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ㅁ-4)
29. 물언아사(勿言我死)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卽 어떤 事實이 相對에게 알려지면 自身이 不利해지므로 그 事實을 숨기고자 할 때에 쓴다.
* 先祖實錄, 古今淸談에.
民族의 聖雄 李舜臣은 本貫이 德水이고, 字는 汝諧이며, 諡號는 忠武이다. 그는 武科에 及第하여 國家의 文書와 帳簿를 擔當하고 말과 가마에 對한 일을 맡는 司僕寺主簿를 거쳐 從4品 造山堡萬戶와 井邑縣監 等을 두루 거쳤다. 西厓 柳成龍이 그의 勇敢함과 才能을 알고 朝廷에 薦擧하여 全羅左道 水軍節度使가 되었다.
當時 朝野에서는 倭亂에 對備하지 않았는데, 將軍만은 거북船을 만들고 軍費 擴充에 힘을 다했다. 마침내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거북船으로 玉浦에서 敵船 30如 隻을 擊破한 것을 비롯하여, 泗川에서 13隻을, 唐浦에서20如 隻을, 唐項浦에서 100如 隻을, 閑山島에서 70如 隻을, 釜山 앞바다에서 100如 隻을 擊沈시키는 等 南海岸 一帶의 敵軍을 거의 掃蕩했다.
그의 能力을 높이 評價한 先祖는 李舜臣을 三道水軍統制使로 昇進시켰다. 그러자 上級者였던 元均이 그의 麾下에 들어가게 된 데 對하여 反感을 품고 그를 謀陷했다. 그로 因하여 서울로 押送되어 死刑宣告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多幸히 鄭琢의 辯護와 그 間의 戰功이 參作되어 赦免을 받고, 權慄의 麾下에서 白衣從軍하였다.
丁酉再亂이 일어나자 元均이 배를 몰고 나가 싸웠으나 慘敗하고 말았다. 그러자 李舜臣은 다시 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元均이 싸우다가 남긴 12隻의 배와 貧弱한 兵力으로 鳴梁海戰에서 敵船 133隻과 싸워 31隻을 擊破했다. 그의 戰略이 뛰어났음을 또다시 立證한 것이다. 또 明나라 援兵과 合勢하여, 露梁 앞바다에서 撤收하는 倭船 500如 隻과 싸워 200隻을 불 태웠다. 그때 不幸하게도 敵의 銃알에 가슴을 맞았다. 그러자 그는 兵士들의 士氣가 떨어질 것을 念慮하여 이렇게 말했다.
“只今은 싸움이 危急한 狀態다. 그러니 나의 죽음을 兵士들에게 말하지 말라.”
當付를 마치자마자 숨을 거두니 조카 李緩이 그의 遺言대로 將軍의 戰死 事實을 숨기고 如前히 勇猛하게 싸워 많은 戰果를 거두었다. 李舜臣 將軍은 4兄弟 中 셋째였는데 첫째가 羲臣, 둘째가 堯臣, 셋째가 舜臣, 넷째가 禹臣이었다. 이는 古代 中國 皇帝들의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또 將軍은 茶를 좋아하여 아들과 조카들 이름까지도 모두 초두艸邊을 붙여지었다.
文章에도 能하여 時調와 亂中日記 같은 좋은 글도 많이 남겼다.
30. 물위모과(勿謂母過)
어머니의 허물을 말하니 차마 듣지 못하겠다는 말로, 相對便이 自己의 意思와 맞지 않는 말을 할 때를 比喩
* 大東奇聞에.
朝鮮 第11代 中宗 때 性理學者 趙憲 (1544~1592)은 白川 사람으로 號는 重峯, 諡號는 文烈이며, 栗谷 李珥의 學問을 이어받았다. 그는 孝誠이 至極하여 父母님을 모시고자 外職을 自請, 報恩縣監을 지냈다.
다섯 살 때 여러 아이들과 亭子에서 千字文을 읽고 있는데 벼슬아치들이 떠들썩하게 지나가자 모든 아이들이 冊을 덮고 구경하였으나 唯獨 趙憲만이 홀로 冊 읽기를 繼續했다. 이를 본 訓長이 奇特하게 여기고 그 까닭을 묻자 그가 對答했다.
“冊을 읽을 때는 오로지 마음을 모아 冊 읽는 데에만 集中하라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한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父母님에 對한 恭敬이 남달랐다.
先祖 때 日本 使臣이 와 明나라를 치고자 길을 빌려 달라고, 卽 假途攻明을 要請했다. 沃川에서 이 消息을 들은 그는 日本 使臣을 遮斷할 것과, 倭亂에 對備하여야 한다고 上疏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自身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머리를 돌기둥에 쳤다.
이듬해에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沃川에서 義兵 1700名을 糾合하고, 僧將 靈圭가 이끄는 僧兵과 合勢하여 淸州를 收復했다. 또 錦山에서 全羅道로 向하는 倭敵을 맞아 靈圭와 아들 完基 等 義兵 700名과 함께 싸웠으나 衆寡不敵으로 모두 壯烈히 戰死하였다. 後世 사람들은 그들을 기리는 七百義塚을 만들어 崇仰하고 있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繼母에게서 자랐다.
한 番은 外家에 가서 外할머니를 뵈었더니 外할머니가 등을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어린 네가 繼母에게서 虐待를 받는다 하니 마음이 아프구나!”
그 말을 들은 趙憲은 한동안 外家에 가는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外家에 가니 外할머니가 물었다.
“그동안 어찌하여 나에게 오지 아니했느냐?”
“어머니의 잘못을 말씀하시니 차마 듣기 거북하여 그랬습니다.”
그 後 할머니는 다시는 그에게 繼母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繼母한테도 孝心이 이와 같았다.
그가 世上을 떠난 後 나라에서는 領議政을 追贈하고, 沃川에 表忠祠를 지어 祭祀를 지내게 했다
31. 물해효자(勿害孝子)
‘효자를 해치지 말라’ 라는 뜻으로, 효성을 지키고 보호하라는 경고의 의미로 쓰인다.
三憂堂 文益漸(1331~1400) 先生이 淸道郡守로 補任하고 있던중 어머니喪을 當하여 廬幕을 지키다가 南海岸 一帶를 橫行하던 倭寇에게 잡혔으나 父母의 무덤앞에서 3年間 侍墓살이 하는 高麗의 아름다운 風俗에 感動한 倭將은 勿害孝子(孝子를 헤치지 말라)란 팻말을 세우고 撤收하니 이로서 文益漸과 이 一帶는 殘虐無道한 倭寇로부터 禍를 免했다.
禑王은 잦은 外侵 때문에 國法으로 定한 3年喪의 喪禮가 무너진 時節, 이를 本보기로 삼기爲해 文益漸이 태어난 洞里를 孝子里라 命名하고, 아울러 孝子碑가 내려져 保存되고 있다.
☆ 文益漸이 高麗 使臣의 一行으로 元나라에 갔다가 木花씨를 붓두껍에 몰래 가져와 故鄕인 丹城 培養마을 (慶南 山淸郡 丹城面 沙月里) 始培함으로써 高麗에 木花栽培普給과 衣類革命, 産業革命을 일으킴. 孫子 '文萊'는 씨뽑는 機械 '文萊'를 發明했고 (後에 '물레'로 바뀜) 孫子 '文英'이 베를 처음 짰다하여 '文英베'라 일컬음(後에 '무명베'로 바뀌었다한다)
32. 미국가객(美菊佳客)
아름다운 菊花가 좋은 손님이다. 卽 菊花의 아름다움을 손님에 比喩하여 예찬(譽讚)하는 말이다.
* 大東奇聞에.
申用漑 (1463~1519)는 朝鮮 第11代 中宗 때 文臣으로 申叔舟의 孫子다 本貫은 高靈이고, 號는 二樂亭(이요정)으로 成宗 때 左議政을 지냈으며, 諡號는 文景公이다.
金宗直의 門下였던 그는 술을 무척 좋아해서 한 番 술을 미시기 始作하면 滿醉가 되어야 그만두었다.
그는 유난히 菊花꽃을 貪하여 해마다 여덟 개의 花盆에 菊花를 심어 길렀는데 가을이 되면 꽃이 滿開하여 아름다웠다.
하루는 그가 食口들에게 일렀다.
“오늘 아주 貴한 손님이 오실 터이니 술과 按酒를 장만해 놓도록 하여라.”
하여 온 집안이 搖亂스럽게 飮食을 차려 놓고 해가 저물도록 손님을 기다렸다. 그러나 손님은 오지 않았다. 夫人이 異常히 여겨 어찌 된 일이냐고 물으니 그가 말했다.
“달이 떠서 달빛이 집안까지 곱게 비추고, 菊花꽃 香氣가 가득하니 이것이 貴한 손님이 아니오.”
그러고는 여덟 花盆의 菊花꽃과 어우러져 술을 나누었다.
그가 成宗을 4年間이나 모셔 깊은 信任을 얻고, 戊午士禍 때 投獄되었다가 곧 釋放되어 直提學과 都承旨를 지낸 것도 그만큼 信任이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號가 二樂亭이었듯이 늘 두 가지의 즐거움을 안고 산 사람이었다.
33. 미일도거(美溢到去)
너무 아름다우면 쫓겨난다는 말, 宰相 李德馨이 그의 愛人이 罪가 없는데도 지나치게 영리(怜悧)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사랑에 빠져 나라의 일을 그르칠까 봐 쫓아낸 故事에서 由來했다.
* 海東野史에.
朝鮮 宣祖 때 文臣 李德馨 (1561~1613)은 本貫이 京畿道 廣州이고, 號는 漢陰이며, 諡號는 文翼이다.
그가 同知中樞府事라는 重任을 맡았을 때, 壬辰倭亂이 일어났다. 나라의 存亡이 너무 危急하여 暫時도 大闕을 떠날 틈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大闕 門밖에 小室을 두고, 거기에서 宿食을 했다.
몹시 무더운 어느 날, 그가 上監과 緊히 議論할 일이 있어서 밤늦게야 小室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목이 말라 물을 달라고 할 氣運도 없어 입만 벌리고 손을 내밀었다. 小室은 미리 醍醐湯 (더위를 풀어주고 목마른 것을 그치게 하는 湯藥)을 準備해 두었다가 그에게 건넸다. 그러나 그는 湯藥을 달게 받아 마시지 않고 小室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이제 그대와 헤어져야 하겠소. 그러니 나를 기다리지 말고 마음대로 살 곳을 찾아가시오.”
말을 마친 漢陰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門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小室은 갑자기 疎薄을 當한 까닭을 알지 못하고 밤새워 울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와 가장 親한 白沙 李恒福을 찾아가 自初至終을 이야기했다. 李恒福도 亦是 疑訝해하면서 漢陰을 쫓아가 물었다.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小室이 아무런 罪가 없는데도 차버린 까닭이 무엇인가?”
漢陰은 意味深長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사람이 罪가 있어서가 아니네. 내가 지난番 上監과 國事를 議論하고 늦게 돌아와 목이 몹시 말라 말도 못하고 손을 내민 적이 있었다네. 그때 그 사람이 미리 醍醐湯을 準備해 두었다가 내어 주었어. 처음 그 女子를 만났을 때 그 怜悧하고 聰明함이 나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게 했었거든. 그런데 그날 물砂鉢을 받고 보니 사랑스런 마음이 더욱 깊어지지 뭐야.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倭亂으로 온 나라가 混亂地境인데 小室에게만 빠져 있다면 나라의 重責을 맡고 있는 나로서 어디 可當찮은 일인가? 小室의 사랑스러움은 나를 迷惑에 빠지게 만들고 그러다보면 國事를 그르치게 될 것이 分明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國事에 專念하고자 取한 行動이라네.”
自初至從을 듣고 있던 李恒福이 말했다.
“公은 참으로 忠誠스러운 臣下요, 大丈夫라야 할 수 있는 일을 했군! 나로서는 到底히 미치지 못할 일이네.”
34. 미팔당삼(未八當三)
여덟이 아니라 셋으로도 充分하다. 卽 어떤 일을 解決하는 데에는 그 中心이 되는 部分만 解決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풀린다는 뜻이다.
* 大韓季年史에.
開花期의 政治家이자 先覺者였던 月南 李商在(1850~1927)는 本貫이 韓山이고, 羲宅의 아들이다. 1867年 科擧에 應試했으나 落榜하였는데 李長稙의 紹介로 朴定陽을 알게 되어 그 因緣으로 紳士遊覽團의 한 사람으로 日本에 다녀오면서 洪英植과 사귀었다. 洪英植이 郵政局總管이 되자 李商在는 郵政局 主事가 되었다. 그 後, 甲申政變의 失敗로 落鄕해 있다가 朴定陽이 駐美 大韓民國大使館 公使로 赴任하자 李商在는 一等書記官으로 同參하게 되었다.
그는 美國에 있는 동안 洋服을 一切 입지 않고 紗帽冠帶와 朝服을 通常服으로 입고 어디든지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다. 韓國의 固有한 風習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意圖에서였다.
어느 날, 그가 紗帽冠帶를 쓰고 朝服에 나막신을 신은 채 公園을 散策하노라니 어린아이들이 그를 에워싸고 道袍자락을 잡아끄는가 하면 돌팔매질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며 놀렸다. 그러나 그는 웃는 낯으로 그들을 對했다. 그런데 그 光景을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警察에 申告하여 아이들이 모두 붙들려가게 되었다.
그 事實을 新聞의 記事를 읽고 난 뒤에야 알게 된 李商在는 警察署長을 찾아가 天眞爛漫한 어린아이들이 生前 처음 보는 外國 風俗의 服裝을 보고 好嗜心으로 그랬을 뿐, 惡意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니 放免해 주라고 請했다. 이에 警察들도 그의 人格에 感動하여 아이들을 풀어주었다.
이처럼 月南의 高邁한 人品이 알려지자 韓國에 對한 認識이 美國의 上下議員 에서 두루 새롭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淸國 使臣들은 우리나라를 自己들의 屬國인 것처럼 對하여 오다가 韓國의 外交官들이 오히려 自己들보다 優待를 받는 것을 보고 猜忌하기 始作했다. 그리고 끝내 그것이 빌미가 되어 朴定陽과 李商在는 歸國을 해야 했다.
故國으로 돌아온 李商在는 學部의 學務局長을 거쳐 議政府 總務局長이 되었다.
當時 國內에서는 白銅錢을 濫發하여 經濟가 塗炭에 빠지고, 三南地方에서는 東學亂이 일어나 民心이 洶洶했다. 그런 가운데 朝廷에서는 이미 廢止했던 轉運司를 復舊하고자 高宗의 允許까지 받아냈다. 그러나 李商在는 그 일이 잘못된 것이라 判斷하고 執行하지 않았다. 이에 高宗은 처음에는 왜 바로 執行하지 않느냐고 大怒하였으나 이내 그 일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中止하게 했다.
한때 임금의 命을 拒逆하여 죽음을 覺悟해야 했던 李商在는 살아난 것을 기뻐하기보다는 뒤늦게나마 高宗이 賢明한 判斷을 내려준 데 對하여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日本에 倂呑을 當하는 恥辱스런 일이 일어났다.
그 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李完用, 宋秉畯 等이 合席한 한 晩餐자리에 工巧롭게 함께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李商在가 李完用과 宋秉畯을 보고 불쑥 말했다.
“大監들은 東京에 가서 사시지요.”
두 사람이 어리둥절해서 말을 받았다.
“令監, 瞥眼間 그게 무슨 말이요?”
李商在가 다시 싸늘하게 쏘아보며 말했다.
“大監들은 나라를 亡하게 하는 데는 天才들이 아니요? 그러나 當身들이 東京에 가 있게 되면 이番에는 日本이 亡하게 될 것이니 하는 말이외다.”
그러자 座中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며 모두들 死色이 되었다. 日本 總督 이토 히로부미도 있는 자리에서 月南이 아니고는 敢히 못할 소리였다. 이처럼 뼈 있는 말을 거침없이 내쏘는 李商在의 大膽性은 훗날 總理가 된 金弘集과 政事를 討議하는 자리에서도 餘地없이 나타났다.
八道監司 金弘集이 말했다.
“昨今 貪官汚吏가 우글우글해서 百姓들이 살 수가 없으니 여덟 놈만 목을 베면 될 텐데…….”
이에 李商在가 맞받아서 말했다.
“여덟 사람이 아니라 세 놈만 없애도 되겠지요.”
金弘集은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셈이었다. 이 말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뜻이었는데, 이런 李商在의 機智는 곳곳에서 드러났다.
한 番은 日本을 視察하고 돌아온 李商在에게 所感을 묻자 짧게 對答했다.
“東洋에서 第一 큰 兵器廠을 보니 大砲와 銃劍이 山처럼 쌓여 있어 日本이 强國인 것은 틀림없었소. 그런데 聖經 말씀에 칼로 일어서는 者는 칼로 亡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걱정이오.”
이는 日本이 亡할 것을 豫言한 말이기도 했다.
李商在는 1927年, 78歲로 解放을 보지 못한 채 日帝의 暗鬱한 비구름 속으로 사라져갔다.
35. 민초지란(民草之亂)
풀뿌리 百姓들의 난리(亂離)라는 말로, 朝鮮 末期에 洪景來가 主軸이 되어 平安道 地方에서 일어났던 民亂에서 由來했다. 힘없는 사람들이라도 뭉치면 무서운 威力을 發揮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 關西辛未錄에.
朝鮮의 마지막 王 第23代 純祖 때 民衆 反亂을 일으킨 洪景來(1771~1812)는 平安道 龍岡에서 태어났다. 그는 外叔 柳學權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聰明한데다가 言辯도 뛰어났다. 또 그는 열아홉 살에 司馬試에 應試했다가 落榜을 했다. 그리고 얼마 後 自己보다 實力이 모자라는 兩班집 子息들은 모두 及第했음을 알게 되어 憤怒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西北人은 文武를 莫論하고 高官에는 登用시키지 않는 地域差別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더욱 强하게 不滿을 품게 되었다.
이때부터 洪景來는 定處 없이 8道를 돌아다니며 民心을 살폈다. 그 結果 平安道 出身들은 安東 金氏들에게 排斥當하고 있어 나라에 不滿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博川의 靑龍寺에서 名門家의 庶子 禹君則과 意氣投合하여 叛亂을 일으키기로 謀議했다.
그는 滿州의 馬賊團 鄭始守와 嘉山郡에서 第一가는 富者이면서 武科에 及第한 李禧著, 兵法에 밝은 進士 金昌始, 泰川의 金士用과 价川의 所聞난 壯士 洪總角 等 30如 名의 同志들을 모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科擧 制度를 비롯 權門勢家의 腐敗와 洶洶한 民心을 吐露하고 있었다. 特히 南陽 洪氏가 朝廷에 들어오면서 그들에 對한 不平이 높았다.
洪景來는 金鑛 採掘을 구실로 流民 壯丁들을 끌어모은 後, 機會를 보다가 第一 먼저 嘉山郡을 襲擊, 郡守 鄭著와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엿새 만에 여덟 고을을 손에 넣었다.
叛亂이 成功的으로 이루어지자 洪景來는 스스로 平西大元師라 稱하고 金士用을 副元師로, 金昌始를 參謀로, 朴聖幹을 兵站將으로 任命하여 組織을 確固히 하는 한便, 占領地에서는 倉庫를 열어 百姓들에게 穀食을 나누어주는 等 民心 收拾에도 努力했다. 그리하여 嘉山, 郭山, 定州, 宣川, 龍川 等地까지 占領했다. 朝廷에서는 많은 懸賞金을 걸고 洪景來를 逮捕하라고 督勵했다.
洪景來는 南으로 내려가는 第一의 關門인 安州를 攻擊하기 爲하여 博川의 松林里로 集結하였다.
한便, 安州城을 지키던 李海愚와 趙鍾永은 洪景來의 亂 消息을 듣고 軍士를 둘로 나누어 洪景來가 있는 松林을 左右에서 襲擊했다.
그때 負傷을 當해 擧動이 不便했던 洪景來는 그들을 當해내지 못하고 定州城으로 逃亡가 城門을 굳게 닫고 洪總角 等 다른 將帥의 支援軍이 到着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겨울이 가고 봄이 오도록 그들은 오지 않고 城안에서는 食糧마저 동이 났다.
그때 官軍 李堯憲이 火藥으로 城壁을 爆破하고 물밀 듯이 들이닥쳤다.
끼니도 제대로 못하고 지칠 대로 지친 洪景來의 叛軍들은 進擊해 들어오는 官軍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最後가 닥쳤음을 안 洪景來는 官軍에게 외쳤다.
“여기 洪景來가 나간다. 나를 잡아 賞金을 타거라.”
官軍들은 그에게 활을 쏘아대 벌집을 만들어 버렸다.
洪景來의 亂은 腐敗한 朝鮮 末期의 混濁한 政治 狀況을 말해주는 事件이었다.
산과바다 이계도
'**한자성어(漢字成語)** >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ㅂ-2) (0) | 2026.02.22 |
|---|---|
|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ㅂ-1) (0) | 2026.02.22 |
|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ㅁ-3) (0) | 2026.02.21 |
|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ㅁ-2) (0) | 2026.02.21 |
|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ㅁ-1) (0) | 2026.02.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