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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한자성어(漢字成語)**/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ㅁ-3)

by 산산바다 2026. 2. 21.

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글 목록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3)

 

 

20. 묘각재판(猫脚裁判)

고양이 다리의 裁判이라는 말로, 고양이에 해서 火災가 나자 訟事를 벌였던 故事에서 由來했다. 어떤 일이든지 判斷하는 基準에 따라 그 結果가 바뀔 수 있음을 意味한다.

 

* 韓國人野談.

木花 장사를 하기 해 네 사람이 똑같이 投資하여 木花 값이 쌀 때에 많은 木花를 사들였다. 木花 값이 오르면 내다 팔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木花倉庫에 쌓아두다 보니 쥐가 여기저기에 오줌을 싸는 바람에 木花가 누렇게 되어 고민(苦憫)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議論한 끝에 고양이를 한 마리 共同으로 사다 놓고 넷이서 다리 하나씩을 맡아 責任 지고 보살피기로 했다.

부터 倉庫에 쥐가 들어오지 않아서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이가 잘못하여 왼쪽 앞발을 다치게 되었다. 그 발을 맡은 親舊傷處을 바르고 헝겊으로 감아 주니 고양이는 절름거리면서도 나머지 세 발로 곧잘 뛰어다녔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불 때는 아궁이 앞을 지나다가 그만 아픈 다리에 감긴 헝겊에 불이 붙었다. 唐慌한 고양이는 自己가 살고 있는 木花 倉庫로 뛰어 들어가 이곳저곳으로 마구 뛰어다녔다. 그러자 불이 여기저기에 옮겨붙어 倉庫는 순식간에 불더미에 휩싸이고 말았다. 勿論 고양이도 그 안에서 타 죽었다.

損害를 보게 된 세 사람들은 고양이의 다친 다리를 맡은 親舊에게 責任이 있다고 따졌다.

자네의 잘못으로 큰 損害를 입었으니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가 이대로 損害를 보고 있을 수는 없네. 그러니 賠償을 해주게.”

고양이 발에 난 傷處를 치료해 준 親舊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보게 들 倉庫에 불을 낸 건 내가 아니라 우리가 共同으로 산 고양이 아닌가. 게다가 자네들도 알다시피 나 亦是 자네들과 똑같이 損害를 보았고……. 그런데 나에게 損害賠償을 하라니,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일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세 親舊莫無可奈였다.

아무리 소리 지르며 싸워도 結論은 쉽게 나지 않았다. 네 사람은 마침내 고을 사또(使道)를 찾아가서 判定을 받기로 했다. 사또를 찾아간 네 親舊가 저마다 自己主張을 폈다.

그러니까 애초에 저 親舊가 맡은 고양이 다리를 잘 보살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傷處에 헝겊을 감지만 않았더라도 괜찮았을 거구요.”

그래서 損害賠償을 해달라고 要求했는데, 親舊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親舊을 올리는 동안 傷處治療해준 親舊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사또의 判決을 기다렸다. 이야기를 傾聽한 사또가 嚴肅하게 말했다.

듣거라! 木花 값을 물어낼 사람은 저 사람이 아니라 너희들 세 사람이다. 그러니 너희 세 사람은 돈을 모아서 저 사람에게 木花 값을 물어주도록 해라.”

사또의 判決에 세 親舊는 놀라서 물었다.

사또 나리 그게 都大體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들은 저 親舊 때문에 損害를 본 사람들이옵니다.”

아뢰옵기 황송(惶悚) 하오나, 사또 나리께서 무언가 잘못 생각하신 것은 아니신지요? 判決反對로 내린 것 같사옵니다.”

親舊一時에 사또의 判決이 잘못되었다고 抗議하자 사또가 큰 소리로 말했다.

어허, 버릇없는지고! 그렇다면 只今부터 判決根據說明해 줄 테니 잘 들어라. 고양이가 다리를 다쳤든, 거기에 헝겊을 감아 불이 붙었던 간에 고양이가 倉庫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불이 나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

그야 그렇습니다만 고양이는 헝겊에 불이 붙자 木花倉庫로 달려간 것이고, 結果 불이 났으니 木花 값은 當然히 그 다리의 主人인 저 親舊가 물어내야 합니다.”

사또는 혀를 끌끌 차더니 다시 說明했다.

沓沓하구나, 잘 생각해 보아라. 그 고양이가 불붙은 다리를 끌고 木花倉庫로 달려갈 때 어떤 다리를 利用했겠느냐?”

그야 勿論 성한 다리로 달려갔겠지요.”

그래. 바로 그것이다. 너희들 세 사람이 보살피던 성한 다리가 아니었다면 고양이가 木花倉庫로 달려갈 수 있었겠느냐? 結局 木花 倉庫에 불이 붙게 한 건 성한 세 다리였다는 말이다. 그러니 너희 셋이 저 사람에게 木花 값을 물어 주는 것이 當然하다.”

사또의 說明을 들은 세 親舊는 아무 말도 못했다.

 

 

21. 묘전읍교(墓前泣敎)

무덤 앞에서 눈물로 가르치다.

 

* 里鄕見聞錄.

박세영은 열아홉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 어머니 李氏가 울며 에게 이르기를, "네게 바라는 것은 아우를 가르쳐서 다시 朴氏 家門을 일으키는 것이다."라고 하시니, 逍遙堂 朴世茂는 나이가 겨우 열 두살이고, 막내 同生 박세옹은 이제 여섯 살이었다.

박세영이 둘을 敎育하면서 或是라도 安逸하게 하고 게으름을 피우면, 아버지 墓所 앞에서 自身의 종아리를 치고 나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同生들이 배움을 부지런하지 못함은 이 가 됨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니, 同生들이 히 어기지 못하고 마침내 文學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里鄕見聞錄 ~ 朝鮮 哲宗 劉在建이 지은 人物行跡記. 머리에 壺山外記作者 趙熙龍이 쓴 序文이 있고, 다음에 著者里鄕見聞錄義例目次·引用書目配列되어 있다. 朝鮮 初期 以來 下層階級 出身으로 各 方面에 뛰어난 人物行蹟學行 · 忠孝 · 智謀 · 烈女 · 文學 · 書畵 · 雜藝 · 僧侶으로 分類하여 284에 걸쳐 記錄하였는데, 引用書冊52이고 收錄人物은 모두 308에 이른다. 兩班層하여 記錄된 것을 引用部分兩班 中心社會倫理가 눈에 띄지만, 朝鮮時代 下層階級 出身人物硏究에 도움이 되는 重要資料이다. 많은 文獻을 섭렵(涉獵)하여 類書集成人物行蹟 記錄이 높이 評價된다.

 

 

22. 묘항현령(猫項懸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다. 方法은 그럴듯한데 전혀 實現 可能性이 없는 일을 일컫는다.

 

* 旬五志. 순오지(旬五志)에 나오는 속담(俗談)

고양이()에게 몹시 시달리는 쥐들이 生存相議했다.

고양이만 없다면 우리들의 生活도 부러울 것이 없을 텐데 꼭 우리들의 먹을 것이 있을 만한 데에 고양이가 있어 늘 生命威脅을 느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한 좋은 對策이 있으면 忌憚없이 말해주시오.”

그러자 한 쥐가 나서며 말했다.

우리가 萬若 고양이 목에 방울만 매달 수 있다면 그 소리를 듣고 도망가면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이오.”

쥐들이 모두 좋은 意見이라고 뜨거운 拍手喝采를 보냈다.

그때 늙은 쥐 한 마리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자네 말이 옳네. 그렇게만 되면 두려울 게 없겠지.”

늙은 쥐는 座中을 쭉 둘러보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누가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겠는가?”

그러자 쥐들은 고개를 숙이며 뿔뿔이 흩어졌다.

이 이야기가 나오는 旬五志朝鮮時代 評論集이다. 孝宗 學者이며 批評家玄黙子 洪萬宗鄭澈, 宋純 等1678年 肅宗 十五志라고도 한다. 附錄에는 130如 種俗談이 실려 있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는 바로 이 이야기 속에 실려 있다. 國立中央圖書館所藏되어 있다.

 

 

23. 무국지왕(無國之王)

나라가 없는 이라는 말로, 허울만 그럴듯할 뿐 實勢가 없음을 이른다.

 

* 新增東國輿地勝覽 이야기 韓國史.

新羅의 마지막 王 敬順王(?~979)의 이름은 이며, 伊飡 孝宗의 아들이다. 그는 927年 後百濟의 견훤(甄萱)侵攻으로 경애왕(景哀王)이 죽자 甄萱하여 卽位하게 되었다.

敬順王 4(930) 正月載巖城將軍 善弼高麗投降하니 太祖 王建待接하고 尙父라는 職爲를 주었다. 이듬해 2王建騎馬 兵 50如 名을 거느리고 京畿에 이르러 敬順王에게 만나기를 하므로, 敬順王百官과 더불어 臨海殿에서 그를 맞아들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

나는 하늘의 도움을 입지 못하여 患亂이 자주 일어나고, 또 견훤(甄萱)이 우리나라를 자주 侵害하니 얼마나 분통(憤慟)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니 左右에서 흐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王建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慰勞했다.

王建이 그렇게 數十 日 동안 머물다가 돌아가려고 하니 敬順王穴城에까지 餞送해주며 아우 裕廉人質로 딸려 보냈다.

王建 麾下軍士들은 軍氣嚴正하여 머무는 동안 一切民弊를 끼치지 않았다. 이에 徐羅伐婦女子들이 기뻐하며 말했다.

前日에 견훤(甄萱)이 왔을 때에는 시호(豺虎 승냥이와 호랑이, 사납고 惡毒한 사람을 이르기도 함)를 만난 것과 같더니, 王公父母를 만나는 것과 같구나.”

王建新羅에게는 錦彩 緋緞 鞍裝, 官僚壯兵들에게는 布帛膳物로 보냈다.

王建卽位 9(935) 10, 敬順王은 강토를 거의 다 빼앗기고 百姓들의 生活極度疲弊했다. 그래서 君臣들과 더불어 王建에게 降服할 것을 議論했는데, 意見紛紛하자 王子 (麻衣太子)가 말했다.

國家에는 天命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스스로 最善을 다하여 굳게 지키다가 最後에 힘이 다하면 그때 議論함이 옳을 것인데, 어찌 싸워보지도 않고 千年社稷을 허수로이 하루아침에 他人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太子의 간곡(懇曲)한 말에 이 말했다.

이처럼 危殆로운 形勢時間만 끌어 無辜百姓들을 간곡(懇曲)하게 죽게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敬順王侍郞 金封休에게 하여 高麗 太祖에게 降服文을 보냈다. 그러자 王子痛哭하면서 허름한 로 만든 옷을 입고 皆骨山(겨울의 金剛山)으로 들어가서 一生을 마쳤다.

王建敬順王의 글을 받고, 大相 王鐵 等을 보내어 隆崇하게 迎接하게 한 , 臣下들을 거느리고 直接 郊外까지 마중 나와 慰勞했다. 王建行列香車寶馬30如 里하여 道路가 막히고, 구경하는 사람이 담을 둘러싼 듯했다.

太祖쪽의 좋은 집 한 채를 敬順王에게 주고, 맏딸 樂浪公主를 그에게 집보냈다. 그리고 正承으로 하니 그 地位太子의 윗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나라도 百姓도 없는 無國之王이었다.

 

 

24. 무영무애(無影無愛)

그림자가 없으면 사랑도 없다. 無影塔을 만든 阿斯達과 그의 아내 阿斯女의 이야기에서 由來했다. 사랑한다는 根據가 없어 믿을 수 없다는 뜻으로 쓴다.

 

* 玄鎭健 無影塔.

佛國寺新羅 第23代 法興王(?~540) 22創建되었다. 그리고 35代 景德王(在位742~762) 10改修되었다. 그때 뜰에 多寶塔釋迦塔을 세우게 되었다.

廣大佛國寺 境內築成多寶塔釋迦塔構造絶倫함을 보여주어 보는 이로 하여금 感動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이를 築成金大城牟梁里에서 태어났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넓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金大城이 낳아주신 父母하여 佛國寺를 세우고 또 前生父母하여 石佛寺, 石窟庵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多寶塔釋迦塔을 세우기 해 마땅한 石工이 없어 애를 태우던 中 百濟石工 阿斯達技術이 뛰어나다는 所聞을 듣고 그를 招請했다.

그대 阿斯達에게는 갓 結婚阿斯女라는 예쁜 아내가 있었다. 阿斯女男便 阿斯達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길이 남을 作品을 만들고 싶어 하는 男便藝術에 대한 欲心을 아는지라 울며 배웅했다. 阿斯達新羅로 와 佛國寺 뜰에서 釋迦塔多寶塔築造하면서도 틈만 나면 故鄕에 있는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그때 行次에 따라왔던 구슬아기가 阿斯達을 보고는 한눈에 반하여 戀慕하게 되었다. 는 날마다 阿斯達을 찾아왔다. 阿斯達은 그렇잖아도 쓸쓸하던 참이라 그 가 싫지 않았다. 그렇다고 自己의 아내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를 볼 때마다 아내가 더 그리워졌다.

阿斯達에게는 팽개라는 戀敵이 있었다. 그는 阿斯達新羅에 가고 없음을 機會阿斯女에게 接近하여 치근덕 거렸다. 견디다 못한 阿斯女阿斯達이 있는 新羅로 왔다. 그리고 佛國寺住持를 찾아가 男便해서 물었다.

住持 스님은 이 거의 다 完成되어 가는데 아내가 왔으니 作業이 늦어질까봐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率直하게 털어놓았다.

只今 郎君께서는 을 거의 다 만들어 가고 있소, 이제 며칠만 참고 있으면 千年萬年 後孫들에게 해질 훌륭한 完成豫定이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시오. 그리고 절 아래에 影池라는 못이 있는데 完成되면 그 못에 의 모습이 비칠 것이니 그때 그것을 確認하고 올라오면 만나게 해드리리다.”

阿斯女住持 스님의 말대로 影池로 가서 每日 影池水面의 모습이 비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어찌된 까닭인지 의 모습은 좀처럼 비치지 않았다. 阿斯達이 구슬아기와 사랑에 빠져 時間浪費했기 때문에 竣工이 늦어졌던 것이다. 애가 닳은 阿斯女食飮全廢하고 오로지 影池에 비칠 만을 기다리다가 氣盡하여 結局 죽고 말았다.

後 世上 사람들은 當然影池에 모습이 비쳐져야 할 이 비쳐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을 그림자 없는 塔 卽, 無影塔이라 하고 多寶塔有影塔이라 했다.

 

 

25. 무접무향(無蝶無香)

나비가 없음으로 미루어 香氣가 없을 것이다. 善德女王이 어렸을 적 牡丹꽃 그림을 보고 香氣가 없을 것이라고 豫言故事에서 由來한 말로 어떤 일에 반드시 갖추어져야 할 要件이 없다면 그것은 完全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 三國史記.

新羅 第27代 善德女王眞平王의 맏딸로서 本名金德曼이고, 善德諡號이며, 聖祖皇姑.

智慧가 많아 세 가지 앞일을 豫測하여 的中시켰다.

그 첫 째는 牡丹꽃에 한 이야기다.

나라 太宗眞平王에게 紅色, 紫朱色, 白色牡丹꽃 그림과 그 씨앗 세 되를 보내 오자 德曼에게 보이니 그 가 말했다.

이 꽃은 비록 아름다우나 틀림없이 香氣가 없을 것입니다.”

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 묻자 德曼對答했다.

이 꽃 그림에 蜂蝶이 없음으로 미루어 알았나이다. 大抵 女子가 아름다우면 男子들이 따르고, 꽃에 香氣가 있으면 蜂蝶이 따르는 아닙니까? 그런데 이 꽃 그림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蜂蝶을 그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香氣가 없음이 分明하나이다.”

그래서 그 씨앗을 뜰에 심게 했더니 果然 꽃은 스럽게 피었으나 香氣가 없었다.

째는 百濟 軍士를 물리친 이야기다.

날씨가 싸늘한 겨울에 靈廟寺 (善德女王 慶州創建한 절)아래의 玉門池에 난데없는 개구리 떼가 모여들어 울어댔다.

그러자 사람들이 駭怪한 일이라 생각하여 에게 報告하였다. 善德女王角干 閼川弼呑 等에게 軍士 2千 名을 뽑아 徐羅伐西南邊에 있는 玉門谷 (女子生殖器를 닮은 溪谷)을 찾아가서 潛伏해 있는 百濟兵士들을 殲滅하라고 命令했다. 角干王命대로 찾아가니 한 작은 山 溪谷果然 百濟將軍 于召軍士 五百 名을 거느리고 獨山城襲擊하려고 潛伏해 있어 一網打盡했다.

째는 自己의 죽음을 豫言한 일이다.

女王臣下들에게 自身이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거든 狼山 男쪽 비탈의 忉利天 안에 묻어 달라고 當付했다. 그리고 그날이 되자 豫言대로 世上을 떠났다. 臣下들은 當付에 따라 葬事를 지냈다.

그로부터 十如 年 後 文武大王善德女王아래에다 寺刹 四天王寺 (須彌山四方世界 卽, 勝身洲, 西牛貨洲, 贍部洲, 俱盧洲를 일컫는다)創建했다. 사람들은 佛經에서 四天王須彌山턱에 있고, 그 위에 忉利天이 있다고 한 말을 想起하고, 그때서야 善德女王豫言이 맞아 떨어짐을 알았다.

善德女王이 살아 있을 때 臣下들이 개구리에 豫言을 두고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 묻자 善德女王說明했다.

개구리의 불거져 나온 눈으로 兵士意味하는 것을 알았고, 玉門女根. 이고, 女子陽 中하며, 그 빛깔은 흰 것인 바, 흰 빛은 西쪽을 象徵하는 것이므로 兵士西쪽에 있음을 알았고, 男根女根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이니 그들을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說明을 듣고 난 臣下들은 모두 感歎해마지 않았다.

善德女王芬皇寺創建하고, 瞻星臺皇龍寺 9層塔建立했다.

 

 

26. 문김생원(文金生員)

文 生員金 生員, 卽 平凡한 사람이란 뜻으로, 朝鮮 英祖 때 몸가짐과 집안 管理를 잘했던 한 선비의 故事에서 由來했다. 自己 身分이 드러나지 않게 處身하거나 假名을 쓰는 境遇를 이른다.

 

* 大東奇聞.

朝鮮 第21代 英祖(1694~1775) 自己, 文字에다 어머니의 , 金字를 넣어서 文金生員으로 行勢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容貌가 못생기고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는데, 그의 조카는 容貌가 잘생겨서 內命婦 從四品淑媛 品階를 받았다. 그 바람에 家門 全體惠澤을 입어 벼락富者에 벼락감투를 쓰게 되었고, 淑媛의 아우 文聖國尙宮을 돌보는 小監이 되었다.

聖國無識한 데다가 사람이 狡猾하여 酒色奢侈를 좋아했다. 外出할 때는 華麗한 마차를 타고 다니며 權勢를 뽐내고, 집안에서는 下人數十 名씩 거느렸으며, 門前에 드나드는 사람이 저자를 이루고, 無賴食客들이 우글우글하였다.

그러나 淑媛伯父 文金生員淑媛이 벼슬자리를 만들어 주어도 하지 않았다. 히 조카 聖國이 보내오는 돈이나 物件一切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아예 去來를 끊고 지냈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聖國은 집안을 危險人物이니 操心하라고 注意를 주었다.

聖國이란 놈이 저 貌樣인데 그 權勢가 얼마나 가겠소. 猝富貴不詳이란 말대로 벼락富貴는 얼마 못가는 이오. 뒤집히는 날에는 滅門之禍할 것이니 處身操心해서 하고, 나는 아예 1에 한 차례씩만 집에 올 것이니 그리 아시오.”

이렇게 말하고는 대지팡이에 짚신을 신고 名山大刹을 찾아 定處 없이 떠나 버렸다. 그리고 本姓을 감추고 金氏行勢하며 섣달 그믐 캄캄한 밤에야 한 씩 집에 들러 省墓를 하고, 妻子를 만났다.

몇 해 , 아니나 다를까 淑媛 同生 聖國謀叛賜死하고, 그에 따라 文氏 一門滅亡했다. 그러나 文金生員의 집안만은 하게 되었다. 그가 일찍이 어머니의 까지 넣어서 行動操心한 것은 先見之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27. 문덕지략(文德之略)

文德智略이라는 말로, 조그만 힘으로 엄청난 큰 힘을 깨뜨린 乙支文德故事에서 由來했다. 智略이 뛰어난 사람을 比喩하는 말이다.

 

* 三國史記 列傳 第4.

乙支文德高句麗 嬰陽王 때 사람으로 그의 家系譜仔細內容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資質沈着하고 날쌔며 智略術數가 뛰어났고, 글을 잘 알고, 잘 지었다고 해지고 있다.

西紀 612, 나라 煬帝宇文述于仲文에게 高句麗를 치게 했다. 그러자 乙支文德實態把握하기 하여 陣營에 들어가 거짓으로 降服했다.

宇文述宇仲文高句麗이나 乙支文德이 찾아오거든 잡아두라는 皇帝密旨를 받고 乙支文德抑留시키려 했으나 尙書右丞(尙書都省官吏) 劉士龍降服하기 해 온 敵長抑留하는 것은 道理가 아니라고 굳이 말리므로 그냥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곧바로 後悔하고 사람을 보내 더 議論할 일이 있으니 다시 오라고 했으나 乙支文德은 속지 않았다.

乙支文德을 놓친 宇文述食糧이 떨어졌으므로 回軍하려 했으나 精銳部隊追擊하면 成果를 이룰 것이라는 宇仲文主張에 따라 鴨綠江을 건너 追擊했다.

乙支文德나라 軍士가 굶주리고 있음을 알고 그들을 지치게 하고자 싸움마다 하는 척하니, 宇文述은 하루 동안에 일곱 을 싸워 모두 이겼다. 그러자 여러 이긴 것을 믿고 마침내 薩水(淸川江)를 건너 平壤城에서 30되는 地點에까지 좇아오니 乙支文德宇仲文에게 愚弄하는 를 지어 보냈다.

神策究天文 ~ 그대의 神妙計策天文을 꿰뚫었고

妙算窮地理 ~ 奇妙計算地理通達했도다.

戰勝功旣高 ~ 싸움마다 이겨 이 높아졌으니

知足願云止 ~ 그것으로 滿足하고 그만 그침이 어떠한가?

 

乙支文德使者를 보내어 거짓으로 降服하며 말했다.

軍士를 돌려 돌아가면 을 모시고 行在所(皇帝行次할 때 머무는 臨時居所)로 찾아가겠다.”

宇文述軍士들이 지쳐있어 더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고 乙支文德降服을 핑계 삼아 돌아가기 薩水쯤 건넜을 때 乙支文德後尾攻擊하니 한꺼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그들이 돌아가는데 걸린 時間은 하루 낮 하룻밤 동안이었고, 그 거리는 450였다. 또 처음 遼河를 건넜을 때에는 아홉 개 部隊軍隊305000이었는데, 遼東城으로 되돌아간 는 겨우 2700이었다. 高句麗가 그 많은 軍士를 거의 다 殲滅할 수 있었던 것은 乙支文德智略 때문이었다.

 

 

28. 문선의민(文宣衣民)

文氏百姓들에게 옷을 입히다. 卽 高麗 文益漸나라에서 木花씨를 가져와 普給시킴으로써 百姓들이 따뜻하게 지내게 해준 것을 말한다. 여러 사람을 하여 最善을 다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 朝鮮古今名賢傳.

高麗 末期學者 文益漸 (1329~1398)日新이고, 三憂堂이며, 諡號忠宣이다. 그가 書狀官(서장관)이 되어 使臣 李公遂를 따라 나라에 갔을 때였다. 그곳에는 高麗王族 德興君이 있었는데 그는 나라가 高麗를 쳐들어오자 崔濡와 더불어 나라에 協助했다. 나라의 文益漸에게도 그 德興君을 따르라고 했으나 듣지 아니하므로 交趾 (越南北部 하노이 地方)三年間 流配를 보냈다.

文益漸은 그 곳 流配地에서 사람들이 木花栽培하여 옷을 지어 입는 것을 보고, 그것을 本國에 가져가 國民衣生活에 도움을 주고자 했으나 搬出禁止된 탓으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苦心 끝에 木花씨 세 개를 붓대롱(筆管) 속에 숨겨서 몰래 가져왔다.

그러고는 그의 丈人 鄭天益과 함께 故鄕 慶南 山淸郡 丹城面 培養里(沙月里)에서 밭에 심었으나 栽培法을 몰라 겨우 한 만 싹을 틔울 수 있었다. 그래서 刻苦努力으로 繁殖을 거듭했다. 繼續해서 木花로 솜 타는 과 실을 뽑는 方法, 그리고 베짜는 것까지 開發하니 마침내 온 나라 坊坊曲曲百姓들이 따뜻한 무명으로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게 되었다.

7代 世祖 때 그의 祀堂이 세워졌으며, 萬人을 따뜻하게 입힌 功勞忠宣公 諡號도 받았다.

李滉, 宋時烈, 李珥 等 여러 사람이 그를 讚揚한 글을 지었다.

 

神農敎民耕 ~ 옛적에 神農百姓들에게 논밭 갈기를 가르쳤고

后稷敎民稼 ~ 后稷百姓들에게 모심기를 가르쳤는데

忠宣衣我民 ~ 文 忠宣公萬百姓들에게 무명옷을 입혀주었으니

豐功倍前昔 ~ 忠誠은 옛적의 그것보다 갑절이나 되도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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