章爲二曲, 薤露送公卿貴人, 蒿里歌送士夫庶人, 使挽樞者歌之, 世亦呼挽歌.)

 

薤上朝露何易晞 : 부추 위의 이슬은 쉬이도 말라라.

露晞明朝更復落 : 이슬은 말라도 來日 아침 다시 내리지만

人死一去何時歸 : 사람 죽어 한 번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오나.

해로가(薤露歌)

 

蒿里誰家地 : 蒿里는 뉘 집터인고

聚斂魂魄無賢愚 : 魂魄 거둘 때는 賢明하고 어리석음도 없네.

鬼伯一何相催促 : 鬼伯은 어찌 그리 최촉(催促)하는고

人命不得少踟蹰 : 人命은 잠시(暫時)도 머뭇거릴 수 없는 것인가.

호리가(蒿里歌)

 

薤露蒿里歌說明崔豹古今注에서 만가(挽歌)’由來했다. ‘挽歌에서 으로도 쓰고 으로도 쓴다. ‘挽歌는 다음의 典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挽歌漢武帝 때의 役夫들이 부르던 勞動者들의 노래였는데, 그 소리가 哀絶하여 마지막 길을 보내는 (葬禮)에 쓰게 되었다.

(挽歌出於漢武帝役人之勞歌, 聲哀切, 遂以爲送終之禮.)

* 晉書 禮志.

 

勞歌勞動者들의 노래라는 뜻 에도 憂愁와 슬픔의 노래, 惜別의 노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6. 만기친람(萬機親覽)

온갖 政事를 임금이 히 보살핌

 

論語爲政篇에서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

(으로써 政治하길 比喩하면 마치 北極星이 한 곳에 있어도 모든 별이 그 周圍로 돈다는 뜻을 가진다)

 

子曰:「無爲而治者其舜也與夫何爲哉恭己正南面而已矣

스승 孔子께서 말하셨다. “아무 것도 안하면서 다스린 사람은 아마 임금 일 것이야. 都大體 어떻게 했는가?

恭遜自身을 바르게 하고 쪽을 해 앉아 있었을 뿐이지.”

王肅이란 사람이 쓴 孔子家語에도 曾子曰:「不勞不費之謂明王可得聞乎?

曾子가 말했다. “수고롭지도 않고, 浪費하지 않는 것을 밝은 임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孔子曰昔者帝舜左禹而右皐陶하니不下席而天下治하니라夫如此何上之勞乎?”

孔子對答하였다. “옛날에 임금은 왼便를 앉히고 오른쪽에 皐陶를 앉힌 채로 앉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天下가 다스려졌으니 이 같은 것은 무엇이 윗사람이 수고롭겠는가? 라 했다.

 

 

7. 만사구비 지흠동풍(萬事俱備 只欠東風)

모든것이 準備되었는데, 東風不足하다. 重要核心이 빠졌다.

 

(由來 : 三國志)

天下統一하기華北平定하고, 이제 赤壁에서 나라를 물리치고 나라를 치기나라의 曹操赤壁으로 10萬 大軍을 이끌고 移動對峙하고 있었다.

이에 나라의 劉備나라의 孫權은 서로 손을 잡고 曹操對抗하기로 하고

나라의 諸葛亮나라의 周瑜先鋒에 세우고 戰鬪準備하고 있었다. 워낙 數的으로나 武器로나 差異가 많이 나있는 狀態, 로서는 어려운 戰鬪였다.

 

赤壁에서의 戰鬪苦悶하던 周瑜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諸葛亮은 그가 왜 쓰러졌는지를 알기에 周瑜를 찾아가 조용히 周圍 사람을 물리고 글을 한 써 주었다.

이 글을 읽어본 周瑜自身의 마음을 너무 正確하게 그리고 赤壁에서의 戰鬪에서 勝利할 수 있는 方法까지 써놓은지라 그 글을 보고 諸葛亮해서 다시 한 番 嘆伏했다.

, 가 이길 수 있는 方法은 오직 火攻뿐이었는데, 나라 陣營有利地形이라 그것이 어려웠던 것이다.

 

諸葛亮은 바로 火攻에서 나라 陣營으로 바람이 불 때를 알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東風이었는데 겨울이라 西風이 많이 부는때라 누구든지 東風期待할 수 가 없었던것이다.

諸葛亮天機를 아는 正確하게 언제 東風이 불지를 알고 있었기에

形式的으로 七星堂을 쌓고 祭祀를 드렸다.

結局 赤壁大戰, 勝利로 끝났다.

여기서 由來된 말이 萬事俱備 只欠東風이다.

 

 

8. 만사일생(萬死一生) 万死一生

번의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다. 至極危險處地에 놓여 있다가 겨우 죽음을 冒免한다는 뜻이다.

 

나라는 煬帝 때에 이르러 高句麗 征伐無理土木工事, 暴政으로 民生疲弊해지자 各地에서 反亂이 일어났다. 李淵關中治安을 맡고 있다가 民亂鎭壓하라는 命令을 받들어 둘째 아들 李世民과 함께 山西, 河東 等 곳곳에서 民亂鎭壓했다.

 

煬帝李淵人相凡常치 않을 뿐만 아니라, 當時 有行하던 圖讖說(運命이나 人事未來豫言記錄)深水沒黃楊이란 豫言이 있었으므로 李淵警戒했다. 深水는 깊은 물로 李淵의 이름字 淵을 뜻하고, 나라 皇帝이므로, ‘깊은 연못이 버드나무를 잠기게 하다’, 卽 李淵나라를 滅亡시킨다는 뜻을 內包하고 있다.

 

그런데 李淵太原 留守로 있을 때 나라의 混亂을 틈타 突厥族國境 地帶侵入했는데, 李淵은 이들과 싸우다 兵力을 많이 잃고 말았다. 煬帝李淵江都連行해 오라는 命令을 내렸다. 江都에서는 刑罰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이 分明할 터, 李淵李世民說得에 힘입어 叛亂을 일으키고 首都 長安으로 進擊했다.

 

長安 入城成功李淵百姓들을 鎭撫하는 한 便, 大王 楊侑皇帝擁立하고, 江都避身해 있는 煬帝太上皇으로 받들었다. 唐國公이었던 李淵唐王이 되어 皇帝代身하여 政務를 폈다. 이 모든 것이 禪讓準備 過程이었다.

 

便, 義氣完全히 꺾인 煬帝는 마치 모든 것을 抛棄한 것처럼 江都離宮에서 美女들에게 둘러싸여 遊興에 젖어 살다가, 不滿이 쌓여 쿠데타를 일으킨 親衛君해 죽고 말았다. 煬帝江都에서 弑害되었다는 消息長安해지자 李淵은 그해 5, 禪讓形式을 빌려 長安에서 皇帝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이라 했다.

 

過程에서 李世民은 뛰어난 活躍을 보였으며, 아버지로부터 天下는 모두 네가 이룩하여 놓은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李世民이 아버지를 도와 天下統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生死를 같이한 많은 人才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李世民宮殿北門玄武門에서 兄弟들을 殺害하고 李淵의 뒤를 이어 皇帝가 되었는데, 이이가 太宗이다. 李淵退位하여 太上王이 되었다. 太宗은 그 後 地方割據하던 群雄服屬시키고, 學問奬勵하여 民心을 가라앉혔다. 그는 또 凌煙閣을 지어 開國 때부터의 功臣 20肖像畵를 그려 걸어 놓게 했다.

 

貞觀 10, 太宗侍臣에게 말했다. “帝王創業守成 中에서 어떤 것이 어렵소?” 尙書左僕射() 房玄齡對答했다. “天地混沌스러울 때 여러 英雄이 다투어 일어나, 攻擊하여 깨뜨려야 降服하며 戰爭에서 이겨야 克復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말하자면 創業이 어렵습니다.” ······ 太宗이 말했다. “옛날에 房玄齡은 나를 따라 나라를 平定하느라고 苦生했는데, 萬 番의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오기도 했소. 그래서 創業의 어려움을 보았소.”

(貞觀十年, 太宗謂侍臣曰, 帝王之業, 草創與守成孰難. 尙書左僕射房玄齡對曰, 天地草昧, 群雄競起, 攻破乃降, 戰勝乃克. 由此言之, 草創爲難. ······ 太宗曰, 玄齡昔從我定天下, 脩嘗艱苦, 出萬死而遇一生. 所以見草創之難也.)

 

이 이야기는 唐太宗貞觀之治記錄해 놓은 貞觀政要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萬死一生이 나왔다. ‘九死一生과 같은 意味로 쓰인다. 이는 自治通鑒 唐紀에도 나오는데, ‘많은 죽음에 나아가 살아남았다.(出百死, 得一生.)’記錄하고 있다.

 

 

9. 만사형통(萬事亨通) 万事亨通 ,

모든 일이 亨通하다. 모든 일이 뜻대로 잘 이루어지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周易64卦 中 첫 번째 乾卦에 나오는 · · · 四德 가운데 하나다. 주역 01 건위천(乾爲天)

萬物成長시키는 힘으로, 季節로 보면 여름에 하고, 四端으로 따지면 한다. 亨通이라는 말은 무슨 일이든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것을 가리킨다.

 

 

10. 만사휴의(萬事休矣) 万事休矣

모든 일이 끝장이다. 다 글렀다. 모든 일이 絶望 狀態에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黃巢으로 나라가 290歷史를 마감한 , 50如 年에 걸쳐 黃河 流域華北에는 後梁 · 後唐 · 後晉 · 後漢 · 後周 等 5王朝가 나타났고, 이와 同時華中華南에는 나라 末期節度使들이 세운 · 南唐 · 吳越· · · 前蜀 · 後蜀 · 荊南 · 南漢 · 北漢 等 10割據 政權이 잇따라 나타났다. 이로써 中國 땅은 다시 分裂混亂時期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를 五代十國이라고 한다.

 

中 荊南荊南 節度使였던 高季興이 세운 나라이다. 荊南4代 約 40에 걸쳐 섬기는 나라가 할 때마다 새로 들어선 나라를 섬겨 가면서 命脈維持했는데, 高季興後梁太祖 朱全忠節度使任命되었으므로 後梁을 섬겼고, 2代 高從誨後唐, 3代 高保融後周, 마지막인 4代 高保勖을 섬기다가 에게 吸收되고 말았다. 4代 保勖은 아버지 高季興盲目的인 사랑을 받으며 자라서 眼下無人인 데다가 淫亂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保勖歷史는 다음과 같이 記錄하고 있다.

 

高保勖省躬으로 高從誨의 열 째 아들이며, 高保融同腹 同生이다. ······ 高保勖은 어려서 이 많았고 몸은 虛弱했으며 淫亂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낮에 娼妓를 불러 官衙에 모아 놓고 士卒 中에서 健壯를 골라 제멋대로 戱弄하게 하고 高保勖侍妾들은 발을 드리우고 함께 보면서 즐겼다. 또한 樓臺를 짓고 끝없이 土木工事를 벌여 軍隊百姓들이 모두 怨望했다. ······ 처음, 高保勖을 키울 때 高從誨高保勖特別히 사랑했다. 그래서 아무리 가 나 있어도 高保勖을 보면 반드시 가 풀려 웃었다. 荊 地方의 사람들은 이를 萬事休(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모든 狀況이 끝난 것)’로 여겼다. 高保勖卽位하자 藩鎭政勢는 갈수록 衰弱해졌고, 結局 數個月 後에는 나라를 잃게 되고 말았으니, (‘萬事休라는 말은) 事前 徵兆였던 것이다.

(保勖字省躬, 從誨第十子, 保融同母弟也. ······ 保勖幼多病, 體貌臞瘠, 淫泆無度. 日召娼妓集府署, 擇士卒壯健者令恣調謔, 保勖與姬妾垂簾共觀, 以爲娛樂. 又好營造臺谢, 窮極土木之工, 軍民咸怨. ······ , 保勖在保抱, 從誨獨鐘愛, 故或盛怒, 見之必釋然而笑. 荊人目爲萬事休. 及保勖之立, 藩政離弱, 卒裁數月遂失國, 亦預兆也.)

* 宋史 荊南高氏世家.

 

高保勖2代 王 高從誨의 막내()아들이며, 3代 王 高保融同生이다. 宋太祖 元年(960) 高保融으로 世上을 떠났는데, 그의 아들 高繼沖이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同生 高保勖이 그 뒤를 이었다. 나라에서는 그를 荊南節度使任命했다. 高保勖은 어렸을 때 이 많았고 몸도 虛弱했지만 나라를 다스릴 만한 才能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의 뒤를 이어 王位에 오르자 나라 일은 等閑視한 채 放縱하고 無絶制한 삶을 살았다. 그는 대낮에 娼妓들을 불러다가 健壯兵士들과 淫亂行爲를 하게 해 놓고, 自己姬妾들과 함께 이를 구경하며 즐기는가 하면, 豪華로운 樓臺를 짓느라고 사람들을 動員하여 人力物資浪費했다. 建隆 3(962) 高保勖으로 죽었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侍中追贈했다. 조카 高繼沖이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高保勖이 죽은 뒤 몇 個月 만에 荊南나라에 滅亡하고 말았다.

 

高從誨業務를 보다가 불같이 를 내는 일이 잦았는데, 그때마다 그의 臣下들은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라 모두 坐不安席, 不安에 떨며 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런 狀況에서 高保勖만 보이면 高從誨를 풀고 滿面에 웃음을 띠었으니, 困境해 있던 臣下立場에서는 高保勖救世主였을 터다. 그래서 臣下들은 이런 狀況萬事休’, 사람들을 恐怖 雰圍氣로 몰아가고 두려움에 떨게 하는 모든 狀況이 끝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렇게 臣下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느꼈던 萬事休結局끝장豫告하는 말이 되고 말았다. 바로 이 萬事休라는 말에서 모든 일이 끝장났다, 다 글렀다는 뜻의 萬事休矣由來했다.

 

原文에 나오는 藩鎭簡單說明한다. 나라 初期重要各 州都督府, 睿宗 때는 節度大使, 玄宗 때는 節度使設置했는데, 이를 통틀어 藩鎭이라고 한다. 各 藩鎭은 한 地域軍政 (兵權)掌握했는데, 나라 末期에 이르러 中央政府의 힘이 衰弱해지자 藩鎭勢力漸次 擴大되면서 民政財政까지 모두 掌握하게 되었고, 特定 地方割據하면서 中央朝廷對峙 局面形成 되었는데, 이를 일러 藩鎭割據라고 한다. 그리고 이 藩鎭割據背境 아래 五代十國局面形成되었다.

 

成語出典은 두 가 있는데, 典籍家族 關係記錄에서 差異를 보인다. 宋史 荊南高氏世家에서는 高保勖高從誨의 아들로 記錄되어 있는데, 다음의 典籍에서는 高保勖高季興의 아들로 記錄되어 있다.

 

保勖高季興의 막내아들로 지나칠 程度特別한 사랑을 받았다. 高季興이 살아 있을 때 어떤 일로 한 番 火爆發하면 左右의 사람들은 히 곁눈질로 힐끔거리지도 못했는데, 오직 保勖이 쳐다보기만 하면 高季興가 저절로 풀렸다. 그래서 荊 地方의 사람들은 이를 萬事休로 여겼다. 皇朝建隆 4봄에 죽었는데, 이 해에 荊門의 땅은 高氏所有가 아니게 되었으니, 그런즉 萬事休라는 말은 아마도 그 事前 徵兆였던 것 같다.

(保勖, 季興之幼子也. 鐘愛尤甚, 季興在世時, 或因事盛怒, 左右不敢竊視, 惟保勖一見, 季興則怒自解, 故荊人目之爲萬事休. 皇朝建隆四年春卒. 是歲, 荊門之地不爲高氏所有, 則萬事休之言. 蓋先兆也.)

* 舊五代史 世襲列傳

 

舊五代史는 매우 짧은 期間에 쓰인 原稿誤謬가 적지 않다고 알려져 있으며, 後世史家들에게 많은 論駁을 받고 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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