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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한자성어(漢字成語)**/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ㅅ-1)

by 산산바다 2026. 2. 22.

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글 목록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1)

 

 

1. 사금갑설화(射琴匣說話)

거문고 갑을 쏘라

 

* 三國遺事 券1 紀異扁 第1.

新羅 第21代 毗處王(炤知王) 卽位 10(西紀 479) 어느 날, 天泉亭行次했다.

行次 中에 까마귀와 쥐가 나타나더니 쥐가 사람처럼 말을 했다.

저 까마귀를 따라 가보십시오.”

그래서 騎士에게 까마귀가 날아가는 곳으로 따라가게 했었다. 까마귀가 避村(慶州 南山의 동쪽 기슭)에 이르자 멧돼지 두 마리가 한창 싸우고 있었다.

돼지 싸움에 精神이 팔려 구경하다, 그만 까마귀의 行方을 잃어버려 近處徘徊하고 있노라니까 한 老人이 물속에서 나와 서찰(書札)을 하나 건네주었다. 그 봉투(封套)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書札을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騎士가 돌아와 에게 드리니 이 말했다.

열어보고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열어보지 않고 한 사람만 죽게 하는 便이 낫겠구나.”

그러자 곁에 서 있던 日官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란 普通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고, 한 사람이란 바로 폐하(陛下)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日官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書札을 열어보게 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琴匣을 쏘라 (射琴匣).”

은 곧 으로 돌아가 거문고 箱子()해 활을 쏘았다. 그런데 그 안에는 내전(內殿)焚香修道(佛事를 맡아 하는 일) 중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 追窮結果 王妃와의 不倫 事實이 밝혀지고 將次 王을 시해(弑害)하려 했다는 內容까지 밝혀져 두 사람은 죽임을 당했다.

그때부터 每年 正月의 첫 亥日, 子日, 午日에는 모든 일을 操心하여 함부로 行動하지 않았고, 正月 보름날은 烏忌日(까마귀를 기리는 날)이라 하여 五穀(까마귀가 좋아하는 대추를 넣은 )을 지어 까마귀에게 祭祀를 지내주는 風俗이 생겨났다.

以後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烏忌日五穀()을 지어 먹게 되었으며, 老人이 나온 연못을 '書出池'라 부르게 되었다.

 

 

2. 사색당파(四色黨派)

朝鮮時代 老論, 小論, 南人, 北人 등의 黨派를 가리키는 말. 團合하지 못하고 分裂되는 現象을 이른다.

 

* 黨議通略.

四色黨派朝鮮時代 老論, 小論, 南人, 北人四大黨派를 말하며, 14代 宣祖 8(1575), 東西分黨契機340年 間이나 繼續되었다. 이러한 黨派가 생긴 것은 16代 仁祖, 17代 孝宗 때였는데, 西人에서 老論小論派生되었고, 東人에서 南人北人이 갈라졌다. 北人은 다시 大北小北으로 兩分되었고, 仁祖反正으로 西人權勢를 잡게 되자 大北全滅 狀態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小北艱辛命脈維持하게 되니 北人이 바로 그들이다.

黨爭原因은 첫째가 儒學派對立이었으며, 둘째는 王室 內 外戚들의 內訌이었고, 셋째로는 政治的 制度未備였다. 具體的 原因宣祖 金孝元沈義謙東西 對立을 들 수 있으나 그 뿌리는 儒學朱子學에 있다.

忠淸道 藍浦白頤正나라에서 朱子學을 들여와 高麗 末 鄭夢周繼承되어 朝鮮佔畢齋, 金宗直이 이어받고 그 門下에서 金宏弼, 鄭汝昌, 金馹孫, 趙光祖 等碩學들이 輩出되었다.

이들은 隱然 中 政治的으로 連帶되어 戊午士禍, 甲子士禍, 己卯士禍, 乙巳士禍 等이 잇달아 發生했다. 이렇게 反目肅淸反復되는 黨爭中央集中兩班 官吏들의 熾熱權力爭奪 競爭 때문이었다.

宣祖卽位한 뒤 士林派代表的 職位吏曹銓郞에 이해(李澥)薦擧되자 士林派舊勢力吏曹參議 沈義謙이 이를 拒否했다. 이해(李澥)權臣 尹元衡門客으로 身世를 졌다는 것이 理由였다. 그러나 끝내 銓郞起用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沈義謙同生 沈忠謙吏曹銓朗薦擧되자 金孝元이 척신(戚臣)私有物이 될 수 없다. 하여 反對하고 나섰다.

이렇게 하여 金孝元支持하는 新進 士林派沈義謙支持하는 旣成 士林派對立始作되었다.

여기서 金孝元東大門 駱山에 살았다하여 그 一派東人이라 하였고, 沈義謙西貞洞에 집이 있었으므로 그 一派西人이라 불렀다.

銓郞이란 吏曹正郞佐郞을 일컬으며 內外 官員을 천거(薦擧), 전형(銓衡)하는 5品 職責이었다. 吏曹判書三司弘文館, 司憲府, 司諫院 中에서 德望 있는 사람을 推薦하여 임금이 任命했다. 이 자리를 거치면 宰相(임금을 돕고 官員指揮監督하는 2品 以上 벼슬자리의 總稱. 또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 卿宰. 宰臣)의 길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이처럼 要職이다 보니 그 人事權을 두고 치열(熾熱)對立 構圖形成되게 마련이었다.

兩班들은 國家로부터 科田功臣田을 받았는데 그들은 官職을 떠나면 그를 中心으로 同族部落形成되었다.

이렇게 되자 나중에는 科田으로 支給土地가 모자라 科田法職田法으로 改編하기에 이르렀다. 職田法이란 現職에 있는 사람에 하여 土地支給해 주는 制度였다.

그마저 나누어 줄 土地가 없어 新進 官僚舊 官吏對立이 생겼다. 勳舊派士林派對立도 이와 깊은 關聯이 있다.

西人은 다시 , 少 兩黨으로 갈라지면서, 老論宋時烈, 金益勳 等代表的 人物이었고, 少論趙持謙, 尹拯 等中心이 되어 朝鮮 末期까지 정권쟁탈(政權爭奪)을 벌였다. 當時 副提學 栗谷 李珥西人이면서도 1584年 宣祖 17, 으로 世上을 떠날 때까지 10年間에 걸쳐 兩 派對立緩化하기 努力했다.

그가 죽은 에는 李山海, 盧守愼, 柳成龍 等 東人錚錚人物들이 登用됨으로써 西人勢力은 기울고, 東人勢力强化되자 內部分裂이 생기어 1591年 宣祖 24에는 南人北人의 두 갈래로 또다시 分派되었다. 南人禹性傳, 柳成龍 等中心이 되었고, 北人은 이발(李潑), 李山海 等領袖가 되었다.

南人, 北人名稱由來禹性傳의 집이 南山 밑에 있었으므로 南人이라 했고, 李潑北岳山 밑에 살았으므로 北人이라 불렀다.

1592年 宣祖 25壬辰倭亂勃發하여 그로부터 7年間國家民族存亡危機直面했던 關係派爭을 벌일 겨를이 없었으나 戰亂이 끝나자 곧 南人柳成龍和議主張했다는 理由失脚되었고, 北人南以恭政權을 쥐게 되었다. 그리고 北人得勢東人名稱은 없어졌다.

그러나 北人 또한 勢力이 커짐에 따라 內紛이 일어나 大小兩北으로 다시 나누어지고, 大北은 다시 骨北, 肉北, 中北, 皮北, 濁北 等6分裂되었으며, 小北 또한 , 濁 兩北으로 分派되었다. 大小 兩北光海君卽位이이첨(李爾瞻) 大北勢力을 잡아 光海君 在位 15동안 執權하였다. 그러나 仁祖反正으로 光海君이 물러나자 西人이 다시 政權을 잡음으로써 大北沒落했다. 後 西人功西淸西分派되었으며, 김류(金瑬)中心으로 한 老西와 이를 反對少壯派 少西로 다시 나뉘었다. 그리고 이들은 原黨, 洛黨, 山黨, 漢黨 等으로 細分되어 對立했다.

그러나 西人執權하고 있던 동안에도 南人李元翼登用으로 命脈을 이어왔고, 北人 中 大北全滅했으나 小北은 남아서 , 少北3派 對立形勢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을 3이라 일컬었고, 西人老論小論, 兩論으로 分破되니 南人, 西人, 老論, 小論四色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景宗卽位하자 世子 冊立問題를 둘러싸고 小論衝突結果 小論勝利하고 老論慘敗했으며, 또한 辛壬士禍하여 金昌集, 李健命 等 數十 名西人 指導者들이 肅淸하여 老論一隊 打擊을 받았다. 景宗 다음에 英祖卽位하자 辛任士禍慘狀目睹老小 兩派調整에 힘을 기울여 蕩平策을 폈다. 다음 正祖 또한 前王施策繼承하여 蕩平注力했으므로 이로부터 黨爭은 크게 緩和되었으나 權勢老論掌握했다. 그러나 英祖 때에는 時派僻派의 새로운 對立이 생겨났다.

憲宗哲宗3代間外戚勢力 다툼은 잦았으나 以前과 같은 慘劇은 없었고, 高宗登極 後大院君派黨 打破人才登用 施策으로 黨派 觀念漸次로 사라졌다.

이와 같은 黨爭百姓들로 하여금 上典 앞에 阿附해야 살아남는 風土造成하게 해 서로 中傷하고 反目하는 不信 風潮繼續되었다.

이런 朋黨內政뿐만 아니라 對外 關係國防 政策에까지 影響을 미쳐 壬辰倭亂, 丙子胡亂 같은 國亂招來하여 나라 發展에 엄청난 支障을 가져왔다.

洪景來亂東學革命 등도 黨爭産物이었다.

또 밖으로 , , () 等 隣接 强大國들의 角逐場이 된 것도 340여 년간 지속되어 온 黨爭이 그 빌미를 제공했다.

 

 

3. 사웅지투(獅熊之鬪)

사자와 곰의 싸움이라는 말로, 近代 佛敎界의 거두 滿空 스님과 萬海 스님의 逸話에서 由來했다. 곰과 獅子優劣을 가리기 힘든 다툼을 이른다.

 

* 萬海 韓龍雲硏究.

萬海 韓龍雲(1879~1944)雪岳山 五歲庵에 들어갔다가 다시 인제(麟蹄) 白潭寺 로 가서 連谷에게 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그의 戒名奉琓이고, 本貫淸州이며, 洪城 出身이다. 그는 어렸을 때 書堂에서 漢學을 배우다가 東學革命加擔하기도 했다.

1910, 韓日合邦이 되자 시베리아 等地放浪하다가 돌아와 佛敎改革하고 現實參與主張하였으며, 佛敎 大衆化抗日獨立運動에 힘썼다.

그리고 1919, 31 運動 때에는 民族 代表 33의 한 사람으로 參與했다가 체포되어 3년 형을 선고받았다.

萬海日帝 日本人들의 支配를 받는 것을 恥辱的으로 생각하여 民籍이 없이 살았다. 그로 하여 받은 代價酷毒했다. 配給制施行되면서 食糧衣類 等 一切生活必需品을 받을 수 없는 것도 그 의 하나였다. 그런 苦礎 속에서도 無男獨女 외딸 英淑學校에 보내지 않는다며 집에서 손수 工夫를 가르쳤다.

1937, 朝鮮總督府에서는 佛敎親日化시키려고 全國 31個 本山住持會議召集하였다. 그 자리에서 麻谷寺滿空 宋道巖(1871~1946)禪師總督府一聲했다.

옛날에는 시골 僧侶들이 長安에 들어서지도 못했고, 어쩌다 몰래 들어오면 볼기도 때리고 法律로 다스렸는데, 이제 總督府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니 氣分이 좋아야 할 터인데 도리어 볼기 맞던 時節이 그립도다. 우리를 여기에 부른 것은 所謂 査察令을 내려 僧侶組織을 휘어잡으려는 속셈 같은데, 萬一 그리한다면 總督府無間地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 陰謀를 꾸미는 總督이야말로 짜로 無間地獄에 떨어질 것이다.”

滿空은 들고 있던 지팡이로 冊床을 치며 一場演說을 했다.

그러자 場內는 아연(俄然) 긴장(緊張)하여 總獨 미나미 지로(南次郞)를 주시(注視)했다. 今方 무슨 날벼락이라도 내리지 안겠는가 마음을 졸이며 滿空이 무모(無謀)하다고 怨望視線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憲兵이 들이닥쳐 滿空 스님을 체포(逮捕)하려 했다. 그런데 總督이 무슨 생각에 선지 이를 制止시켰다. 그리고 參席한 스님들을 全部 총독관저(總督館邸)招待하여 다과(茶菓)待接하고 돌려보냈다. 滿空의 호통에 스님들의 親日化 計劃을 포기했던 것이다.

滿空은 한달음에 萬海 스님을 찾아갔다. 滿空總督을 호되게 꾸짖은 消息霎時間長安에 퍼졌다. 그런데 그 일을 미리 알고 있던 萬海滿空이 찾아오자 매우 반가이 맞았다.

萬海가 입을 열었다.

旣往이면 號令만 하지 말고 스님의 拄杖子總督의 머리통이라도 한 대 갈겼더라면 시원했을 걸…….”

그러자 滿空이 말했다.

막대기 싸움은 곰()이나 하는 짓이고, 號令獅子라야 하는 이지.”

그러니까 滿空 自身獅子가 되고, 萬海는 곰이라는 이야기였다.

萬海가 다시 입을 열었다.

號令은 새끼 獅子가 하고, 獅子는 그림자만 보여주는 이지.”

그리되면 滿空은 새끼 獅子이고, 萬海는 큰 獅子라는 뜻이다.

當代 佛敎界傑出한 두 禪師는 서로 자웅(雌雄)을 겨룰 만큼 마음을 주고받았는데, 萬海가 떠나자 滿空이제 漢陽에 가도 만날 사람이 없구나.’ 하면서 漢陽에는 발걸음을 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4. 삼촌설 격퇴적(三寸舌 擊退敵)

세 치 혀로 을 물리치다. 거란(契丹)80大軍을 이끌고 高麗를 쳐들어왔을 때 徐熙 將軍理論으로 따져 물리친 故事에서 由來했다. 雄辯重要性을 이르는 말이다.

 

* 高麗史節要. 이야기 韓國史.

거란(契丹) 916, 高麗 建國 2年 前中國 北쪽에 生成된 나라로, 渤海하여 東丹國을 세우고, 나라를 쳐서 國號大遼라 했다.

高麗 太祖는 거란(契丹)을 오랑캐로 여겨 契丹에서 보낸 使臣 30을 귀양 보내고, 膳物로 보낸 駱駝 50도 굶겨 죽여 버렸다. 그것은 契丹無道한 나라임을 百姓들에게 알리고, 契丹에게 渤海遺民을 받아들여 高句麗의 옛 땅을 되찾으려는 뜻에서였다.

그런데 나라를 쳐서 中國統一하려던 契丹高麗4代 光宗나라와 國交를 맺자 6代 成宗 12遼東을 지키고 있던 蕭遜寧으로 하여금 80軍士를 거느리고 鴨綠江을 건너 高麗를 치게 했다.

그러자 高麗에서는 993年 尹庶顔先鋒將으로 내세웠으나 淸津江 싸움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에 高麗侍從 朴良柔上軍使, 內史侍郞 徐熙(942~998)中軍使, 門下侍郞 崔亮下軍使任命해서, 오랑캐를 막도록 措置하였다.

安北部까지 나가 將帥들을 督勵하는 한편, 禮部少卿 이몽전(李蒙戰)使臣으로 任命하여 敵陣으로 들여보냈다. 그래서 敵陣情況을 살피고 온 李蒙戰이 말했다.

敵將의 말이 高麗가 압록강(鴨綠江)까지 나온 것은 거란(契丹) 땅을 侵犯한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徐熙 等 將軍들과 重臣을 모아놓고 對策議論하였다.

敵將은 누구이고, 兵力은 얼마나 되는고?”

의 얼굴에는 愁心이 가득했다.

敵將은 소손녕(蕭遜寧)이고, 80만은 되리라고 생각하옵니다.”

저들 거란(契丹)나라를 쳐서 中原統一하는데 目的이 있을 것이오, 그런데 우리 高麗나라와 國交를 맺고 있으니 우리를 먼저 쳐서 과 손을 끊게 하겠다는 心算이 아니겠소? 따라서 과 손을 끊으면 물러가겠다고 했다는데 事實이오?”

박양유(朴良柔)가 나서서 말했다.

의 생각으로는 발해(渤海)의 옛 땅 大同江 以北을 떼어 주면서 和平策을 써야 할 줄 압니다.”

이에 徐熙反對를 하고 나섰다.

太祖大王께서 高句麗의 옛 땅을 되찾으시려는 큰 뜻으로 擴張해 놓으신 것을 쉽사리 의 손에 넘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契丹한 나라라 할지라도 싸우지도 않고 國土를 빼앗긴다는 것은 우리 高麗羞恥입니다. 이 이 일을 반드시 解決하겠습니다.”

徐熙自信 있고 强硬態度座中潛潛해졌다. 李知白이 말했다.

中軍使意見贊成합니다. 싸우지도 않고 國土를 내준다는 것은 太祖大王께 큰 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高麗朝廷에서는 結論을 내리지 못하고 右往左往하는 사이에 契丹軍 陣營에서는 使臣 李蒙戰이 다녀간 지 한 달이 지나도 消息이 없으므로 드디어 安戎鎭攻擊하게 되었다.

契丹軍은 벌판 싸움엔 하였으나 險峻이 우뚝우뚝 솟은 高麗 땅에서는 어떻게 攻擊을 해야 좋을지 遲遲不進했다.

敵將 蕭遜寧唐慌하여 高麗로 사람을 보냈다.

貴國大臣을 우리 으로 보내면 서로 會談을 한 뒤에 適切決定을 내리겠소이다.”

그러나 契丹軍 陣中으로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徐熙가 나서며 말했다.

이 어리석고 不足하오나 敵陣에 들어가 談判을 짓겠나이다.”

將軍이 간다면 寡人安心하겠소. 그러나 中軍使重責은 누가 擔當한단 말이오?”

陛下! 中軍使上軍使가 없어도 반드시 을 물리치겠습니다. 萬若 目的을 이루지 못하면 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사오니 萬壽無疆하소서.”

徐熙敵陣하여 말을 달렸다.

蕭遜寧軍幕으로 引導徐熙蕭遜寧과 미주 앉았다.

蕭遜寧은 점잔을 빼며 威脅的語套로 입을 열었다.

將軍! 高麗國新羅 땅을 根據建國된 나라임에 틀림없소. 그리고 우리 契丹은 옛 高句麗 땅에서 일어난 나라임이 確實하오. 그런데 貴國이 우리 契丹領土인 옛날 高句麗 땅을 侵犯했소. 그리고 貴國國境이 우리나라와 隣接해 있는데도 不拘하고 우리나라를 敵對視하고 멀리 바다를 건너 나라와 國交를 맺고 있소. 내가 軍士를 거느리고 온 理由도 여기에 있소. 그러므로 첫째, 貴國에서 卽時 우리 領土인 옛 高句麗 땅을 내놓고 朝貢을 바칠 것이며, 둘째 나라와 斷交를 하면 軍士를 돌이키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80萬 大軍을 이끌고 大同江을 건너 開京을 무찌를 것이니 이에 將軍意見을 말하시오.”

徐熙精神을 바짝 차리고 條目條目 따지며 說得했다.

우리 高麗新羅에서 일어났다고 將軍은 말하지만, 그게 아니라 우리나라는 分明高句麗後身이오. 때문에 國號高句麗를 줄여 高麗라고 하였소. 國境問題를 말한다면 契丹東境部까지가 모두 우리 高麗領土가 되어야 함이 마땅하거늘 어째서 우리나라가 侵犯하였다고 하시오? 그리고 우리가 貴國朝貢을 못 한 것은 鴨綠江 沿岸女眞族 때문에 길이 막혀서 그런 것이었소. 이제라도 女眞族을 쫓아버리고 鴨綠江 以南의 땅을 돌려준다면 朝貢을 하겠소.”

蕭遜寧이 말했다.

우리 皇帝께서는 貴國을 치려고 하는 게 아니라 貴國나라와 國交를 맺고 우리나라를 오랑캐처럼 여기기 때문에 이렇게 軍士를 움직인 것이오. 그러면 우리가 軍士를 일으켜 을 친다면 貴國에서는 어떻게 하겠소?”

남의 나라를 먼저 쳐들어간 일이 없는 우리가 어찌 다른 나라의 싸움에 끼어들겠소? 우리 民族은 예부터 平和를 즐기는 淳朴하고 穩厚民族이오.”

이렇게 論理 井然徐熙의 말에 할 말을 잃은 蕭遜寧會談內容自己 나라 皇帝에게 報告하여 그 回答徐熙에게 하였다.

우리 皇帝께서 말씀하시기를, 高麗國鴨綠江 以南의 땅에 을 쌓아 貢路(朝貢을 바치러 다니는 길)開拓하여 每年 使臣을 보내고 서로 交通 하겠다면 軍士回軍시키라고 했소. 그리하겠소?”

좋소. 그리하겠소.”

이리하여 中軍使 徐熙 將軍은 세 치의 짧은 혀 하나로 蕭遜寧이 거느린 80大軍을 물리쳤다.

이를 두고 後世 사람들은 三寸舌 擊退敵또는 徐熙談判이라 이르게 되었다.

 

 

5. 삼기불변(三起不變)

세 번 넘어뜨려도 일어나 변함없이 하다.

 

* 里鄕見聞錄.

儒學者 이몽리(李夢鯉)學問으로 크게 稱頌을 받았다. 어느 재상집 종이 거리에서 權勢를 믿고 방자하게 횡포를 부리더니, 하루는 크게 술 취하여 길거리에서 우연히 李夢鯉를 만났는데, 李夢鯉가 의젓하고 法道 있게 걸어감을 보고는 비웃으며 李生을 손으로 힘껏 밀쳐 길 위에 넘어뜨려 버렸다. 李夢鯉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일어나서 여전하게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종이 다시 밀어뜨리기를 세 번이나 하였는데도, 李夢鯉는 일어나서 처음과 같은 모습을 지켰다. 종이 크게 깨달아서, 절을 하고 말하기를, "理學을 배우는 분이신 것을, 小人無知하여 크게 缺禮를 범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6. 삼마태수(三馬太守)

세 마리의 말만 가진 太守라는 말로, 肅宗 때 사람 宋欽에게서 由來했다. 淸白吏를 가리키는 말이다.

 

* 故事成語 大辭典.

朝鮮時代에는 고을 守令이 임기를 마친 다음 다른 부임지(赴任地)로 떠날 때는 고을에서 感謝表示로 말 여덟 마리를 바치는 慣例가 있었다.

그런데 中宗 宋欽(1459~1547)潭陽府使로 있다가 長興府使赴任해 갈 때 세 마리의 말만 받았다. 그 세 마리 말 중 한 本人이 탈 말이었고, 나머지 두 은 어머니와 아내가 탈 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三馬太守라고 불렀다. 그는 그처럼 淸廉하기도 했지만, 燕山君의 학정(虐政)이 심할 때는 물러나 후진들에게 經書를 가르치며 조용히 지낸 處世家이기도 했다.

이와 흡사(恰似)한 이야기로 高麗史 券 121 列傳 34에 최석(崔奭)한 이야기가 있다.

高麗 忠烈王 때 최석(崔奭)은 어렸을 때 이름은 崔錫이라 했는데 淸廉官吏였다. 그때에도 亦是 任期가 끝나는 府使에게는 일곱 의 말을 주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昇平(只今順天) 府使였던 그는 任期를 마치고 떠날 때 일곱 의 말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애초 그에게 주려던 말이 새끼를 낳아 여덟 이 되자 그 새끼말까지도 그곳 百姓들에게 돌려주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그의 뜻을 기려 를 세우니 바로 八馬碑.

只今順天에서는 八馬의 고장이라 하여 淸白吏自負心이 대단하다.

 

 

7. 삼복삼근(蔘復三斤)

人蔘 세 근을 되찾다.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해 찾지 않았던 物件이 뜻밖에 다시 되돌아 왔음을 意味한다.

 

* 仁祖實錄 梧里集.

梧里政丞 李元翼(1547~1634)本貫全州이고, 李億載의 아들이었다. 李元翼禁府使로 있을 때 亂離가 날 것이라는 等 時局이 뒤숭숭해서 宣祖人才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좋은 사람을 薦擧하라고 했다. 그러자 承政院左副承旨가 들어와 말하였다.

御命대로 하긴 했습니다만 그가 워낙 衰弱해 있으니 下賜해주시면 氣力을 키워 奉仕할 것입니다.”

宣祖는 어련하랴 싶어 믿고 을 보내 주었다. 그런데 며칠 데리고 들어온 人物이 석 자 세 치 官服이 끌릴 程度로 작은 體軀에 얼굴은 말처럼 길쭉하여 도무지 볼품이 없었다. 宣祖는 어이가 없어 내뱉듯이 말했다.

만 버렸군!”

그 사람이 바로 梧里 李元翼이었다.

훗날 壬辰倭亂하여 宣祖避卵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蒙塵 길이라 해도 水刺(수라)番番이 늦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水刺 尙宮을 불러 나무라니 그가 말했다.

다름이 아니오라 李元翼 都巡察使가 와서 먼저 한 가지씩 먹어 보고는, 뙤약볕에 한참씩 드러누웠다가 그제야 들여보내기 때문에 이렇게 늦었사옵니다.”

그래서 李元翼을 불러 탓하자 그가 말했다.

混亂 中에 어떤 일이 있을지 누가 알겠사옵니까? 그래서 이 먼저 한 가지씩 먹어 본 것이고, 萬若이 들었을 境遇 볕에 누워 있으면 빨리 퍼질 것이라 여겨 그렇게 所見껏 하였을 뿐이옵니다.”

宣祖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거 참, 다시 찾았군!”

李元翼1573年 明나라에 다녀와 黃海道使가 되어 크게 人望을 얻었다. 뒤에 元翼八十을 넘기고, 元老大臣으로서 光海君 驪州로 귀양가 있다가 仁祖反正領議政에 있었으며, 光海君을 죽이고자 할 때 大妃에게 懇請하여 流配에 그치게 하는 等 世上이 바로 잡히는 것을 보고야 눈을 감았다.

그는 文章에도 뛰어났으며 淸白吏錄選되었고 諡號文忠이다.

 

 

8. 상불개상(尙不開箱)

아직 箱子를 열지 않았다는 말로, 肅宗 때 한 淸廉한 선비의 삶에서 由來했다. 곧고 깨끗하며 孤高한 사람을 이른다.

 

* 錦溪筆談

朝鮮 第19代 肅宗 (在位 1674~1720)正月 大보름날 밤에 南山의 가난한 선비들을 생각해서 밥 한 箱子를 가져오게 한 다음 말했다.

이것을 가지고 南山골에 가서 굶주림이 가장 한 사람에게 하여 주도록 하라.”

御命을 받은 內官南山골에 가서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한 집을 살펴보니 집이 쯤은 헐어지고, 뜰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있는데 사람의 발자국이 없었다. 그래서 稀微燈盞 불빛이 새어나오는 뒤에 귀를 대고 들어보니 아낙네의 힘없는 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면 좋으련만…….”

그러자 亦是 힘이 없는 男子의 목소리도 들렸다.

구들에 불기가 끊어진 지도 사흘이 지났으니 어디서 따뜻한 물을 하겠소?”

內官은 이 집이 가장 가난한 집이라 생각하고, 箱子窓門을 열고 밀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난 正月 大보름날, 肅宗은 옛일을 생각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보낸 밥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구나!”

그러자 옆에 있던 弘文館 李瑞雨 (1633~?)가 말했다.

殿下! 小臣이 그때 그 밥을 받았었나이다. 은 그때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아내와 함께 죽을 地境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窓門으로 밥 한 箱子가 들어왔습니다. 밥을 물에 말아 아내와 함께 여러 날을 延命하여 죽지 아니하고 살아날 수 있었나이다.”

! 그런 일이 있었는가? 그럼 그 箱子 속에 다른 物件은 들어 있지 않았던가?”

, 덩이 하나가 함께 들어 있었나이다.”

그것이면 한 財産으로 했을 것인데?”

네에! 은 그것이 어디의 누가 보냈는지 모르는 까닭으로 只今까지 箱子를 덮어두고 다시는 열지 않고 그대로 保管해두고 있나이다.”

肅宗死境을 헤매는 가난 속에서도 함부로 남의 財産하지 않은 李瑞雨淸廉함에 感嘆하고, 그를 特別工曹參判으로 昇進시켰다.

그는 詩文에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써 文珠寺 偑潭大師碑를 썼다.

 

 

9. 상전지녀(床廛之女)

床廛에 간 女子라는 말로, 空然히 싱겁게 피식피식 웃는 사람을 이른다. 直接 擧論하기 困難할 때 默示的으로 指稱하는 境遇比喩

 

* 韓國人野談.

王政時代宮中 內人(나인)들의 生活男女 關係徹底하게 統制하는 苛酷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多少間 慰安을 주고자 同性끼리 結婚을 시켜 一般家庭과 같이 令監. 마누라라고 부르며 살게 하였다. 이때 임금은 그들에게 살림 道具 一切를 마련하여 주었다.

그들은 家具로 자개장을 愛用했는데 그 때문에 자개장을 同性結婚象徵하는 物件으로 認識하기도 했다.

그들은 또 암소 뿔을 깎아 角腎이라는 것을 만들어 性生活道具로 썼다. 만드는 은 암소의 뿔을 두께 한 푼 程度로 얇게 속을 후벼낸 그 안을 솜으로 채우고 더운물에 담가두면 부드럽게 彈力이 생겨 男性 代用品으로 제법 쓸 만했다고 한다.

角腎兒女子들이 만들 수 있는 物件이 아니라서 상전(床廛)이라는 日用 雜貨商에서 팔았다. 그래서 장옷을 쓴 女人이 상전(床廛)에 들어와 말하지 않고 씽긋이 웃으며 돈을 내밀면 主人은 눈치로 알아차리고 종이에 싼 그것을 내어주었다고 한다.

朝鮮 後期들은 하나같이 生存 期間이 짧았는데 男女關係를 탐닉(耽溺)한 데 原因이 있었던 것으로 推定된다. 宮中에는 의 시중을 드는 內人들이 多數여서 慶熙宮에 따로 收容하였는데, 日帝時代 의 여러 建物移築될 때 그런 物件들이 數十 個나 쏟아져 나와 外國人 수집가(蒐集家)에게 高價로 팔렸다고 한다.

 

 

10. 색한명당(色漢明堂)

色漢. 卽 女色을 좋아하는 사내와 明堂이라는 말로, 女子隱密部位隱喩的으로 이른 말이다.

 

* 太平閒話. 於于野談.

() 한 마리가 父親喪地官과 함께 묏자리를 보러 갔다. 마침 보드라운 女人人體를 두루 살피다가 두 乳房 사이에 이르자 地官이 말했다.

內外龍虎가 비록 分明하긴 하나 앞이 높고 뒤가 낮으니 不可하오.”

그리고 다시 배꼽 위에 이르더니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沃野千里에 구멍이 있어 主山龍虎가 흐려지니 不可하오.”

또다시 한참을 더듬어 배 밑 두 다리 사이에 이르자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이곳이 明堂이오. 方書하기를 土山茂盛한 곳이 可謂 正穴이며, 正穴 아래에 무덤을 쓰면 참으로 百子千孫萬歲香火한다고 했소이다. 이곳으로 하시오.”

그러자 이란 놈이 크게 기뻐하며 일꾼을 사서 무덤을 파려고 하자 벼룩 한 마리가 뛰어나와 얼굴을 부라리며 꾸짖었다.

네 이놈, 어떤 놈이 士大夫家先墓暗葬을 하려 하는고?”

이가 크게 놀라 그 事緣을 물으니 벼룩이란 놈이 사람의 中心部에서 깊게 파인 골을 가리키면서 호통을 쳤다.

이놈! 이것이 洪 生員 宅親山雙墳이란 事實을 네놈이 몰랐단 말이냐?”

이란 놈은 벼룩의 호통에 或是 名相을 잘못 걸었나 싶어 제 아비의 무덤 자리를 하지 못하고 그대로 달아났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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