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바다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ㄷ-1)
1. 다관지교(多官之交)
사다함(斯多含)과 무관낭(武官郞)의 사귐이라는 말로, 斯多含의 親舊 武官郞이 病으로 죽자 親舊인 斯多含도 7日 만에 따라 죽은 故事에서 由來했다. 목숨을 아끼지 않을 만큼의 깊은 友情을 이른다.
* 三國史記에.
新羅의 斯多含은 奈勿王의 7代孫으로 아버지는 級湌 仇梨知이다. 本來 眞骨 家門의 貴한 子孫으로 風貌가 秀麗하고 志氣가 分明하므로 周圍 사람들이 花郞으로 薦擧하니 마지못해 應했다. 郎徒가 된 뒤에는 그를 따르는 무리가 무려 1千 名에 達했으며 斯多含은 그들 모두에게서 歡心을 얻었다.
眞興王이 伊湌 異斯夫에게 命해 駕洛國(伽倻)을 征伐할 때 나이 15歲의 斯多含이 從軍하기를 請했다. 王은 나이가 어리다는 理由로 許諾지 않았으나 그 뜻이 確固하므로 貴幢裨將(地方 單位 部隊의 首將)으로 任命하여 出戰하도록 했다.
斯多含이 駕洛國 國境에 當到하여 먼저 元帥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앞장서 전단량(栴檀梁. 城門 이름, 梁은 駕洛國 말로 門을 가리킴)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하였다. 그곳 住民들은 갑자기 新羅 軍士들이 쳐들어오므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흩어졌다. 그래서 쉽게 駕洛國을 占領하였으며 結局은 滅亡시켰다.
軍士들이 凱旋하여 돌아오자 眞興王은 斯多含의 功을 認定하여 駕洛國 사람 3百 名을 下人으로 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받는 卽時 모두 放免해주었다. 또 土地를 下賜했는데 굳이 辭讓하므로 王이 强勸하니 閼川의 不毛地를 請해 받았다.
斯多含은 武官郞과 生死를 같이 하기로 約束한 親舊였는데, 武官郞이 病들어 먼저 죽자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다가 7日 만에 그를 따라 죽었다. 當時 斯多含의 나이 17歲였다.
사람들은 斯多含과 武官郞의 義로운 情을 기리며 斯多含과 武官郞의 各 가운데 이름字에서 한 字씩 따 多官之交라 불렀다.
2. 다산지책(茶山之冊)
茶山의 冊이라는 말로 丁若鏞의 활발(活潑)한 著述 活動에서 由來했다. 自己 分野에 뛰어난 業績을 이룬 境遇를 稱頌하는 뜻으로 쓰인다.
* 茶山先生 生涯와 業績에.
茶山 丁若鏞 (1762~1836)은 英祖 38年, 京畿道 廣州의 馬峴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丁載遠이 戶曹佐郞으로 起用되자 上京하여 열 살 때 經書와 史書를 受學하고 李瀷의 遺稿를 보고 感銘을 받아 民生을 爲한 經世에 뜻을 두게 되었다.
다음은 그가 일곱 살 때 지은 글이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작은 山이 큰 山을 가리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가 어린 나이임에도 事物을 觀察하는 눈이 銳利하여 周圍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丁若鏞의 눈높이는 이미 山의 아름다움이 아닌 멀고 가까운 거리를 본 것이다. 어린 나이에 科學的인 視覺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茶山의 글을 보고 아들이 數學的 才能이 뛰어난 것을 알았다.
茶山은 22歲 때인 1789年에 科擧에 及第하고, 1794年度에 京畿道 暗行御史가 되었다.
나중에 刑曹參議를 지내고 奎章閣의 書誌 編纂 事業에 參與하기도 했다. 그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實力을 갖추어 出世의 길로 올라선 것이다.
하지만 運命의 神이 全的으로 그의 便만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그의 不幸은 1791年 天主敎에 對한 彈壓과 함께 始作되었다.
天主敎人이었던 그는 같은 南人이었던 攻西派의 彈劾으로 妻男 李承薰과 함께 逮捕되어 流配되었다.
그가 天主敎에 關心을 기울인 것은 天主敎와 함께 들어오는 西洋의 科學을 받아들이기 爲해서였다. 하지만 天主敎 迫害는 黨派 싸움의 渦中에서 더욱 거세졌다. 그리하여 이른바 黃嗣永 帛書 事件이 일어나 茶山은 獄에 갇혀 모진 拷問을 받은 後 겨우 목숨을 건져 全羅南道 康津 땅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는 拷問을 當할 때 이렇게 말했다.
“法規에 對해서 仔細히 說明하지 않고 刑罰을 加하는 것은 百姓을 잡을 目的으로 그물질하는 것과 같다.”
그는 百姓에 對한 迫害와 苛斂誅求를 强力히 抗議하였으며 平民의 人權 保護를 爲해 힘썼다.
流配地 茶山 山亭에서 19如 年 동안의 귀양살이는 그의 人生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는 그곳에서 百姓들과 더불어 살며 現實을 똑바로 보게 되었다.
또 經書學을 中心으로 한 學問을 깊게 硏究하고 體係化하였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冊을 읽고 實學을 集大成하는 데 渾身의 힘을 기울였다.
그의 冊 大部分이 귀양살이 때 쓰여졌다. 그는 後日 귀양살이 때를 回顧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스무 살 때 겨레와 나라를 爲해서 田制?管制?軍制 等을 바로잡고, 經典의 풀이도 다시 하려는 情熱을 가졌었다.”
귀양살이는 茶山을 大學者로 만드는 좋은 機會가 된 셈이다.
그의 學問은 逆境에 處했을 때 오히려 더 무르익었던 것이다.
그는 傳統的인 學問에만 머물지 않고 中國을 거쳐서 들어오는 西洋 學問도 우리 實情에 맞게 椄木시켰다.
그가 平生 執筆한 冊은 5百8券이나 되었으며, 70如 篇의 茶詩도 썼다. 이러한 엄청난 著述은 歷史上 보기 드문 일이었다. 50年 동안 글을 썼다고 치면 해마다 10券의 冊을 펴낸 셈이 된다.
茶山은 人文科學 外에 自然科學과 山林經濟, 魚類에 對한 解說을 써 朝鮮의 自然科學 水準을 한 段階 높이 끌어올리는데 크게 寄與했다.
서른한 살 때에는 水原城을 築城하게 되자 起重機를 만들어 무거운 바윗돌을 쉽게 옮길 수 있게 하기도 했다.
그는 醫學에도 關心이 깊어 天然痘에 關한 醫學書 <麻科會通>을 펴내고 種痘法도 紹介하였다.
한平生을 實踐的 學問 硏究와 著述 活動에 바친 茶山은 1836年 74歲로 世上을 떠났다.
4. 단완불필(斷腕不筆)
손목이 잘린다고 해도 글을 쓰지 않겠다. 英祖가 承旨에게 폐세자(廢世子) 전지(傳旨)를 쓰게 하자 承旨가 “내 팔이 끊어지더라도 傳旨를 받아쓰지 못하겠다.”라고 한 故事에서 由來했다.
* 韓國人物誌
朝鮮 第21代 英祖 때 都承旨 李彛章. (1703~1764)은 英祖가 思悼世子를 廢位하라는 傳旨를 받아쓰도록 命하자 꿇어 엎드려 말했다.
“臣의 팔이 잘린다고 해도 차마 그것만은 쓰지 못하겠나이다.”
英祖는 성이 나서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아니, 그렇게 마음이 弱해서야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완강(頑强)히 拒否하니 할 수 없이 다른 承旨가 받아썼다.
都承旨는 王의 傳旨를 받아 써야 할 責任이 있는 職責인데, 이를 拒絶하는 것은 죽음을 覺悟하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이장(李彛章)은 司馬試를 거쳐 文科에 及第하여 全羅道 暗行御史를 지낸 人才였다. 1748年에는 書狀官으로 淸나라에 다녀와 同副承旨를 거쳐 都承旨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
5. 답부지책(答夫之策)
答夫라는 사람의 策略이라는 말로, 高句麗 때의 國相 明臨答夫에게서 由來했다. 戰鬪에서 時間을 끌어 相對가 지치게 한 後 싸우면 이긴다는 뜻이다.
* 三國史記 列傳 第5에.
高句麗 第8代 新大王(재위165~179) 때 漢나라 玄菟太守 耿臨이 大軍을 이끌고 高句麗를 攻擊해왔다. 緊急 對策會議를 연 新大王이 攻擊과 防禦, 어느 쪽이 유리한가를 물으니 大臣들이 말했다.
“漢나라가 兵力이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얕보고 있으므로 萬若 只今 나가 싸우지 않는다면 더욱 깔보고 더 자주 쳐들어올 것입니다. 多幸히 우리는 山이 險하고 門이 좁으니 이를 잘 活用하면 한 사람이 敵軍 百 名도 당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청컨대 軍士를 내어 攻擊하십시오.”
그러자 國相 明臨答夫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漢나라 軍士는 强兵으로서 士氣가 衝天하오니 그 서슬을 當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我軍이 많을 때는 싸워야 하고, 적을 때는 지켜야 하는 것이 兵法입니다. 그리고 只今 漢나라 軍士는 千 里 밖에서 軍糧米를 運搬해 와야 하는 弱點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호(塹壕)를 깊이 파고 성곽(城廓)을 높이 쌓아 그들의 侵攻을 막으며 기다리면 저들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지쳐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들이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新大王이 答夫의 말에 首肯하여 城門을 닫고 굳게 지키니, 果然 漢나라 軍士들이 지치고 굶주려 結局 退却했다. 이때 答夫가 數千의 騎兵을 거느리고 追擊하여 交戰하니, 漢나라 軍士는 大敗하여 單 한 匹의 말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王은 크게 기뻐하여 答夫에게 坐原과 質山을 食邑으로 주어 激勵했다.
그가 113歲로 죽자 王이 7日間이나 政務를 쉬며 親히 弔喪하였다.
新大王과 明臨答夫는 特別한 關係였다. 165年 新大王의 兄 次大王의 학정(虐政)을 보다 못한 答夫가 次大王을 殺害하고 次大王의 아우 伯固를 王位에 登極케 하니 그가 新大王이다. 그리고 新大王이 明臨答夫를 國相으로 任命했던 것이다.
6. 당금여석(當金如石)
黃金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말로, 아버지의 遺訓을 끝까지 지킨 高麗의 忠臣 崔瑩將軍의 이야기에서 由來했다. 財物을 貪하지 말라는 뜻.
* 太祖實錄 韓國名人傳에.
高麗 末의 將軍 崔瑩(1316~1388)은 本貫은 東州요, 諡號는 武愍이다.
키가 크고 힘이 센 그는 1658年 吾乂浦에 侵入한 倭敵과 對敵하여 倭船 400如 隻을 擊破했다. 또 1361年에는 紅巾賊 4萬이 西京(平壤)을 攻擊하여 開京에까지 이르자 이를 擊退시켰으며, 1363年엔 興王寺의 變을 鎭壓하였다.
1376年 禑王2年에 倭敵이 三南地方 (忠淸道, 慶尙道, 全羅道)에 쳐들어와 良民을 괴롭히자 鴻山에서 맞싸워 크게 무찔렀다. 그러자 敗하여 쫓겨간 倭寇들은 崔瑩을 白首崔萬戶라 하여 그의 옆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亂을 모두 平定하여 나라를 安定시켰다.
그가 이렇게 名將이 된 데에는 그의 아버지 崔元直의 遺言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崔元直은 司憲糾正으로 있으면서 官吏들을 糾察하고 風俗을 矯正하는 일을 맡아 왔다.
崔瑩이 열여섯 살 때 아버지가 世上을 下直하며 이렇게 遺言했다.
“財物을 貪내지 말고 黃金 보기를 돌과 같이 하라(當金如石)”
崔瑩은 그 遺言을 작은 나무쪽에 써서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平生토록 實踐했다. 그는 一國의 第一가는 將帥임에도 不拘하고 비좁은 집에서 不平 없이 살았다. 그리고 오직 나라를 爲하는 일에만 沒頭하여 싸움에 臨하면 싸움마다 모두 勝利를 거두었다.
그런 그도 妖僧 辛旽의 讒訴로 左遷되었다가 恭愍王 20年에 辛旽이 處刑되자 다시 贊成事가 되었다.
崔瑩은 明나라 鐵嶺衛 問題를 契機로 遼東征伐을 主張하여 그 計劃이 서자 八道都統使가 되어 禑王과 함께 平壤에 進出하였는데, 이때 李成桂가 威化島에서 回軍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崔瑩은 李成桂의 一派에 依해 高峰(高陽)에 流配되었다가 죽임을 當하였다.
그는 莫强한 兵權을 잡고 있었지만 私事로운 付託은 한마디도 들어주지 않았다. 오로지 옳은 것만을 가려서 받아들인 貴人이었다.
그는 新羅의 百結 先生과 朝鮮의 黃喜 政丞과 더불어 3大義人으로 꼽힌다.
7. 도모지(塗貌紙)
물 묻힌 종이를 바른다는 말로, 罪人의 얼굴에 물을 적신 종이를 겹겹으로 붙여 마침내 숨이 막혀 죽음에 이르게 하는 刑罰의 하나다.
* 梅泉野錄 韓國文化象徵辭典에.
황현(黃玹 1855~1910)은 號가 梅泉으로 全南 光陽 出身이다. 어려서부터 詩文을 잘 지었으며 1885年 生員試에 壯元하였다. 1910年 庚戌國恥인 韓日倂合이 되자 痛憤하여 絶命詩 4篇을 남기고 飮毒 自決하였다.
* 黃玹의 ‘絶命詩’
其一
亂離袞到白頭年 ~ 亂離를 겪다 보니 白頭年이 되었구나.
幾合捐生却末然 ~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今日眞成無可奈 ~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輝輝風燭照蒼天 ~ 가물거리는 촛불이 蒼天에 비치도다.
其二
妖氣掩翳帝星移 ~ 妖妄한 氣運이 가려서 帝星이 옮겨지니
九闕沉沉晝漏遲 ~ 구궐(九闕)은 침침하여 주누(晝漏)가 더디구나.
詔勅從今無復有 ~ 이제부터 조칙(詔勅)을 받을 길이 없으니
琳琅一紙淚千絲 ~ 구슬 같은 눈물이 주룩주룩 조칙(詔勅)에 얽히는구나.
其三
鳥獸哀鳴海岳嚬 ~ 새 짐승도 슬피 울고 江山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 ~ 無窮花 온 世上이 이젠 亡해 버렸어라.
秋燈掩卷懷千古 ~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 ~ 人間 世上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其四
曾無支厦半椽功 ~ 일찍이 나라를 지탱(支撑)할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只是成仁不是忠 ~ 但只 仁을 이룰 뿐이요. 忠은 아닌 것 이로다.
止竟僅能追尹殺 ~ 겨우 能히 윤곡(尹穀)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當時愧不躡陳東 ~ 當時의 陣東을 밟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구나.
위의 글은 梅泉의 心情을 잘 나타낸 絶命詩이다. 나라를 잃는 재변(災變)을 겪으면서 선비 梅泉의 選擇은 自決의 길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이는 朝鮮人의 꿋꿋한 氣像과 精神의 表出이었다.
또 그가 남긴 <梅泉野錄>은 韓末의 秘事를 記錄한 冊으로 嶺南과 湖南의 선비들이 誠金을 모아 出刊하였으며 最近世史를 硏究하는 貴重한 資料로 活用되고 있다. 梅泉은 47年間의 記錄을 野錄으로 남겼는데 여기에는 國政全般에 걸쳐 다루고 있으며 高宗의 卽位와 日本의 關係, 그리고 親日派의 賣國行爲까지 收錄하고 있다. 이 梅泉野錄에 民間에서 行한 刑事的 問題를 다음과 같은 記錄으로 남겼다.
倫理, 道德的으로 到底히 容納할 수 없는 者에게 世上에 알려지는 것을 極度로 꺼려 그 一家親戚이 塗貌紙라는 刑罰을 施行했다는 內容이다.
血肉을 매로 때려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칼을 使用하여 죽일 수도 없으며 死藥을 먹여, 죽일 수도 없을 때 不得已하게 斷行했던 方法이다. 卽 罪人을 움직이지 못하게 나무에 묶어 놓고, 물에 적신 韓紙를 한 張, 두 張 얼굴에 몇 張이고 겹쳐 바른다. 이렇게 하면 刑罰을 받는 사람은 앞이 보이지도 않고, 나중에는 소리를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狀態가 된다. 이처럼 여러 겹을 바르고 난 다음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까지 바른다. 그런 다음에는 韓紙의 물기가 漸漸 말라가면서 到底히 숨을 쉴 수가 없게 되어 結局 죽게 된다.
이런 刑罰은 집안의 名譽를 失墜시킴은 勿論 倫理, 道德的으로 到底히 한 하늘 아래에서 머리를 두고 같이 살 수 없는 禽獸와 같은 일을 저지른 者에게 내려지는 親族間의 刑罰이었다.
現在 우리가 使用하는 ‘도무지’라는 말은 바로 이 塗貌紙란 이 말에서 由來한 말이다.
8. 도미지처(都彌之妻)
도미(都彌)의 아내라는 뜻으로, 品行이 바르고 節槪가 있는 有夫女를 말한다.
* 三國史記列傳에
都彌는 百濟 사람으로 心性이 깊고 家族을 사랑하는 誠實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賦役의 對象으로 編入된 微賤한 身分이었지만 자못 義理를 알았다. 그의 아내는 容貌가 아름답고 節槪를 지키는 行實이 바른 女子여서 사람들의 稱頌이 藉藉했다.
百濟의 第14代 蓋婁王(?~166)이 都彌의 妻가 예쁘다는 所聞을 듣고 都彌를 불러 말했다.
“大抵 女子들이란 비록 志操를 지키고 潔白한 것을 第一로 삼는 것 같지만, 사람이 없는 곳에서 巧妙한 말로 誘惑하면 마음이 變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라.”
그러자 都彌는 自己는 夫人을 두고 하는 말인 것을 알고 對答했다.
“무릇 사람의 情이란 헤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아내만큼은 죽는 限이 있어도 두 마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허! 정말 그럴까? 네가 壯談을 하니 어디 한 番 試驗을 해보자.”
王이 都彌를 宮에 잡아 가두고 한 臣下에게 王의 衣服을 입혀 밤에 都彌의 집으로 보냈다. 王으로 變裝한 그 臣下가 都彌의 아내에게 말했다.
“네가 예쁘다는 所聞을 듣고 네 男便과 내기를 하여 내가 이겼으므로 너를 宮人으로 삼기로 햇다. 그리 되면 너는 苦生에서 벗어나 호강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 밤 내 守廳을 들도록 하여라!”
그리고 들어가 옷을 벗기려 하자 都彌의 아내가 말했다.
“大王께서는 虛言을 하지 않으실 것이니 제가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請컨대 먼저 房에 들어가 계시면 저도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러고는 물러나 계집종을 治裝시켜 들여보냈다.
王이 後에 그 말을 傳해 듣고 크게 怒하여 王을 속인 罪로 都彌의 두 눈알을 빼고, 작은 배에 태워 江물에 띄워버렸다. 그리고는 그 아내를 끌어다가 强制로 守廳을 들도록 시키니 그女가 말했다.
“郎君을 이미 잃었으니 홀로 이 한 몸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敢히 御命을 또다시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只今 月經 中이라서 몸이 더러우니 다음 날 沐浴을 하고 다시 오겠습니다.”
王이 그 말을 믿고 許諾했다.
都彌의 아내는 그길로 곧바로 逃亡쳐 江어귀로 나갔으나 江을 건널 수가 없었다. 絶望한 나머지 하늘을 우러르며 痛哭하니 문득 작은 쪽배 하나가 물결을 따라 흘러왔다. 都彌의 아내가 그 배를 타고 泉城島에 다다르니 男便이 죽지 않고 그곳에 있었다. 두 사람은 풀뿌리를 캐 延命하다가 함께 배를 타고 高句麗의 蒜山 아래에 이르니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옷과 飮食을 주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나그네로 살다가 一生을 마쳤다.
9. 도사하영(倒屣下迎)
짚신을 거꾸로 신고 내려가 迎接한다는 말로, 사람을 眞實한 마음으로 恭遜하게 迎接하는 態度를 말한다.
* 海東名臣錄 古今淸談에.
朝鮮 第16代 仁祖 때 左議政 이정귀(李廷龜. 1564~1635)의 夫人은 判書 權克智의 딸이었다.
그 女는 婦德을 갖추고 儉素하여 華麗한 緋緞옷은 한 番도 입어 본 적이 없었다.
한 番은 貞明公主 집에서 잔치가 있어 高官 夫人들이 다 모이게 되었다. 參席한 夫人들이 한결같이 華麗한 緋緞옷에 비싼 佩物로 治裝하니, 참으로 華麗했다.
그런데 느지막하게 가마를 타고 늙수그레한 한 夫人이 왔다. 옷은 비록 베옷이었으나 端正하고 儉素한 차림이었다. 그女가 막 뜰에 들어서자 이를 본 公主가 신을 거꾸로 신고 急하게 내려가 반갑게 맞았다. 自然히 모든 夫人들이 疑訝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公主는 鄭重하게 그 夫人을 案內하여 윗자리에 모시고 極盡한 禮로써 待接하니 모두 異常하게 여겼다. 잔치의 興趣가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 그 夫人이 먼저 일어나서 돌아가려고 하자 公主가 아직 이르다면서 말렸다. 그러자 夫人이 말했다.
“저의 집 食口들이 돌아올 時間이 되었으니 어서 가서 저녁을 차려야 합니다.”
그의 男便은 朝廷의 藥院都提調였고, 맏아들은 吏曹判書였으며, 둘째 아들은 承旨였다.
이 事實을 안 座中의 夫人들은 크게 놀라면서 自身들의 지나친 奢侈를 부끄러워했다.
左議政 李廷龜는 經書學에도 밝아 明나라의 宋應昌의 要請으로 그곳 사람들에게 經書를 講義하기도 하였다.
그가 兵曹參知로 있을 때 1598年 明나라 兵部主事 丁應泰가 ‘朝鮮이 倭兵을 끌어들여 明나라를 侵犯하려 한다.’라고 明나라 朝廷에 誣告하였다. 이때 朝鮮國의 辨誣奏文을 지어 明나라에 가 丁應泰가 誣告했음을 밝혀 丁應泰를 明나라 朝廷에서 罷免시키게도 했다.
李廷龜는 이처럼 國際間의 어려운 問題도 明快하게 解決했던 名臣으로 글씨도 잘 썼을 뿐만 아니라 文章家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런 人物의 집안에 그 夫人이었으니 그 男便에 그 夫人인 其夫其婦가 아닐 수 없다.
10. 도이봉부(刀以逢父)
칼로 因하여 아버지를 만나다. 琉璃王이 胎內에 있을 때 아버지 朱蒙을 離別했으나 훗날 부러진 칼을 證標로 만나게 된 故事에서 由來했다. 어떤 物件을 根擧로 極的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 三國史記에.
高句麗 琉璃王(?~A.D.18)의 諱는 類利 또는 儒留이며, 朱蒙의 아들이다. 朱蒙은 高句麗가 統治하던 沸流國의 둘째 公主 소서노(召西奴)를 새 皇妃로 맞아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을 두었다. 琉璃王이 태어나기 前에 아버지 朱蒙은 나라를 세우려고 南쪽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琉璃도 少年 時節에 아버지 朱蒙처럼 활을 잘 쏘았다.
어느 날, 琉璃가 활쏘기 演習을 하다가 화살이 빗나가는 바람에 지나가던 女人의 물동이를 깨뜨렸다. 물을 흠뻑 뒤집어 쓴 夫人이 몹시 怒하여 辱說을 퍼부었다.
“天下에 버릇없고, 아비 없는 후레子息 같으니라구…….”
그 말을 들은 琉璃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엎드려 울며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다. 어머니 禮氏는 그때까지 숨겨온 아버지에 對한 이야기를 仔細히 들려주었다.
“너희 아버지는 일찍이 큰 뜻이 있으셔서 南쪽으로 내려가 只今 高句麗를 세우신 朱蒙王이시다. 네 아버지가 떠날 때 나에게 말하기를 ‘以後 사내아이를 낳거든 證標가 될 物件을 소나무 밑 일곱 모난 돌 아래에 묻어 두었으니, 그것을 가지고 찾아오게 하라.’라고 하시었느니라.”
琉璃는 그날부터 山 등성이와 골짜기를 헤매며 소나무 밑 일곱 모난 돌을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遇然히 집 마루 기둥의 주춧돌을 보니 일곱 모로 다듬어져 있었다. 눈이 번쩍 뜨인 琉璃는 그 밑을 파 오매불망(寤寐不忘) 찾고 있던 證標인 토막난 칼을 찾았다.
琉璃는 그 칼을 가슴에 품고 卒本 땅으로 朱蒙을 찾아가 보여 주었다. 朱蒙이 自身의 칼과 맞춰보니 딱 들어맞았다.
“네가 정녕(叮嚀) 내 아들 琉璃로구나!”
朱蒙은 感激에 겨워 琉璃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날로 琉璃를 王子로 삼았다. 琉璃의 나이 18歲요. 高句麗 建國 19年이었다. 그로부터 다섯 달이 지난 9月, 朱蒙은 갑자기 世上을 떠났다.
琉璃는 아버지를 이어 王位에 오른 뒤 옆 나라 송양국(宋讓國)의 딸을 王妃로 맞았다. 그리고 卽位한 지 3年 만에 鶻川에 離宮을 짓는 等 나라의 面貌를 새로이 一新했다. 그 後 王妃가 죽자 鶻川 사람의 딸 화희(禾姬)와 漢人의 딸 치희(雉姬)를 繼室로 맞아들였다.
그 後 父王을 繼承하여 약탈(掠奪)을 일삼는 선비(鮮卑)와 扶餘의 帶素王 等 周圍의 여러 나라를 征復하여 領土를 擴張하였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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