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ㄱ–2)
11. 검행위국(儉行爲國)
儉素하게 生活하는 것이 나라를 爲하는 일이라는 뜻으로, 李成桂를 도와 朝鮮 建國에 功을 세운 趙溫의 生活哲學에서 由來했다.
* 韓國歷史 이야기에.
朝鮮 建國 功臣인 趙溫(1347~1417)이 벼슬을 내놓고 閑暇하게 지내고 있을 때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막 벼슬길에 오른 젊은이는 前任 大臣이며 府院君인 趙溫에게 請託하면 出世가 빠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젊은이는 趙溫의 집이 너무 초라한 데 놀랐다. 잘못 찾은 것이 아닐까 하여 머뭇거리다가 사람을 부르니, 안에서 텁수룩하게 차린 老人이 나왔다.
“ 趙溫 大監께서는 안에 계신가?”
“내가 趙溫인데, 무슨 일로 오셨소?”
相對方을 下人으로 알았던 젊은이는 깜작 놀라서 容恕를 빌었다. 趙溫은 부드러운 말로 젊은이를 安心시키고, 房으로 案內했다. 房에는 돗자리가 한 張 달랑 깔려 있고, 冊欌에 冊만 꽂혀 있을 뿐 裝飾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暫時 後, 저녁床이 나왔다. 그런데 床 위에는 보리밥에 飯饌이라고는 나물 된장국 한 가지뿐이었다.
그런 形便없는 食事를 해본 적이 없는 젊은이는 到底히 먹을 수가 없어서 한 숟갈 뜨는 시늉을 하다 수저를 놓았다.
“왜 안 드시오? 素饌이라 입에 맞지 않나 보군.”
“아닙니다. 조금 前에 點心을 들어서 시장하지 않습니다.”
床을 물린 後, 젊은이가 말했다.
“大監께서는 너무 몸을 돌보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趙溫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게 習慣들이기 나름이오. 젊어서는 父母님을 섬기고, 벼슬길에 나서서는 一線에서 主로 生活하다 보니 豪奢하고 便安한 것과는 自然히 멀어졌소이다. 나는 오히려 이런 生活이 便하오.”
“그러나 只今은 벼슬을 그만두셨고, 春秋 또한 높으신데….”
趙溫은 젊은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잘 들으시오. 나는 이제 늙어서 나라 일에 直接 參與하지는 않지만, 百姓과 함께 儉素한 生活을 하는 것 또한 나라를 돕는 일이라고 믿고 있소. 地位가 높아지고 功이 조금 있다고 해서 豪奢를 부리면 안 되오. 부디 이 點을 銘心하시오.”
젊은이는 벼슬에서 물러나서도 이렇듯 儉素하고 淸廉한 趙溫 大監에게 請託을 하러 온 自身의 行動을 뉘우쳤을 뿐 아니라, 나라와 百姓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에 깊이 感動하였다.
12. 견직지간(牽織之間)
牽牛와 織女의 사이라는 말로, 牽牛와 織女의 傳說에서 由來했다. 어쩔 수 없는 事情으로 떨어져 지내는 夫婦나 戀人을 이르는 뜻으로 쓰인다.
* 韓國人의 風俗 野談에.
牽牛와 織女의 說話에서 織女는 하늘나라 玉皇上帝의 딸이고, 牽牛는 牧畜業을 하는 牧童이었다.
귀여움을 獨차지하며 자란 아리따운 織女는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베를 짜는 솜씨도 빼어났다. 그런 織女가 피리를 잘 부는 牧童 牽牛와 父母의 許諾도 없이 사랑을 맺어 交際를 하자 크게 火가 난 玉皇上帝가 命令을 하였다.
“너희 두 사람은 罰을 받아야겠다. 只今부터 牽牛 너는 銀河水의 東쪽으로 가서 소를 몰아 밭을 갈고, 織女 너는 銀河水의 西쪽으로 가서 베를 짜며 살게 하라!”
그래서 牽牛는 東쪽 나라로, 織女는 西쪽 나라로 떠났다. 1年 中 七月七夕날에 한 番씩만 만나도록 命하였다.
牽牛는 牽牛대로, 織女는 織女대로 눈물로 歲月을 보냈다. 사랑하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사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1年이 지나 七夕날이 되자 牽牛와 織女는 각각 銀河水 江가로 갔다. 오랫동안 만나 보지 못한 터이므로 만나면 그동안 쌓인 이야기라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뜻밖에 江의 幅이 너무 넓어서 멀리서 얼굴밖에 볼 수가 없었다. 牽牛와 織女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런데 그 눈물이 地球까지 흘러내리니 地球에는 큰 洪水가 지게 되었다.
그러자 地球에 사는 날짐승들이 모여서 對策을 論議하였다.
“이거 큰일 났군, 가만히 있다가는 몽땅 떠내려가게 생겼어, 비를 그치게 하는 方法은 牽牛와 織女를 만나게 해 주는 것밖에 없겠어.”
“그렇게 하자면 누군가 銀河水에 다리를 놓아야 하는데….”
그때, 智慧로운 비둘기가 말했다.
“하늘로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은 까치님들뿐입니다. 그러니 까치님들께서는 銀河水에 올라가 다리를 놓아 주십시오.”
“좋습니다. 우리가 해보겠습니다.”
다음 해 七夕날, 地球에 있는 모든 까치들은 銀河水로 올라가 머리를 서로 맞대어 다리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牽牛와 織女는 그 다리를 밟고 서로 만나, 그동안 그리워하면서 못 다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 다리를 검을 烏字와 까치 鵲字를 써서 烏鵲橋라고 했다.
每年 七月七夕날이 지나면 까치들의 머리가 벗겨지는데 그것은 牽牛와 織女가 밟고 지나갔기 때문이고, 七夕날 비가 내리는 것은 牽牛와 織女가 만나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라고 한다.
(까마귀와 까치가 다리를 놓었다하여 烏鵲橋라는 說도 있다. 烏<까마귀오> 鵲<까치작> 橋<다리교>)
13. 견훤지말(甄萱之末)
甄萱의 終末이라는 뜻으로, 後百濟의 王 甄萱이 子息에게 逐出된 故事에서 由來했다. 華麗한 生涯의 끝에 悲慘한 終末을 맞게 됨을 比喩
* 三國史記, 韓國歷史 이야기에.
견훤(甄萱.867~935)은 新羅 尙州 加恩縣에서 태어났다. 本來의 姓은 李氏였으나 뒤에 甄氏로 바꾸었다. 아버지 阿慈介는 原來 農夫였는데 나중에 出世하여 將軍이 되었다.
甄萱이 태어나 襁褓 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밭에 나가자 어머니는 밥을 지어 오느라고 아이를 숲 속에 두었는데, 그 사이에 호랑이가 와서 젖을 주니 사람들이 듣고 큰 人物이 될 것이라고 했다.
果然 甄萱이 훗날 後百濟 王으로 登極하니 때는 新羅 孝恭王 4年이었다. 그해 8月에 甄萱이 高麗의 太祖에게 使臣을 보내 駿馬를 바쳤다. 그리고 10月에는 騎兵 3千을 거느리고 曹物城을 侵攻하자 高麗의 太祖(王建)가 精兵을 거느리고 와서 激戰을 벌였으나 勝負를 決定하지 못하였다.
太祖가 平和를 維持하자는 書信을 보내 和親을 請하고 自身의 同生 王信을 볼모로 보내니, 甄萱 亦是 外조카 眞虎를 보내 서로 볼모를 交換했다.
그런데 高麗에 보낸 眞虎가 갑자기 죽자, 甄萱은 太祖가 일부러 죽였을 거라고 疑心하여 王信을 獄에 가두고, 지난해에 보낸 駿馬를 돌려달라 하니 太祖는 王信의 身邊에 問題가 생길 것을 念慮하여 卽時 돌려주었다.
新羅 景哀王 4年 9月, 甄萱이 近品城(聞慶市 所在)을 쳐서 불태우고, 新羅의 고을부(只今의 永川市)를 襲擊하니 景哀王이 高麗의 太祖에게 救援을 要請하므로 太祖가 軍士를 일으켜 援助에 나섰다.
그러자 甄萱은 서둘러 新羅의 徐羅伐로 쳐들어갔다. 그때 景哀王은 鮑石亭에서 술을 마시며 遊興을 즐기다가 敵이 들이닥치자 夫人과 더불어 城南의 別宮으로 避身했다. 甄萱은 軍士를 풀어 닥치는 대로 掠奪케 하고, 別宮에서 景哀王을 죽인 後 景哀王의 同生 金傅로 하여금 王位를 繼承케 했다. 그리고 또 다른 同生 孝廉과 宰相 英景 및 王의 子女와 宮女 等 많은 볼모를 잡아 돌아갔다.
이에 高麗의 太祖가 精銳 騎兵 5千을 이끌고 公山 아래에서 甄萱과 크게 싸웠는데, 太祖의 將帥 金樂과 申崇謙이 敗北하여 죽고, 太祖는 겨우 몸만 逃亡쳤다. 甄萱은 勝勢를 타고 大木郡을 빼앗았다.
新羅 敬順王 6年, 甄萱의 部下 龔直 (?~939)이 甄萱의 奢侈와 無秩序를 보고 失望하여 太祖에게 投降했다. 智略이 뛰어나고 勇敢했던 龔直이 高麗로 가버리자 火가 난 甄萱은 龔直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잡아다 다리의 힘줄을 끊어버렸다.
9月에는 甄萱이 一吉飡 相貴에게 水軍을 주어 高麗의 禮成江에서 鹽州, 白州, 定州의 배 1百 隻을 불태우고, 猪山島의 말 3百 匹을 잡아 오게 했다.
新羅 敬順王 8年 正月, 甄萱은 運州에 高麗의 太祖가 駐屯해 있다는 말을 듣고 곧장 軍士 5千 名을 뽑아 쳐들어갔다. 그러자 高麗의 將軍 黔弼은 甄萱이 陣을 치기도 前에 攻擊하여 3千如 名을 베어 죽이니, 熊津(公州의 옛 地名) 以北의 30如 城의 城主와 甄萱의 術師 宗訓과 醫師 訓謙, 勇將 尙達, 崔弼 等도 太祖에게 投降했다.
甄萱은 아내가 많아 아들을 10名이나 두었다. 그 中에 넷째 아들 金剛이 키가 크고, 智慧가 많았으므로 特別히 사랑하여 王位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자 그 兄 神劍, 良劍, 龍劍 等이 猜忌했다. 그때 良劍은 江州都督, 龍劍은 茂朱都督으로 있었으며, 神劍이 홀로 甄萱의 곁에 있었다.
新羅 敬順王 9年 3月, 神劍은 波珍湌 新德, 英順 等과 함께 甄萱을 金山寺에 가두고, 金剛을 죽였으며, 스스로 大王이라 稱하고 나라를 掌握했다.
甄萱은 金山寺에서 석 달 동안 갇혀 있다가 막내아들 能艾와 딸 衰福, 愛妾 姑比 等을 데리고 金城으로 逃亡쳤다. 그리고 사람을 高麗의 太祖에게 보내 만나기를 請하니, 太祖가 기뻐하며 將軍 庾黔弼, 萬歲 等을 보내 慰勞하고 데려왔다. 그리고 甄萱의 나이가 10年이나 위이므로 尙父 (또는 尙甫)로 삼고, 楊州를 食邑으로, 金, 緋緞, 屛風, 金針, 男女 종 各 40名과 宮中의 말 10匹을 주었다. 甄萱이 太祖에게 말했다.
“老臣이 殿下께 몸을 依託한 것은 殿下의 威力에 힘입어 逆者를 베자는 것이니, 請컨대 强한 軍士를 빌려주시어 不孝者 神劍을 滅하게 해준다면 臣은 죽어도 餘恨이 없겠습니다.”
그리하여 太祖는 그해 9月에 親히 3軍을 거느리고 天安에 이르니, 神劍이 맞이하여 一利川(龜尾. 善山 地域)을 사이에 두고 싸움을 벌였다.
太祖는 將軍 公萱으로 하여금 騎兵 2萬과 步兵 3千으로써 對敵하게 했다.
그 結果 神劍은 두 아우와 將軍 富達, 小達, 能奐 等 40如 名과 함께 降服했다.
終戰 後 軍士裁判에서 神劍은 高麗 太祖에게 部下들의 脅迫으로 어쩔 수 없이 그리된 것이라고 容恕를 求하므로 죽음만은 免케 해 주었다.
그 後 甄萱은 등瘡이 나서 黃山의 한 寺刹에서 生을 마쳤다.
14. 경도낭저(罄到囊儲)
주머니를 모두 털어냈다는 뜻으로, 子息의 成功을 爲해 있는 食糧을 다 털어 밥을 지어 준 眞定法師의 어머니 이야기에서 由來했다. 相對便을 爲하여 가지고 있는 全部를 내어 주는 境遇를 이른다.
* 三國遺事
法師 眞定은 新羅 사람으로 義湘의 10大 弟子 中 한 사람이며, 俗世에 있을 때는 軍隊에 隸屬되어 있었다. 그는 집안이 가난해서 장가도 들지 못하고 軍隊에 服役하면서도 틈틈이 품을 팔아 穀食을 얻어서 홀어머니를 奉養했다. 집안에 財産이라고는 다리 부러진 솥 하나가 全部였다.
하루는 한 스님이 와서 절 지을 쇠붙이를 施主하라고 하자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솥을 내주고 나서 저녁에 眞定이 돌아오자 그 事實을 이야기했다. 眞定은 全혀 언짢은 氣色 없이 오히려 기쁜 얼굴로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佛事에 施主하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비록 솥은 없다 하더라도 먹고사는 데에는 아무 일 없을 것입니다.”
그는 솥 代身 옹기(甕器)그릇으로 飮食을 익혀 어머니를 奉養했다.
그러던 어느 날, 義湘法師가 太白山에서 說法을 한다는 말을 듣고 眞定은 스님이 되었으면 싶어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 義湘法師를 찾아가서 道를 깨우칠까 합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아들 眞定에게 말했다.
“佛法은 만나기 어렵고, 人生은 너무도 빨리 지나가느니라, 네 뜻이 그러하다면 바로 떠나도록 하거라.”
“어머니는 年老하시고, 奉養할 사람은 저 하나뿐인데 끝까지 모시지 못하는 不孝를 容恕하십시오.”
“어미 때문에 네가 出家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 어미를 地獄에 떨어지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하니 어찌 좋은 飮食으로 奉養하는 것만이 孝道가 되겠느냐, 나는 비록 남의 門前에서 衣食을 얻더라도 天壽를 다 누릴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속히 떠나거라.”
어머니는 미낭저(米囊儲 쌀자루)를 모두 털어 밥을 지어 싸주며 말했다.
“가는 途中에 밥을 지어 먹으면 발길이 더디게 될 테니 이 밥을 가지고 가도록 하여라!”
眞定은 흐느껴 울면서 말했다.
“어머니를 홀로 두고 出家하는 것도 子息된 道理로 차마 못할 일이거늘. 하물며 어머니의 米飮거리마저 다 가지고 떠난다면 人間의 道理가 아니지 않습니까?”
眞定이 세 番이나 辭讓했으나 어머니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眞定은 밤낮으로 三 日 동안 걸어 太白山에 들어가 義湘法師에게 歸依하였는데 修養하는 동안에 어머니의 訃告가 왔다. 眞定은 卽時 跏趺坐를 하고 禪定에 들어 어머니를 만나고 7日 만에 깨어났다. 그 後, 解脫의 境地에 올라 每事에 超然했다.
15. 경봉여불(敬奉如佛)
恭敬하기를 부처님 모시듯 하라는 말로, 相對를 至極히 아끼고 恭敬하며 사랑하라는 뜻이다. 平信徒를 그리스도 모시듯 하고, 佛者를 부처님 모시듯 해야 天國이고 極樂이라는 意味이다.
* 宣祖實錄, 朝鮮金石總覽에.
朝鮮時代의 高僧 惟政 (1544~1610)의 俗性은 豊川 任氏이고, 字는 離幻, 號는 四溟堂, 또는 松雲이라 했으며 慶南 密陽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祖父 밑에서 자라다가 13歲 때 慶北 黃嶽山 直指寺에 入山했다.
그 後 妙香山의 休靜 (西山大師)을 찾아가 佛法을 더욱 깊게 修道하고, 楓嶽山 (가을의 金剛山), 八空山, 淸凉山, 太白山 等의 名山을 다니면서 佛道를 깨우쳐 佛家에서 많은 信望을 받았다.
明宗 16年에는 僧科에 及第했으며 奉恩寺 住持로 招聘받았으나 辭讓하고 妙香山으로 들어가 休靜의 法을 이어받았다.
43歲 때 沃州山 上東庵에서 소나기를 맞아 떨어진 꽃잎을 보고 無常함을 깨달아 門下의 弟子들을 解散시키고 홀로 參禪에 精進했다.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休靜의 麾下에서 僧兵을 모아 倭敵과 싸웠다. 또 僧軍都摠攝이 되어 明나라 軍士와 함께 平壤을 收復하는 데 큰 功을 세웠다. 그리고 都元帥 權慄과 함께 宜寧에서 倭敵을 크게 擊破하니, 그 戰功으로 堂上官 (正3品)이 되었다.
그는 倭長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를 세 차례나 만나 談判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가토기요마사가 물었다.
“朝鮮에 어떤 좋은 보배가 있습니까?”
惟政은 躊躇하지 않고 對答했다.
“朝鮮에는 보배가 없고, 日本에는 많습니다.”
“뭐라구요? 보배가 日本에 많다고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나라에서는 當身들의 머리를 보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의 斷乎한 말에 가토기요마사는 肝膽이 서늘했다.
1597年 丁酉再亂이 일어나자 蔚山의 島山에서 戰功을 세우고, 이듬해 順天에서도 크게 이겼다.
그때 日本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고, 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가 政權을 잡고 있었다. 惟政은 그를 만나 말했다.
“두 나라의 百姓들이 塗炭에 빠진 지 이미 오래되어 내가 救濟하기 爲하여 왔습니다.”
도쿠가와이에야스는 그의 慈悲로운 言行에 感服하여 그를 마치 부처와 같이 恭敬하며 極盡한 禮로 待接했다. 그 德澤에 그는 日本과 講和를 順調롭게 맺고 捕虜 3500名을 데리고 돌아왔다. 朝廷에서는 그의 成果를 致賀하여 兵曹判書의 祿을 주고, 御馬를 下賜했으나 辭讓하고 걸어서 海印寺로 돌아가 그곳에서 餘生을 마쳤다.
16. 경승마경(敬乘馬驚)
敬字가 말을 타면 놀랄 驚字가 된다. 朝鮮時代 林漢浩에게서 由來한 말로 難處한 境遇 瞬間的인 才致로 巧妙히 解決하는 行動을 말한다.
* 讀朝野輯要에.
朝鮮 純祖 때 右議政을 判中樞府事 林漢浩(1752~1827)는 當時 벼슬길이 막혀 있던 庶孼 (庶子와 그 子孫)들에게 벼슬길을 열어 준 매우 進步的인 人物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 하루는 글방에서 訓長이 자리를 비우자 親舊들과 글자 풀이 놀이를 하며 놀았다.
“야, 꼬부랑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가는 글자가 뭐지?”
장난꾸러기 書堂 親舊가 묻자 漢浩가 對答했다.
“이에 乃字!”
“글자 생김새를 두고 풀어낸 말이었다.
“그럼 소가 외나무다리 위로 지나가는 字는?”
“그거야 날 生字지!”
소 牛字 이래 가로지른 한 一字가 있으니 하는 말이었다.
“그러면 입 아래 발이 달린 글字는?”
“다만 只字!”
“눈 아래 발이 달린 글자는?”
“야! 그 程度도 모르겠냐? 조개 貝字 아니냐!”
“갓 밑에 발이 있는 글字는?”
“야야! 그건 구멍 穴字야.”
“그럼 스무하룻날, 해가 대나무 밭으로 오는 글字는?”
“그건 戶籍 籍字다.”
대 竹 밑에 올 來하고, 열 十字가 둘이고, 그 밑에 한 一, 또 날 日했으므로 하는 말이었다.
“그럼 三族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아니?”
“그거야 아버지와 아들과 孫子를 말하는 거지, 그러나 系譜를 말할 땐 좀 달라, 親族은 그렇지만 어머니 쪽의 外族과 妻族은 다른 의미를 지니지, 그리고 後孫이라고 할 때의 孫子, 孫字는 아들 子 뒤에 실 糸字를 合해서 쓰는데, 이는 子息이 실처럼 繼續해서 이어진다는 뜻 아니겠어? 이렇게 代를 잇는 것을 世代라고 하는데 十字 세 個가 合쳐진 것을 世라고 하니, 一世代는 三十年을 가리키는 거야.”
“그렇다면 恭敬할 敬字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 아니?”
그런데 漢浩는 미쳐 恭敬할 敬字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지기는 싫어 冊을 뒤적이다 보니 언뜻 말 馬 部에 놀랄 驚字가 있는지라, 됐다 싶어 외쳐댔다.
“허허, 이것 좀 봐! 恭敬할 敬字가 언제 말을 타고 여기에 와 있네. 그것도 모르고 엉뚱한 곳에서 찾으니 없지.”
林漢浩는 才致가 뛰어나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臨機應變으로 解決을 잘하였다.
17. 경지경(更之更)
고친 것을 또 고친다는 뜻으로, 不足함이 많다는 말이다. 最上級은 上之上이고 맨 下級이 更之更인데 그만큼 모자란다는 意味이다.
* 古今淸談에.
朝鮮 成宗 때 正郞 孫永叔이란 사람이 湖南地方에 赴任하였는데 그곳에 紫雲兒라는 妓生이 漢陽에서 내려와 있었다. 孫永叔은 自己의 職位를 利用하여 紫雲兒를 戱弄했으나, 그의 잠자리 能力이 시원치 않아 紫雲兒는 不滿이 많았다.
어느 날, 孫永叔이 儒生들의 詩文을 採點하고 있는 中에 옆에서 구경하던 紫雲兒가 點數를 주는 方法에 對해서 물었다. 孫永叔은 가장 잘된 것은 上之上이고, 차례로 上之中, 上之下, 다음은 二之上, 二之中, 二之下, 그리고 여기에 못 들어간 것은 次上, 次中, 次下라 하며, 맨 꼴찌는 更之更이라 한다고 일러 주었다.
그 後 孫永叔은 서울로 올라가고, 趙稚圭란 사람이 後任으로 내려와 紫雲兒와 잠자리를 하고 나서 물었다.
“너는 그동안 많은 사람을 겪었을 터인데, 내 잠자리 實力은 어느 程度나 되더냐?”
그러자 紫雲兒가 對答했다.
“네, 上之下쯤 됩니다.”
“그러면 漢陽으로 올라간 孫永叔은 어땠느냐?”
孫永叔은 머리가 좋아 工夫는 잘하였으나 女子를 다루는 能力은 形便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妓生에게 採點하는 方法을 가르쳐 주었는데 정작 自己는 그 妓生의 採點에서 맨 꼴찌를 했던 것이다.
18. 계가불요(鷄價不要)
닭값은 必要 없다. 卽 닭값은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自己가 願하는 것은 이미 確保했으니 더 以上의 것은 必要치 않다는 뜻으로 쓰인다.
* 古今笑叢, 韓國諧謔小說大全集에.
淫心이 發動한 男便이 慇懃히 婦人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오늘 밤 궐사(厥事 그 일, 卽 男女 間의 情事)를 當身이 願하는 만큼 해주면 當身은 나에게 무엇으로 報答하겠소?”
婦人이 반색하며 對答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야 숨겨 두었던 細木. (고운 옷감)으로 설빔을 지어 드리지요.”
신이 난 男便이 큰소리를 쳤다.
“當身이 約束만 지킨다면 내 열 番도 더 해 주겠소.”
이렇게 해서 일이 始作되었는데, 男便이 一進一退할 때마다 ‘一次, 二次, 三次…….’ 하고 數를 헤아리자 아내가 버럭 火를 냈다.
“아니, 이건 쥐가 나무를 갉는 것이지 무슨 一次 二次예요? 설빔은 固辭하고 삼베 잠방이도 아깝소.”
“아니, 그럼 當身은 무엇을 一次로 친단 말이오?”
“처음에는 천천히 進入하여 厥物을 玉戶에 가득 채운 다음, 上下와 左衝右突, 九退九進法으로 달래주고, 花心 깊숙이 進入하기를 數十 次 거듭하여 마음과 몸이 蒙然해지고, 소리는 목에 있지만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으며, 눈을 뜨고 보려 해도 뜰 수가 없는 地境에 이르러야 可謂 一次가 되고, 그다음 두 사람이 깨끗이 씻고 나서 다시 始作하는 게 二次가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이 厥事에 對해 論爭하고 있는데 마침 닭서리 꾼이 門 뒤에서 그 말을 엿듣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의 말이 옳소, 男便이 말하는 一次, 二次는 틀려먹었소. 그건 그렇고, 내가 當身네 닭을 술 按酒로 할까 해서 두어 마리 빌려 가니 容恕하시오. 後日 꼭 갚아 드리리다.”
그러자 婦人이 속이 후련하다는 듯이 應答했다.
“明官의 訟決이 그처럼 至公無私하니 그까짓 닭 몇 마리가 뭣이 아깝겠소, 닭값은 그만두시구려.”
19. 계고현량(繫嘎懸梁)
상투를 묶어 大들보에 매달다.
朝鮮 世宗때의 名臣이었던 文貞公(諡號) 西川(號) 어세겸(魚世謙 姓名)은 나이 열일곱에 이르기까지 글 읽기를 좋아하지 않고 씨름만 熱心히 하였다. 아버지 文孝公 魚孝瞻이 判中樞가 되어 正月 大보름에 임금에게 賀禮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길거리의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기를, "오늘 씨름판은 判樞의 아들이 판을 制覇할 것이다."고 함을 듣고, 文孝公이 아들을 꾸짖어 말하기를, "어찌 거친 技術로 길거리에서 名聲을 얻으려 하느냐?"고 하니, 魚世謙이 痛烈하게 스스로를 꾸짖고 冊을 읽는데 상투(上頭)를 묶어 大들보에 매달아서 스스로 졸다가 엎드리지 않게 하더니, 工夫가 날로 發展하여 스물 한 살에 大科에 及第하고 벼슬이 卿宰相에 이르르니, 뜻을 세움이 독실(篤實)하여 이룩함이 있게 된 것이다.
20. 계란유골(鷄卵有骨, 鸡卵有骨)
鷄卵에 뼈가 있다. 運이 나쁜 사람은 모처럼의 좋은 機會가 와도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比喩
朝鮮 世宗 때 領議政을 지낸 黃喜는 淸廉한 生活을 하다 보니 官服도 한 벌밖에 없었으며 장마철에는 집에 비가 샐 程度로 가난했다. 世宗大王은 黃喜를 도와줄 方法을 생각하다가, 하루 동안 새벽에 城門을 열었을 때부터 저녁에 닫을 때까지 門 안으로 들어오는 物件을 다 사서 黃 政丞에게 주도록 措置했다. 그러나 그날은 뜻밖에도 새벽부터 몰아친 暴風雨가 終日토록 멈추지 않아 城을 드나드는 장사치가 한 名도 없었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어 門을 닫으려 할 때 한 사람이 달걀 한 꾸러미를 들고 들어왔다. 黃喜가 달걀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달걀이 모두 곯아서 한 알도 먹을 수가 없었다.
이 이야기는 朝鮮 純祖 때의 學者 趙在三이 지은 松南雜識 方言類에 나온다. 이 成語는 中國에서는 쓰이지 않고 韓國에서만 쓰인다. 여기서 ‘骨’은 ‘곯다’의 音을 따서 쓴 것으로 一種의 가차자(假借字)로 볼 수 있다. 비슷한 純 우리말 俗談으로는 ‘財數 없는 砲手는 곰을 잡아도 熊膽이 없다.’, ‘밀가루 장사를 하면 바람이 불고, 소금 장사를 하면 비가 온다.’ 等이 있다.
또 三可宰相(三可宰丞) 成語도 있는데
요즘 世代에도 吟味해 볼만한 知慧다.
'넌 틀렸어, 네가 맞아' 보다는....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고... 또 네 말도 맞구나...'
그 속에 숨어있는 '中途의 知慧'에 關한 有名한 逸話가 바로 '黃喜 政丞'의 逸話다.
집의 下女 둘이 싸우다가 黃喜 政丞에게 와서 하소연하였다. 한 下女가 自己의 事情을 이야기하자 黃喜 政丞이 말하였다."네 말이 옳구나." 그러자 다른 下女가 自己가 옳다고 主張하였다." 네 말도 옳다." 黃喜 政丞의 對答이 이러했다.
그 光景을 보고 있던 夫人이 말했다." 두 사람이 서로 相反된 이야기를 하는데 둘이 다 옳다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한 사람은 틀려야지요." 그러자 黃喜 政丞은 말했다." 當身의 말도 옳소 兩쪽의 立場 모두 옳다고 받아들이는...
이 矛盾 解法의 知慧는 어떤 것인가?
黃喜 政丞은 公私가 分明하여 是非를 가려야 할 일과 덮어두어야 할 일을 分明히 가려 處身한것이다. 집안의 女子 종들이 일하다가 일어난 싸움은 是非를 가리면 한쪽을 나쁘게 만들어서 오히려 反目이 생겨 더 나쁜 結果를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잘잘못을 가릴 必要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易地思之로 보면 모두 옳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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