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ㄷ-3)
18. 동혈지우(同穴之友) (調信說話)
* 調信說話를 擴大再生産한 것이 春園 李光洙의 <꿈>이다.
* 三國遺事 券3, 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神에.
昔, 新羅爲京師時 : 옛날 新羅 <徐羅伐> 時代 때에
有世逵寺<今興敎寺也>之莊舍, 在溟州㮈李郡 : 世逵寺의 農場 집이 溟州 㮈李郡에 있었는데
按『地理志』, 溟州無㮈李郡, 唯有㮈城郡, 本㮈生郡, 今寧越. 又牛首州領縣有㮈靈郡, 本㮈已郡, 今剛州. 牛首州今春州, 今言㮈李郡, 未知孰是, : 地理志에 依據하면 溟州에 㮈李郡은 없고 오직 㮈城郡이 있다. 本디 㮈生郡이고 只今 寧越이다. 또 牛首州 領縣에 㮈寧郡이 있으니 本디 㮈已郡이고 只今은 剛州이다. 牛首州는 只今 春州인데 여기서 말하는 㮈李郡은 어느 것인지 모르겠다.
本寺遺僧調信爲知莊 : 本寺에서 중 調信을 보내어 莊園을 맡아 管理하도록 했다.
信到莊, 上悅守金昕公之女, 惑之深 : 調信이 莊園에 와서 金昕公의 딸을 좋아하여 그女에게 아주 반했다.
屢就洛山大悲前, 潛祈得幸 : 그는 여러 番 洛山寺 觀音菩薩 앞에 나아가 그 女와 살게 해달라고 남몰래 祈禱했다.
方數年間, 其女已有配矣 : 바야흐로 數年 사이에 그女에게 이미 配匹이 생겼다.
又往堂前怨大悲之不遂己 : 이에 그는 또 佛堂에 나가 觀音菩薩이 自己의 所願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怨望하며
哀泣至日暮, 情思倦憊, 俄成假寢 :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지쳐서 暫時 잠이 들었다.
忽夢金氏娘, 容豫入門, 粲然啓齒而謂曰 : 꿈속에서 문득 金氏 娘子가 기쁜 얼굴로 門에 들어와 입을 활짝 벌리고 웃음 지으며 말했다.
「兒早識上人於半面 : "저도 일찍이 스님을 暫間 뵙고 알게 되어
心乎愛矣, 未嘗暫忘 : 마음 속으로 사랑하며 暫時도 잊지 못했습니다.
迫於父母之命, 强從人矣 : 그러나 父母님의 命令에 못 이겨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媤집 갔었습니다.
今願爲同穴之友, 故來爾 : 이제 同穴之友(夫婦)가 되고자 하여 왔사옵니다."
信乃顚喜, 同歸鄕里 : 이에 調信은 매우 기뻐하며 그 女와 같이 故鄕으로 돌아갔다.
計活四十餘霜, 有兒息五 : 그녀와 40如 年間 같이 살며 子女 다섯을 두었다.
家徒四壁, 藜藿不給 : 집은 但只 네 壁뿐인데 거친 飮食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遂乃落魄扶攜, 糊其口於四方. : 마침내 零落하여 食口들을 이끌고 四方으로 다니면서 얻어먹고 지냈다.
如是十年, 周流草野 : 이렇게 十年을 草野에 두루 헤매이니
懸鶉百結, 亦不掩體. : 갈갈이 찢어진 옷은 몸뚱이도 가리지 못했다.
適過溟州蟹縣嶺 : 때마침 溟州 蟹縣嶺을 지날 때
大兒十五歲者忽餧死, 痛哭收瘞於道 : 15歲 되는 큰 아이가 갑자기 굶어 죽으매 痛哭하며 길가에 묻었다.
從率餘四口, 到羽曲縣(今羽縣也), 結茅於路傍而舍. : 남은 네 食口를 데리고 그들 內外는 羽曲縣에 이르러 길가에 茅屋을 짓고 살았다.
夫婦老且病, 飢不能興 : 그들 夫婦는 늙고 병들었으며 게다가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十歲女兒巡乞 : 10세 된 계집아이가 밥을 얻으러 다니다가
乃爲里獒所噬, 號痛臥於前. : 마을 개에게 물려 아픔을 부르짖으며 앞에 와서 눕자
父母爲之歔欷, 泣下數行 : 父母도 목이 메어 눈물이 흘러내렸다.
婦乃澁拭涕, 倉卒而語曰 : 夫人은 눈물을 씻으며 倉卒히 말했다.
「予之始遇君也 : "내가 처음 當身을 만났을 때는
色美年芳, 衣袴稠鮮 :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입은 옷도 깨끗했습니다.
一味之甘, 得與子分之 : 한가지 飮食이라도 當身과 나누어 먹었으며
數尺之煖, 得與子共之, 出處五十年 : 작은 衣服이나마 當身과 나누어 입으면서 함께 살아온 것이 於焉間 50年입니다.
情鍾莫逆, 恩愛綢繆, 可謂厚緣. : 그동안 情은 깊어졌고, 사랑도 굳게 얽혔으니 참으로 두터운 因緣이라 하겠습니다.
自比年來, 衰病日益深, 飢寒日益迫 : 그러나 近年에 이르러 衰弱하여 생기는 病이 날로 더해지고, 굶주림과 추위가 날로 더욱 甚해지니
傍舍壺漿, 人不容乞 : 남의 집 곁방살이나 보잘것없는 飮食조차도 빌어 얻을 수가 없게 되었으며
千門之恥, 重似丘山. : 千門 萬戶에 乞食하는 부끄러움은 무겁기가 산더미 같습니다.
兒寒兒飢, 未遑計補 :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이것도 미처 돌보지 못하였는데
何暇有愛悅夫婦之心哉 : 어느 겨를에 夫婦의 情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紅顔巧笑, 草上之露 : 꽃다운 얼굴과 어여쁜 웃음도 풀잎에 이슬이요
約束芝蘭, 柳絮飄風. : 芝蘭 같은 約束도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입니다.
君有我而爲累, 我爲君而足憂 : 이제 當身은 내가 있어 累加되고 내게는 그대를 爲하여 더욱 근심합니다.
細思昔日之歡, 適爲憂患所階. : 조용히 옛날의 기쁨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始作이었습니다.
君乎予乎, 奚至此極, : 當身과 내가 어찌하여 이런 地境에까지 왔을까요?
與其衆鳥之同餧, 焉知隻鸞之有鏡, : 뭇 새가 다 함께 굶어 죽는 것보다는 짝 잃은 鸞새가 거울을 向하여 짝을 부르는 것이 낫습니다.
寒棄炎附, 情所不堪, : 추우면 버리고 더우면 親하는 것은 人情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然而行止非人, : 行하고 그침은 人力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離合有數, 請從此辭." :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運數가 있습니다. 願컨대 이제부터 헤어지기로 합시다."
信聞之大喜, 各分二兒將行, : 調信이 이 말을 듣자 깊이 首肯하여 各各 아이 둘씩 나누어 데리고 將次 떠나려 하니
女曰: 我向桑梓, 君其南矣. : 夫人이 말했다." 저는 故鄕으로 가겠으니 當身은 南쪽으로 가십시오."
方分手進途而形開, : 이리하여 서로 作別하여 길을 떠나려 하는데 꿈에서 깨었다.
殘燈翳吐, 夜色將闌. : 타다 남은 등잔불은 하늘거리고 어느덧 희뿌옇게 날이 밝기 始作했다.
及旦鬚髮盡白, : 아침이 되어 수염(鬚髥)과 머리털은 모두 하얗게 세고
惘惘然殊無人世意, : 망연(惘然)히 세상일에 뜻이 없어졌다.
已厭勞生, 如飫百年苦, : 이미 괴롭게 살아감도 싫어지고, 마치 한평생의 苦生을 다 겪고 난 듯하여
貪染之心, 洒然氷釋. : 財物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 깨끗이 사라졌다.
於是, 慚對聖容, 懺滌無已. : 이에 觀音菩薩의 像을 對하기가 부끄러워지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도 누를 길이 없었다.
歸撥蟹峴所埋兒, 乃石彌勒也. : 그는 돌아와 해현(蟹峴)에 묻은 아이를 파보았더니 그것은 바로 돌부처였다.
灌洗奉安于隣寺, 還京師, 免莊任, : 물로 씻어서 近處의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서 莊園을 맡은 소임(所任)을 내놓고
傾私財, 創淨土寺, 懃修白業, : 私財를 기울여 淨土寺를 세워 부지런히 착한 일을 했다.
後莫知所終. : 그 후에 어디서 世上을 마쳤는지는 알 수 없다.
議曰 : 思論해 보건대
讀此『傳』, 掩卷而追繹之, : 이 傳記를 읽고서 冊을 덮고 지나간 일을 생각하니
何必信師之夢爲然! : 어찌 調信師의 꿈만 그렇겠느냐?
今皆知其人世之爲樂, 欣欣然役役然, : 只今 모든 사람들이 俗世의 즐거움만을 알고서 기뻐하며 애쓰고 있으나
特未覺爾. : 이것은 但只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
乃作詞誡之曰: : 이에 詩를 지어 警戒한다.
快滴須臾意已閑 : 暫時 즐거운 일 마음에 맞아 閑暇롭더니
暗從愁裏老蒼顔 : 근심 속에 어느덧 남 모르게 늙어졌네.
不須更待黃粱熟 : 모름지기 기장이 누렇게 다 익길 기다릴 새도 없이
方悟勞生一夢間 : 人生은 끝나는 한바탕 꿈임을 깨달을 것을
治身臧否先誠意 : 修身의 잘잘못은 먼저 誠意에 달린 것
鰥夢蛾眉賊夢藏 : 홀아비는 美人을, 도둑은 倉庫를 꿈꾸네.
何以秋來淸夜夢 : 어찌하여 가을날 밤 맑은 꿈으로
時時合眼到淸凉 : 때때로 눈감아 理想鄕에 이를거나?
調信說話. : (調信의 說話에서)
(六堂 崔南善本 三國遺事 159쪽에)
19. 두문지의(杜門之義)
門을 막아 義로움을 지킨다는 말로, 高麗가 亡하고 李成桂가 朝鮮을 建國하자 高麗를 섬기던 忠臣들이 朝鮮의 穀食을 먹지 않겠다 하며 杜門洞에 들어가서 고사리만을 캐 먹고 산 데서 由來했다.
* 國史大事典. 古今淸談에.
李成桂 (在位 1392~1398)가 高麗를 무너뜨리고 朝鮮(1392년)을 建國하니 高麗를 섬기던 忠臣들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하여 모든 榮華와 名譽를 버리고 京畿道 開豊郡 光德面 光德山 골짜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서 延命하며 끝까지 高麗에 忠誠할 것을 盟誓했다.
그때 高麗 忠臣들이 몸을 씻은 샘을 洗身井이라 불렀으며, 그들이 머물렀던 곳을 杜門洞이라 하였고, 그들의 忠義를 杜門之義라 했다.
記錄에 나와 있는 그때의 忠臣들을 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長城의 徐仲輔를 비롯하여 迂軒. 許邕, 金海의 許麒. 金振門 等을 杜門洞 72賢으로 꼽는다.
(둘째) 個別的인 記錄으로는 富平의 李倚, 開城의 高天佑, 仁川의 蔡貴河, 邊肅, 城山의 全信, 坡平의 金仁奇, 靑松의 沈元符, 晉州의 姜淮仲 父子 等 10人과 申珪, 申琿, 趙羲生, 林先味, 李瓊, 孟好誠, 高天祥 等이 있었다.
(셋째) 太學生<成均館 所屬의 生員, 進士의 總稱> 69名이 焚身自殺했거나 끝까지 抗拒하다가 굶어 죽었다.
(넷째) 武臣 48人이 있으며, 朝鮮에 忠誠하지 않아 끝내 歿殺當한 사람이 많았는데 이들을 爲해 第21代 英祖 때 表節祠를 세워 配享하였다.
(다섯째) 杜門同에서 5里쯤 떨어진 곳에 宮女洞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高麗의 宮女들이 義롭게 죽었다.
以上의 人員 數만 해도 199名, 宮女를 合하면 200名이 훨씬 넘는 數다. 記錄에 빠진 것을 堪案하면 이 外의 數는 헤아리기가 힘들 程度이다. 또 杜門洞이 아닌 名山大川을 헤매다가 죽거나, 벼슬하지 않고 義를 지켰던 숨은 사람이 數없이 많았던 것을 堪案하면 그 數는 斟酌하기조차 어렵다.
20. 두죽시중(豆粥侍中)
콩죽만 먹는 侍中이라는 말로, 高麗 末에 나라의 政治를 總括하던 門下侍中이 朝鮮 初에 太宗 李芳遠의 懷柔에도 굽히지 않고 콩粥만 먹으며 志操를 지킨 故事에서 由來했다. 不義와 타협(妥協)하지 않는 志操가 굳은 사람을 이른다.
* 高麗史. 古今淸談에.
高麗 末에 左侍中 禹玄寶 (1333~1400)는 鄭夢周가 善竹橋에서 被殺된 後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그곳으로 가기를 꺼리자 天摩山의 스님을 시켜 葬事를 지내준 義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朝鮮의 建國 主役으로 太宗과는 매우 親한 벗이었다. 太宗이 禹玄寶를 淸白吏에 封하고 나라의 重責을 맡기려 하였으나 그는 亡國之臣임을 내세워 極力 辭讓했다. 또한 朝鮮에서 주는 祿米는 안 먹겠다는 潔癖으로 그의 衣服은 언제나 철에 맞지 않았고, 朝夕의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恒常 콩을 맷돌에 갈아서 나물과 함께 粥을 끓여 먹었으므로 사람들은 禑王 때 侍中을 지냈다 하여 그를 豆粥侍中이라고 불렀다.
그는 쓰러져 가는 高麗를 救하지 못했다는 自愧感으로 自身의 무덤조차 先塋에 쓰지 않고 따로이 쓰게 했다.
21. 두현상량(頭懸上梁)
머리를 上梁에 매단다는 말로, 修養하는 사람이 스스로 肉體的 苦痛을 克服함으로써 自身의 目標를 達成한다는 뜻이다. 新羅 자장법사(慈藏法師)에게서 由來했다.
* 三國遺事. 佛敎大辭典에.
新羅의 大德 慈藏의 俗名은 金善宗으로 그의 아버지 蘇判 茂林은 辰韓의 眞骨로서 管理職을 맡고 있었는데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觀音菩薩에게 子息 하나만 점지해줄 것을 빌었다.
“萬若 아들을 낳게 해주시면 佛法에 歸依케 하겠습니다.”
그 後 아내가 별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胎夢을 꾸고 아들을 낳았는데, 釋迦世尊과 生日이 같은 날이었다. 그래서 善宗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善宗의 父母가 世上을 떠나자, 그는 어렵게 結婚했으나 世俗의 번거로움이 싫어져 아내와 子息을 버리고 元寧寺를 세운 後 入山했다. 그리고 깊고 險한 山속에서 篤實하게 佛法을 修行했다.
그는 修行할 때 自己 스스로를 다스리기 爲해 周圍에 가시덤불을 둘러치고, 맨몸으로 들어앉아 조금만 움직여도 가시가 찌르도록 하고, 머리카락을 들보에 매달아 졸음을 막았다.
그 무렵 朝廷에서는 宰相의 자리가 비게 되자 善德女王이 그를 여러 番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자 勅令을 내렸다.
“命令에 不應하면 목을 베어버리리라.”
그러자 慈藏이 女王에게 말했다.
“차라리 하루 동안 戒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戒를 어기고 百年 살기를 願치 않습니다.”
그의 斷乎한 뜻이 朝廷에 알려지자 王도 더 以上 俗世로 돌아오라고 强要하지 않았다.
그는 비바람을 避해서 바위 사이에 틀어박혀 修道하며 살았다.
그런데 異常한 새가 穀食을 물어다 주어 그것으로 供養을 했다.
어느 날, 그의 꿈에 하늘 사람이 와서 다섯 가지 戒를 주었다. 꿈을 깬 그는 비로소 골짜기를 나오니 마을의 婦女子들이 다투어 와서 戒를 받았다.
그 後 더 깊은 佛法을 硏究하고자 636年에 僧實 等 10如 名과 함께 唐나라의 淸凉山으로 갔다. 그 山에는 文殊菩薩의 塑像이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에 依하면 帝釋天 (佛法을 지키는 神)이 匠人을 데리고 와서 만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꿈에 塑像이 그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梵偈를 주었다. 그러나 그 意味를 알 수가 없었는데 이튿날 아침 처음 보는 스님이 와서 解釋해 주며 말했다.
“비록 萬 가지 敎를 배운다 하더라도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을 것이오.”
말을 마친 스님은 自己가 지니고 있던 袈娑와 舍利 等을 주고는 사라졌다. 慈藏은 佛經과 佛像이 없었으므로 大藏經 1簿와 幡幢?花蓋 (佛堂을 裝飾하는 깃발) 等 佛敎를 알릴 수 있는 資料들을 가져가게 해달라고 唐太宗에게 請해서 모두 가져왔다.
그가 新羅에 되돌아오자 朝廷에서도 뜻을 같이 하여 議論했다.
“佛敎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오래되었지만 그것을 主管하고 받드는 規範이 없으니 이를 統括해서 管掌할 必要가 있다.”
論議가 이에 이르자 勅令을 내려 慈藏을 大國統으로 삼고, 佛敎의 一體 規範을 主管하도록 했다. 慈藏은 重責의 所任을 느끼고 宮中과 皇龍寺에서 大乘論을 活發하게 펴 佛敎를 布敎했다. 그래서 戒를 받고 부처를 받드는 이가 열 집 中에 여덟, 아홉 집이나 되었고, 스님이 되기를 請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이에 通度寺를 세워 스님 志望者들을 받아들였다. 또 自己 집에 세웠던 元寧寺를 고쳐 짓고 落成會를 열어 雜花(華嚴經)를 講했다.
慈藏은 皇龍寺9層塔의 創建을 建議하여 645年에 完成하고, 通度寺를 創建했으며, 10如 個의 寺塔도 建立했다. 또 唐나라 年號를 쓰도록 하고, 그들의 衣冠制度를 導入하여 整理하니 外觀上으로 身分을 區分 짓는 制度的 裝置가 마련되었다.
慈藏은 末年에 太白山에 淨巖寺를 세운 뒤 그곳에서 生을 마감했다.
22. 도환시전(盜還施錢)
집에 든 盜賊이 도리어 돈을 베풀다.
* 銘心寶鑑 廉義篇에. 명심보감 23. 염의편(廉義篇)
朝鮮 純祖 때 사람인 洪耆燮이 젊었을 때 매우 가난하여 말할 수 없더니 하루는 어린 계집종이 기쁜 듯이 뛰어와서 돈 일곱 兩을 바치며 말하기를, "이것이 솥 속에 있었습니다. 이만하면 쌀이 몇 섬이요, 나무가 몇 바리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公은 놀라서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된 돈이냐?"라 하고는, '돈 잃은 사람은 와서 찾아가라.'는 글을 써서 大門에 붙여 놓아다.
이윽고 얼마 아니되어 劉라는 사람이 찾아와 글 뜻을 물었다. 公은 하나도 빠짐없이 事實을 말해 들려주었다.
劉哥가 말하기를, "남의 솥 속에다 돈을 잃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참으로 하늘이 주신 것인데 왜 取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公이 말하기를, "나의 物件이 아닌데 어찌 가지겠소이까?"라고 하였다.
劉哥가 꿇어 엎드려 말하기를,
"小人이 어젯밤 솥을 훔치러 왔다가 살펴보니 너무 家勢가 딱함을 알고, 적으나마 보템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돈 몇 푼을 두고 갔습니다. 公께서 남의 것이라며 돌려주려는 高貴한 人品을 보고 嘆服 하였습니다. 다시는 도둑질을 아니할 것을 盟誓하옵고, 앞으로는 늘 옆에서 모시기를 願하오니 걱정 마시고 받아 주십시요." 라고 하였다. 公이 돈을 돌려주며 말하기를, "네가 착한 사람이 된 것은 참 좋은 일이나 이 돈은 取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며 끝내 받지 않았다. 뒤에 公은 判書가 되고 그의 아들 在龍이 憲宗의 府院君이 되었으며, 劉哥도 또한 信任을 얻어서 몸과 집안이 크게 繁榮을 하였느니라.
23. 득수지어(得水之魚)
물을 만난 물고기라는 말로, 어떤 일에서 크게 도움이 되는 狀況이 되었음을 이르는 말이다.
* 三國遺事에.
新羅 第30代 文武王(?~681)은 太宗武烈王(金春秋)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金庾信의 누이 同生 文明王后이고, 妃는 慈儀王后이다.
660年에 太子로 冊封되어 羅唐 聯合軍이 百濟를 攻擊할 때 庾信과 함께 5萬의 軍隊를 이끌고 百濟를 滅亡시켰다. 661年, 太宗武烈王이 죽자 王位에 올라 三國統一의 遺業을 繼承하였으며, 이듬해에는 羅唐이 聯合하여 高句麗 征服에 나섰으나 唐의 軍隊가 全滅當함으로써 第1次 高句麗 征伐에 失敗했다. 668年 再次 羅唐 聯合軍을 動員하여 高句麗를 攻擊하여 마침내 三國統一의 偉業을 達成했다. 그리고 674年 唐으로부터 받아온 年歷을 新羅의 新曆으로 바꾸어 썼다.
文武王 13年, 異常한 별이 나타나고 地震이 자주 일어나 王이 근심하자 金庾信이 말했다.
“只今의 異變은 그 禍가 小臣에게 있는 것으로서 國家의 災殃은 아니오니 大王께서는 걱정하지 마소서!”
“그렇다면 내 근심이 더욱 크구려.”
文武王이 占術家에게 命해 國家의 安寧과 金庾信의 健康을 爲해 祈禱하게 하자 祈禱를 마친 占術家가 말했다.
“數十 名의 武將 兵士들이 金庾信 將軍의 집에서 울며 나왔는데 갑자기 없어졌나이다.”
金庾信이 그 말을 듣고 말했다.
“그들은 必是 나를 保護해 주던 神兵들일 것이다. 그들이 나의 命이 다함을 알고 가버린 것이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그 後 金庾信이 病으로 눕게 되자 王이 몸소 枉臨하여 問病하니, 金庾信이 말했다.
“臣이 大王의 팔다리가 되어 섬기고자 했사오나 命이 다하여 다시 龍顔을 뵙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王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동안 寡人은 卿이 있어 得水之魚인 듯 좋았는데 이제 그대에게 피치 못할 일이 생긴다면 百姓은 어찌하며, 사직(社稷)은 어찌하란 말인가?”
“어리석고 不肖한 小臣이 國家에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다만 慈愛롭고 밝으신 殿下께서 저를 믿고 일을 맡겨 주셨기 때문에 적게나마 도울 수 있었습니다. 이제 三韓이 한 집안이 되고, 百姓들은 두 마음을 갖지 않게 되었으니 곧 太平이 오리라 믿습니다. 臣이 보건대 王室이 처음에는 잘 하지만 끝까지 잘하는 일이 적으니 그 點이 念慮되옵니다. 바라옵건대 殿下께서는 小人輩들을 멀리하시고 어진 이를 가까이하십시오. 위로는 朝廷이 和合하고 아래로는 百姓들을 安定되게 하시어 國家의 威嚴이 無窮하게 된다면 臣은 죽어도 餘恨이 없습니다.”
文武王은 아직도 金庾信이 할 일이 泰山 같다면서 안타까워하였다.
金庾信은 三國統一을 이룩한 後 唐나라 勢力을 逐出하기 爲해 高句麗 遺民들과 協力하여 667年 唐나라 勢力을 끝내 韓半島에서 몰아내는데 成功했다.
文武王은 681年, 죽음에 臨薄하자 ‘내 遺骨을 火葬한 後에 東海에 묻어주면 龍이 되어 왜구(倭寇)의 侵入을 막겠다.’라고 遺言하여 世界에서도 唯一한 水中陵에 安置되었다.
이 水中陵은 1967年, 慶北 慶州市 陽北面 奉吉里 앞바다 大王岩에 있음이 確認되어 現在는 史蹟 第158號로 指定되어 있다.
大王岩에 오르면 東西南北 四方으로 바닷물이 드나들어 마치 水路를 人爲的으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안쪽의 空間은 比較的 넓고 큰 돌이 놓여 있는데 水面은 이 돌을 若干 덮을 程度로 維持되고 있다. 文武王의 遺骨은 그 돌 밑에 安葬되어 있을 것으로 推定된다.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文武王의 護國精神은 우리 後孫들이 본받아야 할 敎訓이다.
24. 득어망전(得魚忘筌)
물고기를 잡으면 그 물고기를 잡는 데 使用했던 통발은 버린다. 卽 必要한 것을 얻고 나면 不必要한 것은 거추장스러워 버리게 된다는 뜻. 토사구팽(兎死狗烹)과 같은 意味이다.
* 佛敎大辭典에.
朝鮮 中宗, 仁宗 年間에 震默堂(俗名 一玉 1562~1633) 스님이 있었다.
그는 全北 萬頃 佛居村에서 出生하여 일곱 살 때 全州의 西쪽에 있는 봉서사(鳳棲寺)로 出家했는데 머리가 英特하고 神通力을 가지고 있었다.
當時 全州에는 儒敎學者 鳳谷 金東準이 있었다. 두 사람은 마음이 잘 通하여 切親했다. 그래서 鳳谷은 震默堂을 참 道人이라 하고, 震默堂은 鳳谷을 巨儒라 불렀다.
하루는 邊山의 月明庵에 있던 震默堂이 鳳谷을 찾아가 通鑑을 빌려 달라고 하였다. 鳳谷은 震默堂의 付託이라 빌려주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한 番 읽은 冊은 찢어서 버리는 그의 怪愎한 行實이 못미더워 弟子 한 사람을 몰래 딸려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震默堂은 鳳棲寺로 가는 사이에 빌려간 通鑑을 한 券 읽고 나면 찢어 버리고, 두 番째 것을 읽고 나면 亦是 또 버리는 것이었다. 뒤따라가던 鳳谷의 弟子가 그것을 모두 주워 가지고 돌아온 것은 勿論이다.
그 뒤 震默堂이 다시 鳳谷을 찾아오자 鳳谷이 그를 나무랐다.
“남의 冊을 빌려 갔으면 마땅히 返還하는 것이 禮義이거늘 길거리에 모두 버리다니 그런 法이 어디 있소?”
그러자 震默堂은 껄껄 웃으면서 對答했다.
“여득어자망전(如得魚者忘筌)이오.”
이 말은 물고기를 얻은 者가 筒발(물고기를 잡는데 쓰는 대나무로 만든 用器)을 버리는 것과 같다. 卽 물고기를 얻었는데 무엇하러 筒발을 챙기겠느냐는 뜻이다.
약이 오른 鳳谷이 試驗 삼아 <通鑑>의 各 대목을 낱낱이 물으니 震默堂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正確하게 對答했다. 대단한 記憶力의 所有者였다.
震默堂은 술을 매우 좋아했는데, 술이라고 부르면 마시지 않고, 穀茶라고 해야만 마시는 客氣를 부리기도 했다. 그는 1633年 72歲로 入寂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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