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ㄱ–5)
41. 교왕지말(驕王之末)
교만(驕慢)한 王의 끝이라는 말로, 泰封國 王 궁예(弓裔)의 故事에서 由來했다. 높은 地位에 올랐을 때 德을 베풀지 않고 驕慢하면 그 末路가 悲慘해진다는 뜻으로 쓰인다.
* 三國史記에.
애꾸눈 王 (弓裔.?~918)의 出生에 對해서는 明確한 記錄이 없어 確實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姓은 金氏로 新羅 第47代 憲安王의 後宮한테서 태어난 庶子로 알려져 있다. (第48代 景文王의 子孫이라는 說도 있다.)
當時의 新羅는 政治가 混亂하여 곳곳에서 盜賊이 일어났고, 朝廷에서 멀리 떨어진 地方에서는 至嚴한 王의 命令도 먹혀들지 않을 程度로 어지러웠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權力을 가진 사람들이 그 힘을 利用한 陰謀가 판을 치게 된다. 弓裔 亦是 王家의 權力 다툼이 있을 때 태어났다. 갓 태어난 弓裔의 生命에 위협(威脅)이 닥쳐오자 後宮이 宮 안에서 담 너머에 있는 乳母에게 아기를 던졌는데, 그때 乳母의 손가락에 눈을 찔려 애꾸눈이 되었다고 한다. 다쳐 피를 흘리는 弓裔를 世達寺라는 절에 맡겨 중이 되었는데 法名은 善宗이다.
어느 날, 까마귀 한 마리가 弓裔 앞에 ‘王’字가 씌어져 있는 符籍을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弓裔는 그것을 보고 언제인가는 自身이 王이 되리라고 期待하게 되었다. 그 後, 靑年이 된 그는 절에서 나와 盜賊의 우두머리인 기훤(箕萱)의 部下로 들어갔다. 그러나 箕萱과 마음이 맞지 않아 그를 버리고 이번에는 北原의 盜賊 梁吉의 部下가 되어 功을 세웠다. 梁吉은 弓裔를 信任하여 軍士까지 맡기며 厚하게 對해 주었다.
弓裔는 그 힘을 빌어 溟州와 鐵原을 함락(陷落)시키고, 富者들로부터 財物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어진 將軍이라는 稱頌과 함께 民心을 모았다.
그를 따르는 軍士의 數爻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는 싸울 때마다 이겨서 江原道의 여러 고을을 차지했는데, 이 무렵 松嶽 出身 王建도 그의 部下로 들어왔다. 王建의 勢力까지 합친 弓裔는 都邑을 송악(松嶽)으로 定하고 王建을 太守로 삼았다.
梁吉은 部下인 弓裔가 크게 成功하자 自己의 地位가 危殆로워짐을 느껴 먼저 弓裔를 쳤다. 궁예(弓裔)는 王建으로 하여금 反擊하게 하여 梁吉을 죽이고, 新羅 孝恭王 5年에는 正式으로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王位에 올라 國號를 後高句麗라 했다. 그리고 王建에게 金城과 羅州를 치게 하여 後百濟의 견훤(甄萱)을 견제(牽制)했다.
孝恭王 8年에는 國號를 마진(摩震)이라 改稱하고 年號를 武泰로 바꾼 뒤 首都를 鐵原으로 옮겼다. 그리고 中央官廳으로 廣評省을 두어 나랏일을 討議케 하는 한편, 各 地方에 官廳을 둠으로써 나라의 基礎를 튼튼하게 다졌다. 또 宮闕과 樓臺 等을 豪華롭게 꾸며 自身의 位相을 높였다.
그리고 繼續해서 平壤까지 占領하여 新羅의 북쪽 領土를 거의 다 차지함으로써 그 勢力이 新羅를 앞지르게 되었다.
그러자 新羅의 많은 將帥와 學者들이 投降하였으나 新羅에 對하여 怨恨을 품고 있던 그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죽여 버렸다. 그의 殘惡한 本性이 이때부터 서서히 드러나기 始作한 것이다.
弓裔는 911年에 國號를 태봉(泰封)이라 고치고, 年號를 水德萬歲라 했다. 그리고 自身을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하고, 맏아들은 靑光菩薩, 막내 아들은 神光菩薩이라고 불렀다. 또 스스로는 머리에 金冠을 쓰고, 方袍(중의 옷)를 걸치고 다녔다. 그는 佛經 20券을 만들어 僧侶 釋聰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다. 釋聰은 ‘이것은 佛經이 아니라 邪惡하고 怪常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直言을 했다. 弓裔는 몹시 怒하여 釋聰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 이때부터 百姓들의 마음은 次次 弓裔에게서 멀어져 갔다.
弓裔의 王妃가 그의 亂暴한 行動을 念慮하여 平常心을 찾으라고 懇曲히 諫하였다. 火가 난 弓裔는 王妃에게 말했다.
“敢히 彌勒佛을 가르치려 하다니……, 너 요즘 다른 사내와 가까이 지내고 있지? 나는 彌勒佛이야, 彌勒佛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觀心 能力이 있어서 相對方의 눈동자만 보아도 속마음을 훤히 알 수가 있어.”
그러고는 끔찍하게 王妃를 인두로 지져대자 아들 靑光菩薩과 神光菩薩이 말렸다. 더 火가 난 弓裔는 그 자리에서 철퇴(鐵槌)로 두 아들을 때려 죽여 버렸다. 또 臣下들도 걸핏하면 트집을 잡아 죽였다.
그러자 將帥 申崇謙, 洪儒, 卜智謙, 裵玄慶 等이 그를 逐出하고 王建을 王으로 推戴하는 反亂을 일으켰다. 弓裔는 몰래 달아나다가 平康에서 百姓들에게 붙잡혀 殺害되고 말았다.
이로써 泰封國은 28年이라는 짧은 歷史로 끝나고 高麗가 열리게 되었다.
42. 교체중매(郊彘仲媒)
산돼지<彘:돼지체> 仲媒를 하다. 高句麗 山上王에게서 由來한 말로, 뜻하지 않은 일이나 事物이 契機가 되어 일이 잘 이루어짐을 뜻한다.
* 三國史記에.
高句麗의 第8代 新大王(在位 165~179)은 4兄弟를 두었다. 첫째 男武(故國川王), 둘째가 發歧, 셋째가 延優, 넷째가 罽須(계수) 4兄弟였다.
故國川王 男武가 죽자 後嗣가 없었던 皇后가 이를 숨기고 둘째 媤同生 發歧를 찾아갔다.
“大王께서 王子가 없으니 王位를 繼承하십시오.”
그러자 發歧는 兄嫂인 王后가 自身을 試驗하는 것으로 알고, 嚴然히 兄님이 계신데 輕率한 行動을 삼가라며 斷乎히 말했다. 王后는 부끄러웠으나 大權을 이어야 했기 때문에 셋째 媤同生인 延優를 찾아갔다. 延優는 衣冠을 整齊하고 兄嫂인 王后를 鄭重히 맞았다.
“제가 찾아 온 까닭은 大王이 昇遐하여 發歧 媤同生을 찾아갔으나 나를 疑心하기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延優는 王后를 맞아 床을 차리는데 고기를 썰다가 일부러 손가락을 베었다. 피가 흐르자 王后가 치마끈을 찢어 傷處를 싸매 주었다. 宮闕로 돌아온 王后는 故國川王 屍身을 向해 말했다.
“延優를 王位에 繼承하라 하셨죠?”
거짓말로 던진 말이지만 이 말이 公式化되어 延優는 王位를 繼承하게 되었다는 消息을 들은 兄 發歧가 軍兵을 이끌고 王宮을 包圍하였다. 宮門을 굳게 닫은 延優는 3日을 버텼는데 發歧가 스스로 물러서더니 遼東 땅으로 가 公孫康에게 同生 延優를 處斷하겠다며 軍士 3萬을 要請하였다.
公孫康은 그렇지 않아도 눈에 가시같은 高句麗를 치려고 機會만 보고 있던 참이라 잘 되었다 싶어 軍士 3萬을 내주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괘씸한 아우를 무찌르고 王位를 탈환(奪還)하시오.”
山上王에 오른 延優는 兄 發歧가 3萬의 軍士를 앞세워 쳐들어 오자 아우 계수(罽須)에게 軍士를 주어 맞서도록 했다. 막내 아우 罽須가 兄 發歧를 向해 말했다.
“延優 兄이 王位를 辭讓하지 않고 잇는 것은 義理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라를 亡치려고 遼東의 軍士를 빌려 高句麗를 쳐들어 왔으니 죽은 뒤에 무슨 面目으로 先祖들을 對하겠습니까?”
發歧는 罽須의 이 말을 듣고 부끄럽고 面目이 없어 裴川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宮闕이 平定을 되찾자 山上王은 잔치를 열고 同生 계수(罽須)를 請하였다. 그리고 禮優를 다하여 發歧 兄을 葬事 지내고 온 罽須에게 兄弟의 友宜를 다한 것에 對해 稱讚을 아끼지 않았다.
葬禮 後 正式으로 王位에 오른 山上王은 兄嫂 于氏를 王后로 맞이했다.
山上王 7年(203) 3月에 王은 아이 갖기를 懇切히 祈禱했다. 그날 밤 꿈을 꾸게 되었는데 흰옷을 입은 祖上이 나타나더니 말했다.
“延優야, 네가 小后妾으로 하여금 아들 낳게 될 것이니라.”
꿈을 꾼 山上王은 하늘이 준 機會라고 생각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山上王 12年(208) 王이 사냥을 나가게 되었는데 산돼지를 보고 시위를 당겼으나 맞지 않고 달아났다.
그러자 臣下들이 산돼지를 쫓아가 酒桶村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때 시끄러운 소리에 한 處女가 뛰쳐나오더니 달아나는 산돼지를 낚아채 쫓아오던 사람에게 주었다.
壯丁이 몰아도 잡지 못하던 것을 處女가 잡아 주자 臣下들은 疑訝해 하면서 王 앞으로 가지고 갔다.
“누가 잡았느냐?”
“酒桶村의 處女가 잡아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山上王이 그 집으로 가 人事를 받고 전날의 꿈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山上王은 酒桶村에 뜻하지도 않았던 小后를 두게 되었다.
酒桶村에 小后를 두었다는 消息을 들은 王后는 軍士를 보내 그녀를 죽이려 했다.
그러자 小后는 男裝을 하고 산속으로 달아났으나, 얼마 못 가 잡히고 말았다. 軍
士들이 칼을 빼 그녀를 죽이려 하자 말했다.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는데 이것이 大王의 命令이냐? 그렇지 않으면 王后의 命令이냐?”
“王后의 命令입니다.”
“그럼 듣거라. 내 뱃속에는 大王이 남겨 준 새 生命이 있다. 내 죽음은 곧 王子의 죽음이니 그래도 죽이겠느냐?”
이 말을 듣고 大闕로 돌아가 王后에게 告하자 펄펄 뛸 뿐 어찌하지 못했다.
山上王이 그 이야기를 듣고 酒桶村을 찾았다. 그리고 그 해 9月에 아이를 낳으니 산돼지로 말미암아 낳은 아기이므로 이름을 들교(郊)字에 돼지체(彘)字를 써 ‘교체(郊彘)’라 하고 그녀를 宮으로 불러 小后로 삼았다. 西紀 218年 山上王이 昇遐하자 郊彘가 王位에 오르니 그가 바로 11代 東川王이다.
43. 구관불탁(求官不擢)
벼슬을 억지로 求하는 사람은 뽑지 않는다는 뜻이다. 벼슬을 私事로이 請託하는 사람에게는 주려던 벼슬도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 朝鮮人物考 國朝名臣錄에
朝鮮 明宗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李後白(1520~1578)은 本貫이 延安이고, 號는 靑蓮으로 人事管理를 公平無私하게 했던 淸白吏였다.
그에게 친척(親戚) 한 사람이 찾아와서 벼슬 한 자리를 은근(慇懃)히 請託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미 官吏로 採用하려고 作成해둔 名單에 올려져 있었다. 李後白은 그 名簿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보시게! 나는 그대의 이름을 이렇게 적어 두고, 將次 順序대로 採用하고자 했는데 그대가 염치(廉恥)없이 벼슬을 달라는 말을 하니 萬若 그대에게 벼슬을 먼저 준다면 이는 公平한 道理가 아니지 않은가. 아깝게 되었네, 그대가 벼슬을 請託하지 아니했다면 벼슬을 하게 되었을 텐데…….” 벼슬자리를 付託한 親戚은 부끄러워하면서 돌아갔다.
그는 사람을 官職에 任命할 때는 여러 사람에게 그 사람의 人品과 能力이 어떤지 먼저 알아보고 萬若 合當하지 못하다는 輿論이면 斷乎하게 排除했다.
靑蓮은 特別히 明宗의 信任을 얻어 父母를 모시면서 工夫하라는 賜暇讀書 (나라에서 特別히 休暇를 주어 工夫하도록 配慮하는 制度) 特惠를 받게 되었으며, 그 後 都承旨를 거쳐 吏曹參判과 大提學을 歷任했다.
그는 咸安의 文會書院에 祭享되었고, 諡號는 文靑公이다
44. 구면수절(垢面守節)
때가 낀 얼굴로 守節 하다. 卽 일부러 몸을 더럽게 꾸며 뭇 男子들의 接近을 避 함으로써 貞節을 지킨 한 妓生에게서 由來한 말로 節槪가 굳은 女人을 이르는 말이다.
* 國朝人物志에.
朝鮮 英祖 때 左議政 趙文命 (1680~1732)은 本貫이 풍양(豊壤)이고 號는 학암(鶴巖), 諡號는 文忠으로 風采와 人物이 뛰어났었다. 그가 明나라에 使臣으로 가던 길에 安州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날 밤, 그 고을의 員과 함께 百祥樓에서 술을 마시는데 그 자리에 겨우 열두 살인 어린 妓生이 있었다. 그는 그 妓生을 귀여워했고, 그 妓生도 그를 따랐다. 宴會가 끝나고 두 사람이 휘영청 밝은 달밤에 따로 만나서 情談을 나누던 中에 그가 손가락으로 기둥에 成熟한 女體를 그려 보여주면서 말했다.
“네가 너무 어린 것이 안타깝구나, 네 몸이 이렇게만 되었다면 우리가 오늘 밤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을 텐데…….”
그리고 膳物로 부채 하나를 주었다.
몇 해 後, 그가 또다시 安州를 지나다가 百祥樓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그날 밤,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와 부채를 주면서 말했다.
“小人의 누이동생이 이 부채를 大監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부채를 보니 낯익은 부채인데 詩가 한 首 쓰여 있었다.
安陵一別黯消魂(안능일별암소혼) : 安州 한 번 떠난 뒤엔 消息이 없어 서러워라.
忍忘當時畵柱恩(인망당시화주은) : 기둥에 그렸던 그림 어이 차마 잊으리오.
摩挲篋裏扇猶在(마사협이선유재) : 고운 箱子 속에 부채를 간직하고
半是秋風半淚痕(반시추풍반루흔) : 가을바람이 지날 때마다 눈물을 짓네.
그는 몇 해 前의 귀여웠던 어린 妓生을 생각해 내고 嘉尙하여 安否를 물었다.
“네, 小人의 누이동생은 이 부채를 받은 後 永遠히 守節할 것을 盟誓하고, 오직 詩를 짓고 冊 읽는 것을 樂으로 삼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 節槪가 어찌나 强한지 官家의 指示에도 꺾이지 않고 只今까지 處女로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急히 그녀를 불러오게 했다. 그런데 몇 年 만에 만난 그녀의 美貌는 그대로 잃지 않고 있었으나, 머리에 빗질도 아니하고 때 묻은 얼굴로 襤褸한 차림이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그녀가 말했다.
“妓生의 몸이다 보니 뭇 男丁네들이 업신여겨 넘보는지라 貞節을 지키기 爲해 일부러 이렇게 더럽게 하고 지냈습니다.”
참으로 哀切하고도 感動的인 對答이었다.
그는 그녀와 激情의 밤을 지내고, 그녀를 데리고 돌아가서 一生을 幸福하게 偕老했다.
45. 구수회의(鳩首會議)
비둘기들이 머리를 맞대고 會議 하다. 卽 여러 사람이 모여 진지(眞摯)하게 議論하는 것을 이른다.
* 故事成語 大辭典에.
비둘기 구(鳩)字는 새 鳥字와 아홉 九字를 結合해서 만들어진 글字다. 九가 붙은 까닭은 비둘기들이 머리를 맞대고 ‘구구’거리면서 울기 때문에 그 音을 따온 것으로 象形文字이다.
비둘기는 여러 마리가 떼를 지어 사는 習性이 있다. 비슷한 말 中에 鳩合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은다는 糾合의 뜻으로도 쓰인다.
비둘기는 그렇게 떼 지어 살면서도 서로 다투거나 무리지어 먹이를 독차지하는 法이 없다. 그래서 平和를 象徵하고 원앙(鴛鴦)과 함께 금슬(琴瑟) 좋은 夫婦에 比喩하기도 한다.
또 鳩民이라는 말은 中國 古典 春秋左典에 나오는데 이는 百姓들이 비둘기처럼 便安하게 모여 사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서로 돕고 아끼는 좋은 뜻으로 쓰이지만 鳩酒하면 毒酒를 가리키기도 한다.
비둘기는 모이를 쪼아 먹을 때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한 알씩 콕콕 쪼아 먹는다. 이것을 멀리서 보면 마치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처럼 보여 사람들이 鳩首會議란 말을 붙여 使用하게 된 것이다.
비둘기는 서로 싸우지 않아 友情이나 共存을 뜻하기도 하지만 암수의 사이가 좋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렇지만 이 새는 둥지를 짓지 못하고 다른 새가 지어 놓은 둥지에 들어가 알을 낳는다. 이런 비둘기의 習性을 따서 남의 집에 들어가 살면서 行勢하는 것을 구거작소(鳩居鵲巢 비둘기가 까치 둥지에서 삶)라 하기도 한다. 그런데 自己 집을 말할 때도 謙遜한 뜻으로 鳩居라 表現하기도 하는데 이는 널리 쓰는 말은 아니다. 허나 윗사람에게 謙遜을 나타낼 때 비둘기 집처럼 누추(陋醜)하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46. 九容
아홉 얼굴, 卽 心身 修養에 必要한 아홉 가지 態度와 몸가짐을 일컫는 말이다. 身言書判과 비슷한 뜻이다.
* 擊蒙要訣 持身章에.
栗谷 李珥(1536~1584)가 쓴 擊蒙要訣 持身章에 나오는 九容은 ①足容重 ②手容恭 ③目容端 ④口容止 ⑤聲容靜 ⑥頭容直 ⑦氣容肅 ⑧立容德 ⑨色容莊 等의 아홉 가지를 말한다. 이는 君子가 몸과 마음을 修養하는 方法을 가리키는 말이다.
① 足容重 ~ 걸을 때에는 발걸음을 무겁게 해서 輕妄스럽게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② 手容恭 ~ 손은 恭遜하게 두어 怠慢하고 게으른 느낌을 주지 않아야 한다.
③ 目容端 ~ 눈의 움직임을 端正하게 해 곁눈질하지 않아야 한다.
④ 口容止 ~ 입은 굳게 다물어 言行을 愼重하게 해야 한다.
⑤ 聲容靜 ~ 재채기나 기침을 삼가서 周邊을 고요하게 造成해야 한다.
⑥ 頭容直 ~ 머리는 곧게 하여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해야 한다.
⑦ 氣容肅 ~ 숨소리를 점잖고 嚴肅하며 맑게 해야 한다.
⑧ 立容德 ~ 서 있을 때의 姿勢는 中心을 똑바로 잡고 의젓하게 하면서 德이 있어야 한다.
⑨ 色容莊 ~ 表情은 씩씩하고 謹嚴하되 仁慈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라고 했다.
이 冊은 1577年(宣祖10年) 學問을 始作하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爲해 10章으로 編纂했으며, 各 章의 內容은 다음과 같다.
• 第1章 (立志) ~ 學問에 뜻을 둔 사람은 聖人이 되기를 目標로 하여 물러서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
• 第2章 (革舊習) ~ 學問을 成就하기 爲해서는 行動을 게을리 하지 말며,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模倣하지 말고, 安逸한 것에 얽매이지 말 것 等 具體的 條項 8個를 들고 있다.
• 第3章 (持身) ~ 몸을 바르게 지키는 方道를 提示하여 뜻을 어지럽히지 말고 學問의 基礎를 마련하라고 하였다.
• 第4章 (讀書) ~ 讀書가 道에 들어가기 爲한 窮理의 前提가 되어야 하며, 端正한 姿勢로 깊이 精讀할 것을 가르치고, 讀書의 順序를 提示하였다.
• 第5章 (事親. 어버이를 섬김) ~ 父母님 섬기기를 비롯하여 父母의 뜻이 義理에 어긋날 때에는 子息이 부드럽게 아뢰어 뜻을 바꾸게 하라는 等의 內容이 실려 있다.
• 第6章 돌아가신 분에 對한 喪制와
• 第7章 돌아가신 분을 모시는 祭禮 ~ 朱熹의 家禮에 따라서 할 것과 반드시 祠堂을 갖추라는 內容 等이 실려 있다.
• 第8章 (居家) ~ 夫婦間의 禮를 비롯하여 집안을 다스리고 家産을 管理하는 方法이 例示되어 있다.
• 第9章 (接人) ~ 社會生活을 하는 데 必要한 基本的인 敎養이 記錄되어 있다.
• 第10章 (處世) ~ 科擧를 거쳐 벼슬 生活을 하는 牧民官이 百姓들을 對하는 姿勢에서 注意해야 할 點들이 실려 있다.
이 冊은 學問에 뜻을 두는 것으로부터 始作하여 自己 몸을 바로 세우고, 性理學의 根本理念을 日常生活에 具體的으로 適用하는 것까지 說明하고 있다. 또 自然과 社會를 把握하는 데 理氣哲學이 바탕이 되며, 父母와 子息 사이의 孝가 社會 秩序의 根本理念임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선비, 卽 士族들이 社會를 主導하던 朝鮮時代의 가장 根本的인 敎科書라 할 수 있는 指針書다.
그러나 社會 運營의 哲學과 秩書가 크게 바뀐 現代에는 그 內容들을 그대로 適用하기에는 여러 가지 問題가 없지 않다. 그러면서도 內容 하나하나에는 硏究의 價値가 充分하다고 하겠다. 親筆本인 李珥 手筆 擊蒙要訣은 寶物 第602號로 指定되어 있다.
47. 구존방언(具存方言)
方言을 그대로 둔다는 말로, 自己 나라말을 그대로 쓰는 것이 옳다는 뜻이다.
* 三國遺事에.
新羅 第2代 南解居西干 南解王 (南解次次雄)의 아버지는 赫居世요, 어머니는 閼英夫人이며, 그의 妃는 雲梯夫人. 或은 雲梯. 只今 迎日의 西쪽 雲梯山에 모셔져 있는데 가뭄에 祈雨祭를 올리면 效驗이 있다고 한다)이다. 그는 王位에 오른 지 21年 만인 甲辰年에 世上을 떠났는데, 赫居世王, 弩禮王과 함께 三皇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그 中의 첫째로 꼽힌다.
新羅에서는 王을 居西干, 또는 麻立干이라 일컬었는데, 辰韓의 말로 王이라는 뜻이다. 어떤 이는 貴人을 부르는 號稱이라고도 하며, 次次雄은 慈充이라고도 하는데 무당을 이르는 말이다. 이는 사람들이 무당은 鬼神을 섬기고 人生의 運命을 占쳐 주는 까닭으로 무당을 두려워하고 恭敬하므로 村長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또 尼師今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잇금, 卽 임금을 이르는 말이다.
南解王이 世上을 떠나자 아들 弩禮 (儒理王)가 脫解에게 王位를 讓步했다.
그러자 脫解가 말했다.
“거룩하고 슬기로운 사람은 이(齒)의 數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떡을 물어 이의 個數를 確認했더니 弩禮가 많아 먼저 王位에 올랐다. 이때부터 王의 稱號를 임금이라 했는데 이는 잇금이 變移된 말이다. 弩禮가 妹夫 脫解에게 王位를 讓位하는 아름다운 美德을 보여준 例이다.
新羅 王으로서 居西干, 또는 次次雄으로 불린 사람은 各各 한 사람이고, 尼師今이라 불린 사람은 열여섯, 麻立干이라 불린 사람은 네 사람이었다.
新羅 末氣의 留學者 崔致遠 (慶州 崔氏의 始祖)은 帝王年代曆을 지으면서 品格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였던지 居西干으로 말하지 않고, 某王이라고만 記述했다. 그러나 歷史的인 事實을 記錄할 때는 具存方言, 卽 當時 쓰던 말을 그대로 살려 두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參考로 追封된 王은 모두 葛文王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王의 生父나 丈人 等의 近親에게 주던 封爵이었다.
48. 구천십장(九遷十葬)
墓地를 아홉 番 옮기어 열 番 葬事 지낸다 말로, 무슨 일이 억지로 되지 않고 運이 닿아야 이루어짐을 比喩한 말이다.
* 朝野集要에
朝鮮 明宗 때 南師古(1509~1571)는 本貫이 英陽이고, 號는 格庵으로, 易學, 風水, 天文, 卜筮, 相法에 이르기까지 두루 博識한 學者였다.
그는 豫言을 正確하게 잘하여 10年 뒤에 일어날 東西分黨과, 30~40年 뒤에 일어날 壬辰倭亂까지도 豫言하였다.
그가 젊어서 말을 타고 蔚珍 佛影寺로 가는데 길에서 만난 한 스님이 自己도 태워 달라고 했다. 그래서 함께 타고 가다가 芙蓉峯에 올라 큰 소나무 아래에서 暫時 쉬면서 바둑을 두었다. 그런데 스님이 갑자기 외마디 高喊을 지르고는 보이지 않더니 한참 만에 나타나 말했다.
“두렵지 않았습니까?”
“아니오. 왜 무섭습니까?”
“어허. 그렇다면 가르칠만한 人才로군.”
스님은 南師古에게 冊 한 券 주면서 當付했다.
“그대는 選擇받은 사람이니 이 冊을 가지고 꼭 힘써 배우도록 하시오.”
말을 남긴 스님은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南師古는 그 길로 洞窟로 들어가 玄妙한 術法에 通達하여 有名한 地官이 되었다.
그런데 그가 父親喪을 當하여 좋은 터를 잡아 葬事를 치르고 나서 다시 살펴보니 좋은 땅이 못되었다. 그래서 移葬을 하고, 또 살펴보니 亦是 자리가 안 좋아 또다시 移葬했다. 이렇게 여러 番 되풀이 하다가 마침내 明堂을 찾아냈다.
“龍이 날아서 하늘에 오르는 地形이다.”
그는 기뻐하면서 移葬을 했다. 그런데 封墳을 쌓는 일꾼들의 노래가 怪異했다.
“아홉 番 移葬하여 열 番째 葬事하는 南師古야, 죽은 뱀이 나뭇가지에 걸린 터를 두고 龍이 날아서 하늘로 오르는 地形이라니 웬 말이냐?”
그는 놀라서 다시 山勢를 살펴보니 果然 일꾼들의 노래가 옳았다. 그래서 急히 그 노래를 한 일꾼들을 찾았으나 온데간데 없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當身은 다른 사람의 運命은 잘 알면서 왜 自身의 運命은 모르고 헛일만 거듭합니까?”
그는 서글프게 對答했다.
“그러게나 말일세, 動機가 私的인 慾心으로 차 있으면 보는 눈이 도리어 어두워지기 때문 아니겠나!”
49. 국운수왕(國運隨王)
나라의 運은 임금을 따른다. 高句麗 廣開土王에게서 由來한 말로, 나라의 興盛은 統治者의 能力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다.
* 三國史記에.
高句麗 第19代 廣開土王 (374~412)은 第17代 小獸林王 5年에 故國壤王(?~391)의 아들로 태어나 드넓은 滿州 땅에 나라를 세워 東北 地域에서는 가장 큰 國家를 만들었다.
그 領土는 中國의 北쪽 松花江에서 東쪽의 遼河에까지 이르렀다.
王이 되기 前 廣開土王의 이름은 談德이었는데, 어렸을 적부터 호랑이를 활로 쏘아 잡을 만큼 勇猛스러웠다. 12歲 때 太子로 冊封되었고, 18世 때 319年 王位에 올랐다.
談德의 할아버지 故國原王 때에는 中國 前燕의 侵略을 받곤 했다. 한 번은 燕나라의 王 慕容盛이 5萬 名의 軍士를 이끌고 國內城에 쳐들어와 宮闕을 불태우고 美川王의 무덤을 파헤쳐 屍身을 꺼내 갔다. 또 王의 어머니와 함께 高句麗 百姓 5萬如 名을 잡아갔다.
그러자 故國原王은 343年에 同生을 燕나라에 派遣하여 朝貢하고, 美川王의 屍身을 찾아왔으며, 355年에 다시 朝貢하고 어머니도 모셔 왔다. 뼈에 사무치는 懷恨이었지만 힘이 不足한 高句麗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故國原王 41年에는 百濟의 近肖古王이 3萬如 名의 軍士를 이끌고 平壤城을 攻擊해 왔는데, 이때 故國原王은 앞장서서 싸우다가 戰死했다. 談德의 아버지 故國原王은 中國의 後燕이 高句麗를 넘보자 軍士를 일으켜 먼저 後燕으로 쳐들어가 遼東을 占領했다. 談德이 太子가 되기 1年 前의 일이었다.
385年 11月, 高句麗는 後燕의 反擊을 받아 遼東城에서 싸우다가 後退하였다. 이때 故國原王이 談德에게 懇切히 付託했다.
“談德아, 너는 반드시 아버지가 當한 이 羞恥를 씻어야 한다.”
“예. 아버지 말씀대로 高句麗人의 勇猛스러움을 꼭 보여 드리겠습니다.”
談德은 熱心히 武術을 닦는 한便으로 兵法도 같이 硏究했다.
392年 5月, 故國原王의 世上을 떠나자 談德이 王位에 오르니 그가 廣開土王이다. 廣開土王 王位에 오르자마자 永樂이라는 年號를 使用하게 함으로써 高句麗의 位相을 萬方에 宣布했다. 그리고 平壤에 아홉 個의 절을 지어 佛敎를 널리 傳播하였으며, 나라의 敎育機關인 太學의 門을 넓혀 敎育에도 힘썼다.
392年 7月에는 4萬如 名의 軍士를 이끌고 石峴, 關彌城 等 百濟의 城 10如 곳을 占領하고, 9月에는 거란(契丹)으로 쳐들어가 그곳에 잡혀가 있던 高句麗 百姓 1萬 名을 歸國시켰다.
그해 10月에는 百濟 北方의 主要 要塞를 모두 빼앗은 後 새롭게 일곱 個 城을 쌓았다. 이어서 3千如 名의 騎兵을 이끌고 北쪽 邊方을 괴롭히는 碑麗國을 占領했다.
이 무렵, 百濟에서는 辰斯王(?~392)이 물러나고 阿莘王(?~405)이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廣開土王은 百濟를 占領하고자 水軍을 앞세워 漢江을 넘어 百濟의 都邑地 慰禮城을 包圍했다. 그러자 百濟의 阿莘王은 크게 沮抗 한 番 하지 못하고 스스로 降伏했다.
廣開土王은 阿莘王을 살려 주고, 代身 그의 同生을 包含해 10如 名을 볼모로 데리고 高句麗로 돌아왔다. 이때 高句麗는 百濟의 58個 城을 占領했다.
한便, 阿莘王은 王子 晪支를 日本에 보내 救援兵을 要請하는 等 다시 高句麗를 攻擊할 準備를 갖추었다. 廣開土王은 그런 情況을 알고 對備를 하고 있는데 新羅에서 使臣이 왔다.
“大王媽媽, 援兵을 보내어 저희 나라를 侵犯한 倭寇를 무찔러 주십시오.”
廣開土王은 卽刻 騎兵 等 軍士 5萬 名을 新羅에 보냈고, 消息을 들은 倭寇들은 곧바로 달아나 버렸다.
百濟의 阿莘王은 高句麗軍이 倭軍을 退却시켰다는 말을 듣고 高句麗를 攻擊하려던 計劃을 抛棄했다.
廣開土王이 南쪽에 神經을 쓰는 사이에 後燕의 慕容熙가 3萬 名의 大軍을 이끌고 高句麗의 北方 要塞인 新城과 南蘇城을 占領했다.
廣開土王은 이를 契機로 北方 征伐을 計劃하고 6萬 名의 大軍을 밤낮으로 訓練시켰다. 그리고 402年, 드디어 遼河를 건너 宿軍城으로 進軍하였다. 宿軍城에는 後燕의 將帥 慕容熙가 陣을 치고 있었다.
마침내 兩쪽 軍士가 맞붙어 싸운 結果 慕容熙는 敗하여 北門으로 달아났다.
宿軍城이 陷落되었다는 消息을 들은 後燕의 다른 城主들은 怯을 먹고 달아나 高句麗軍은 遼東省까지 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 이어서 廣開土王이 高句麗 北쪽의 東扶餘도 征伐하기로 하자 그 消息을 들은 東扶餘의 王은 對降할 수 없음을 깨닫고 降服했다.
東扶餘를 征伐한 廣開土王은 내친김에 肅愼族까지 征伐하기로 했다. 그래서 얼음이 언 牧丹江을 건너 敵陣 속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무찔렀다.
負傷을 입은 肅愼族長은 廣開土王 앞에 무릎을 꿇고 降服했다.
“너희는 前에도 우리나라를 괴롭힌 적이 있는데 앞으로는 絶對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
廣開土王은 族長을 죽이지 않고 타일렀다. 이로써 廣開土王은 北쪽으로 東扶餘, 北扶餘를 征復하고 松花江 流域의 碑麗國과 息愼, 肅眞까지 占領하여 시베리아에 이르는 大帝國을 이루었다. 그러니까 廣開土王은 北쪽의 松花江에서 東쪽의 遼河에 이르는 廣大한 땅을 高句麗의 領土로 만들었던 것이다.
廣開土王은 40歲인 414年에 世上을 떠나고, 뒤를 이어 王子 巨連이 王位에 오르니, 그가 곧 20代 長壽王이다.
50. 국조단군(國祖檀君)
우리나라를 세운 始祖 檀君王儉을 가리키는 말이다. 檀君王儉이 아버지 桓雄의 도움으로 阿斯達(平壤)에 都邑을 定하고 나라 이름을 朝鮮이라 했다. 이 朝鮮이 바로 高朝鮮, 卽 檀君朝鮮이다.
* 三國遺事에.
中國 北魏의 正史 魏書와 檀君古記에 依하면 紀元前2333年, 天帝 桓因 (帝釋天王)의 아들 桓雄이 땅으로 내려가 世上을 다스리고자 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太伯을 내려다보니 果然 人間이 살아갈 만한 곳이므로 天符印 세 個를 주어서 내려가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桓雄은 3千 名의 무리를 거느리고 太白山 (只今의 妙香山) 神壇樹 밑으로 내려오니 그곳을 일어 神市라 하였다. 그는 風伯(바람), 雨師(비), 雲師(구름)를 거느리고 穀(農業), 命(生命), 病(疾病), 刑(刑罰), 善惡(道德) 等 人間世上의 360如 가지 일을 主管하여 世上을 다스리기 始作하였다.
그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桓雄에게 사람이 되기를 願하니 桓雄이 神靈스런 쑥 함 줌과 마늘 20個를 주며 말했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百 日 동안만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人間이 될 것이다.”
그러자 곰은 忍耐心을 가지고 그 말대로 施行하여 三七日 만에 女子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호랑이는 그 期間을 참지 못하고 中間에 窟 밖으로 뛰쳐나가 햇빛을 보는 바람에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女子가 된 곰, 熊女는 婚姻할 相對가 없어 날마다 神壇樹 밑에서 아기 갖기를 祈願하였다. 이에 桓雄이 사람으로 變하여 雄女와 結婚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檀君 (一名 檀君王儉)이다.
檀君은 平壤城에 都邑을 定하고 國號를 朝鮮이라 하였다. 때는 堯 임금 50年이었다. 以後 1500年間 나라를 다스리다가 周나라 武王이 卽位한 己卯年에 箕子를 朝鮮에 封하므로 檀君은 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다시 阿斯達로 옮기고, 거기서 山神이 되었는데 나이가 1908歲였다.
建國神話는 天地가 開闢한 後 陰陽이 생기고, 그 속에서 사람과 森羅萬象이 發生하였으며, 하늘로부터 統治할 사람이 내려와 國家를 建設하고 다스린다는 것이 一般的이다.
檀君 崇拜思想은 高麗와 朝鮮時代를 거쳐 大衆化되었으며, 朝鮮朝 世宗은 平壤에 祠堂을 짓고 檀君과 高句麗 始祖 東明聖王을 함께 모시고 國祖로 받들었다. 그리고 朝鮮 後期에는 檀君敎와 大宗敎가 생겨났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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