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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는 꽃이 피네
**한자성어(漢字成語)**/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ㄷ-1)

by 산산바다 2026. 2. 21.

산과바다

 고사성어(故事成語) 글 목록

 

 

 한국 고사성어(韓國 故事成語) (-1)

 

 

1. 다관지교(多官之交)

사다함(斯多含)과 무관낭(武官郞)의 사귐이라는 말로, 斯多含親舊 武官郞으로 죽자 親舊斯多含7만에 따라 죽은 故事에서 由來했다. 목숨을 아끼지 않을 만큼의 깊은 友情을 이른다.

 

* 三國史記.

新羅斯多含奈勿王7代孫으로 아버지는 級湌 仇梨知이다. 本來 眞骨 家門子孫으로 風貌秀麗하고 志氣分明하므로 周圍 사람들이 花郞으로 薦擧하니 마지못해 했다. 郎徒가 된 뒤에는 그를 따르는 무리가 무려 1千 名했으며 斯多含은 그들 모두에게서 歡心을 얻었다.

眞興王伊湌 異斯夫에게 駕洛國(伽倻)征伐할 때 나이 15斯多含從軍하기를 했다. 은 나이가 어리다는 理由許諾지 않았으나 그 뜻이 確固하므로 貴幢裨將(地方 單位 部隊首將)으로 任命하여 出戰하도록 했다.

斯多含駕洛國 國境當到하여 먼저 元帥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앞장서 전단량(栴檀梁. 城門 이름, 駕洛國 말로 을 가리킴)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하였다. 그곳 住民들은 갑자기 新羅 軍士들이 쳐들어오므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흩어졌다. 그래서 쉽게 駕洛國占領하였으며 結局滅亡시켰다.

軍士들이 凱旋하여 돌아오자 眞興王斯多含認定하여 駕洛國 사람 3百 名下人으로 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받는 卽時 모두 放免해주었다. 土地下賜했는데 굳이 辭讓하므로 强勸하니 閼川不毛地해 받았다.

斯多含武官郞生死를 같이 하기로 約束親舊였는데, 武官郞들어 먼저 죽자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다가 7만에 그를 따라 죽었다. 當時 斯多含의 나이 17였다.

사람들은 斯多含武官郞로운 을 기리며 斯多含武官郞가운데 이름에서 한 씩 따 多官之交라 불렀다.

 

 

2. 다산지책(茶山之冊)

茶山이라는 말로 丁若鏞의 활발(活潑)著述 活動에서 由來했다. 自己 分野에 뛰어난 業績을 이룬 境遇稱頌하는 뜻으로 쓰인다.

 

* 茶山先生 生涯業績.

茶山 丁若鏞 (1762~1836)英祖 38, 京畿道 廣州馬峴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丁載遠戶曹佐郞으로 起用되자 上京하여 열 살 때 經書史書受學하고 李瀷遺稿를 보고 感銘을 받아 民生經世에 뜻을 두게 되었다.

다음은 그가 일곱 살 때 지은 글이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작은 이 큰 을 가리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가 어린 나이임에도 事物觀察하는 눈이 銳利하여 周圍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丁若鏞의 눈높이는 이미 의 아름다움이 아닌 멀고 가까운 거리를 본 것이다. 어린 나이에 科學的視覺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茶山의 글을 보고 아들이 數學的 才能이 뛰어난 것을 알았다.

茶山22때인 1789科擧及第하고, 1794年度京畿道 暗行御史가 되었다.

나중에 刑曹參議를 지내고 奎章閣書誌 編纂 事業參與하기도 했다. 그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實力을 갖추어 出世의 길로 올라선 것이다.

하지만 運命全的으로 그의 便만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그의 不幸1791年 天主敎彈壓과 함께 始作되었다.

天主敎人이었던 그는 같은 南人이었던 攻西派彈劾으로 妻男 李承薰과 함께 逮捕되어 流配되었다.

그가 天主敎關心을 기울인 것은 天主敎와 함께 들어오는 西洋科學을 받아들이기 해서였다. 하지만 天主敎 迫害黨派 싸움의 渦中에서 더욱 거세졌다. 그리하여 이른바 黃嗣永 帛書 事件이 일어나 茶山에 갇혀 모진 拷問을 받은 겨우 목숨을 건져 全羅南道 康津 땅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는 拷問할 때 이렇게 말했다.

法規해서 仔細說明하지 않고 刑罰하는 것은 百姓을 잡을 目的으로 그물질하는 것과 같다.”

그는 百姓迫害苛斂誅求强力抗議하였으며 平民人權 保護해 힘썼다.

流配地 茶山 山亭에서 19如 年 동안의 귀양살이는 그의 人生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는 그곳에서 百姓들과 더불어 살며 現實을 똑바로 보게 되었다.

經書學中心으로 한 學問을 깊게 硏究하고 體係化하였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을 읽고 實學集大成하는 데 渾身의 힘을 기울였다.

그의 冊 大部分이 귀양살이 때 쓰여졌다. 그는 後日 귀양살이 때를 回顧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스무 살 때 겨레와 나라를 해서 田制?管制?軍制 等을 바로잡고, 經典의 풀이도 다시 하려는 情熱을 가졌었다.”

귀양살이는 茶山大學者로 만드는 좋은 機會가 된 셈이다.

그의 學問逆境했을 때 오히려 더 무르익었던 것이다.

그는 傳統的學問에만 머물지 않고 中國을 거쳐서 들어오는 西洋 學問도 우리 實情에 맞게 椄木시켰다.

그가 平生 執筆58이나 되었으며, 70如 篇茶詩도 썼다. 이러한 엄청난 著述歷史上 보기 드문 일이었다. 50동안 글을 썼다고 치면 해마다 10을 펴낸 셈이 된다.

茶山人文科學 外自然科學山林經濟, 魚類解說을 써 朝鮮自然科學 水準을 한 段階 높이 끌어올리는데 크게 寄與했다.

서른한 살 때에는 水原城築城하게 되자 起重機를 만들어 무거운 바윗돌을 쉽게 옮길 수 있게 하기도 했다.

그는 醫學에도 關心이 깊어 天然痘醫學書 <麻科會通>을 펴내고 種痘法紹介하였다.

平生實踐的 學問 硏究著述 活動에 바친 茶山183674世上을 떠났다.

 

 

4. 단완불필(斷腕不筆)

손목이 잘린다고 해도 글을 쓰지 않겠다. 英祖承旨에게 폐세자(廢世子) 전지(傳旨)를 쓰게 하자 承旨내 팔이 끊어지더라도 傳旨를 받아쓰지 못하겠다.”라고 한 故事에서 由來했다.

 

* 韓國人物誌

朝鮮 第21代 英祖 都承旨 李彛章. (1703~1764)英祖思悼世子廢位하라는 傳旨를 받아쓰도록 하자 꿇어 엎드려 말했다.

의 팔이 잘린다고 해도 차마 그것만은 쓰지 못하겠나이다.”

英祖는 성이 나서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아니, 그렇게 마음이 해서야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완강(頑强)拒否하니 할 수 없이 다른 承旨가 받아썼다.

都承旨傳旨를 받아 써야 할 責任이 있는 職責인데, 이를 拒絶하는 것은 죽음을 覺悟하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이장(李彛章)司馬試를 거쳐 文科及第하여 全羅道 暗行御史를 지낸 人才였다. 1748에는 書狀官으로 나라에 다녀와 同副承旨를 거쳐 都承旨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

 

 

5. 답부지책(答夫之策)

答夫라는 사람의 策略이라는 말로, 高句麗 때의 國相 明臨答夫에게서 由來했다. 戰鬪에서 時間을 끌어 相對가 지치게 한 싸우면 이긴다는 뜻이다.

 

* 三國史記 列傳 第5.

高句麗 第8代 新大王(재위165~179) 나라 玄菟太守 耿臨大軍을 이끌고 高句麗攻擊해왔다. 緊急 對策會議를 연 新大王攻擊防禦, 어느 쪽이 유리한가를 물으니 大臣들이 말했다.

나라가 兵力이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얕보고 있으므로 萬若 只今 나가 싸우지 않는다면 더욱 깔보고 더 자주 쳐들어올 것입니다. 多幸히 우리는 하고 이 좁으니 이를 잘 活用하면 한 사람이 敵軍 百 名도 당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청컨대 軍士를 내어 攻擊하십시오.”

그러자 國相 明臨答夫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라 軍士强兵으로서 士氣衝天하오니 그 서슬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我軍이 많을 때는 싸워야 하고, 적을 때는 지켜야 하는 것이 兵法입니다. 그리고 只今 漢나라 軍士千 里 밖에서 軍糧米運搬해 와야 하는 弱點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호(塹壕)를 깊이 파고 성곽(城廓)을 높이 쌓아 그들의 侵攻을 막으며 기다리면 저들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지쳐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들이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新大王答夫의 말에 首肯하여 城門을 닫고 굳게 지키니, 果然 漢나라 軍士들이 지치고 굶주려 結局 退却했다. 이때 答夫數千騎兵을 거느리고 追擊하여 交戰하니, 나라 軍士大敗하여 의 말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은 크게 기뻐하여 答夫에게 坐原質山食邑으로 주어 激勵했다.

그가 113로 죽자 7日間이나 政務를 쉬며 弔喪하였다.

新大王明臨答夫特別關係였다. 165年 新大王兄 次大王의 학정(虐政)을 보다 못한 答夫次大王殺害하고 次大王의 아우 伯固王位登極케 하니 그가 新大王이다. 그리고 新大王明臨答夫國相으로 任命했던 것이다.

 

 

6. 당금여석(當金如石)

黃金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말로, 아버지의 遺訓을 끝까지 지킨 高麗忠臣 崔瑩將軍의 이야기에서 由來했다. 財物하지 말라는 뜻.

 

* 太祖實錄 韓國名人傳.

高麗 末將軍 崔瑩(1316~1388)本貫東州, 諡號武愍이다.

키가 크고 힘이 센 그는 1658年 吾乂浦侵入倭敵對敵하여 倭船 400如 隻擊破했다. 1361에는 紅巾賊 4西京(平壤)攻擊하여 開京에까지 이르자 이를 擊退시켰으며, 1363興王寺鎭壓하였다.

1376年 禑王2倭敵三南地方 (忠淸道, 慶尙道, 全羅道)에 쳐들어와 良民을 괴롭히자 鴻山에서 맞싸워 크게 무찔렀다. 그러자 하여 쫓겨간 倭寇들은 崔瑩白首崔萬戶라 하여 그의 옆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을 모두 平定하여 나라를 安定시켰다.

그가 이렇게 名將이 된 데에는 그의 아버지 崔元直遺言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崔元直司憲糾正으로 있으면서 官吏들을 糾察하고 風俗矯正하는 일을 맡아 왔다.

崔瑩이 열여섯 살 때 아버지가 世上下直하며 이렇게 遺言했다.

財物내지 말고 黃金 보기를 돌과 같이 하라(當金如石)”

崔瑩은 그 遺言을 작은 나무쪽에 써서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平生토록 實踐했다. 그는 一國第一가는 將帥임에도 不拘하고 비좁은 집에서 不平 없이 살았다. 그리고 오직 나라를 하는 일에만 沒頭하여 싸움에 하면 싸움마다 모두 勝利를 거두었다.

그런 그도 妖僧 辛旽讒訴左遷되었다가 恭愍王 20辛旽處刑되자 다시 贊成事가 되었다.

崔瑩나라 鐵嶺衛 問題契機遼東征伐主張하여 그 計劃이 서자 八道都統使가 되어 禑王과 함께 平壤進出하였는데, 이때 李成桂威化島에서 回軍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崔瑩李成桂一派高峰(高陽)流配되었다가 죽임을 하였다.

그는 莫强兵權을 잡고 있었지만 私事로운 付託은 한마디도 들어주지 않았다. 오로지 옳은 것만을 가려서 받아들인 貴人이었다.

그는 新羅百結 先生朝鮮黃喜 政丞과 더불어 3大義人으로 꼽힌다.

 

 

7. 도모지(塗貌紙)

물 묻힌 종이를 바른다는 말로, 罪人의 얼굴에 물을 적신 종이를 겹겹으로 붙여 마침내 숨이 막혀 죽음에 이르게 하는 刑罰의 하나다.

 

* 梅泉野錄 韓國文化象徵辭典.

황현(黃玹 1855~1910)梅泉으로 全南 光陽 出身이다. 어려서부터 詩文을 잘 지었으며 1885年 生員試壯元하였다. 1910年 庚戌國恥韓日倂合이 되자 痛憤하여 絶命詩 4을 남기고 飮毒 自決하였다.

 

* 黃玹絶命詩

其一

亂離袞到白頭年 ~ 亂離를 겪다 보니 白頭年이 되었구나.

幾合捐生却末然 ~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今日眞成無可奈 ~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輝輝風燭照蒼天 ~ 가물거리는 촛불이 蒼天에 비치도다.

 

其二

妖氣掩翳帝星移 ~ 妖妄氣運이 가려서 帝星이 옮겨지니

九闕沉沉晝漏遲 ~ 구궐(九闕)은 침침하여 주누(晝漏)가 더디구나.

詔勅從今無復有 ~ 이제부터 조칙(詔勅)을 받을 길이 없으니

琳琅一紙淚千絲 ~ 구슬 같은 눈물이 주룩주룩 조칙(詔勅)에 얽히는구나.

 

其三

鳥獸哀鳴海岳嚬 ~ 새 짐승도 슬피 울고 江山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 ~ 無窮花 世上이 이젠 해 버렸어라.

秋燈掩卷懷千古 ~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 ~ 人間 世上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其四

曾無支厦半椽功 ~ 일찍이 나라를 지탱(支撑)할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只是成仁不是忠 ~ 但只 仁을 이룰 뿐이요. 은 아닌 것 이로다.

止竟僅能追尹殺 ~ 겨우 히 윤곡(尹穀)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當時愧不躡陳東 ~ 當時陣東을 밟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구나.

 

위의 글은 梅泉心情을 잘 나타낸 絶命詩이다. 나라를 잃는 재변(災變)을 겪으면서 선비 梅泉選擇自決의 길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이는 朝鮮人의 꿋꿋한 氣像精神表出이었다.

또 그가 남긴 <梅泉野錄>韓末秘事記錄으로 嶺南湖南의 선비들이 誠金을 모아 出刊하였으며 最近世史硏究하는 貴重資料活用되고 있다. 梅泉47年間記錄野錄으로 남겼는데 여기에는 國政全般에 걸쳐 다루고 있으며 高宗卽位日本關係, 그리고 親日派賣國行爲까지 收錄하고 있다. 梅泉野錄民間에서 刑事的 問題를 다음과 같은 記錄으로 남겼다.

倫理, 道德的으로 到底容納할 수 없는 에게 世上에 알려지는 것을 極度로 꺼려 그 一家親戚塗貌紙라는 刑罰施行했다는 內容이다.

血肉을 매로 때려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칼을 使用하여 죽일 수도 없으며 死藥을 먹여, 죽일 수도 없을 때 不得已하게 斷行했던 方法이다. 卽 罪人을 움직이지 못하게 나무에 묶어 놓고, 물에 적신 韓紙를 한 , 얼굴에 몇 이고 겹쳐 바른다. 이렇게 하면 刑罰을 받는 사람은 앞이 보이지도 않고, 나중에는 소리를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狀態가 된다. 이처럼 여러 겹을 바르고 난 다음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까지 바른다. 그런 다음에는 韓紙의 물기가 漸漸 말라가면서 到底히 숨을 쉴 수가 없게 되어 結局 죽게 된다.

이런 刑罰은 집안의 名譽失墜시킴은 勿論 倫理, 道德的으로 到底히 한 하늘 아래에서 머리를 두고 같이 살 수 없는 禽獸와 같은 일을 저지른 에게 내려지는 親族間刑罰이었다.

現在 우리가 使用하는 도무지라는 말은 바로 이 塗貌紙란 이 말에서 由來한 말이다.

 

 

8. 도미지처(都彌之妻)

도미(都彌)의 아내라는 뜻으로, 品行이 바르고 節槪가 있는 有夫女를 말한다.

 

* 三國史記列傳

都彌百濟 사람으로 心性이 깊고 家族을 사랑하는 誠實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賦役對象으로 編入微賤身分이었지만 자못 義理를 알았다. 그의 아내는 容貌가 아름답고 節槪를 지키는 行實이 바른 女子여서 사람들의 稱頌藉藉했다.

百濟14代 蓋婁王(?~166)都彌가 예쁘다는 所聞을 듣고 都彌를 불러 말했다.

大抵 女子들이란 비록 志操를 지키고 潔白한 것을 第一로 삼는 것 같지만, 사람이 없는 곳에서 巧妙한 말로 誘惑하면 마음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라.”

그러자 都彌自己夫人을 두고 하는 말인 것을 알고 對答했다.

무릇 사람의 이란 헤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아내만큼은 죽는 이 있어도 두 마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 정말 그럴까? 네가 壯談을 하니 어디 한 番 試驗을 해보자.”

都彌에 잡아 가두고 한 臣下에게 衣服을 입혀 밤에 都彌의 집으로 보냈다. 으로 變裝한 그 臣下都彌의 아내에게 말했다.

네가 예쁘다는 所聞을 듣고 네 男便과 내기를 하여 내가 이겼으므로 너를 宮人으로 삼기로 햇다. 그리 되면 너는 苦生에서 벗어나 호강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 밤 내 守廳을 들도록 하여라!”

그리고 들어가 옷을 벗기려 하자 都彌의 아내가 말했다.

大王께서는 虛言을 하지 않으실 것이니 제가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컨대 먼저 에 들어가 계시면 저도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러고는 물러나 계집종을 治裝시켜 들여보냈다.

에 그 말을 해 듣고 크게 하여 을 속인 都彌의 두 눈알을 빼고, 작은 배에 태워 물에 띄워버렸다. 그리고는 그 아내를 끌어다가 强制守廳을 들도록 시키니 그가 말했다.

郎君을 이미 잃었으니 홀로 이 한 몸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御命을 또다시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只今 月經 中이라서 몸이 더러우니 다음 날 沐浴을 하고 다시 오겠습니다.”

이 그 말을 믿고 許諾했다.

都彌의 아내는 그길로 곧바로 逃亡어귀로 나갔으나 을 건널 수가 없었다. 絶望한 나머지 하늘을 우러르며 痛哭하니 문득 작은 쪽배 하나가 물결을 따라 흘러왔다. 都彌의 아내가 그 배를 타고 泉城島에 다다르니 男便이 죽지 않고 그곳에 있었다. 두 사람은 풀뿌리를 캐 延命하다가 함께 배를 타고 高句麗蒜山 아래에 이르니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옷과 飮食을 주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나그네로 살다가 一生을 마쳤다.

 

 

9. 도사하영(倒屣下迎)

짚신을 거꾸로 신고 내려가 迎接한다는 말로, 사람을 眞實한 마음으로 恭遜하게 迎接하는 態度를 말한다.

 

* 海東名臣錄 古今淸談.

朝鮮 第16代 仁祖 左議政 이정귀(李廷龜. 1564~1635)夫人判書 權克智의 딸이었다.

婦德을 갖추고 儉素하여 華麗緋緞옷은 한 도 입어 본 적이 없었다.

貞明公主 집에서 잔치가 있어 高官 夫人들이 다 모이게 되었다. 參席夫人들이 한결같이 華麗緋緞옷에 비싼 佩物治裝하니, 참으로 華麗했다.

그런데 느지막하게 가마를 타고 늙수그레한 한 夫人이 왔다. 옷은 비록 베옷이었으나 端正하고 儉素한 차림이었다. 가 막 뜰에 들어서자 이를 본 公主가 신을 거꾸로 신고 하게 내려가 반갑게 맞았다. 自然히 모든 夫人들이 疑訝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公主鄭重하게 그 夫人案內하여 윗자리에 모시고 極盡로써 待接하니 모두 異常하게 여겼다. 잔치의 興趣가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 夫人이 먼저 일어나서 돌아가려고 하자 公主가 아직 이르다면서 말렸다. 그러자 夫人이 말했다.

저의 집 食口들이 돌아올 時間이 되었으니 어서 가서 저녁을 차려야 합니다.”

그의 男便朝廷藥院都提調였고, 맏아들은 吏曹判書였으며, 둘째 아들은 承旨였다.

事實을 안 座中夫人들은 크게 놀라면서 自身들의 지나친 奢侈를 부끄러워했다.

左議政 李廷龜經書學에도 밝아 나라의 宋應昌要請으로 그곳 사람들에게 經書講義하기도 하였다.

그가 兵曹參知로 있을 때 1598年 明나라 兵部主事 丁應泰朝鮮倭兵을 끌어들여 나라를 侵犯하려 한다.’라고 나라 朝廷誣告하였다. 이때 朝鮮國辨誣奏文을 지어 나라에 가 丁應泰誣告했음을 밝혀 丁應泰나라 朝廷에서 罷免시키게도 했다.

李廷龜는 이처럼 國際間의 어려운 問題明快하게 解決했던 名臣으로 글씨도 잘 썼을 뿐만 아니라 文章家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런 人物의 집안에 그 夫人이었으니 그 男便에 그 夫人其夫其婦가 아닐 수 없다.

 

 

10. 도이봉부(刀以逢父)

칼로 하여 아버지를 만나다. 琉璃王胎內에 있을 때 아버지 朱蒙離別했으나 훗날 부러진 칼을 證標로 만나게 된 故事에서 由來했다. 어떤 物件根擧極的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 三國史記.

高句麗 琉璃王(?~A.D.18)類利 또는 儒留이며, 朱蒙의 아들이다. 朱蒙高句麗統治하던 沸流國의 둘째 公主 소서노(召西奴)를 새 皇妃로 맞아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을 두었다. 琉璃王이 태어나기 에 아버지 朱蒙은 나라를 세우려고 쪽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琉璃少年 時節에 아버지 朱蒙처럼 활을 잘 쏘았다.

어느 날, 琉璃가 활쏘기 演習을 하다가 화살이 빗나가는 바람에 지나가던 女人의 물동이를 깨뜨렸다. 물을 흠뻑 뒤집어 쓴 夫人이 몹시 하여 辱說을 퍼부었다.

天下에 버릇없고, 아비 없는 후레子息 같으니라구…….”

그 말을 들은 琉璃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엎드려 울며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다. 어머니 禮氏는 그때까지 숨겨온 아버지에 한 이야기를 仔細히 들려주었다.

너희 아버지는 일찍이 큰 뜻이 있으셔서 쪽으로 내려가 只今 高句麗를 세우신 朱蒙王이시다. 네 아버지가 떠날 때 나에게 말하기를 以後 사내아이를 낳거든 證標가 될 物件을 소나무 밑 일곱 모난 돌 아래에 묻어 두었으니, 그것을 가지고 찾아오게 하라.’라고 하시었느니라.”

琉璃는 그날부터 등성이와 골짜기를 헤매며 소나무 밑 일곱 모난 돌을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遇然히 집 마루 기둥의 주춧돌을 보니 일곱 모로 다듬어져 있었다. 눈이 번쩍 뜨인 琉璃는 그 밑을 파 오매불망(寤寐不忘) 찾고 있던 證標인 토막난 칼을 찾았다.

琉璃는 그 칼을 가슴에 품고 卒本 땅으로 朱蒙을 찾아가 보여 주었다. 朱蒙自身의 칼과 맞춰보니 딱 들어맞았다.

네가 정녕(叮嚀) 내 아들 琉璃로구나!”

朱蒙感激에 겨워 琉璃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날로 琉璃王子로 삼았다. 琉璃의 나이 18. 高句麗 建國 19이었다. 그로부터 다섯 달이 지난 9, 朱蒙은 갑자기 世上을 떠났다.

琉璃는 아버지를 이어 王位에 오른 뒤 옆 나라 송양국(宋讓國)의 딸을 王妃로 맞았다. 그리고 卽位한 지 3만에 鶻川離宮을 짓는 나라의 面貌를 새로이 一新했다. 後 王妃가 죽자 鶻川 사람의 딸 화희(禾姬)漢人의 딸 치희(雉姬)繼室로 맞아들였다.

後 父王繼承하여 약탈(掠奪)을 일삼는 선비(鮮卑)扶餘帶素王 等 周圍의 여러 나라를 征復하여 領土擴張하였다.

 

 

 

 

산과바다 이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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