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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한자성어(漢字成語)**/고사성어(故事成語)

고사성어(故事成語) (ㄷ-4 독안용~ )

by 산산바다 2026. 3. 4.

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글 목록

 

 

 고사성어(故事成語) (-4 독안용~ )

 

 

31. 독안용(獨眼龍) 独眼龙

눈의 . 애꾸눈의 英雄이나 勇猛將帥를 뜻한다.

 

나라 僖宗 때에 山東 出身 소금 密賣業者인 황소(黃巢)와 왕선지(王仙芝) 叛亂을 일으켰는데, 이를 歷史에서는 黃巢이라고 한다. 王仙芝殺害되었고, 黃巢主導하여 叛亂을 일으킨 지 5만에 10如 萬農民軍을 이끌고 都邑長安入城했다. 黃巢涵元殿에서 卽位式擧行하고, 나라 이름을 大齊라고 했다. 官軍長安城을 겹겹이 包圍하고 長期戰突入했으며, 僖宗成都蒙塵하여 突厥族 出身李克用起用하여 黃巢 討伐했다. 當時 4萬如 名에 이르는 李克用軍士는 모두 검은 옷을 입고 猛攻했기 때문에 叛亂軍갈가마귀 군사(鴉軍)가 왔다.”히 두려워했다.

 

時間이 지나면서 黃巢軍戰力은 눈에 띄게 弱化되었고, 長安, 西, 쪽이 모두 官軍에게 封鎖되고 말았다. 이런 狀況에서 쪽인 洛陽으로 하는 길을 掌握하고 있던 黃巢軍部將 朱溫我軍形勢不理하다고 判斷하고 官軍에게 降伏을 해 버리자 이제는 洛陽과의 交通마저 遮斷되고 말았다. 長安孤立 狀態에 빠지게 되었다. 朱溫背叛黃巢에게는 致命的打擊이 된 反面, 唐 王朝에는 千軍萬馬와 같은 힘이 되었다. 唐 王朝에서는 朱溫에게 要職을 내리는 한便, 全忠 이라는 이름까지 下賜했다. 朱全忠이 바로 五代十國의 하나인 後梁太祖가 된 人物이다.

 

黃巢結局 長安脫出하여, 追擊하는 朱全忠, 李克用軍隊1年 如를 싸우며 敗退를 거듭하면서 거의 全滅 狀態에 빠지고 말았다. 8846, 黃巢는 겨우 1千如 名軍士를 거느리고 泰山 東南狼虎山으로 逃亡쳤으나 虎狼谷 戰鬪에서 하고 自決하고 말았다. 黃巢亂 平定長安 奪還一等 功臣朱全忠宣武節度使任命되고, 李克用河東節度使任命되었다. 李克用朱全忠과의 勢力 싸움에서 밀려 憤死했다. 朝廷實權掌握朱全忠唐 王朝의 마지막 皇帝 哀宗 (在位 903907)하고 스스로 帝位에 올라 後梁을 세웠으나, 16年 後 李克用의 아들 李存勖에게 滅亡當했다. 李存勖後唐을 세우고 帝位에 올랐는데, 이이가 바로 莊宗이다.

 

李克用元來 터키사타首將이었다. 元來朱邪인데, 그의 아버지 주야적심(朱邪赤心)徐州軍人 龐勳이 일으킨 (868869)平定功勞나라에서 李氏 姓下賜받은 까닭에 그 亦是 李氏 姓使用하게 되었다. 黃巢이 일어나 天下가 어지러워지자 李克用雲州 사타軍士들에게 推戴되어 나라 朔州襲擊했다가 失敗하고 숨어 지내고 있었는데, 나라에서 黃巢討伐하기 해 그의 容恕하였기 때문에 그는 贖罪하기 해서 功勳을 세워야겠다는 決意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앞장서 싸웠고, 黃巢亂 平定朱全忠과 더불어 一等 功臣이 되어 河東節度使任命된 것이다. 이때 李克用의 나이는 28였다. 李克用해서는 資治通鑑에 다음과 같이 記錄되어 있다.

 

克用當時 28로 여러 將帥 中에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 黃巢를 깨뜨리고, 長安回復하는 데 第一이었다. 軍勢가 가장 强力하여 여러 將帥들이 그를 모두 두려워했다. 克用은 한쪽 눈이 아주 작았기 때문에 當時 사람들은 그를 獨眼龍이라 불렀다.

(克用時年二十八, 於諸將最少而破黃巢, 復長安, 功第一. 兵勢最强, 諸將皆畏之. 克用一目微, 時人謂之獨眼龍.)

 

활의 名手였던 李克用平素 활을 쏠 때마다 왼쪽 눈을 감고 目標照準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이 失明을 했다고 잘못 해지게 되었다. 僖宗李克用이 활을 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고 이야말로 猛將 獨眼龍이로다.(此眞猛將獨眼龍也.)”라고 말하며 讚歎치 못했다고 한다.

 

李克龍한 이야기는 資治通鑑, 舊五代史 唐紀, 新唐書李克用傳에 나온다.

 

 

32. 돈제일주(豚蹄一酒)

돼지 발굽과 술 한 . 작은 物件이나 精誠으로 큰 것을 하려고 하는 것을 比喩

 

齊威王 8나라가 크게 軍隊動員하여 나라를 侵攻했다. 齊王은 순우곤(淳于髡)에게 나라로 가서 援兵해 오도록 하면서 黃金 百 斤과 수레 열 禮物로 가져가게 했다. 淳于髡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웃자 의 끈이 모두 끊어졌다. 이 물었다. “先生은 이것을 적다고 생각하시오?” “어찌 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웃는 데에 어찌 하고 싶은 말이 없겠소?” “이제 쪽으로부터 오던 에 길가에서 豊作을 비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돼지 발굽 하나와 술 한 을 놓고 다음과 같이 빌었습니다. ‘높은 밭에서는 채롱에 가득하고 낮은 밭에서는 수레에 가득하도록 五穀이여 豊盛하게 익어서 집 안에 가득 넘쳐라.’ 은 그 손에 잡은 것은 그렇게 작으면서 하는 것은 그처럼 奢侈스러운 것을 보았기 때문에 웃은 것입니다.” 魏王黃金 千 溢, 白璧 , 네 마리가 끄는 마차 百 臺禮物을 늘려 주었다. 淳于髡作別 人事를 하고 나라에 들어가자, 나라 精兵 10과 가죽수레 千 臺를 보내 주었다. 이 말을 들은 나라는 밤중에 軍士를 돌려 撤收했다.

(威王八年, 楚大發兵加齊. 齊王使淳于髡之趙請救兵. 齎金百斤, 車馬十駟. 淳于髡仰天大笑, 冠纓索口. 王曰, 先生少之乎. 髡曰, 何敢. 王曰, 笑豈有說乎. 髡曰, 今者臣從東方來, 見道傍有禳田者, 操一豚蹄, 酒一盂. 祝曰, 甌簍滿簍, 洿邪滿車, 五穀蕃熟, 穰穰滿家. 臣見其所持者狹而所欲者奢, 故笑之. 於是齊威王乃益齎黃金千溢, 白璧十雙, 車馬百駟. 髡辭而行, 至趙. 趙王與之精兵十萬, 革車千乘. 楚聞之, 夜引兵而去.)

 

이 이야기는 史記 滑稽列傳에 나온다. 淳于髡比喩를 든 말에서 豚蹄一酒由來하여, 작은 精誠이나 物 件으로 큰 것을 하려고 하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33.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 东家食西家宿

쪽 집에서 먹고 西쪽 집에서 잔다. 自己의 잇속을 차리기 위해 志操 없이 이리저리 빌붙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라에 한 女子가 있었는데 두 집에서 請婚이 들어왔다. 父母가 딸에게 말했다. “쪽 집으로 집가고 싶으면 왼쪽 소매를 걷고, 西쪽 집으로 가고 싶으면 오른쪽 소매를 걷어라.” 딸은 쪽 소매를 다 걷었다. 父母가 그 까닭을 묻자 딸이 對答했다. “쪽 집에서 밥을 먹고 西쪽 집에서 잠을 자겠습니다.”

(齊有女, 二家求之. 其家語其女曰, 汝欲東家則左袒, 欲西家則右袒. 其女兩袒. 父母問其故, 對曰, 願東家食而西家宿.)응소(應劭)風俗通義引用* 太平御覽

 

나라 사람에게 딸이 있었는데 두 집에서 와서 請婚을 했다. 쪽 집 아들은 못생겼으나 富者였고, 西쪽 집 아들은 잘생겼으나 가난했다. 父母決定을 내리기가 어려워 딸에게 한쪽 소매를 걷어 意思表示하도록 했다. 딸은 卽時 두 소매를 다 걷었다.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묻자 딸이 對答했다. “쪽 집에서 먹고 西쪽 집에서 자려고요.”

(齊人有女, 二家同往求之. 東家子醜而富, 西家子好而貧. 父母不能決, 使其女偏袒示意. 女便兩袒. 母問其故, 答曰, 欲東家食而西家宿.)

* 古今譚槪

 

東家食西家宿東食西宿이라고도 한다.

 

東家食西家宿元來一定居處가 없이 떠돌아다니며 지내는 것을 말했으나, 自己 잇속을 차리기 志操 없이 여기저기 빌붙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使用하게 되었는데, 이에 한 이야기는 朝鮮 때의 大東奇聞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朝鮮太祖 李成桂開國後 朝廷에서 開國功臣들을 불러 酒宴을 베풀었다. 그때 어떤 政丞이 술이 얼근하게 해서 妓生 雪中梅에게 말했다. “너는 東家食西家宿하는 妓生이니 오늘 밤에는 이 늙은이의 守廳을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러자 雪中梅對答했다. “東家食西家宿하는 妓生, 어제는 王氏를 모시다가 오늘은 李氏를 모시는 政丞 어른을 모신다면 宮合이 잘 맞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功臣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술자리는 을 잃고 하고 말았다.

 

 

34. 돌돌핍인(咄咄逼人)

氣勢騰騰하게 힘으로 몰아친다.

 

中國 東晋時代 學者 고개지(顧愷之 348~409)가 어느 날 벗 은중감(殷仲堪)의 집을 찾았다. 마침 恒玄이라는 사람이 머물고 있었다. 셋은 時間을 보낼 料量으로 글자 놀이를 했다.

單語를 뽑아들면 그에 걸맞은 解釋을 하는 게임이다.

危殆롭다는 뜻의 가 뽑혔다. 各者 한마디씩 한다. ‘防牌 머리로 쌀을 일고 칼 끝으로 밥을 짓는 것 (矛頭淅米劍頭炊·戰爭을 일삼는다는 뜻)’ ‘百 歲 老人이 썩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形局(百歲老翁攀枯枝)’ ‘우물의 도르레에 어린아이가 누워 있는 꼴(井上轆轤臥嬰兒)’ 모두 危險千萬狀況을 얘기했다.

그때 殷仲堪部下氣勢騰騰하게 달려와 사람을 밀치며(咄咄逼人) 말하길, “장님이 눈 먼 말을 타고, 밤중에 깊은 우물에 다다른 狀況(盲人騎瞎馬, 夜半臨深池)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에 세 의 선비들은 拍手를 치며 그것이 適格이로세라고 和答했다. 顧愷之逸話집에 하는 말이다.

氣勢騰騰하게 힘으로 몰아친다는 뜻을 가진 咄咄逼人出處. ‘元來 남을 윽박지르는 소리라는 뜻을 가진 였다. 一種擬聲語였던 셈이다.

中國에서 咄咄只今남을 꾸짖다라는 意味로 쓰인다. ‘氣勢洶洶咄咄逼人과 같은 말이다. 氣勢强盛함을 물결이 솟구치는 것(洶洶)比喩했다.

 

咄咄逼人이 꼭 사람만을 對象으로 한 것은 아니다. 中國 言論日本 電子製品咄咄逼人氣勢中國 市場蠶食하고 있다’ ‘한여름 더위가 咄咄逼人氣勢로 베이징을 嚴襲하고 있다等 事物이나 自然現狀에도 이 말을 쓴다.

單語國內 言論本格的으로 登場한 것은 中國日本 사이에 最近 벌어진 댜오위다오(釣魚島) 衝突 事件 以後. 中國對外的으로 힘의 外交를 쓰는 것이 아니냐는 指摘이 일면서 이를 形容하는 말로 쓰이기 始作했다.

中國韜光養晦 (實力을 감추고 힘을 기름) 戰略에서 벗어나 힘으로 相對國을 몰아붙이는 咄咄逼人時代로 접어들고 있다는 指摘도 나온다. 中國이 그동안 어둠 속에서 벼른 칼을 國際舞臺로 들고 나와 휘두른다면, 그 또한 가 아니겠는가...

 

 

35. 동시효빈(東施效顰) 东施效颦

東施가 찡그리는 것을 따라 하다. 아름다운 西施가 얼굴을 찡그리고 다니는 것을 醜女東施가 따라 한다는 뜻으로, 自己 特性考慮하지 않고 無條件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을 比喩

 

옛날 西施는 가슴앓이 이 있어서 언제나 손으로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얼굴을 찡그리고 다녔다. 마을의 어떤 못생긴 사람이 그게 아름답게 보였는지 自己도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얼굴을 찡그리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마을의 富者들은 을 굳게 닫아 버렸고, 가난한 들은 家族을 데리고 떠나 버렸다. 그 사람은 찡그리는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만 알았지, 찡그리는 것이 아름답게 보인 理由를 몰랐기 때문이다.

(故西施病心而顰其里, 其里之醜人見而美之, 歸亦捧心而顰其里. 其里之富人見之, 堅閉門而不出, 貧人見之, 挈妻子而去之走. 彼知顰美而不知顰之所以美.)

 

莊子 天運에 나오는데, 元來나라의 樂師長師金孔子弟子 顔淵에게 한 말이다. 莊子師金의 말을 빌려 時代變遷에 따라 制度道德해야 한다는 것을 强調하며, 孔子가 그 옛날 나라의 理想的政治나라와 나라에서 再現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醜女自己 生긴 모습은 생각지도 않고 無作定 西施를 흉내 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孔子尙古主義批判한 것이다.

 

莊子에는 東施라는 말이 없고 그냥 마을의 못생긴 사람(醜人)’이라고만 되어 있다. ‘東施라는 말은 後代에 와서 만들어 낸 것으로 推定되는데, 나라 翟灝通俗編 婦女에 처음으로 나온다. 이에 하면 西施本名施夷光으로, 浙江 苧蘿村 사람이다. 苧蘿村에는 東村西村이 있었는데, 施夷光西村에 살고 있었으므로 西쪽의 施氏라는 뜻의 西施라고 불리게 되었다. ‘東施쪽의 施氏를 말한다. 西施美人計를 써 吳王 夫差滅亡시키려는 越王 勾踐計劃에 따라 夫差에게 보내져 나라를 滅亡시키는 데 한몫 했다.

 

東施效顰찡그리는 것을 받다.’라는 뜻의 效顰西施가 눈을 찡그리다.’라는 뜻의 西施嚬目’, ‘西施가 가슴을 손으로 감싸다.’라는 뜻의 西施捧心이라고도 한다. 中國에서는 못생긴 女子가 눈을 찡그리는 것을 받다.’란 뜻의 醜婦效顰이라고도 쓴다.

 

 

36. 동호직필(董狐直筆)

나폴레옹이 펜은 칼보다 무섭다.”라고 한 것을 우리는 絶世名言이라고 배웠지만, 事實只今부터 2,600年 前中國董狐直筆이라는 말과 筆鋒이 칼끝보다 무섭다라는 말이 이미 있었다.

 

BC600年 頃에 이르러 諸侯國들의 權力君主 中心에서 漸次 貴族 中心制移動하는 時期이다.

나라에는 BC608年 晉 靈公이 겨우 7의 나이로 龍床에 올랐고, 實質的 權力一家掌握하고 있었다.

實權이 없는 어린 은 그의 나이 20가 되면서 每日같이 酒色에 빠져 지내거나 몹쓸 娛樂으로 歲月을 보내고 있었다.

나라의 元老이고 宰相趙盾이 여러 임금을 責望하자 晉靈公側近들이 趙盾除去하기로 圖謀하였다.

 

이러한 情報入手趙盾一旦 國境 附近으로 避身하여 事態觀望 하고. 兵權을 손에 쥐고있던 趙盾從弟 趙穿이 구테타를 일으켜 殺害, 趙盾이 돌아와 엉터리 새 임금을 세우는 政變이 일어났다.

事態收拾하고 全權을 더욱 確固掌握趙盾은 구테타의 主犯同生 趙穿亂臣賊子로 몰아 處罰하고 自身處身合理化한 이 事件을 두고,

當時 董狐 라는 史家“9乙丑日(27), 趙盾이 임금, 夷皐弑害하다.” 라고 記錄하였다.

 

天下에 두려울 것이 없던 趙盾

自身首陽山避身하고 있을 때 이 事件發生하였기 때문에 自身과는 直接的關聯이 없고, 事件 發生 卽時 歸京하여 殺害趙穿에따라 處刑 하였으며, 새로운 임금을 세워 社稷鞏固히 한 내가 이러한 陋名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抗辯 하면서 史官 董狐에게 記錄訂正命令하였다.

그러나 史官이라는 一個 末職不過董狐는 임금까지 左之右之하는 最高絶對 實力者 趙盾 宰相에게

趙盾避難하였다 하나 國境을 넘지 않았고, 宰相職返納 하지 않았기 때문에 弑害 當責任할 수 없을 뿐 아니라, 趙穿處罰 했다하나 그는 바로 趙盾從弟이고 그의 叛逆自身만을 한 것이라 볼 수 없기 때문에 이 記錄은 매우 正當함으로 고칠 수 없다."

라는 理由趙盾命令拒否하였다.

 

事件契機權力에 굽히지 않고 眞實記錄하려는 精神行動董狐直筆이라 부르게 되었고 後世 史官勿論 모든 記錄者에게 커다란 龜鑑이 되었다.

이런 敎訓으로 當時勿論 後世史家들이 自身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正確하고 옳은 記錄을 남기려는 風潮發達 되었는데, 를 하나 들어 본다면,

 

董狐直筆 以後 約 50이 지난 BC548年 齊나라의 齊莊公이 그의 스승이며 宰相崔杼의 아내를 强制로 빼앗아 奸通駭怪事件이 있었는데,

이에 激忿宰相 崔杼齊莊公殺害하고 새로운 허수아비 임금을 세운 뒤 스스로 全權掌握하는 政變이 일어났다.

 

이때 나라 史官太史 伯이었다.

그는 當然여름 5月 乙亥日(17) 崔杼君主弑害하다라고 記錄 하였다.

崔杼即時 反撥하여, 齊莊公은 임금이 아닌 一個 奸通한 사내일 뿐임으로 下剋上該當하는 弑害라는 用語 代身 誅殺 或이라는 말로 바꿀 것을 强要하였다.

當時史官制度史官 職을 맡은 家門擔當하였는데 이를 拒否史官 伯處刑 되었고, 뒤를 이어 史官을 맡은 同生 仲繼續 拒否하여 차례로 處刑되었다.

 

막내 同生 季史官 職繼承하였으나 이은 들의 죽음에도 不拘하고 亦是 記錄變更拒否하자, 崔杼도 어쩔 수 없이 막내 史官 季處罰하지 못하였고 나폴레옹보다 2,600 如 年 前筆鋒이 칼끝보다 무섭다라는 有名한 말을 남긴다.

이러한 中國 先人들의 記錄 精神歷史觀이 오늘날 世界 最古, 最高記錄 遺産을 남기게 된 原動力이고, 現代에도 이와 같이 權力抗拒하여 바른 記事記錄을 남기려는 勇敢意志를 우리는 董狐直筆 이라 부른다.

春秋左氏傳 (宣公) 2年朝

 

 

37. 동공이곡(同工異曲) 同工异曲

같은 樂工끼리도 曲調를 달리함. 精巧技量은 같으나 그 情趣는 다르단 말로, 處理하는 方法은 같아도 그 結果에 서는 差異가 남을 比喩하는 말. 오늘날 表現은 달라도 內容은 같다.’, ‘겉만 다를 뿐 內容은 똑같다.’라는 否定的意味로 많이 쓴다.

 

國字先生이 아침 일찍 太學에 들어가 學生들을 불러 校舍 아래에 세워 놓고 訓話하셨다. “學業은 부지런한 데서 精進되고 노는 데서 荒廢해진다. 行實은 생각하는 데서 이뤄지고, 마음대로 하는 데서 허물어진다. ··· 諸君들은 學業精進되지 않음을 근심할 것이지 官吏賢明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말고, 行實完成되지 못함을 근심할 것이지 官吏公定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말라.” 말을 마치기도 列 中에서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말하는 가 있었다. “先生님은 저희를 속이시는군요. 弟子로서 先生님을 섬긴 지는 오래되었습니다만, , 先生님은 입으로는 끊이지 않고 六藝文章을 읊조리셨고 손으로는 쉴 새 없이 百家을 펼치고 셨습니다. ··· 훌륭하고 아름다운 글에 푹 젖어서 그 妙美를 머금고 씹으며, 文章을 지어 著書가 집에 가득합니다.

 

위로는 · 夏 時代深遠博大文章, 周代殷代盤庚과 같이 文章이 읽기 어렵고 理解하기 어려운 글, 春秋謹嚴文章,左傳虛式的이고 誇張文章, 易經奇異하면서도 法式에 맞는 文章, 詩經의 바르고 아름다운 文章받으셨습니다. 아래로는 莊子이소(離騷), 司馬遷史記, 揚雄司馬相如와는 精巧技量은 같으나 그 情趣는 다릅니다. 先生님은 文章內容을 넓히고 表現自由롭게 하셨다고 할 만합니다.”

 

文章韓愈進學解一部이다. ‘同工異曲이란 제자들이 國字先生文章을 높이 評價하여 한 말로, 같은 방법으로 詩文을 지어도 그 情趣는 다르단 것이다. 弟子國字先生의 대화는 계속되는데 요약하면

 

그럼에도 不拘하고 先生님은 只今 周圍信任도 못 받고 親舊의 도움도 로 없어 자칫 를 받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家庭生活도 어려운데 處世道理云云함이 果然 合當한 일입니까?” 이에 國字先生對答要約하면

 

孔子孟子와 같은 聖賢들도 不遇했는데, 程度博士라는 閑暇한 벼슬에 붙어 있는 것만도 過分하다.”

韓愈進學解에서 國字先生弟子들이 對話하는 形式을 빌려 學者姿勢學業精進해야 함과 꾸준히 德行에 힘써야 함을 强調하며, 政治的으로는 不遇을 보냈던 聖人孟子荀子寄託하여 自身不遇處地隱然中에 드러내고 있다. ‘同工異曲異曲同工이라고도 한다.

 

進學解全文,

國字先生이 아침 일찍 太學에 들어가 學生들을 불러 校舍 아래에 세워 놓고 訓話하셨다. “學業은 부지런한 데서 精進되고 노는 데서 荒廢해진다. 行實은 생각하는 데서 이루어지고, 마음대로 하는 데서 허물어진다. 只今 聖君賢明宰相이 서로 만나 法令을 고루 펼쳐 兇惡하고 邪惡한 무리들은 除去해 내고 英俊人才들을 登用하여 優待하고 있다. 조그만 長技라도 가진 는 모두 選擇되고, 한 가지 주라도 이름이 난 는 쓰이지 않음이 없다. 손톱으로 긁어내고 그물질하기도 하고 剔抉하기도 하여 때를 닦아 내고 문질러 을 내듯이 하고 있다. 大槪 僥幸으로 選擇도 있겠지만 누가 주는 많은데 드날려지지 않았다고 하겠는가? 諸君들은 學業精進되지 않음을 근심할 것이지 官吏賢明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말라. 行實完成되지 못함을 근심할 것이지 官吏公正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말라.”

 

말을 마치기도 列 中에서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가 있었다. “先生님은 저희를 속이시는군요. 弟子로서 先生님을 섬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先生님은 입으로는 끊이지 않고 六藝文章을 읊조리셨고, 손으로는 쉴 새 없이 百家을 펼치고 계셨습니다. 事實記錄한 것은 반드시 要點把握하셨고, 思想記錄한 것은 반드시 玄妙理致糾明하셨습니다. 많은 것을 바라고 얻기를 힘쓰시며 작은 것 큰 것 할 것 없이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기름을 태워 낮을 이어 恒常 쉬지 않고 한 해를 보내셨습니다. 先生님의 學業은 부지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異端排斥하고, 부처와 老子思想을 물리치셨고, 틈과 새는 곳을 補完하셨고, 奧妙理致擴大하여 밝히셨습니다. 稀微하게 衰退緖業을 찾아 홀로 널리 뒤져 멀리 있었습니다. 온갖 냇물을 막아 쪽으로 흐르게 하고, 이미 엎어진 데서 세찬 물결을 回復시켰습니다.

 

先生님은 儒者로서 勞苦를 다하셨습니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글에 푹 젖어서 그 妙美를 머금고 씹으며, 文章을 지으니 著書가 집에 가득합니다. 위로는 · 夏 時代深遠博大文章, 周代殷代盤庚과 같이 文章이 읽기 어렵고 理解하기 어려운 글, 春秋謹嚴文章, 左傳虛式的이고 誇張文章, 易經奇異하면서도 法式에 맞는 文章, 詩經의 바르고 아름다운 文章을 본받으셨습니다. 아래로는 莊子離騷, 司馬遷史記, 揚雄司馬相如와는 精巧技量은 같으나 그 情趣는 다릅니다. 先生님은 文章內容을 넓히고 表現自由롭게 하셨다고 할 만합니다.

 

어려서부터 學問을 알기 始作하여 하는 데 勇敢하셨고, 바른 道理通達하셔서 左右 모든 일이 合當합니다. 先生님은 사람됨에 있어서 完成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公的으로는 남에게 信任받지 못하고, 私的으로는 親舊에게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가도 넘어지고 뒤로 가도 자빠지며 움직이면 곧 허물을 얻게 됩니다. 暫時 御使가 되었다가 마침내 쪽 오랑캐 地方으로 流配되고, 三 年 동안 博士로 계셨지만 한 일 없이 아무 治積도 보일 수 없었습니다. 運命怨讐謨議하였으니, 失敗한 적이 몇 입니까. 겨울이 따뜻해도 아이들은 춥다고 울부짖고, 豊年이 들어도 師母님께서는 배고파 우셨으며, 머리가 벗겨지고 이도 빠지셨으니 마침내 죽으면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이것을 생각할 줄 모르시고 도리어 남들에게 敎訓을 하시는 것입니까.”

 

先生이 말하였다. “! 자네, 앞으로 나오라. 무릇 큰 나무는 들보가 되고, 가는 나무는 서까래가 되며 박로, 주유, 지도리, 門地枋, 빗장, 설주가 各其 마땅함을 얻어 집을 이루는 것은 木手技術이다. 옥찰, 단사, 적전, 청지나, 우수(소 오줌이라고도 함)풀과 마발버섯(藥材로 쓰는 버섯)이나 찢어진 북의 가죽을 모두 거두어 貯蓄해 놓고, 쓰일 때를 기다려 버리는 일이 없는 것은 의사의 高明함이로다.

 

벼슬의 登用公明하고 選拔公正하며, 잘난 와 못난 를 뒤섞어 官職에 나아가게 하고, 才能豊富하여 餘裕綽綽를 훌륭하다고 하고 卓越俊傑이라 하는데, 長短點比較하고 헤아려 能力適合하도록 任命하는 것은 宰相道理이다.

 

옛날 孟子辯論을 좋아해 孔子를 밝혔으나, 수레를 타고 天下를 돌아다니다 마침내 길에서 늙어 갔다. 荀子는 바른 道理를 지켜 偉大言論興盛시켰으나, 讒訴나라로 逃亡하였다가 蘭陵에서 죽었다. 이 두 儒家는 말을 뱉으면 經典이 되고 一擧一動法道가 되었으니, 凡常한 무리를 떠나 聖域에 들어섰지만 世上과의 만남은 어떠하였는가.

 

只今 나는 學業은 부지런히 하지만 都統繼承하지 못했고, 말은 많지만 中心體得하지 못했고, 文章은 비록 奇異하지만 世上에 쓰이지 못했고, 行實은 닦아졌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외려 달마다 俸給浪費하고 해마다 倉庫 속의 穀食消費하고 있다. 아들은 農事지을 줄 모르고, 婦人은 베를 짤 줄 모른다. 말을 타고 從者를 따르게 하며 便安히 앉아서 밥을 먹고 지낸다. 애쓰면서 平凡한 길을 따라가며 옛날 이나 보고 훔치는 짓을 하고 있다.

 

그러나 聖明하신 天子께서는 주지 않으시고, 宰相排斥하지 않으니 이는 多幸이 아닌가. 걸핏하면 誹謗을 듣고 不名譽도 따라붙고 있으니, 閑散職分處身하는 것이 分數에 맞는 일이다. 萬若 財物의 있고 없음을 헤아리고, 地位俸祿의 높고 낮음이나 計算하면서 自己 力量適合한 자리를 잊고서 上官의 잘못이나 꼬집고 있다면, 이것은 이른바 말뚝으로 기둥을 삼지 않는다고 木工詰難하고, 醫師가 창양(菖蒲)으로 壽命連長시키려 하는 것을 批評하며 희령(毒草)推薦하는 것과 같은 일이니라.”

 

 

38. 동엽봉제(桐葉封弟) 桐叶封弟

오동나무 잎으로 同生諸侯하다. 어떤 말이든 할 때는 操心해야 한다는 것을 比喩

 

成王同生인 숙우(叔虞)와 소꿉놀이를 하며 梧桐나무 잎을 따 (信標)로 삼아 叔虞에게 주면서 장난으로 말했다. “이것으로 너를 諸侯한다.” 太史 사일(史佚)이 이 말을 듣고 吉日叔虞하는 儀式擧行하자고 奏請했다. 그러자 成王이 말했다. “난 그저 장난으로 했을 뿐이오.” 사일(史佚)이 말했다. “天子에게는 장난으로 하는 말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하시면 史官記錄을 하고 로써 그 일을 擧行하며 音樂으로 그 일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叔虞해졌다.

(成王與叔虞戲, 削桐葉爲珪以與叔虞, , 以此封若. 史佚因請擇日立叔虞. 成王曰, 吾與之戲耳. 史佚曰, 天子無戲言. 言則史書之, 禮成之, 樂歌之. 於是遂封叔虞於唐.)

 

이 이야기는 史記 진세가(晉世家)에 실려 있는데, 梧桐나무 잎으로 信標를 삼아 同生諸侯했다는 말에서 桐葉封弟由來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天子에게는 弄談이 없다는 뜻의 天子無戱言이란 말도 나왔는데, ‘桐葉封弟와 더불어 責任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恒常 言動操心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叔虞周武王의 아들이자 成王同生으로, 나라의 始祖이다. 나라 武王이 죽고 아들 成王이 어린 나이에 卽位하자 武王의 아우인 周公 旦攝政을 했었다.

 

같은 이야기를 '呂氏春秋 重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이 된 는 말을 愼重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强調하기 하여 桐葉封弟故事引用했는데, 成王에게 天子에게는 戱言이 없다고 말하며 同生 叔虞諸侯해야 한다고 主張한 사람이 周公이라고 되어 있다.

 

임금이 된 사람은 愼重하지 않으면 안 된다. 高宗皇帝卽位하자마자 을 치렀는데, 三 年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大夫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이 일을 근심했다. 高宗이 말했다. “나 한 사람이 四方을 다스리다 보면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까 봐 말을 하지 않은 것이오.” 古代天子는 말을 이처럼 重要하게 여겼기 때문에 말을 함에 失手가 없었다. 成王唐叔虞閑暇히 둘이 있을 때 梧桐잎을 따 信標로 삼아 唐叔虞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것으로 너를 한다.” 叔虞는 기뻐하며 周公에게 이를 말했다. 周公成王에게 했다. “天子께서는 叔虞하려 하십니까?” 成王이 말했다. “나 혼자서 叔虞와 장난을 한 것입니다.” 周公이 말했다. “天子에게는 장난으로 하는 말이 없는 것이라고 은 들었습니다. 天子가 말을 뱉으면 史官記錄하고, 樂工이 노래하며, 선비들이 稱頌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唐叔虞땅에 하게 되었다. 周公 旦은 말을 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말로 成王으로 하여금 한 말을 重要하게 여기게 했고, 同生을 사랑하는 뜻을 밝히게 했으며, 王室堅固함을 輔佐함이 있었다.

(人主之言, 不可不愼. 高宗, 天子也. 卽位, 凉暗, 三年不言. 卿大夫恐懼, 患之. 高宗乃言曰, 以余一人正四方, 余唯恐言之不類也, 玆故不言. 古之天子, 其重言如此, 故言無遺者. 成王與唐叔虞燕居, 援梧葉以爲珪, 而援唐叔虞曰, 余以此封女. 叔虞喜, 以告周公. 周公以請曰, 天子其封虞邪. 成王曰, 余一人與虞戱也. 周公對曰, 臣聞之, 天子無戲言. 天子言, 則史書之, 工誦之, 士稱之. 於是遂封叔虞於晉. 周公旦可謂善說矣. 一稱而令成王益重言, 明愛弟之義, 有輔王室之固.)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柳宗元呂氏春秋에 실려 있는 內容根據로 하여 桐葉封弟辯이란 作品을 썼는데, 全文은 다음과 같다.

 

옛날의 典籍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成王梧桐나무 잎을 어린 同生에게 주면서 장난 삼아 말했다. “이것으로 너를 한다.” 周公이 들어가 祝賀를 하자 이 말했다. “장난이었소.” 그러자 周公이 말했다. “天子戱言을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어린 同生땅에 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同生冊封되는 것이 妥當한 것이었다면 周公이 때에 맞추어 에게 말을 했겠지, 戱言을 하기를 기다렸다가 祝賀함으로써 成事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冊封하는 것이 妥當하지 않았는데도 周公不合理한 장난을 成事시켜 땅과 人民들을 어린 사람에게 주어 君主가 되게 하였다면, 그를 聖人이라 할 수 있겠는가? 또한, 周公의 말은 苟且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 반드시 그 말을 좇아 일을 成事시켰겠는가? 萬若 不幸하게도 梧桐나무 잎으로 婦女子宦官에게 戱言을 했다면, 亦是 이를 들어 좇았겠는가?

 

무릇 王子이란 그 함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萬若 妥當하지 않다면 비록 열 을 바꾸어도 問題가 되지 않지만, 萬若 妥當하다면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물며 장난으로 한 일에 있어서야 어떠하겠는가. 萬若 장난으로 한 일을 반드시 하게 했다면 이는 周公을 잘못하게 만든 것이다. 내 생각에 周公成王輔弼할 때 程度로써 점잖고 부드러우며 餘裕 있고 즐겁게 하여 至極公正한 데로 돌아가게 했지, 失手를 타서 그것을 구실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한 不當하게 束縛하여 몰아붙여 소나 말을 부리는 것처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면 일을 그르치는 것이다. 집안의 父子 關係도 이런 方法으로는 일을 다스릴 수가 없는 것인데, 하물며 君臣이라 하는 關係에 있어서야 어떠하겠는가? 이런 것은 小人輩知慧롭지 못한 일일 뿐이지, 周公方法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을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唐叔虞한 것은 太史 윤일(尹佚)成事시킨 것이다.”

(古之傳者有言. 成王以桐葉與小弱弟戱, , 以封汝. 周公入賀, 王曰, 戱也. 周公曰, 天子不可戱. 乃封小弱弟於唐. 吾意不然. 王之弟當封耶, 周公宜以時言於王, 不待其戱而賀以成之也. 不當封耶, 周公乃成其不中之戱, 以地以人與小弱者爲之主, 其得爲聖乎. 且周公以王之言不可苟焉而已, 必從而成之耶. 設有不幸, 王以桐葉戱婦寺, 亦將擧而從之乎. 凡王者之德, 在行之何若. 設未得其當, 雖十易之不爲病, 要於其當, 不可使易也. 而況以其戱乎. 若戱而必行之, 是周公敎王遂過也. 吾意周公輔成王, 宜以道從容優樂, 要歸之大中而已, 必不逢其失而爲之辭, 又不當束縛之, 馳驟之, 使若牛馬然. 急則敗矣. 且家人父子, 尙不能以此自克, 況號爲君臣者耶. 是直小丈夫缺缺者之事, 非周公所宜用. 故不可信. 或曰, 封唐叔, 史佚成之.)

 

本文에서 말하는 옛날의 典籍이란 史記 晉世家를 말한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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