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ㅂ-2)
10. 부득달박(夫得怛朴)
夫得과 朴朴이라는 두 聖人을 가리키는 말로, ‘노힐부득(努肹夫得)’과 ‘달달박박(怛怛朴朴)’ 두 사람이 成佛했다는 이야기에서 由來했다.
* 三國遺事 券3에.
新羅의 白月山은 仇史郡 (慶南 昌原) 北쪽에 있으며 山줄기가 빼어난데다가 百 里나 뻗은 鎭山이었다.
이 山 東南쪽 仙川村에 노힐부득(努肹夫得)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努肹夫得의 아버지는 月藏이고, 어머니는 味勝이라 했다. 怛怛朴朴(달달박박)의 아버지는 修梵이고, 어머니는 梵摩였다.
努肹夫得과 怛怛朴朴은 風骨이 凡常치 않았는데 俗世를 떠나 살려는 생각이 같아 서로 親하게 사귀었다. 두 사람은 나이가 20歲가 되자 마을 東北쪽 고개 너머에 있는 法積房으로 가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들은 雉山村 法宗谷 僧道村에 있는 절이 修養할 만한 곳이라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夫得은 懷眞庵에 머물고, 朴朴은 琉璃光寺에 머물렀다. 이들은 모두 妻家들이 있었으나 俗世를 完全히 떠날 생각을 하고 서로 만나 議論했다.
“기름진 밭에 豊年이 들어 穀食을 거두어 들이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옷과 飮食이 願하는 대로 생기고, 저절로 배부르며, 따뜻한 것이 더 좋다. 또 女子와 집이 좋기는 하지만 蓮華藏에서 부처님들과 함께 놀고, 鸚鵡새나 孔雀새와 함께 즐기는 것이 더 좋다. 더구나 佛道를 배웠으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참된 마음을 닦았으면 반드시 眞理를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들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니 마땅히 世俗에서 벗어나 無常의 道를 이뤄야 할 터인데 어찌 俗世의 무리들과 다름없이 지낸단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밤 各者 꿈을 꾸었는데 白毫의 빛이 西쪽으로부터 오더니 빛 속에서 金빛 팔이 내려와 이마를 어루만져주는 것이었다. 奇異하게 생각한 두 사람이 서로 꿈 이야기를 해보니 그 內容이 똑같았다. 두 사람은 分明 부처님의 啓示라고 생각하고 白月山 無等谷으로 들어갔다.
朴朴은 北쪽 고개의 獅子岩 위에 板子로 8尺 房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板房이라 하고, 夫得은 東쪽의 돌무더기 밑에 僧方丈을 만들어 살았으므로 磊房이라고 했다.
夫得은 부지런히 彌勒을 求했고, 朴朴은 彌陀佛을 恭敬하며 쉬지 않고 외웠다.
己酉年(706年) 4月 8日, 날이 저물어 가는데 나이가 한 스물쯤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娘子가 蘭草 香氣와 麝香 香氣를 풍기면서 忽然히 朴朴의 板房에 찾아와 자고 가기를 請하는 글을 지어 보였다.
길 가는데 날이 저물어 千山이 어두워지네.
길은 어둡고 城은 멀어 人家가 보이지 않으니
오늘 저녁 이 庵子에서 묵어 가려고 하는데.
慈悲로운 스님께서는 굳이 꾸짖지 말아주오.
그러자 朴朴이 娘子에게 말했다.
“절은 敬虔해야 하는 곳이니 그대가 가까이 할 곳이 아니오, 하니 遲滯 말고 떠나시오.”
그리고는 門을 닫고 들어가버려 말할 틈도 주지 않았다. 娘子는 할 수 없이 南쪽 磊房으로 가서 먼저와 같이 請했다. 夫得이 말했다.
“그대는 어디서 왔소?”
“저의 마음이 大虛(하늘)와 같은데 어찌 오가는 곳이 있겠습니까? 그저 스님의 德行이 높다는 말을 들었기에 將次 菩提(보리)를 이뤄주려 할 뿐입니다.”
그리고는 詩를 한 首 지어 주었다.
疊疊 山中에 날은 저문데
가고 가도 人家는 보이지 않네.
대나무와 소나무 그늘은 한층 깊고
냇물 물소리는 한결 새롭게 들리는데.
길을 잃어 찾아 온 것만은 아니리오.
스님께 큰 길을 일깨워 주려 함이니
부디 내 請을 따라주시되
내가 누구인지 묻질랑 마시오.
夫得이 그 말을 듣고 적이 놀라며 말했다.
“이곳은 婦女子가 함께 있을 곳은 아니지만 衆生의 뜻을 따르는 것 또한 菩薩行의 하나이고, 더구나 깊은 골짜기에 밤이 어두웠으니 어찌 疎忽히 待接할 수 있겠소? 不便하겠지만 하룻밤은 머무실 수 있을 테니 그리하시오.”
夫得은 그를 庵子 안에 머물게 했다.
밤이 깊어지자 아름다운 娘子가 한 지붕 아래 머무는지라 夫得은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고 志操를 지키기 爲해 壁을 바라보며 쉬지 않고 念佛을 외웠다. 이윽고 날이 샐 무렵에 娘子가 夫得을 불렀다.
“스님! 罪悚하오나 내가 갑자기 解産 幾微가 있어 그러하니 짚자리를 좀 깔아 주십시오.”
夫得이 操心스럽게 짚자리를 마련해주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촛불을 밝혀주자 解産을 마친 娘子가 이番에는 沐浴을 시켜 달라고 했다.
夫得은 부끄러움과 두려운 心情으로 浴槽를 마련해 娘子를 그 가운데 앉히고 沐浴을 시키자 浴槽 속의 물에서 香내가 풍기며 金빛으로 變했다. 夫得이 크게 놀라자 娘子가 말했다.
“스님께서도 함께 沐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夫得이 마지못해 그 말대로 하니 갑자기 精神이 맑아지고 皮膚가 金빛으로 變했다. 문득 옆을 돌아보니 언제 만들어졌는지 蓮花臺 하나가 있었다. 娘子가 夫得에게 거기 올라앉으라고 勸하며 말했다.
“實은 내가 觀音菩薩이오. 大師를 도와 큰 깨달음을 얻게 하려고 온 것입니다.”
말을 마치더니 今세 보이지 않았다.
한便, 朴朴은 娘子가 떠난 뒤에 생각했다.
“어젯밤에 夫得이 아마 破戒했을 것이니 가서 慰勞를 해주어야겠다.”
그러나 가서 보니 夫得이 彌勒尊像이 되어 蓮花臺에 앉아 있는데 몸빛이 모두 金빛이었다. 朴朴은 自己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리고 절하며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되셨습니까?”
夫得이 그 까닭을 仔細히 말하자 朴朴이 嘆息하며 말했다.
“나는 마음에 가린 것이 있어서 부처를 만나고도 모시지 못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질어 먼저 뜻을 이루셨습니다. 바라건대 道伴의 情을 잊지 마시고 부디 小僧도 啓導해주소서.”
夫得이 말했다.
“浴槽에 아직도 金液이 남아 있으니 沐浴을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래서 朴朴도 沐浴을 하니 亦是 夫得과 같이 無量壽佛이 되었다.
11. 부어제일(夫於第一)
男便이 第一이라는 말로, 朝鮮 中宗 때 政丞을 지낸 洪彦弼의 夫人에게서 由來했다. 條件이 모두 같아도 내 男便이 第一 좋다는 지어미의 道를 깨우쳐 주는 말이다.
* 古今淸談에.
朝鮮 第11代 中宗 때 領議政 宋軼 (1454~1520)은 점잖기로 有名하고, 그의 貞敬夫人은 妬忌가 甚하기로 有名하여, 그 內外는 이 有名, 저 有名을 합쳐 더욱 有名했다.
그러나 宋 政丞의 有名은 世人의 尊敬을 받는 有名이었으나 夫人의 有名은 男便과 집안의 體面을 깍는 有名으로, 그 行實이 政丞의 夫人으로서는 甚히 道가 어긋나는 것이었다.
한 番은 시중을 드는 계집아이가 宋 政丞의 洗手물을 떠다 놓고는 手巾을 들고 서 있었다. 政丞이 洗手를 하고 手巾을 받으려다가 계집애가 귀여워 別 생각없이 ‘그것 참 귀엽기도 하다.’ 고 하면서 손을 어루만져 주었다.
다음날 아침, 宋 大監은 밥床의 밥 뚜껑을 열다가 기겁을 했다. 밥그릇 속에는 밥 代身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계집아이의 손가락이 담겨 있었다. 두말할 것 없이 夫人의 所行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大監은 그 아이의 아비를 불러 종의 文書를 내주고, 土地 몇 마지기를 떼어주며 謝過하고 돌려보냈다.
宋 政丞에게는 딸이 셋 있었는데 모두 外탁을 하여 어머니를 빼닮았다. 宋 政丞은 이런 딸들을 다잡기 爲해서는 特段의 措置가 必要하다고 생각해서 먹물 세 砂鉢을 타 놓고 딸들을 불렀다.
“너희들도 너희 어머니처럼 妬忌를 한다면 敗家亡身할 것이 分明하니 마음을 그리 쓰지 않겠다고 約束을 하든지, 아니면 이 藥을 먹고 죽든지, 둘 中 하나를 選擇하도록 하여라!”
그러자 위로 두 딸은 妬忌를 않겠다고 다짐을 했으나 막내딸은 ‘제 性味로 못 살 바에야 차라리 죽겠습니다.’ 면서 먹물을 마시려고 했다. 두 언니가 깜짝 놀라 砂鉢을 빼앗기는 했지만 宋 政丞은 막내딸의 將來가 크게 걱정되었다. 그래서 그 性味를 누를 수 있는 사윗감을 고르는 중에 洪彦弼(1476~1549)을 만났다.
그는 17歲의 어린 나이였으나 이미 喪妻한 經驗이 있었다. 그러나 宋 政丞은 그의 凜凜함이 能히 한 女子를 制御할 수 있는 사윗감이라고 생각되어 自己의 셋째 딸과 婚姻할 것을 提議했다. 洪彦弼도 政丞의 딸에게 새 장가를 가게 되니 拒絶할 理由가 없었다.
婚事 前날, 宋 政丞이 洪彦弼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내 딸이 다 좋지만 한 가지 性味가 사나우니 그 애의 性質을 누르기 爲해서는 이러저러 하라.”
그러나 貞敬夫人은 사윗감이 喪妻한 經驗이 있다는 말을 듣고 크게 怒했다.
“내 딸이 어떤 딸인데 再娶로 보내다니요. 宰相家의 體統이 안 섭니다. 禮緞을 물리세요.”
丈母의 거센 反撥에 부딪치자 洪彦弼도 火가 치밀어 말했다.
“내가 비록 喪妻한 몸이기는 하지만 丈人어른께서 決定하신 일을 丈母님께서 뒤엎다니 이런 法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이 宅 딸 아니면 장가를 못 들 것 같습니까?”
그러자 宋 政丞이 나서서 말했다.
“사내 大丈夫가 所見 좁은 아낙네와 같이 行動하면 안 되네. 자네가 참게나.”
사위는 丈人의 말에 못 이기는 척하고 그냥 妻家에 머물기는 했으나 新房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 後 3年 동안, 洪彦弼은 妻家에는 얼씬도 안 했다. 그러나 丈人과는 隱密하게 消息을 주고 받으며 熱心히 工夫하여 科擧에 及第하자 그제야 正式으로 妻家에 들렷다.
뒤늦게야 사위의 됨됨이를 알게 된 貞敬夫人은 自身의 輕率함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謝過했다.
그 後 洪彦弼이 政丞에 오르니 그의 夫人으로서는 親庭아버지와 男便, 그리고 훗날 領相에 오른 아들까지 父, 夫, 子 모두 세 政丞을 맞았다.
末年에 사람들이 세 政丞을 보시니 누가 第一 좋으냐고 묻자 그 女는 이렇게 對答했다.
“아버지가 政丞이었을 때는 젊은 탓에 그냥 좋았고, 男便이 政丞이었을 때는 내가 政丞이 된 것 같아 좋았으며, 아들이 政丞이 되었을 때는 내 나이가 들어 비록 늙었으나 마음이 피어오르는 구름 같아 좋았소. 그래도 男便이 政丞이었을 때가 第一 좋았던 것 같소.”
12. 분여대고(糞如大鼓)
똥 덩어리가 커다란 북만 하다. 卽 똥 덩어리가 크니, 따라서 그 똥을 눈 사람의 身體도 클 것이라는 말이다. 어떤 한 가지로 미루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 三國遺事 券 1에.
新羅 第22代 智證王은 姓이 金氏였으며, 이름은 智大路, 智度路, 또는 智哲老라고 했다. 智證은 諡號였는데, 諡號가 우리나라에서 쓰이기 始作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또 王을 麻立干이라고 부른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런데 智證王은 陰莖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나 되어 그에 걸맞은 王后를 求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全國에 王后가 될 配匹을 求하는 榜을 붙였다.
牟梁部의 한 官吏가 冬老樹 아래 개울가를 지나는데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덩어리를 앞에 놓고 서로 으르렁대고 있었다. 官吏는 그 똥을 싼 임자가 女子라면 王의 짝이 될 만하겠다고 생각하고 搜所聞하니 한 少女가 말했다.
“牟梁部 相公의 딸이 그곳에서 빨래를 하면서 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여 그 相公의 집을 찾아가 보니 놀랍게도 그 딸의 身長이 일곱 자 다섯 치나 되는 巨人이었다.
王에게 그 事實을 알리니 王이 親히 수레를 보내어 그 딸을 宮中으로 맞아들여 王后로 삼았다. 뭇 臣下들은 王의 慶事를 祝賀했다.
이 智證王 때 朴伊宗이 于陵島(于山國)의 오랑캐들이 깊은 바닷물을 핑계 삼아 朝貢을 하지 않자 나무로 獅子를 만들어 싣고 가 그들을 威脅하여 降服을 받아냈다.
13. 불가상서(不可尙書)
‘아니오’라고 말하는 尙書라는 뜻으로, 高麗 宣宗 때 王의 政治가 옳지 않을 境遇 그 不當함을 直言했던 尙書 위계정(魏繼廷)의 行實에서 由來했다. 事實대로 直言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 高麗史節要. 韓國人名大辭典에.
高麗 第13代 宣宗(1049~1094) 때의 尙書 魏繼廷 (?~1107)은 비록 王이라 하더라도 잘못하면 ‘不可합니다.'라고 아뢰는 志操있는 선비였다.
宣宗이 寵愛하는 愛妾 萬春이 自己 집을 지나치게 雄莊하고 華麗하게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女가 王의 寵愛를 받는 愛妾이라는 事實을 알기 때문에 누구도 그 不當함을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魏繼廷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直言을 했다.
“萬春이 陛下를 속이고 百姓들을 苦生시켜 私事로운 個人 집을 너무 巨大하게 짓고 있습니다. 請컨대 그것을 헐게 하소서!”
敢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일인데도 거침없이 아뢰었던 것이다.
그런 魏繼廷에게 한 番은 王이 燃燈會 자리에서 술에 醉해서 춤을 추어보라고 命하였다. 그러자 魏繼廷은 躊躇하지 않고 所信을 밝혔다.
“광대가 있는데 大臣의 몸으로 어떻게 여러 사람 앞에서 춤을 춥니까? 아무리 殿下의 命令이라 해도 그것만은 못하겠습니다.”
듣고 있던 다른 同僚 大臣이 魏繼廷의 行動에 끼어들어 參見했다.
“陛下의 말씀에 ‘아니오’ 라고 말하는 것은 臣下된 道理가 아닐 것이오. 그러니 殿下의 말씀대로 춤을 추는 것이 옳은 일이오.”
그러자 魏繼廷이 正色을 하며 말했다.
“일찍이 曾子는 ‘殿下의 말이라고 ’예, 예‘만 하면 그 나라는 亡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소.” 하고 끝내 춤을 추지 않았다.
魏繼廷은 그 後 正直性과 淸廉性이 認定되어 벼슬은 門下侍中에 이르렀고, 나이가 들어 辭表를 냈으나 許諾하지 않고 200日의 休暇를 줄 程度로 王의 厚한 待接도 받았다. 自然히 百姓들에게도 信望이 두터웠으며, 文章에도 뛰어났다. 諡號는 忠烈公이다.
14. 불굴필성(不屈必成)
굽히지 않으면 반드시 成功한다. 高麗의 將帥 박서(朴犀)의 故事에서 由來한 말로 힘이 모자라더라도 抛棄하지 않고 끝까지 努力하면 終來에는 成功한다는 뜻이다.
* 高麗史, 이야기 韓國史에.
高麗의 第23代 高宗(1192~1259) 12年, 蒙古의 使臣 著古與 一行이 高麗에서 貢物을 가지고 鴨綠江을 건너가던 中 鴨綠江 咸新鎭 (義州)에서 女眞族에게 殺害當하는 事件이 벌어졌다.
蒙古에서는 이것이 高麗人의 짓이라 여겨 國交를 斷絶하고 高宗18年에 蒙古의 太宗(칭기즈칸<成吉思汗>의 셋째아들)이 將帥 살리타(撒禮塔)로 하여금 40萬 大軍으로 高麗를 侵略하게 하였다. 撒禮塔는 咸新鎭을 包圍하고 이렇게 威脅했다.
“나는 蒙古의 將帥다. 降伏하지 않으면 모조리 짓밟아 버리겠다.”
그러자 怯을 먹은 府使 金僩은 防禦 責任者 趙叔昌과 함께 降伏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咸新鎭을 掌握한 蒙古軍은 鐵州로 길을 잡았다.
가는 中에 降伏한 趙叔昌이 撒禮塔에게 말했다.
“나는 元帥 趙沖의 아들이오. 우리 아버지는 일찍이 貴國의 元帥 哈眞과 兄弟의 義를 約束한 바 있었소. 그러니 나의 목숨만은 살려 주시오.”
그러고 나서 그는 朔州 宣德鎭의 城主에게 찾아가 함께 降服할 것을 勸誘했다.
그렇게 하여 여러 城을 쉽게 占領한 蒙古軍은 가는 곳마다 趙叔昌으로 하여금 城을 지키는 責任者에게 降服을 勸誘토록 使嗾했다.
鐵州城에 이르렀을 때, 蒙古軍은 사로잡은 瑞昌郞將 文大로 하여금 通譯을 하게 했다.
“眞짜 蒙古 軍士가 왔으니 속히 降服하라.”
그러나 文大는 蒙古人들의 말을 反對로 通譯했다.
“가짜 蒙古 軍士가 왔으니 城門을 굳게 닫고 降服하지 말라!”
그러자 蒙古軍은 文大를 죽이고 城을 攻擊했다.
城안에서는 糧食이 다 떨어져 狀況이 매우 危急했다. 그러자 判官 李希勣은 城안의 婦女子와 어린아이들이 敵에게 辱을 當하고 죽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處理하리라 생각하고 倉庫로 들어가게 한 다음 불을 질렀다. 그리고 壯兵들과 함께 決死的으로 싸웠으나 이길 可望이 없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로써 城은 끝내 陷落되고 말았다.
그 해 9月, 武臣 崔忠獻의 아들 崔瑀는 蒙古軍을 무찌르기 爲해 大將軍 蔡松年을 北界兵馬使로 삼아 軍士를 모았다. 그 結果 龜州兵馬使 朴犀, 朔州 分道將軍 金仲溫, 定州 分道將軍 金慶孫 等이 定州, 朔州, 渭州, 泰州의 守令들과 軍士를 거느리고 龜州城으로 集結했다.
蒙古軍은 城을 여러 겹으로 包圍하고 晝夜로 攻擊했다.
高宗 19年 正月, 朴犀 等은 蒙古君이 樓車와 大砲車 그리고 雲梯 等으로 攻擊해오자 한 달 동안이나 버티어 이들을 물리쳤다.
金慶孫 亦是 決死隊 12名과 함께 奮戰, 擊退했는데 大軍이 다시 몰려오자 龜州로 가서 朴犀와 함께 싸웠다.
蒙古軍은 龜州를 到底히 攻略할 수 없게 되자 開城으로 쳐들어가 그곳을 陷落시키고 다시 龜州를 쳤으나 大敗하고 말았다.
이에 高麗 朝廷에서 降伏할 것을 勸誘하자 눈물을 머금고 降伏했다. 그때 蒙古軍 將帥가 말했다.
“나는 戰爭터에 나가 數없이 싸웠지만 이렇게 攻擊을 當하고도 끝까지 버티는 將帥는 보지 못했다. 이 城을 지킨 將帥들은 後日 반드시 有名한 將帥나 宰相이 될 것이다.”
그의 豫言대로 朴犀는 뒤에 門下平章事가 되었으며, 金慶孫은 樞密院 副使가 되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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