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산에는 꽃이 피네
**한자성어(漢字成語)**/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ㄱ–6)

by 산산바다 2026. 2. 21.

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글 목록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6)

 

 

51. 국중비부(國重比父)

나라가 아버지보다 더 하다. 나라를 하여 일하는 사람은 父母보다 나라를 히 여겨야 한다는 忠節强調한 말이다.

 

*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朝鮮 第14代 宣祖 때의 忠臣 宋象賢(1551~1592)本貫礪山이고, 泉谷인데 壬辰倭亂 倭將尊敬할 만큼 훌륭한 人物이었다.

그는 縣監 宋復興의 아들로 태어나 10如 歲經史를 읽었으며, 벼슬길에 올라서는 質正官(特定事案하여 質疑하거나 解明, 學習擔當하는 使臣)으로 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그는 東萊府使로 있었는데, 倭敵釜山上陸하여 東萊城包圍하자 釜山僉使 鄭撥과 함께 勇敢히 싸워 을 지켰다. 그러나 不幸鄭撥敵軍에 맞아 戰死하니 戰勢不利해져 을 지키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자 옆에서 奮戰하고 있는 申汝櫓에게

나는 이곳을 지켜야 할 責任者로서 마땅히 이 運命을 같이 해야 하지만 그대에게는 老母가 계시니 죽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安全한 곳으로 물러나 있거라.”고 일렀다.

倭軍將帥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板子에 글을 써 알리길 '戰則戰矣不戰則假道'(싸울테면 나와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

이에 宋象賢板子

'戰死易假道難' (싸우다 죽음은 쉬우나 길을 빌려줌은 어렵다)라고 써서 되 받았다.

戰況惡化되어 倭敵을 넘어 들어오고, 이제 더 以上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옷 위에 朝服을 갖추어 입고, 쪽을 하여 큰 절을 올리고 난 다음 漢城에 계신 父母님께 바치는 를 부채에 남겼다.

孤城月暈 (孤立되고 倭敵은 달무리 처럼 애워싸)

列鎭高枕 (이웃한 여러 에는 서로 도와 줄 餘力도 없습니다)

君臣義重 (나라를 지켜내야 할 君臣間는 무엇보다 무겁사오매)

父子恩輕 (父子間恩情은 외려 가볍습니다)

그리고 나서 밀려오는 적을 맞아 奮鬪하다가 敵兵銃彈壯烈하게 戰死했다.

東國戰亂史에는 끝가지 싸우다가 戰死한 그의 忠節敢鬪精神倭長 히라요시(平義智)感動하여 그의 屍身東門 밖에 葬事지내고 忠節 宋象賢之墓라는 碑銘과 함께 를 지어 바치고 葬禮式을 지내 주었다고 한다.

諡號忠烈公이다.

 

 

52. 군자이편(君子而騙)

君子는 점잖은 사람이기에 속기 쉽다는 말로, 世上 物情을 모르기 때문에 속는다는 뜻이다. 卽 純粹하기에 남에게 利用 當하는 사람을 안타깝게 여겨 同情하는 말이다.

 

* 英祖實錄 國朝人物考.

朝鮮 第19代 肅宗 趙泰采 (1660~1722)二憂堂이었으며, 右議政을 지냈다.

그가 夫人 沈氏를 잃고 얼마 안 된 어느 날, 下級職胥吏 勤務時間에 늦게 出勤하여 로 볼기를 때리려 하자 울면서 呼訴했다.

小人은 잘못을 모르는 바 아니오나 事情 말씀이나 드리고 을 받아도 받겠습니다. 小人喪妻를 하여 어린 것 셋을 데리고 있사온데 큰 놈이 다섯 살, 다음이 세 살, 끝이 딸년으로 난 지 여섯 달 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 혼자 아비 어미 役割을 하며 키우고 있사온데, 오늘 아침 어린 것이 울고 보채어 이웃집 아주머니께 젖을 좀 먹여 달라고 付託하고 나니 나머지 두 놈이 또 배고프다 울기에 죽을 끓여 먹여 주고 오느라 이렇게 되었사오니 그저 죽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趙 政丞은 눈물을 지으며 同情했다.

處地叮嚀 나와 같구나.”

그런데 나중에 事實을 알고 보니 그 下級 胥吏行爲는 모두 매맞는 것을 謨 免하기 한 거짓말이었다. 上官呼訴하여 當場狀況謀免하고자 했던 것이다.

趙泰采 政丞老論의 네 大臣 中 한 사람으로 그 影響力이 대단했지만 天性이 워낙 착해서 이처럼 下級職 胥吏에게도 속을 程度였다. 그는 나중에 少論勢力이 밀리자 辭職하고 官職에서 물러났으나 少論使嗾를 받은 睦虎龍告變으로 珍島流配되었다가 賜死되었다. 著書二憂堂集이 있다.

 

 

53. 권심상수(權心常守)

權力者의 마음은 恒常 自身權力을 지키는 데에 있다. 가진 는 가진 것을 지키기 해서 애쓰고, 權力者恒常 權力志向한다는 뜻이다.

 

* 吳尙源 寓話.

動物 나라에서 호랑이 임금이 老境에 접어들자 金銀寶貨華麗하게 裝飾玉座를 더듬다가 불현 듯 自己權座를 노리는 가 있지나 않을까 하는 不安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속의 짐승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命令이 떨어지자 많은 짐승들이 다투어 달려와서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부르심을 받자옵고 遑急히 달려왔사옵니다. 무슨 吩咐라도?”

호랑이 임금은 威嚴을 갖추고 한 둘러본 다음

빠진 가 없으렷다?”

하고 물었다. 범의 얼굴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意識해서 한 말이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여우가 말했다.

범 어르신께 傳喝을 했으나 出他 中이라 아직 待令치 못했사옵니다.”

호랑이 임금은 不快한 듯 입속에서 큰 숨을 한 죽인 다음 입을 열었다.

이 그대들의 도움을 받아 權座에 오른 참으로 긴 歲月이 흘러갔다. 이 긴 歲月 동안 無限榮光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대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輔佐勞苦 때문이라는 것을 暫時라도 잊은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 老境에 접어들고 보니 하루하루 氣力衰弱해지고, 事理判斷하는 能力 또한 흐려져 예전과 같지 못하다. 그래서 생각한 끝에 보다 强力하고 聰明後繼者를 골라 이 權座를 물려주려고 한다. 들의 뜻은 어떠한가?”

暫時 後 무거운 沈默을 깨고 여우가 操心스럽게 입을 열었다.

임금님의 그 깊으신 뜻을 모르는 바 아니오나 부디 그 決心을 거두심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예로부터 임금은 제 스스로를 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百姓해 있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어찌 自己老衰함을 탓하여 나라와 百姓을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오니 그 뜻을 거두심이 옳을까 하옵니다.”

호랑이 임금은 滿足스러운 웃음을 머금으며 늙은 山羊에게 視線을 돌렸다.

은 늘 그대의 깊은 經綸을 높이 사오고 있다. 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제 뜻도 같은 줄로 아뢰옵니다.”

호랑이 임금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늙은 山羊은 호랑이 임금이 여우의 말을 듣는 瞬間 입가에 흘린 웃음의 뜻을 모를 리 없었다.

에는 늦게 當到범을 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은 늘 마음속 깊이 그대를 後繼者찍어 왔었다. ,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惶悚하옵니다.”

범은 一旦 머리를 조아리고 나서 堂堂하게 말했다.

예로부터 어진 와 어리석은 差異自己를 알고 모르는 데 있다 하였습니다. 榮光이 다하기 에 자리를 물러나면 길이 榮光을 누릴 수 있으나, 榮光이 다한 然後에 물러나면 남는 것은 悔悟侮蔑뿐이라 하였습니다.”

호랑이 임금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모인 모두가 의 뜻을 거두도록 挽留하는데 그대만이 그렇지 않으니 남은 길은 오직 하나뿐이로구나!”

말이 떨어지자마자 호랑이 임금은 범을 한 입에 물어 쓰러뜨리고 나서 恨嘆하듯 말했다.

의 뜻은 그렇지 않았으나 어찌할 道理가 없었다. 只今 朕은 이보다 더 슬플 수가 없구나! 바라건대 앞으로는 이 또다시 이런 슬픈 일을 겪지 않도록 하라.”

 

 

54. 금두려신(金頭麗臣)

으로 된 머리의 高麗 臣下라는 말로, 高麗開國功臣 申崇謙主君 王建하여 목이 잘린 故事에서 由來했다. 목숨을 바칠 程度忠節意味한다.

 

* 韓國五千年野史

高麗忠臣 申崇謙(?~927)元來 이름은 能山이었으며, 諡號壯節平山 申氏始祖이다.

918, 泰封弓裔悖惡無道를 일삼자 申崇謙, 洪儒, 卜智謙, 裵玄慶 等王建의 집에 모여서 弓裔逐出하고 王建으로 推戴하자는 決議를 했다.

申崇謙王建에게 말했다.

暴君廢位大勢이자 天命입니다. 그러니 나라의 나라의 와 같은 弓裔 王廢位하고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王建周圍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忠義信條로 삼고 살아온 사람이오, 그런데 비록 亂暴하다 하더라도 臣下道理로 어찌 두 마음을 가지겠소?”

그러자 左右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했다.

卽位한 지 몇 만에 妻子息殺害하고, 疲弊百姓들의 怨聲 또한 하늘을 찌르는데 將軍께서 이를 外面하면 참으로 無責任한 일이 됩니다. 또 하늘이 주는 을 제때에 받지 않으면 도리어 災殃을 받게 됩니다. 大勢의 좋은 氣運은 만나기 어려운 , 千載一遇機會를 놓치지 마십시오.”

모인 사람들이 이番 擧事天命임을 强辯하자 王建은 할 수 없이 許諾했다. 高麗開國 偉業은 이렇게 하여 이루어졌다.

開國完成되고 平和롭던 어느 날, 申崇謙太祖 王建을 따라 平山로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그때 하늘에 기러기 세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太祖가 말했다.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서 맞힐 수 있겠는가?”

申崇謙이 나서서 말했다.

째 기러기를 맞힐까요?”

그러자 太祖申崇謙에게 말했다.

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맞혀보시오.”

申崇謙卽時 활시위를 당기자 날아가던 세 째 기러기가 땅에 떨어졌다. 確認해 보니 果然 왼쪽 날개를 맞고 떨어져 있었다.

太祖申崇謙의 활 솜씨에 感嘆하고 近處 300下賜하였다. 그리고 子孫들이 그를 始祖로 삼도록 하고, 本貫平山으로 指定해주었다. 사람들은 그 땅을 弓位라고 불렀다.

太祖 10, 西紀 927太祖新羅 景哀王鮑石亭에서 잔치를 벌이다가 後百濟甄萱에게 殺害되었다는 말을 듣고 精騎5千 名을 거느리고 後百濟를 치고자 公山에 이르렀다. 消息甄萱夜陰을 틈타 高麗軍完全包圍했다. 事態危急해지자 申崇謙太祖에게 말했다.

제가 大王容貌와 비슷하니 大王으로 變裝하여 御車를 타고 出戰하겠습니다. 大王께서는 이 틈을 利用하여 脫出하십시오.”

그리하여 太祖 王建一般 軍卒變 裝하여 脫出하고, 申崇謙王建의 옷을 입고 出戰하여 熾烈하게 싸웠다.

甄萱申崇謙王建으로 알고 軍士를 몰아 사로잡아 놓고 보니 服裝의 것이었을 뿐 王建이 아니었다. 甄萱은 속은 것에 대해 가 났지만 한便 申崇謙行動嘉尙하게 여겨 말했다.

비록 敵將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忠誠心하구나, 죽을 줄 뻔히 알면서 死地로 뛰어들다니……, 그러나 너는 나를 속인 將帥이니 어찌하겠느냐, 나를 怨望하지 말거라.”

甄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申崇謙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甄萱이 말했다.

비록 敵將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훌륭한 人物이다. 屍身이나마 돌아가게 해주어라!”

그리하여 申崇謙의 머리를 그가 타고 있던 말에 매달아 쫓으니 말은 泰安寺로 달려가 절 앞에서 슬피 울부짖었다. 主持 스님이 놀라 나와 보니 申崇謙 將軍頭上인지라 陽地바른 곳에 安葬했다.

戰爭이 끝나고 王建自己代身하여 죽은 申崇謙尸身을 찾았으나 머리가 없음을 確認하고 으로 그 머리를 만들어 붙인 後 屍身과 함께 葬禮를 지내주었다. 그리고 寺刹 智妙寺를 세워 冥福을 빌게 하는 한便, 壯節이라는 諡號를 내려주었다. 그야말로 主人하여 목숨을 바친 爲主懸命이다.

 

 

55. 기과필화(氣過必禍)

가 지나치면 반드시 를 입는다는 말로, 趙光祖의 어머니가 남곤(南袞)의 어렸을 적 지나친 氣勢를 보고 그의 性情豫測한 데에서 由來했다. 너그럽고 穩和性品奬勵하는 意味로 쓰인다.

 

* 朝鮮名人傳 韓國人間象.

趙光祖(1482~1519)南袞 (1471~1527)은 어려서 書堂에 다닐 때부터 10如 年의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不拘하고 切親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聰明과 슬기는 스승을 늘 흐뭇하게 하였다.

그들이 科擧를 눈앞에 두고 學問熱中하고 있던 어느 날, 머리를 식히기 해 가까운 으로 山策을 나갔다. 으로 가는 길에는 예쁜 處女 아이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다. 趙光祖는 그 處女들을 보는 瞬間 空然히 가슴이 뛰고 얼굴이 上氣되었다. 마음은 괜히 부끄러우면서도 視線은 줄곧 處女들에게 쏠려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 앞으로 해야 할 工夫가 많고, 어머니 말씀대로 나라의 棟樑이 되어야 할 텐데…….”

趙光祖는 스스로 생각해도 自身理解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마음이 해선 안 되지, 將次 어쩌려고…….’

趙光祖가 마음苦生으로 뒤처져 걷는 동안 南袞은 저만치 앞서서 한눈을 팔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면서 씩씩하게 걸어갔다. 趙光祖는 걸음을 빨리 하여 南袞을 따라갔다.

亦是 南袞은 나보다 낫구나. 난 아직도 修養不足한 거야.’

집으로 돌아온 趙光祖는 어머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하였다. 아들의 말을 다 듣고 난 어머니가 말하였다.

애야. 그건 걱정할 일이 아니다. 네 나이 때에 處女들에게 關心을 갖는 것은 아주 自然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까 그건 잘못이 아니다. 네 또래의 사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생각이란다.”

어머니, 그렇지 않습니다. 저와 함께 간 南袞處女들에게 눈길 한 주지 않고 꼿꼿이 걸어갔습니다.”

, 그랬어?”

, 어머니. 南袞確實히 저와는 다릅니다.”

어머니는 한동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斷乎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늘 밤에 남의 눈에 띄지 않게 移徙를 가야겠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移徙라니요?”

아무 말 말고 조용히 이삿짐을 싸도록 해라.”

趙光祖는 갑작스런 어머니의 決定에 어리둥절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에 따라 짐을 꾸려 을 넘어 다른 마을로 移徙를 했다.

어머니, 이렇게 夜半逃走하는 理由가 무엇인지요?”

얘야, 사람은 自己 感情率直해야 한다. 예쁜 處女가 옆을 지나가면 너 같은 總角이 눈길을 주는 것은 當然理致. 그런데 南袞自己 感情을 숨기고 木石처럼 行動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것만으로도 그 아이가 얼마나 차디찬 사람인지 알 수 있겠다. 사람은 따뜻함과 너그러움이 있어야 되는 것이란다. 嚴格함과 꼿꼿함만 가지고는 너그럽고 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단다. 히 다스려야 할 때도 있지만, 너그러이 容恕하고 寬容을 베풀어야 할 때도 있어야 하는 것이란다. 앞으로 南袞은 여러 사람을 피 흘리게 할 것이니, 操心하는 것이 좋겠다. 참으로 冷酷한 사람이야.”

趙光祖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훗날, 南袞은 여러 官職을 두루 거치는 동안 實際로 칼날처럼 冷嚴政治를 했다. 그는 勳舊派先鋒에서 己卯士禍를 일으켜 執權者 趙光祖 等 新進士類肅淸, 左議政을 거쳐 領議政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晩年에는 自己의 잘못을 自責하며 를 입을까봐 自己著書를 불태우기도 했다.

 

 

56. 개감추교(豈敢墜敎)

어찌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랴.

 

* 新羅 眞平王 때에

花郞 貴山箒項(추항)은 어려서부터 함께 잘 어울렸고, 圓光法師世俗五戒의 가르침도 充實히 따랐다.

(1) 事君以忠 (忠誠~ 임금 섬김은 忠誠으로 하고)

(2) 事親以孝 (孝道 ~ 어버이 섬김은 孝道로 하고)

(3) 交友以信 (信義 ~ 벗을 信義로 사귀고)

(4) 臨戰無退 (勇猛 ~ 戰爭터에서는 물러서지 말며)

(5) 殺生有擇 (慈悲 ~ 生命을 가려서 죽여라)

 

貴山箒抗百濟侵略戰場에 나서며 勇猛信義一喝했다.

 

귀산(貴山) "내가 일찍이 가르침을 받기를 '戰爭터에서는 물러서지 말라'고 했으니, 어찌 이를 따르지 않으랴?"

 

추항(箒項) "내가 일찍이 가르침을 받기를 '벗을 信義로 사귀라'고 하였으니, 어찌 이를 따르지 않으랴?"하고, 함께 나아가 싸우다가 둘은 壯烈戰死하였다.

이 뭇 臣下를 거느리고 를 갖추어 冥福을 빌며 葬禮를 치루었다.

 

 

57. 기부기자(其父其子)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로, 朝鮮 初 武器 製造 技術者崔茂宣과 그의 아들 海山 父子에게서 由來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닮았음을 比喩하는 말이다.

 

* 世宗實錄

高麗 末, 崔茂宣(1325~1395)武器重要性을 알고 朝廷火㷁都監設置奏請하여 火藥火砲, 信砲, 火㷁 等 各種 火器를 만들어 大馬島倭船 500如 隻擊破했다. 그런데 倭軍侵入이 잦아들자 火㷁都監廢止하자는 輿論沸騰했다. 維持費가 많이 든다는 것이 理由였다.

그것은 崔茂宣猜忌하는 무리들의 謀陷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事實 大砲海戰에서 그 威力을 보였으나 實際로는 뭍에서 더 必要武器였다.

輿論에 밀린 昌王이 마침내 火㷁都監을 없애버리자 崔茂宣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歎息했다.

내 나이 이제 六十, 火藥과 함께 살아온 人生後悔스럽지는 않지만 그 技術이 여기서 끝나지 않을 까 念慮스럽구나.”

그는 火藥製造沒頭하다가 늦게서야 아내를 맞는 바람에 아들이 이제 겨우 열 살밖에 안 되었다. 그는 어린 아들에게라도 火藥製造秘密하리라 決心했다.

13927, 高麗5百年 歷史의 막을 내리고 李成桂朝鮮 王朝로 바뀌었다.

李成桂大砲威力必要性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崔茂宣에게 武器 만드는 官廳을 맡도록 했으나 그는 몸이 衰弱해졌다는 理由辭讓했다.

13953, 崔茂宣自身生命이 다했음을 느끼고 아들 海山 (1380~1443)에게 火藥 製造法火藥修鍊法火砲法冊子를 주며 當付했다.

熱心히 읽고 硏究하여 火藥 만드는 勿論이고, 내가 發明大砲보다도 더 武器를 만들어내도록 하여라. 大砲는 옮기기가 不便한 게 이니 그 改善하도록 하여라.”

그는 이 말을 遺言으로 남기고 죽었다.

그리고 5이 지난 1400, 太祖 때부터의 忠臣 權近太宗에게 아뢰었다.

將次 倭寇侵入念慮됩니다. 高麗 때에도 그들이 極盛을 부렸으나 그때는 崔茂宣大砲가 있어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하오니 그 아들에게 아버지의 뜻을 잇게 하여 大砲와 같은 威力 있는 武器生産하도록 御命을 내리시옵소서.”

權近推薦으로 海山20의 나이로 무기를 다루는 軍器監官吏가 되었다. 海山은 아버지 이름을 헛되지 않게 하기 해 뼈를 깎는 努力을 기울였다. 보람이 있어 1407, 比較해 두爆發力火藥을 만들어내는 데 成功하였으며, 技術者만도 33이나 길러 내었다.

海山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1409에는 四方防牌로 막은 바퀴 달린 수레式 大砲, 卽 火車發明했다. 그로써 敵陣 속으로 들어가 攻擊할 수가 있어 破壞力이 훨씬 높아졌다.

火車 德分에 오랑캐와 倭寇를 물리치자 사람들은 그에 稱讚을 아끼지 않았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먼(其父其子).”

2, 崔海山碗口라는 새로운 大砲發明했다. 밥그릇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크기는 , , 의 세 種類였는데, 威力이 대단해서 집채나 城門單番에 날아갈 程度였다. 이런 崔海山努力認定을 받아 太宗은 그에게 4品 軍器監丞職責을 내렸다.

實際 그의 은 엄청났다. 그가 처음 官職에 몸을 담았을 때는 火藥이 겨우 44밖에 없었으나 나중에는 15百 倍가 넘는 69百 斤으로 늘어났다. 大砲2百 門이 채 안 되었으나 그가 軍器監으로 일한 뒤에는 135百 門으로 增加되었다. 砲兵1萬 名으로 불어났으며, 어마어마하게 큰 武器庫建立되었다.

崔海山이 죽은 뒤 1471에는 그가 生時에 그렇게 바라던 火藥製造工場火藥監造廳이 세워졌으며, 鄭以吾라는 사람은 火藥古記라는 글을 지어 崔茂宣歷史에 길이 남도록 하였다.

 

 

58. 기사와사(起死臥死)

서서 죽으나 누워서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러나저러나 結果는 한가지라는 듯으로 쓰인다.

 

* 古今淸談.

朝鮮 第17代 孝宗 武人 出身 右議政 李浣(1602~1674)本貫慶州이고, 梅竹軒이며, 諡號貞翼公이다.

사냥을 좋아하였던 그가 하루는 노루를 쫓다가 날이 저물어 깊은 속을 헤매게 되었다. 그런데 山中大闕 같은 큰 집이 있어 大門을 두드렸다. 그러자 갓 스물이 될락 말락한 아름다운 女人이 나와서 말했다.

여기는 손님이 머물 곳이 못 되니 그냥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猛獸들이 득실거리는 이 깊은 山中에 날은 저물고 人家도 없는데 어디로 가겠소? 아무데라도 좋으니 하룻밤 쉬어가게 해주시오.”

잠자리를 드리지 않으려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손님께서 여기에 머무시면 반드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들어오시지요.”

좋습니다. 나가서 猛獸의 밥이 되나 집 안에서 죽으나 마찬가지이니까요.”

이렇게 해서 그는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女人이 홀로 깊은 山中에 있게 된 事緣을 물었다.

이곳은 도둑의 巢窟입니다. 저는 本來 兩家의 딸이었으나 여기에 잡혀 와서 벌써 한 해를 넘겼습니다. 비록 緋緞으로 몸을 감고 구슬로 致裝했으나 監獄살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저의 懇切所願은 하루빨리 이곳에서 벗어나 좋은 사람을 만나 平生便安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마친 女人은 밥을 짓고, 도둑들이 사냥해온 고기로 飯饌을 장만하여 술과 함께 을 차려 왔다. 李浣은 배부르게 먹고 거나하게 하여 女人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酬酌을 벌였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닌가 싶소, 貞節을 지켜 몸이 깨끗하다 하더라도 누가 믿어 주겠소? 人命在天이라 했으니 生死는 하늘에 맡겨 두고 人緣이나 맺어 봅시다.”

李浣女人을 꼬여 한바탕 뜨거운 雲雨之情을 나누었다.

그때 뜰에서 하는 소리가 들렸다. 女人은 얼굴빛이 死色이 되어 재촉했다.

큰일 났습니다. 도둑의 우두머리가 왔습니다.”

그러나 李浣沈着하게 말했다.

이제 當身이나 나는 일어나도 죽고, 누워 있어도 죽을 거요. 그냥 이대로 있도록 합시다.”

이윽고 도둑의 우두머리가 으로 들어왔다.

웬 놈이 히 이곳에 들어왔느냐?”

李浣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氣色 없이 천천히 말했다.

노루를 쫓다가 길을 잃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이다.”

그러면 行廊에나 머물 것이지 히 남의 有夫女하다니 그러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사람이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는 이오. 무엇을 두려워하겠소!”

도둑은 굵은 새끼로 그를 묶어 들보에 매달아 놓고, 女人으로 하여금 멧돼지를 삶고 술을 가져오게 했다. 도둑은 고기를 썰어 우물우물 씹으며 술 한 동이를 다 마셨다. 묶여 있던 李浣이 말했다.

여보시오. 나도 한 합시다. 아무리 人心野薄하기로서니 어찌 사내가 옆에 사람을 두고 혼자만 술을 마신단 말이요. 於此彼 죽을 목숨인데 나도 고기 맛이나 보고 죽읍시다.”

참으로 큰 그릇이로다.”

도둑은 捕縛한 것을 풀어 주면서 말했다. “이제 비로소 大丈夫를 만났습니다. 將次 나라의 큰 干城이 될 人才를 내 어찌 죽이겠습니까? 우리 같이 한 합시다.”

도둑은 다시 술을 차려오게 하여 서로 하게 마셨다.

女人은 이제까지는 나의 아내였으나 그대와 이미 했으니 只今부터는 그대가 가지시오.”

도둑은 李浣에게 兄弟를 맺자고 하며 말했다.

내가 뒷날 어려움을 하여 내 목숨이 그대의 손에 달리게 될 때가 있을 것이오. 그때 오늘의 情誼를 잊지 않는다면 고맙겠소.”

李浣은 그의 말대로 뒷날 科擧에서 武科及第하여 縣令, 郡守, 府使 等을 거쳐 平安道 兵馬節都使에 올랐다. 그리고 1636에는 丙子胡亂이 일어나자 金自點을 도와 正方山城 싸움에서 크게 勝利했다. 孝宗宋時烈北伐計劃하자 新武器 製造, 城廓 改修 新築 等 戰爭準備完璧하게 해냈다. 그러나 孝宗의 갑작스런 別世霧散되고 말았다.

그는 그 後 守禦使, 捕盜大長 等을 거쳐 右議政에까지 올랐다.

그는 보기 드물게 文武한 훌륭한 人物이었다.

그가 捕盜大長 時節 어느 날, 큰 도둑을 잡아 處刑하려다가 仔細히 보니 바로 옛날 兄弟를 맺었던 그 도둑이었다.

李浣孝宗에게 도둑과의 지난날의 이야기를 말씀 드리고, 容恕케 하여 人才登用했다.

도둑은 武科及第하여 을 지키는 部將이 되었다.

 

 

59. 기패기마(碁敗寄馬)

바둑에 져서 말을 맡긴다는 말로, 어떤 目的을 위하여 싸움이나 競爭에서 일부러 져주는 境遇를 이른다. 作戰上 後退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다.

 

바둑이 언제 만들어 졌는지 確實하게 하는 文獻은 없어도 中國 古代부터 存在했다는 記錄은 많다. 임금이 아들 丹朱, 임금이 아들 商均을 가르치기 해 바둑을 利用했다고 한다.

바둑은 두는 것 못지않게 觀戰하는 재미도 넘쳐 神仙들의 對局을 구경하던 나무꾼이 도낏자루 썩는 줄도 모르고 빠져있다 精神 차려보니 아득히 歲月이 지났더라는 이야기도 한다.

 

* 朝鮮五百年奇譚

德源君 (本名李曙.1449~1498)世祖의 아들로 成宗 宗室糾察先王 祭享所管理했다. 그는 性格豪宕하였으며 雜技 中에 바둑 두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實力도 뛰어나서 周圍에는 아무도 그를 相對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軍卒이 찾아와서 아뢰었다.

小人鄕軍이온데 이을 들기 漢陽에 왔습니다. 오래전부터 大君媽媽께서 바둑을 잘 두신다는 말을 들어온 터라 한 가르쳐주십사 하고 이렇게 찾아 뵈었습니다.”

알겠다. 實力이 어느 程度인지 모르지만 한 두어 보자꾸나!”

德源君은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바둑판 앞에 마주 앉았다.

愛碁家元來 서로 敵手만 되면 相對 身分貴賤, 男女老少를 가리지 않는다.

軍卒이 입을 열었다.

바둑은 그냥 두면 재미가 없고 내기 바둑이 재미있는 줄 아옵니다. 萬若 제가 이기면 쌀 한 가마니를 주시고, 小人이 지면 제가 몰고 온 말을 드리면 어떠할지요?”

좋다. 두려움을 모르는 로구나. 어서 바둑알을 놓거라.”

그러나 처음에는 팽팽하던 바둑이 結果德源君僅少差異勝利하였다.

제가 졌습니다. 約束한 대로 제 말을 드리고 가겠습니다.”

그럴 必要 없네. 자네 德分에 재미있게 時間을 보냈으니 말은 그냥 가져 가도록 하게나.”

아닙니다. 約束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軍卒은 말을 두고 돌아가서 을 서고, 석 달 뒤에 다시 德源君을 찾았다. 그리고 이에도 말을 건 내기 바둑을 두자고 提議하였다. 德源君은 반가워하며 마주 앉았다.

그동안 바둑 實力은 좀 늘었느냐?”

. 나름대로 熱心히 했습니다.”

德源君初盤부터 그의 實力唐慌했다.

實力普通이 아니로구나. 지난과는 혀 다른 걸.’

德源君은 끝내 그의 相對가 되지 못했다. 一方的敗北德源君約束대로 그의 말을 되돌려주면서 말했다.

너의 솜씨가 참으로 놀랍다. 그런데 지난에는 어찌해서 나에게 졌느냐?”

. 罪悚하오나 그래야만 했던 事情이 있었습니다. 漢陽에 말을 타고 오긴 했지만 먹이고 재울 方法이 없어서 大君媽媽暫時 맡겨 둘 料量으로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끝나서 다시 찾아가는 것입니다. 惶恐합니다.”

德源君은 그 軍卒의 남다른 機智에 껄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德源君申叔舟와 더불어 國事를 돌보기도 했으며, 成宗 2에는 全北 고창(高敞)에 있는 禪雲寺重建하도록 하여 幸浩禪師에게 發願文直接 초하기도 했다.

德源君聖賢學問專修하여 儒宗이라는 稱頌을 받기도 했다.

 

 

60. 기호지세(騎虎之勢)

호랑이를 탄 氣勢라는 뜻. 卽 已往 始作했으면 가는 데까지 갈 수밖에 없음을 이르는 말. 사람이 범의 등에 탔다면 내릴 수는 없고, 가는 데까지 가 본다는 뜻이다.

 

* 高麗史節要 古今淸談.

高麗 太祖 王建(877~943)開城 附近 禮成江 近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王隆이었으며 地方 沙湌 豪族으로 德望이 높았다. 896年 弓裔勢力擴張一路에 있자 王隆松岳弓裔 隸下로 들어가 錦城太守가 되었다.

後 王建成長하여 20에 이르자 廣州忠州, 그리고 唐城 等攻略하여 成功하자 阿湌이 되었다.

王建禮成江에서 訓練水軍을 거느리고 錦城 (羅州)陷落시키고 10고을을 平定했다.

王建이 어느 날 貞州를 지나다가 목이 말라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는 女人에게 물을 했다. 그러자 女人은 물을 길은 다음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주었다. 하게 마시지 말라는 配慮였다. 智慧가 마음에 든 王建은 그날 밤 그의 집에 들어가 女人父母로부터 許諾을 받은 다음 그正式으로 夫婦을 맺었다. 이가 바로 土豪 天弓의 딸 柳氏夫人이었다.

當時 王建弓裔 밑에서 將軍으로 있을 때였다. 王建戰場에서 쉴 새 없이 싸우다가 어느 날 문득 그消息搜所聞하니 절에 들어가 守節하고 있다고 했다. 王建은 먼저 家庭安定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必要하다는 것을 느끼고 그를 불러 올렸다. 그리고 開國을 이룬 에는 그王后로 맞으니 神惠王后가 되었다.

그 무렵, 弓裔亂暴行動으로 失政을 거듭하여 君王으로서 資質疑心받게 되었다. 그래서 部下 將帥들이 王建으로 推戴하려 하자 王建決定을 못 내리고 망설였다. 이를 눈치 챈 柳氏 夫人男便에게 狀況緊迫하게 돌아가는 騎虎之勢이니 將帥들의 말대로 推戴受諾하라고 激勵했다. 이로써 王建洪儒, 裵玄慶, 申崇謙, 卜智謙 等과 함께 高麗를 세울 수 있었다.

나라 皇帝 楊堅夫人 獨孤氏王建夫人 柳氏怜悧하여 事勢 判斷內助를 잘한 王后이다.

 

 

 

 

산과바다 이계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