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ㄱ–1)
1. 가도공명(假道攻明)
길을 빌려서 明나라를 侵攻한다는 뜻으로, 日本이 朝鮮에게 明나라를 치고자 하니 길을 내달라고 要求하고 그 핑계로 壬辰倭亂을 일으킨 데서 由來했다. 어떤 名分을 내세워 터무니없는 것을 要求하는 것을 比喩
* 東國奇問 · 韓國人名辭典에.
倭寇들은 三國時代 때부터 朝鮮時代에 이르기까지 틈만 나면 玄海灘을 건너와 掠奪과 放火를 서슴치 않았다. 하여 朝鮮에서는 合坐(朝鮮時代 堂上官들이 모여 重要한 일을 議論하던 일)하여 防禦하였으나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貿易의 길을 열어주었다. 卽 世宗이 東萊의 釜山浦, 雍川의 堤浦, 그리고 蔚山의 鹽浦를 열어주어 倭寇들의 擄掠질을 막아내려고 했지만 오히려 더 亂動이 甚해졌다. 그런 가운데 日本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とよとみ ひでよし. 1536~1598)가 百如 年間의 戰國時代를 平定, 60如 州를 統合하여 兵權을 쥐게 되자 大陸 侵略의 野慾을 품고 對馬島主 宗義智 玄蘇를 朝鮮에 보내 明나라를 征服하고자 하니 길을 빌려 달라고 要請했다.
中國의 三十六計兵法 中에 第24計 假途伐虢과 같은 假道攻明 計策을 들고 나온 것이다.
朝鮮에서는 當然히 拒絶하자 도요토미는 征朝令(朝鮮을 征伐한다는 命令)을 내려서 宣祖 25年(1592年) 壬辰年 4月 14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かとう きよまさ. 1562~1611),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こにし ゆきなが. 1555~1600)等을 앞세워 20如 萬 名의 軍士로 侵攻하니, 바로 壬辰倭亂이다.
4月 17日, 慶尙左水使 朴泓으로부터 倭軍이 侵攻했다는 急報가 傳해지자 朝廷에서는 申砬을 三道都巡邊使로, 李鎰을 巡邊使로, 金汝岉을 從事官으로 任命하여 侵攻에 對敵케 하였다.
釜山으로 上陸한 倭軍은 세 길로 나누어 中路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東路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西路는 구로다 나가사마(黑田長政. くろだ ながまさ. 1568~1623)가 맡아 破竹之勢로 北上하자 4月 30日, 宣祖는 結局 平壤으로 蒙塵하는 受侮를 겪어야 했다. 倭軍은 上陸 20日 만인 5月 2日, 서울을 完全히 占領한 後 다시 北進을 繼續하여 40日 만에 平壤까지 陷落시키니 宣祖는 다시 義州로 蒙塵해야 했다.
이때 처음으로 李舜臣으로부터 玉浦에서 勝利했다는 消息이 傳해왔고, 이어서 泗川, 唐浦, 唐項浦, 閑山島에서 거듭 勝戰報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終來에는 釜山浦에서 크게 勝利하여 制海權을 掌握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世界 海軍 歷史上 처음으로 一字陣을 쳤다가 敵이 몰려오면 鶴의 날개로 감싸는 鶴翼陣法을 써 倭軍을 壞滅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水軍 李舜臣과 陸軍 趙憲, 高敬命, 郭再祐 等이 나서서 큰 功을 세웠으나 李舜臣은 露梁海戰에서 敵의 流彈에 最後를 맞았다.
日本이 假道攻明, 또는 假道征明이라는 구실로 일으킨 7年間의 戰爭으로 朝鮮은 國土가 荒廢化되고, 數많은 人命 被害로 百姓은 塗炭에 빠졌으며, 政治 · 經濟 · 文化 · 社會 · 思想 等 各 方面에 深刻한 打擊을 받았다.
2. 가비삼강(家備三綱)
한 집안에서 三綱을 지켰다는 뜻으로, 人倫 道德과 忠節을 잘 지키는 模範된 家庭을 이르는 말이다.
* 義兵들의 抗爭에.
朝鮮 仁祖 때 安州牧使 兼 防禦使 金逡 (1582~1627)은 丁卯胡亂이 일어나자 民兵을 모아서 安州城을 지켰다. 그런데 처음에는 節度使 南以興이 援兵을 보내주어 잘 버텼으나, 後金의 軍士들이 더욱 세차게 攻擊해오자 衆寡不敵으로 21日째 되는 아침에 그만 城이 陷落되고 말았다.
그는 最後까지 城의 기둥을 防牌삼아 敵을 막아내다가 끝내 버티지 못하게 되자 아내와 함께 自決했다. 그러자 그의 아들 金有聲이 하늘을 우러르며 말했다.
“臣下는 나라를 爲하여 죽어야 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復讐를 爲하여 죽어야 하는 것이 道理요, 職分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敵陣 속으로 뛰어들어 勇敢하게 싸워 많은 敵을 무찔렀으나 從來에는 自身도 壯烈하게 戰死했다.
이에 金逡의 아내 金氏도 節槪를 지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媤집간 그의 딸도 節槪을 지키고자 自決하였다.
後日 觀察使 金起宗(1582~1635)이 이 事實을 朝廷에 報告했다.
“한 집안에서 三綱이 穩全히 지켜졌습니다. 金逡이 胡狄과 싸워 戰死한 것은 君爲臣綱이요, 그의 아들과 딸이 戰死하고 自決한 것은 父爲子綱이며, 그의 아내 金氏가 自決한 것은 夫爲婦綱입니다.”
仁祖는 金逡에게 左贊成을 追贈하고, 古埠의 旌忠祠와 忠愍祠에서 祭祀를 지내 그의 忠節을 기리게 했다.
丁卯胡亂과 丙子胡亂은 仁祖가 親明政策을 폄으로써 後金의 太宗과 衝突하게 되어 빚어진 싸움이었다. 그 結果 親明政策을 維持하면서도 後金의 怨恨도 사지 않는 兩面 外交政策을 펴 破國的인 戰亂은 避했으나 敗戰國으로서의 負擔을 덜 수는 없었다.
3. 가사정적(假獅征敵)
가짜 獅子로 敵軍을 征伐한다는 말로, 虛像을 利用한 計略에 依해서 相對를 물리치는 戰略
* 三國遺事, 三國史記에.
新羅 第22代 智證王 때의 將帥 異斯夫는 本名이 朴伊宗으로, 國境을 지키기 爲해 精銳軍을 養成하려고 했다. 그런데 于山國과 居柒山國, 伽倻 等에게 그 事實이 알려지면 紛爭이 생길 것이 憂慮되어 한 꾀를 냈다. 卽 騎兵訓練 때 軍士들에게 女子 옷을 입혀 놀이하는 것처럼 꾸밈으로써 敵의 눈을 속이는 術策이었다. 이렇게 해서 養成된 精銳軍으로 伽倻를 侵攻하니 放心하고 있던 伽倻는 땅을 고스란히 빼앗기고 新羅의 第24代 眞興王 때에 이르러 斯多含에게 征服되어 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526年)
新羅의 朝廷에서 功이 많은 將軍 異斯夫를 阿瑟羅州 (江陵)의 軍主로 任命했다. 軍主가 된 異斯夫는 더욱 軍士 訓練에 熱을 올려 士氣가 絶頂에 이르자, 이番에는 于山國을 倂合시키기로 마음먹고 偵探兵을 보내 그곳의 地勢와 住民들의 氣質을 알아 오도록 했다. 偵探을 마치고 돌아온 兵士가 報告했다.
“于山國 사람들은 健康하며 固執이 셉니다. 따라서 武力으로 屈服시키기에는 힘들 것으로 생각됩니다. 計策을 세우지 않는다면 苦戰할 것입니다.”
異斯夫는 생각 끝에 命令을 내렸다.
“모두들 山에 가서 커다란 통나무를 베어 오도록 하라.”
그렇게 해서 아름드리 통나무를 베어 오자 이番에는 木手를 불러 그 통나무로 獅子의 形像을 만들라고 했다.
木手들은 궁금했지만 시키는 대로 통나무를 깎아 險狀궂게 생긴 獅子 貌樣을 만들었다.
異斯夫는 그것들을 우리 안에 넣어 배에 싣고 于山國으로 갔다. 海岸에 닿자 于山國 軍士들이 언덕 위로 몰려나와 살펴보았다.
그때 뱃머리에 있던 異斯夫가 高喊을 질렀다.
“于山國 사람들은 보아라! 이 獅子들이 무섭지 않느냐!”
배에 실린 獅子를 본 于山國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始作했다.
異斯夫가 다시 소리쳤다.
“너희들이 降服하지 않으면 이 獅子들을 풀어 놓겠다. 獅子들이 얼마나 殘忍한 짐승인지 너희들도 잘 알 터이므로 더 以上 說明은 하지 않겠다. 이 獅子들은 닷새를 굶주렸다. 獅子 밥이 되겠느냐, 아니면 順順히 降伏을 하겠느냐?”
怯에 질린 于山國 사람들은 到底히 싸울 勇氣가 나지 않아 그대로 降伏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異斯夫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于山國을 新羅의 領土로 만드는데 成功했다. 그는 智略이 뛰어난 智將이었다.
4. 가선부금(可船不琴)
배는 괜찮고 거문고는 안 된다는 뜻으로, 李舜臣의 곧은 信念에서 由來한 말로, 어떤 事物이 그 目的에 따라 評價가 다름을 이른다. 事理判斷이 明確할 때를 빗대어 쓴다.
* 朝鮮名人傳, 韓國諧謔小說傳集에.
朝鮮 宣祖 때의 名將 忠武公 李舜臣 (1545~1598)은 諡號가 忠武이고, 漢陽 乾川洞에서 出生하였다. 그는 德水 李氏 貞의 아들로 羲臣, 堯臣, 舜臣, 禹臣 4兄弟 中 셋째였다. 그의 祖父는 兵曹參議를 지냈다.
李舜臣은 武將이었지만 文章과 글씨에도 卓越한 才能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의 孝道하는 마음은 緋緞결같이 곱고 어린아이 처럼 純粹했다. 셋째 아들이면서도 어머니에 對한 孝誠은 누구보다 至極했다.
宣祖 9年(1576年), 나이 32歲에 武科에 合格한 李舜臣은 처음에는 咸鏡道 一帶의 國境을 守備하는 責任者로 任命받았다. 從9品의 하찮은 벼슬에다 매서운 찬바람이 불어오는 北녘에서 오랑캐의 侵略이 있을 때마다 戰鬪를 치러야 하는 苦된 勤務여서 모든 사람이 고개를 저었지만 李舜臣은 全혀 不平하지 않았다.
그는 36歲 되던 해에 全羅道 鉢浦의 水軍 萬戶로 昇進되었다.
鉢浦는 只今의 全羅道 高興郡 道化面 內鉢里에 있는 水軍 陣營으로, 全羅左水營의 管下에 屬해 있었다. 萬戶는 只今의 郡守 職位와 비슷한 正4品 벼슬로서, 그 地域의 守備大將이었다. 그동안 줄곧 陸地에서만 勤務해 온 李舜臣으로서는 水軍을 指揮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어느 날, 李舜臣의 職屬上官인 左水使가 사람을 보내 鉢浦陣의 東軒 앞에 있는 梧桐나무를 베어가겠다고 했다.
李舜臣이 심부름꾼에게 물었다.
“그 나무를 무엇에 쓰시려고 한다더냐?”
“左水使께서 워낙 風流를 즐기는 분이 아닙니까? 그동안 좋은 梧桐나무를 얻으면 거문고를 만들어야겠다고 벼르셨는데, 日前에 이 나무를 보고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뭐라고? 거문고를 만들기 爲해서라고? 戰艦이라면 몰라도 거문고라면 안 된다. 가서 그렇게 傳해라!”
“左水使 어른의 令을 拒逆하시겠다는 겁니까?”
“아무리 웃어른의 令이라 하더라도 不當한 것은 들어줄 수 없다. 나무 하나라도 官廳의 財産은 누구든 私的으로 써서는 안 된다.”
그 말을 傳해들은 左水使는 怒發大發하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흥, 제깟 놈이 剛直한 척한다마는 앞으로는 일하기가 좀 까다로울 것이다.”
果然 얼마 後에 李舜臣은 다른 사람에게 萬戶 職位를 내주어야 했다. 이렇듯 李舜臣은 대나무처럼 곧은 性格 때문에 不利益을 當하기도 했다. 그러나 맡은 바 所任을 默默히 해낸 結果 宣祖 22年인 1589年에는 井邑縣監이 되었다. 그의 나이 45歲 때의 일이니 그리 빠른 出世라고는 할 수 없었다.
父母에 對한 孝誠이 至極했던 李舜臣은 井邑縣監이 되어서도 혼자 지내시는 어머니를 恪別히 奉養했다. 그는 隨時로 어머니께 問安 便紙를 올리곤 했으나 얼굴을 直接 對하지 못하고, 音聲도 直接 듣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宣祖 25年, 壬辰倭亂이 터지자 그는 거북船을 이끌고 玉浦로 나가 倭船 30隻, 泗川에서 13隻, 唐浦에서 20隻, 閑山島에서 70隻, 安骨浦에서 42隻, 釜山에서 1百 隻을 擊破했다. 그것은 海戰 史上 두 番 다시 없을 엄청난 勝利였다.
壬辰倭亂이 일어난 지 3年 째 되던 宣祖 27年(1594年), 李舜臣은 全羅左水營으로 赴任하게 되자 어머니를 十如 里 떨어진 古音川으로 모셨다. 그리고 80 高齡의 어머니를 홀로 두고 떠나면서 李舜臣은 속으로 한없이 울었다. 그의 안타까운 마음과 愛國心이 그때의 日記에 잘 드러나 있다.
‘어버이 살아 계실 때에는 놀 때도 멀리 떨어져 놀지 말라 했거늘 알면서도 實踐할 수 없음은 나라가 어지럽기 때문이 아닌가, 孝道를 하기 爲해서라도 全力을 다해 倭兵을 쳐부술 것이다.’
그해 5月 4日, 李舜臣은 日記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은 나를 나으시고 기르신 어머니의 生辰이다. 子息으로서 마땅히 계신 곳으로 달려가 祝賀하는 술盞을 바쳐야 道理이나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어찌 平生의 恨이 아니겠는가.’
李舜臣은 아들 울(李䓲. 이예)을 자주 古音川으로 보내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도록 했다. 비록 軍務로 因해 自身은 못 간다 하더라도 孫子만이라도 代身 보내 不便한 것이 없나 살펴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忠誠心과 孝心으로 萬人의 우러름을 받아야 할 그도 1597年에는 元均(1540~1597)의 謀陷을 받아 死刑 直前에까지 몰렸다가 鄭琢의 辯護로 살아나 權慄 將軍의 麾下에서 白衣從軍했다. 그러다가 元均이 慘敗하자 또다시 三道水軍統制使에 任命되어 貧弱한 敗殘兵들과 부서진 12隻의 배를 이끌고 鳴梁海戰에서 敵船 31隻을 擊破하는 赫赫한 戰果를 올렸다. 그 後에도 많은 戰果를 거두었으나 이듬해 露梁에서 接戰 中 流彈에 맞아 壯烈하게 戰死했다.
5. 가아소세(加我小勢)
新羅의 花郞 長春郎과 罷郞의 故事에서 由來한 말로, 나에게 작은 힘이라도 보태달라는 뜻이다.
* 三國史記, 三國遺事에.
新羅의 花郞 長春郎과 罷郞이 黃山벌에서 百濟軍과 싸우다가 壯烈하게 戰死했다. 後에 太宗武烈王 (在位654~661)이 百濟를 칠 때 그들이 武烈王의 꿈에 나타나 말했다.
“臣들은 나라를 爲하여 몸을 바쳐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只今은 唐나라 蘇定方의 威嚴에 눌려 꼼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王께서 저희에게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주소서(加我小勢), 그러면 반드시 나라에 報答을 하겠나이다.”
꿈에서 깨어난 武烈王은 怪異하게 여겨 牟山亭에서 두 魂을 爲한 鎭魂祭를 올려주도록 했다. 그리고 漢山州에 莊義寺를 새로 짓고, 그들의 冥福을 빌어주도록 했다.
'三國史記'에는 武烈王이 唐에 請兵을 했으나 回報가 없어서 근심하자 長春郞과 罷郞이 꿈에 나타나 蘇定方이 軍士를 거느리고 來年 5月에 百濟를 치러 온다는 唐의 百濟 征伐 計劃을 알려주었다고 傳한다. 그리고 黃山벌 싸움에서 거듭 失敗함으로써 戰意를 喪失하여 士氣가 沈滯되어 있는 武烈王을 도운 虞國衷情이라 할 수 있다.
한 番도 아니고 여섯 番이나 敗戰한 新羅軍에게 다시 戰意를 새롭게 다지는 일은 決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武烈王은 660年에 羅.唐 聯合軍을 만들어 王子 法敏 (文武王)과 金庾信에게 5萬의 軍士를 주어 百濟를 攻擊, 滅亡시켰다. 이듬해에는 唐나라가 다시 高句麗를 征伐하기 爲해 軍士를 보내 왔으나 武烈王은 三國統一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唐나라를 來往하면서 三國統一의 基礎 作業을 進行시켰으며 善德, 眞德의 두 女王이 新羅를 發展시키는데 크게 寄與하였다.
6. 가야물감야물(加也勿減也勿)
恒常 더하지도 말고 덜하지도 말라는 뜻으로, 人性이 厚하고 즐거움이 넘치는 狀態를 나타내는 말이다.
新羅 儒理王 때 길쌈 試合을 열고 이긴 便에게 술과 飮食을 베풀었던 데서 由來하였다.
* 三國史記 列陽歲時記에.
秋夕은 陰曆 8月 보름날을 가리키는 名節로 그 名稱은 新羅 3代 儒理王(在位 234~57) 때부터 비롯되었다.
8月은 各種 穀食을 收穫하는 時期여서 1年 가운데 가장 큰 名節로 여겼다. 이날이 되면 秋夕빔이라 하여 새 옷으로 갈아 입고, 햅쌀로 송편과 술을 빚으며, 돼지나 닭을 잡아 飮食을 만드는 한便, 온갖 과일을 豊盛하게 準備하여 祖上에게 차례(茶禮)를 올린 後, 家族과 親知들이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祖上의 墓에 省墓를 하고, 恩德을 기렸다.
儒理王 9年, 王은 楊山部는 梁部로 바꾸고 그곳 族長의 姓을 李氏로, 高墟部는 沙梁部로 바꾸고 姓을 崔氏로, 大樹部는 漸梁部로 바꾸고 姓을 孫氏로, 于珍部는 本彼部로 바꾸고 姓을 鄭氏로, 加利部는 漢祗部로 바꾸고, 姓을 裵氏로, 明活部는 習比部로 바꾸고 姓을 薛氏로 各各 指定하여 주었다. 또 6部의 女子들을 두 便로 나누어 7月16日부터 8月 보름날가지 길쌈 試合을 하여 그 成積을 評價하였는데 이때 이긴 便에게는 賞을 주고, 진 便은 이긴 便에게 술과 飮食을 待接하면서 歌舞를 즐겼다. 사람들이 춤을 추면서 ‘會召! 會召!’ 하고 외쳤는데 會召란 어서 모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에는 試合에 져서 안타깝다는 뜻도 담겨 있다. 이 노래가 바로 ‘會召曲’이다.
秋夕에 對한 名稱도 多樣하여 嘉俳 (또는 嘉排), 가위, 仲秋嘉俳라고도 하였다.
季節이 가을로 들어서는 時期여서 새로 옷을 장만했는데 이를 秋夕빔이라고 했다. 이때는 秋收를 한 直後이기에 糧食이 넉넉해서 人心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恒常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흔히 春朝日 秋夕月이라 하는데 이는 봄에는 아침 해가 좋고, 가을에는 저녁달이 좋다는 말로 秋夕 달빛의 아름다움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설날(正初.歲首)과 寒食, 秋夕, 冬至의 네 名節에는 山所에 가서 祭祀를 지냈다. 特히 寒食과 秋夕이 가장 盛大해서 兵卒이나 머슴, 乞人 等 社會에서 疎外되거나 賤待받는 下層民들까지도 이때만은 모두 배불리 먹고 함께 즐겼다.
임금이라는 名稱의 語源도 儒理王 때 誕生되었다. 當時에는 國家의 王을 가리키는 名稱이 따로 있지 않고 儒理 居西干, 次次雄 等의 名稱이 두루 使用되고 있었다. 그런데 居西干이 後繼者를 定할 때 當時의 代表的인 세 部族, 卽 朴, 昔, 金氏 中에서 가장 延長者를 選擇하기로 했다. 그런데 脫解가 임금의 자리를 辭讓하며 말하기를 ‘智慧로운 사람은 이(齒)가 많다고 하니 떡을 깨물어 이빨의 數(잇금)를 세어 定하자.’고 하였다. 尼師今은 本來 方言이었으나 그때부터 나라의 最高 首長을 잇금이라 했고, 이 말이 變하여 임금으로 불러지게 되었다.
儒理王의 治績 中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가난한 百姓을 보살폈던 일이다. 그가 어느 날 巡行을 하다가 한 老婆가 굶주림과 추위에 얼어 죽을 地境이 된 것을 보고 웃옷을 벗어 덮어주며 大臣들에게 말했다.
“不德한 내가 百姓을 달 다스리지 못하여 이 地境에 이르렀도다. 나라 안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홀아비와 홀어미, 孤兒 等 늙고 病들어 스스로 生活할 수 없는 이들을 慰問하고 그들을 救恤하도록 하라.”
그러자 이 所聞을 듣고 이웃나라 百姓들까지 몰려들었다. 이렇게 時局이 安定되고 살기가 便安해지자 百姓들은 兜率歌를 지어 부르니 이것이 歌樂의 始初였다.
7. 가화실화(假話失貨)
거짓말을 하면 돈을 잃는다는 뜻이다. 잃어버린 돈을 찾아준 사람에게 謝禮를 하기가 아까워 벌어진 事件에서 由來한 말로, 眞實하게 살 것을 勸奬하는 金言이다.
* 古今淸談. 韓國人의 智慧에.
井邑 笠岩面에 金萬己라고 吝嗇하기 짝이 없는 구두쇠가 살았는데, 어찌 잘못하여 돈 자루를 잃어버렸다. 마음이 燥急해진 그는 돈 자루를 찾아주는 사람에게 1百 兩이라는 큰돈을 褒賞하겠다고 所聞을 냈다. 며칠 後, 아주 착하고 正直해 보이는 丁判其라는 젊은이가 불룩한 자루를 메고 찾아왔다. 바로 잃어버렸던 그 돈 자루였다.
구두쇠 金 令監은 몹시 기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젊은이에게 주어야 할 1百 兩이 아까워지기 始作했다. 그래서 窮理한 끝에 褒賞金을 주지 않기 위한 꾀를 냈다. 그는 젊은이가 보는 앞에서 자루 속의 돈을 헤아려 보여 주며 말했다.
“그런데 돈이 1百 兩이나 모자라는데 어찌 된 일이냐? 그러니까 네가 이 속에서 1百 兩을 꺼내 간 것이 틀림없다.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官家로 보내 物故를 낼 것이니라.”
젊은이는 어이가 없었으나 自己의 潔白을 證明할 方法이 없으므로 할 수 없이 縣監에게 찾아가 抑鬱함을 呼訴했다.
縣監이 젊은이에게 물었다.
“거짓 없이 말하라. 자루에서 돈을 꺼낸 일이 있는가?”
“어느 顔前이라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런 일은 絶對 없었습니다.”
縣監은 이번에는 구두쇠 金 令監에게 물었다.
“當身의 돈 자루에는 돈이 얼마나 들어 있었는가?”
“8百 兩입니다.”
“틀림없는가?”
“예.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縣監이 嚴肅히 말했다.
“金萬己 當身이 잃어버린 돈 자루에는 8百 兩이 들어 있었고, 丁判其 젊은이가 주운 돈 자루에는 7百 兩이 들어 있었다면 그것은 金萬己 當身의 돈 자루가 아니다. 젊은이는 이 돈 자루를 도로 가지고 가 眞짜 主人이 나타나거든 돌려주도록 하여라.”
그리하여 1百 兩을 아끼려다 7百 兩을 잃은 구두쇠 令監은 배가 아팠지만 아무소리도 못 하고 물러났다.
8. 간자성업(赶者成業)
쫓겨난 者가 큰 일을 이룬다는 말로, 高句麗의 始祖 朱蒙의 故事에서 由來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일이 뜻하지 않게 큰 成果를 이룰 때를 比喩
* 三國史記, 三國遺事에.
高句麗의 始祖 東明王(B.C. 58~B.C. 19)은 이름이 高朱蒙이다. 그의 祖父 解夫婁는 아들이 없었는데, 어느 날 鯤淵. (蓮못)에서 黃蛙 貌樣의 兒童을 發見하고 데려왔다. 그래서 이름을 黃金 개구리란 뜻으로 金蛙라고 짓고, 太子로 세웠다.
그 後 太子가 王이 되어 太白山 南쪽 優渤水에 사냥하러 나갔다가 美貌의 女人 柳花를 만나게 되었다. 柳花는 本是 물을 맡아 다스리는 神 河伯의 딸이었는데 天帝의 아들 解慕漱의 誘惑에 빠져 情을 通했기 때문에 優渤水로 귀양 보내졌던 것이다.
그런 事實을 눈치챈 金蛙王은 柳花를 방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얼마 후 닷 되들이만 한 큰 알을 낳았다. 金蛙王은 좋지 못한 徵兆라 생각하여 알을 갖다 버리도록 했다.
그런데 그 알을 돼지에게 주어도 먹지 않고, 길바닥에 버리면 소와 말이 피해 갔다. 그래서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아와 품어주는 것이었다. 異常히 여겨 알을 깨뜨리려 했으나 깨지지 않자 다시 柳花에게 주었다.
柳花가 그 알을 따뜻하게 싸서 아랫목에 잘 간직해 두니 얼마 後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非凡하고 英特하여 일곱 살 때부터 활을 쏘았는데 百發百中이었다. 그래서 扶餘의 말 中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朱蒙이라 하였다.
金蛙王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지만 그 氣像이나 行實에서 누구도 朱蒙을 따르지 못했다.
이에 長子 帶素가 猜忌하여 朱蒙을 除去해달라고 父王에게 懇請했다. 그러자 金蛙王은 朱蒙을 保護해주기 爲해 말을 기르는 賤한 일을 시켰다.
朱蒙은 좋은 말에게는 飼料를 적게 주고, 나쁜 말에게는 많이 주어 살찌게 하였다. 그러자 金蛙王은 사냥을 나갈 때 自身은 살찐 말을 타고, 朱蒙에게는 야윈 말을 타게 하니 朱蒙이 훨씬 더 많은 짐승을 잡았다.
다른 王子와 臣下들이 陰謀를 꾸며 朱蒙을 없애려 하자 柳花가 朱蒙에게 몸을 操心하라고 일렀다.
朱蒙은 그 말을 듣고 平素에 사귀어 오던 烏伊, 麻離, 협보(陜父)와 함께 逃亡하여 卒本川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國號를 高句麗라 稱하고 自身의 姓은 高氏라 하였다. 이때 朱蒙의 나이는 22歲였으며, 新羅 朴赫居世 21年, 甲申年이었다.
그는 出生이 特別하여 다른 兄弟들의 猜忌를 받고 宮闕에서 逃避했지만 結局에는 나라를 세우는 大業을 이루었다.
9. 개장파장(開場罷場)
場날에 場이 열리자마자 곧바로 끝난다는 말로, 어떤 일이 始作되자마자 끝났다는 뜻. 다른 뜻으로 서로 낫고 못함이 없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 韓國五千年奇文野史에.
京畿道 加平 下面에 살던 老夫婦가 모처럼 배를 타고 旅行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배가 江 中心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暴風雨가 몰아쳐 배가 甚하게 搖動치면서 뒤집힐 것처럼 흔들렸다.
그런데도 男便은 搖之不動 淡淡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런 男便을 보고 아내가 물었다.
“當身은 배가 이렇게 甚하게 흔들리는데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그러자 男便은 갑자기 차고 있던 시퍼런 칼을 뽑아 아내의 목에 겨누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怯을 먹기는커녕 피식 웃으면서 男便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자 男便이 아내에게 말했다.
“只今 웃음이 나와요? 조금만 움직여도 목에 칼이 꽂힐 판인데…….”
이에 아내가 微笑를 지으면서 말했다.
“勿論 칼은 무섭지요. 하지만 칼이 當身 손에 들려 있는 한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男便이 칼을 치우며 말했다.
“暴風雨도 마찬가지요, 當身이 나를 믿듯 저 老鍊한 船長을 믿는다면 두려울 것이 없소.”
對答하기가 男便이나 아내나 피장파장이었다.
그런데 이 피장파장이란 말의 語源은 ‘開場罷場, 卽 場을 열었다가 罷場한다.’는 말에서 그 由來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까 보따리 商人들이 市場에 物件을 팔기 爲해 場바닥에 펴는 것이 피장이요, 해가 지면 거두어 싸는 것이 파장이다.
只今은 路上에서 物件을 파는 것이 흔치 않지만 예전의 우리나라 傳統 場은 大部分 空地에 天幕을 치거나 그냥 路上에 商品을 파는 것으로 이루어졌었다.
때문에 그 場이 열리고 거두어 싸는 것을 이르는 말이 純粹 우리말로 피장파장이고 (辭典的 解釋 ~ 서로 낫고 못함이 없거나 相對方의 行動에 따라 그와 같은 行動으로 맞서는 일) 漢字말로는 開場罷場이라고 쓴다.
이 外에도 꽃이 ‘피다’ 는 말이 있는데 사람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는 말도 같은 意味다. 이 피다의 피가 펴는 場이고 다 끝나고 짐을 싸는 일이 罷한다는 뜻의 罷場이다.
10. 거정지의(巨正之義)
巨正의 義理라는 말로, 朝鮮時代의 義賊 林꺽정에게서 由來했다. 自身이 어려움에 處해 있음에도 不拘하고 自身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境遇를 比喩
* 古今淸談에.
朝鮮 明宗 때 義賊 임꺽정(林巨正.?~1562)은 楊洲에서 白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힘이 壯士였다.
明宗10年, 倭寇가 쳐들어오자 林꺽정(林巪正. 임걱정)은 愛國心이 發動하여 싸움터에 나가 큰 功을 세웠으나 白丁의 아들이라는 理由 때문에 아무 벼슬도 얻지 못하였다.
이에 不滿을 품은 그는 部下들을 거느리고 黃海道 一帶를 누비며 官家나 富者집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義賊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朝廷의 立場에서 보면 대낮에 官衙를 襲擊하고 官吏를 殺害하는 等 國家의 紀綱을 흔드는 凶暴한 盜賊이었다.
그해 봄, 明宗이 文定大妃 尹氏에게 보내는 生鮮 膳物을 林꺽정의 무리들이 몽땅 털어가 버렸다. 明宗은 李億根을 捕盜官으로 任命하고 軍士 3百을 주어 이들을 討伐하게 했다.
李億根은 林꺽정의 무리들을 얕잡아 보고 느긋한 마음으로 出發했다. 靑石골 골짜기 곳곳에 埋伏하고 있던 林꺽정의 部下들은 餘有롭게 行軍하던 官軍을 奇襲하여 李億根을 비롯한 모두를 全滅시켜 버렸다. 그러자 朝廷에서는 다시 將帥 南致勤과 李夢麟을 보냈다.
“애들아, 官軍이 또 오신단다. 마중 나가자.”
林꺽정은 官軍이 지나는 길목인 가막재에 숨어 기다렸다. 官軍은 둘로 나누어 李夢麟은 가막재로 가고, 南致勤은 林꺽정의 山寨로 直接 쳐들어갔다.
林꺽정은 가막재에서 李夢麟의 官軍을 痛快하게 殲滅하고 山寨로 와 보니 아내와 子息들이 모두 잡혀 가고 집 또한 잿더미로 變해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九月山으로 들어간 林꺽정은 部下 徐林에게 아내와 子息을 救出해 오라고 하였다. 徐林은 兩班 차림을 하고 漢陽에 숨어 들어 獄門을 부수고 林꺽정의 아내와 子息을 救出해 내는데 成功했다.
그러나 李夢麟의 後任으로 온 捕盜大將 金淳高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南大門 옆 한 客酒집에 林꺽정의 參謀 徐林과 內通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두었다. 徐林과 그 部下들이 그 집에 묵게 되면 그때 덮치기 爲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後 그 酒幕에 徐林의 一行이 到着했다는 報告를 받자 金淳高는 官軍을 出動시켜 全員 拏捕하고, 林꺽정의 兄 加都致도 붙잡았다.
徐林과 加都致가 붙들리자 林꺽정은 더욱 거세게 官軍을 攻擊했다. 金淳高와 南致勤은 林꺽정을 잡으려고 徐林을 懷柔했다.
徐林은 이제 살길은 官을 돕는 일뿐이라 생각하고 變心하여 官의 앞잡이가 되었다.
官軍에게 投降한 徐林이 情報를 提供하는 바람에 林꺽정의 싸움은 番番이 慘敗했다. 그러자 部下들은 모두 降服을 했고, 마땅히 숨을 곳이 없던 林꺽정은 官軍의 옷을 빼앗아 입고 그들 틈에 끼어 隱身했다. 그러나 結局 그의 身分이 綻露나 官軍이 一齊히 쏘아대는 화살을 맞고 죽고 말았다.
그때가 明宗 17年, 5年 동안 黃海道 一帶를 주름잡던 林꺽정은 心腹 徐林의 背信에 悲慘한 最後를 맞게 되었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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