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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한자성어(漢字成語)**/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ㄱ–5)

by 산산바다 2026. 2. 21.

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글 목록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5)

 

 

41. 교왕지말(驕王之末)

교만(驕慢)의 끝이라는 말로, 泰封國 王 궁예(弓裔)故事에서 由來했다. 높은 地位에 올랐을 때 을 베풀지 않고 驕慢하면 그 末路悲慘해진다는 뜻으로 쓰인다.

 

* 三國史記.

애꾸눈 (弓裔.?~918)出生해서는 明確記錄이 없어 確實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金氏新羅 第47代 憲安王後宮한테서 태어난 庶子로 알려져 있다. (48代 景文王子孫이라는 도 있다.)

當時新羅政治混亂하여 곳곳에서 盜賊이 일어났고, 朝廷에서 멀리 떨어진 地方에서는 至嚴命令도 먹혀들지 않을 程度로 어지러웠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權力을 가진 사람들이 그 힘을 利用陰謀가 판을 치게 된다. 弓裔 亦是 王家權力 다툼이 있을 때 태어났다. 갓 태어난 弓裔生命에 위협(威脅)이 닥쳐오자 後宮안에서 담 너머에 있는 乳母에게 아기를 던졌는데, 그때 乳母의 손가락에 눈을 찔려 애꾸눈이 되었다고 한다. 다쳐 피를 흘리는 弓裔世達寺라는 절에 맡겨 중이 되었는데 法名善宗이다.

어느 날, 까마귀 한 마리가 弓裔 앞에 가 씌어져 있는 符籍을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弓裔는 그것을 보고 언제인가는 自身이 되리라고 期待하게 되었다. , 靑年이 된 그는 절에서 나와 盜賊의 우두머리인 기훤(箕萱)部下로 들어갔다. 그러나 箕萱과 마음이 맞지 않아 그를 버리고 이번에는 北原盜賊 梁吉部下가 되어 을 세웠다. 梁吉弓裔信任하여 軍士까지 맡기며 하게 해 주었다.

弓裔는 그 힘을 빌어 溟州鐵原을 함락(陷落)시키고, 富者들로부터 財物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어진 將軍이라는 稱頌과 함께 民心을 모았다.

그를 따르는 軍士數爻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는 싸울 때마다 이겨서 江原道의 여러 고을을 차지했는데, 이 무렵 松嶽 出身 王建도 그의 部下로 들어왔다. 王建勢力까지 합친 弓裔都邑을 송악(松嶽)으로 하고 王建太守로 삼았다.

梁吉部下弓裔가 크게 成功하자 自己地位危殆로워짐을 느껴 먼저 弓裔를 쳤다. 궁예(弓裔)王建으로 하여금 反擊하게 하여 梁吉을 죽이고, 新羅 孝恭王 5에는 正式으로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王位에 올라 國號後高句麗라 했다. 그리고 王建에게 金城羅州를 치게 하여 後百濟의 견훤(甄萱)을 견제(牽制)했다.

孝恭王 8에는 國號를 마진(摩震)이라 改稱하고 年號武泰로 바꾼 뒤 首都鐵原으로 옮겼다. 그리고 中央官廳으로 廣評省을 두어 나랏일을 討議케 하는 한편, 各 地方官廳을 둠으로써 나라의 基礎를 튼튼하게 다졌다. 宮闕樓臺 等豪華롭게 꾸며 自身位相을 높였다.

그리고 繼續해서 平壤까지 占領하여 新羅의 북쪽 領土를 거의 다 차지함으로써 그 勢力新羅를 앞지르게 되었다.

그러자 新羅의 많은 將帥學者들이 投降하였으나 新羅하여 怨恨을 품고 있던 그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죽여 버렸다. 그의 殘惡本性이 이때부터 서서히 드러나기 始作한 것이다.

弓裔911國號태봉(泰封)이라 고치고, 年號水德萬歲라 했다. 그리고 自身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하고, 맏아들은 靑光菩薩, 막내 아들은 神光菩薩이라고 불렀다. 또 스스로는 머리에 金冠을 쓰고, 方袍(중의 옷)를 걸치고 다녔다. 그는 佛經 20을 만들어 僧侶 釋聰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다. 釋聰이것은 佛經이 아니라 邪惡하고 怪常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直言을 했다. 弓裔는 몹시 하여 釋聰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 이때부터 百姓들의 마음은 次次 弓裔에게서 멀어져 갔다.

弓裔王妃가 그의 亂暴行動念慮하여 平常心을 찾으라고 懇曲하였다. 가 난 弓裔王妃에게 말했다.

彌勒佛을 가르치려 하다니……, 너 요즘 다른 사내와 가까이 지내고 있지? 나는 彌勒佛이야, 彌勒佛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觀心 能力이 있어서 相對方의 눈동자만 보아도 속마음을 훤히 알 수가 있어.”

그러고는 끔찍하게 王妃를 인두로 지져대자 아들 靑光菩薩神光菩薩이 말렸다. 가 난 弓裔는 그 자리에서 철퇴(鐵槌)로 두 아들을 때려 죽여 버렸다. 臣下들도 걸핏하면 트집을 잡아 죽였다.

그러자 將帥 申崇謙, 洪儒, 卜智謙, 裵玄慶 等이 그를 逐出하고 王建으로 推戴하는 反亂을 일으켰다. 弓裔는 몰래 달아나다가 平康에서 百姓들에게 붙잡혀 殺害되고 말았다.

이로써 泰封國28이라는 짧은 歷史로 끝나고 高麗가 열리게 되었다.

 

 

42. 교체중매(郊彘仲媒)

산돼지<:돼지체> 仲媒를 하다. 高句麗 山上王에게서 由來한 말로, 뜻하지 않은 일이나 事物契機가 되어 일이 잘 이루어짐을 뜻한다.

 

* 三國史記.

高句麗8代 新大王(在位 165~179)4兄弟를 두었다. 첫째 男武(故國川王), 둘째가 發歧, 셋째가 延優, 넷째가 罽須(계수) 4兄弟였다.

故國川王 男武가 죽자 後嗣가 없었던 皇后가 이를 숨기고 둘째 媤同生 發歧를 찾아갔다.

大王께서 王子가 없으니 王位繼承하십시오.”

그러자 發歧兄嫂王后自身試驗하는 것으로 알고, 嚴然님이 계신데 輕率行動을 삼가라며 斷乎히 말했다. 王后는 부끄러웠으나 大權을 이어야 했기 때문에 셋째 媤同生延優를 찾아갔다. 延優衣冠整齊하고 兄嫂王后鄭重히 맞았다.

제가 찾아 온 까닭은 大王昇遐하여 發歧 媤同生을 찾아갔으나 나를 疑心하기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延優王后를 맞아 을 차리는데 고기를 썰다가 일부러 손가락을 베었다. 피가 흐르자 王后가 치마끈을 찢어 傷處를 싸매 주었다. 宮闕로 돌아온 王后故國川王 屍身해 말했다.

延優王位繼承하라 하셨죠?”

거짓말로 던진 말이지만 이 말이 公式化되어 延優王位繼承하게 되었다는 消息을 들은 兄 發歧軍兵을 이끌고 王宮包圍하였다. 宮門을 굳게 닫은 延優3을 버텼는데 發歧가 스스로 물러서더니 遼東 땅으로 가 公孫康에게 同生 延優處斷하겠다며 軍士 3要請하였다.

公孫康은 그렇지 않아도 눈에 가시같은 高句麗를 치려고 機會만 보고 있던 참이라 잘 되었다 싶어 軍士 3을 내주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괘씸한 아우를 무찌르고 王位를 탈환(奪還)하시오.”

山上王에 오른 延優兄 發歧3軍士를 앞세워 쳐들어 오자 아우 계수(罽須)에게 軍士를 주어 맞서도록 했다. 막내 아우 罽須兄 發歧해 말했다.

延優 兄王位辭讓하지 않고 잇는 것은 義理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라를 치려고 遼東軍士를 빌려 高句麗를 쳐들어 왔으니 죽은 뒤에 무슨 面目으로 先祖들을 하겠습니까?”

 

發歧罽須의 이 말을 듣고 부끄럽고 面目이 없어 裴川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宮闕平定을 되찾자 山上王은 잔치를 열고 同生 계수(罽須)하였다. 그리고 禮優를 다하여 發歧 兄葬事 지내고 온 罽須에게 兄弟友宜를 다한 것에 稱讚을 아끼지 않았다.

葬禮 後 正式으로 王位에 오른 山上王兄嫂 于氏王后로 맞이했다.

山上王 7(203) 3은 아이 갖기를 懇切祈禱했다. 그날 밤 꿈을 꾸게 되었는데 흰옷을 입은 祖上이 나타나더니 말했다.

延優, 네가 小后妾으로 하여금 아들 낳게 될 것이니라.”

꿈을 꾼 山上王은 하늘이 준 機會라고 생각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山上王 12(208) 이 사냥을 나가게 되었는데 산돼지를 보고 시위를 당겼으나 맞지 않고 달아났다.

그러자 臣下들이 산돼지를 쫓아가 酒桶村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때 시끄러운 소리에 한 處女가 뛰쳐나오더니 달아나는 산돼지를 낚아채 쫓아오던 사람에게 주었다.

壯丁이 몰아도 잡지 못하던 것을 處女가 잡아 주자 臣下들은 疑訝해 하면서 앞으로 가지고 갔다.

누가 잡았느냐?”

酒桶村處女가 잡아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山上王이 그 집으로 가 人事를 받고 전날의 꿈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山上王酒桶村에 뜻하지도 않았던 小后를 두게 되었다.

酒桶村小后를 두었다는 消息을 들은 王后軍士를 보내 그녀를 죽이려 했다.

그러자 小后男裝을 하고 산속으로 달아났으나, 얼마 못 가 잡히고 말았다.

들이 칼을 빼 그녀를 죽이려 하자 말했다.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는데 이것이 大王命令이냐? 그렇지 않으면 王后命令이냐?”

王后命令입니다.”

그럼 듣거라. 내 뱃속에는 大王이 남겨 준 새 生命이 있다. 내 죽음은 곧 王子의 죽음이니 그래도 죽이겠느냐?”

이 말을 듣고 大闕로 돌아가 王后에게 하자 펄펄 뛸 뿐 어찌하지 못했다.

山上王이 그 이야기를 듣고 酒桶村을 찾았다. 그리고 그 해 9에 아이를 낳으니 산돼지로 말미암아 낳은 아기이므로 이름을 들교()에 돼지체()를 써 교체(郊彘)’라 하고 그녀를 으로 불러 小后로 삼았다. 西紀 218年 山上王昇遐하자 郊彘王位에 오르니 그가 바로 11代 東川王이다.

 

 

43. 구관불탁(求官不擢)

벼슬을 억지로 하는 사람은 뽑지 않는다는 뜻이다. 벼슬을 私事로이 請託하는 사람에게는 주려던 벼슬도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 朝鮮人物考 國朝名臣錄

朝鮮 明宗 ,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李後白(1520~1578)本貫延安이고, 靑蓮으로 人事管理公平無私하게 했던 淸白吏였다.

그에게 친척(親戚) 한 사람이 찾아와서 벼슬 한 자리를 은근(慇懃)請託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미 官吏採用하려고 作成해둔 名單에 올려져 있었다. 李後白은 그 名簿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보시게! 나는 그대의 이름을 이렇게 적어 두고, 將次 順序대로 採用하고자 했는데 그대가 염치(廉恥)없이 벼슬을 달라는 말을 하니 萬若 그대에게 벼슬을 먼저 준다면 이는 公平道理가 아니지 않은가. 아깝게 되었네, 그대가 벼슬을 請託하지 아니했다면 벼슬을 하게 되었을 텐데…….” 벼슬자리를 付託親戚은 부끄러워하면서 돌아갔다.

그는 사람을 官職任命할 때는 여러 사람에게 그 사람의 人品能力이 어떤지 먼저 알아보고 萬若 合當하지 못하다는 輿論이면 斷乎하게 排除했다.

靑蓮特別明宗信任을 얻어 父母를 모시면서 工夫하라는 賜暇讀書 (나라에서 特別休暇를 주어 工夫하도록 配慮하는 制度) 特惠를 받게 되었으며, 後 都承旨를 거쳐 吏曹參判大提學歷任했다.

그는 咸安文會書院祭享되었고, 諡號文靑公이다

 

 

44. 구면수절(垢面守節)

때가 낀 얼굴로 守節 하다. 일부러 몸을 더럽게 꾸며 뭇 男子들의 接近함으로써 貞節을 지킨 한 妓生에게서 由來한 말로 節槪가 굳은 女人을 이르는 말이다.

 

* 國朝人物志.

朝鮮 英祖 左議政 趙文命 (1680~1732)本貫이 풍양(豊壤)이고 는 학암(鶴巖), 諡號文忠으로 風采人物이 뛰어났었다. 그가 나라에 使臣으로 가던 길에 安州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날 밤, 그 고을의 과 함께 百祥樓에서 술을 마시는데 그 자리에 겨우 열두 살인 어린 妓生이 있었다. 그는 그 妓生을 귀여워했고, 妓生도 그를 따랐다. 宴會가 끝나고 두 사람이 휘영청 밝은 달밤에 따로 만나서 情談을 나누던 에 그가 손가락으로 기둥에 成熟女體를 그려 보여주면서 말했다.

네가 너무 어린 것이 안타깝구나, 네 몸이 이렇게만 되었다면 우리가 오늘 밤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을 텐데…….”

그리고 膳物로 부채 하나를 주었다.

몇 해 , 그가 또다시 安州를 지나다가 百祥樓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그날 밤,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와 부채를 주면서 말했다.

小人의 누이동생이 이 부채를 大監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부채를 보니 낯익은 부채인데 가 한 쓰여 있었다.

 

安陵一別黯消魂(안능일별암소혼) : 安州 한 번 떠난 뒤엔 消息이 없어 서러워라.

忍忘當時畵柱恩(인망당시화주은) : 기둥에 그렸던 그림 어이 차마 잊으리오.

摩挲篋裏扇猶在(마사협이선유재) : 고운 箱子 속에 부채를 간직하고

半是秋風半淚痕(반시추풍반루흔) : 가을바람이 지날 때마다 눈물을 짓네.

 

그는 몇 해 의 귀여웠던 어린 妓生을 생각해 내고 嘉尙하여 安否를 물었다.

, 小人의 누이동생은 이 부채를 받은 後 永遠守節할 것을 盟誓하고, 오직 를 짓고 읽는 것을 으로 삼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節槪가 어찌나 한지 官家指示에도 꺾이지 않고 只今까지 處女로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히 그녀를 불러오게 했다. 그런데 몇 만에 만난 그녀의 美貌는 그대로 잃지 않고 있었으나, 머리에 빗질도 아니하고 때 묻은 얼굴로 襤褸한 차림이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그녀가 말했다.

妓生의 몸이다 보니 뭇 男丁네들이 업신여겨 넘보는지라 貞節을 지키기 해 일부러 이렇게 더럽게 하고 지냈습니다.”

참으로 哀切하고도 感動的對答이었다.

그는 그녀와 激情의 밤을 지내고, 그녀를 데리고 돌아가서 一生幸福하게 偕老했다.

 

 

45. 구수회의(鳩首會議)

비둘기들이 머리를 맞대고 會議 하다. 여러 사람이 모여 진지(眞摯)하게 議論하는 것을 이른다.

 

* 故事成語 大辭典.

비둘기 구()는 새 鳥字와 아홉 九字結合해서 만들어진 글. 가 붙은 까닭은 비둘기들이 머리를 맞대고 구구거리면서 울기 때문에 그 을 따온 것으로 象形文字이다.

비둘기는 여러 마리가 떼를 지어 사는 習性이 있다. 비슷한 말 鳩合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은다는 糾合의 뜻으로도 쓰인다.

비둘기는 그렇게 떼 지어 살면서도 서로 다투거나 무리지어 먹이를 독차지하는 이 없다. 그래서 平和象徵하고 원앙(鴛鴦)과 함께 금슬(琴瑟) 좋은 夫婦比喩하기도 한다.

鳩民이라는 말은 中國 古典 春秋左典에 나오는데 이는 百姓들이 비둘기처럼 便安하게 모여 사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서로 돕고 아끼는 좋은 뜻으로 쓰이지만 鳩酒하면 毒酒를 가리키기도 한다.

비둘기는 모이를 쪼아 먹을 때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한 알씩 콕콕 쪼아 먹는다. 이것을 멀리서 보면 마치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처럼 보여 사람들이 鳩首會議란 말을 붙여 使用하게 된 것이다.

비둘기는 서로 싸우지 않아 友情이나 共存을 뜻하기도 하지만 암수의 사이가 좋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렇지만 이 새는 둥지를 짓지 못하고 다른 새가 지어 놓은 둥지에 들어가 알을 낳는다. 이런 비둘기의 習性을 따서 남의 집에 들어가 살면서 行勢하는 것을 구거작소(鳩居鵲巢 비둘기가 까치 둥지에서 삶)라 하기도 한다. 그런데 自己 집을 말할 때도 謙遜한 뜻으로 鳩居表現하기도 하는데 이는 널리 쓰는 말은 아니다. 허나 윗사람에게 謙遜을 나타낼 때 비둘기 집처럼 누추(陋醜)하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46. 九容

아홉 얼굴, 卽 心身 修養必要한 아홉 가지 態度와 몸가짐을 일컫는 말이다. 身言書判과 비슷한 뜻이다.

 

* 擊蒙要訣 持身章.

栗谷 李珥(1536~1584)가 쓴 擊蒙要訣 持身章에 나오는 九容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 等의 아홉 가지를 말한다. 이는 君子가 몸과 마음을 修養하는 方法을 가리키는 말이다.

 

足容重 ~ 걸을 때에는 발걸음을 무겁게 해서 輕妄스럽게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手容恭 ~ 손은 恭遜하게 두어 怠慢하고 게으른 느낌을 주지 않아야 한다.

目容端 ~ 눈의 움직임을 端正하게 해 곁눈질하지 않아야 한다.

口容止 ~ 입은 굳게 다물어 言行愼重하게 해야 한다.

聲容靜 ~ 재채기나 기침을 삼가서 周邊을 고요하게 造成해야 한다.

頭容直 ~ 머리는 곧게 하여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해야 한다.

氣容肅 ~ 숨소리를 점잖고 嚴肅하며 맑게 해야 한다.

立容德 ~ 서 있을 때의 姿勢中心을 똑바로 잡고 의젓하게 하면서 이 있어야 한다.

色容莊 ~ 表情은 씩씩하고 謹嚴하되 仁慈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라고 했다.

 

1577(宣祖10) 學問始作하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10으로 編纂했으며, 各 章內容은 다음과 같다.

 

1(立志) ~ 學問에 뜻을 둔 사람은 聖人이 되기를 目標로 하여 물러서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

2(革舊習) ~ 學問成就하기 해서는 行動을 게을리 하지 말며,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模倣하지 말고, 安逸한 것에 얽매이지 말 것 等 具體的 條項 8를 들고 있다.

3(持身) ~ 몸을 바르게 지키는 方道提示하여 뜻을 어지럽히지 말고 學問基礎를 마련하라고 하였다.

4(讀書) ~ 讀書에 들어가기 窮理前提가 되어야 하며, 端正姿勢로 깊이 精讀할 것을 가르치고, 讀書順序提示하였다.

5(事親. 어버이를 섬김) ~ 父母님 섬기기를 비롯하여 父母의 뜻이 義理에 어긋날 때에는 子息이 부드럽게 아뢰어 뜻을 바꾸게 하라는 內容이 실려 있다.

6돌아가신 분에 喪制

7돌아가신 분을 모시는 祭禮 ~ 朱熹家禮에 따라서 할 것과 반드시 祠堂을 갖추라는 內容 等이 실려 있다.

8(居家) ~ 夫婦間를 비롯하여 집안을 다스리고 家産管理하는 方法例示되어 있다.

9(接人) ~ 社會生活을 하는 데 必要基本的敎養記錄되어 있다.

10(處世) ~ 科擧를 거쳐 벼슬 生活을 하는 牧民官百姓들을 하는 姿勢에서 注意해야 할 들이 실려 있다.

 

學問에 뜻을 두는 것으로부터 始作하여 自己 몸을 바로 세우고, 性理學根本理念日常生活具體的으로 適用하는 것까지 說明하고 있다. 自然社會把握하는 데 理氣哲學이 바탕이 되며, 父母子息 사이의 社會 秩序根本理念임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선비, 卽 士族들이 社會主導하던 朝鮮時代의 가장 根本的敎科書라 할 수 있는 指針書.

그러나 社會 運營哲學秩書가 크게 바뀐 現代에는 그 內容들을 그대로 適用하기에는 여러 가지 問題가 없지 않다. 그러면서도 內容 하나하나에는 硏究價値充分하다고 하겠다. 親筆本李珥 手筆 擊蒙要訣寶物 第602指定되어 있다.

 

 

47. 구존방언(具存方言)

方言을 그대로 둔다는 말로, 自己 나라말을 그대로 쓰는 것이 옳다는 뜻이다.

 

* 三國遺事.

新羅 第2代 南解居西干 南解王 (南解次次雄)의 아버지는 赫居世, 어머니는 閼英夫人이며, 그의 雲梯夫人. 雲梯. 只今 迎日西雲梯山에 모셔져 있는데 가뭄에 祈雨祭를 올리면 效驗이 있다고 한다)이다. 그는 王位에 오른 지 21만인 甲辰年世上을 떠났는데, 赫居世王, 弩禮王과 함께 三皇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의 첫째로 꼽힌다.

新羅에서는 居西干, 또는 麻立干이라 일컬었는데, 辰韓의 말로 이라는 뜻이다. 어떤 이는 貴人을 부르는 號稱이라고도 하며, 次次雄慈充이라고도 하는데 무당을 이르는 말이다. 이는 사람들이 무당은 鬼神을 섬기고 人生運命쳐 주는 까닭으로 무당을 두려워하고 恭敬하므로 村長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尼師今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잇금, 임금을 이르는 말이다.

南解王世上을 떠나자 아들 弩禮 (儒理王)脫解에게 王位讓步했다.

그러자 脫解가 말했다.

거룩하고 슬기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떡을 물어 이의 個數確認했더니 弩禮가 많아 먼저 王位에 올랐다. 이때부터 稱號를 임금이라 했는데 이는 잇금이 變移된 말이다. 弩禮妹夫 脫解에게 王位讓位하는 아름다운 美德을 보여준 이다.

新羅 王으로서 居西干, 또는 次次雄으로 불린 사람은 各各 한 사람이고, 尼師今이라 불린 사람은 열여섯, 麻立干이라 불린 사람은 네 사람이었다.

新羅 末氣留學者 崔致遠 (慶州 崔氏始祖)帝王年代曆을 지으면서 品格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였던지 居西干으로 말하지 않고, 某王이라고만 記述했다. 그러나 歷史的事實記錄할 때는 具存方言, 卽 當時 쓰던 말을 그대로 살려 두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參考追封은 모두 葛文王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生父丈人 等近親에게 주던 封爵이었다.

 

 

48. 구천십장(九遷十葬)

墓地를 아홉 옮기어 열 番 葬事 지낸다 말로, 무슨 일이 억지로 되지 않고 이 닿아야 이루어짐을 比喩한 말이다.

 

* 朝野集要

朝鮮 明宗 南師古(1509~1571)本貫英陽이고, 格庵으로, 易學, 風水, 天文, 卜筮, 相法에 이르기까지 두루 博識學者였다.

그는 豫言正確하게 잘하여 10뒤에 일어날 東西分黨, 30~40뒤에 일어날 壬辰倭亂까지도 豫言하였다.

그가 젊어서 말을 타고 蔚珍 佛影寺로 가는데 길에서 만난 한 스님이 自己도 태워 달라고 했다. 그래서 함께 타고 가다가 芙蓉峯에 올라 큰 소나무 아래에서 暫時 쉬면서 바둑을 두었다. 그런데 스님이 갑자기 외마디 高喊을 지르고는 보이지 않더니 한참 만에 나타나 말했다.

두렵지 않았습니까?”

아니오. 왜 무섭습니까?”

어허. 그렇다면 가르칠만한 人才로군.”

스님은 南師古에게 주면서 當付했다.

그대는 選擇받은 사람이니 이 을 가지고 꼭 힘써 배우도록 하시오.”

말을 남긴 스님은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南師古는 그 길로 洞窟로 들어가 玄妙術法通達하여 有名地官이 되었다.

그런데 그가 父親喪하여 좋은 터를 잡아 葬事를 치르고 나서 다시 살펴보니 좋은 땅이 못되었다. 그래서 移葬을 하고, 또 살펴보니 亦是 자리가 안 좋아 또다시 移葬했다. 이렇게 여러 되풀이 하다가 마침내 明堂을 찾아냈다.

이 날아서 하늘에 오르는 地形이다.”

그는 기뻐하면서 移葬을 했다. 그런데 封墳을 쌓는 일꾼들의 노래가 怪異했다.

아홉 番 移葬하여 열 葬事하는 南師古, 죽은 뱀이 나뭇가지에 걸린 터를 두고 이 날아서 하늘로 오르는 地形이라니 웬 말이냐?”

그는 놀라서 다시 山勢를 살펴보니 果然 일꾼들의 노래가 옳았다. 그래서 히 그 노래를 한 일꾼들을 찾았으나 온데간데 없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當身은 다른 사람의 運命은 잘 알면서 왜 自身運命은 모르고 헛일만 거듭합니까?”

그는 서글프게 對答했다.

그러게나 말일세, 動機私的慾心으로 차 있으면 보는 눈이 도리어 어두워지기 때문 아니겠나!”

 

 

49. 국운수왕(國運隨王)

나라의 은 임금을 따른다. 高句麗 廣開土王에게서 由來한 말로, 나라의 興盛統治者能力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다.

 

* 三國史記.

高句麗 第19代 廣開土王 (374~412)17代 小獸林王 5故國壤王(?~391)의 아들로 태어나 드넓은 滿州 땅에 나라를 세워 東北 地域에서는 가장 큰 國家를 만들었다.

領土中國松花江에서 쪽의 遼河에까지 이르렀다.

이 되기 前 廣開土王의 이름은 談德이었는데, 어렸을 적부터 호랑이를 활로 쏘아 잡을 만큼 勇猛스러웠다. 12太子冊封되었고, 18319年 王位에 올랐다.

談德의 할아버지 故國原王 때에는 中國 前燕侵略을 받곤 했다. 한 번은 나라의 王 慕容盛5萬 名軍士를 이끌고 國內城에 쳐들어와 宮闕을 불태우고 美川王의 무덤을 파헤쳐 屍身을 꺼내 갔다. 의 어머니와 함께 高句麗 百姓 5萬如 名을 잡아갔다.

그러자 故國原王343同生나라에 派遣하여 朝貢하고, 美川王屍身을 찾아왔으며, 355에 다시 朝貢하고 어머니도 모셔 왔다. 뼈에 사무치는 懷恨이었지만 힘이 不足高句麗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故國原王 41에는 百濟近肖古王3萬如 名軍士를 이끌고 平壤城攻擊해 왔는데, 이때 故國原王은 앞장서서 싸우다가 戰死했다. 談德의 아버지 故國原王中國後燕高句麗를 넘보자 軍士를 일으켜 먼저 後燕으로 쳐들어가 遼東占領했다. 談德太子가 되기 1年 前의 일이었다.

38511, 高句麗後燕反擊을 받아 遼東城에서 싸우다가 後退하였다. 이때 故國原王談德에게 懇切付託했다.

談德, 너는 반드시 아버지가 한 이 羞恥를 씻어야 한다.”

. 아버지 말씀대로 高句麗人勇猛스러움을 꼭 보여 드리겠습니다.”

談德熱心武術을 닦는 한便으로 兵法도 같이 硏究했다.

3925, 故國原王世上을 떠나자 談德王位에 오르니 그가 廣開土王이다. 廣開土王 王位에 오르자마자 永樂이라는 年號使用하게 함으로써 高句麗位相萬方宣布했다. 그리고 平壤에 아홉 의 절을 지어 佛敎를 널리 傳播하였으며, 나라의 敎育機關太學을 넓혀 敎育에도 힘썼다.

3927에는 4萬如 名軍士를 이끌고 石峴, 關彌城 等 百濟10곳을 占領하고, 9에는 거란(契丹)으로 쳐들어가 그곳에 잡혀가 있던 高句麗 百姓 1萬 名歸國시켰다.

그해 10에는 百濟 北方主要 要塞를 모두 빼앗은 새롭게 일곱 個 城을 쌓았다. 이어서 3千如 名騎兵을 이끌고 邊方을 괴롭히는 碑麗國占領했다.

이 무렵, 百濟에서는 辰斯王(?~392)이 물러나고 阿莘王(?~405)이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廣開土王百濟占領하고자 水軍을 앞세워 漢江을 넘어 百濟都邑地 慰禮城包圍했다. 그러자 百濟阿莘王은 크게 沮抗 하지 못하고 스스로 降伏했다.

廣開土王阿莘王을 살려 주고, 代身 그의 同生包含10如 名을 볼모로 데리고 高句麗로 돌아왔다. 이때 高句麗百濟58個 城占領했다.

便, 阿莘王王子 晪支日本에 보내 救援兵要請하는 다시 高句麗攻擊準備를 갖추었다. 廣開土王은 그런 情況을 알고 對備를 하고 있는데 新羅에서 使臣이 왔다.

大王媽媽, 援兵을 보내어 저희 나라를 侵犯倭寇를 무찔러 주십시오.”

廣開土王卽刻 騎兵 等 軍士 5萬 名新羅에 보냈고, 消息을 들은 倭寇들은 곧바로 달아나 버렸다.

百濟阿莘王高句麗軍倭軍退却시켰다는 말을 듣고 高句麗攻擊하려던 計劃抛棄했다.

廣開土王쪽에 神經을 쓰는 사이에 後燕慕容熙3萬 名大軍을 이끌고 高句麗北方 要塞新城南蘇城占領했다.

廣開土王은 이를 契機北方 征伐計劃하고 6萬 名大軍을 밤낮으로 訓練시켰다. 그리고 402, 드디어 遼河를 건너 宿軍城으로 進軍하였다. 宿軍城에는 後燕將帥 慕容熙을 치고 있었다.

마침내 軍士가 맞붙어 싸운 結果 慕容熙하여 北門으로 달아났다.

宿軍城陷落되었다는 消息을 들은 後燕의 다른 城主들은 을 먹고 달아나 高句麗軍遼東省까지 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 이어서 廣開土王高句麗 北쪽의 東扶餘征伐하기로 하자 그 消息을 들은 東扶餘對降할 수 없음을 깨닫고 降服했다.

東扶餘征伐廣開土王은 내친김에 肅愼族까지 征伐하기로 했다. 그래서 얼음이 언 牧丹江을 건너 敵陣 속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무찔렀다.

負傷을 입은 肅愼族長廣開土王 앞에 무릎을 꿇고 降服했다.

너희는 에도 우리나라를 괴롭힌 적이 있는데 앞으로는 絶對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

廣開土王族長을 죽이지 않고 타일렀다. 이로써 廣開土王쪽으로 東扶餘, 北扶餘征復하고 松花江 流域碑麗國息愼, 肅眞까지 占領하여 시베리아에 이르는 大帝國을 이루었다. 그러니까 廣開土王쪽의 松花江에서 쪽의 遼河에 이르는 廣大한 땅을 高句麗領土로 만들었던 것이다.

廣開土王40414世上을 떠나고, 뒤를 이어 王子 巨連王位에 오르니, 그가 곧 20代 長壽王이다.

 

 

50. 국조단군(國祖檀君)

우리나라를 세운 始祖 檀君王儉을 가리키는 말이다. 檀君王儉이 아버지 桓雄의 도움으로 阿斯達(平壤)都邑하고 나라 이름을 朝鮮이라 했다. 朝鮮이 바로 高朝鮮, 卽 檀君朝鮮이다.

 

* 三國遺事.

中國 北魏正史 魏書檀君古記하면 紀元前2333, 天帝 桓因 (帝釋天王)의 아들 桓雄이 땅으로 내려가 世上을 다스리고자 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太伯을 내려다보니 果然 人間이 살아갈 만한 곳이므로 天符印 를 주어서 내려가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桓雄3千 名의 무리를 거느리고 太白山 (只今妙香山) 神壇樹 밑으로 내려오니 그곳을 일어 神市라 하였다. 그는 風伯(바람), 雨師(), 雲師(구름)를 거느리고 (農業), (生命), (疾病), (刑罰), 善惡(道德) 等 人間世上360가지 일을 主管하여 世上을 다스리기 始作하였다.

그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桓雄에게 사람이 되기를 하니 桓雄神靈스런 쑥 함 줌과 마늘 20를 주며 말했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百 日 동안만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人間이 될 것이다.”

그러자 곰은 忍耐心을 가지고 그 말대로 施行하여 三七日 만에 女子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호랑이는 그 期間을 참지 못하고 中間밖으로 뛰쳐나가 햇빛을 보는 바람에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女子가 된 곰, 熊女婚姻相對가 없어 날마다 神壇樹 밑에서 아기 갖기를 祈願하였다. 이에 桓雄이 사람으로 하여 雄女結婚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檀君 (一名 檀君王儉)이다.

檀君平壤城都邑하고 國號朝鮮이라 하였다. 때는 임금 50이었다. 以後 1500年間 나라를 다스리다가 나라 武王卽位己卯年箕子朝鮮하므로 檀君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다시 阿斯達로 옮기고, 거기서 山神이 되었는데 나이가 1908였다.

建國神話天地開闢後 陰陽이 생기고, 그 속에서 사람과 森羅萬象發生하였으며, 하늘로부터 統治할 사람이 내려와 國家建設하고 다스린다는 것이 一般的이다.

檀君 崇拜思想高麗朝鮮時代를 거쳐 大衆化되었으며, 朝鮮朝 世宗平壤祠堂을 짓고 檀君高句麗 始祖 東明聖王을 함께 모시고 國祖로 받들었다. 그리고 朝鮮 後期에는 檀君敎大宗敎가 생겨났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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