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ㅅ-2)
11. 생요왕형 사후불형(生樂王兄 死後佛兄)
살아서는 임금의 兄이요. 죽은 뒤에는 부처의 兄이다. 讓寧大君의 故事에서 由來한 말로, 自身의 八字가 最高로 좋다는 意味로 쓰인다.
* 韓國人의 智慧, 古今淸談에.
朝鮮 第3代 太宗의 長男 讓寧大君(1394~1462)이 世子로 冊封되었으나 셋째 아우 忠寧(世宗)에게 王位를 讓位하고 周遊天下하고 있을 때 스님이 된 둘째 同生 孝寧大君(1396~1486)의 초대(招待)를 받았다.
“兄님 못 뵈온 지 참 오래되었습니다. 이번 2月 15日은 釋迦의 열반일(涅槃日)이오니 부디 오셔서 마음속의 情恨도 풀고 兄弟間의 友愛도 나누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小弟 多少의 飮食을 장만해 놓고 기다리겠나이다.”
讓寧은 휘하(麾下)의 手足들을 거느리고 孝寧이 修道하고 있는 회암사(檜巖寺) 附近으로 가서 사냥을 한 후, 잡은 짐승을 寺刹의 境內에서 구워 먹으며 술을 마셨다. 냄새가 寺刹의 境內에까지 振動하자 孝寧이 兄님이 온 줄 알고 마중을 나오니 讓寧이 妓生들까지 끼고 앉아 喜喜樂樂하고 있는 것이었다.
“兄님! 이 아우의 立場을 살펴서라도 경건(敬虔)해야 할 절 境內에서 이게 무슨 일입니까?”
孝寧大君이 이맛살을 찌푸리자 讓寧은 호탕(豪宕)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살아서는 王의 兄이요, 죽어서는 부처님의 兄(兄佛)이 될 테니 무엇이 두렵겠느냐? 또 王이니 王世子니 하는 것은 다 괴로운 것인데 우리는 그런 것에서 벗어나 이렇게 自由로이 만날 수 있으니 얼마냐 좋으냐?”
“至當하신 말씀입니다. 저도 즐겁습니다.”
그러나 두 兄弟의 마음속은 眞實로 기쁨만 充滿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12. 서금일롱(書衾一籠)
40여 年間 높은 벼슬에 있었던 사람의 財産이 冊과 이불과 장롱(欌籠) 하나뿐이라는 말로, 淸貧한 선비 精神을 가리킨다.
* 古今淸談에
高麗 第34代 恭愍王 때 文科에 及第하여 寶文閣 學士를 지낸 安省 (1344~1421)은 號는 雪泉이고, 本貫은 京畿道 廣州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한쪽 눈이 작아서 작을 少字와 눈 목目字. 卽 少目으로 불렸다. 어느 날 王이 그의 이름을 보고 少字와 目字를 합쳐 省이라고 作名하여 下賜했다.
그는 朝鮮이 建國되자 太宗 때까지 奉職하며 參贊과 平安監司를 지냈다.
그는 高麗에서 朝鮮까지 40年 동안 높은 벼슬을 했으나 財産이라곤 冊과 이불과 欌籠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그 籠마저 부서지자 夫人 宋氏가 푸념을 했다.
“이제 修理할 종이도 없으니 무엇으로 고칠꼬?”
“허허! 무슨 새삼스런 걱정이오? 차음엔 그 籠조차 없지 않았소?”
“남들은 10年만 벼슬해도 먹고 살 걱정을 안 한다는데 40年 벼슬에 이 꼴이라면 누가 곧이듣겠습니까?”
그는 그間 벼슬을 했으나 종이 한 張도 自己 것이 아니면 손대지 아니했다. 그야말로 冊과 이불과 籠 하나가 全 財産이었던 것이다.
朝鮮 開國 後, 太祖 2年에 安省은 淸白吏에 뽑혀 宋京留後에 任命되었다. 그러나 그는 ‘代代로 高麗에 벼슬한 家門으로서 내가 어찌 다른 사람의 臣下가 되어 宋京에 가서 祖上의 靈魂을 對하랴!’ 하고 宮殿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며 痛哭하였다.
太祖는 이런 臣下를 죽이면 後世에 忠誠하는 선비가 없어진다고 생각하여 죽이려는 左右를 制止하고 그를 急히 붙들어 내보내 살렸다고 한다.
安省은 눈은 작았지만 티 없이 맑고 깨끗한 白雪이었다. 그래서 淸白吏로 길이길이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의 諡號는 思簡이다.
13. 서동작요(薯童作謠)
薯童 노래를 지었다는 말. 百濟의 武王이 된 薯童과 新羅 善花公主의 사랑 이야기에서 由來했다. 어떤 일의 변죽을 울려 目的한 바를 이루는 行爲를 이른다.
* 國朝人物考, 三國遺事에.
百濟 第30代 武王(재위600~641)의 어머니는 寡婦로 南池라는 蓮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런데 그 못의 龍과 關係하여 武王 璋을 낳았다 그러나 國史大事典에는 法王의 아들로 記錄되어 있다.
武王의 兒名은 그가 恒常 마를 캐다 팔아 生活하였으므로 마 薯字를 써서 薯童이라 불렀다.
薯童은 新羅 眞平王의 셋째 딸 善花公主가 世上에 둘도 없는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所聞을 들었다. 그래서 머리를 깎고 徐羅伐로 들어가서 그곳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며 親하게 사귀었다. 그리고 한 便의 童謠를 지어 아이들로 하여금 부르고 다니게 했다.
善花公主님은 남 몰래 媤집가려고
밤마다 薯童을 만나 함께 지낸다네.
童謠는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번져 마침내 大闕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新羅의 百官들은 童謠의 內容을 事實로 믿고 善花公主의 不淨한 行實을 極力 彈劾하여 먼 시골로 流配시키도록 했다. 公主가 抑鬱한 陋名을 쓰고 流配의 길을 떠날 때 王后는 純金 한 자루를 路資로 몰래 주었다.
善花公主가 流配地로 가는 途中에 薯童이 나타나 自己가 薯童이라 말하고 앞으로 잘 모시겠다고 했다. 公主는 그를 잘 알지 못하였지만 어쩐지 미덥고 親近感이 들었다. 그래서 함께 百濟로 가서 살기로 約束했다.
그런데 當場 먹고 살 生活費를 걱정하자 善花公主는 母后가 준 金을 꺼내 보여 주었다. 그러자 薯童이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오?”
“黃金입니다. 우리 夫婦가 平生 동안 便安히 살아갈 수 있는 寶物이에요.”
“이게 그리 重한 것이오? 이런 것은 내가 마를 캐던 흙 속에 많이 있었는데…….”
公主는 깜짝 놀랐다.
“이것은 世上에서 가장 貴重한 寶物입니다. 只金 그곳을 안다면 그 寶物을 캐 王宮으로 실어 보내도록 합시다.”
이렇게 해서 薯童과 公主는 黃金을 잔뜩 쌓아놓고 龍華山 獅子寺의 知命法師에게로 가서 輸送方法을 물었다.
知命法師는 欣快히 應諾했다.
“내가 빠른 時間 내에 當身들이 願하는 王宮으로 보내주겠소. 그러니 그 金들을 이리로 가져오시오.”
善花公主는 便紙를 써서 金과 함께 知命法師에게 맡겼다. 法師는 黃金과 公主의 便紙를 新羅의 宮闕로 보냈다.
이렇게 하여 眞平王으로부터 夫婦로 公式的인 認定을 받게 된 薯童은 莫大한 金을 가지고 泗泌城으로 들어가 百姓들의 人心을 얻고 드리어 王位에까지 오르니 그가 바로 百濟의 第30代 武王 (在位600~641)이다
14. 선녀익의(仙女翼衣)
仙女 날개옷이라는 말로, 仙女와 나무꾼이라는 옛날이야기에서 由來했다. 어떤 일이 完璧하게 이루어지기 前에는 빠져나갈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 이야기 韓國史, 韓國傳來童話
老總角이 山에 올라가 나무를 베고 있는데 사슴 한 마리가 달려오더니 多急하게 哀願했다.
“아저씨, 나 좀 살려주시오. 저쪽에서 사냥꾼이 나를 잡으려고 쫓아오고 있소.”
老總角은 사슴이 가엾어 얼른 나뭇단 밑에 숨겨 주었다. 暫時 後 사냥꾼이 쫓아와 물었다.
“여보시오. 조금 前에 사슴 한 마리 逃亡가는 것 못 보았소?”
“아, 예. 方今 저 山 너머로 逃亡치더군요.”
사냥꾼은 靑年이 가리켜 주는 쪽으로 사라졌다.
사슴은 죽음을 免하게 되자 老總角에게 거듭 謝禮를 하며 말했다.
“고맙소. 나는 이 山 山神靈의 아들인데 봄 날씨가 따뜻해서 사슴으로 變裝하고 놀러 나왔다가 當身 德에 큰 逢變을 避했소. 그래서 報答하고자 하니 바라는 것을 말해 주시오. 내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주리다.”
老總角은 暫時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면 내가 아직 總角인데 예쁜 색시를 하나 求해주시오.”
사슴은 暫時 머리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좋은 수가 있소. 저 絶壁을 올라가면 그 위에 蓮못이 있을 것이오. 보름날이면 그곳으로 天上에서 仙女들이 내려와서 沐浴을 할 텐데 그때 마음에 드는 仙女의 날개옷을 감추어 두시오. 그러면 그 仙女는 天上에 올라가지 못할 것이니 그때 그 仙女를 잘 說得하여 아내로 삼으시오. 그러나 子息을 셋 낳기 前에는 決코 날개옷을 보여주지 마시오. 萬若 그 前에 보여주면 天上으로 올라가버릴 것이니…….”
말을 마친 사슴은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며칠 後 보름날, 老總角은 사슴이 가르쳐 준 대로 絶壁 위로 올라 가 보니 果然 蓮못이 있고, 아름다운 仙女들이 沐浴을 하고 있었다.
老總角은 살금살금 기어가 한 仙女의 옷을 품속에 감추고 바위 뒤에 숨었다.
이윽고 沐浴을 마친 仙女들은 저마다 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런데 한 仙女가 옷이 없어 唐慌해하고 있었다.
老總角은 仙女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쩌나, 날개옷이 없어졌나보군요. 깊은 밤에 山속에 仙女님 혼자 있으면 山짐승들에게 危險할 테니 于先 우리 집으로 갑시다.”
그렇게 해서 老總角은 예쁜 仙女를 데리고 집으로 와서 夫婦기 되어 함께 살았다.
歲月이 흘러 夫婦는 아들 兄弟를 두었다. 아내는 날개옷은 잊어버린 듯 幸福하게 生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그랗게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며 아내가 말했다.
“아, 내 날개옷은 누가 가져갔을까? 한 番 입어보고 싶은데…….”
男便은 아내의 그런 모습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아이들이 셋 되기 前에는 絶對 날개옷을 내어주지 말라던 사슴의 當付를 잊고 숨겨두었던 옷을 꺼내주었다.
아내는 그 옷을 보자마자 얼른 주워 입고, 아이들을 한쪽 팔에 하나씩 各各 안더니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아내가 마음 아파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 여린 마음이 아내를 잃어버리게 한 것이다.
사슴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다시 일러 주었다.
仙女의 날개 옷이 없어 진 後 부터는 天上에서 달 밝은 보름밤에 地上의 沐浴물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니 그 때 蓮못에서 기다렸다가 두레박을 타고 天上에 올라가 妻子息을 만나라고 하였다.
天上 再會 後 家族들이 모두 地上에 내려와 幸福하게 살았다.
15. 선방귀객(先訪貴客)
먼저 訪問하는 사람이 귀한 손님이라는 말. 朝鮮 中宗의 妃, 文定王后가 간택(揀擇) 받은 逸話에서 由來했다.
* 國朝寶鑑, 韓國人의 智慧에.
朝鮮 第11代 中宗(1488~1544)이 繼妃를 揀擇하고자 敎旨를 내렸다.
揀擇하는 날, 尹之任도 딸을 應募시키려 했으나 工巧롭게도 病이 나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競爭者는 坡城君 尹金孫의 딸이었고, 尹金孫은 이미 判書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尹之任은 自己의 不運을 恨嘆하며 占을 쳐보기로 했다.
한편, 점쟁이는 運勢를 보니 귀한 손님이 찾아올 卦가 나오는지라 下人에게 來日 아침 맨 먼저 오는 손님은 귀한 손님(先訪貴客)이니, 잘 모시라고 일렀다.
다음 날 아침, 尹之任이 점쟁이를 찾아가니 隆崇한 待接을 하며 딸의 四柱(生年.月.日.時)를 보고 말했다.
“國母가 될 四柱요. 그리고 當身은 府院君이 될 것이요.”
그때 尹之任은 6品 別坐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揀擇日이 되었으나 尹氏 딸의 事情을 전해 들은 王은 揀擇日을 延期해 參席하게 해 주었다.
이래서 尹之任의 딸이 마침내 王妃가 되니, 그가 바로 지금 서울의 태릉(泰陵)에 묻혀 있는 文定王后이다.
이런 일이 있은 後로 一般 市場이나 가게에서도 첫 손님을 開始 손님, 卽 先訪貴客이라 하여 重要視하고 있다.
文定王后는 1男 4女를 두었는데 그 아들이 明宗이고, 男同生은 乙巳士禍를 主導한 尹元衡이다.
그 女는 朝鮮時代의 國施였던 崇儒排佛政策에 關係없이 佛敎의 中興을 圖謀했다.
16. 선선급손(善善及孫)
착하고 좋은 일을 거듭하면 그 子孫에까지 影響이 미친다는 말. 金庾信의 孫子에 얽힌 故事에서 由來했다.
* 三國史記 列傳 第3券에.
金庾信의 맏孫子 金允中은 第33代 聖德王 때 大阿湌을 지냈다. 王이 그의 할아버지의 恩功을 못 잊어서 그를 寵愛하니 王의 親戚들이 몹시 猜忌했다.
때는 中秋 大보름이었는데 王이 月城(慶州) 南山의 꼭대기에 올라 侍從官과 함께 술을 마시고, 金允中을 불러올 것을 命하니, 王의 親戚 中에 어떤 者가 不平을 했다.
“宗室 親戚들 中에 사람이 없지 않은데 구태여 가깝지도 않은 사람을 부르시니 어찌 親戚들과 親하다 하겠습니까?”
그러자 王이 말했다.
“오늘 내가 그대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모두 允中의 祖父 德이오. 萬若 公의 말과 같이 恩功을 잊어버린다면 좋은 일을 한 것에 對한 義理가 아니오.”
王은 允中을 불러 가까이 앉히고 그의 祖父의 훌륭함을 稱讚했다.
17. 선즉득복(善則得福)
착하면 福을 받는다. 남에게 좋은 일을 베풀면 그만큼의 報答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 孝宗實錄, 韓國五千年野史에.
朝鮮의 第17帶 孝宗(1619~1659)이 弊袍破笠 차림으로 潛行을 나갔다. 때는 마침 한여름이어서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날이 저물어 그날 저녁을 지낼 마땅한 곳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는데 어디선가 朗朗하게 글을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여름에 글을 읽다니, 궁금하기도 하고 하룻저녁 잠자리도 알아보자는 생각이 들어 찾아갔다.
그 집 大門에 이르러서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부르니까 한 中年 선비가 나왔다.
“지나가던 나그네인데 날이 저물어 그러하니 하룻밤 留宿하게 해 주시오.”
“워낙 陋醜해서…….”
“한데보다는 낫겠지요. 아무 데나 좋으니 許諾해주시오.”
“正히 그러시다면 들어오십시오.”
이리하여 房에 들어서니 한 쪽 壁에 ‘我獨無魚(나 혼자만 물고기가 없다)’ 라고 쓰여진 글귀가 보였다.
孝宗은 그 글을 써 붙인 理由가 궁금해서 물었다.
“主人丈, 저 글이 무슨 뜻이오?”
“아. 아실 것 없소이다. 그저 장난으로 써놓은 것일 뿐이오.”
이윽고 밥床을 차려왔다. 그런데 밥이 녹쌀밥(메밀밥)이었다. 거기에다 飯饌이라곤 달랑 배추국 하나였으나 시장이 飯饌이라 孝宗은 달게 들었다. 그런데 主人은 食事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물어보나마나 손님을 待接하느라 밥이 없어 굶는 것이 分明했다. 孝宗은 어떻게든 돕고 싶어서 물었다.
“저 ‘我獨無魚’ 라는 말이 大體 무슨 뜻이오?”
“再次 물으시는 걸 보니 好奇心도 많소이다. ‘工夫는 했으나 고기가 없어서 科擧에 及第를 하지 못한다.’는 뜻이올시다.”
“허허! 뭔가 事緣이 있을 것 같은데 마저 말해 보시구려.”
“別 뜻 없는 글인데 물으시니 對答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說明하기 始作했다.
“꾀꼬리와 왜가리가 살았는데 서로 自己가 노래를 잘한다고 是非가 붙었답니다. 그래서 第3者에게 判決을 받자고 했죠. 그리하여 하늘 높이 悠悠自適하며 나는 솔개에게 付託했읍죠. 그런데 약삭빠른 왜가리는 判決 前날 밤 붕어 한 마리를 잡아가지고 솔개를 찾아가 自己 손을 들어 달라고 付託을 했답니다. 다음 날, 꾀꼬리와 왜가리는 솔개를 찾아가서 누가 더 노래를 잘하는지 가려 달라고 하며 꾀꼬리가 먼저 아리따운 목소리로 한 曲調를 氣가 막히게 봅았죠. 그런데 이것이 무슨 날벼락 입니까! 솔개가 面駁을 주며 말했답니다.
‘아니, 그것도 노래라고 불러? 零落없이 돼지 목 따는 목소리지,’
그리고는 왜가리에게 말했죠. ‘다음은 왜가리 先生께서 한 番 불러보시지.’
그러자 왜가리가 쾍! 쾍! 소리를 질러댔죠. 솔개는 무릎을 탁 치면서 ‘허허. 果然 사내大丈夫 목소리로다.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구먼!’ 하고 稱讚하더랍니다. 그런 事情을 글로 써 놓은 것입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孝宗이 말했다.
“主人丈! 科擧 試驗이 있다고 하거든 꼭 올라가서 應試해 보시구려. 그리고 그때 漢陽에 가거든 鐘路의 어디어디에서 나와 만납시다. 마침 이番 試驗官이 나와 絶親한 사람이 될 거라고 하니 도움이 될 것 같소.”
그리고 孝宗은 上京하자마자 別科를 본다는 榜을 全國에 내걸게 했다.
當然히 我獨無魚 선비도 괴나리褓짐을 짊어지고 漢陽으로 向했다. 그리고 約束된 場所에서 그 나그네를 만나니, 나그네가 말했다.
“이番 試驗은 百 步 앞에다 細筆로 솔개 鳶字를 써놓고 무슨 字냐고 물어서 알아맞히는 것이라고 합디다.”
선비는 이제 壯元及第는 따 놓은 堂上이라고 생각했다.
이튿날, 科場에 들어가니 八道에서 올라온 應試者들이 우글우글했다. 그런데 科擧를 마치고 나온 선비들이 모두들 툴툴거렸다.
“世上에 무슨 놈의 科擧가 이래? 試題를 細筆로 보일락 말락하게 써놓고 읽으라니 千里眼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걸 읽겠어!”
드디어 선비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科場에 들어서자 가슴이 두근거리고, 모든 생각이 머리에서 싹 달아나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科試官이 말했다.
“저기 쓰인 글字가 무슨 字인지 읽어 보시오.”
선비는 입이 얼어붙은 듯 對答을 하지 못했다.
“두 번째 묻겠소. 어서 말하시오.
“…….”
“이제 마지막이오. 어서 말하시오.”
선비는 多急한 나머지 생각나는 대로 對答했다.
“예. 빙빙 鳶字입니다.”
孝宗은 落心을 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工夫는 많이 했지만 運이 따르지 않는구나!’
선비도 失望하여 고개를 숙이고 나오는데 그제야 ‘아. 솔개 鳶字지!’ 하고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는 지나갔다. 十年工夫 南(나)無阿彌陀佛이 되고 만 것이었다. 억수로 運이 없었다.
선비는 이제 自身은 틀렸고 누군가에게 일러 주어 좋은 일이나 하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젊은이에게 自己는 ‘빙빙 鳶’ 字라고 해서 落榜했는데 ‘솔개 鳶’字라고 말하라고 일러 주었다. 그 젊은이가 科場으로 들어갔다.
한便 科試官으로 앉아있던 孝宗은 이제 興味가 없었다. 워낙 한 사람만을 爲한 科擧였던지라 正答을 알 사람도 없을 터여서 어찌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들어섰다. 그리고 대뜸 말했다.
“答을 漢陽音으로 말할까요? 아니면 시골音으로 말할까요?”
孝宗은 그 말이 興味로웠다.
“두 가지 다 말해 보아라.”
“漢陽音으로는 솔개 鳶이올시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하늘에서 빙빙 돈다고 해서 빙빙 鳶이라고도 합니다.”
젊은이는 自己에게 好意를 베풀어준 그 선비에게 報答하고자 瞬間的으로 才致를 發揮했던 것이다.
“뭐, 빙빙 鳶? 그럼 조금 前 그 선비도 맞힌 거잖아. 내가 시골音을 몰랐구나. 여봐라! 조금 前 그 科客을 찾아 들여라! 어서.”
그리하여 그 선비가 다시 불려왔다.
“未安하오. 선비가 壯元이오. 조금 前에는 내가 시골音을 몰라서 그런 것이니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그리하여 두 사람 모두 及第하여 後에 한 사람은 平壤監司가 되고, 또 한사람은 都承旨가 되었다.
18. 섭발백발(鑷拔白髮)
족집게로 흰 머리털을 뽑다. 늙지 않고 오래 살면서 人生을 즐기려는 欲求를 이르는 말이다.
* 大東奇聞에.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늙게 마련이다. 그러나 東西古今을 莫論하고 늙어 보이는 것이 싫어서 머리털을 染色하고, 주름살을 펴는 成形手術을 한다. 또 오래 살고 싶어서 지렁이나 뱀 같은 嫌惡食品도 게걸스럽게 먹어댄다. 中國의 秦始皇이 長生不死하려고 不老草를 求했던 것도 다 이런 뜻이었다.
우리 歷史의 故事 中에 延安 李氏 李好閔(1553~1634)은 號가 五峯이고, 諡號는 文僖이며, 朝鮮 宣祖 때 左贊成을 歷任한 선비다.
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그는 明나라에 가서 軍士援助를 받아내는 外交的 力量을 發揮하기도 했다.
그가 늘그막에 벼슬을 그만두고 閑暇하게 지내면서 恒常 족집게로 흰 머리털을 뽑았다. 이것을 본 李德馨이 물었다.
“벼슬도 이미 높은 地位까지 누리셨는데 더 以上 무슨 所望이 있어서 흰 털을 뽑아내십니까?”
“허허! 漢나라의 法이 비록 寬大하다고 해도 사람을 죽인 者는 반드시 죽이듯이, 白髮이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까닭으로 하는 수 없이 뽑아 버리고 있습니다.”
그는 中國과 往來하는 文書를 管掌하였는데 1668年 宣祖가 죽자 永昌大君의 卽位를 反對하고 光海君의 卽位를 도왔다. 宣祖가 죽고 光海君이 卽位하자 告訃請諡請承襲使가 되어 明나라에 들어가 禮部에서 嫡庶의 區別 없이 長男을 세우자는 主張을 폈다.
19. 세류과변(歲流果變)
歲月에 따라 과일도 변한다. 三國時代에는 밤(栗)이 컸으나 只今은 작아졌다는 데서 由來했다. 時間이 흐르면 自然에도 變化가 온다는 意味로 쓰인다.
* 朝鮮金石總覽, 三國遺事解題에.
三國遺事를 쓴 一然(1205~1289) 스님은 俗名이 金見明이며 慶尙道 慶山 出生으로 金彦必의 아들이다. 見明은 9살 때 海陽 無量寺로 出家하였고, 1227年 僧科에 及第하여 三重大師가 되었으며, 74歲(1259年)에 大禪師가 되었다.
1281年에는 雲門寺에서 王에게 法說을 講論하였으며, 國尊으로 推戴되었다. 그러나 老母를 奉養하기 爲하여 故鄕으로 돌아왔다.
一然의 著書 三國遺事는 三國史記와 함께 우리나라 古代史 硏究에 重要한 資料가 되고 있다.
이 三國遺事 中 元曉不羇에 다음과 같은 記錄이 있다.
‘元曉 스님의 어머니가 아이를 가져 이미 滿朔이었는데 佛地라는 골짜기를 지나다가 急하게 産氣가 있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옷을 나무에 걸어놓고 그 아래에서 아기를 낳았다. 그 나무는 娑羅樹, 열매는 娑羅栗이라고 했다.’
또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한 절에서 雜일을 하는 일꾼들에게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었다. 일꾼들이 量이 적다고 官廳에 呼訴하니 官吏가 그 밤을 가져다가 檢査해 보았다. 그런데 밤톨이 워낙 커서 한 알이 밥그릇에 가득 찼으므로 도리어 한 알씩만 주라고 判決했다. 그 後부터 그곳을 밤나무골, 즉 栗谷이라고 했다.
元曉는 出家하자 自己가 살던 집을 절로 고쳐 이름을 初開寺라고 했다. 또 娑羅樹가 있는 곳에도 절을 세우고 娑羅寺라 했다.
이처럼 밤과 因緣된 事件이 많은 것은 밤나무를 神木으로 여기는 우리 先祖들의 精神的인 흐름 때문이었다. 그래서 三國時代 때부터 只今까지 記錄에 나타난 밤나무나 그 나무에 열리는 밤의 크기를 살펴보는 것도 興味롭다.
高麗圖經 23券 土産篇에는 밤이 복숭아 만하고, 맛이 달아 좋다는 記錄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밤 크기가 호두 (胡桃)알 만한 것에 比較하면 쉽게 納得하기 어려우나 當時의 記錄이 그러하니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卽 新羅時代에는 밥그릇에 가득 찼던 밤이 時間이 지남에 따라 高麗 때는 복숭아만 해지고, 요즘에는 호두알만 해졌다는 것이다.
韓國文化狀徵辭典의 三國志魏書東夷傳에는 ‘馬韓에서 梨만 한 크기의 밤이 난다.’는 記錄이 있으며, 後漢書와 隋書 北史에도 ‘百濟에서는 큰 밤이 나온다.’ 고 記錄되어 있다. 이러한 記錄들을 綜合하면 三國時代 무렵에는 오늘날의 밤보다도 훨씬 큰 밤이 있었던 듯하다.
婚禮式의 幣帛 때 新婦의 치마에 대추와 밤을 던져 주는 것은 아들을 많이 낳으라는 뜻에서 行하는 儀式이다. 祭祀 床에서 棗栗梨柹의 順序로 床에 오르는 것도 밤이 그만큼 貴重한 待接을 받기 때문이다. 밤나무가 오래 前부터 神物을 만드는 神聖한 材料가 되었던 것 또한 意味深長하다.
밤은 姙娠을 象徵하는데, 그것은 하나의 주머니에 여러 個의 밤톨이 義좋게 들어 있어 兄弟間의 友愛를 나타내고, 子息과 同氣間, 兄弟를 뜻한다.
20. 세속오계(世俗五戒)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戒律, 新羅時代에 花郞들이 지키던 戒律이어서 花郞五戒라고도 한다.
* 三國史記 列傳 第46 에.
新羅의 沙梁部에 貴山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何干 武殷의 아들로 젊어서 學問과 德을 기르기 爲해 남다르게 努力했다.
그는 帚項과 깊이 사귀어 서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어진 사람을 찾아 道理를 다하자고 다짐했다.
이때 圓光法師가 隋나라에서 留學하다가 돌아와 加悉寺에 居處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를 높이 받들었다. 貴山도 그의 門下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圓光法師는 自己를 따르는 修道僧들에게 늘 이렇게 가르쳤다.
“佛家에는 열 가지 菩薩戒가 있느니라. 그런데 그대들은 이를 能히 堪當하지 못할 것이다. 하여 世俗의 五戒를 說하겠노라.
(첫째)는 忠誠으로 임금을 섬기고 (事君以忠)
(둘째)는 孝道로써 어버이를 섬기며 (事親以孝)
(셋째)는 信義로써 벗을 사귀고 (交友以信)
(넷째)는 싸움에 臨하되 後退해서는 안 되고 (臨戰無退)
(다섯째)는 生物은 반드시 가려서 죽여야 하느니라 (殺生有擇)
이의 實行에 疏忽함이 없도록 하여라.”
이에 貴山이 물었다.
“다른 가르침은 알겠으나 生物을 가려서 죽이라는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圓光法師가 對答했다.
“生命이 나서 자라는 봄, 여름에는 殺生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特히 기르고 부리는 것은 죽이지 않는 것이니 말, 소, 닭, 개가 그러하느니라.”
이에 貴山은 法師의 周旋함을 잘 받들어 失手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眞平王 24年(西紀602年) 8月에 百濟가 大軍을 일으켜 阿莫城을 包圍하니, 王은 波珍干 乾品, 武梨屈, 伊梨伐과 級干 武殷, 比梨耶로 하여금 防禦케 했다. 이때 貴山은 少監職으로 戰線에 나가니 百濟가 敗하였으므로 泉山 늪으로 물러가 潛伏하고 있었다. 그런데 我軍이 進擊하다가 힘이 다하여 退却하자 貴山이 큰소리로 외쳤다.
“내 일찍이 스승에게 배우기를 戰爭에서 물러서지 말라 했으니 어찌 달아날 수 있으랴!”
그는 아버지가 負傷을 當하여 危態롭자 自己의 말에 태워 보내고 槍을 휘두르며 나아가 싸웠다.
이에 軍士들이 士氣衝天하여 帚項과 함께 猛烈히 突擊하여 치니, 敵의 屍體가 들에 가득하고 말 한 匹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안타깝게 貴山도 온몸이 槍에 찔려 돌아오는 途中에 戰死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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