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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한자성어(漢字成語)**/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ㄱ–3)

by 산산바다 2026. 2. 21.

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글 목록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3)

 

 

21. 고병헌구(姑病獻狗)

()어머니 病患에 기르던 개를 奉養 하다.

 

* 大同小學 明倫篇.

김병렬의 아내 洪氏洪宗漢의 딸이다. 나이 스물에 金氏에게 집와서 媤父母를 잘 섬기었다. 어머니가 80이 지남에 들어 누우신지 7~8이 되었는데도 精誠을 다해 奉養하였다.

하루는 뒤뜰에 까마귀가 시끄럽게 울어대니, 洪氏가 놀라 쳐다보며, 말하기를 "까마귀야, 네 울음이 한 것이냐? 한 것이냐? 한 것이거든 우리 어머니 을 낫게 하고, 한 것이거든 내게 오너라."라고 하니 까마귀가 울음을 멈추었고, 어머니의 病患差度가 있었다.

나중에 또한 危重하고 泄瀉로 고치기 어렵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개고기를 잡숫고자 하였다.

洪氏가 기르던 개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머금고 말하기를, "네가 몇 을 나와 같이 한솥밥을 먹었으니 사람과 動物이 다르다고는 하나 한 食口나 다름없는데, 哀惜함을 그칠 길 없다. 또한 내 손으로 죽이자면 어머니가 그 소리를 듣고 놀라실 듯하구나."라 하니, 개가 그 소리를 듣고 몇 바퀴 맴돌다가 뜰에 엎드려 죽음에, 그 고기를 奉養하였다.

 

 

22. 계림지신(鷄林之臣)

鷄林臣下라는 말로, 新羅忠臣 朴堤上에게서 由來했다. 죽어도 祖國背叛하지 않겠다는 信念을 지닌 사람을 가리킨다.

 

* 三國遺事.

新羅 第17내물왕(奈勿王 36391), 新羅名實共國家로서의 體制를 갖추자, 바다 건너 倭王使臣을 보내왔다.

우리나라 陛下名聲을 듣고 서로 和親을 맺고자 하신다고 아뢰라고 하셨습니다. 컨대 陛下께선 王子 한 분을 저희 에게 보내시어 誠義를 보여주소서.”

奈勿王은 셋째 王子 未斯欣 (또는 美海)을 볼모로 보내기로 했으나 未斯欣은 나이 겨우 열 살이라 臣下 朴娑覽副使로 딸려 보냈다. 倭王은 이들을 抑留하고 30이 지나도록 보내주지 않았다.

奈勿王逝去하자 太子 訥祗가 어리므로 13代 味鄒王의 조카를 18代 王으로 推戴하니 實聖王이다. 그러나 訥祗猜忌하여 殺害하려다가 오히려 自己가 죽음을 하였다. 그리하여 訥祗19代 王으로 卽位하여 3째 되던 해(419) 에는 高句麗長壽王使臣을 보내왔다.

우리나라 께서 大王同生 卜好 (一名 寶海)님이 뛰어난 智慧주를 지녔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서로 友誼敦篤하게 지내기를 懇請하십니다.

訥祗王은 그렇지 않아도 頻繁國境侵犯해오는 高句麗和親을 하고 싶었던 참이라 臣下 金武謁隨行케 하여 선선히 아우 卜好를 보내주었다. 그러나 長壽王 亦是 卜好抑留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訥祗王卽位한 지도 於焉間 10, 未斯欣倭國抑留된 지 36째로 접어들었고, 高句麗卜好8째가 되었다. 歲月이 갈수록 訥祗王은 두 아우의 일로 傷心이 커졌다.

그래서 어느 날, 臣下들을 불러 놓고 宴會를 베풀었다. 이 서너 차례 돌아가고 宴會가 무르익어 갈 즈음, 은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난날 先王께선 眞心으로 百姓들의 安寧念慮하시었소,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을 볼모로 倭國으로 보내시고 끝내 그 아들의 얼굴을 못 보신 채 눈을 감으셨소, 卽位한 뒤 이웃나라 高句麗가 너무 强盛하여 戰爭이 그치지 않았는데 和親을 맺자는 말을 믿고서 同生을 보냈소, 그런데 高句麗 또한 只今同生을 돌려보내지 않고 있소. 내가 비록 의 자리에 올라 있으나 어느 하루도 두 아우가 잊혀지는 날이 없소. 萬若 두 아우를 만나 先王魂靈 앞에 人事를 드릴 수 있게 해준다면 그 恩惠를 꼭 갚으리다. 이 일을 遂行할 만한 사람 누구 없소?”

呼訴를 들은 臣下들이 悚懼스런 마음으로 아뢰었다.

이 일은 容易한 일이 아니어서 智慧勇氣를 갖춘 사람이라야 해낼 수 있나이다. 저희들의 생각으로는 歃羅郡太守朴堤上(三國遺事에는 金提上으로 表記)이 가장 適合한 사람으로 思料되나이다.”

卽時 堤上을 부르니 그는 한걸음에 달려와 아뢰었다.

大王께 근심이 있다면 臣下로서 名譽롭지 못한 일이오니 臣下는 그 일을 해 목숨도 不辭해야 할 것이옵니다. 萬若 일의 어렵고 쉬움을 따진 뒤에야 한다면 그것은 眞定忠臣이 아닙니다. 이 비록 못난 사람이긴 하오나 을 받들어 遂行하겠나이다.”

訥祗王堤上忠誠勇氣를 거듭 稱讚하고 그를 高句麗로 보냈다.

堤上卽時 高句麗 땅에 潛入, 變裝을 하고 卜好를 찾아가서 5보름날 脫出圖謀하겠다고 計劃을 알려주었다. 約束한 날, 堤上只今江原道 高城 港灣에 배를 대놓고 기다렸다. 卜好는 밤王城을 빠져나와 바닷가로 내달렸다. 뒤늦게 卜好逃亡事實을 안 長壽王軍士들로 하여금 追擊케 한 結果 高城에 이르러 卜好發見했다.

그런데 卜好高句麗抑留當해 있을 때 周圍사람들에게 많은 溫情을 베풀어 人心을 얻어 두었었다. 그날 그를 쫓던 軍士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卜好를 살려 보내주고 싶어서 화살에서 살촉을 빼고 쏘았다. 때문에 卜好無事逃亡하여 그리웠던 故鄕, 新羅로 돌아올 수 있었다.

訥祗王卜好를 만나니 倭國에서 오랜 歲月, 望鄕에 젖어 있을 未斯欣의 생각이 더욱 懇切해졌다. 그래서 기쁨과 슬픔이 엇갈리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臣下들에게 말했다.

마치 몸에 한쪽 팔과 한쪽 눈만 있는 것 같소. 비록 한쪽은 얻었으나 다른 한쪽이 없으니 如前히 마음이 아프구려!”

堤上은 다시 悲壯決心을 하고 곧장 栗浦 바닷가로 내달렸다.

堤上의 아내는 男便倭國으로 건너가기 栗浦로 갔다는 말을 듣고는 히 뒤쫓아 갔다. 栗浦에 이르렀을 때 堤上이 탄 배는 이미 바다 한가운데로 떠나가고 있었다. 堤上의 아내는 哀絶하게 男便의 이름을 불렀다. 堤上은 손을 흔들어 보였으나 배는 이내 아물아물 水平線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堤上倭國上陸하자 일단 거짓말로 倭人들에게 말했다.

나는 新羅 사람인데 新羅王이 아무런 도 없는 나의 父母를 죽였기 때문에 이곳으로 逃亡쳐왔소.”

倭王堤上의 말을 그대로 믿고 그에게 집을 주어 安住케 했다.

堤上은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아 倭王에게 바쳐 歡心을 사는 한便, 隱密하게 王子 未斯欣과 만나 自己가 찾아온 目的을 말하였다.

어느 날 새벽에 안개가 짙게 끼자 堤上未斯欣에게 말했다.

이런 날이 좋습니다. 어서 먼저 떠나십시오. 저까지 함께 사라지면 倭人들이 알아채고 뒤쫓아 올 것이니 저는 여기 남아서 뒤쫓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只今 나에게 있어 그대는 나의 父兄과 같은데 어찌 그대를 버려두고 혼자 가겠는가?”

生命할 수만 있다면 滿足할 뿐이지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하오니 제 걱정은 마시고 어서 떠나십시오.”

堤上鷄林 사람 康仇麗未斯欣에게 딸려 보냈다.

다음날 아침, 倭人들이 未斯欣을 살피러 으로 들어가려 하자 堤上制止하며 말했다.

어제 사냥을 하느라 疲困하셔서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으니 기다리도록 하시오.”

해가 기울자 監視員들이 異常하게 여겨 다시 물었다.

이제 일어나실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제야 堤上이 바르게 말했다.

未斯欣 王子께서는 이미 新羅로 떠난 지가 오래되었소.”

報告를 받은 倭王騎兵으로 하여금 뒤쫓게 했으나 붙잡지 못했다. 이에 堤上을 가두고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나 몰래 未斯欣 王子를 보냈느냐?”

나는 鷄林臣下이지 倭國臣下가 아니오. 따라서 우리 임금의 뜻을 따를 뿐인데 어찌 그런 事實을 그대에게 말하겠소?”

倭王하여 말했다.

너는 내 나라에 온 것으로 이미 내 臣下가 되었으니 이제부터 鷄林臣下라고 말하면 五刑 (얼굴 皮膚에 먹물을 넣는 刺字刑, 코를 베는 , 발뒤꿈치를 베는 , 불알을 없애는 宮刑, 목을 베어 죽이는 )할 것이고, 나의 臣下라고 말하면 祿을 주겠다.”

차라리 鷄林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當身臣下는 되지 않겠으며, 鷄林 王의 매를 맞을지언정 當身祿은 받지 않겠소.”

極度가 난 倭王堤上의 발바닥 살을 도려낸 후 갈대밭의 갈대를 짧게 베어 그 위를 걷게 하였다. 오늘날 갈대에 핏물이 들어있는 것은 그때 朴堤上의 피라고 한다.

倭王刑罰한 다음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臣下인가?”

鷄林臣下.”

그러자 倭王堤上을 뜨거운 鐵板 위에 서게 하고 다시 물었다.

그대는 어느 나라 臣下인가?”

鷄林臣下.”

倭王堤上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木島로 데려가 불태워 죽였다.

便, 未斯欣新羅到着하여 康仇麗로 하여금 먼저 에게 알리니, 이 놀라고 기뻐하며 同生 卜好와 함께 郊外에까지 나가 맞았다. 그리고 大闕로 돌아와 宴會를 베풀고, 들을 모두 赦免하는 한便, 堤上의 아내에게 國大夫人이란 爵位를 내리고 그의 딸을 未斯欣夫人으로 맞았다.

堤上의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은 곧잘 옛 나라의 臣下 周苛에 견주곤 하였다.

周苛나라 劉邦臣下였는데 滎陽 땅에서 나라 軍士들의 捕虜가 되었다. 楚王 項羽周苛에게 물었다.

 

나의 臣下가 되면 萬戶를 주고, 諸侯로 삼겠다.”

周苛는 오히려 項羽를 꾸짖고 끝내 굽히지 않아 項羽에게 죽임을 하고 말았는데 堤上忠烈은 그에 해 조금도 못하지 않았다.

앞서 堤上倭國으로 떠날 때 그의 夫人이 그 消息을 듣고 뒤쫓아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望德寺 門 南쪽의 모랫벌에 누워 길게 울부짖었다 하여 그곳 모랫벌을 長沙라고 했다. 그리고 親戚들이 그를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夫人이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 일어나지 않았던 곳은 伐知旨라 했다.

그 뒤에 夫人男便한 그리움을 누를 길이 없어 세 딸을 데리고 鵄述嶺 고개 위에 올라가서 바다 건너 아득히 倭國을 바라보며 痛哭하다 그대로 죽으니 몸은 望夫石이 되고, 鵄述神母가 되었다.

 

 

23. 계명수하(鷄鳴樹下)

닭이 나무 밑에서 운다는 말로, 祥瑞로운 일이 생길 때에 나타나는 조짐(兆斟)을 뜻한다. 김알지(金閼智)誕生說話에서 由來했다.

 

* 三國史記.

新羅初期의 큰 人物 中에는 特異說話를 가진 사람이 많았다. 1代 王朴赫居世4代 王 석탈해(昔脫解)는 알에서 태어났고, 慶州 金氏始祖인 김알지(金閼智 65~?)는 금궤(金櫃)에서 出現했다.

탈해니사금(脫解尼師今), 卽 脫解王의 아버지는 多婆那國으로, 耽羅國 (只今濟州道)女人王女로 맞았는데, 그의 夫人7만에 커다란 알을 낳았다. 그러자 祥瑞롭지 못하다 하여 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짝이 波濤에 밀려 辰韓阿珍浦에까지 떠내려갔다. 그곳에서 한 늙은이가 짝을 引揚하여 열어 보니 그 속에 어린 아이가 있었다. 이때가 朴赫居世 在位 39의 일이었다.

그래서 아이의 짝이 처음 發見될 때 까치가 울고 있었기 때문에 까치 鵲字의 한 昔氏로 하고, 짝을 열고 나왔으므로 脫解라고 지었다.

脫解는 고기잡이를 하며 살았는데 키가 長大하고 頭腦明晳하였다. 所聞을 들은 南解王은 그를 公主結婚시켜 大輔登用하고 政事를 맡겼다.

後 南海王이 죽을 적에 아들 儒理와 사위 脫解에게 일렀다.

너희들 이 나이 많은 順序王位를 잇게 하라.”

그리고 잇금의 年長者를 가려 王位에 오르게 하니 昔脫解이 되었다.

脫解王 93이 밤에 金星 西始林을 지나다가 숲 속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瓠公派遣하여 살펴보게 했다. 그가 始林에 이르러 보니 紫朱色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뻗쳤는데, 그 빛은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黃金 櫃를 비추고 있고, 그 나무 밑에서는 흰 닭이 울고 있었다. 하여 卽時 王에게 報告했다.

짝을 가져오게 하여 열어 보니 그 속에 갓난 사내아이가 누워 있었다. 은 크게 기뻐하며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고 거두어 길렀다. 그리고 이름은 閼智라고 하되 金櫃에서 나온 意味를 살려 金氏라 했다. 始林을 고쳐 鷄林으로 하고 國號로 삼았다. 閼智란 어린아이란 뜻이다.

閼智를 수레에 싣고 大闕로 돌아오는데 새와 짐승들이 서로 뒤따르면서 기뻐 춤추었다. 吉日을 가려 太子冊封했으나 閼智王位婆娑에게 辭讓하고 오르지 않았다.

閼智長成하여 熱漢을 낳고, 熱漢阿都를 낳고, 阿都首留를 낳고, 首留郁部를 낳고, 郁部俱道 (또는 仇刀)를 낳고, 俱道未鄒를 낳았는데, 未鄒王位에 오르니, 新羅金氏는 바로 이 閼智로부터 繁盛하게 되었다.

金閼智慶州 金氏始祖이다.

 

 

24. 계살처노(階殺妻孥)

계백(階伯)妻子息을 죽이다. 百濟將軍 階伯戰場에 나아가기 戰爭에서 했을 때를 對備하여 妻子息을 죽인 고사에서 由來했다. 어떤 일을 하기 에 그와 關聯된 일을 깨끗이 整理하고 最善을 다하는 것을 뜻한다.

 

* 三國遺事. 三國史記.

階伯(?~660)百濟將帥로서 .唐 聯合軍侵入을 막다가 黃山벌에서 壯烈戰死했다. 職位達率이었다.

百濟 義慈王 20(660), 唐 高宗蘇定方神丘道大摠管으로 삼아 新羅聯合하여 百濟侵攻했다. 이에 階伯決死隊 5千 名을 거느리고 羅唐 聯合軍決死 抗拒했다. 그러나 黃山벌 싸움에서 聯合軍氣勢에 밀려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자 家族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侵略者 唐 나라와 新羅大軍을 맞아 國家存亡을 알 수 없게 되었다. 萬一 이 싸움에서 진다면 너희들은 모두 들의 奴婢가 되어 恥辱하게 될 것이니 그보다는 차라리 이 아비의 손에 깨끗이 죽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러자 家族들은 階伯의 말에 따르겠다고 했다. 階伯은 눈물을 머금고 家族들을 自己 손으로 죽였다. 歷史假定이란 있을 수 없지만 깊이 생각하여야 할 餘地가 있다. 예나 只今이나 戰爭諜報勝利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싸움이 끝나기도 에 먼저 家族들을 自己 손으로 죽인 다음 戰爭터로 나간 事實이다. 그리고 그는 黃山 들판에 이르러 新羅 金庾信軍士 5萬 名對決하였다. 階伯決然意志壯兵들에게 最後訓示를 했다.

옛날에 나라의 句踐5千 名軍士로써 나라의 70萬 大軍擊破했다. 오늘 여러분들도 奮發하여 勝利爭取함으로써 國恩報答하도록 하라.”

죽음을 覺悟兵士들이 물밀듯이 쳐들어가서 한 사람이 千 名해 내니, 그야말로 一當千勇氣로 싸웠다. 이와 같이 서로 進退 하기를 네 이나 거듭하며 激戰했으나 官昌의 죽음으로 士氣가 오른 新羅軍總攻擊을 받고 百濟軍重寡不敵으로 敗退하고, 階伯도 힘이 다하여 結局 戰死했다.

여기에서 派生된 말로 決死隊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죽음을 覺悟한 무리, 또는 軍隊라는 뜻이다.

 

 

25. 견금여석(見金如石)

'黃金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풀이되며, 財物해 지나친 慾心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 큰 뜻을 이루기 富貴榮華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 慵齋叢話에 나온다.

최영(崔瑩) 將軍 하면 떠오르는 句節이 바로 "黃金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見金如石)이다.

그런데 흔히 "見金如石"崔瑩 將軍直接 한 말로 알려져 있는데, 崔瑩父親崔瑩에게 남겨준 말이다.

鐵原府院君 崔瑩이 어릴 때 그 아버지(元直)恒常 그에게 訓示하면서 말하기를 "黃金 보기를 돌같이 하라."하니, 崔瑩恒常 이 네 글자를 띠에 써서 죽을 때까지 가슴에 새겨 잃지 않았다.

비록 國政을 잡고 威嚴이 나라의 안팎까지 알려졌지만, 하나의 터럭이라도 남에게서 함이 없었고 집안은 겨우 먹는 것에 滿足할 뿐이었다.

 

그는 살찐 말을 타고 좋은 옷을 입고 거드름을 피우며 편안히 居處하며 豪華를 일삼는 를 보면 개돼지와 같이 여겼다.

當時 宰相들은 다투어가며 서로 招請하여 珍羞盛饌을 베풀어 奢侈를 자랑하나 홀로 崔瑩은 손을 맞이할 때는 해지기를 기다려 시장기가 한창 들 적에 나물밥을 내어놓으므로 주렸던 손들은 시장이 飯饌이라 그나마 달게 먹으며 "鐵城 (君號)飮食은 매우 맛이 있다." 하니 崔瑩"이도 또한 用兵이다."하고 웃었다는 逸話가 있는바 이러한 그의 儉約精神當時紊亂紀綱을 바로잡고 國政刷新하여 暗躍禑王을 도와 社稷便安케 하려던 것이 그의 鐵石 같은 一念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그의 身分將帥宰相에 있었고 오랫동안 兵權을 맡아보았어도 賂物을 주고받는 不正을 행하지 않았고 으로 내려준 功田國家庫間이 비었다 하여 다 辭讓하고 받지 아니하고 스스로 米穀을 내어 軍糧補充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그는 天性淸廉潔白 한데다 아버지의 '을 돌로 보라'見金如石遺訓銘心 銘心하여 實踐에 옮긴 것이다.

73白髮 老將인 그는 刑場에서 숨을 거두기 泰然히 말하기를 "내가 平生貪慾의 마음을 가졌다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요, 그렇지 않았다면 나지 않을 것이다." 고 말하였는데 果然 그의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아 '적분(赤墳)'이라고 불리었다.

見金如石의 마음가짐으로 貪慾을 버리고 國政에만 專念 紛骨碎身하여, 우리의 高位指導者들도 死後 무덤에 풀이 나지 않는 赤墳이 많았으면 좋겠다.

[原文]

崔鐵原瑩 少時 其父 常戒之曰 見金如石 瑩 常以四字 書諸紳 終身服膺而已勿失 雖秉國政 威行中外 而一毫 不取於人 家才足食而已.

 

 

26. 고시례(高矢禮)

고시(高矢)에게 드리는 , 檀君時代農事 짓는 을 가르쳐 주는 高矢에게 를 차린다는 뜻이다. 農民들이 들녘에서 참을 먹거나 點心을 먹을 때 맨 처음 술이나 밥을 周圍에 던지며 외치는 말이다.

 

* 韓國民俗談.

高矢라는 말은 檀君 王儉이 나라를 세운 後 農事짓는 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내린 職策으로 只今農林部長官과 같은 職位였다. <神市本紀>記錄에는 當時農民들은 高矢指示하여 農事 짓는 을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그 을 잊지 않기 해서 일을 하다가 참을 먹거나 點心食事 때 먼저 를 갖추는 告祀를 지냈던 것을 오늘날의 고시례(高矢禮)라고 한다. 그런데 或者飮食에 따라온 鬼神을 쫓고 들판에 있는 雜鬼를 좇기 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 先祖들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런 由來只今飮食을 먹기 에 먼저 떼서 던지며 高矢禮하고 외치는 風習으로 남게 되었다.

이런 慣習이 나중에는 남의 집에서 飮食을 가져와도 먼저 한 쪽을 떼서 던지며 高矢禮하는 儀禮的慣習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는 中國 神話에서 農事主管하는 炎帝 神農氏보다 훨씬 앞선 일이다.

더러는 이를 迷神이라고 置簿하는 境遇도 있으나 이는 우리 民族正體性을 나타내 주는 貴重民俗임을 認識하여야 할 것이다. 또 우리 先祖들이 감나무에 까치밥을 남겨 놓아 自然과 더불어 親和的으로 나누고자 했던 心情的美德도 같은 範疇라 할 것이다.

名節이나 祭祀의 차례상(茶禮床)을 올릴 때 茶 代身 술을 먼저 茅沙에 조금씩 세 번 따른 뒤 神主 앞에 올리는데, 이 또한 高矢에게 를 표했던 것처럼 祖上님께 를 표하는 行位.

위에서 말한 차례(茶禮) 또한 우리 先祖들이 술 代身 茶祖上께 올린 데서 비롯되었다. 禮物에서 가장 禮物였음은 朝鮮時代婚禮 必需 禮物이었던 만 봐도 充分證明되고 있다. 先人들의 恩惠感謝를 이처럼 잊지 않고 표했던 것이 우리 民族이다. 그러니까 위의 는 우리 先祖들이 農事 짓는 을 가르쳐준 高矢感謝히 여기는 마음에서였다. 地方에 따라 高矢禮나 고수례, 고수레, 高矢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그 意味나 뜻은 위와 같다.

 

 

27. 곡경능지(曲逕凌遲)

곡경(曲逕)不正事由勢力을 잡는다는 뜻이고, 능지(凌遲)는 능지처참(凌遲處斬)의 준말로, 罪人四枝를 베는 極刑을 말한다. 不正하게 權勢를 잡아 榮華를 누리면 끝에 가서는 極刑하게 된다는 뜻이다.

 

*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朝鮮時代 雙里 이이첨(李爾瞻 1569~1625)京畿道 廣州 사람으로 光海君 때에 政權을 잡아 政局左之右之하다가 凌遲處斬한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司馬試壯元及第하여 權力에 들어섰다,

宣祖後嗣問題大北小北對立하자 그는 光海君擁立하려는 大北領袖가 되어 정인홍(鄭仁弘)中心으로 永昌大君推戴하려는 小北論駁하다가 宣祖여움을 사 甲山으로 流配했다.

光海君宣祖後宮 恭嬪 金氏의 아들이고, 永昌大君繼妃 仁穆大妃의 아들이었다.

이런 가운데 宣祖가 갑자기 죽고 光海君王位에 오르자 李爾瞻一躍 禮曹判書 兼 大提學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權勢를 얻게 되자 그는 竹嶺에서 强盜짓을 하다가 잡혀 온 朴應犀로 하여금 永昌大軍王位擁立하려 했다고 虛僞 自白을 하게 했다.

그렇게 陋名을 씌워서 永昌大軍江華島流配시켰다가 얼마 後 蒸殺 하고, 仁穆大妃의 아버지 金悌男賜死하게 했으며, 仁穆大妃西宮幽廢시켰다. 後 癸亥年仁祖反正으로 光海君廢位되고 仁祖王位에 오르자 그는 極刑해졌으며, 그의 세 아들도 함께 處刑되었다.

李爾瞻勢道가 하늘을 찌르던 어느 날, 官衙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다가 衣冠이 부서지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울고 있는 盲人을 만나 그 까닭을 묻자 盲人對答했다.

小人占術家인데 의 아들이 將來하여 吉凶을 묻기에 癸亥年 2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더니 를 내며 이 地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李爾瞻盲人에게 謝過하고 그 對價物件하게 주어 보냈다. 그리고 아들을 꾸짖었다.

너의 물음에 盲人占卦대로 對答했는데 그것이 어찌 가 된다고 매질을 하였느냐? 내가 너희들에게 를 짓게 했구나.”

그도 自身曲逕凌遲豫見하고 있었던 것 같다.

不正方法으로 地位가 높아진 사람은 事必歸正眞理災殃을 받게 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28. 곡이속여(穀已屬汝)

穀食은 이미 네 것이다.

 

* 明心寶鑑 廉義篇. 명심보감 23. 염의편(廉義篇)

新羅時代 印觀이라는 사람이 市場에서 솜을 팔았더니, 署調라는 사람이 穀食으로 바꿔서 사 갔다.

署調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어떤 소리개가 그 솜을 채 가지고 가서 도로 印觀의 집에 떨어 뜨렸다. 그러자 印觀署調에게 다시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소리개가 當身 솜을 내 집에 떨어뜨렸음으로 當身에게 돌려보냅니다. "라고 하니, 署調가 말하기를, "소리개가 솜을 채다가 當身에게 준 것은 하늘이 한 것이다. 내가 어찌 받을 수 있겠소이까?"라고 하였다. 印觀이 다시 말하기를, "그렇다면 當身穀食을 돌려보내겠습니다."라고 하니, 署調가 말하기를, "내가 當身에게 준 지가 벌써 이틀이 되었으니, 穀食은 이미 當身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辭讓하던 끝에, 솜과 穀食을 모두 市場에 버려두었다. 市場을 맡아 다스리는 官員이 이 事實을 임금께 아뢰어서 다 같이 벼슬을 주었다.

 

 

29. 공계불산란(公鷄不産卵)

공계(公鷄<수탉>)는 알을 낳지 못한다. 어떤 일을 成事시킬 수 없을 때 辨明意味로 쓰인다. 名臣 李德馨宣祖에게 저는 수탉이라서 알을 낳지 못하여 가져오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한 故事에서 由來했다.

 

* 古今淸談, 韓國人野談

朝鮮 第14代 宣祖景福宮 勤政殿에서 文武百官을 모아 놓고 朝會를 하고 있었다.

承旨 漢陰 李德馨(1561~1613)은 뒤늦게서야 到着하여 조용히 自己 자리로 가 앉았다. 그런데 參席大臣들이 저마다 품속에서 鷄卵 씩을 꺼내 上監媽媽 앞에 鄭重히 바치는 것이었다.

異常한지고……?’

遲刻을 한 터라 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던 漢陰은 생각했다.

무슨 일일꼬? 上監媽媽鷄卵을 바치다니……, 上監媽媽께서 잡수시려고 가져오라고 하지는 않았을 테고, 分明 무슨 曲折이 있는 거로구나.’

漢陰 어제 아내가 앓고 있어서 다른 大臣들보다 일찍 退廳했었다. 때문에 自身退廳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이 물었다.

鷄卵을 안 가지고 온 사람 없겠지?”

漢陰暫時 망설이다 갑자기 엉덩이를 푸드득! 푸드득! 치고 나서 꼬끼오하고 수탉의 울음소리를 냈다.

龍床에 앉아 있던 宣祖勿論 滿座百官들이 눈이 휘둥그레져 바라보았다.

李承旨! 承旨平素 () 앞에서 失手를 한 적이 없었거늘, 方今 怪聲은 무슨 소린고?”

, 수탉의 울음소리이옵니다.”

, 수탉의 울음소리? 왜 그런 駭怪한 소리를 내는가?”

아뢰옵기 惶悚하오나 上監媽媽께서는 方今 들으신 대로 저는 수탉이라서 알을 낳지 못하여 鷄卵을 가져오지 못했나이다.”

滿座百官들은 天然덕스럽게 아뢰는 漢陰을 보고 爆笑를 터뜨렸다. 宣祖內心 滿足스러웠다. 사실은 宣祖李德馨才致를 시험해 보려고 꾸민 일이었다.

漢陰宣祖 25年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나라에 가서 援兵交涉하여 李如松으로 하여금 日本軍을 막게 하고, 自身接賓官으로 活躍했다.

, 그는 領議政에까지 올랐으나 永昌大君處刑廢母論反對하다가 職位를 박탈(剝奪)당하고 陽根에 내려가 죽었다.

 

 

30. 공사무사(公事無私)

公的인 일에는 私的感情이나 情實이 없다. 어떤 일을 함에 個人慾心이 없이 公明正大해야 한다는 뜻이다.

 

* 海東名臣錄. 韓國人名大事典.

朝鮮 第3代 太宗 大司憲(檢察總長) 古佛 孟思誠(1359~1438)部下持平 朴安信과 같이 太宗의 사위인 趙大臨을 국문(鞫問)하면서 太宗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그 일로 太宗여움을 사게 되어 韓州流配되었다. 그러나 領議政 성석린(成石璘)都承旨 황희(黃喜)의 간곡(懇曲)解明으로 풀려나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右議政을 거쳐 左議政에까지 올랐다.

그가 右議政으로 있을 때, 世宗<太宗實錄>을 보고자 하자 鄭重語調로 말했다.

實錄收錄事實들은 먼 훗날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記錄입니다. 때문에 이를 보신다 하더라도 內容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殿下께서 이를 보신다면 後世의 임금들도 殿下先例로 삼아 모두 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史官들은 或是 火를 입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本然任務를 제대로 遂行할 수 없을 것입니다. 殿下께서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겠습니까? 公的인 일에 私的感情介入되면 아니 되니, 뒷사람들에게 事實信義傳達할 수 있게 보시지 않는 것이 옳은 줄로 思料되옵니다.”

世宗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올바른 忠情을 높이 評價하여 벼슬을 榮轉시켜 주었다.

그는 黃喜와 함께 朝鮮 初期文化를 이룩하는 데 크게 供獻을 했다. 그는 性格剛直하고, 淸廉하여 政丞으로 있을 때에도 집의 지붕에서 빗물이 새고, 故鄕에 갈 때에도 남루(襤褸)한 차림으로 行次하여 그곳 守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야유(揶揄)하는 일도 있었다.

詩文音律에도 밝아 鄕樂整理하고, 樂器直接 製作하기도 했다.

死後에는 淸白吏推戴되었고, 孝子旌門도 세워졌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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