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ㅂ-1)
1. 반궁자성(反躬自省)
잘못된 原因을 自身에게서 찾는다. 卽 허물을 自己 自身에게서 찾아 고친다는 말이다.
* 益齋亂藁 益齋眞自贊에.
李齋賢(1287~1367)은 高麗 第25代 忠烈王 때의 留學者로 本貫은 慶州이고, 號는 益齋 • 實齋이다.
15歲에 成均館試에 壯元으로 合格하였으며, 22歲에 藝文春秋館에 拔擢되어 4番이나 宰相을 지낸 뛰어난 政治家였다.
李齋賢은 自己를 警戒할 때면 이렇게 말했다.
“사슴을 좇는 者는 山을 보지 못하고, 돈을 움켜쥔 者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가을철의 털끝 같은 작은 것은 살필 수 있어도 수레에 가득 실은 땔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마음이 오로지 한곳에 쏠려 있고 눈이 다른 데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忠宣王을 따라 元나라에 갔다가 그곳 首都 燕京에서 뛰어난 才能으로 文才를 드러냈다. 그래서 그곳의 人才 趙孟頫 等과 交流하며 지냈다. 그는 平素 이렇게 말했다.
“禹임금은 물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自己가 그를 빠지게 한 것같이 여겼고, 굶주린 사람이 있으면 自己가 그를 굶주리게 한 것같이 여겼다. 하늘이 큰 人物에게 所任을 맡길 때는 이 世上을 救濟하려 함인데 困窮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고도 救濟할 생각을 않는다면 어찌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 하겠는가, 그리고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 왜 몇 걸음밖에 굽어보지 못 한단 말인가?”
그는 또 모든 잘못은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自身에게 있는 것이라며 自省할 것을 促求했다.
“學問이 貧弱하면 道를 깨닫는 것도 늦는 것이 當然하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거늘 어찌 스스로 反省하지 않는가? 내가 이제 나이 들어 벼슬에서 물러났으니 뭇사람들의 誹謗만 듣겠구나, 分明히 말하노니 한 番 보고 세 番 생각하라. 그리고 쉬지 말고 工夫하라.”
그는 선비들의 삶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의 才주는 배의 노와 같고, 運命은 그 배에 불어오는 順風과 같은 것이며, 順風에 이끌려가는 돛배라 할지라도 그 배를 運用하는 사람이 그만한 人物이 되지 못하면 世上의 거친 波濤와 風浪을 어떻게 헤쳐 나가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를 일러 反躬自省, 또는 反躬自問이라고 한다.
2. 반선지운(半船之運)
몸의 半은 배 위에, 半은 땅 위에 있는 運이라는 말. 피할 수 없는 運命을 뜻한다.
* 太宗實錄, 韓國人名大辭典에.
朝鮮 太祖 李成桂(재위1392~1398)는 第1次 王子의 亂에 火가 나서 王位를 方果(定宗1357~1419)에게 물려주고 咸鏡南道 咸興으로 가서 隱居했다. 이에 아들 方遠이 第2次 王子의 亂을 일으켜 定宗으로부터 王位를 移讓 받아 太宗이 된 後, 아버지를 모셔오고자 差使라는 臨時 벼슬을 내려 數차례 보냈으나 그때마다 李成桂는 差使를 죽여버렸다. 하여 한 番 간 後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을 빗대어 咸興差使라고 했다.
그러자 差使에 支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 判中樞府事 朴淳이 스스로 다녀오겠다고 自願했다. 그는 李成桂에게로 갈 때 새끼가 딸린 어미 말을 데리고 가서 새끼 말은 李成桂의 집 앞 나무에 매어 놓고 어미 말만 타고 안으로 들어갔다.
朴淳과 李成桂가 大廳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어미 말이 새끼를 찾으며 애타게 울었다. 太祖가 이 光景을 보고 朴淳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어미 말이 새끼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러하옵니다. 비록 짐승이지만 至極한 情이 嘉尙하지 않습니까?”
李成桂는 朴淳과 親舊 사이라서 바둑을 두며 서로의 情을 나누었다. 그때 天障에서 어미 쥐가 새끼를 안고 떨어졌다. 어미 쥐는 떨어지고 나서도 새끼를 안고 있었다. 그것을 본 李成桂가 嘉尙히 여기자 朴淳은 그때서야 비로소 自己가 太宗의 命을 받은 差使임을 밝히고 눈물로 懇請했다.
“하찮은 微物인 쥐도 죽을 때까지 제 새끼를 감싸주는데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子息을 버릴 수 있겠나이까? 只今 太宗이 寤寐不忘 殿下를 그리워하고 있사오니 이제 그만 怒여움을 푸시고 저와 함께 歸京하시옵소서!”
이에 感動한 李成桂는 咸州에 들렸다가 돌아가겠다고 했다.
朴淳은 그렇게 確約을 받고 歸路에 올랐고, 太祖는 只今까지와는 달리 그를 살려주어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李成桂의 臣下들이 前例와 같이 죽여야 한다고 主張을 펴고 나섰다. 李成桂는 옛 親舊와의 情을 생각하여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龍興江을 充分히 건너갔으리라 생각되었을 때 그를 죽이라 命令하면서 條件을 달았다.
“萬若 그가 이미 江을 건넜으면 더 쫓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不幸하게도 朴淳은 몸이 不便한 탓으로 時間이 늦어져 兵士들이 到着했을 때 몸의 半은 陸地에, 半은 江을 건너는 배 위에 있어 그만 죽임을 當하고 말았다.
李成桂는 半船之運으로 죽은 옛 親舊를 그리워하며 매우 슬퍼했고, 朴淳의 아내 임씨는 男便이 죽었다는 訃音을 듣고 自決했다.
太宗은 그의 功을 讚揚하여 忠愍이라는 諡號를 내려 忠臣으로 稱頌하고, 그의 故鄕에 忠臣. 烈女의 두 旌門을 세우게 했다.
3. 방하견성(放下犬聲)
개소리를 그만하라. 卽 理論이나 狀況에 맞지 않는 허튼소리는 하지 말라는 뜻이다. 말을 할 때는 前後, 左右上下를 가려서 하라는 意味로 쓰인다.
* 韓國人의 智慧. 雜記에.
論山 大谷에서 3代째 小農을 耕作하면서 살던 안두기라는 사람이 生日을 맞자. 子息들이 기르던 개를 잡아서 生辰 床을 차리려 했다. 그런데 눈치를 챈 개가 사람 곁으로 오지 않고 슬슬 避했다. 그러다가 안두기가 볼일을 보러 便所에 들어가자 개가 따라 들어갔다. 그것을 본 큰 아들이 올가미를 감추고 便所 門 뒤에 숨어서 기다렸다.
暫時 後, 便所에서 나오는 개에게 올가미를 씌우려고 덤비자 개가 놀라서 逃亡치다가 그만 마당가의 우물에 빠질 뻔했다. 마침 우물가에서 손을 씻으려던 둘째 아들이 엉겁결에 개의 뒷다리를 붙잡았다. 개를 잡긴 했으나 하도 搖動치는 바람에 도움을 請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便所에 있는 아버지에게 急하게 말했다.
“아버지 빨리 나오시오. 아버지 빨리…….”
그런데 그 모습이 우물에 처박힌 개를 거꾸로 붙잡고 외치고 있어서 마치 개를 아버지라 부르는 形局이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개를 잡아 가마솥에 안치고 불을 지폈다. 그때 셋째 아들이 房으로 들어와 아버지가 앉아 있는 方席 밑에 손을 넣어 房이 따뜻한지 만져 보면서 말했다.
“方今 개를 안쳤더니 房이 뜨뜻해 오네요.”
이番에는 아버지가 方席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개를 안쳤다고 하니 아버지가 개가 된 꼴이었다.
飮食이 다 마련되자 동네 老人들을 請해 놓고 술과 개고기를 待接하니 모두들 소매를 걷어 올리고 맛있게 먹으면서 뼈다귀를 휙휙 門밖으로 내던졌다. 그러자 동네 개들이 모여들어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다투어 먹었다. 이것을 본 넷째 아들이 말했다.
“허허, 오늘이 개 生日이구먼.”
그날이 自己 아버지 生日인 것을 생각하지 않고 개들이 잘 먹는다고 개의 生日이라고 한 것인데 마치 自己 아버지를 개라고 指稱한 꼴이 되었다.
안두기는 아들이 열 兄弟나 되어 아들들이 서로 먼저 아버지의 生辰을 祝賀하려고 여기저기서 모셔가려 했다. 그래서 큰 아들이 이를 確認하려는데 다섯째가 보이지 않으므로, 自己 아들에게 다섯째 작은 아버지에게 가서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고 오라고 했다. 아이가 다섯째 작은 아버지 집에 가서 말했다.
“오늘 할아버지 저녁 진지를 어느 宅에서 차릴 것인지 물어보고 오래요.”
마침 다섯째 同生이 뒷간에 있었는데 食口들이 다 奔走했던 탓으로 미처 對答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조카가 아무 對答도 못 듣고 그냥 가버리면 안 되겠다 싶어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 저녁 진지는 여기서 차린다고 傳해라!”
그 뜻은 우리 집에서 모신다는 것이었는데, 便所 안에서 ‘여기서 차린다’ 고 하니 아버지는 그날 저녁 밥床을 뒷간 안에서 받아야 할 판이었다.
안두기는 아들들을 다 세간을 내어주고 막내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기르던 개를 잡아먹고 나니 도둑이 들까 걱정이 되어 말했다.
“애들아, 어디서 강아지 새끼라도 하나 얻어다가 기르면 어떻겠느냐? 함께 있던 짐승이 없어지니 서운하구나.”
그러자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이젠 개소리 좀 그만하세요.”
개에 對한 이야기를 그만하라는 말이었는데, 아버지의 말이 개소리가 된 꼴이니 또 失手였다.
말은 조금만 不注意해도 엉뚱한 뜻으로 바뀔 수 있다.
어떤 사람이 自己 어머니를 乘用車의 옆자리에 모시고 가며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집에서 어머니를 싣고 가서 場터에 내려놓고, 거기서 작은아버지를 싣고 가서 작은아버지 집에 내려놓고 난 다음, 다시 場을 본 어머니를 싣고 오겠습니다.”
이 말은 어머니와 작은아버지를 車에 싣는 物件으로 取扱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말은 恒常 注意해서 하라는 가르침을 주는 이야기이다.
4. 백결대락(百結碓樂)
百結의 방아樂이라는 말로, 百結先生이 가난을 슬퍼하는 아내를 慰勞해 주기 爲하여 거문고를 演奏했던 故事에서 由來했다.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는 의연(毅然)한 態度를 이른다.
* 三國史記 列傳 第 8 에.
新羅 第20代 慈悲王 때 樂聖 百結 先生은 百姓들의 살림이 어려워지자 王에게 政治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上疎했다. 그러나 改善의 幾微가 보이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慶州 狼山 밑에서 숨어 살았다. 自然히 살림살이가 가난해져 옷을 누더기처럼 百 곳이나 기워(結) 입고 다녔는데 마치 온몸에 메추라기를 달아 맨 것과 같아 그를 東里 또는 百結 先生이라는 別號로 불렀다.
어느 해 歲暮에 다른 집에서는 떡방아를 찧는 소리가 搖亂했으나 百結 先生의 집에서는 그러하질 못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穀食이 있어 설을 쇠는데 우리집은 形便이 되지않으니 어떻게 차례를 지내리까?”
그러자 百結 先生이 말했다.
“”大抵 사람이 죽는 것은 命에 달려 있고, 富貴는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오, 오는 것을 막지 못하고 가는 것을 쫓을 수 없는 것이 人生인데 그대는 어찌 그렇게 마음 弱해하시오? 내 그대를 爲하여 떡방아 찧는 소리를 演奏해주리니 마음이라도 즐겁게 가지시오.“
그러고는 거문고를 잡고 덩더쿵! 덩더쿵! 하고 떡방아 찧는 소리를 演奏했다. 이것이 그의 有名한 ‘방아樂’, 卽 碓樂이지만 안타깝게도 曲은 傳하지 않는다.
百結 先生은 人間의 喜怒哀樂의 모든 心事를 거문고 가락에 실어 風靡하였다.
後世 사람들은 新羅 사람으로서 公明正大하기는 金陽만한 이가 없으며, 英雄豪傑로는 金庾信만한 이가 없다. 그러나 百結 先生은 두 분을 合친 것과 같은 人格者였다고 稱頌했다.
5. 백사단심(百死丹心)
百 번 죽어도 변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로, 高麗의 忠臣 鄭夢周가 죽음을 무릅쓰고 忠節을 지킨 故事서 由來했다. 오직 한 임금만을 爲하는 節槪를 뜻한다.
* 朝鮮名人傳 圃隱集에.
圃隱 鄭夢周 (1337~1392)는 牧隱 李穡, 冶隱 吉再와 함께 高麗 末 三隱 中 한 사람이다. 그의 本貫은 延日이고 號는 圃隱이며, 字는 達可, 諡號는 文忠이다.
어머니가 그를 孕胎했을 때 蘭의 꿈을 꾸어 처음에는 이름을 夢蘭이라 했다. 그가 아홉 살 때에는 黑龍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 後 나가보니 그가 나무 밑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夢龍이라 했다가, 長成한 다음에 夢周라고 改名했다. 恭愍王 때 세 番이나 壯元及第하였고, 벼슬이 三重大匡 (正1品)에 이르렀다.
高麗 禑王 때 成均館大司成으로 있던 鄭夢周는 排明親元의 外交 路線을 反對하다가 彦陽으로 流配되기도 했다. 그리고 1379年에는 助戰元帥가 되어 李成桂 麾下에서 倭寇 討伐에 參戰했다. 그러나 李成桂는 威化島에서 回軍한 後, 날로 勢力이 强해져 마침내 朝鮮 建國의 大業을 꾀하기 始作했다. 그러자 鄭夢周는 金震陽 等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高麗를 지키려고 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李成桂의 셋째 아들 李芳遠이 鄭夢周의 마음을 懷柔시키기 爲하여 그의 뜻을 묻는 時調(何如歌)를 읊었다.
如此亦何如 如彼亦何如 ~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城隍堂後壇 頹落亦何如 ~ 萬壽山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 ~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百年까지 누리리라.
이에 鄭夢周는 卽席에서 詩(丹心歌)를 지어 拒絶했다.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 白骨이 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 ~ 임 向한 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어떤 일이 있어도 高麗 王朝를 向한 마음은 變치 않으리라는 뜻이다.
鄭夢周가 高麗에 對한 確固한 忠誠心, 卽 百死丹心을 드러내자 李芳遠은 그의 마음이 變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除去하기로 作定했다. 그래서 趙英珪를 시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친 李成桂를 問病하고 돌아가던 鄭夢周를 善竹橋에서 죽였다.
李芳遠은 훗날 王位에 오른 뒤 그의 忠節을 기리어 領議政에 追贈하고, 益陽府院君으로 追封했다.
6. 백의종군(白衣從軍)
벼슬 없이 軍隊를 따라 싸움터로 감
朝鮮時代 官吏들이 儀式에 參加할 때 服裝은 金冠朝服이었다. 黑色과 金色으로 된 金梁冠을 쓰고 紅色 緋緞으로 만든 朝服을 입었다. 執務 때는 소매가 넓고 깃이 둥근 團領을 입고 職級에 따라 色相이 다른 道袍를 걸쳤다. 武官이 입는 철릭·夾袖·戰服 等 軍服은 多樣한 紋樣을 넣어 華麗함이 더했다. 그러나 一般 百姓은 大槪 흰옷을 입었다. 그래서 ‘白衣’는 벼슬하지 않은 사람의 象徵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白衣從軍이란 말이 나왔다. 卽 벼슬이 없이 軍隊에 服務하게 되니까 職責에 맞는 옷이 없고 따라서 一般百姓들이 입는 흰색 옷을 입는다는 것이다.
李舜臣 將軍은 두 차례나 白衣從軍을 했다. 첫 番째는 咸鏡道 鹿屯島 屯田官이던 1587年 女眞族의 奇襲을 막지 못한 데 責任을 지고서였다. 그는 이듬해 女眞族 征伐戰에서 功을 세워 赦免되었다. 忠武公은 10年 뒤 壬辰倭亂 때 또 한 番 白衣從軍하게 되었다. 釜山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倭軍을 攻擊하라는 朝廷의 命令을 戰略上 判斷으로 따르지 않아 罷職된 것이다. 그는 後任인 元均이 漆川梁 海戰에서 大敗하고 戰死한 뒤 다시 水軍 總指揮官으로 復職하게 되었다. 白衣從軍은 이처럼 大部分 敗戰과 關聯된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境遇도 있었다. 中宗 7年 5月 7日 副提學 權敏手가 쓴 上疏에는 “예로부터 邊方의 百姓이 한 사람이라도 오랑캐에게 拉致되면 主將은 白衣從軍하였다”는 內容이 있다. 壬辰倭亂 勃發 直後에는 임금의 避亂 行列을 護衛하는 武士들이 너무 적다고 하여 責任者들을 白衣從軍시키기도 했다. 白衣從軍하는 將帥의 身分에 對해서 ‘兵卒 降等’ ‘補職 解任’으로 解釋이 엇갈린다. 李舜臣이 첫 白衣從軍 때 參加한 女眞族 征伐戰을 그린 戰鬪圖에는 비록 白衣從 軍을 하는 位置였지만 그가 將帥의 한 사람으로 돼 있다. 이처럼 白衣從軍은 잘못에 對한 處罰인 同時에 名譽回復의 機會이기도 했던 것이다.
7. 별실지록(別室之祿)
別室에 쌓아 둔 祿俸이라는 뜻으로, 의롭지 않은 돈은 그냥 保管만 할 뿐 쓰지 않는다. 또는 그 돈을 말한다.
* 端宗實錄 璿源系譜에.
朝鮮 時代의 文臣 하위지(河緯地 1412~1456)는 本貫은 晉州, 號는 丹溪, 諡號는 忠烈로 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그는 人品이 沈着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오로지 集賢殿에서 學問에만 熱中한 첫 손에 꼽히는 淸白吏였다.
1453年 首陽大君이 조카 端宗으로부터 王位를 빼앗고 世祖로 登極한 後 河緯地를 禮曹參議에 任命했다. 그러자 河緯地는 이를 固辭하고 故鄕 善山에 내려가 隱遁했다. 그러나 世祖가 强壓的으로 命令하자 마지못해 赴任은 했으나 ‘나는 端宗의 臣下이지 世祖의 臣下가 아니다.’ 하여 世祖가 준 祿俸을 쓰지 아니하고 別 途의 場所에 쌓아 두었다.
그는 다른 忠臣들과 함께 端宗 復位를 꾀하다 綻露가 났으나 世祖는 그의 人品을 아껴서 마음을 돌려 함께 일하자고 慫慂했다. 그러자 그는 斷乎히 말했다.
“ 이미 逆賊이라 이름 지었으면 應當 죽일 것이지 어찌하여 묻고 또 묻는 것이오? 아무리 그리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니 더 以上 괴롭히지 마시오.”
그러자 世祖가 말했다.
“너는 이미 내가 준 祿俸을 받아 먹었으니 朕의 臣下가 되었는데 이제 와서 다른 말을 하는 게냐?”
“千萬의 말씀이오. 나는 當身이 義롭지 않음을 알기에 當身이 준 부끄러운 祿俸을 한 푼, 한 톨도 축내지 않고 모두 別室에 따로 모아 두었소이다.”
世祖는 그의 確固한 忠節에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成三問, 朴彭年, 李塏, 兪應孚, 柳誠源 等과 함께 灼刑 (불로 살을 지지는 刑罰)에 處했다.
그는 나중에 吏曹判書에 追贈되었다.
같은 死六臣의 한 사람인 成三門도 亦是 世祖가 준 祿俸을 먹지 아니했다고 한다.
8. 보은단동(報恩緞洞)
恩惠를 베푼 사람이 살았던 동네라는 말. 自己의 處地는 생각지 않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는데 도움을 받은 사람이 훗날 큰일을 解決해 준 故事에서 由來했다.
* 韓國人의 智慧에.
朝鮮 第14代 宣祖 때 明나라 通譯官 洪純彦은 漢陽의 美洞에 살았다. 그는 本來 豪俠한 사람으로 뛰어난 親和力이 있어 中國에 가는 使臣을 隨行했다.
通州에 到着하여 旅程을 풀고 구경도 할 兼 靑樓에 놀러 나갔다가 몸을 판다는 女人의 글을 보고 찾아 들어갔다. 그런데 그 女가 素服을 한 채 愁心이 가득하길래 물어보니 父母가 갑자기 病으로 돌아가셨으나 葬事지낼 돈이 없어서 몸을 팔러 나왔다고 했다. 洪純彦은 그 말을 듣고 巨金 3百金을 몸값으로 주고 그 女를 靑樓에서 풀려나게 해주었다. 그 女는 무척이나 고마워하며 그의 이름을 물었으나 그는 다만 朝鮮의 洪 譯官이라고만 알려주었다.
그리고 歸國 後 그는 3百金이라는 莫大한 國庫金을 縮낸 事實이 드러나 獄에 갇히게 되었다.
그 무렵, 明나라에는 太祖 李成桂의 아버지가 李子春이 아니라 高麗의 權臣 李仁任이라고 잘못 알려져 그를 바로잡는 일로 外交的 摩擦을 겪고 있었다. 그러니까 明나라에서는 朝鮮 建國 後 200如 年間이나 李成桂가 全州 李氏가 아닌 星州 李氏인 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더군다나 李仁任은 賣官賣職을 하다가 李成桂에 依해 慘刑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太祖의 아버지로 記錄해놓고, 高麗의 王을 넷이나 죽이고 쿠테타로 政權을 奪取했으므로 正統性을 認定할 수 없다고 主張하면서 잘못된 記錄을 修正해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大明會典의 잘못된 記錄이 外交上 問題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3代에 걸쳐 15차례나 使臣을 보냈으나 고쳐지지 않았다. 宣祖는 大怒하여 使臣들의 잘못이니 꼭 바로잡도록 하라고 嚴命을 내렸다. 그러자 大臣들이 모여서 熟議를 했다.
“이 일을 解決하려면 明나라의 事情을 잘 아는 洪純彦이 꼭 必要한데 그가 監獄에 갇혀 있으니 우리가 代身 公金을 갚아주고 그를 明나라로 보내기로 합시다.”
이렇게 해서 洪純彦은 監獄에서 풀려나 奏請使 黃廷彧과 함께 明나라로 가게 되었다.
洪純彦이 使臣 一行과 朝陽門에 到着하자 뜻밖에 禮部侍郞 石星이 마중 나오더니 뒤이어 騎兵이 달려왔다. 그러면서 ‘洪 譯官이 누구냐’ 고 찾더니 洪純彦을 鄭重히 모시고 가는 것이었다.
그가 한 客室에 들어 기다리니 지체가 높아 보이는 夫婦가 다가와 큰절을 올리고 나서 말했다.
“나으리! 저는 나으리의 恩惠를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夫人 옆에 있던 男便도 鄭重히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通州에서 어른께서 베푸신 恩惠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른께서는 天下의 大人이십니다.”
洪純彦은 그때 서야 몇 年 前의 일을 떠올렸다.
그 女子는 靑樓에서 나와 父母의 兩班家道를 이어받아 石星의 後妻로 들어갔는데 石星이 出世하여 禮部尙書가 되었던 것이다.
石星이 洪純彦에게 물었다.
“이番에는 무슨 일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洪純彦이 宗系辨誣 問題로 왔다고 말하자 그는 積極的으로 나서서 朝鮮 王室의 宗系를 바르게 고쳐 주었다. 그리고 洪純彦이 돌아올 때 그 夫人이 손수 짰다는 緋緞 10疋에 손수 '報恩緞'이라는 글씨를 繡놓아 洪純彦에게 주었다.
歸國하자 사람들이 그 緋緞을 사러 洪純彦의 집 앞에 구름처럼 모여드니 그 洞네를 報恩緞洞이라 하였는데 只今의 서울 中區 小公洞 롯데호텔 附近이다.
宣祖는 功이 큰 洪純彦에게 2等 功臣을 주고, 唐陵君이라는 君號까지 내렸다.
壬辰倭亂 때에는 洪純彦이 支援兵을 要請하기 爲해 다시 明나라에 가니 石星이 兵部尙書로 昇進하여 積極的으로 도와주어 일이 順調롭게 되었다. 洪純彦은 譯官 出身이어서 큰 벼슬은 못했으나 그의 孫子 洪孝孫은 肅川府使를 지냈다.
9. 복완지공(覆椀之功)
毒藥이 든 밥상을 엎지른 功이라는 말로, 王을 毒殺하려 했던 李資謙의 亂에서 由來했다. 어떤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冒險을 하면서까지 바로잡는 行動을 이른다.
* 人物韓國史에
高麗의 李資謙(?~1126)은 둘째 딸이 第16代 睿宗의 妃로 冊封되자 邵城郡開國伯의 자리에 올라 勢力家가 되었다. 睿宗이 죽자(1122年) 그는 王位를 貪내던 王弟들을 물리치고 外孫子를 仁宗으로 擁立하고, 自己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妃로 삼게 했다.
그렇게 해서 莫强한 威勢를 얻자 自己 一派를 要職에 等用하고, 自己는 太子와 同等한 待遇를 받았다. 또 賣官賣職을 通하여 富를 蓄積하고, 權勢와 더불어 十八子, 卽 李氏가 임금이 되리라는 讖緯說을 퍼드렸다. 그리고 王位를 簒奪하기 爲해 仁宗을 自己 집에 招待하여 毒殺을 施圖했다. 卽 自身의 딸인 王妃를 시켜 毒이 든 飮食을 仁宗에게 가져다주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자 王妃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 男便인 王을 죽인 妖婦가 될 것이고, 안 들으면 不孝가 된다는 생각에 甚하게 葛藤하던 끝에 床을 들고 가다가 일부러 넘어져 飮食을 엎질러버렸다. 그 女는 男便을 살림과 同時에 아버지의 命令도 拒逆하지 않는 智慧를 發揮했던 것이다.
얼마 後, 李資謙의 이 陰謀가 綻露나 붙잡히자 王妃 李氏도 逆賊의 딸이라 하여 廢妃되었다.
그러나 仁宗은 일부러 床을 엎질러 自身의 목숨을 救해준 李氏에게 土地와 奴婢를 下賜하고 끝까지 돌보아 주었다. 그 後부터 밥床을 들고 가다 엎어지는 女人을 비꼬는 말로 覆椀之功을 세우려고 하느냐고 놀리게 되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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