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ㄴ)
1. 난생주몽(卵生朱蒙)
알에서 태어난 朱蒙이라는 말로, 高句麗의 始祖 朱蒙의 故事에서 由來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일이 뜻하지 않게 큰 成果를 이루는 것을 比喩
* 三國遺事에.
朱蒙 (B.C.58~19)은 高句麗의 始祖 東明王의 이름이며, 姓은 高氏이다.
東扶餘王 解夫婁가 아들 갖기를 願하여 名山大川을 찾아 致誠을 드리다가 곤연(鯤淵) 연못가 돌 밑에서 노란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를 주워 왔다. 解夫婁는 기뻐하면서 黃金개구리란 뜻으로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그가 자라 太子가 되었고, 解夫婁가 죽자 마침내 王이 되었다.
金蛙王이 太白山 南쪽 우발수(優渤水)에 사냥하러 나갔다가 美貌의 柳花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本是 河伯(水神)의 딸이었다. 그런데 天帝의 아들 解慕漱의 誘惑에 빠져 情을 通했다. 그러자 父母는 딸이 貞節을 지키지 못하고 함부로 몸을 許諾했다 하여 그곳으로 귀양 보낸 것이었다.
金蛙王은 그녀를 방안에 가두어 두게 했는데 解慕漱가 햇빛이 되어 다시 그女를 찾아와 情을 通한 후 닷 되들이만 한 큰 알을 낳았다. 金蛙王은 柳花夫人의 房에 있는 알을 보고 좋지 못한 徵兆라 하여 갖다 버리도록 했다.
그래서 그 알을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고, 길바닥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避해 갔으며, 들판에 버리니 날아가던 새가 내려와 품어주었다. 王이 異常히 여겨 그 알을 깨뜨리려 했으나 깨지지 않아 도로 柳花夫人에게 주었다.
柳花夫人이 그 알을 잘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얼마 後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생김새가 非凡하고 英特하게 생긴 그 아이는 일곱 살이 되자 활을 만들어 쏘는데 百發百中이었다. 扶餘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朱蒙이라 하였기 때문에 그에 따라 이름을 朱蒙이라 하였다.
金蛙王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朱蒙만 못했다. 그런데도 長子 帶素는 朱蒙을 猜忌하여 그는 사람이 낳은 子息이 아니니 없애버려야 한다고 父王에게 아뢰었다.
그러나 金蛙王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朱蒙에게 말 기르는 任務를 맡겼다. 朱蒙이 말을 맡아 기르게 되었는데 그는 좋은 말에게는 飼料를 적게 주고, 나쁜 말에게는 좋은 먹이를 주어 살찌게 했다. 그래서 사냥을 나갈 때면 王이 살찐 말을 타고 朱蒙은 야윈 말을 탔는데 이 말이 야위기는 했으나 좋은 말이라 朱蒙이 잡은 짐승이 恒常 많았다.
이를 猜忌하여 王子와 臣下들이 共謀하여 朱蒙을 없애려 하자 柳花夫人은 朱蒙에게 차라리 宮을 떠나 살라고 일렀다.
朱蒙은 平素에 사귀어오던 烏伊, 摩離, 협보(陜父) 等과 함께 宮을 떠나게 되었는데 淹水에 이르러 江을 건널 수 없게 되자 물에게 말했다.
“나는 天帝의 아들이오, 나를 쫓는 者가 있으니 길을 여시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모여들어 다리를 만들어 건너게 한 後 흩어지니 쫓는 者들은 건널 수가 없었다.
朱蒙은 卒本川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國號를 高句麗라 하고, 姓을 高氏로 定했다.
그때 朱蒙의 나이는 22歲로, 新羅 朴赫居世21年(甲辰年) B.C.38年이었다.
2. 난생설화(朱蒙의 卵生說話)
압녹계곡(鴨綠溪谷)에서 風雲을 부르며 建國을 圖謨하니 그 이름은 추모(鄒牟) 곧, 高句麗 始祖인 東明聖王이다.
松花江 流域의 扶餘國은 東方 唯一의 文明이 發達된 나라이었는데 扶餘王 解夫婁는 늙도록 아들이 없어 山川 이곳저곳을 다니며 祈禱를 하다가 路上에 버린 금와(金蛙)라는 少兒를 얻어 後嗣를 삼았더니 天子의 子라 自稱하는 해모수(解慕漱)가 王權을 主張하게 되니 兩者間에 紛爭이 생겨 이로 因해 國相 아난불(阿蘭弗)의 建言에 따라 東海濱迦葉原으로 遷都하고 舊都에는 해모수(解慕漱)가 자리해 解夫婁의 '東扶餘'와 '解慕漱'의 北扶餘'로 나누어진다.
北扶餘王 解慕漱가 遊覽을 하다가
河伯의 長女인 柳花라는 美人을 만나서
서로가 相悅한 結果 아이를 孕胎하게 된다.
河伯은 딸이 姙娠한 것을 願치않아 大怒하여 딸인 柳花를 죽일려고 優勃水에 던졌는데 漁夫가 救해서 東扶餘王인 金蛙에게 바쳤다.
柳花를 後宮에 두고 寵愛하게 되는데
뜻 밖에 柳花가 大卵을 낳아 그 理由를 물으니 柳花의 말이
'妾은 深宮에 獨處하야 外人과 相從이 없고 다만 懷中에 日影의 빛인 異兆가 있었을 뿐 이처럼 孕胎하여 알을 낳았노라'하며 이때까지의 '解慕漱'와의 關係를 숨겼다.
金蛙王은 그 알이 祥瑞롭지 못하다 하여
마구(馬廐)에 버렸는데 群馬가 밟지 아니하여
深山幽谷에 버리니 百獸들이 保護하므로 다시 그 母인 柳花에게 보내 따뜻한 곳에 싸서 두었더니 男兒가 난각(卵殼)을 깨뜨리고 나왔다 한다.
이것이 高句麗의 始祖인 추모(鄒牟- 朱蒙)의 卵生說話 이다.
鳳凰이 凡鳥와 다르고 神龍이 범사(凡蛇)와 다르고, 偉人이 凡夫와 다르니 만큼
鄒牟(朱蒙)의 出生의 神異함도 輕視할 바 아니다.
3. 남명증우(南冥贈牛)
南冥先生이 弟子에게 소를 주다.
朝鮮 中宗때의 名臣이었던 鄭琢 (號 藥圃. 諡號 貞簡公)은 南冥 曺植 (1501~1572)을 스승으로 섬기었다. 스승이 한 마리 소를 그에게 주시니, 그 뜻을 깨닫지 못하였다. 南冥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너를 보니 말과 氣運이 너무 敏捷하여, 더디고 무디면서도 먼데까지 가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되는구나. 하여 소를 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니라"라고 하였다.
4. 내심구아(耐心求鵝)
忍耐心이 거위를 救하다. 참을성의 重要함을 이르는 말로 朝鮮 世宗 때의 宰相 尹淮의 故事에서 由來하였다.
* 國朝名臣錄에.
朝鮮 世宗 때의 名臣 尹淮 (1380~1436. 本貫 茂松. 字 淸卿. 號 淸香堂•鶴川)는 어려서부터 經史에 通達하여 神童으로 불렸다. 그는 奴婢辨正都監에서 第十房을 맡아 迅速 正確하게 判決하여 周圍의 注目을 받았다.
그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어느 집을 찾아 하룻밤 자고 가기를 請했으나 主人은 冷情히 拒絶하고 들어가 버렸다.
尹淮는 너무 疲困한 나머지 그 집의 뜰아래에 앉아 暫時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집 어린아이가 나와 眞珠 구슬을 가지고 놀다가 땅바닥에 떨어뜨리자 곁에 있던 거위가 그것을 낼름 삼켜버렸다. 그것을 보지 못한 아이는 이리저리 찾다가 尹淮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얼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이는 구슬을 尹淮가 가져간 것으로 疑心하는 눈치였다.
暫時 後, 쫓아나온 主人이 다짜고짜 尹淮를 犯人으로 斷定하고 眞珠 구슬을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方今 우리 아이가 가지고 나간 眞珠 구슬이 없어졌으니, 네 所行이 分明하렷다.!”
그러고는 下人을 불러 尹淮의 온 몸을 뒤지게 했다. 그러나 眞珠 구슬이 發見되지 않자 그를 結縛하고, 來日 아침에 官家로 끌고 가겠다고 했다. 尹淮는 아무 抵抗 없이 묶이면서 主人에게 付託했다.
“좋소, 구슬을 찾고 싶다면 저 거위도 내 곁에 묶어주시오.”
主人이 그 理由를 물었으나 尹淮는 그에 對해서는 對答하지 않고 하여튼 거위를 곁에 함께 있게 해달라고만 하였다. 別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해서 主人은 그렇게 했다.
다음 날 아침, 主人이 나오자 尹淮는 거위가 눈 똥을 가리키면서 헤쳐 보라고 했다. 主人이 異常히 여겨 헤쳐 보니 그 속에서 眞珠 구슬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主人이 謝過하며 말했다.
“어제는 왜 이야기를 하지 않았소? 그때 이야기했으면 이렇게 묶이는 苦役을 치르지 않았을 텐데….”
그러자 尹淮가 對答했다.
“萬若 내가 어제 거위가 眞珠 구슬을 먹었다고 말했다면 主人丈께서는 빨리 그 事實을 確認해 보고 싶은 나머지 그 거위의 배를 갈라 眞珠 구슬을 꺼냈을 것이 아니오, 그렇게 애꿎은 짐승을 죽게 하느니 내가 하룻밤을 苦生하는 便이 낫다고 생각했던 거요.”
그는 이처럼 事理 判斷이 分明하고, 特히 사람의 마음을 洞察해 보는 眼目이 높았다. 훗날 그는 官職에 올라 世宗의 두터운 信任을 얻었다. 兵曹判書, 藝文館 大提學을 歷任하면서 仁慈한 마음씨로 어떤 일도 失手 없이 處理했다. 그는 酒好로도 이름이 났는데 世宗이 絶酒하라는 意味에서 하루에 술 석 盞씩만 마시라며 작은 盞을 下賜하자 대장間에서 큰 沙鉢로 늘려 석 盞씩 마셨다고 한다.
5. 노화삽관(蘆花揷冠)
모자(帽子)에 갈대꽃을 꽂다. 高句麗 때 美川王을 擁立하는 擧事에 贊成한다는 뜻으로 갓에 갈대꽃을 꽂았던 故事에서 由來했다. 어떤 일에 對해서 秘密裏에 贊成 與否를 確認하는 暗號를 이른다.
* 三國史記 券 第17에.
西紀280年, 高句麗의 13代 西川王 (在位 270~292) 11年, 滿州 東北方에서 狩獵生活을 하던 肅愼族이 高句麗 땅을 侵犯하니, 많은 百姓들이 죽고 財物을 掠奪當했다. 그러자 西川王은 아우 달고(達賈)를 불러 懇曲하게 命했다.
“네가 남달리 智略이 뛰어나고 勇猛스러우니 肅愼族을 물리치도록 하라.”
達賈는 卽時 싸움터로 나가 肅愼族의 大將을 죽이고, 檀盧城과 그 外 여러 城을 빼앗았다.
王은 그의 功을 높이 사 梁貊과 肅愼 두 部落을 그에게 주었다. 百姓들도 達賈의 勇猛을 침이 마르도록 稱頌했다.
西川王이 죽자 아들 烽上王 (在位292~300. 一名 雉葛王)이 代를 이어 第14代 王이 되었다.
烽上王은 天性이 傲慢하고 疑心이 많았다. 그러한 그가 百姓들의 尊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達賈를 내버려 둘 까닭이 없었다. 自己의 地位를 빼앗길까봐 지레 怯을 먹은 그는 軍士를 풀어 叔父인 達賈를 處置해버렸다. 또 自身의 아우 咄固에게도 逆謀를 圖謀했다는 陋名을 씌워 賜藥을 내렸다. 그러자 咄固의 아들 乙弗은 自身의 목숨도 危殆롭다고 생각하고 미리 逃亡을 쳤다.
烽上王은 奢侈와 享樂을 일삼으며 大闕을 크게 짓는 等 國力을 浪費함으로써 나라를 어렵게 몰아갔다.
大闕 工事가 끝나던 해에는 烽火山에서 鬼神의 哭소리가 들린다는 等 民心이 凶凶해지고, 그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地震이 거듭되었으며, 雪上加霜으로 가뭄까지 겹쳤다. 自然히 兇年이 들고, 百姓들은 굶주려 누렇게 붓는 浮黃으로 쓰러져갔다. 그런데도 烽上王은 또다시 大闕을 修理하라고 命令했다. 百姓이야 어떻게 되든 大闕이 雄壯해야 王의 威嚴이 선다는 생각이었다.
한便, 乙弗은 宮闕에서 逃亡친 後 定處 없이 떠돌다가 水室村이라는 마을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는 살기 爲한 窮餘之策으로 한 富者집의 머슴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沸流江에서 뱃沙工이 되었다.
어느덧 6年이란 歲月이 흘렀다.
朝廷에서는 國相 倉助利를 비롯하여 祖弗, 蕭友 等의 臣下들이 나라를 바로잡기로 뜻을 모았다.
“이제 百姓들은 지칠 대로 지쳤소. 그러니 임금을 廢하고 咄固의 아드님 乙弗을 모셔다 새 임금으로 모십시다.”
그래서 祖弗과 蕭友는 變裝을 하고 乙弗을 찾아 나섰다. 그들이 遇然히 沸流江에 이르러 江을 건너고자 배를 탔는데 뱃沙工이 乙弗, 바로 그 사람인 것을 發見했다. 그들은 乙弗에게 事情을 이야기하고 함께 都城으로 돌아와 隱密하게 機會를 노렸다.
그즈음 烽上王은 臣下들을 데리고 侯山으로 사냥을 나갔다. 倉助利와 祖弗, 蕭友 세 사람은 그때를 틈타 擧事를 行하기로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와 뜻을 같이 할 사람은 나처럼 하라.”
그러고 나서 그가 갈대를 꺾어 冠에 꽂으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따라서 했다. 倉助利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같은 것을 確認하고 드디어 王을 廢하여 別室에 가두고 乙弗로 하여금 王位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第15代 美川王 (在位300~331)이다.
6. 누금지효(淚琴之孝)
눈물 젖은 거문고의 孝道라는 말로, 朝鮮 成宗 때 南山골의 한 선비 이야기에서 由來했다. 精誠이 至極한 孝道를 빗대어 쓴다.
* 成宗實錄 古今淸談에.
朝鮮 第9代 成宗 (1457~1494)은 世祖의 孫子로서 帝位 13個月 만에 他界한 睿宗에 이어 13歲에 王位에 올랐다. 王位 登極 後 처음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 世祖妃 貞熹大妃의 7年 攝政을 받았지만 成人이 되어 國政을 맡고 나서는 善政을 베풀었다.
그는 世祖 때 이룩한 文化를 되살려 꽃을 피웠고, 外交에도 恪別히 神經을 쓰는 한便, 人才를 널리 登用했다. 그리고 農事를 積極 勸奬하고, 百姓을 子息처럼 돌봤으며, 抑鬱하게 獄살이를 하는 일이 없도록 애썼다. 또 百姓들의 삶을 살피기 爲해 隨時로 夜行을 했다.
어느 늦은 가을밤, 成宗이 夜行을 하고 있는데 南山 밑 어느 오막살이 안에서 한밤中에 間間이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때 아닌 거문고 소리가 들렸다.
成宗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거 참 怪異한 일이다. 기쁜 일과 슬픈 일이 한꺼번에 겹친 貌樣이로구나!’
成宗은 好奇心이 動해서 오막살이 가까이로 가서 들窓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房 안에서는 고깔을 쓴 女僧 차림의 한 女人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옆에는 한 사내가 낡은 거문고를 타고 있는 가운데, 술床 앞에 앉은 老人은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成宗은 房안의 雰圍氣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밖에 사람이 왔다는 信號로 ‘에헴’하고 기침을 하니 거문고 소리가 뚝 그치고 노래 부르던 사내가 나왔다.
“누구십니까?”
成宗은 自身이 조금 前에 房 안의 光景을 엿보았다는 事實을 털어 놓은 다음, 그 曲折을 물었다.
사내와 女人이 躊躇하자 술床 앞에서 울던 老人이 말했다.
“다 보셨다니 무엇을 숨기겠소. 이 애는 내 아들이고, 이 애는 며느리랍니다. 오늘이 이 늙은 것의 回甲인데 살림이 워낙 어렵다보니 뭐 차릴 게 있어야지요, 생각다 못해 며느리가 제 머리를 잘라 팔아서 이렇게 조촐하게나마 술床을 마련하고, 興을 돋우기 위해 凶한 머리를 고깔로 감추고 춤을 추니, 아들이 거기에 맞추어 거문고를 演奏했던 것입니다. 하여, 내가 저들의 至極한 孝誠을 보고 목이매어 울었던 것입니다.”
成宗은 連方 고개를 끄덕이며 感歎했다.
“只今까지 數많은 孝道 事例를 들었지만 이보다 더 貴한 孝道는 없었소, 내 壯談컨대 반드시 큰 福이 내릴 것이오.”
이튿날 아침, 어제의 그 오막살이집에 官服을 차려 입은 官吏가 찾아와 허리를 鄭重하게 숙이며 말했다.
“御命이오. 어서 入闕할 채備를 하시오.”
老人은 까닭을 몰라 손을 내저었다.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저는 大闕에 入闕할 사람이 못 됩니다.”
“허허! 어젯 밤 만난 분이 上監媽媽이셨소.”
“뭐, 뭐라고요?”
老人 一家族은 허겁지겁 임금이 있는 宮闕을 向하여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老人과 아들 夫婦는 宮闕에 當到하여 隆崇한 待接을 받고, 賞金과 쌀을 下賜받았다.
成宗은 스스로가 學問을 즐기고 射藝書畵에도 能하였으며, 農事를 積極 奬勵하는 한便, 人才를 登用, 制度를 整備하여 나라를 크게 隆盛케 했다.
7. 능자승당(能者昇當)
能力 있는 者가 昇進하는 것은 當然하다는 말로, 朝鮮 成宗 時代의 文章家 丘從直의 故事에서 由來했다.
* 東國輿地勝覽 東文選에.
朝鮮 7代 世祖(1417~1468)의 큰 아들 德宗(追尊名 1438~1457)이 世子로 冊封된 後 갑자기 夭折하여 둘째 아들 光이 王位에 오르니 바로 睿宗 (1450~1469) 이다. 그런데 睿宗 또한 王位에 오른 지 1年 만에 昇遐하니, 사람들은 世祖가 端宗을 죽이고 王位를 簒奪했기 때문에 因果應報로 그의 아들들이 모두 夭折한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睿宗의 뒤를 이어 第9代 成宗 (1457~ 1494)이 卽位하자, 世祖의 王妃 尹氏를 비롯하여 成宗의 生母와 養母가 모두 살아 있어 宮中에는 寡婦 王妃가 셋이나 있게 되었다.
成宗은 할머니와 두 어머니를 爲하여 잔치를 벌이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宮中에서는 노랫소리와 장구 소리가 떠날 날이 없었다.
成宗이 나이가 들어 成人이 되자 宮女들은 王의 사랑을 먼저 차지하려고 慇懃히 嬌態를 부렸다. 成宗은 술도 잘하고, 風流 氣質이 있었다. 또 有能한 선비를 아끼어 크게 쓸 줄도 알고, 諧謔도 즐겼다.
學問을 奬勵하기 爲하여 世宗 때 設立되었으나 世祖 때 廢止되었던 集賢殿을 弘文館으로 改稱하여 임금의 諮問機關으로 復活시켰다.
또 東國通鑑, 東國輿地勝覽, 東文選 等을 編纂케 하였고, 나라의 紀綱이 되는 經國大典도 完成시켰다. 그는 實力이 있는 사람을 極盡히 優待하였다.
한 番은 宗廟에 祭祀를 지내는데 祝官으로 指名된 掌令이 祝文을 읽다가 모르는 글字가 나오자 唐惶하여 그냥 서 있었다. 成宗은 어이가 없어 還宮하는 卽時 그를 武官으로 左遷시켜 버렸다. 言官들이 들고 일어나 文官을 武官으로 任命하는 것이 不可함을 말하자,
“祝文도 제대로 못 읽는 사람이 무슨 文官이오?”
하고 一言之下에 默殺해 버렸다.
훗날 左贊成을 지낸 文章家 丘從直. (1404~1477)이 처음으로 科擧에 及第하여 校書館 正字 벼슬에 올라 景福宮 안에서 宿職을 하게 되었다. 시골 사람이 처음 宮 안으로 들어온지라 마침 時間도 閑暇해서 慶會樓 구경을 나갔다가 王의 行次를 만나게 되었다. 御命 없이는 들어오지 못하는 곳에서 王의 行次와 마주치자 丘從直은 그 자리에 엎드려 待罪하였다. 成宗이 그에게 말했다.
“너는 누군데 여기까지 들어왔느냐?”
“네, 시골에서 올라와 校書官의 末職에 있는 丘從直이옵니다. 慶會樓 景致가 좋다 하기에 구경하러 들어왔습니다.
“노래를 할 줄 아느냐?”
“擊壤歌를 조금 부를 줄 아옵니다만…….”
“그래? 그럼 어디 한 番 불러보아라.”
丘從直은 農夫들이 부르는 擊壤歌를 熱心히 불렀다. 그러자 成宗은 洽足해 하며 다시 물었다.
“經書를 읽을 줄 아느냐?”
“예. 알고 있습니다.”
“무슨 經書를 잘 알고 있는고?”
“春秋를 조금 알고 있습니다.”
“어디 한 番 외워보도록 하라.”
丘從直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春秋左傳을 막힘없이 줄줄 외워 내려갔다.
成宗은 마음이 洽足한 나머지 御酒까지 下賜하며 稱讚하고, 다음날로 丘從直의 벼슬을 一躍 副校理로 昇格시키니, 三司 (司諫院. 司憲府. 弘文館을 合한 俗秤) 에서는 反對하는 輿論이 빗 발치듯 하였다. 그러자 成宗이 言官들에게 말했다.
“卿들이 及第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을 昇進시켰다고 反對하는데 그럼 어디 <春秋左傳>을 외울 수 있는 者 있거든 나와 보시오.”
그러나 한 사람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成宗은 丘從直에게 외워보라고 하였다. 丘從直은 前날과 같이 自信 있게 줄줄 외웠다. 成宗이 말했다.
“卿들도 科擧에 及第했고 經歷 또한 많은 사람인데 어찌하여 經典하나 제대로 외우지 못하면서 新進의 벼슬을 承格시켰다고 反對만 하오? 무릇 官吏는 實力이 가장 于先하는 것이오. 卿들도 工夫를 좀 하도록 하시오.”
成宗의 破格的인 人事에 反對하던 臣下들은 오히려 無顔만 當하여 默默不答 이었다.
成宗은 垂簾聽政으로 다져진 王權이 흔들리지 않게 權力의 均衡을 이루었고 權臣들의 勢力을 牽制하였으며, 士林勢力을 끌어들여 儒敎思想을 定着시켜 王道政治를 實現했다.
勸農治民에 힘쓰면서 賢明한 王으로 世祖 때 이룩한 初期의 文化가 開花되었다. 讀書堂을 設置하고 鄕學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宗敎的인 面에서는 排佛政策을 强化하여 火葬 風習을 없애고, 僧侶들의 都城 出入을 禁止시켰으며, 士大夫 집안의 婦女가 比丘尼 되는 것도 禁止시켰다. 6寸 以內의 結婚을 禁하고 政治的으로는 道學政治의 기틀을 세워나갔다.
成宗 當時 太平聖代가 이뤄지자 成宗 스스로도 頹廢風潮에 빠져 宮中을 빠져나가 妓房을 出入하다가 王妃 尹氏가 그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事件이 發生하여 廢妃되는 秘話가 있게 되었다.
이는 燕山君 代에 이르러서 政爭의 禍根이 되었다.
成宗은 1494年 38歲로 生을 마감했으며 陵은 宣陵이다.
8. 이중진주(泥中眞珠)
진흙 속의 眞珠라는 말로, 훌륭한 人物은 진흙 속의 眞珠처럼 언젠가는 빛을 發한다는 뜻이다.
* 古今淸談에.
유진동(柳辰仝.1497~1561)은 中宗 때 工曹判書를 지낸 사람으로 書畵를 잘했는데 特히 竹畵와 큰 글씨인 大書를 잘 썼다. 太祖 4年에 起工된 崇禮門은 世宗 29年에 정분(鄭苯)에게 命하여 新造했다고 實錄은 記錄하고 있다. 그리고 顯板 글씨는 芝峰類說에 讓寧大君이 썼다고 記錄되어 있는데 一說에는 柳辰仝이 朝鮮 明宗 때 썼다고도 한다.
柳辰仝은 일찍이 兩親을 여의고 제대로 工夫도 못 한 채 乾達들과 어울리면서 남의 家畜을 훔치고, 한길에서 힘자랑하는 것이 生活의 全部였다. 그런 그가 中宗 때 戶曹判書를 지낸 李自堅 (1454~1529)의 눈에 띄게 되었다.
李自堅은 나이가 스물 前이었는데 柳辰仝이 將次 큰 人物이 될 것을 알고 自己 누님에게 그와 婚姻할 것을 勸하였다. 平素 同生을 누구보다도 믿고 있던 그의 누님은 別말 없이 吉日을 擇하여 乾達 柳辰仝과 婚姻을 하였다.
婚姻 後에도 柳辰仝은 市井의 無賴輩와 어울리며 甚至於 妻家집 종들에게까지 行悖를 부렸다. 丈母는 매우 걱정했으나 自堅은 別로 걱정하지 않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얼마 後에 그를 必要로 하는 때가 왔다.
辰仝이 말을 타고 사냥을 갔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졌다. 火가 난 그는 그날로 危驗한 武術과 담을 쌓고 君子가 業으로 할 것은 學問이라고 생각하여 門을 걸어 잠그고 讀書에 全心全力을 다했다. 그 結果 마침내 科擧에 及第하여 벼슬이 判書에까지 이르고, 自堅과 그 아우도 宰相이 되어 兄弟가 按察使로 任命되는 等 名聲을 얻었다.
1550年 柳辰仝은 明宗의 聖節使가 되어 나라의 大業을 爲해 明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또 朝廷에서 周易을 勸奬하자 經筵官으로 起用되었으며 都摠管과 知中樞府事를 지내다가 過勞로 中風에 걸려 生涯를 마쳤다.
柳辰仝은 늙어서도 恒常 自己를 바른 사람으로 이끌어 준 妻男 自堅을 父母나 다름없이 恭敬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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