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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한자성어(漢字成語)**/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ㅁ-4)

by 산산바다 2026. 2. 21.

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글 목록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4)

 

 

29. 물언아사(勿言我死)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어떤 事實相對에게 알려지면 自身不利해지므로 그 事實을 숨기고자 할 때에 쓴다.

 

* 先祖實錄, 古今淸談.

民族聖雄 李舜臣本貫德水이고, 汝諧이며, 諡號忠武이다. 그는 武科及第하여 國家文書帳簿擔當하고 말과 가마에 한 일을 맡는 司僕寺主簿를 거쳐 4品 造山堡萬戶井邑縣監 等을 두루 거쳤다. 西厓 柳成龍이 그의 勇敢함과 才能을 알고 朝廷薦擧하여 全羅左道 水軍節度使가 되었다.

當時 朝野에서는 倭亂對備하지 않았는데, 將軍만은 거북을 만들고 軍費 擴充에 힘을 다했다. 마침내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거북으로 玉浦에서 敵船 30如 隻擊破한 것을 비롯하여, 泗川에서 13, 唐浦에서20如 隻, 唐項浦에서 100如 隻, 閑山島에서 70如 隻, 釜山 앞바다에서 100如 隻擊沈시키는 等 南海岸 一帶敵軍을 거의 掃蕩했다.

그의 能力을 높이 評價先祖李舜臣三道水軍統制使昇進시켰다. 그러자 上級者였던 元均이 그의 麾下에 들어가게 된 데 하여 反感을 품고 그를 謀陷했다. 그로 하여 서울로 押送되어 死刑宣告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多幸鄭琢辯護와 그 戰功參作되어 赦免을 받고, 權慄麾下에서 白衣從軍하였다.

丁酉再亂이 일어나자 元均이 배를 몰고 나가 싸웠으나 慘敗하고 말았다. 그러자 李舜臣은 다시 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元均이 싸우다가 남긴 12의 배와 貧弱兵力으로 鳴梁海戰에서 敵船 133과 싸워 31擊破했다. 그의 戰略이 뛰어났음을 또다시 立證한 것이다. 나라 援兵合勢하여, 露梁 앞바다에서 撤收하는 倭船 500如 隻과 싸워 200을 불 태웠다. 그때 不幸하게도 알에 가슴을 맞았다. 그러자 그는 兵士들의 士氣가 떨어질 것을 念慮하여 이렇게 말했다.

只今은 싸움이 危急狀態. 그러니 나의 죽음을 兵士들에게 말하지 말라.”

當付를 마치자마자 숨을 거두니 조카 李緩이 그의 遺言대로 將軍戰死 事實을 숨기고 如前勇猛하게 싸워 많은 戰果를 거두었다. 李舜臣 將軍4兄弟 中 셋째였는데 첫째가 羲臣, 둘째가 堯臣, 셋째가 舜臣, 넷째가 禹臣이었다. 이는 古代 中國 皇帝들의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將軍를 좋아하여 아들과 조카들 이름까지도 모두 초두艸邊을 붙여지었다.

文章에도 하여 時調亂中日記 같은 좋은 글도 많이 남겼다.

 

 

30. 물위모과(勿謂母過)

어머니의 허물을 말하니 차마 듣지 못하겠다는 말로, 相對便自己意思와 맞지 않는 말을 할 때를 比喩

 

* 大東奇聞.

朝鮮 第11代 中宗 性理學者 趙憲 (1544~1592)白川 사람으로 重峯, 諡號文烈이며, 栗谷 李珥學問을 이어받았다. 그는 孝誠至極하여 父母님을 모시고자 外職自請, 報恩縣監을 지냈다.

다섯 살 때 여러 아이들과 亭子에서 千字文을 읽고 있는데 벼슬아치들이 떠들썩하게 지나가자 모든 아이들이 을 덮고 구경하였으나 唯獨 趙憲만이 홀로 읽기를 繼續했다. 이를 본 訓長奇特하게 여기고 그 까닭을 묻자 그가 對答했다.

을 읽을 때는 오로지 마음을 모아 읽는 데에만 集中하라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한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父母님에 恭敬이 남달랐다.

先祖 日本 使臣이 와 나라를 치고자 길을 빌려 달라고, 卽 假途攻明要請했다. 沃川에서 이 消息을 들은 그는 日本 使臣遮斷할 것과, 倭亂對備하여야 한다고 上疏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自身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머리를 돌기둥에 쳤다.

이듬해에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沃川에서 義兵 1700糾合하고, 僧將 靈圭가 이끄는 僧兵合勢하여 淸州收復했다. 錦山에서 全羅道하는 倭敵을 맞아 靈圭와 아들 完基 等 義兵 700과 함께 싸웠으나 衆寡不敵으로 모두 壯烈戰死하였다. 後世 사람들은 그들을 기리는 七百義塚을 만들어 崇仰하고 있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繼母에게서 자랐다.

外家에 가서 할머니를 뵈었더니 할머니가 등을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어린 네가 繼母에게서 虐待를 받는다 하니 마음이 아프구나!”

그 말을 들은 趙憲은 한동안 外家에 가는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外家에 가니 할머니가 물었다.

그동안 어찌하여 나에게 오지 아니했느냐?”

어머니의 잘못을 말씀하시니 차마 듣기 거북하여 그랬습니다.”

할머니는 다시는 그에게 繼母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繼母한테도 孝心이 이와 같았다.

그가 世上을 떠난 나라에서는 領議政追贈하고, 沃川表忠祠를 지어 祭祀를 지내게 했다

 

 

31. 물해효자(勿害孝子)

효자를 해치지 말라라는 뜻으로, 효성을 지키고 보호하라는 경고의 의미로 쓰인다.

 

三憂堂 文益漸(1331~1400) 先生淸道郡守補任하고 있던중 어머니하여 廬幕을 지키다가 南海岸 一帶橫行하던 倭寇에게 잡혔으나 父母의 무덤앞에서 3年間 侍墓살이 하는 高麗의 아름다운 風俗感動倭將勿害孝子(孝子를 헤치지 말라)란 팻말을 세우고 撤收하니 이로서 文益漸과 이 一帶殘虐無道倭寇로부터 했다.

禑王은 잦은 外侵 때문에 國法으로 3年喪喪禮가 무너진 時節, 이를 보기로 삼기文益漸이 태어난 洞里孝子里命名하고, 아울러 孝子碑가 내려져 保存되고 있다.

文益漸高麗 使臣一行으로 나라에 갔다가 木花씨를 붓두껍에 몰래 가져와 故鄕丹城 培養마을 (慶南 山淸郡 丹城面 沙月里) 始培함으로써 高麗木花栽培普給衣類革命, 産業革命을 일으킴. 孫子 '文萊'는 씨뽑는 機械 '文萊'發明했고 ('물레'로 바뀜) 孫子 '文英'이 베를 처음 짰다하여 '文英'라 일컬음('무명베'로 바뀌었다한다)

 

 

32. 미국가객(美菊佳客)

아름다운 菊花가 좋은 손님이다. 卽 菊花의 아름다움을 손님에 比喩하여 예찬(譽讚)하는 말이다.

 

* 大東奇聞.

申用漑 (1463~1519)朝鮮 第11代 中宗 文臣으로 申叔舟孫子本貫高靈이고, 二樂亭(이요정)으로 成宗 左議政을 지냈으며, 諡號文景公이다.

金宗直門下였던 그는 술을 무척 좋아해서 한 술을 미시기 始作하면 滿醉가 되어야 그만두었다.

그는 유난히 菊花꽃을 하여 해마다 여덟 개의 花盆菊花를 심어 길렀는데 가을이 되면 꽃이 滿開하여 아름다웠다.

하루는 그가 食口들에게 일렀다.

오늘 아주 한 손님이 오실 터이니 술과 按酒를 장만해 놓도록 하여라.”

하여 온 집안이 搖亂스럽게 飮食을 차려 놓고 해가 저물도록 손님을 기다렸다. 그러나 손님은 오지 않았다. 夫人異常히 여겨 어찌 된 일이냐고 물으니 그가 말했다.

달이 떠서 달빛이 집안까지 곱게 비추고, 菊花香氣가 가득하니 이것이 한 손님이 아니오.”

그러고는 여덟 花盆菊花꽃과 어우러져 술을 나누었다.

그가 成宗4年間이나 모셔 깊은 信任을 얻고, 戊午士禍 投獄되었다가 곧 釋放되어 直提學都承旨를 지낸 것도 그만큼 信任이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二樂亭이었듯이 늘 두 가지의 즐거움을 안고 산 사람이었다.

 

 

33. 미일도거(美溢到去)

너무 아름다우면 쫓겨난다는 말, 宰相 李德馨이 그의 愛人가 없는데도 지나치게 영리(怜悧)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사랑에 빠져 나라의 일을 그르칠까 봐 쫓아낸 故事에서 由來했다.

 

* 海東野史.

朝鮮 宣祖 文臣 李德馨 (1561~1613)本貫京畿道 廣州이고, 漢陰이며, 諡號文翼이다.

그가 同知中樞府事라는 重任을 맡았을 때, 壬辰倭亂이 일어났다. 나라의 存亡이 너무 危急하여 暫時大闕을 떠날 틈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大闕 門밖에 小室을 두고, 거기에서 宿食을 했다.

몹시 무더운 어느 날, 그가 上監議論할 일이 있어서 밤늦게야 小室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목이 말라 물을 달라고 할 氣運도 없어 입만 벌리고 손을 내밀었다. 小室은 미리 醍醐湯 (더위를 풀어주고 목마른 것을 그치게 하는 湯藥)準備해 두었다가 그에게 건넸다. 그러나 그는 湯藥을 달게 받아 마시지 않고 小室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이제 그대와 헤어져야 하겠소. 그러니 나를 기다리지 말고 마음대로 살 곳을 찾아가시오.”

말을 마친 漢陰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小室은 갑자기 疎薄한 까닭을 알지 못하고 밤새워 울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와 가장 白沙 李恒福을 찾아가 自初至終을 이야기했다. 李恒福亦是 疑訝해하면서 漢陰을 쫓아가 물었다.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小室이 아무런 가 없는데도 차버린 까닭이 무엇인가?”

漢陰意味深長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사람이 가 있어서가 아니네. 내가 지난番 上監國事議論하고 늦게 돌아와 목이 몹시 말라 말도 못하고 손을 내민 적이 있었다네. 그때 그 사람이 미리 醍醐湯準備해 두었다가 내어 주었어. 처음 그 女子를 만났을 때 그 怜悧하고 聰明함이 나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게 했었거든. 그런데 그날 물砂鉢을 받고 보니 사랑스런 마음이 더욱 깊어지지 뭐야.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倭亂으로 온 나라가 混亂地境인데 小室에게만 빠져 있다면 나라의 重責을 맡고 있는 나로서 어디 可當찮은 일인가? 小室의 사랑스러움은 나를 迷惑에 빠지게 만들고 그러다보면 國事를 그르치게 될 것이 分明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國事專念하고자 行動이라네.”

自初至從을 듣고 있던 李恒福이 말했다.

은 참으로 忠誠스러운 臣下, 大丈夫라야 할 수 있는 일을 했군! 나로서는 到底히 미치지 못할 일이네.”

 

 

34. 미팔당삼(未八當三)

여덟이 아니라 셋으로도 充分하다. 어떤 일을 解決하는 데에는 그 中心이 되는 部分解決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풀린다는 뜻이다.

 

* 大韓季年史.

開花期政治家이자 先覺者였던 月南 李商在(1850~1927)本貫韓山이고, 羲宅의 아들이다. 1867年 科擧應試했으나 落榜하였는데 李長稙紹介朴定陽을 알게 되어 그 因緣으로 紳士遊覽團의 한 사람으로 日本에 다녀오면서 洪英植과 사귀었다. 洪英植郵政局總管이 되자 李商在郵政局 主事가 되었다. , 甲申政變失敗落鄕해 있다가 朴定陽駐美 大韓民國大使館 公使赴任하자 李商在一等書記官으로 同參하게 되었다.

그는 美國에 있는 동안 洋服一切 입지 않고 紗帽冠帶朝服通常服으로 입고 어디든지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다. 韓國固有風習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意圖에서였다.

어느 날, 그가 紗帽冠帶를 쓰고 朝服에 나막신을 신은 채 公園散策하노라니 어린아이들이 그를 에워싸고 道袍자락을 잡아끄는가 하면 돌팔매질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며 놀렸다. 그러나 그는 웃는 낯으로 그들을 했다. 그런데 그 光景을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警察申告하여 아이들이 모두 붙들려가게 되었다.

事實新聞記事를 읽고 난 뒤에야 알게 된 李商在警察署長을 찾아가 天眞爛漫한 어린아이들이 生前 처음 보는 外國 風俗服裝을 보고 好嗜心으로 그랬을 뿐, 惡意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니 放免해 주라고 했다. 이에 警察들도 그의 人格感動하여 아이들을 풀어주었다.

이처럼 月南高邁人品이 알려지자 韓國認識美國上下議員 에서 두루 새롭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淸國 使臣들은 우리나라를 自己들의 屬國인 것처럼 하여 오다가 韓國外交官들이 오히려 自己들보다 優待를 받는 것을 보고 猜忌하기 始作했다. 그리고 끝내 그것이 빌미가 되어 朴定陽李商在歸國을 해야 했다.

故國으로 돌아온 李商在學部學務局長을 거쳐 議政府 總務局長이 되었다.

當時 國內에서는 白銅錢濫發하여 經濟塗炭에 빠지고, 三南地方에서는 東學亂이 일어나 民心洶洶했다. 그런 가운데 朝廷에서는 이미 廢止했던 轉運司復舊하고자 高宗允許까지 받아냈다. 그러나 李商在는 그 일이 잘못된 것이라 判斷하고 執行하지 않았다. 이에 高宗은 처음에는 왜 바로 執行하지 않느냐고 大怒하였으나 이내 그 일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中止하게 했다.

한때 임금의 拒逆하여 죽음을 覺悟해야 했던 李商在는 살아난 것을 기뻐하기보다는 뒤늦게나마 高宗賢明判斷을 내려준 데 하여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日本倂呑하는 恥辱스런 일이 일어났다.

,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李完用, 宋秉畯 等合席한 한 晩餐자리에 工巧롭게 함께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李商在李完用宋秉畯을 보고 불쑥 말했다.

大監들은 東京에 가서 사시지요.”

두 사람이 어리둥절해서 말을 받았다.

令監, 瞥眼間 그게 무슨 말이요?”

李商在가 다시 싸늘하게 쏘아보며 말했다.

大監들은 나라를 하게 하는 데는 天才들이 아니요? 그러나 當身들이 東京에 가 있게 되면 이에는 日本하게 될 것이니 하는 말이외다.”

그러자 座中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며 모두들 死色이 되었다. 日本 總督 이토 히로부미도 있는 자리에서 月南이 아니고는 히 못할 소리였다. 이처럼 뼈 있는 말을 거침없이 내쏘는 李商在大膽性은 훗날 總理가 된 金弘集政事討議하는 자리에서도 餘地없이 나타났다.

八道監司 金弘集이 말했다.

昨今 貪官汚吏가 우글우글해서 百姓들이 살 수가 없으니 여덟 놈만 목을 베면 될 텐데…….”

이에 李商在가 맞받아서 말했다.

여덟 사람이 아니라 세 놈만 없애도 되겠지요.”

金弘集은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셈이었다. 이 말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뜻이었는데, 이런 李商在機智는 곳곳에서 드러났다.

日本視察하고 돌아온 李商在에게 所感을 묻자 짧게 對答했다.

東洋에서 第一 兵器廠을 보니 大砲銃劍처럼 쌓여 있어 日本强國인 것은 틀림없었소. 그런데 聖經 말씀에 칼로 일어서는 는 칼로 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걱정이오.”

이는 日本할 것을 豫言한 말이기도 했다.

李商在1927, 78解放을 보지 못한 채 日帝暗鬱한 비구름 속으로 사라져갔다.

 

 

35. 민초지란(民草之亂)

풀뿌리 百姓들의 난리(亂離)라는 말로, 朝鮮 末期洪景來主軸이 되어 平安道 地方에서 일어났던 民亂에서 由來했다. 힘없는 사람들이라도 뭉치면 무서운 威力發揮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 關西辛未錄.

朝鮮의 마지막 王 第23代 純祖 民衆 反亂을 일으킨 洪景來(1771~1812)平安道 龍岡에서 태어났다. 그는 外叔 柳學權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聰明한데다가 言辯도 뛰어났다. 또 그는 열아홉 살에 司馬試應試했다가 落榜을 했다. 그리고 얼마 後 自己보다 實力이 모자라는 兩班子息들은 모두 及第했음을 알게 되어 憤怒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西北人文武莫論하고 高官에는 登用시키지 않는 地域差別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더욱 하게 不滿을 품게 되었다.

이때부터 洪景來定處 없이 8를 돌아다니며 民心을 살폈다. 結果 平安道 出身들은 安東 金氏들에게 排斥當하고 있어 나라에 不滿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博川靑龍寺에서 名門家庶子 禹君則意氣投合하여 叛亂을 일으키기로 謀議했다.

그는 滿州馬賊團 鄭始守嘉山郡에서 第一가는 富者이면서 武科及第李禧著, 兵法에 밝은 進士 金昌始, 泰川金士用价川所聞壯士 洪總角 等 30如 名同志들을 모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科擧 制度를 비롯 權門勢家腐敗洶洶民心吐露하고 있었다. 南陽 洪氏朝廷에 들어오면서 그들에 不平이 높았다.

洪景來金鑛 採掘을 구실로 流民 壯丁들을 끌어모은 , 機會를 보다가 第一 먼저 嘉山郡襲擊, 郡守 鄭著와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엿새 만에 여덟 고을을 손에 넣었다.

叛亂成功的으로 이루어지자 洪景來는 스스로 平西大元師하고 金士用副元師, 金昌始參謀, 朴聖幹兵站將으로 任命하여 組織確固히 하는 한便, 占領地에서는 倉庫를 열어 百姓들에게 穀食을 나누어주는 等 民心 收拾에도 努力했다. 그리하여 嘉山, 郭山, 定州, 宣川, 龍川 等地까지 占領했다. 朝廷에서는 많은 懸賞金을 걸고 洪景來逮捕하라고 督勵했다.

洪景來으로 내려가는 第一關門安州攻擊하기 하여 博川松林里集結하였다.

便, 安州城을 지키던 李海愚趙鍾永洪景來亂 消息을 듣고 軍士를 둘로 나누어 洪景來가 있는 松林左右에서 襲擊했다.

그때 負傷擧動不便했던 洪景來는 그들을 해내지 못하고 定州城으로 逃亡城門을 굳게 닫고 洪總角 等 다른 將帥支援軍到着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겨울이 가고 봄이 오도록 그들은 오지 않고 안에서는 食糧마저 동이 났다.

그때 官軍 李堯憲火藥으로 城壁爆破하고 물밀 듯이 들이닥쳤다.

끼니도 제대로 못하고 지칠 대로 지친 洪景來叛軍들은 進擊해 들어오는 官軍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最後가 닥쳤음을 안 洪景來官軍에게 외쳤다.

여기 洪景來가 나간다. 나를 잡아 賞金을 타거라.”

官軍들은 그에게 활을 쏘아대 벌집을 만들어 버렸다.

洪景來腐敗朝鮮 末期混濁政治 狀況을 말해주는 事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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