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ㄷ-2 대간사충~ )
11. 대간사충(大姦似忠) 大奸似忠
큰 姦似함은 忠誠같이 보인다. 악한 本性을 숨기고 가장 充實한 체하는 것을 比喩
文治主義를 標榜한 宋나라는 敎育과 商業이 發達하고, 學問과 文化가 꽃을 피웠다. 하지만 文人 官僚制로 因한 軍士力의 弱化와 外交上의 失責으로 王朝 내내 危機 속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하고, 異民族인 거란(契丹)族의 遼나라, 黨項, 탕구트)族의 西夏, 女眞族의 金나라, 그리고 蒙古族의 元나라에 차례로 屈辱을 當했다. 宋나라는 이들 異民族들의 要求 事項을 金錢으로 解決하는 方法을 썼는데, 그러다 보니 財政이 枯渴되고 말았다. 하여 第5代 皇帝 英宗 (在位 1063∼1067)은 이런 問題를 解決하고 國力을 키우기 爲해 改革을 始作했으나, 卽位 4年 만에 世上을 뜨고 말았다.
19歲의 나이로 그 뒤를 이은 神宗 (在位 1067∼1085)은 王安石을 拔擢하여 英宗이 이루지 못한 改革을 繼續 推進했다. 王安石은 神宗의 絶對的인 支持와 信任 아래 旣得權 側의 反對를 무릅쓰고 새로운 法인 新法을 公布했다. 新法은 農民의 租稅와 役 負擔을 덜어 주고, 商人의 獨占으로 因한 品貴 現狀을 解消시키며, 兵農一致 政策으로 國方을 强化하려는 强力한 改革 政策을 包含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法은 旣得權을 浸害當한 皇室, 貴族官僚, 地主와 富豪들의 强力한 反對에 부딪혔다. 이 反對의 先鋒에 섰던 사람이 바로 御史中丞 呂誨 였으며, 司馬光,그리고 王安石과 더불어 唐宋八大家로 追仰받는 蘇軾과 歐陽修도 反對派였다. 呂誨는 王安石이 宰相에 就任하는 것부터 反對했던 사람으로, 新法이 繼續 提出되자 神宗에게 王安石을 彈劾하는 上疏를 올렸다.
「臣은 크게 姦邪한 사람은 忠臣처럼 보이며, 큰 속임수는 믿음직하게 보인다고 들었습니다. 王安石은 겉으로는 質朴하게 보이지만 마음에는 姦邪함을 품고 있습니다. 王安石은 驕慢하여 皇室을 업신여기고 陰險하게 남을 해치려 하는 奸慝한 人間입니다.
(臣聞大奸似忠, 大詐似信. 安石外示朴野, 中藏奸詐, 驕蹇慢上, 陰賊害物.)」
이렇게 몰아붙였지만 神宗은 王安石에 對한 信任을 거두지 않고 오히려 呂誨를 地方으로 左遷시키면서까지 改革을 推進했다. 그런데 神宗이 죽고 10歲의 哲宗이 卽位하자, 新法으로 因해 親政이 많은 損害를 입게 되어 新法을 몹시 嫌惡하던 太皇太后 高氏의 攝政이 始作되었다. 太皇太后 高氏가 맨 처음 한 일은 守舊派의 人物인 司馬光을 宰相으로 起用한 일이었다. 新法의 大部分이 廢止되고 新法黨의 官吏들도 大部分 左遷을 當했다. 1086年 4月, 王安石은 新法이 事實上 모두 廢止되었다는 悲痛한 消息을 들으며 病死했다.
* 宋史 呂誨傳에.
12. 대공무사(大公無私) 大公无私
매우 公正하여 私事로움이 없다. 公的인 일 處理에서 個人 感情을 介入시키지 않거나, 大義를 爲해 些少한 怨恨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晉나라의 平公이 기황양(祁黃羊)에게 물었다.
“南陽縣長 자리가 비어 있는데, 누가 잘할 것 같소?” 祁黃羊이 말했다.
“해호(解狐)가 가장 適合할 것입니다.” 平公이 祁黃羊에게 되물었다.
“解狐는 卿과 원수지간(怨讐之間)이 아닌가?” “王께서 누가 任務를 修行하는 데 적합한가를 물으셨지, 臣의 원수(怨讐)를 물으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平公은 解狐를 南陽縣長으로 임용했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잘된 任命이라고 稱頌했다. 얼마 후 平公이 또 祁黃羊에게 물었다.
“尉(軍士統帥) 자리가 비었는데, 누가 가장 적합하다고 보는가?”
“기오(祁午)라면 직책을 잘 堪當할 수 있을 것입니다.” 平公이 다시 물었다.
“祁午는 卿의 아들이 아니오?”
“王께서 그 자리에 누가 가장 적합한가를 물으셨지, 臣의 아들을 물으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平公은 祁午를 임용했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잘된 임명이라고 稱頌했다. 孔子가 이 일을 듣고 말했다.
“훌륭하다. 기황양(祁黃羊)의 건의는. 다른 사람을 추천하는데 원수(怨讐)라고 해서 배제하지 않았고, 자기 사람을 薦擧하는데 아들이라고 해서 피하지 않았으니, 祁黃羊이야 말로 大公無私하다고 할 수 있겠구나.”
(晉平公問於祁黃羊曰, 南陽無令, 其誰可而爲之. 祁黃羊曰, 解狐可. 平公曰, 解狐非子之仇邪. 對曰, 君問可, 非問臣之仇也. 平公曰, 善. 遂用之, 國人稱善焉. 居有間, 平公又問祁黃羊曰, 國無尉, 其誰可而爲之. 對曰, 午可. 平公曰, 午非子之子邪. 對曰, 君問可, 非問臣之子也. 平公曰, 善. 又遂用之, 國人稱善焉. 孔子聞之曰, 善哉. 祁黃羊之論也. 外擧不避仇, 內擧不避子, 祁黃羊可謂公矣.)」
《史記 晉世家》에 나오는데, 孔子의 祁黃羊에 對한 評에서 ‘大公無私’가 由來했다. ‘大公無私’의 또 하나의 出典은 《呂氏春秋 去私》이다.
「墨家의 사람 中에 鉅子인 腹黃享은 秦나라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殺人을 했다. 秦惠王이 말했다. “先生의 年歲가 많고 다른 아들이 없으니, 寡人이 官吏에게 誅罰하지 않도록 令을 내렸소. 先生은 이番 일은 寡人의 말을 들으시오.” 腹黃享이 對答했다. “墨家의 法에 사람을 죽인 者는 죽음에 處하고 사람을 傷하게 한 者는 刑罰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이로써 사람을 죽이거나 傷하게 하는 것을 禁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傷하게 하는 것을 禁하는 것은 天下의 큰 義입니다. 王께서 이 일에 恩惠를 내려 誅罰을 하지 않으시지만 腹黃享은 墨家의 法을 施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고는 惠王의 뜻에 따르지 않고 아들을 죽였다. 아들은 누구나 偏愛하는 것인데 自身이 偏愛하는 마음을 누르고 大義를 行하였으니, 그야말로 大公無私하다고 말할 수 있다.
(墨者有鉅子腹黃享, 居秦, 其子殺人. 秦惠王曰, 先生之年長矣, 非有它子也, 寡人已令吏弗誅矣, 先生之以此寡人也. 腹黃享對曰. 墨者之法曰, 殺人者死, 傷人者刑. 此所以禁殺傷人也. 夫禁殺傷人者, 天下之大義也. 王雖爲之賜而令吏弗誅, 腹黃享不可不行墨者之法. 不許惠王, 而遂殺之. 子, 人之所私也, 忍所私以行大義, 鉅子可謂公矣.)」
‘鉅子, 巨子’는 墨家 組織의 指導者를 말한다.
13. 대기만성(大器晩成)
큰 그릇은 늦게 찬다. 곧 크게 될 人物은 늦게 이루어진다.
老子의 道德經 41章에 大方無隅 大器晩成이란 句節에서 온 말이다. * 노자 도덕경(老子 道德經) 38장~50장
큰 人物은 하루아침에 간단히 되는 것이 아니라 忍苦의 歲月을 修練하고 努力하는 課程을 거쳐야 비로소 이뤄진다는 것이다.
三國時代 魏나라에는 山東省 武城 出身의 名將 최염(崔琰) 계규(季珪 字)가 있었다.
그는 大人의 品格을 지녔고 목소리는 우렁차며 큰 키에 당당하고 우람한 체격에 수염이 넉 자나 되었다.
그에게 四寸同生으로 人品이 떨어지는 '崔林' 이란 자가 있었다. 남들이 林을 하찮은 存在로 여겨 멸시(蔑視)했으나 그만은 그가 함부로 보아 넘길 인재가 아님을 看破하고 있었기에 周圍 사람들에게 그를 가리켜 "큰 鐘이나 큰 솥은 쉬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큰 人材도 쉬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며 감쌓다. 歲月이 지나 刻苦의 努力 끝에 林은 三公의 한 사람으로 天子를 輔弼한 大政治家가 되었다.
* 後漢書 馬援傳에는
後漢 光武帝때 名將 馬援은 邊方 官吏에서 出發하여 伏波將軍(漢武帝 以來 큰 功을 세운 將軍께 내린 稱號) 까지 된 人物이다. 그가 처음 官吏로 赴任할 때 그의 兄 馬況이 멸시(蔑視)한 말 중에 나온다. "너는 큰 才能을 갖었다. 더디 이뤄질 것이다. 솜씨 좋은 木手가 남에게 보여주지 않고 잘 다듬듯이 너도 才能을 살려 努力하렴"
(汝大才, 當晩成. 良工不示人以朴, 且從所好)
14. 대동소이(大同小異) 大同小异
크게 같고 작게 다르다. 原 뜻은 크게 보면 서로 같지만 작게 보면 各各 다르다는 것인데, 差異가 없이 거의 비슷하다는 말로 쓰인다.
「혜시(惠施)의 著述은 多方面에 걸쳐 다섯 수레나 되는데 그의 道는 複雜하고, 그가 말하는 바는 정곡(正鵠)을 잃었으며, 그의 생각은 萬物에 걸쳐 있다. 그는 말했다. “至極히 커서 밖이 없는 것을 大一이라 하고, 至極히 작아서 속이 없는 것을 小一이라 한다. 두께가 없는 것은 쌓아 올릴 수가 없지만, 그 크기는 千 里나 된다. 하늘은 땅과 더불어 낮고, 山은 못과 같이 平平하다. 해는 將次 中天에 뜨지만 將次 기울고, 萬物은 將次 태어나지만 또한 將次 죽는다. 크게 보면 같다가도 작게 보면 다르니 이것을 小同異라 하고, 萬物은 모두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니 이것을 大同異라 한다. 南쪽은 끝이 없음과 同時에 끝이 있고, 오늘 南쪽의 越나라로 간 것은 어제 越나라에서 온 것이다. 꿰어 있는 고리도 풀 수가 있다. 나는 天下의 中心을 알고 있다. 燕나라의 北쪽이며 越나라의 南쪽이 그곳이다. 萬物을 넓게 差別 없이 사랑하면 天地도 하나가 된다.” 惠施는 自己가 天下를 達貫한 자라고 自負하여, 이로써 여러 사람을 가르쳤다.(惠施多方, 其書五車. 其道舛駁, 其言也不中. 歷物之意曰. 至大無外, 謂之大一. 至小無內, 謂之小一. 無厚, 不可積也, 其大千里. 天與地卑, 山與澤平. 日方中方睨, 物方生方死. 大同而與小同異, 此之謂小同異. 萬物畢同畢異, 此之謂大同異. 南方無窮而有窮, 今日適越而昔來. 連環可解也. 我知天下之中央. 燕之北越之南是也. 氾愛萬物, 天地一體也. 惠施以此爲大, 觀於天下而曉辯者.)」
《莊子 天下》에 나온다. 莊子는 墨家와 法家 等의 學說을 批判하고 道가 思想을 宣揚하면서 뒷부분에 惠施의 論理를 소개하고 自己 意見을 덧붙였는데, ‘大同小異’는 바로 莊子가 引用한 惠施의 말에서 나왔다. 惠施는 時間과 空間의 無限性, 萬物이 가지고 있는 相對性을 말했는데, 惠施가 말한 ‘大同小異’란 相對的 觀點에서 보이는 差異가 아니라, 큰 틀에서 보면 서로 같지만 작은 틀에서 보면 各各 다르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差異가 없이 거의 비슷하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15. 대우탄금(對牛彈琴) 对牛弹琴
소를 마주하여 거문고를 타다. 어리석은 사람은 마치 거문고를 타 소에게 들려주는 것같이 아무리 道理를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함을 比喩
後漢 末期에 모융(牟融)이라는 學者가 있었다. 그는 佛經에 밝아 많은 사람들이 佛經을 배우러 그를 찾아왔다. 모융(牟融)은 儒學者에게 佛敎를 說明할 때는 佛典이 아니라 儒學의 經典을 引用했다.
「儒學者가 그 까닭을 물었다. “그대 말로는 佛經은 큰 江과 바다 같고 말씀이 緋緞과 같다 하더니, 내 물음에 어찌 佛經으로 對答하지 않고 《詩經》과 《書經》에 있는 말을 引用하시오. 이는 궤변(詭辯)이 아니오?” 牟融이 말했다. “목이 마른 사람일지라도 江이나 바다의 물을 마실 必要가 있는 것은 아니고, 배가 고픈 사람도 倉庫를 열어 배를 채워야 할 必要가 있는 것은 아니지요. 道라는 것은 智慧로운 자에게 펴는 것이요, 分別함은 事物을 아는 자에게 通하는 것이요, 글은 聰明한 사람에게 傳할 수 있고, 일을 꾸밈은 明晳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내가 그대의 意圖를 알기 때문에 그 合當한 말을 引用하는 것이오. 萬若에 佛經의 말을 引用한다면 그 要諦를 알 수 없을 것이오. 比喩하자면 눈먼 소경에게 여러 가지 色깔을 말해 주고 귀머거리에게 音樂을 들려주는 것이오. 사광(師曠)의 才주가 아무리 뛰어나도 줄 없는 거문고로 소리를 낼 수 없으며, 담비 털옷이 따뜻하다고는 하나 죽은 者를 따뜻하게는 못 하는 것이오. 公明儀가 소를 위해서 아름다운 音樂을 演奏해도 여전히 엎드려 풀만 뜯어 먹는 것은 소가 듣지 못함이 아니라 듣고자 하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이오. 하지만 바꾸어 모기나 등에 따위 소리를 내거나 송아지 우는 소리를 내면 (소는) 꼬리를 젓고 귀를 세우며 빙빙 돌면서 듣지요. 이런 까닭에 《詩經》과 《書經》을 引用해 그대가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오.”
(問曰, 子云(佛)經如江海, 其文如錦繡, 何不以佛經答吾問, 而復引詩書, 合異爲同乎. 牟子曰, 渴者, 不必須江海而飮, 飢者, 不必待廒倉而飽. 道爲智者設, 辯爲達者通, 書爲曉者傳, 事爲見者明, 吾以子知其意, 故引其事. 若說佛經之語, 談無爲之要. 譬對盲者, 說五色, 爲聾者奏五音也. 師曠雖巧, 不能彈無弦之琴, 狐貉雖熅, 不能熱無氣之人. 公明儀爲牛彈淸角之操, 伏食如故, 非牛不聞, 不合其耳矣. 轉爲蚊虻之聲, 孤犢之鳴, 卽掉尾, 奮耳, 蹀躞而聽. 是以詩書, 理子耳.)」
이 이야기는 《弘明集 이혹논(理惑論)》에 나오는데, 모융(牟融)이 例로 든 이야기인 소를 위해 아름다운 音樂을 演奏해도 소는 전혀 關心 없다는 말에서 ‘對牛彈琴’이 由來했다.
‘對牛彈琴’과 비슷한 말로는 말귀에 東風이 분다는 뜻으로 남의 말을 새겨듣지 않고 귓등으로 흘리는 것을 比喩하는 말인 ‘馬耳東風’, 소귀에 經 읽기라는 뜻의 ‘牛耳讀經’이 있다.
16. 대의멸친(大義滅親) 大义灭亲
大義를 위해서는 <罪를 지으면> 親族도 滅 한다. 나라나 民族의 利益을 위한 일에는 父母나 兄弟의 程度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春秋時代 衛나라 莊公이 愛妾에게서 아들 주우(州吁)를 낳았다. 莊公이 州吁를 너무 총애(寵愛)한 탓에 州吁가 너무 방종(放縱)했으므로, 석작(石碏)이란 늙은 臣下가 莊公에게 子弟들을 사치(奢侈)와 방탕(放蕩)과 안일(安逸)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諫했지만 莊公은 石碏의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莊公이 죽은 뒤 桓公이 王位에 올랐다. 權力慾에 눈이 먼 州吁는 수시로 桓公을 陰害하고 王位 찬탈(簒奪) 陰謨를 꾸미기 始作했으며, 석작(石碏)의 아들 석후(石厚)도 주우(州吁)에게 나쁜 計策을 알려주곤 했다. 石碏은 州吁에게 역심(逆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아들 石厚에게 州吁와 교제를 하지 말라고 했지만 石厚는 아버지의 말도 듣지 않았다. 周桓王 元年(BC719), 州吁는 마침내 桓公을 시해(弑害)하고 스스로 王이 되었으며 石厚를 上大夫에 封했다. 하지만 百姓들이 복종(伏從)하지 않고 다른 諸侯들의 반응도 좋지 않자 州吁가 石厚에게 상의했다. “民心이 여전히 安定되지 않으니 어쩌면 좋겠는가?”
“臣의 아비가 지난날 上卿 벼슬에 있었습니다. 臣의 아비는 原來 百姓들의 信任이 대단했으므로 百姓을 쉽사리 服從시켰습니다. 臣의 아비를 불러 政事를 맡기시면 王의 자리가 安定될 것입니다.” 州吁는 많은 寶物을 보내 石碏을 불렀지만 石碏은 부름에 應하지 않았다. 그러자 州吁는 石厚를 石碏에게 보내 說得하도록 했다. “이番 새로 位에 오르신 王께서 아버지를 恭敬하며 思慕합니다.” 白髮이 星星한 石碏이 물었다. “새 王께서 나를 부른 뜻이 무엇이냐?” “王位가 安定되지 못해 아버지를 모셔다가 좋은 計策과 指示를 받기 爲해서라고 합니다.” 그러자 石碏이 計策을 일러 주었다. “天下의 宗室인 周 王室을 禮訪하여 天子를 拜謁하고 承認을 받는 게 좋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天子를 拜謁할 수 있을까요?” “먼저 周 王室과 恪別한 사이인 陳나라 桓公을 通해서 請願하도록 해라. 그러면 陳桓公께서 善處해 주실 것이다.”
州吁와 石厚는 기쁨을 禁치 못하고 膳物을 準備하여 陳나라로 떠났다. 石碏은 “主君을 弑害한 州吁와 石厚를 잡아 죽여 大義를 바로잡아 달라.”는 內容의 書信을 密使를 通해 陳桓公에게 보냈다. 州吁와 石厚는 陳나라에 到着하자마자 逮捕되고 말았다. 衛나라에서는 사람을 陳나라에 보내 두 사람을 處斷하게 하고, 桓公의 同生인 晉을 세웠는데, 이이가 衛宣公이다. 한편, 衛나라 大臣들은 石厚를 너그럽게 處分하자고 建意했다. 그러나 石碏은 이 建意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들 石厚를 處斷하도록 했다. 《左傳》의 著者는 이 事實을 記錄한 後, 다음과 같이 써 石碏의 이런 精神이 바로 ‘大義滅親’이라며 높이 評價했다.
「9月, 衛나라 사람들이 右宰인 丑에게 복(濮)에서 州吁를 죽이는 것을 監督하게 했다. 石碏은 그의 宰 (家臣)인 누양견(獳羊肩)을 시켜 陳에서 石厚를 죽이는 것을 監督하게 했다. 君子는 말한다. “石碏은 忠順하고 篤實한 臣下이다. 州吁를 미워하여 (아들)石厚를 함께 죽였다. 大義滅親은 바로 이를 이름인가.”(九月, 衛人使右宰丑莅殺州吁於濮. 石碏使其宰獳羊肩莅殺石厚於陳. 君子曰, 石碏, 純臣也, 惡州吁而厚與焉. 大義滅親, 其是之謂乎.)」
이 이야기는 《左傳 (隱公) 34年》에 나온다.
17. 대의멸친(大義滅親) 大义灭亲 교사음일(驕奢淫逸)
大義를 위해서는 罪를 지으면 親屬도 滅한다. 나라나 民族의 利益을 위한 일에는 父母나 兄弟의 情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春秋時代 衛나라 莊公이 齊나라의 莊姜을 아내로 맞았다. 莊姜은 美人이었으나 아들을 낳지 못했다. 魏莊公이 또 陳나라의 厲嬀(여규)를 아내로 맞이하여 孝伯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莊公은 다시 厲嬀의 同生 戴嬀를 맞이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이가 桓公이다. 莊姜은 桓公을 自己 아들로 삼았다. 妾의 아들 中에 州旴가 있었는데, 莊公의 寵愛를 받았다. 州旴는 兵丁놀이를 좋아했는데, 莊公은 이를 禁하지 않았다. 莊姜은 州旴를 아주 미워했다.
莊公이 죽은 뒤 桓公이 王位에 올랐다. 權力慾에 눈이 먼 州旴는 時時때때로 桓公을 陰害하고 王位 簒奪 陰謀를 꾸미기 始作했으며, 大夫 石碏(석작)의 아들 石厚도 州旴에게 나쁜 計策을 알려주곤 했다. 石碏은 州旴에게 逆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아들 石厚에게 州旴와 交際를 하지 말라고 했지만 石厚는 아버지의 말도 듣지 않았다. 周桓王 元年(BC719), 州旴는 마침내 桓公을 弑害하고 스스로 王이 되었으며 石厚를 上大夫에 封했다. 하지만 百姓들이 服從하지 않고 다른 諸侯들의 反應도 좋지 않자 州旴가 石厚에게 相議했다. “民心이 如前히 安定되지 않으니 어쩌면 좋겠는가?” “臣의 아비가 지난날 上卿 벼슬에 있었습니다. 臣의 아비는 元來 百姓들의 信任이 대단했으므로 百姓을 쉽사리 服從시켰습니다. 臣의 아비를 불러 政事를 맡기시면 王의 자리가 安定될 것입니다.” 州旴는 많은 寶物을 보내 石碏을 불렀지만 石碏은 부름에 應하지 않았다. 그러자 州旴는 石厚를 石碏에게 보내 說得하도록 했다. “이番 새로 位에 오르신 王께서 아버지를 恭敬하며 思慕합니다.” 白髮이 星星한 石碏이 물었다.
“새 王께서 나를 부른 뜻이 무엇이냐?” “王位가 安定되지 못해 아버지를 모셔다가 좋은 計策과 指示를 받기 爲해서라고 합니다.” 그러자 石碏이 計策을 일러 주었다. “天下의 宗室인 周 王室을 禮訪하여 天子를 拜謁하고 承認을 받는 게 좋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天子를 拜謁할 수 있을까요?” “먼저 周 王室과 恪別한 사이인 陳나라 桓公을 通해서 請願하도록 해라. 그러면 陳桓公께서 善處해 주실 것이다.”
州旴와 石厚는 기쁨을 禁치 못하고 膳物을 準備하여 陳나라로 떠났다. 石碏은 “主君을 弑害한 州旴와 石厚를 잡아 죽여 大義를 바로잡아 달라.”는 內容의 書信을 密使를 通해 陳桓公에게 보냈다. 州旴와 石厚는 陳나라에 到着하자마자 逮捕되고 말았다. 衛나라에서는 사람을 陳나라에 보내 두 사람을 處斷하게 하고, 桓公의 同生인 晉을 세웠는데, 이이가 衛宣公이다. 한便, 衛나라 大臣들은 石厚를 너그럽게 處分하자고 建議했다. 그러나 石碏은 이 建議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들 石厚를 處斷하도록 했다. 《左傳》의 著者는 이 事實을 記錄한 後, 다음과 같이 써 石碏의 이런 精神이 바로 ‘大義滅親’이라며 높이 評價했다.
「9月, 衛나라 사람들이 右宰인 추(丑)에게 濮에서 州旴를 죽이는 것을 監督하게 했다. 石碏은 그의 宰 (家臣)인 누양견(獳羊肩)을 시켜 陳에서 石厚를 죽이는 것을 監督하게 했다. 君子는 말한다. “石碏은 忠純하고 篤實한 臣下이다. 州旴를 미워하여 (아들)石厚를 함께 죽였다. 大義滅親은 바로 이를 이름인가.”
(九月, 衛人使右宰丑莅殺州吁於濮. 石碏使其宰獳羊肩莅殺石厚於陳. 君子曰, 石碏, 純臣也, 惡州吁而厚與焉. 大義滅親, 其是之謂乎.)」
* 左傳 隱公34年에.
18. 도용지기(屠龍之技) 屠龙之技
龍을 잡는 技術. 대단한 技術인 것처럼 보이지만 事實은 全혀 쓸모가 없는 技術을 比喩
「道를 알기는 쉬우나 (알고도) 말하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다. 알면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自然의 境地로 通하는 것이요, 알면서 말한다는 것은 人爲的인 現世로 가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自然을 살폈지 人爲를 追求한 것이 아니었다. 朱泙漫은 龍 잡는 法을 支離益에게 배웠다. 千 金이나 되는 家産을 써 가며 三 年 만에야 그 才주를 이루었지만 그것을 써먹을 곳이 없었다. 聖人은 꼭 해야 할 일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속의 다툼이 없다. 世上 사람은 꼭 해야 할 일도 아닌 것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마음속의 다툼이 많은 것이다. 마음속의 다툼이 따르기 때문에 그 行動에는 求하는 것이 있고, 마음속의 다툼을 依支하기 때문에 마침내 스스로 죽게 되는 것이다.
(莊子曰, 知道易, 勿言難. 知而不言, 所以之天也. 知而言之, 所以之人也. 古之人, 天而不人. 朱泙漫學屠龍於支離益, 單千金之家, 三年技成而無所用其巧. 聖人以必不必, 故無兵. 衆人以不必必之, 故多兵. 順於兵, 故行有求. 兵, 恃之則亡)」
이 이야기는 《莊子의 열어구(列禦寇)》에 나온다. 莊子는 이 比喩를 通해 小人들이 世俗的이고 사소(些少)한 일에 얽매여 큰 道를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指摘하고 있다.
19. 도이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
桃李는 말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있어 사람들이 모이므로 저절로 길이 생김
德 있는 者는 잠차코 있어도 그 德을 思慕하여 사람들이 따른다.
前漢의 將軍 李廣은 農西 사람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武藝, 特히 활쏘기에 뛰어나 紀元前 166年에 匈奴가 侵入해 왔을 때 그 擊退에 힘썼다. 그 後로 자주 戰功을 세워 北쪽 邊境의 太守가 되었다.
匈奴는 그를 尊敬하고 두려워하여 李 將軍의 이름만 들어도 敢히 侵攻해 오지 못했다. 그의 用兵은 알기 쉬웠으며, 部下를 사랑하였으므로 모두가 기꺼이 그의 指揮에 따랐다. 行軍 中 물이나 풀이 있으면 部隊를 쉬게 하고, 小數의 偵察兵을 보낼 뿐이었다.
紀元前 121年, 4千 如 名의 兵士를 이끌고 出戰했을 때 4萬의 匈奴軍에게 包圍 當했다. 그는 部下에게 命하여 圓型의 陣을 만들게 하고 自己도 强弓을 가지고 敵에게 화살을 퍼부었다.
화살이 떨어져 가므로 部下들은 唐惶했지만, 그는 沈着하게 敵의 部將을 쏘아 쓰러뜨렸기 때문에 匈奴는 두려워서 近接하지 못했다. 그리고 自己 陣營을 굳게 지켜 援軍에게 救出되었다.
그는 善戰했으나 部下를 많이 잃어 侯에 封해지지 않았다. 뒤에 大將軍 衛靑 곽거병(藿去病)이 出進할 때 從軍할 것을 願했으나 武帝는 그의 老齡을 念慮했다.
그러나 再三 要請하므로 武帝는 하는 수 없이 李廣을 衛靑의 한 部將 으로 任命했다. 衛靑은 命令대로 그를 右將軍으로 從軍케하고, 東쪽 길을 가게 하여 漠北에서 合流하기로 했다.
그러나 李廣은 途中에 길을 잃는 等 碍路가 많아 期限 안에 當到하지 못했다. 匈奴에게 애먹고 있던 衛靑은 李廣을 疑心하고, 武帝에게 그를 罰하라고 上奏했다. 그는 모든 罪는 自己에게 있다며 部下를 감싸고 兵舍로 돌아와
"60이 넘어 審判을 받는 恥辱은 견딜 수 없다"며 自決했다.
그의 죽음을 듣고 將兵은 勿論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모두가 그의 죽음을 哀悼했다. 司馬遷은 《史記》에서 '桃李不言下自成蹊' 라고 그를 絶讚했다.
20. 도방고이(道傍苦李)
길가의 쓴 오얏. 많은 사람들이 無視하는 것은 반드시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는 것을 比喩하는 말이다.
「晉나라의 왕융(王戎)이 일곱 살 때에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었는데, 길가의 오얏나무에 가지가 휘어질 程度로 많은 열매가 맺혀 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은 그것을 따려고 앞을 다투어 달려갔다. 그런데 王戎만은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理由를 묻자 王戎이 對答했다. “나무가 길가에 있는데 저렇게 열매가 많이 매달려 있는 것은 틀림없이 쓴 오얏입니다.” 오얏을 따서 먹어 보니 果然 그랬다.
(王戎七歲嘗與諸小兒遊, 看道邊李樹多子折枝. 諸兒競走取之. 惟戎不動. 人問之, 答曰, 樹在道邊而多子, 此必苦李. 取之信然.)」
이 이야기는 《晉書 王戎傳》과 《世說新語 雅量》에 나온다. 왕융(王戎)은 晉의 政治家로서 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唐나라의 許渾은 그의 詩
(和淮南王相公與賓僚同遊瓜洲別業, 題舊書齋) 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길가의 쓴 오얏은 오히려 열매를 늘어뜨렸고, 城 밖의 甘棠나무는 그늘을 펼쳤구나. (道傍苦李猶垂實, 城外甘棠已布陰.)」
산과바다 이계도
'**한자성어(漢字成語)** > 고사성어(故事成語)'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사성어(故事成語) (ㄷ-4 독안용~ ) (0) | 2026.03.04 |
|---|---|
| 고사성어(故事成語) (ㄷ-3 도불습유~ ) (0) | 2026.03.04 |
| 고사성어(故事成語) (ㄷ-1 다기망양~ ) (1) | 2026.03.03 |
| 고사성어(故事成語) (ㄴ-3 노생상담~ ) (0) | 2026.03.03 |
| 고사성어(故事成語) (ㄴ-2 남풍부경~ ) (0) | 2026.03.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